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다녀와서 :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해야 건강한 사회다. - 이현정/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부장
이현정/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부장 작년 11월 11일부터 올 1월 23일까지, 74일 동안 유럽의 12개국 26개 도시를 다녀왔다. 평소 사회 공공성 확대운동에 관심이 많았는데 장기근무 안식월을 이용하여 유럽 시민사회를 답사한 개인연수였다. 이에 영국(스코틀랜드 포함), 아일랜드,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 오스트리아, 체코, 이탈리아, 터키, 스페인 등 유럽의 많은 장소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경험하였다. 물론 보다 분석적이고 체계적인 연수가 되지 못해 아쉬움을 가지면서 이곳에 일부를 간략하게 써본다. 여기에 두 가지 정도를 첨언해 본다. 첫째, 그동안 한국 사회가 서구(유럽)중심주의적 사고에 빠져 지나친 환상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나, 한국보다 훨씬 이전에 형성된 서구(유럽) 시민사회의 모습을 우리 사회에 대입해 운동의 전망을 가져가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또한 한국과 유럽시민사회의 형성 배경, 역사, 문화, 경제수준 등의 상이함이 존재하기에 무조건적인 비교는 무리가 있겠으나,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골고루 잘 먹고, 개인의 표현 및 이익이 구현되면서 공동체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건강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시민사회와의 비교분석도 필요하다. 1.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해야 건강한 사회다. 이게 선진국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일반 회사 노동자와의 대화를 가졌다. 본인은 여름에 한 달 동안 유급휴가를 받아 여행을 다녀온다고 한다. 만약 이게 실현되지 않으면 노동자들의 파업이 정당하다고 말한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최근 프랑스는 주요 유럽연합(EU)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양호한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다. 영국 런던에서는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이 자주 있었다. 정부의 지하철 발매창구 직원 감축 방침에 지하철 노조가 대대적으로 동참하였고, 하루씩 주기적으로 모든 역이 폐쇄되었다. 런던 시민들은 불편했지만, 고용 안정을 위한 파업이라는 노조의 직접행동에 높은 연대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더불어 공공 및 사적영역의 서비스업을 통해 만난 유럽노동자들의 평균나이는 한국보다 매우 높았다. 바로 고용의 보장이었다. 유난히 더 추웠던 올 겨울, 대부분의 유럽 사람들에게서는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에게 보이는 그 무언가가 보이지 않았다. 바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문득 떠올랐다. 고용과 복지, 의료보험, 교육 등 사회보장제도의 안전망 속에서 살아가는 유럽인들이 있는 반면에, 대기업의 성장률은 사상 최고인데 반해 실업률, 비정규직율, 청년실업률 또한 사상 최대의 현실에서 허우적거리는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가장 크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유럽연합(EU) 국민들의 조세부담률이 평균 50%로 한국보다 약 19% 높다는 현실을 짚고 가야 한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지속가능한 성장 사회를 만들기 위해 소득 수준에 따라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 것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 법인세를 더 내는 기업에서도 지속가능한 성장 측면에서 자신들을 위해 투자한다며 기꺼이 동참하고 있다. 더불어 보수정책을 펼치는 영국 보수당에서도 사회복지정책 강화, 북유럽의 보수정당도 사회복지정책을 최우선 과제로 두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상황은 어떠한가. 보수정권의 집권 하에 대기업 최대 성장률 이면에는 최고의 실업률, 비정규직율, 청년실업률, 양극화가 실존한다. 복지의 가장 기본이 되는 고용 보장이 더 어려워진 현실이 반영된 결과이다. 수천 년의 한국 역사 동안에 요즘 청년들만큼의 대단한 스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함에도 이 청년들은 여전히 취업을 못하거나 저임금의 비정규직 노동자로 전락하는 현실에 놓여 있다. 더불어 일자리 불안도 계속 증대하고 있다. 우리는 이 문제를 꼭 해결해야 한다. 이게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의 진짜 행복은 찾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보다 일찍 형성된 유럽 시민사회의 복지현황에 대해 면밀히 검토하고, 한국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을 실행해야 할 것이다. 2. 가해자로서의 독일과 일본의 반성은 다르다. 독일 베를린 등 독일 곳곳을 다녀왔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패배 후, 승전 4개국에 의해 동서독 분할 통치를 받았다. 이후 1990년, 동서독은 통일국가를 이루었다. 이제는 통일국가의 수도 베를린이 하나의 큰 관광 상품이 되어 있었다. 무너져버린 베를린장벽, 그리고 그 장벽 위에 그려진 각종 그림들, 브란덴부르크문, 체크포인트 찰리검문소 등 각종 건물 등이 많은 관광객들을 모으고 있었다. 또한 베를린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것 중의 하나는 과거 2차 대전 기간의 폭력성에 대해 반성 하는 상징물들이었다. 그 중 베를린 장벽을 따라 설치된 토포그라피 데스 테러 건물은 많은 시사점을 안겨주고 있었다. 과거 나치 통치 시절 게쉬타포 등 나치 친위대 건물로 사용되었던 터에 만들어진 전시관으로서 2차 세계대전 준비 및 기간 동안에 나치와 독일이 유럽인들에 행한 폭력성을 전시하고 반성하자는 내용을 담았다. 우리가 일제의 잔혹행위 사진에서 많이 보았던 것과 같은 끔찍한 사진 및 영상들이 담겨 있었다. 전시관에서 지켜보던 독일인들과 외국인들은 눈시울을 붉히고,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음으로써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이를 보면서 문득 진심어린 사과도 보상도 없는 일본의 과거 전쟁 범죄가 떠올랐다. 히로시마에 있는 평화박물관에도 핵무기의 피해성만 강조되어 있고, 그들의 가해성은 전시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왜 이렇게 다를까? 가장 큰 해답은 그 원인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독일은 전쟁범죄국가로서 분열되었고 통제를 받았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오히려 피해국인 한반도의 남북이 갈라졌다. 이 역사적 비극은 미국이 동북아전략의 이유로 일본 천황을 전쟁범죄자로서 법정에 세우지 않고, 한반도 분할을 추진했기에 이뤄졌다. 그러면서 일본 A급 전범자들 7명만 처형을 당하고, 오히려 조선인을 포함한 강제 징병된 외국인 B, C급 전범이 훨씬 더 많이 처형당했던 역사적 상처를 남겼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과거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후손들이 여전히 일본의 정치를 좌지우지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역사는 과거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즉 과거의 역사를 우리가 배우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보다 더 건강하게 만들어 가고, 밝은 미래를 열어가기 위함이다. 결국 일본의 시행되지 못한 과거 청산이 오늘날의 군사 대국주의와 우경화의 길로 나서는 현실을 낳았다. 최근 일본 내 유일한 가해자의 폭력성을 담은 단바망간기념관 재건 운동에 흥사단을 포함해 많은 단체들이 나서고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더불어 이 시점에서 한국 사회는 어떠한가 돌아봤다. 우리는 지난 날 일제 및 군사정권에서 이뤄졌던 폭력성에 대해 제대로 청산을 하였던가. 오히려 과거의 억압을 청산하고, 역사적 진실을 규명함으로써 갈등을 해소하고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자는 취지에서 설립, 운영되었던 여러 과거사위원회들이 문을 닫아야만 했다. 우리 스스로가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닫아 버렸다. 참 씁쓸한 일이다. 유럽연수를 다녀온 후 유럽 시민사회를 더 알고 싶어졌다. 최근에 셰리 버먼의 <정치가 우선한다 : 사회민주주의와 20세기 유럽의 형성>을 읽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회적 안정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가장 강력하게 옹호했으며, 실제로 놀라울 만큼 그것들이 공존할 수 있도록 실행 프로그램을 개발해 낸 것은 바로 사회민주주의였다.”는 내용이 눈길을 끈다. 마지막으로 ‘키 큰 나무숲을 지나니 내 키가 커졌고, 깊은 강을 건너니 내 혼이 더 깊어졌다.’는 말이 있는데, 이번 유럽연수가 나에게는 키 큰 나무숲, 그리고 깊은 강이 되어주었다. 앞으로 내 삶의 마디마디에, 그리고 운동의 걸음걸음에 이러한 정신들이 더욱 더 깊이 새겨져 있으리라 본다. * 보태기 - 최근 대지진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일본의 많은 생명들에게 애도를 표하고, 이 상처가 빨리 치유될 수 있도록 진심으로 기원한다. 나는 일본과 좋은 이웃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지금 일본이 큰 상처를 입은 시기임에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전쟁과 폭력에 대한 반성의 내용을 담았다. 일제 강점기 일본 검사의 문초 중 도산 안창호 선생은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이웃인 대한나라를 유린하는 것은 결코 일본의 이익이 아니 될 것이다. 원한 품은 이천만을 억지로 국민 중에 포함하는 것보다 우정 있는 이천만을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득일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복리까지도 위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도산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병보석으로 풀려나 2개월 후인 1938년에 경성대학병원(현 서울대병원)에서 서거하셨다. 모범적인 공화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독립된 나라를 끝내 만나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