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에 대한 개념을 소개하는 일종의 인권법총론으로 법학계의 열악한 인권 이해에 대해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고, 다양한 인권사례들을 수록하였다.
저자소개
이상돈 - 한국전쟁 중 피난지 부산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 자랐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고, 해군장교로 군 복무를 마친 후, 미국에 유학해서 뉴올리언스에 위치한 튤레인 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83년부터 중앙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2001~03년 동안에는 학장을 지냈다. 미국 조지아 대학 딘 러스크 센터 교환연구원(1988년), 조지타운 대학 풀브라이트 방문학자(1993~94년)를 지냈고, 1996년 가을 학기에는 로욜라 로스쿨에서 교환교수로 강의를 했다. 저서로는 <비판적 환경주의자>(2006년), <세계의 트렌드를 읽는 100권의 책>(2006년), <지구촌 환경보호와 한국의 환경정책>(1995년),<국제거래법>(1992년),<미국의 헌법과연 방대법원>(1983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중상모략>(공역, 2007년), <에코스캠>(1999년)이 있다. 1995년~2003년간 조선일보 비상임 논설위원을 지냈고, 그 후에도 조선일보, 문화일보 등에 기고를 했으며, 2007년 들어서는 동아일보에 고정적으로 기고를 해 오고 있다.
목차
제1부 인권의 개념과 한계
1. 인권사상의 기초
2. 근대적 인권사상의 이론적 특성
3. 근대적 인권사상의 실천적 한계
제2부 인권과 주권
4. 정치모델과 인권
5. 하버마스의 인권이론
제3부 현대사회와 인권
6. 인권 개념의 절차화
7. 인권 개념의 세계화
8. 인권 개념의 지역화
제4부 인권의 실현
9. 인권실현모델 - 국가주도와 시민주도
10. 국가인권위원회
서평
근대적 인권개념을 넘어서
1. 인권을 둘러싼 몇 가지 문제
한국사회에서 인권이 담론화된지도 이제 꽤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은 ‘인권’을 이야기하고 싸우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인권’이라는 담론이 갖는 의미를 차분하게 평가해 볼 시점이 된 듯하다. 그런 점에서 이상돈 교수의 <인권법>이 다루고 있는 몇 가지 쟁점들은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첫 번째 쟁점은 “인권의 보편성”과 “근대적 인권개념”에 대한 의문이고(제1부), 두 번째는 그러한 의문을 바탕으로 해서 “인권개념의 재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이고(제2부, 제3부), 세 번째는 그런 이해를 토대로 어떻게 “인권실현의 모델을 만들 것인가”(제4부) 하는 것이다.
2. 근대적 인권개념의 한계
이 책은 먼저 근대적 인권개념의 한계에서부터 시작한다.(제1부) 근대적 인권개념은 18-19세기 근대시민혁명과 더불어 발전하였다. 이에 따르면, 인권이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보편적이고 고정불변하는 권리이며(보편성), 이것은 누구에 의해서도 침해받아서는 안되며(불가침), 누구에게 양도할 수도 없는(불가양) 권리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이러한 ‘근대적 인권사상’이 ‘정치적 소외, ’사회경제적 소외‘, ’문화적 소외‘라는 세가지 실천적 한계를 노정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정치적 소외란 근대적 인권개념이 민주주의적 주권원리와 충돌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며, 사회경제적 소외란 근대적 인권개념이 사회적 약자의 실질적 자유보장에 취약할 수 있다는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문화적 소외란 근대적 인권개념이 보편적 인권이라는 명목 하에 타문화권 고유의 이념을 폭력적으로 무시할 수 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근대적 인권개념은 현대사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인권문제를 해결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개념이다. 현대적 인권문제가 인권과 주권의 충돌, 사회·경제적 권리이나 문화적 권리의 위상 문제, 문화적 상대주의의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얽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위의 세 가지 소외를 낳는) 근대적 인권개념은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인권은 보편적이다’, ‘인권은 불가침, 불가양의 천부적 권리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주장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학적 기능’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리고 그 수사학적 기능은 중세봉건권력과 맞서 싸웠던 부르주아혁명 시기에는 의미가 있었을지 몰라도, 현대사회에서는 오히려 부정적인 역기능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장애인의 접근권은 ‘천부인권’이다”라는 근거로 장애인 엘리베이터 설치를 주장하는 것은 실천적으로 위력적인 논거가 된다. 하지만 점심을 굶는 어린이의 인권, 최소한의 주거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독거노인의 인권 또한 천부인권라면, (재화가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다른 천부인권보다도 장애인 접근권이 우선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당장 서울 시내에서 수만명의 어린이가 점심을 굶고 있는데, 수억의 예산을 들여 지하철에 엘리베이터 설비를 하는 것은 어떠한 타당성이 있는가? 절대적인 권리가 이렇게 어느 하나를 위해 어느 하나를 양보해야 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합당한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소위 ‘근대적 인권개념’은 적절한 이론적 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근대적 인권개념은 재화가 풍부한 서구선진국의 이해관계를 편파적으로 반영하기도 한다. 전체 국민에게 일정한 수준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해줄 수 있을 만큼의 풍부한 재화를 가진 선진국들은 최소한의 인권을 확보하는 것이 비교적 용이하다. 하지만 재화가 부족한 나라에서는 어떤 인권부터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장애인접근권과 최소한의 음식을 먹을 권리가 충돌할 때, 후진국은 어느 한 권리만을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서구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인권’을 부당하게 ‘선택적’으로만 실현하는 것일 수 있고,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이러한 인권침해국에 대한 ‘응징’을 위해 ‘전쟁’을 불사하는 어이없는 사태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근대적 인권개념으로는 이러한 난관에 대해 어떠한 답도 제공하지 못한다. 그저 ‘인권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이다’는 ‘공문구’만을 남발할 뿐이다.
3. 인권개념의 새로운 모색과 대안
그렇다면 근대적 인권개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인권개념의 재정립은 인권학과 인권운동의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어버린다. 저자는 하버마스(J. Habermas)의 토론정치이론을 이론적 토대로 삼아(제2부), 인권개념에 대한 재구성을 시도한다.(제3부) 그것은 한마디로 “인권개념은 실체가 아니라 (대화적 의사소통의 과정에서) 절차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107쪽)는 명제이다. 즉, 저자는 인권이 원래부터 보편적으로 일정한 내용을 담고 있는 실체가 아니라, 인권담론에 대한 공정한 공론경쟁을 통해 비로소 ‘절차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인권과 주권, 사적 자율성과 공적 자율성, 자유주의와 공화주의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하버마스의 후기 법-정치이론을 응용한 결과물이다.
이렇게 보면, ‘인권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라는 명제는 기각되며, 대신 인권담론의 ‘형성절차’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가 중요한 논점으로 부각된다. 어떠한 인권개념도 선험적으로 절대적인 것으로 전제되지 않으며, 모든 가치들은 구성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공론을 통해 재해석되고, 그러한 합리적 절차의 결과물로서 인권은 비로소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인권개념을 유동적으로 만든다는 단점이 있지만, 인권개념을 역동적인 개념으로 재정립하는 장점도 있다. 특히 인권담론의 해석주체로서의 인권담지자의 역할에 주목함으로써, 자칫 시혜적이고 후견적(paternalistic)이기 쉬운 근대적 인권개념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넘어서기도 한다.
그리고 저자는 마지막 제4부에서 이러한 새로운 인권개념에 기반했을 때, 다양한 인권의 실현기제들이 어떻게 제자리를 찾아야 하는지를 논한다. 인권이 절차를 통해 구성되는 것이라면, 그 절차를 세심하게 가다듬는게 당면과제가 될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기존 국가기구의 역할, 그리고 시민적 공론을 형성하는 시민사회의 역할이 모두 중요하다. 여기서 국가인권위원회는 그 중간에서 국가와 시민사회를 매개하는 ‘의사소통촉매기능’(241쪽)을 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실천적 제안이다.
4. 해결되지 않은 과제
이 책은 근대적 인권개념의 한계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인권개념을 이론적으로 도출해 내고, 그것을 기반으로 한 국가의 인권실현기제까지 분석하고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는, 이른바 ‘자기 완결성’을 가지고 있다. 인권에 대한 기존의 연구가 대개 사회학적 현상분석이나 철학적 고찰에 머물거나, 법제도에 대한 피상적 접근을 넘어서지 못하며, 학제간 연구라고 해도 대개 여러 학문분과의 시각이 나열되는 것에 불과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책이 갖는 의미는 더욱 크다. 인권관련출판이 이미 ‘거대산업화’되어 버린 서구에서도 이러한 종합적 고찰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 책의 주장이 안고 있는 ‘실천적 난점’이다. 형사피의자의 인권을 이야기할 때, 재소자의 인권을 주장할 때, 장애인의 인권을 옹호할 때, “인권은 보편적이고 불가침의 권리이다”라는 모토만큼 선명한 주장은 없다. 이것은 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그 주장이 사회적 인정을 받는데 크게 기여한다. 대부분의 인권교재가 인권의 절대성/보편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일테다. 하지만 이 책은 실천적 우위를 포기하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인권개념의 절차적 재구성을 주장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완성도는 높지만, 그 주장이 시민사회에서 동의를 얻기에는 또다른 난관이 존재한다. 성숙하고 건강한 공론영역이 존재하고, 그것이 정치권력을 적절하게 견제하는 사회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근대적 인권개념’을 포기하고, 인권의 다원성, 절차성 등을 주장하는 것은 실천적 차원에서는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의 척박한 공론현실을 고려해 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우리 공론에 여전히 희망을 걸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재소자에 대한 성폭력문제가 연일 신문 헤드라인을 강타하고 있다. 당신은 재소자의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인권’이 침해당했다는 근거로 항의를 조직하는 일부터 시작할 것인가? 아니면 재소자의 인권을 어떻게 정의하고 구성할 것인가를 주제로, 공론영역에서의 사회적 합의절차를 밟아나가는 지리한 노정부터 차근차근 시작할 것인가?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향상된 우리 인권현실이 이제 그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너무 앞서나간 것일까? 어느 선택지를 택하건 그 치열한 고민은 이제 시작되어야 한다.
이 서평은 홍성수 교수가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 기고한 것으로, 홍성수 교수는 런던정경대학(LSE) 박사과정에서 인권법과 법사회학을 공부하고 현재는 숙명여대 법대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강간죄의 객체, 강간죄의 폭행 협박의 정도, 성폭력범죄 피해자의 형사절차적 보호, 가정폭력에 대한 국가개입의 방식,가정폭력 피해자의 가해자에 대한 반격행위에 대한 형법적 평가 등의 주제를 다룬 책. 국내의 형사법률, 이론, 판례 및 실무관행이 명시적 묵시적으로 남성중심적 관념을 보유하고 있는 데 대하여 철저한 비판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소개
조 국 - 1965년 부산에서 태어났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과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로스쿨에서 공부했다. 울산대학교, 동국대학교를 거쳐 2001년 12월 이후 서울대학교에서 법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다. 2000년 이후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부)소장으로 시민운동에 참여하였고, 2007년 12월 대법원장 지명으로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으로 임명되어 인권침해와 차별에 대한 조사와 구제에 일조하고 있다. 전공인 법학연구를 삶의 중심에 놓으면서도, 여력이 되는 대로 전공 밖의 세상일에 관여하고 있다. 법의 제정, 해석, 집행의 문제, 그리고 인권의 보장과 신장의 문제가 애초부터 세상 일과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없으므로. 학술서로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 『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 『로스쿨 형법총론』 등을, 에세이집으로는 『성찰하는 진보』를 발간했다.
목차
제1장 남성중심적 강간죄 형법규정과 해석론 비판
제2장 형사절차에서 성폭력범죄 피해여성의 처지와 보호
제3장 매맞는 아내에 대한 법적 보호의 한계
제4장 매맞는 여성의 대남성 반격행위에 대한 남성중심적 평가
서평
<형사법의 성편향>
법치국가적 인권보장 vs 여성주의
근대적 인권은 국가권력에 맞서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고자 하는 투쟁의 과정에서 발전해 왔다. ‘인권’하면 피의자나 수형자의 인권이 떠오르고, 인권을 ‘국가의 지배’에 맞선 ‘인간의 권리의 수호’라는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죄형법정주의, 법익보호원칙, 비례성원칙, 형사절차의 정형화 등이 ‘민주적 법치국가’의 핵심이념으로 자리 잡은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그러한 이념을 바탕으로 성립된 근대 (형사)법체계는 ― 인권보장이라는 나름대로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 남성 편향적이고 여성 차별적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강간, 성희롱, 아내 구타, 형사절차에서 성폭력범죄피해여성의 보호 등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여성이 불리한 지위에 놓이게 된다는 것은 이미 오랫동안 지적된 바 있다. 그래서 여성주의운동진영에서는 강간죄객체규정의 확대, 강간죄 성립요건의 재구성, 형사절차에서 성폭력범죄피해자 보호 강화, 매 맞는 여성에 대한 보호 강화, 성희롱의 범죄와, 비동의간음의 범죄와, 반여성적인 포르노그래피 규제 등을 주장해 왔고, 그 중 일부는 법체계 내에서 수용되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법치국가에서 이러한 여성주의의 주장이 전적으로 수용될 수만은 없다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여성 주의적 관점‘만’을 전적으로 수용하다보면, 인권보장을 위한 법치국가 원리가 불가피하게 침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간죄의 성립요건을 완화하는 것은 증거재판주의의 원칙을 무력화시키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고, 형사절차에서 성폭력범죄 피해여성에 대한 보호는 법정에서 피고인의 방어권의 축소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가 법치국가의 인권보장체계를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 이상, 여성 주의적 관점의 도입이 법치국가원칙을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난감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여성인권의 진정한 실현을 위해, 근대시민혁명의 성과인 법치국가적 인권보장체계를 무력화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법치국가원칙을 수호한다는 명목 하에서 여성의 경험과 느낌을 무시해서도 안 될 것이며, 반대로 여성 주의적 관점만을 강조하여 법치국가원칙의 침해가능성에 눈감아서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의 논의는 한쪽의 입장만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편에서는 여성의 경험과 느낌을 무시하고, 그것을 ‘중립성’이나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해왔다. 이 입장은 ‘중립’이 여성에게는 ‘차별’과 ‘억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철저히 눈감아 왔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여성 주의적 관점의 도입이 법치국가적 인권보장체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세심하게 고려하지 못했다. 이 입장은 성폭력특별법을 제정하면서 사형제도가 선고될 수 있는 범위를 확대하는 오류를 범하는가 하면, 형사절차에서 성폭력범죄피해자 보호가 피고인의 소송상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을 충분히 염두에 두지 못했다.
여성주의와 법치국가적 인권보장 : 절충? 타협?
<형사법의 성편향>은 바로 이렇게 중요하고도 어려운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법을 제시하는 책이라는 점에 그 의미가 있다. 이 책은 형사법의 남성편향을 치밀하게 비판하면서도, 여성 주의적 관점의 도입이 법치국가원칙을 침해할 위험에 눈감지 않는다. 그래서 저자는 한편으로 강간죄문제(제1장, 제2장), 형사절차에서 성폭력범죄 피해여성의 보호의 문제(제2장), 매 맞는 아내의 문제(제3장, 제4장)에서, 남성 편향적 형사법체계의 전면적인 개혁을 주장함으로써, 진정한 여성인권의 회복을 꾀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비동의간음의 범죄화, 간통죄 존속, 성매매에 관한 단선적 범죄화,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과도한 규제 등에 대해서는 오히려 반대의 입장을 개진한다.(제5장) 저자는 한편으로 여성주의의 입장을 형사법체계에 내에 상당 부분 수용하려고 하지만, “모든 반여성적 행위를 일률적으로 범죄 화하려는 여성주의의 요구”(290쪽)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요컨대, 저자는 여성주의의 문제제기가 법치국가의 인권보장체계에서 어떻게 조화롭게 수용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에 대해, ‘어설픈 절충’ 내지 ‘정치적 타협’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러한 입장이 여성주의진영과 법조계 모두에게 불만족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법치국가 형사법의 원칙과 여성주의의 문제제기 중 어느 하나를 배제하지 않는 한, ‘좋은 의미의 절충과 조절’은 불가피하다고 하겠다. 또한 여성주의의 관점은 ‘국가형벌권’을 통해서‘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문제해결을 위한 법적 수단으로는 ― 형벌 외에도 ― 민사제재, 행정제제, 제3의 대안(중재, 조정 등)이 있으며, 법 이전에 교육적·사회문화적 해결방안도 있다. 무엇보다도 민주적 법치국가에서 국가형벌권의 행사는 이러한 해결방안 중에서도 ‘최후의 수단’일 뿐이다. 그래서 이러한 관점에서 법치국가원칙과 여성주의의 입장을 조절하고 절충하다 보면, 여성 주의적 관점의 도입이 곤란하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론은 여성 주의적 관점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사안의 ‘형사법에 의한 해결’에 비판적인 입장을 개진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형사법 이외의 다른 해결방안의 모색을 제안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논증이 ‘정치적 타협’이나 ‘어설픈 절충’과 명백히 구분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의의와 전망
마지막으로, 이 책의 미덕은 무엇보다도 ‘읽기 쉽다’는 점에 있다. 전문연구서임에도 불구하고 정돈된 논리를 유려한 문체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법학자는 물론이고 비법학전공자나 일반시민들도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연구서로서의 품격을 전혀 잃지 않고 있으니, 이런 류의 연구서로서는 가히 모범적이라고 할 만 하다. 또한 이 책은 국내외의 연구 성과를 성실하게 인용하고 검토하고 있는데, 이 점은 이 책의 학문적인 가치를 더해 줌은 물론이고, 관련 분야를 좀 더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책은 여성주의의 도전과 관련한 ‘형사법’의 문제를 다루고 있을 뿐, 형사법 이외의 다양한 법적·제도적 대안을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못하다. 물론 이 점은 <‘형사법’의 성편향>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의 불가피한 한계라고 할 수 있지만, 어쨌든 아쉬운 일임은 분명하다. 앞으로 법체계 전반의 성편향과 (형사법 이외의) 여러 법적·제도적 대안에 대한 후속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며, 이 책은 그러한 후속연구를 위한 훌륭한 발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 서평은 홍성수 교수가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 기고한 것으로, 홍성수 교수는 런던정경대학(LSE) 박사과정에서 인권법과 법사회학을 공부하고 현재는 숙명여대 법대 교수로 재직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