필리핀에서 그려 본 한국의 자화상 - 임아연/ 한밭대 학생
필리핀에서 그려 본 한국의 자화상 - 임아연/ 한밭대 학생
임아연/ 한밭대 학생 '필리핀 마닐라에서 생활한지 어느덧 6개월이 지났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필리핀의 상황은 생각보다 더 열악했다. 아니 어떤 면에선 끔찍했다. 필리핀 번화가(특히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지역에) 어디에나 퍼져있는 성매매부터 시작해, 한국 사회에선 거의 보기 드문 가족노숙까지. 그로 인해 방치되고 학대받는 아이들은 <긴급출동 SOS>에나 나올 법한 모습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이런 상황들이 사람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질 만큼 흔한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함부로 말을 꺼내놓기 어려웠던 건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 짧은 시간동안 겪은, 혹은 보고 들은 모습으로 한 사회를 함부로 속단하는 우를 범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한 내 생각이 한 나라를 규정하는 또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사람들에게 '필리핀? 그럼 그렇지' 하는 식으로 회자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려고 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 했다. 또 내가 살고 있는 마닐라의 모습이 곧 필리핀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위해 많은 곳을 여행하고자 했다. 그런 노력덕분인지 내가 생각해오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필리핀의 모습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야 그동안 내가 겪은 이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 놓는다. '한국은 이런데 여긴 왜이래?'라는 생각을 가져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필리핀과 대한민국, 그 두 사회가 엇비슷하게 공유하고 있는 모습들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 쉽게 얕잡아 보던, 흔히 '후진국' 이라고 말하는 한 사회의 문제를 우리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좀 낫지' 하는 식으로 자위하기엔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며칠 후면 한국의 대학들은 새 학년도 새 학기 개강이겠다. 듣자하니 올해도 서울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들에서 등록금을 동결했다고 한다. 이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리기엔 속이 좀 쓰리다. 동결됐다 하더라도 이미 대학의 문턱이 높다. 아니 대학 '등록'의 문턱이 너무 높다. 사실 진부한 이야기다. 그러나 다시금 또 이야기를 꺼내는 건 '아무나' 교육 받을 수 없는 이곳의 현실을 보면서 대한민국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혹자는 한국이 빠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요인으로 높은 교육열과 교육 수준을 꼽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개천에서 용' 나는 방법은 교육 뿐 이라는 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이 곳 사정을 보면 더 와 닿는다. 그나마 개발도상국 중에서도 교육수준이 나은 편이라는 필리핀 역시 교육비가 여간 비싼 게 아니라서 웬만큼 '사는 집', 혹은 웬만한 열의가 아니고서야 대학 교육을 받기가 쉽지 않다. 특히 거의 모든 대학과 교육기관이 밀집해 있는 마닐라에서 조금만 떨어져 살아도 태어난 곳이 한 사람의 미래를 결정짓는 일이 흔하다. 예컨대 바다에서 방카 보트를 운전하는 아버지 밑에 태어난 8살짜리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면서 그 일을 계속한다든지, 관광객에게 말을 태우는 일이 전부인 곳에서 어렸을 때부터 마부로 길러져 왔다든지. 그들은 자신들의 직업에 대해 내게 이렇게 말했다. "There is no choice.(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이렇게 단편적인 사실들만 보아도 교육이 한 사람의 삶을 결정짓는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이제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자. '서울대'와 '서울에 있는 대학', 그리고 '서울 밖에 있는 대학'과 같은 출신성분에 따른 직업선택의 차이, 아니 차별은 차치하고서라도, 대학의 이름과 상관없이 마냥 높기만 한 대학 등록금은 대학생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간다. 누군가는 노래방 도우미를 한다고 하고, 누군가는 호스트바에 나간다고 하는 이야기들은 더 이상 신문지면 안의 뉴스가 아니라 내 주변의 이야기가 돼버렸다. 지금 한국사회의 대학 교육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지만, 적어도 지식과 진리를 구할 기회가 박탈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일 수 있겠으나, 비싼 등록금은 대학생들이 아르바이트와 취업, 스펙에 목매달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어 있다. 대학이 학생들의 정신을 풍요롭게 하기는커녕 외려 피폐하게 만들어, 대학은 '무식한 대학생'을 키워 내고 학생들은 또 등록금을 걱정하면서 돈을 버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그 지독한 고리를 끊어낼 칼자루를 쥔 정부는 임기 3년이 지나도록 대학 등록금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학생들은 매년 반복되는 협상 아닌 협상에 지쳐가고, 변함없는 상황에 그들의 관심도 점점 사그라졌다. 체념하듯 현실에 수긍하며 살아간다. '큰 배움' 없는 대학에서 그저 비싼 등록금 영수증 같은 졸업장만 손에 넣는다. 공부, 혹은 배움이 한 사람의 인생을 넘어 우리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일까? 아예 대학 문턱 조차 넘기 힘든 필리핀의 상황과 무엇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필리핀에서 부끄러운 한국 사회의 자화상을 들여다 볼 일이 많아졌다. 한국에 있을 때보다 조금은 객관적으로 한국 사회를 관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자꾸 이러면 안되는데…'하는 조바심이 생긴다. 그저 외면해 버리기엔 먼 이야기가 아니라서, 특히 교육 없인 정말로 희망이 없을 것만 같아서 부질없이 조급증만 커져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