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 상임위원 2명 전격사퇴 배경

국민의 인권 보호 임무를 부여받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내홍으로 사실상 ‘기능 정지’ 상태에 들어갔다. 2001년 출범 후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인권위 기능을 보편적인 가치인 인권이 아니라 진보와 보수 모두 자기 입맛에 맞춰 해석하려는 정치·사회 풍토가 이번 사태를 낳았다는 지적이다. 인권위가 스스로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정권에 따라 오락가락의 행보를 한 결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식물위원회’라는 지적받은 인권위

시민사회의 오랜 노력 끝에 2001년 어렵게 출범한 인권위는 그동안 인권이라는 개념의 폭을 넓히고 인권의식이 우리 사회에 자리 잡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물론 보수쪽 입장에서는 인권운동가들이 대거 자리를 차지하고 잇따라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인권위가 곱게 보이진 않았다. 2008년 정권 교체 이후 통폐합이 추진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인권위의 ‘보수화가 눈에 띄게 이뤄진 것도 사실이다.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가 인권이라는 기준으로만 판단하는 인권위로서 기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난해 7월 현병철 위원장 취임 이후 인권위는 아예 “정권에 부담을 주는 의결이나 의견 표명은 하지 않는다”는 비판까지 받았다. MBC ‘PD수첩’ 광우병 보도에 대한 검찰 수사건과 야간시위 위헌법률심판제출건, 박원순 변호사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건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한 의견표명 여부를 전원위에서 부결시키거나 기각했다. 이런 경향은 지난 2월 11명의 전원위원 중 진보와 보수 위원의 수가 ‘5대 6’으로 역전되면서 더욱 심해졌다는 게 인권단체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지난 8월에는 인권위 설립 멤버인 김형완 인권정책과장이 현 위원장의 조직 운영에 불만을 품고 자진 사퇴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날 사퇴한 문경란 위원은 한나라당이 추천했다는 점에서 파장은 더욱 크다.

◆인권위 독립성 강화해야

2008년 정권 교체 후 인권위의 ‘우향우’ 행보는 예견됐다. 안경환 전 위원장은 지난해 임기를 4개월 남긴 채 사퇴하면서 “적어도 인권에 관한 한 이 정부는 의제와 의지가 부족하고 소통의 자세나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쓴소리를 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 독립기관인 인권위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만들려고 했던 정부는 지난해 4월 인권위 정원을 208명에서 164명으로 줄이는 직제개정을 단행했다. 종전 5본부 22팀 4소속기관이던 조직체계도 1관 2국 11과 3소속기관으로 축소됐다. 지난해 7월 취임한 현 위원장은 국회에서 인권위의 독립성을 훼손한다는 의심을 받을 만한 발언을 하는 등 잇따라 문제를 일으켰다.

인권위 안팎에서는 ‘인권위가 스스로 역할을 포기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위원의 낮은 인권의식과 함량 미달의 발언 탓에 인권단체 사이에선 인권위 전원위원회를 ‘봉숭아 학당’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지난달 25일 보수성향 비상임위원 3명이 발의한 ‘인권위 운영규칙 일부 개정안’이 전원위원회에 상정된 것은 두 상임위원 동반사퇴의 결정적 계기였다는 분석이다. 개정안은 인권위 상임위원 3명이 안건에 대한 의견표명이나 권고에 합의하더라도 위원장 판단에 따라 전원위에 다시 회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상임위를 무력화하려는 의도가 개정안에 깔려 있다는 게 동반사퇴한 두 위원의 판단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상임위원이 2명이나 사퇴한 것은 인권위 초유의 사태로, 현 위원장 이후 파행운영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인권위원장도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치도록 하는 등 인사상 난맥과 내부갈등, 자격미달 인사 취임 등을 막을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태영 기자 anarchy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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