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못 차린 경찰, 인권교육으로는 어림없다

 

허창영/ 전남대 공익인권법센터 연구원, 전임 간사

 최근에 알려진 ‘양천경찰서 고문사건’은 충격 아닌 충격이었다. 충격이라는 것은 아직도 고문이라는 전근대적 수법이 잔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충격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 고문이 완전히 근절되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도 그럴 것이 일부에서는 고문이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서나 있었던 일이라고 ‘추억’할지 모르겠지만, 가깝게는 2002년에도 검찰에서의 고문치사사건이 있었다. 그 이후에도 고문에 대한 증언은 이어져왔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된 사건들만 살펴보더라도 우리사회에서 고문은 여전히 ‘현실의 문제’라는 개연성이 충분하다.

 여하튼 이번 일로 그동안 잊혀지려던 ‘고문경찰’이라는 말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인권경찰’임을 표방하고, ‘새롭게 바뀌겠다’고 약속했지만 내부 깊숙한 곳에서는 구태의 악습을 벗지 못했음이 자명해졌다. 양천서 사건 이후 경찰이 보여준 태도 또한 이러한 심증을 굳게 한다. ‘자정결의대회’를 열고 인권교육을 실시하는 등 경찰 스스로 자숙하는 모습을 보이는 듯 했다. 그렇지만 이 또한 ‘눈 가리고 아웅’임이 금방 드러났다. 인권교육을 하러 간 강사에게 “고문을 봤냐”라고 항의하고, 동료직원들은 여기에 호응하는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백번을 자숙해도 모자랄 판에 “봤냐”라는 식의 항의는 희대의 살인마가 “내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봤소”라고 묻는 섬뜩함이 느껴진다.

 또 한 직원이 “고문이 아니라 가혹행위”라고 하거나, 서장이 “자연스러운 의견 개진”이라고 한 것에서는 천박함도 엿보인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가 사실이라면 양천서에서의 일은 국제사회가 규정하고 있는 고문임이 명백하다. 물론 우리 형법에는 고문에 대한 정의규정이 없어서 고문죄로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그렇다고 있었던 고문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이런 이유로 국가인권위원회 또한 이례적으로 고문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쓴 것으로 생각된다. 서장의 변명도 궁색하다. 외부의 문제제기로 독이 오른 몇 백 명과 마주서있는 상황에서 터져 나온 불만을 자연스러운 의견개진이라고 하기엔 설득력이 없다.

 
지난 7월 7일 오전 서울 양천경찰서에서 열린 '양천경찰 신뢰회복을 위한
자정결의대회 및 인권보호교육' 참석자들이 강연을 듣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일련의 모습들은 인권교육만으로 적당히 넘어가려는 경찰에게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물론 인권교육은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강요된 반성이거나 무마를 위한 일회성 인권교육은 답이 될 수 없다. 경찰로 입직하는 과정에서부터 입직 이후 보수교육에 지속적으로 인권감수성을 향상할 수 있는 교육내용이 반영되어야 한다. 경찰관 직무규칙에 ‘경찰관서의 장’으로 명시되어 있는 인권교육의 의무를 경찰법에 ‘경찰청장’으로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양천서 사건 이후 각 서별로 이루어지는 일회성 인권교육은 절대 해답이 아니다. 

 또 내부의 자정 노력, 내부의 징계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경찰청장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경찰의 특성상 내부에서의 무마도 얼마든지 가능한 조직이다. 외부에서의 감시와 견제가 가능하도록 구조화해야 한다. 경찰위원회를 활성화해 견제의 기능을 강화하고, 경찰옴부즈만, 경찰비리민원조사기구 등 감시와 통제기구를 둘 필요도 있다. 자치경찰제의 전면도입으로 힘을 분산시키는 것도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고문방지국가예방기구’의 도입도 검토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이 1995년에 가입한 ‘고문방지협약’에는 어떠한 유보조항도 달지 않았지만, 국가예방기구의 설립과 고문방지소위원회의 현장방문권을 명시하고 있는 ‘고문방지협약 선택의정서’는 아직까지도 비준하지 않은 상태다. 고문이 현존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글로벌스탠다드’를 주장하는 현 정부의 지향을 고려한다면 선택의정서의 비준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것이 경찰이건 검찰이건 교정시설이건 우리사회에서 고문을 완전히 근절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가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고문경찰’의 악몽을 재현한 경찰을 두고 경찰 스스로의 반성과 성찰만 요구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이제는 시민들이 나서서 경찰의 문제를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인권교육 제대로 받아라"…양천서 홈피 항의글 빗발

【서울=뉴시스】김미영 기자 = 서울 양천경찰서가 인권교육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며 곤욕을 치르고 있는 가운데 시민들의 거센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15일 양천서 홈페이지에는 전날 언론 보도 직후 이를 비판하는 글이 올라왔다. 지난달 16일 국가인권위원회의 '양천서 피의자 고문 의혹' 사건 발표이후 해당 홈페이지에는 이미 70건에 가까운 비판 글이 올라왔다.

시민 김정우씨는 '양천구에 주소를 둔 것이 부끄럽소이다'라는 글에서 "범죄와 힘들게 싸우다보니 불가피하게 물리적인 방법을 쓴 것에 대해서는 어쩌다 한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확인한 상황에서 경찰의 자세가 지금처럼 '배째라'식으로 나온다면 경찰이기에 어느 정도 묵인돼진 경찰의 권한마저 우리 국민들이 무시하고 민원을 제기할 것"이라며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경찰에게 하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최훈씨도 '인권강의 중에 야유 보낸 사람들 철저히 조사해서 일벌백계해야' 라는 글에서 "관련자들 징계하고 차후 그런 일이 없다고 해야 국민들은 믿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현식씨는 '양천구에 계시는 경찰관 나리들이란' 글에서 "원래 그러십니까, 고문사건 터지고 인권문제 강의하러 오신 분한테 야유나 보내고"라며 "경찰이 가진 권한이 얼마나 많기에, 평상시에 어떤 마인드를 가지고 살아왔기에…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할 때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가"라고 반문했다.

이에 대해 양천서 교육담당 직원은 "강사님과 다른 의견을 말한 직원에게 다른 몇몇 직원들이 동조한 것으로 강사에게 야유를 보낸 것은 아니다"며 "당일 교육에 참석한 대부분의 직원들은 진지하게 경청했다"고 답변했다.

앞서 양천서는 지난 7~8일 양천서 경찰관을 대상으로 인권침해 재발 방지를 위해 자정결의대회를 열었다. 8일 열린 인권연대 오창익 사무국장 초청 강연에서 한 직원이 '당신이 고문하는 것을 봤냐고'고 항의하자 일부 직원이 이에 동조하면서 강연이 10분가량 중단되기도 했다.

'피의자 고문 의혹' 혐의를 받고 있는 양천서 강력5팀 경찰관 5명은 지난 9일 구속 기소된 바 있다.

mykim@newsis.com
양천서 경관, 인권강연 자리에서 빈정대
2010년 07월 14일 20:20

경찰이 인권침해 재발방지를 위한 자정결의 대회에서 인권교육 강사에게 야유를 보낸 것이 뒤늦게 확인돼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지난 7~8일 이틀 동안 서울 양천경찰서에서 특강을 했던 인권연대 오창익 국장은 강의에서 한 직원이 "당신이 고문하는 것을 봤냐"고 소리를 쳤다고 말했습니다.

경관의 빈정대는 말에 다른 동료가 호응하는 손뼉을 쳤는가 하면 야유까지 해 강사가 강연을 중단하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양천서 이재열 서장은 "자연스럽게 의견을 개진한 상황이었다"며 "누구나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강연 당시 경찰서 서장을 비롯한 과장급 경관은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져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 엄민재 / happymj@mk.co.kr ]



고문재발방지 자정 노력 일환  
“간부도 교육받아야” 내부지적도



피의자 고문수사로 물의를 빚은 양천경찰서가 인권교육을 실시하는 등 반성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양천서는 지난 7일과 8일 양일에 걸쳐 총 700여 명의 소속 경찰관을 대상으로 인권보호 교육 및 인권침해 재발방지를 결의하는 자정대회를 실시했다.  

인권교육이 처음으로 이뤄지던 지난 7일, 양천경찰서 5층 대강당은 양천서 소속 300여 명의 경찰관들로 가득 찼다. 강의는 ‘인권과 경찰활동’이라는 주제로 인권실천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이 맡았다.

본격적인 교육에 앞서 직원 대표들은 “선량한 시민의 인권보호는 물론, 피의자 가혹행위 등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를 절대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담긴 서약서를 이제열 양천경찰서장에게 전달했다.

이어 진행된 강의에서 오 국장은 채수창 전 강북청장을 언급하면서 “조직 내 실적경쟁은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현 정부의 문제”라면서도 “그러나 상급기관에서 실적을 강조한다하더라도 그것이 고문의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오 국장은 “양천서의 고문행위는 조직적, 지속적, 전문적으로 이뤄져왔다”며 “지난 2002년 발생한 서울지검 강력부의 피의자 구타 사망사건과 비교했을 때 행위의 결과는 서울지검이 더 잔혹할지 몰라도 과정에 있어서는 양천서 사건도 못지않게 충격적”이라는 말로 경찰들의 자정을 촉구했다.

마지막으로 오 국장은 강의장을 나서면서 “양천서 사건은 중요한 조직이 사명감을 갖지 못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그 참담한 결과를 보여주는 사례였다”며 “이제까지와는 다른 경찰이 돼 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하지만 강의를 들은 일부 경찰관들은 이러한 인권 교육이 필요하다고 도움이 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공감하면서도, 하급자들만을 대상으로 치러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나타냈다.

김 모 순경은 “(경찰들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하위부만 노력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면서 “조직을 이끄는 간부들도 우리가 들었던 좋은 교육을 들어야 한다”고 쓴소리를 했다.        


김하영 기자

[이슈추적]
범정부 차원의 인권 홀대가 낳은 조직적 고문 사태… 경찰 감시조사기구와 자치경찰제 전면 도입 필요
» 강희락 경찰청장이 지난 6월22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출석해 양천경찰서 고문 사건에 대한 질의에 답하고 있다. 한겨레 탁기형 기자

고문은 조직적으로 지속됐다. 수법도 전문적이다. 서울 양천경찰서만은 아닐 거다. 마포경찰서와 서초경찰서에서도 고문 사건이 터졌고, 비슷한 제보도 잇따르고 있다.

강북경찰서 서장은 실적 경쟁에 내몬 경찰 지휘부의 책임이 크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했다. 실적만 강조하면 유사한 사건이 이어질 거라고 경고한 그가 내놓은 해법은 조현오 서울경찰청장의 퇴진이었다.

 

‘법질서’의 말뜻을 뒤집어버린 이명박 정부

경찰 지휘부가 실적을 강조한 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 때문에 현 사태를 성과주의로만 설명하는 건 본질적이지 않다. 조 청장이 유별났다지만, 경쟁에 내몰린 학생들이 다 커닝을 하는 건 아니다.

더구나 그 과정이 고문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고문은 인간을 파괴하고 법치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악질 범죄다. 전쟁과 민간인 학살 빼고, 국가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죄질 나쁜 범죄일 게다. 실적을 위해 고문을 한다지만, 고문의 뒤끝이 어떤지는 1987년 박종철 사건이나 2002년 서울지검 고문치사 사건을 통해서도 이미 확인됐다. 조직을 위해 일했다지만, 조직은 고문 가해자를 보호해주지 않는다.

사실 경찰은 일상적으로 고문의 유혹을 느끼기 쉽다. 범죄자가 분명해 보이는데 범행을 부인하면 화가 나고, 몇 대 때려서라도 자백을 받고 싶어질 수 있다. 공권력이 갖는 관성의 힘은 그래서 무섭다.


과정은 어떻게 되어도 범인만 잘 잡으면 그만이라는 공권력의 욕구와 유혹을 통제하기 위해 문명국가들은 법치주의를 고안해냈다. 수사 활동이 범인 검거만 우선할 게 아니라, 법에 정한 절차를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원리다. 형사법은 인권 보장은 외면하고 범인 검거에만 골몰하는 경찰 등 수사기관의 관성을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범인 검거만 생각한다면 형사법은 효율을 떨어뜨리는 걸림돌일 뿐이다. 저비용·고효율에 적합한 기업이 아니라, 국가가 수사 활동을 진행하는 까닭이다. 수사가 사람을 겨냥하기에 한없이 신중해야 하고, 혹시 있을지 모를 실수를 줄이는 통제장치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법의 지배, 법질서다.

하지만 현 정권은 대통령부터 법의 지배, 법질서란 말뜻을 거꾸로 뒤집어버렸다. 법의 지배가 겨냥하는 건 대통령 자신과 경찰처럼 크든 작든 권한을 휘두르는 이들인데, 언제부턴가 국민을 윽박지르는 구호가 됐다. 대통령은 일을 하다 보면 접시를 깰 수도 있다며, 과정보다는 결과만을 강조했다. 정권에 코드 맞추기가 체질이 된 경찰은 선무당처럼 굴었다. 범정부 차원의 인권 홀대는 고문 사태로 이어졌다.

경찰 지휘부나 대통령의 요구는 언제나 인권에 맞춰져야 한다. 욕구와 감정이 실적을 좇을 때, 지도자들은 관성의 힘을 거스르는 이성의 길잡이 역할을 해야 한다. 실적과 인권을 똑같이 강조해도 안 되고, 오로지 인권만 강조해야 그나마 균형을 맞출 수 있다.

고문 사건이 터지자 이명박 대통령은 “법 집행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인권을 지키는 일”이고 “어떤 이유로든 수사 과정에서 고문은 용납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당사자들은 억울하겠지만, 강희락 경찰청장과 조현오 서울경찰청장은 물러나야 한다. 그래서 고문 사건이 터지면 경찰 지휘부가 책임진다는 작은 교훈이라도 남겨야 한다.

 

지휘부가 책임진다는 교훈 남겨야

지휘부의 퇴진만으로 끝낼 일은 당연히 아니다. 고문 근절의 약속이 구두선에 그치지 않으려면, 경찰을 근본적으로 혁신해야 한다. 난맥상을 보이는 경찰 인사를 혁신하고, 구조적인 개혁도 해야 한다. 경찰 혁신은 상식의 복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모든 권력에는 반드시 감시가 필요하다는 상식, 권력은 독점되면 안 되고 쪼개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상식이 바탕이 돼야 한다. 경찰만을 감시하는 독립된 감시조사기구가 출범하고, 자치경찰제를 전면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경찰을 지속적으로 감시하는 한편, 자치경찰제를 통해 경찰에 대한 시민적·민주적 통제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자치경찰제는 1997년과 2002년의 대통령 선거 공약이었지만, 아직도 이행하지 않고 있다. 그냥 놔두면, 경찰은 더 큰 사고를 칠 거다. 그 피해는 시민들의 몫이 될 거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이슈추적] 포상뿐 아니라 감점 제도까지 도입…
잡범·서민 잡아들이기에 자괴감 들끓는 경찰 조직, 나 몰라라 하는 수뇌부
경찰의 위기다. 서울 양천경찰서 사건은 21세기 들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경찰 고문 수사다. 경찰서장이 서울지방경찰청장의 실적 평가 시스템을 원인으로 지적하며 사퇴까지 요구한 ‘항명’이 이어졌다. 이 또한 전례가 드물다. 되돌아보면, 경찰은 늘 ‘북’이었다. 공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비위는 예제없이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한 패배감은 내부 결속으로 견제해왔다. 하지만 이번엔 현직 경찰들이 스스로를 ‘피해자’라 부르며 봇물 터진 듯 지휘부를 실명 비판하고 있다. 성과주의 개선 요구와 책임론이 워낙 거세, 현 사태의 또 다른 원인이라 할 공권력의 ‘인권 경시 풍조’는 되레 논의되지 않는 분위기다.

 

마구잡이식 경쟁, 검거 건수 198% 증가

» 서울 양천경찰서 고문 사건으로 ‘피의자’가 된 경찰관들이 지난 6월23일 서울남부지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았다. 한겨레 이종찬 기자

서울 용산경찰서의 한 경찰관이 요즘 현장 분위기를 간추려줬다. “정작 주인은 피해 사실도 모르는데 그 집 고물을 가져간 노인네를 잡아들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화해하거나 처리할 수 있는 것까지 잡아들이죠. 선처야 법원이 하면 된다는 식으로. 경찰은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만 해도 점수니까요. 2007~2008년 지방에 있을 땐 이렇지 않았거든요. 그땐 잡범이나 서민들 잡으면 ‘네가 경찰이냐’ 이런 욕까지 먹었어요.”

자괴감은 두말할 나위 없이 ‘성과주의’에 가닿는다. 이아무개 경관은 “얼마나 많은 무고한 시민이 입건되는지… 얼마나 많은 청소년(초등학생 포함)이 길을 지나가다가 검문당하고… 약자라는 이유로 훈방이 가능함에도 실적에 눈멀어 형사처벌하는 사례가 얼마나 많은지… 가까운 동료들을 보아도 실적주의의 부작용이 심각하다”고 호소한다. 지난 6월30일 경찰청 내부 게시판에 실명으로 올린 글이다.

검거 실적을 계량화하는 경찰 성과주의 제도가 주목받은 건 지난해 2월부터다. 조현오 서울지방경찰청장(2010년 1월 부임)의 공이 크다. 그해 초 경기지방경찰청장에 부임한 그는 지구대·파출소 성과주의를 도입했다. 제도 시행 첫 달의 실적은 경이롭다. 경기 관내 강절도·수배자 검거가 전년 동월 대비 233% 넘게 증가한다. 강도 24건, 절도 795건, 지명수배자 6736건이 처리된 결과다.

추세는 계속된다. 그해 2~4월 석 달 동안 민생침해 사범(강절도·갈취폭력·약취유인 등) 검거 실적이 3만7804건을 기록해 전년 같은 기간(1만2687건)에 견줘 198%의 증가치를 보였다. 올 3월 강절도만 966건이 검거됐다. 전년 같은 달은 물론 지난달보다도 50% 안팎이 증가한 수치다.


경기경찰청은 2009년 3월부터 다달이 으뜸순찰팀·형사팀을 선정해 특진, 포상(금전·휴가), 인사상 인센티브 등 다양한 혜택을 주고 있다. 경찰청마다 운용 방식을 조금씩 달리하고 있지만, 이른바 ‘조현오식 성과주의’의 뿌리이며 뼈대다.

경찰의 성과 평가 및 우대는 이전부터 존재해왔다. 단 조현오식 성과주의는 ‘가점’뿐 아니라, 실적이 낮은 이에게 인사상 불이익이나 감찰 등 ‘감점’을 준다는 점에서 크게 구별된다. 제도를 운영하는 부서가 감찰을 담당하는 청문감사실이란 점이 잘 웅변한다.

문제는 일선 경찰의 지적대로, 불이익을 피하기 위한 경찰의 마구잡이 실적 경쟁을 부르는 구조다. 경기경찰청의 실적을 뜯어보면, 상대적으로 범죄의 흉악성이나 피해 정도가 덜한 절도범 검거의 증가세가 두드러진다. 절대 수치로도 압도적이다.

제도 시행 첫 달부터 석 달 동안의 실적에선 강절도가 1만2362건(전체 민생침해 사범의 32.7%)인데, 첫 달 실적을 보면 강도 검거 수는 전년 2월치와 비교했을 때 5건이 증가한 반면 절도는 541건 늘었다. 전년보다 3.13배 많이 붙잡은 셈이다.

» 서울 강서 지역 시민단체 회원들이 6월21일 책임자를 처벌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라며 양천경찰서 고문사건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실적의 80% 가짜, 훈방할 것도 억지 입건”

물론 이 수치만으로는 마구잡이 수사나 인권침해가 얼마나 유발됐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한겨레21>은 경기경찰청에 지난해 또는 지난달 선정된 1~5위 으뜸순찰팀·형사팀의 검거 실적 내역을 요청했다. 사건 개요, 피의자 연령, 피해 규모를 분석해 정량이 아닌 정성 평가를 하기 위함이다. 경기경찰청 실무자는 “올 1월까지의 자료는 모두 폐기했고, 2월 이후 사건 보고는 갖고 있다”면서도 공개를 거부했다. 경기경찰청 홍보실 관계자는 “자료가 좋게 쓰일 것도 아니고, 서울경찰청 문제인데 경기경찰청에서 굳이 자료를 주기는 그렇다”고 말했다.

대신 수많은 경찰 공무원들이 실적의 ‘속살’을 구체화해준다. 채수창 전 강북경찰서장이 서울경찰청장의 동반 사퇴를 요구하며 지난 6월29일 제 직을 던진 뒤다. 채 전 서장은 “양천경찰서 (고문) 사건은 담당 경찰관의 잘못이 크겠지만, 가혹행위를 하면서까지 실적 경쟁에 매달리도록 분위기를 조장한 서울경찰청 지휘부의 책임 또한 크다”고 말했다. 채 전 서장의 비판이 되레 빙산의 일각처럼 보인다.

6월29~30일 이틀 새 경찰청 내부 게시판은 성과주의의 실체와 지휘부의 무책임을 비판하는 현역 경찰들의 실명 비판이 100건가량 이어졌다. “지구대 직원이 빈집털이 절도범을 검거할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나요?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봅니다. 매일 ‘중고나라’나 뒤져서… 관내 절도 사건 수십 건 터져도 중고생들이 절취한 PMP 중고나라로 검거해 건수 올리는 게 진정한 절도범 검거인가요?”(배◯◯ 경관)

그간의 사건 보도가 이들을 방증한다. 폐지를 줍는 이아무개(62·서울 용산구)씨는 지난해 11월 배달용 신문 30부를 들고 가 고물상에 넘긴 혐의로 입건됐다. 종이값으로 받은 1600원의 대가치곤 아주 쓰다. 당시 신문 배달원도 처벌은 원치 않는다고 했단다.

서울 관내의 한 경관은 “술에 취한 사람을 그냥 귀가시키면 실적이 안 되니까, 지인을 통해 112 전화를 하게 한 뒤 처리하는 경우도 있다”고 기자에게 말한다.

그래서 게시판엔 이런 글도 있다. “(실적의) 80%가 가짜랍니다. 전에 훈방하고 민사관계 상담 종결하던 것을 억지로 입건하는 등….”(어◯◯ 경관)

 

말단 조직원에게 책임 돌리는 지휘부

» 채수창 전 강북경찰서장(오른쪽)이 6월28일 경찰 지휘부의 무리한 실적주의가 고문 사건을 낳았다며 조현오 서울지방경찰청장의 동반 사퇴를 요구했다. 채 전 서장에겐 중징계가 내려질 것으로 예상된다.한겨레 신소영 기자

지난해 4~9월 54명의 경관이 실적을 조작했다 적발되기도 했다. 국정감사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김태원 한나라당 의원이 공개한 자료를 보면, 서울 혜화경찰서의 한 경위는 하나의 공갈 사건을 피해자별로 나눠 전산 입력을 했다 들통났다. 지역별로 보면, 서울경찰청 소속이 19명으로 1위, 경기경찰청 소속이 9명으로 2위를 차지했다.

그럼에도 이 모든 폐단이 ‘성과주의’로만 해석되는 데엔 무리가 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10만이나 되는 조직을 관리하는 데 정밀한 평가 시스템은 필요하다”며 “다만 언제나 원칙이 인권에 맞춰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채 전 서장부터 “실적 평가를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라며 “법을 집행함에 있어 절차를 얼마나 잘 준수하고 얼마나 인권을 우선시했는가를 기준으로 성과를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양천경찰서 고문 사건은 조현오 서울경찰청장 부임 이전에 발생했다. 현 정부의 ‘인권 경시’ 풍조가 또 다른 근원으로 지목되는 까닭이다. 이명박 대통령만큼 ‘법질서 확립’을 강조한 대통령도 드물다. “법질서 확립이 선진화의 핵심 인프라”라는 것이다. 결과는 촛불집회 과잉 진압, 국가인권위 축소, 서울광장 봉쇄, 용산 참사, 쌍용차 파업 진압 등으로 나타났다. 경찰의 실적주의만으로 “한국의 인권 상황이 (이명박 정부 들어) 전반적으로 역주행”(국제앰네스티 발표)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상징적으로, 촛불집회 국면에서 인권위가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집회 참가자들의 인권이 침해됐다”고 발표했지만 법무부와 경찰은 반발했다.

일선 경찰은 조직 수뇌부의 책임론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전·현직 하위직 경찰 공무원으로 구성된 ‘대한민국 무궁화클럽’은 실적주의가 경찰 가혹행위의 원인이 됐는지 등을 조사해달라는 진정서를 지난 6월30일 제출하며 “실적 경쟁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민주노동당 등은 강희락 경찰청장과 조현오 서울경찰청장이 사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단 조 청장은 “내가 와서 강조한 성과주의와 양천경찰서 가혹행위는 관련이 없다”며 “오히려 예전의 성과주의를 완화시켜왔다”고 말했다. 양천경찰서 사건 또한 해당 팀의 문제로 국한시켰다.

하지만 논란이 쉬이 가라앉진 않을 전망이다. 조 청장이 경기경찰청장 시절 으뜸팀을 포상할 때마다 “과도한 실적 경쟁이나 무리한 단속으로 주민에게 불편을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강조했는데, 이것만으로 제도의 부작용에 대한 책임이 덜어지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채 전 서장은 항명 파동과 관련해 중징계를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일선 경찰과 시민사회의 더 큰 반발이 이어질 공산이 크다. 채 전 서장은 “모든 책임을 일선 현장 경찰관에게 미루면서 조직원 잘못에 절대 관대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지휘부의 무책임하고 얼굴 두꺼운 행태에 분개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규제 대상은 국민 아닌 경찰

강희락 경찰청장은 제도 개선을 지시했다. 그러나 사태가 일단락될지언정, 현 공권력의 태도가 달라질지 내다보긴 어렵다. 한 경관은 이렇게 사태를 정리했다. “성과주의-집중 감찰-인사 조치-스트레스 과로사-고문-구속-항명-망신.” 하지만 이 사이에 ‘인권’과 ‘기강 해이’는 들어 있지 않다.

무궁화클럽 전경수 회장은 “과도한 실적 압박을 받다 보면 결국 그 피해는 국민에게 갈 수밖에 없다”며 “사람 한두 명을 바꾼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 제도를 바꾸고 경찰 민주화가 진행돼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말한다.

한 경관은 “(성과주의 문제는) 국민을 섬기는 대상이 아니라 규제 대상으로 본다는 것”이라고 경찰청 내부 게시판에서 지적했다. 이야말로 공권력의 본분이 ‘인권 수호’에 있음을 말해준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경찰의 고문에 대한 인권연대 논평

 서울 양천경찰서에서 경찰관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고문이 자행되었다고 국가인권위원회가 밝혔다.

 경찰에 의해 고문이 자행되고 있다는 이 충격적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놀라운 일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서울 양천경찰서의 고문은 조직적이고, 계획적이며 치밀하게 진행되었다. 경찰은 최소한 22명의 피의자를 고문했다. 입에 재갈을 물리고, 테이프로 얼굴을 감고, 폭행했으며, 뒤로 수갑을 채우고 팔을 꺾어 올리는 등의 고문도 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여러 가지 분야에서 인권이 후퇴하고 있지만, 고문이 다시 등장한 것은 우리 모두를 참담하게 만드는 충격적인 일이다.

 고문은 국가가 직접 자행하는 가장 악질적인 국가범죄다. 수사상 성과를 위한 것이라고 변명조차 할 수 없는 인류 양심에 대한 모독이며, 인간 파괴행위이다. 고문은 진실을 왜곡하고, 국가의 법질서를 훼손하며, 무엇보다 피해자에게 엄청난 고통과 상처를 남긴다는 점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야만행위다.

 이런 야만행위가 21세기,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적지 않은 경찰관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자행되었다는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대해 양천경찰서는 고문 사실 자체를 전면 부인했다. 하지만 고문 피해자가 22명이나 되고, 이들의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된다는 점을 생각할 때, 경찰의 부인은 그저 제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구차한 행태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특히 고문피해자들이 직접 고문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전문적인 고문기법에 대해 진술하고 있고, 고문으로 인한 상해 증거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황은 고문이 자행되었음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고문이 서울 양천경찰서에서만 자행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울의 다른 경찰서, 지역의 경찰서, 검찰이나 군 수사기관은 과연 고문 문제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운지 묻고 싶다. 따라서 각급 수사기관에 대한 전면적인 고문실태 조사 작업이 진행되어야 한다. 이 조사활동은 재야법조계, 시민사회 등이 참여한 가운데, 투명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이번 사건의 고문 가해자들에게 엄중하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숨어 있는 고문가해자들을 찾아내는 작업도 함께 진행해야 한다.  

 추악한 국가범죄인 고문은 대통령이나 집권세력이 조금만 방심하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이명박 정부는 명심해야 한다. 대통령이 인권을 홀대하고, 인권에 무관심하면, 고문 문제는 언제 어디서 다시 터져나올지 모른다. 제발, 민심을 반영하고, 오로지 국민만을 생각하는 방향에서 국정을 운영하길 바란다. 정권은 물론, 국민마저 불행하게 만들지 않기 바란다.  

2010년 6월 16일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될 부끄러움
인권연대 인턴 윤광훈

사실 후속 모임 일정이 잡히기 전까지 '대공분실'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당일 오전부터 부리나케 인터넷을 뒤져가며 조사한 결과, 고문으로 숨진 고 박종철 열사가 수사받던 장소라는 사실만 겨우 알고 사무실을 나섰다. 내리쬐는 햇볕에 팔이 따가울 정도로 무더운 여름 오후 1시, xx역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대공분실' 입구에 도착했다. 미안하게도 이미 십여명의 대학생들이 더위에 지친 얼굴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짧은 안부 인사를 나누고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님의 안내로 '대공분실' 견학이 시작되었다. 국장님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달리 낮고 엄숙했다. 아마도 장소가 주는 무거움 때문이리라.

남영동 대공분실의 정문

두꺼운 철제 철문은 내부를 외부와 완전히 격리시킨다


대공분실의 첫인상은 육중한 철문에서부터 시작된다. (국장님 표현에 따르면) 자동차가 와서 부딪쳐도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한 철문은 철문 안쪽의 세상을 바깥 세상과 완전히 분리시킨다. 밋밋한 색깔의 벽돌 담장은 사람의 키를 훌쩍 뛰어넘기 때문에 밖에서는 안쪽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지금은 철문의 왼편에 '경찰 인권센터'라는 현판이 걸려있지만, 조사실로 사용되던 당시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고 지나치거나 그저 공장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피조사자가 출입하는 건물 뒷문

피조사자는 건물 뒷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다

정문으로 출입하는 조사관이나 경찰, 관계자와는 달리 피조사자는 정문에서 우측으로 가면 나오는 뒷문을 이용한다. 건물 뒷편에는 마치 교도소 담장을 연상시키는 회색 벽돌벽이 건물을 에워싸고 있다. 벽 위쪽은 침입자를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쇠창살이 쳐져 있다. 사진 좌측에 보이는 3단짜리 계단을 올라가면 피조사자만이 출입하는 뒷문이 나온다.








철문으로 분할된 공간

공간분할의 무서움


남영동 대공분실은 당대 가장 유명했던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공간분할'이다. 하나의 방으로 만들어도 될 공간을 벽과 문으로 분할하여 여러 개의 방으로 만드는 식이다. 공간분할로 얻을 수 있는 효과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노리는 효과는 '공간감 상실', '공포감 조성' 등이라고 한다. 그것을 뒷받침해 주듯 분할된 공간에는 빛이 들어오지 않아 앞뒤를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둡다. 지금은 출입문에 비상구등이 켜져 있지만, 당시에는 그것조차 설치되어 있지 않아 한번 들어오면 출입구를 찾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뒷문에서 이어지는 이 분할된 공간들을 통과하면서 피조사자는 수차례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빛마저 차단된 공간에서 이유 모를 구타. 피조사자가 느꼈을 공포를 상상하니 끔찍했다.



밑에서 바라본 나선 계단 입구

위에서 바라본 나선 계단 중간

 
위치감을 잃게 하는 나선형 계단

수차례 폭행당한 피조사자는 이 나선형 계단을 통해 5층 조사실까지 직행한다. 한 명씩 차례로 계단을 오르기 전에 국장님은 한 가지 퀴즈를 냈다. 15초의 간격을 두고 한 명씩 계단을 오르되 조사실에 도착했을 때 몇 층인지 알아맞춰 보라는 것이었다. 곧이어 한 명씩 계단을 올랐다. 고작 두명이 어깨를 맞대로 겨우 올라갈 수 있는 넓이의 계단을 혼자서 빙글빙글 올라가니 과연 위치감을 상실할 수 밖에 없었다. 모두가 계단 끝까지 올라왔을 때, 대답은 4층, 5층, 6층으로 다양했다. 심지어 우리는 국장님의 언급으로 꽤나 주의를 기울여 계단을 올랐음에도 답이 제각각이었다. 정답은 5층이었다. 그러나 수차례 구타를 당하며 계단을 오른 피조사자들 중에서는, 이 건물이 7층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8층에서 조사를 받았다는 대답이 나오기도 한다고 국장님은 말씀하셨다.


조사실 층의 긴 복도

조명등을 밖에서 조작하는 스위치

조사실과 입구가 동일한 모양


각 조사실들의 위치와 구조는 철저하게 계산되었다

조사실은 수용소를 방불케 했다. 긴 복도를 따라서 좌우로 똑같이 생긴 철문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심지어 조사실 복도로 들어오는 입구도 조사실 문과 동일하게 설계되어 위치를 기억하고 있는 조사관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문을 통해 빠져나갈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비상구등'이 달려 있지만, 당시에는 불빛이 없어서 운 좋게 조사실을 빠져나와도 복도를 벗어날 길이 없었다고 한다.

각 조사실 문 옆에는 조사실의 전등을 조작하는 스위치가 달려있다. 피조사자는 밖에서 불을 꺼주면 잠 들고, 불을 켜주면 일어나는 등 '빛의 자유'와 더불어 '시간 감각'을 상실하게 된다.

복도 양 옆에 지그재그로 배치된 조사실들은 문이 열리는 방향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배치해 놓았다. 이렇게 해 놓으면 설사 두 문이 동시에 열리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각 방에 있는 피조사자들은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이렇듯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건축가의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다.


고 박종철 열사가 고문받던 조사실

고 박종철 열사가 취조받던 탁자


간접적, 문화적 폭력으로 피조사자를 굴복시킨다

여러 조사실 중 한 곳의 문을 여니 네 평 남짓의 작은 공간에 침대와 욕조, 화장실, 그리고 취조를 받던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눈에 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 박종철 열사의 흑백 사진이 지난 날의 아픔을 잊지 말아 달라는 듯, 방 한가운데 놓여 엄숙함을 더하고 있었다.

일견 악날했던 대공 수사관들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평범한 모습의 방이라고 생각한 순간, 보통의 방들과는 다른 몇 가지 차이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선, 방에 화장실과 세면대가 있었지만 칸막이가 비정상적으로 낮았다. 동시에 문쪽 천정 가장자리에 장치된 CCTV들이 눈에 들어왔다. 즉, 피조사자가 배변을 보거나 샤워를 하는 모습을 감시자가 전부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런 장치들은 피조사자에게 비인격적인 모멸감을 느끼게 하여 피조사자의 내면 세계부터 무너뜨린다. 국장님 말씀에 따르면, 실제로 피조사자들은 처음 며칠간 배변을 참아보지만 결국 별 수 없이 카메라 앞에서 용변을 보게 되고, 그것에 익숙해지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조사자가 옆에 있어도 자연스럽게 용변을 볼 정도로 익숙해졌을 즈음, 자신을 괴롭히는 조사관 앞에서 벌거벗고 일을 보고 있는 자신을 불현듯 발견하고, 결국 굴복하고 만다고 한다.

방의 벽면은 금속 성질의 흡읍판으로 되어 있다. 고문에 의한 비명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는 장치이다. 또한 천정의 현광등에는 쇠그물이 쳐있어 피조사자가 자살하지 못하도록 해 놓았다. 마찬가지 이유로 책상과 침대, 의자 등은 전부 바닥에 나사로 박혀 있다. 방에는 시계도 없고, 좁고 길다랗게 뚫린 창으로는 머리하나 지나가질 못한다. 따라서 피조사자는 지금이 몇 시인지, 몇 일인지조차 알 수가 없고, 앞서 설명한 나선형 계단을 걸어왔기 때문에 자신이 어디에 있는 건물 몇 층에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시간적, 공간적 감각을 박탈함으로써 피조사자의 정신세계를 굴복시키는 것이다.

국장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 발상의 잔인함에 치를 떨다가 문득 하나의 궁금증이 생겨났다. CCTV며 수세식 변기, 욕조, 침대 등이 지금은 흔한 물건들이지만 이 건물이 지어질 당시에는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이런 최신식 설비가 가능했을까하는 궁금증이다. 그 정도로 정부가 이 사업(?)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방증이 된다.


박종철기념관 내부 전경

박종철기념관

조사실 복도를 빠져나가자 피조사자들이 생활하는 공간과 전혀 다른 새로운 공간이 펼쳐진다. 문은 금속 재질에서 나무 재질로, 창문은 머리하나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가늘고 긴 모양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직사각형 모양으로, 공간은 널찍하게 바뀐다. 이곳은 조사관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다. 문 하나를 두고 비인간적 공간과 인간의 공간이 나누어지는 점에서 다시 한번 '공간분할'의 무서움을 느꼈다. 한 층 내려가니 '박종철기념관'이 눈에 들어온다. 널찍한 공간에 근대 민주화와 관련된 사진, 신문 등과 고 박종철 열사의 생전 모습, 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다. 고작 스물을 갓 넘은 평범한 대학생이 영문도 모른 채 고문을 받았을 것을 생각하니 코 끝이 찡했다.




정문에서 바라본 건물 외관

피조사자를 철저하게 압박하려는 건물 구조

견학이 끝나고 정문을 빠져나오니 건물 외관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한 눈에 봐도 몇 층이 조사실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5층은 다른 층들과는 구별된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위로 갈수록 부피가 커지는 '가분수' 형태로 되어있다. 이런 건물 구조는 피조사자를 압박하고 위축시키는 기작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견학을 마치고 대공분실을 빠져나오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인간이 어쩜 이렇게 치밀하고 잔인할 수 있을까'라는 점이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시설이 인간이 전혀 견딜 수 없을 만큼 낙후되었다든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고문기구가 있었다든가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정신을 굴복시키기 위해 그 많은 기제들을 설계하고 그것들에 시간을 투자했다는 그 '사고(思考)' 자체가 소름끼쳤다. 역사는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다. 쓰라린 과거로 회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건강한 시민의식을 함양할 수 있는 이번과 같은 교육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씁쓸하면서도 가슴은 새로운 배움으로 든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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