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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조/ CBS PD

 “(김대중 전) 대통령님은 국내뿐 아니라 국제사회도 높이 평가하는 우리 현대사의 위대한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이셨다... 대통령의 발자취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지난 8월 23일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한승수 총리가 읽은 영결사의 한 구절이다. 고인에 대한 평가는 출신지역과 연령, 정치적 성향에 따라 너무나 다양하겠지만 고인과 정치적 경쟁・갈등 관계에 있던 정권이 내린 평가니만큼 최소한 과장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장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정부와 유족 간에 소소한 의견 차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부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다하는 모습에 장례도 순조롭게 치러졌다.  

 그런데 무덤에 떼가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고인이 잠들어 있는 현충원 앞에서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몇몇 보수단체 회원들이 고인의 묘를 파헤치겠다며 곡괭이와 낫을 들고 몰려왔다가 입장을 제지당하자 현충원 앞에서 퍼포먼스를 벌인 것이다. 이를 보고 옆에서 말리던 시민들은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며칠 뒤에는 보수단체 회원들이 현충원 앞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묘의 이장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다행히 이들의 행동은 실제 불상사로 이어지진 않았다. 국립현충원에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묘역에 대한 경비를 강화했고 언론에서는 일부 극소수 극우단체 회원들의 돌출행동 정도로 지나치는 듯하다. 당연히 그래야 하고 정말이지 그러길 바란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도 괜찮은 걸까? 망자에 대한 금기와 예의가 두터운 우리사회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9월 23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안장식에서
유해가 장지에 도착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전직 대통령의 묘를 파헤치겠다는 이런 폭력적인 행동의 밑바닥에는 고인에게 덧씌워졌던 ‘빨갱이’라는 저주가 도사리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36년 전인 1973년과 29년 전인 1980년에 이미 두 차례나 고인의 목숨을 앗아갈 뻔했던 그 저주가 고인이 세상을 떠난 지금까지도 우리가 숨 쉬는 공기 속을 떠돌고 있는 것이다. 고인에게 천형처럼 따라다니던 ‘빨갱이’라는 낙인은 정적을 제거하려는 독재 권력의 악의적인 왜곡과 폭력으로 덧씌워진 것이었고 이는 지난 97년 대통령 선거에서 표출된 국민의 선택을 통해, 또 과거 고인에게 덧씌워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법원의 판결을 통해 입증되었다. 거기에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조문까지. 고인을 평생 동안 괴롭힌 저주를 벗어던지기에 이것으로 부족한가?  

 불행하게도 부족한 것 같다. 상식을 가진 시민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이 증오와 폭력을 우리사회에서 추방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또 다른 것이 필요한 듯하다. 그게 뭘까? 내 짧은 소견에는 우선 한나라당 의원들의 반성을 요구하고 싶다. 왜냐고? 적어도 국회의원 정도 되면 고인에게 덧씌워진 ‘빨갱이’라는 혐의가 악의적인 저주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그 저주를 때로는 선동하고 때로는 방조하며 이용해왔기 때문이다. 친북좌파 빨갱이에, 노벨상 매수에, 100억 원이 넘는 비자금에... 고인에게 덧씌워진 마타도어들을 열거하자면 책을 써도 모자랄 판이다. 내 고향 경상도에는 지금도 고인이 엄청난 비자금을 은닉해 두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이런 왜곡과 오해, 저주와 증오가 한나라당이 집권하는데 한 축이 되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주장일까? 누군가를 ‘빨갱이’로 낙인찍기만 하면 그의 혐의가 사실인지와는 관계없이 그를 공격하고 저주하는 것이 애국으로 통하는 이 비정상적인 사회현상과 관련해 한나라당에 일단의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명예훼손이 될까?  

 물론 이 모든 것의 책임을 특정 개인 또는 집단에게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나는 우리사회가 냉전의 광기를 이미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애국’을 앞세운 독선적인 폭력을 공권력이 묵인하고 방관한다면 냉전의 광기는 언제라도 우리 앞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한나라당에 지난 날 고인에게 퍼부었던 비난과 저주를 소리 내어 반성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현 정부가 ‘우리 현대사의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한 고인에 대한 이 끔찍한 저주와 무례를 초래한 원인이 무엇인지, 마음속으로 한번 깊이 반성해보길 바란다. 그리고 당 대표든 대통령이든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분이라면 이런 폭력적인 행태에 유감이라도 표시하는 게 도리가 아닐까 싶다. 내 생각에,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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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은 민주주의 기초에 반하는 행동” [2009.08.27. 제775호]
이순혁
[1972~1984 죽음 앞에 서다]
확고한 인권 신념 지켜온 사형수 출신 대통령…
국가인권위 발족과 실질적 사형제 폐지 길 닦는 업적 남겨

1972~1984 죽음 앞에 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적으로, 의문의 교통사고와 납치·살해 위기를 겪었다. 가택연금과 투옥을 반복하며 반독재 투쟁을 벌이다 1980년 9월17일 신군부의 군사재판에서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기에 이르렀다. 고난 속에서 인권 철학이 뿌리내렸다.

» “사형은 민주주의 기초에 반하는 행동”

지난 2005년 2월2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울 신촌 연세대 교정을 찾았다. 연세대 리더십센터의 초청으로 한·미·중·일 네 나라 대학생을 상대로 특별강연을 하게 된 것이다. 1천여 명의 학생이 ‘동아시아와 젊은 리더십’이란 주제의 강연을 경청했다.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 김 전 대통령은 사형을 선고받던 때를 회상했다.

 

재판장 입 나오면 살고 찢어지면 죽는다?
 

» 군사정권의 모진 박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인권과 민주주의 투사’로 만들었다. 1973년 일본 도쿄에서 납치됐다가 풀려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 사진 한겨레 자료
“큰소리는 쳤지만, 살고 싶어서 재판장에서 재판관 입을 뚫어지게 쳐다봤어요. 무기징역만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무기만 받으면 언젠가는 나올 테니까. 왜 재판관 입을 쳐다봤냐 하면, ‘무’ 하면 (재판관) 입이 (앞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사형의 ‘사’ 하면 (재판관) 입이 (옆으로) 찢어집니다. 입이 ‘나오면’ 살고 ‘찢어지면’ 죽는다, 이것이었죠.”

좌중에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한없이 절박했을 생사 갈림길에서의 고뇌는 ‘입이 튀어나오면 살고 찢어지면 죽는다’라는 말과 웃음으로 그렇게 넘어갔다.

하지만 그의 실제 인생에는 그런 유머로 넘기기에는 너무 엄혹하고 절박한 순간들이 많았다. 앞서 김 전 대통령이 언급한 1980년 신군부 군사재판에서의 내란음모 혐의 사형선고를 비롯해, 1971년 목포에서의 교통사고를 가장한 살해 시도, 1973년 일본에서의 납치·수장 위기까지….

하지만 볕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은 법. 군사정권의 도 넘은 탄압은 자연스레 그를 인권 수호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인권 탄압 피해의 상징과 인권 수호의 상징은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김 전 대통령은 인권의 중요성과 인권 향상의 절박한 필요성을 온몸으로 체득하며 인권에 대한 불굴의 신념을 만들어갔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돼 인권과 관련해 남긴 가장 큰 업적으로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설립과 사형제 폐지 노력을 들 수 있다.

우선 국가인권위원회 설치는 김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으로, 자신의 임기 중인 2001년에 출범시켰다. 출범 준비 단계에서 국가인권위의 위상을 어떻게 할지를 놓고 시민사회단체 쪽과 갈등을 겪긴 했지만,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자체는 우리 사회 인권 향상의 큰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런 국가인권위는 지난 8월18일 김 전 대통령 서거 2시간여 만에 “김 전 대통령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분이셨습니다. 고인이 목숨을 바치며 추구했던 인권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의지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되는 데 큰 밑거름이 됐습니다”라는 추도문을 냈다.

김 전 대통령과 인권을 잇는 또 다른 축인 사형제와 관련해서는 좀더 많은 이야깃거리들이 있다. 우선 본인 스스로가 1980년 9월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 출신이다. 김형태 변호사(천주교인권위원회 이사장)는 “1992년 대선 당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대선 주자들을 불러 여러 현안에 대한 의견을 물었는데, 당시 김대중 후보가 확고하게 사형제는 폐지해야 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며 “김 전 대통령 스스로가 사형수였을 뿐 아니라 바다에 빠져죽을 뻔하기도 해서 그런지, 권력이 사람 목숨을 뺏는 것에 극도의 거부감을 가진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김 전 대통령은 사형제도가 정치적 보복에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을 사형제 반대의 주요한 근거로 들었다. 그는 2006년 국제앰네스티에 보낸 기고문에서 “보다 우려되는 것은 독재자들이 민주주의 주창자들과 정치적 반대자들을 탄압하고 몰아내는 수단으로 사형제를 잘못 사용한 수많은 사례들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인혁당의 가담자들이 잘못 기소된 뒤 사형됐고 나조차도 사형 언도를 받고 거의 사형에 처할 뻔했다”고 밝혔다.

 

1970년대부터 사형제 폐지 활동 나서
 

»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 사진 한겨레 자료

하지만 사형제와 관련한 그의 신념은 개인의 경험 이상의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감사원장을 지낸 한승헌 변호사는 “그분 자신이 해방 뒤부터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기에 형벌로서의 사형에 매우 부정적이었다”며 “1973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사형폐지·고문철폐 운동을 시작했는데 이때에도 (김 전 대통령이) 열심히 참여했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앞서 언급한 기고문 서두에서 “사형은 민주주의 기초에 반하는 행동”이라고 규정한 뒤 “민주주의는 사람의 생명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존중하는 것이며, 생명을 끊는 것은 법의 이름으로 이뤄진다고 해도 인권의 기본적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 글에서 △사형과 범죄 감소율은 무관한 점 △당사자로 하여금 범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날 기회를 줄 수 없는 점 등도 반대 이유로 지적했다. 사형제의 여러 문제점에 대한 종합적 인식을 가졌던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의 이런 신념은 그가 대통령으로 있던 기간 단 한 번도 사형 집행을 하지 않는 것으로 표출됐다. 또 이런 정책 기조는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이어져 우리나라가 10년 동안 사형 집행을 하지 않은 ‘실질적 사형폐지국’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민주주의운동 동지이자 경쟁자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임기 말에 23명의 사형을 한꺼번에 집행했던 점을 감안하면, 김 전 대통령의 이같은 업적은 더욱 도드라진다.

물론 사형제 자체가 폐지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는 김 전 대통령의 신념 때문이 아니라, 의석수 또는 ‘국민 감정’이라는 현실의 벽 때문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한 뒤 대통령직인수위 시절 두 차례 정도 뵐 기회가 있었는데 ‘사형수·양심수와 관련해서만은 실망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했다. 진정성이 있었다”고 말했다. 고은태 국제앰네스티 국제집행위원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형제 폐지 소신만큼은 확고했다. 본인은 사형제를 폐지하고 싶었지만 거기까지 (힘이) 미치지는 못해 실질적 폐지라는 첫 단추를 끼운 것”이라고 말했다. 사형제 폐지 법안은 15대 국회 이후 매번 제출됐지만 통과되지 못하고 자동 폐기됐으며, 17대 국회에서도 절반이 넘는 175명의 국회의원이 사형제 폐지 법안을 발의했지만 국민적 여론 등을 이유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누명 썼던 외국인 사형수 본국 돌려보내

인권운동가들은 살인 누명을 쓴 외국인 사형수 2명을 모국으로 돌려보낸 것도 사형제와 관련한 김 전 대통령의 업적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파키스탄인 모하메드 아지즈와 아미르 사밀은 동료 파키스탄인을 살해한 혐의로 1993년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는데, 이들은 끊임없이 무죄를 주장했다. 이들의 편지를 받은 김수환 추기경의 지시로 천주교인권위원회가 조사에 나섰고, 두 사람을 범인으로 몰도록 진술을 사주한 또 다른 파키스탄인이 누구인지 밝혀졌다. 하지만 당국은 “이미 끝난 사안”이라는 답변만을 내놓고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1998년 광복절 특사 때 이들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형집행 정지로 석방하면서 국외 추방 형식으로 고국에 돌려보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났을 뿐 한국인이 개입된 사건이 아닌 만큼 감형 뒤 본국으로 추방해 파키스탄에서 재판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합리적인 주장은 김 전 대통령이 취임한 뒤에야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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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슬퍼할 힘밖에 없다 [2009.08.25. 제775호]
임지선
[2009, 8, 23, 영면하다]
5월 반쪽이 무너진 뒤, 8월 다시 무너진 반쪽…분향소엔 저항의 분노보다 애도의 정념이…
2009, 8, 23, 영면하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마당에서 엄수된 영결식에서 생정에 그사 존경하고 사랑하던 국민들의 오열 속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영원으로 향했다.

»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마당에서 엄수된 영결식에서 생정에 그사 존경하고 사랑하던 국민들의 오열 속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영원으로 향했다.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고작 87일이 지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내고 석 달도 안 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은 또다시 눈물로 젖었다. 시민들은 ‘데자뷔’를 느끼며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치러냈다. 그때와 닮았지만 어딘가 다른 눈물을 흘리며 그를 보냈다.

김 전 대통령도 눈물을 흘렸었다. 지난 5월29일, 노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김 전 대통령은 권양숙씨의 손을 잡고 통곡했다.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은 심정”이라고 김 전 대통령은 말했다. 지난 7월13일 그가 폐렴 증상으로 입원했을 때, 사람들은 나머지 반이 무너질까 염려했다.

» “편히 가십시오.” 서울시청 앞 시민 분향소.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예우의 차이, 규모의 차이

한 달간 뉴스는 ‘위독’과 ‘안정’ 사이를 오갔으나, 8월18일 오후 1시43분 끝내 모두 무너져내렸다. 서울광장 분향소로 모여든 조문객들은 “이제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전 국민이 고아가 된 것과 마찬가지”라며 김연선(42)씨는 분향소 앞에서 흐느꼈다.

초등학교 4학년, 3학년인 두 아들은 엄마가 울자 눈을 끔벅였다. 아이들은 아직 엄마의 눈물을 이해할 수 없다. 김씨는 아이들을 보며 더 서럽게 울었다. “김대중·노무현 두 지도자를 잃고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답답해 잠도 안 온다”는 김씨에게 두 사람의 상실은 ‘미래의 상실’이다.

그러나 5월의 상실과 8월의 상실은 다르다. 5월, 노 전 대통령 분향소 앞에는 항상 촛불이 있었다. 분향을 마친 이들은 경찰을 굳이 밀쳐내고 거리와 광장에 나서려 안간힘을 썼다. 8월, 김 전 대통령 분향소에 그런 안간힘은 없다.

서거 다음날인 8월19일, 정부는 서울광장에 공식 분향소를 열었다. 첫날에만 시민 1만여 명이 조문했다. 시민들은 대부분 분향을 마친 뒤 방명록에 이름을 남기고 광장을 떠났다. 촛불을 들지도 구호를 외치지도 않았다. 다만 영정 사진을 보며 조용히 눈시울만 붉혔다.

5월의 열정과 8월의 차분함 사이에는 ‘예우’의 차이가 있다. 대학생 김민석(25)씨는 지난 5월, 분향을 마치고 거리에서 촛불을 들었다. 국장으로 예우해주지 않는 정부가 미웠다. 이번엔 다르다. 정부는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르겠다고 8월19일 발표했다. “민주화의 상징인 큰 분이 돌아가셨으니 국장으로 잘 모셨으면 한다.” 김씨는 담담하게 분향소를 떠났다.

정부의 예우는 ‘규모’에서도 차이가 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정부는 서울역에 공식 분향소를 마련했다. 이번 서울광장에 마련된 분향소는 그때보다 3배 이상 넓다. 넓어진 공식 분향소는 ‘시민 분향소’가 들어설 여지를 밀어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알려진 직후 인터넷 포털 사이트 토론 게시판에 “시청 앞으로 모이자”는 누리꾼들의 글이 올라왔다. 8월18일부터 이틀간 시청 앞 광장 한쪽에 시민분향소가 차려졌다. 그러나 주목받지 못했다. 시민들은 시민 분향소 옆의 공식 분향소로 발길을 돌렸다.

» 광주 옛 전남도청 분향소 게시판. 사진 <한겨레> 김태형 기자

5월엔 분노, 8월엔 기억

‘김대중 팬클럽’ 회장이라고 밝힌 한 노인이 8월19일 오후에 찾아왔다. “한 곳에 두 개의 분향소가 있으니 좋지 않아 보인다. 옆으로 옮기는 게 낫겠다”고 말했다. 시민 분향소는 두세 차례에 걸쳐 구석으로 밀려났다. 시민 분향소를 지키던 10여 명의 시민은 이날 저녁 자진 철수를 결정했다. “어르신 장례를 국상으로 잘 치르는데 괜한 불협화음이 날까봐 치웠다”고 분향소 지킴이 엄아무개(44)씨가 말했다.

‘시민 분향소’의 쇠락은 저항의 정념과 애도의 정념 가운데 뒤엣것에 무게가 실렸음을 웅변한다. 지난 5월, 덕수궁 대한문 앞에 차려진 시민 분향소에는 일주일간 100만 명 이상의 조문객이 몰렸다. 지척의 거리인 서울역과 역사박물관에 ‘공식 분향소’가 있었지만, 한사코 대한문 앞에서 서너 시간을 줄서 있다 분향했다. 하지 말라는 것을 굳이 하려 드는, 오히려 보란 듯이 해버리는 태도를 저항이라 부른다. 5월, 사람들은 저항하고 있었다. 그럼 이번에는?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노 전 대통령 서거 때는 조문을 통해 현 정부에 저항을 하려는 의지가 강했는데 지금은 그런 국면은 아니다. 나라의 큰 어른인 김 전 대통령이 고령이고 병원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국민이 차분하게 장례를 치르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애도와 저항은 원래 한 몸의 반쪽이다. 세상을 떠난 이를 슬퍼하는 마음은 그를 핍박했던 이에 대한 증오와 통한다. 5월에는 증오했으나 8월에는 그저 슬퍼하기만 한다. 어쩌면 슬퍼할 힘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 “편히 가십시오.” 조문객의 모습.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지난 5월, 사람들은 목청을 높였다. “MB 아웃(Out)” 구호를 외쳤다. 거리에서 민중가요도 불렀다. 문화제에선 록밴드가 전자음악으로 추모곡을 불렀다. 8월, 사람들은 목소리를 낮췄다. 노래 부르는 이, 구호 외치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런 자리를 기대하고 나오는 이도 드물다. 대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5월에 꺼내든 것이 분노였다면, 8월에는 기억을 꺼내들었다.

전남대를 졸업한 현인(51)씨는 대학 2학년 때 5·18 민주화 항쟁을 겪었다. “우리나라와 민족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던 김대중 선생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젊은 시절, 공장 해고자 남편을 따라 복직 투쟁에 참여했던 오미령(54)씨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기억한다. “김 전 대통령이 당시 노동자들에게 큰 힘이 됐다”고 회고한다.

기억은 역사가 되어 다음 세대로 전해진다. 직장 동료들과 함께 조문을 온 이수길(35)씨는 “어릴 때 아버지께서 5·18 민주화 항쟁과 관련한 비디오를 보여주시며 김대중 선생님 얘기를 하곤 했다”고 말했다. 대학생 이재용(24)씨는 “어릴 때부터 민주화를 위해 애쓰시는 분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중학교 1학년인 김민희양도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노벨평화상을 받은 대통령이라는 것을 듣고서 조문을 왔다”고 또박또박 말했다.

아마도 그것이 저항보다는 애도, 분노 대신 기억을 이야기하는 이유일 것이다. 5월의 분향소를 찾았던 20~30대에게 노 전 대통령은 ‘현실 정치인’이었다. 8월의 20~30대에게 김 전 대통령은 ‘전설’이다. 서울광장 분향소에는 그를 추억하는 40~50대가 많다.

신광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아무래도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 1세대이다 보니 젊은이들 입장에선 노 전 대통령보다 조금 낯설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종산(48)씨는 “노 전 대통령은 우리를 위해 일하는 ‘일꾼’ 같은 존재였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선생’과도 같았다”며 “노 전 대통령을 잃은 당시는 ‘동지’를 잃은 허탈함이었고, 지금은 ‘선생’이 사라진 슬픔”이라고 표현했다.

동지를 잃으면 복수한다. 어른이 돌아가시면 애도한다. 이 땅에 수천 년간 내려온 추모의 법도다. 2009년, 한국인들은 같은 추모의 정념, 조금 다른 법도를 따라 두 대통령을 차례로 보냈다.

“용기와 희망을 저희에게 알려주세요”

» “편히 가십시오.” 조문객들의 모습.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시민 분향소도 없고 촛불도 없고 100만 인파도 없으니, 서울시청 앞 경찰들은 한결 여유로운 표정이다. 그러나 데모가 없다고 분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선생을 애도하는 슬픔은 더 깊은 곳으로 침잠한다. 이명박 시절은 여기에 이르러 거대한 지표석 두 개를 갖게 됐다. 역사는 이 시기를 돌아보며 세 명의 대통령을 기록할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 재임 기간에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고. 그 지표석은 거대한 트라우마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에 꽂혔다.

서울광장 분향소 한쪽에 어느 소녀가 붙였음직한 노란 쪽지가 있다. “용기와 희망을 저희에게 알려주세요.” 그 옆에서 펼침막이 펄럭인다. 김 전 대통령이 남긴 말이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 그것은 강력한 촉구가 되어 차분한 조문객들의 뇌리에 남는다. 신광영 교수는 “추모 분위기는 침착하지만, 민주화 1세대 지도자의 죽음이 사회 전체에 주는 울림은 (노 전 대통령 서거 때보다) 더욱 클 것”이라고 말했다.

신 교수는 특히 “이제부터 새 시대에 맞는 새 인물에 대한 담론이 촉발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 국민이 고아가 됐다”는 추모객의 흐느낌은 그래서 하나의 선언이다. 사람들은 이제 아버지를 찾아나설 것이다. 민주주의를 이끌 새 지도자를 머릿속에 자꾸만 그려볼 것이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김하늬 인턴기자·이영은 인턴기자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셨다. 일요일(23일)인 오늘 국회에서 국장(國葬)이 치러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신지 불과 3개월도 지나지 않아 또 한 분의 전직 대통령이 세상을 달리 하셨다.  

 태어난 곳만 서울이고 어렸을 때부터 대학시절을 대부분 호남지역에서 보낸 나는 호남지역에서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애정이 특별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오죽하면 호남에서의 ‘김대중 정서’가 타 지역의 ‘반 김대중 정서’를 불러 일으켜 대선 낙방의 주요한 이유가 되었을까. 어쨌든 나 역시 그에 대한 정서에서 자유롭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대학원 때문에 서울로 올라왔고, 운동을 지속하고 있던 나는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집권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현안 이슈들로 인하여 당시 정권과 각을 세우며 심심찮게 “김대중 정권 퇴진하라” 라는 구호를 외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는 다른 정책들보다도 이라크 한국군 파병으로 인하여 당시 이라크에 있었던 나로서는 개인적으로 최고의 칼날을 세우며 노무현 정부를 비난했었다.

 
봉하마을 정토원에 안치된 고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영정사진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렇게 운명을 달리 하신 직후,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었고 그 슬픔에 적지 않은 당황까지 하였다. 아마도 당시 흘렸던 눈물은 정치를 지나치게 부정적이고 구조적으로만 본 점과, 내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흑백논리로만 사로잡혀 있었던 자신에 대한 원망과 반성 그리고 감성의 것인 듯싶다. 그러나 솔직히 감성 그 이상을 넘어선 내 스스로 완벽히 인정할 수 없는 그 어떤 종합적인 지점에서의 반성은 아니었다. 그리고 3달이 채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신 김대중 대통령의 죽음을 맞이하며 당혹감과 아쉬움과 슬픔이 또 한 번 가슴속을 지배하고 있다. 이 두 전직 대통령 시절에도 운동을 하며 집권자들에게 비판과 비난의 목소릴 냈으며, 지금도 운동이라는 것을 하면서 현재의 대통령에게도 내용과 정도만 다를 뿐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이 가슴속의 감정에 대해 솔직히 당혹스럽다. 정말 시간이 조금 더 흐른 이후에야 스스로에게 명확한 설명이 되겠지만 지금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고 있는 단어가 있는데 이것은 ‘민주주의’이다. 아마도 이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지금 최소한 나에게 두 분의 전직 대통령과 현재의 대통령이 같은 반열에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고 항변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스스로 원치는 않지만 요 며칠 방송과 신문에서는 드라마틱했던 두 전직 대통령의 개인사를 내비치면서 계속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강조하고 있다. 

‘민주주의’ 

 초등학교 저학년 교과서에서도 볼 수 있는 ‘민주주의’는 현재 2009년을 지나면서 극적으로 그 의미와 정의가 재조명되고 있는 듯하다. 사전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뜻을 누가 모르겠냐 싶지만 이토록 익숙했던 단어가 요즘처럼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평소에는 몰랐다가 희박해지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되는, 상투적인 문장으로 정리되는 그러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10년간 운동이라는 것을 하면서 전혀 느끼지 못해서 원래 있는 것이라 생각했던 그것이 지금에 와서야 이것마저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것만이라도 없는 이 사회가 얼마나 억울한지 느끼고 있다. 이 설명하기 힘들지만 분명히 존재하며 느낄 수 있는 이것은 완벽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전진되었던 민주주의였다. 집회를 하고 시위를 하며 자신의 의견을 표현 할 수 있었고,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처럼 없어서 쩔쩔매지 않았던 그것은 불완전한 민주주의였다. 동의하지 않고 문제가 많다고 믿었던 그 정부정책들도 어느 정도 민의(民意)를 두려워했고 여론을 참고했던 이유는 그동안 존재감이 없었던 민주주의였다.

 아마도 백가지 이상이나 있을법한 대통령에 대한 평가기준들 중 현재 내가 두 분의 전직대통령이 사망한 사실이 슬프고 안타까운 이유는 이 ‘민주주의’가 뒤로 돌아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 때문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 ‘민주주의’를 다시 얻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뜩이나 먹고 살기도 힘든 이 험난한 시기에. 

 이 글을 빌어 고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며 부디 편안한 곳에서 영면하시길 기원합니다.


위대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상주에 귀농한 지인이 있어 몇 몇 사람이 찾아가 하루는 논에서 피와 잡초를 뽑고, 하루는 비 내리는 밭에서 콩을 옮겨 심었습니다. 평소 허리 숙여 잡초와 피 뽑는 일을 해본 적이 없는 관계로 등과 다리의 평소 사용해본 적 없는 근육을 무리하게 사용했고, 일주일 동안 제대로 걷는 것조차 버거웠습니다. 하지만 농사를 짓는 그 친구는 남들이 다 쉬러 나간 후에도 논에서 나오는 길에 눈에 띄는 잡초와 피를 뽑느라 제일 늦게 나오고 일하러 들어갈 때는 제일 먼저 논으로 들어갔고, 콩을 한줄기라도 더 심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쉴 때 남은 땅을 파고 있었습니다. 농부의 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야근에 힘이 부쳤는지 결국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피로와 면역력 약화가 원인이라고는 하는데 아무튼 시쳇말로 나이롱환자 노릇하느라 일주일을 허비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루 중 아침에 한차례 회진을 도는 교수와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오면, 그들의 말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간호사 선생님들이 혈압·체온 체크를 하러 오면 그 결과 하나하나에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이 환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게차에 다리를 깔려 뼈가 부러진 분, 자동차 사고로 왼쪽 다리를 다치신 분, 공익요원으로 근무를 하다 발목 관절을 다친 분 등등 많은 환자들이 의사들의 말 한마디를 신주단지 모시듯 따르고 조심조심하는 모습을 보며 의사 선생님, 간호사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고,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가를 느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 기간이 끝나고 또 다시 일상의 일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는 말씀을 하시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반이 무너져 버린 몸을 이끌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남북화해, 평화를 위해 남은 생의 불꽃을 태우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비록 서거에 임해서이기는 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전 업적에 대한 정당한 평가에 대해 토를 다는 사람이 없는 상황을 보면서 완벽하다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내 생에 이런 정치인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정치인으로서 욕심이 없었을 리 없겠지만 그 깊은 곳에 항상 자신의 주인으로 국민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원조 촛불' 정치인 김대중 76년 3월 1일 암울했던 유신시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일형 박사
(앞줄 오른쪽) 등과 함께 서울 명동에서 유신철폐를 위한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
(왼쪽이 김옥두 전 의원이고 김대중 뒤로 부인 이희호씨와 권노갑 전 의원이 보인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땅을 일구는 농부의 손길에서 먹거리 하나에 온 정성을 기울이는 진정한 농심을 찾게 되고, 아픔을 호소하는 환자를 어루만져주는 의사의 손길에서 진정한 의술을 찾게 되며, 가난과 고통으로 시름하는 국민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 정치인의 품에서 진정한 평화를 찾게 됩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업무 분야는 세분화되고, 전문화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기계가 대신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많은 경우 사람들은 세분화될 일자리에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업무수행 능력을 요구받고 있고,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업무처리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그들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객관적이고 고도화된 업무능력을 믿고 의지하게 됩니다. 누구 하나 전문가가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들 전문가들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단 하루도 지탱되기 어려운 사회가 되었습니다.  

 전문가는 제 영역에서 최선을 다할 때에야 비로소 존재의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 일부 전문가들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니 그들이 최선을 다해야 할 대상을 잘못 찾은 것 같습니다.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그동안 쌓아 온 모든 실력을 발휘해야 할 경찰 전문가들은 시민을 상대로 폭압적인 살인 진압을 자행하고, 국가가 국민의 세금을 들여 양성한 법률 전문가인 검사들은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인 언론의 자유, 집회·시위의 자유를 말살하는데 그들이 가진 온갖 지적 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또 매일 매일 TV 속에 그려지는 정치 전문가들의 행태를 통해 그들의 가슴 속에서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을 찾기는 어려운 반면 자본가들과 기득권자들만이 보이는 것은 저만의 편견은 아닐 것입니다.

 신뢰가 무너진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신뢰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오로지 신뢰만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너무도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고 있는 전문가들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작금의 현실이. 그 자리를 채울 신뢰를 어떻게 다시 쌓아갈 것인지 암담하기만 합니다.

 그리하여 전문가로서 맡은 소임이 일반 대중, 시민, 국민 전체를 상대로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로서 쌓아온 실력을 왜곡된 방향으로 사용할 때, 이를 지적하고 바로잡기 위한 행동에 나서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입니다. 사회를 지탱해나갈 신뢰, 훼손되고 실추된 신뢰를 회복시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모습이 바로 행동하는 양심이 아닐까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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