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듯이 일하지 말고 산 것처럼 일해야... - 김현진/ 에세이스트
김현진/ 에세이스트 녹즙 배달을 처음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알아야 했던 상식은 이 녹즙은 어디에 좋고 저 녹즙은 저기에 좋고, 라든가 접객 요령이라든가 밀린 돈을 칼같이 받아내는 수금의 요령이라든가 신규 고객을 칼같이 낚아채는 세일즈의 기술 같은 게 아니라 ‘걸을 때 소리 나지 않는 신발을 신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제일 중요했다. 가정집에 배달하는 것은 일반 지사라고 하고, 사무실에 다니는 것을 특판 지사라고 하는데 내가 찾아간 곳은 특판 지사였다. 워낙 모든 사람이 하루에 열두 시간씩 일하는 과로의 시대다 보니 업무 시간은 아홉 시부터 시작이래도 사무직 노동자들은 몇 시든 나와서 일했다. 고무창이 잘못되었다거나 조금이라도 딱딱한 굽이 있는 신발을 신어서 소리가 나면 안 됐다. 살금살금, 쥐도 새도 모르게 없는 듯이 다닐 수 있도록 소리 안 나는 신발을 신는 게 제일 중요했다.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들도 하나같이 부드러운 밑창의 효도화를 신고 일하셨다. 편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아주머니들도 죄다 살금살금 다녀야 했다. 청소도 소리 안 나게 살금살금 하고, 삐걱삐걱 큰 소리 나는 금속 쓰레기통도 살금살금 비우고, 사무직 노동자들이 출근하지 않는 새벽 네 시부에 일단 진공청소기를 돌린다던가 하는 큰 청소들을 죄다 해 놓고 오후 네 시까지 건물 구석의 방에서 교대로 일하면서 구겨서 버린 종이컵, 뱉어 놓은 침, 바닥에 쏟은 커피 같은 걸 살금살금 치웠다. 사무실 사람들도 아주머니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아주머니들도 살금살금 재빠르게 사라지느라 사람들과 눈을 안 마주쳤다.
가끔 스키니 진 입었다고 청소 아주머니들한테 혼나곤 했다. 살금살금 다녀야 할 주제에 그딴 걸입었기 때문이었다. 청소 아주머니들은 그럴 때마다 번번이 사무실 분들, 사무실 분들이라고 불렀다. 사무실 분들이 보시는데, 사무실 분들이 불편해 하시는데. 우리는 사무실 분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서, 소리 나지 않게 다니면서, 살금살금 일해야 했다. 죽은 듯이 일하는 게 우리 일이었다. 그럴 때 가끔 슬퍼졌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살금살금 다녀야 하나. 죽은 듯이 일해야 하나. 직업에는 귀천이 없을지 몰라도 그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는 귀천이 있구나. 먹고 산다는 것은 고귀할지 몰라도 먹고 살고 있는 사람은 고귀하고 아니고가 있구나. 사무실 분들이 있고 아닌 분들도 있구나. 물론 나는 아닌 분이었다. 물론 살금살금 다녀야 하는 사람들끼리 죄다 연대한 건 아니었다. 녹즙 샘플 안 준다고 꼬집히고 옷 가지고 괜히 쥐어 박히고 나는 살금살금 다녀야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먹이사슬로 따지자면 플랑크톤 수준이었다. 뭐 입맛 다실 거 없나? 하고 멀리서부터 효도화 신고 살금살금 오셔서 누가 이야기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았다. 괜히 트집 잡아 나를 꼬집고 밀치고 쥐어박던 아주머니를 보면 이가 갈렸지만, 일년 지나서 계약 연장이 안 되어 다른 아주머니들로 싹 갈린 걸 보니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갈린 아줌마나 다시 온 아줌마나 나나 죄다 우리는 죽은 듯이 일해야 하는 건 똑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죽은 듯이 일하면, 정말 죽은 걸로 아는 거였다. 홍대 청소용역 노동자 투쟁은 다행히 복직으로 해결되었지만, 지금까지 그분들의 하루 식대가 300원으로 책정된 걸 보면 이 사람들은 이거 먹고도 살 수 있겠거니 하는 것이다. 하도 없는 듯이 일하니까, 살금살금 일하니까, 죽은 듯 일해 주니까 너무 낯설어서 유령이라도 된 듯 정말 죽은 걸로 아는구나 싶었다. 소리 나는 신발을 또각또각 신고 일할 생각은 없지만, 죽은 듯이 일하지 말고 다들 산 것처럼 일해야 사무실 분들 아닌 분들 없어지지 싶다. 나 불편할 때는 반짝 살아 일하고 내 눈에 거슬릴 때는 죽은 듯이 일해 달라, 이런 요구 없이 일할 수 있어야지 싶다. 산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 취급하니까 유령도 하루에 300원 갖고 먹고 살 수는 없겠건만 산 사람보고 300원 갖고 자꾸 먹고 살라는 거지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