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 비친 인권연대
2년 수사했다더니, 보안수사대 '헛발질'(시사IN 2011.03.31)
인권연대
2011. 4. 21. 14:50
2년 수사했다더니, 보안수사대 ‘헛발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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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대학생 학술동아리 ‘자본주의연구회’ 관련자 3명을 연행한 뒤, 그중 1명만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조직 사건이라면서 별 증거도 없이 체포하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둔 데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
임지영 기자 | toto@sisain.co.kr
까만 철문은 움직일 기미가 안 보였다. 양 옆에 달린 CCTV가 삼엄한 분위기를 전했다. 봄기운이 완연했지만 3층짜리 건물, 수십 개 창문은 내려진 블라인드와 함께 굳게 닫혀 있었다.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90-15번지. 연립주택과 빌라가 즐비한 주택가 사이 경찰청 보안3과가 있다. 지나던 중학생은 매일 지나는 이곳이 무얼 하는 곳인지 몰랐다. 30년 토박이 주민만이 ‘대공분실’이라고 단박에 알아보았다.지난 3월21일. 대구 자택에 있던 최정민씨(33·가명)는 홍제동 대공분실 건물 3층, 3.3㎡(약 1평) 규모의 조사실로 연행되었다. 조사실에는 세면대와 변기, CCTV 2대, 책상이 전부였다. 최씨 집에 경찰 10여 명이 들이닥친 건 아침 9시. 샤워를 하던 중이었다. 집을 압수 수색하는 동안 두 돌을 나흘 앞둔 딸과 아내가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다. “형사들이 <공산당 선언> 책을 증거물로 가져가야 할지 말지 의논하기도 했다”라고 최씨는 말했다. 같은 날 최 아무개씨(38)와 한 아무개씨(24)도 이곳으로 연행되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였다. 3월21일에는 대공분실 앞에서 이들의 면회를 요구하던 학생 50명이 단체로 연행되었다가 이튿날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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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혜 인권운동사랑방·한국대학생문화연대 회원들이 3월23일 경찰청 앞에서 수사 중단을 촉구했다. |
이들은 모두 대학생 학술동아리 ‘자본주의연구회(연구회)’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다. 2007년 만들어진 연구회는 현재 전국에 11개 지부를 두고 있고, 회원 100여 명이 활동 중이다. 평소 경제학 관련 책으로 정기 세미나를 하고 방학 때는 대안경제 캠프를 실시한다. 연구회에 따르면 캠프에는 지금껏 학생 수천명이 참가했다. 장하준 교수(케임브리지 대학)의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 등을 세미나 교재로 활용했고, 이해영 교수(한신대), 김상봉 교수(전남대) 등이 강연자로 참여했다.
경찰, 혐의 사실 두고도 오락가락 행보
경찰은 애초에 최씨 등이 2006년 ‘새세대 청년공산주의자 붉은기’라는 이적 단체를 결성한 뒤, 북한을 찬양·고무하기 위해 산하 단체로 자본주의연구회를 만들었다는 데 혐의를 두었다. 경찰 수뇌부는 본청 보안수사국이 2009년부터 관련 정황을 포착하고 수사를 해왔다고 밝히기도 했다. 경찰은 연행된 3명 이외에도 관련자 10여 명을 압수 수색했다. 연구회 측에 따르면 현재까지 군인 신분 학생을 포함해 13명이 수색당했다. 대대적인 수색으로 경찰은 각종 도서, 문서, 컴퓨터 하드디스크, USB 메모리 등을 압수했다.
2008년에도 경찰은 ‘사회주의노동자연합(사노련)’ 간부 8명을 압수 수색한 뒤 7명을 연행했다. 이번에도 대형 조직 사건이 발표될 조짐이 보였다. 하지만 이틀 뒤 연행된 3명 중 최정민씨와 하 아무개씨가 풀려났다. 조직 사건으로는 이례적이다. 조직 사건은 증거인멸 우려 때문에 구속 수사를 하는 게 관례이기 때문이다. 사노련 사건의 경우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를 비롯한 5명에게 경찰이 두 번이나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가 기각당했다. 경찰은 이번에 최 아무개씨 한 사람에게만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청을 항의 방문한 이정희 대표는 “조직 사건인데 이틀 만에 2명을 내보낸 것은 증거도 없이 체포했다는 걸 자백하는 꼴이다”라고 말했다.
경찰은 혐의 사실을 두고도 오락가락 행보를 보였다. 애초 ‘새세대 청년공산주의자 붉은기’라는 이적 단체의 이름을 꺼내든 건 경찰이지만, 말이 바뀌었다. 3월22일 경찰청을 항의 방문한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와 백원우 민주당 의원 등과 만난 자리에서 조현오 경찰청장은 자본주의연구회에 대한 수사만 진행 중이라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를 받다 풀려난 최정민씨는 경찰이 조사 과정에서 ‘새세대 청년공산주의 붉은기’ 가입 사실을 집중 추궁했다고 밝혔다. 묵비권을 행사하며 단식을 한 최씨가 의아하게 여긴 건, 질문 중 연구회에 대한 내용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체포영장을 제시할 땐 연구회를 이적 단체, 반국가 단체 등으로 무시무시하게 말해놓고선 그에 대한 질문은 거의 없었다.”
구속된 최 아무개씨의 영장실질심사를 참관했던 부인 김 아무개씨(32)도 “검사는 자본주의연구회 활동과 관련해서는 문제 삼을 게 없다는 입장이었다”라고 말했다. 영장에 따르면 최씨의 혐의는 크게 두 가지다. 국가보안법 7조에 따른 이적표현물 소지·반포죄와 일반 교통방해죄가 그것이다.
김보아 자본주의연구회 대표는 “연구 내용은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고, 공개 세미나를 한다”라며 이적 단체 의혹을 부정했다. 사문화되다시피 한 국가보안법 제7조(이적표현물 소지·반포)의 부활을 알리는 소식에 시민사회 단체에서는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마르크스 연구자이자 연구회 강연에도 참석한 바 있는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대학생들이 불안의 원인을 탐구하고 대안을 연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라고 말했다. 오창익 인권연대 국장은 경찰의 행보가 한심하다고 말했다. “2년 이상 수사했다면 상당한 수사력을 들였을 텐데, 결국 한 명에게만 영장청구가 됐다. 국가보안법이 쓸모없는 법이라는 증거이지만, 보안수사대가 남아 있는 한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들도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