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연대 인턴활동을 마치며] 13기 인턴활동가(윤다정/ 황서현)

인권을 배우고 행복해지기를 꿈꾸다

윤다정/ 13기 인턴활동가

 입시를 견뎌내고 모처럼 대학에 입학했으니 하고 싶은 일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심은 제법 잘 지켜지는 듯했다. 학내 언론사에서 활동하고, 강연회가 열리는 곳에는 꼭 찾아가고, 길바닥에서 노숙하며 데모도 해 봤다. 2년을 하얗게 불태웠다. 그러나 평범한 대학생이 으레 느낄 법한 취업 압박을, 고학년이 되어서도 뚝심 있게 외면할 정도로 심지가 굳지도 못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더라도 의미 있어 보이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인권연대 인턴 모집에 지원했다. 다행히 출근하라는 전화를 받긴 했지만, 면접에서 몹시 버벅거리며 얕은 밑천을 여과 없이 드러냈던 탓에 영 불안하기만 했다.

 인턴 활동은 생각보다 고되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힘들었다. 손은 열심히 모르는 내용을 받아 적고 머리는 그것들을 이해하느라 바빴다. 쓸모 있는 질문을 해야 한다는 강박, 멍청해 보이기 싫다는 욕심 때문에 열심히 머리만 굴리다가 질문을 삼킨 적도 허다했다. 여러 가지 인권 현안에 나름대로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지원서에 잘난 척 주워섬겼던 온갖 단어가 휴지통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고백하건대 나의 짧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허영심이었다. 몰랐던 지식을 머릿속에 주워 담고 으스대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곤 했던 내게 고통스러운 자각이 매일 이어졌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열등감이 폭발해서는, 집에서 휴지 한 통을 다 쓰도록 울기도 했다. 자존심으로 포장된 열등감을 과감히 버렸다. 무엇을 모르는지를 직시하고 질문하기를 독려하며, 마치 소크라테스처럼 나를 가르쳐주신 국장님과 간사님들의 도움이 컸다. 겸허함을 배웠다. 나를 낮추고 평생 배우는 자세로 살겠노라고 다짐했다.


7기 대학생 인권학교

 겸허함만큼이나 중요한 배움은 ‘사람의 삶’에 관한 것들이었다. 8주간 내가 모르던 세상에서 울고 웃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머나먼 만주 땅을 전전하던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처럼, 고국을 떠나서 차가운 시선을 묵묵히 견디며 군부 독재에 저항하는 버마 민주화 운동가분들을 만났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교로 이어지는 단조로운 레일을 망가뜨리고자 하는 친구들도 만났다. 매일 한강 변만 산책하다가 난생처음 바다를 본 사람처럼 새로이 만난 세상에 압도되었다. 시야가 수백 배는 넓어진 기분에 가슴이 뻥 뚫렸다.

 한 손엔 수첩, 한 손엔 펜을 드는 생활에 익숙해질 즈음 인턴 활동 마감일이 다가왔다. “일정이 빡빡합니다. 시간이 굉장히 빨리 지나갈 거예요.” 출근 첫날 국장님께서 말씀하신대로였다.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에도 출근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으로 마지막 출근을 했다. 마지막 날에도 국장님은 중요한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필사적으로 열중할 것. 무엇보다도 행복하게 살 것. “인권을 배우자, 그리고 행복해지자.” 제7기 대학생 인권학교의 슬로건을 새삼스레 되새기며, 중요한 깨달음을 얻은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나 자신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해지길 바란다는 전제를 깔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들어앉아 있는 작은 울타리를 부수고 나오게끔 도와준 첫 번째 도약대가 인권연대였다는 행운에 감사한다. 행복하게 살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신, 인권연대에서 만난 모든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린다. 여기서 얻은 배움을 벗삼아, 어떻게 해야 내가 사는 땅을 행복한 곳으로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자 한다. 목소리는 크게, 공부도 사랑도 놀이도 열심히 하면서.

 

무지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 8주

황서현/ 13기 인턴활동가

 처음 인권연대를 알게 된 건 4월에 있었던 <검찰공화국, 대한민국> 저자강연회에 참석했을 때였다. 법학을 전공하는 학생이긴 하나, 전공 교과서에만 치중한 나머지 법과 사회 전반과 직접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였다. 어떻게 해서든 그 무지에서 벗어나려는 생각 중에 있던 나는 우연히 저자 강연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주저 없이 신청을 하게 됐다. 인권연대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강연회에 참석한 이후로는 매일같이 인권연대 홈페이지를 방문해서 어떤 행사가 진행되고 있는지, 그와 같은 강연회는 없는지 살펴보는 것이 하루 일과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름방학 인턴 공지 글을 보게 됐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여름방학은 뭘 하며 보낼까 하고 생각하던 차에 좋은 기회다 싶어 신청을 했고, 운 좋게 인턴으로 선발되었다.

 첫 출근을 하던 날, 인턴은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는 국장님의 말씀에 뭘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두려움이 앞섰다. 국장님이 말씀하신 공부는 단순히 교과서를 보고 줄긋고 시험 치는  등의 일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 외의 공부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 확실히 서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을 했다. 국장님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간파하셨는지, 공부의 방향을 제시해주셨다.

 “듣고, 쓰고, 말하고, 읽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라.” 

 이 한 문장이 인턴활동의 교과서가 되었다. 여기에 따라 사고하며 끊임없이 질문을 만들어 내야했고, 질문을 하기 위해서 공부해야 했다. 출퇴근하는 지하철에서 항상 책을 펴들었고, 책을 읽을 때마다 스스로에게“왜?”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무지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이 멈출 것 같을 때마다 “안 돼!”하고 외치기도 했다. 책을 읽고도 용기가 없어서 질문하지 못했던 적도 많이 있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다 보니 질문에 대한 두려움도 점차 사라졌고, 국장님께는 물론 만나는 선생님들께도 하나씩 질문 하게 됐다. 양질의 질문을 해야겠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듣고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어서 후련 했다. 비로소 아는 것들이 생겼다.

 아는 것들이 생기자 질문에 조금씩 용기를 가지게 됐고 또 다른 질문을 하기 위해 책과 신문을 펼쳤을 때, 노동자와 함께 눈물 흘리는 사람의 이야기, 인권 사각지대에서 고통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등 ‘알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전에는 쉽사리 ‘연대한다’, ‘알 수 있다’라고 말 하지 못했던 것들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목판화가 이철수 선생님과 함께 한 윤다정, 황서현 인턴활동가

 밑지는 인생을 사는 밑지는 생명들은, 내 앞에 있는 상대가 아니라 ‘나’이며 ‘우리’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됐다. 인권연대 인턴활동을 하면서 배운 인권감수성과 연대의식은 내 삶에 거름이 됐다고 확신한다.

 국장님과 간사님들을 비롯해 많은 분들을 만나면서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얼마나 많이 공부해야 되는 지를 뼈저리게 느낀 시간이었다. 내가 만나기 어려운 분들을 인권연대 인턴이라는 이름으로 인사도 나누고 좋은 말씀도 많이 들을 수 있어서 뜻 깊었다.

 이번 인턴활동은 대강의 목표만 세워두고 덩그러니 앉아있던 나에게 목표 달성을 위한 모종의 전환점이 됐다. 생각도 많이 하고 책도 많이 읽고. 교과서적인 말이지만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8주간의 소중한 경험을 반복학습을 하며 또 다른 새로운 오아시스를 찾아 떠나는 일만 남았다. 새로운 모든 것에 갈증을 느끼며 배우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로 임할 것이다.


양길모/ 인권연대 인턴활동가


 제 6기 대학생 인권학교가 지난 119일부터 21일까지 서울 남영동 인권기념관 7층 교육장에서 진행되었다. 몹시도 매서운 한파가 불어 닥친 날임에도 불구하고 40여명의 대학생들이 참가하여 인권에 대한 열의로 교육장은 활기에 넘쳤다. 대부분 개인적으로 강의를 신청하였음에도 어색한 분위기 보다는 강사들의 열띤 강의 속에 대학생들이 녹아든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강의가 끝날 때마다 인권에 대한 진지한 고민들이 담긴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3일간 진행된 대학생 인권학교에는 안수찬(한겨레21 기자), 홍세화(한겨레 기획위원), 이희수(한양대 교수),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하종강(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오창익(인권연대 사무국장)이 강사로 참여하였다. 강사들은 인권이라는 큰 주제를 자신의 전문분야에 녹여내어 강의를 진행하였다.

 안수찬 기자는 대학생들에게 삶의 이정표를 세우는 시기에서 여기 저기에 기대고자 하지 말고 단독자가 되어야 하며, 일상 속에서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들에서 다양함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하고, 혼을 토해내듯이 열정을 가져야하며, 글 쓰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해야한다고 당부하였다.

 홍세화 기획위원은 대학생들에게 스스로 사유하며 자기 형성의 자유를 갖는 자유인이 될 것을 당부하며, 특히 소박한 자유인이 되어야한다고 강조하였다. 여기서 생존조건을 위해서 자아실현을 잠시 유보할 수 있겠지만, 자유인이 되기 위한 자아실현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며 지나치게 물질적인 조건에 집착하지 말고 스스로 사유하는 자유인이 되라고 말했다.

 하종강 소장은 우리가 흔히 노동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생각하는 고루하고, 부정적인 이미지는 허구임을 대학생들에게 일깨워 주었다. 사회의 절대 다수 구성원들이 숭고한 자신의 노동을 통해 삶을 영위하는 노동자임을 인식해야 하고, 그 노동의 의미를 올바르게 인식해야한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단지 개인의 차원이 아닌 사회 구조적인 차원에서 노동의 문제를 바라볼 때 가능하다고 강조하였다.

 오창익 사무국장은 대학생들에게 인권의 의미와 그 특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기본적으로 인권은 자유권, 사회권, 평등권과 같이 나눌 수 없는 불가분의 권리이며, 유기체처럼 점차 확장하는 쪽으로 변화하는 권리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인권이 누구에게나 보장되는 보편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상대적 약자, 소수자들에게는 보다 편향되게 보장해주어야 한다. 또한 인권이라는 것은 단지 국가에서 소극적으로 최소한을 보장하면 그 의무를 면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적극적으로 보장해 주어야 하는 권리라고 말하였다.


김효인/ 인권연대 2011년 겨울 인턴

"자, 또 질문해 봐." 

 매순간 질문의 압박에 시달렸던 7주였다. 식사시간은 물론이고 뒤풀이 자리에서도 "질문"은 끊이지 않아야 했다. 생각하는 것은 묻고 답하는 과정이라고, 매순간 질문을 멈추지 말라던 국장님의 말씀은 늘 나를 긴장하게 했다. 인턴들을 위해 어렵게 시간을 내주신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 분들을 뵙고도, 용기가 없어 번번이 질문을 삼켰던 적도 많다. 말이 엉켜 질문을 잘 전달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목소리가 작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았다. 내가 가진 약점을 한껏 몰아치시는 국장님이 야속해 벌겋게 된 얼굴로 씩씩대며 밤을 지새우는 날도 있었다. "질문이 없는 것은 공부가 덜 된 것"이라는 말을 지표삼아 부지런히 공부하고 질문으로 보충하면 됐을 일인데, 왜 그리도 거창하게 생각하여 질문하기를 꺼려했는지 모를 일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미천한 지식이 드러날까 두려운 마음이 앞서 그랬던 것 같다.  

 7주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바쁜 일정을 따라가며 내가 가진 생각들이 얼마나 근거 없고 초라한 것인지 절감했다. 무식이 부끄러워 공부를 하다 보니 질문을 하는데 탄력도 붙었다. 좋지 않은 머리를 믿고 앉아있을 수 없어 항상 메모하려 했는데, 지금은 내가 가진 가장 큰 자산이 됐다. 다이어리를 펼치면, 살면서 곱씹고 지고가야 할 무겁고도 진실된 어른들의 말씀들이 고스란히 적혀있다. 어렵게 시간을 내주신 것으로도 모자라, 어떠한 질문도 마다않고 끈기 있게 답해주신 선생님들 덕분에 세상을 헤쳐 나갈 도구가 하나 더 생겼다. 

 사회 각계에서 일하시는 선배 세대와의 만남 말고도 나를 풍요롭게 한 경험들은 손에 꼽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외따로이 떨어져 냉기를 뿜고 있던 청송 교도소를 방문한 후, 재소자 인권에 대해 생각하게 됐고, 재단의 횡포로 거리에 나앉게 된 홍대청소 노동자분들의 농성장을 방문한 후 마음의 빚을 얻었다. 게다가 이번 겨울은 어찌나 추웠는지. 홍대 집회에선 한군데에 오래도록 서있는 것이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언 손으로 쓴 메모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괴발개발이었다. 농성장 안도 춥기는 마찬가지여서, 어머님들은 그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앉아 전기요 한 장에 의지해 투쟁을 이어가셨다. 어머님들의 마른 손을 보면서 방문과 응원 외에 별다르게 보탬이 될 수 없는 스스로의 처지에 답답했다. 그렇게 살을 에는 추위는 한남동 버마 대사관을 돌아 이집트 대사관을 지나 민가협 어머님들이 목요집회를 하시는 탑골공원을 휘감고 지나갔다. 이곳의 바람은 다른 곳에서 보다 더 날카로운 것 같았다.  


항상 메모하려 했는데, 지금은 내가 가진 가장 큰 자산이 됐다

 그런 가운데 늘어나는 경험치 속에서 하나 둘, 생긴 질문들이 가치를 치고 뻗어나갔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데 왜, 교도소 시설은 변하지 않나?', '지키지 않는 최저 임금법이 무슨 필요가 있나?' 등 나날이 그 개수를 더해가는 질문 속에서 모든 제약조건의 핵심은 돈이며, 무관심에 있다는 사실을 느낄수록 마음이 번잡했다. 제대로 눈을 뜨고 보기 시작했는데, 한국사회가 이토록 궤도를 벗어나 있는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앉아서 책을 읽는 것만으로 내가 이 같은 경험들을 할 수 있었을까. 알면 알수록 공평하지도 쉽지도 않은 세상이라 여겨졌지만, 그런 속에서도 더 배울 것이 많다고, 오만한 소리하지 말라고 나를 다그쳐 준 경험이 있었으니, 바로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후배 세대들이 올바른 관점을 가질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 부조리에 맞서 외로운 투쟁을 이어오고 있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고 느낀 것은, "사회를 걱정하고 바로잡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구나"라는 것이었다. 문제가 있는 현실에 개탄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인권연대'를 거점삼아 사회를 바꿔보려 고군분투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거점이 된 인권연대 사람들을 만난 것이 내 인생의 큰 수확이라 여겨졌다.  

 2월 11일. 7주간의 인턴 생활을 마감하고, 살짝 취해 불그스레한 뺨을 한 채 지하철 안에서 다이어리를 펼쳤다.  

 "천천히, 여유 있게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기를"

 겉만 보며 굽어진 궤도를 돌 뻔 한 나를, 끊임없이 질문을 안고 고민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호통치고 가르쳐 주신 인권연대 사람들의 글귀다. '자신을 사랑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도 질문하라고 재촉하셨구나 싶어 가슴이 벅찼다. '이젠 애정으로 야단쳐 줄 누군가 없이 홀로 잘잘못을 가려내고 고민하며 살아가야겠지.' 속으로 그런 마음이 들어 헛헛했다. 훗날 이번 겨울은 내게 어떤 의미로 남을까. 고민을 안고 질문을 하는 과정을 게을리 하지 말자는 다짐으로 나는 다시 봄을 준비한다


‘제1회 종교자유인권상’ 수여식 열려

김효인/ 인권연대 인턴활동가

 지난 달 27일, 서울 장충동 우리함께 빌딩 대교육장에서 인권연대가 마련한 ‘제1회 종교자유인권상 시상식’이 열렸다. 인터넷 뉴스 매체 <가톨릭 뉴스 지금 여기>가 종교자유인권상을, 류상태 목사 부부(류상태, 정순훈)가 특별상을 수상했다. 종교자유인권상은 서울 대광고 재학 시절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다 퇴학당한 강의석 씨가 학교로부터 받은 손해배상금을 인권연대에 기부함에 따라 제정된 상이다.   

 시상에 앞서 김녕 교수(서강대)는 “모든 사람들이 다른 종교에 대해서 예를 갖추고, 종교계가 연대를 통해 생각의 틀을 바꾸는 힘으로 거듭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기남 처장(종교자유정책연구원)은 축사에서 “이번 기회를 통해 종교 인권과 정교분리 강화, 나아가 선한 공동체들을 만드는 것에 우리가 더 큰 역할을 하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제1회 종교자유인권상을 수상한 인터넷 뉴스 매체 "가톨릭 뉴스 지금 여기"의 한상봉 편집국장

 ‘제1회 종교자유인권상’을 받은 <지금 여기>의 한상봉 편집국장은 “모든 종교의 목표는 자유를 얻는데 있다. 그리고 종교는 모든 인간들에게 자유를 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교단 내에 소통이 이루어지면, 우리가 말하는 종교의 자유와 인권이 합치될 것” 이라고 덧붙였다. <지금 여기>는 가톨릭계의 대안언론으로 “교회에 약이 되고 세상에 밥이 된다.”는 창간 정신에 걸맞게 가톨릭 교단 내의 다양한 아픈 문제를 용감하게 지적한다는 평을 듣고 있다.

 특별상을 받은 류상태 목사는 “1회 수상자임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고, 부인 정순훈씨는 “남편을 더 잘 내조하라고 주는 상 같다.”며 기뻐했다. 류 목사는 강의석이 퇴학당한 데 책임을 느껴 학교를 떠났다.


특별상을 수상한 류상태 목사 부부(류상태, 정순훈)

 종교자유인권상 심사위원장인 이찬수 교수(강남대)는 “이것은 어쩌면 작고 조촐한 시작일지 모르나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아픔이나 갈등을 해소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며 소회를 밝혔다.


정희진/ 인권연대 2011년 겨울 인턴

 2010년 12월, 컴퓨터를 하다가 우연히 인권연대 인턴 모집 공고를 보았다. 고민이 시작되었다. CGPA나 총 이수학점 모두 여유롭지 않아서 계절 학기를 신청해놓았기 때문이다. 항상 이성이 감성을 압도하고, 모험은 하지 않는 성격임에도 이번에는 수강취소를 하러 학사지원팀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선택을 했다. 

 인권변호사가 되고 싶었지만 학교에서 살고, 학교에서 공부하고, 학교 주변에서 놀았기 때문에 보고 배울 사람이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또한 곧 사학년이라고 말하고 다녀야 할 텐데 그 타이틀에 걸맞은 의식수준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이대로 밀고 나갈 수만은 없었다. 크게 이 두 가지가 인권연대 인턴을 지원한 동기였다.

 운이 좋게도 인턴으로 뽑혔다. 많이 부족한 나를 면접에서 보시고는 “얘는 좀 가르쳐야겠다”는 의무감이 드셨던 것 같다. 초반에 인권연대의 분위기를 조금 익히고 나니, 내가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7주 후의 성과가 크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꼭 얻어갈 것을 몇 개 머릿속에 그렸다. 대략 커뮤니케이션 능력, 사회를 보는 눈, 인권을 생각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다.

 과연 매일같이 인권연대와 연을 맺고 있는 인사들을 만났고, 국장님과 그 분들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가 점점 많이, 점점 깊게 보이기 시작했다. 또 그런 자리들이 모두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기를 수 있는 장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6주(7주 중에 설 연휴 1주 제외) 라는 짧은 시간에도 평생 하지 못할 많은 체험을 했다.

 아무래도 가장 규모가 큰 체험은 ‘청송교도소’ 탐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교도소 안에 들어가는 것은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일인데, 교도소 중에서도 교도소라 할 수 있는 그 유명한 청송교도소를 가 보게 되었다. 형법교수님들도 쉽게 못 간다는 그곳에 가서 독거방까지 보고 나니, 교정 시설에 대한 관심이 우리사회에 부족함을 느꼈고, 왜 오창익 국장님께서 교정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시는 가를 알 수 있었다. 

 평화인문학 프로그램을 통해서 청송 외에 영등포 교도소에도 가 보았다. 사실 교도관에 대한 편견도 있었고, 많은 재소자들과 같이 수업을 듣는다 하니 긴장도 되었었다. 그런데 막상 하루 종일 그분들과 한 공간에 모여 있다 보니, “내가 이상한 영화들 때문에 잘못된 인식을 많이 가지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재소자들도, 교도관들도 모두 나와 같은 사람임을 느꼈다.  

 어제 학교 게시판에서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회가 열린다는 알림 글을 봤다. 재학생들은 수강료가 3만원이었는데, 세 분의 강사 중에 두 분이 내가 인턴 활동을 하면서 수업을 들었던 분들이었다. 그 때는 다른 대학생들이나 학교선생님들의 수업에 무임승차해서 같이 강의 듣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 강사님들의 수업을 따로 들으려면 한 사람당 만원이라는 거액의 수업료를 내고 찾아 가야한다는 것을 직접 보고나니, 그동안 인턴활동의 일부로 15, 16기 교사연수와 대학생 인권학교까지 들을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큰 복이었는가를 실감했다. 학교에서는 거의 들을 수 없었던 가치 있는 강의들을 실컷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준 인권연대에 감사드린다.  


대학생 인권학교 강의를 경청하고 있는 11기 인턴 활동가들
김효인, 정희진, 양길모, 남두희(앞에서부터)

 그 외에도 홍대 청소노동자 기자회견 취재, 한겨레신문사 견학, 민가협 목요집회 참석, 프리버마캠페인 등 셀 수 없이 많은 경험들을 했다. 이제는 학년만 올라간다는 생각도 덜 들고, 우리 사회에 대해 관심이 부족하고 무지했던 점에 대한 죄책감도 조금 줄어든 기분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육체적 피로에 굴해서 그 날 그날의 경험을 확장, 흡수 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지나친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스피치도 잘하고 싶어서 국장님께서 알려주신 방법을 토대로 조금씩 시도는 했지만,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여유가 부족해서 연습할 수 있는 기회들을 충분히 활용 못한 것이 후회된다. 하지만 분명 지금의 나는 7주전의 나와는 비교할 수가 없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우리들에게 더 좋은 배움의 기회를 줄 수 있을까 고민하시고, 인턴들이 마음이 흐트러져서 주는 것을 다 받아가지 못할까 하는 걱정에 괜히 쓴소리를 해주시느라 힘드셨을 국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리고 그 많은 사무실 업무를 두 분이서 맡아 하시느라 바쁘셨을 텐데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지도해주신 간사님들께도 감사드린다. 일주일에 절반정도는 우리를 보내고도 남아서 늦게까지 일을 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먼저 오셔서 반겨주시는 간사님을 보면 피곤함을 잊곤 했었다.  

 역동적이었던 인턴기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비록 7주라는 길지 않은 기간 동안의 일탈이었지만, 잔잔한 나의 일상으로 돌아가더라도 나의 심장은 7주 동안의 그 빨랐던 박동을 잊지 않을 것이다.


인턴 과정을 마치며

임아연/ 인권연대 2010년 여름 인턴

 “면접 보러 오라”는 전화에 엄마랑 떡볶이를 먹다가 소리를 질렀더랬다. 하이힐을 신고 출근을 했다가 하루 종일 돌아다닌 통에 발에 물집이 잡혔더랬다. 퉁퉁 부은 발을 주무르며 또 언제, 어느 곳에 가서 누구를 만날지 마냥 설레던 첫 날 이었다. 하지만 처음이라는 그 기분 좋은 떨림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던 것 같다. 매일 아침이 피곤했고 주말이 자꾸 기다려졌다. 지원서를 다시 읽었다. 그게 마지막 출근 날이었다.

 사람들은 “왜 인권연대 인턴을 지원했느냐”고 물었다. 상투적이긴 하지만 나는 정말로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10만 명을 먹여 살리는 한 명의 천재’보단 조금씩 사회를 움직여 가는 ‘10만 명’을 만나고 싶었다. 나는 사회가 굴러가는 것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궁금했다. 인권연대에서 일하는 동안 다행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얘기 나눌 많은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니 용기를 내서 그들에게 가깝게 다가가지 못한 게 아쉽기만 하다. 또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절실한 이들에게 항상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든 적도 많다. “마음으로나마 함께 할 게요”라는 가벼운 약속만 뱉어내는 모습에 자괴감이 들었다. 특히 대사관 앞 땡볕에서 버마의 민주화를 외치던 이들에게 그랬고, 성미산을 재벌 대학로부터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그랬다. 나의 역할을 고민했다. 내 자리는 어디일까 생각했다.

 평생 ‘글 밥’을 먹고 싶다 생각했는데 내 행색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배움엔 게을렀고 경험도 없었다. 모진 소릴 견뎌 낼 만큼 마음이 단단하지도 못했다. 인턴을 하는 동안 그걸 깨닫고는 많이 위축돼 속상하기도 했다.


여름 방학동안 함께 한 인턴 활동가들(김민아, 오명원, 임아연, 한빛나)과 사무국 식구들

 마지막 날 오창익 국장님이 말했다. “꿈을 기자나 대학원 가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갖지 말라”고, “그렇게 안 되면 실패한 인간이 되어버릴 테니, 겨우 그 정도 꿈을 꾸면서 너희 자신을 하찮게 여기지 말라”고 했다. 집으로 내려가는 길에 그 말을 곱씹었다. 불현듯 고병헌 성공회대 교수님이 “존재만으로 힘이 되고 위안이 되는 사람이 있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기차 안에서 왈칵 눈물을 쏟았다.

 생각해보면 인권연대에서 인턴을 하며 만난 많은 사람들은 그 존재 자체가 힘이 되는 이들이었다. 목소리 없는 자들의 소릴 대신 말하는 변호사들이 그랬고 사회 어두운 구석을 들춰내 빛을 쬐게 하는 기자들이 그랬다. 또 알아주는 이 없어도 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힘쓰는 활동가들이 그랬다. 이 밖에도 자신의 자리에서 서로 연대하는 많은 ‘벗’들이 함께 있었다.

 흰 바탕에 까만 커서가 껌뻑이는 모습을 두고 한참을 생각했다. 7주간의 인턴 생활을 종이 한 장에 채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짧은 시간동안 워낙 많은 일을 겪고,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니, 각각의 현장에서 느낀 생각들이 뒤엉켜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다만 확실한 건 우리의 존재가, 그리고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힘과 위안을 줄 수 있을 거란 믿음이다. 이것이 ‘사람’을 만나고 돌아 온 길이 기쁜 이유다.

2010년 겨울 교사인권강좌 후기> 인권과 교육의 아름다운 동행

김희윤/ 인권연대 인턴활동가

 100년만의 폭설로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은 새해, 그 매서운 바람을 헤치고 좀 더 나은 2010년을 바라는 교사들이 모였다. 1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간 남영동 인권기념관(前 대공분실)에서 ‘인권과 교육’이라는 주제로 이루어진 교사인권연수에서는 ‘인권’을 실천하기 위한 의욕으로 넘치는 교사들과 역량 있는 강사들과의 만남을 통해 배우고, 그 배움을 실천하자는 열기로 뜨거웠다.  

 첫 강의는 성공회대 사회과학부에 재직 중인 조효제 교수의 강의로 시작되었다. 조 교수는 강의에 앞서 수강생들에게 간단한 소개와 함께 강의를 수강하게 된 동기에 대해 물었다. ‘학생들이 지켜줘야 할 인권보다 때려줘야 할 살덩이로 보여서...’,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상태에서 에너지를 얻기 위해...’라고 답하여 대부분의 교사들은 이번 강의에서 재충전에 대한 기대를 나타내었다. 한분씩 소개를 마친 후 강의가 시작되었다. 조 교수는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어떤 정치현실에 처해있나.’, ‘인권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교사도 인간인데 나의 인권은 어떻게 지켜야하나.’ 라는 세 가지 질문을 던져 한국사회에 팽배해 있는 물신주의와 공공정치의 부재 등의 현실을 겉감과 안감이라는 비유로 쉽게 설명해주었다. 

 두 번째로 고병권 수유+너머 연구원의 강의가 이어졌다. 고 연구원은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을 던지며 일반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는 스스로 판단 이전에 선 판단이 되어있기 때문에 ‘생각 한다’의 정의에 어긋난다고 하였다. 여기서 선 판단의 의미는 습관화된 정신작용, 습성, 습속 등 여러 가지 단어로 대체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하기 위해’서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을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첫날의 강의는 마무리 되었고, 지원자에 한해 남영동 대공분실 견학이 이루어졌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의 안내로 대공분실의 분절되어있는 구조와 박종철 열사가 고문 받았던 장소를 보며 왜 대공분실이 ‘인간을 파괴하는 건축물’인지 소름이 끼치도록 느낄 수 있었다.  

 연수 두 번째 날의 첫 강의는 한양대 문화인류학과에 재직 중인 이희수 교수가 진행하였다. 국내 최고의 중동문화 전문가답게 이번 강의에서도 역시 중동문화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던 편견을 깨주었다. 찬란한 문명과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한류에 열광하고 있는 이슬람을 악의 온상이고 테러지원국이며 잠재적 테러 분자로 여기고 있었던, 우리의 매체에 의해 걸러진 시각에 대해 비판하고 세계를 보는 눈과 교육에 대해 역설하였다. 특히 교사들에게 이슬람의 문화나 역사를 잘못 기술하고 있는 교과서들에 대한 시정을 강조하고, 또한 13억 이상의 거대한 이슬람 공동체를 우리의 가까운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였다.  

 두 번째 강의는 현직 교사인 마산 내서여고 이필우 선생이 맡았다. 이필우 선생은 ‘학생인권교육 실천사례’라는 주제로 자신이 직접 현장에서 겪고 시도해보았던 사례를 중심으로 강의하였다. 이는 이론과 실제의 괴리감을 느끼고 있었던 현직 교사들의 고충을 어느 정도 해소해주었다. 그 방법으로는 학생 자치 기구에 많은 권리와 그에 따른 책임을 부여하는 것으로 간부수련회나 급식문제, 두발자유화 등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여 학생들의 자존감을 높이는데 기여하였고 이는 인권의식의 성장으로 발전되었다.

 세 번째 강의는 ‘인권에 대한 네 가지 의문’이라는 주제로 숙명여대 법학부의 홍성수 교수가 함께 하였다. 인권에 대한 개념이 잘 확립되어 있지 않는 교사들에게 ‘왜 나쁜 사람들(조두순 사건 등)의 인권만 옹호 하는가.’, ‘왜 소수자의 권리만을 생각 하는가.’, ‘표현의 자유와 한계는 어디까지 지켜져야 하나.’, ‘인권은 언제나 다른 가치보다 우위에 있는 절대적 가치인가.’라는 네 가지 질문에 대해 역사적이고 다양한, 또 흥미로운 판례를 제시하여 평소에 가지고 있던 인권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 

 마지막 강의는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이 ‘인권과 시민의식’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즉 한국인의 의식구조 형성 과정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은 물신에 대한 숭배, 존재배반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의식형성은 지배세력에 의해 주입된다. 한국에서의 사회화 과정은 우리에게 비판의식을 주지 않고, 깨어있는 소수 역시 제도교육이 아닌 우연적 계기에 기인한다. 이러한 비주체성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없는 정도의 생활수준에 머무르는 사람들이나, 현재는 이에 속하지 않더라도 장차 낙오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구조를 바꾸려는 의지보다 자기만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하였다. 

 3일간의 강의는 <외박>이라는 영화를 함께 보며 마무리되었다. 이 영화는 홈에버 사태 때 김미례 감독이 여성노동자들과 함께하며 직접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었다. 우리의 평범한 어머니들이 ‘생존’을 위해 시작한 외박은 많은 이들의 눈물샘을 자극하였다. 

 인권연대는 매년 여름 방학에 1회, 겨울 방학에 2회에 걸쳐 교사연수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이번 제 12기 교사 인권 연수는 40여명 선생님들의 진지하고 무게 있는 모습으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대공분실이라는 장소만큼이나 뜻 깊은 연수가 되었다. 우리나라 사교육비 부담은 세계최고 수준이며 OECD평균의 네 배라고 한다. 이번 ‘교육희망, 인권이 해답이다!’의 연수를 계기로 새해에는 인권과 아름다운 동행을 하는 교사들이 교육의 희망을 만들어 주길 바란다.


인권연대 인턴 / 이영주

  인권연대 제3기 대학생 인권캠프에서 '대학생들과 함께 생각해보는 한국 사회 노동문제'를 주제로 하는 하종강(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선생님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입소문을 통해 너무도 기대하고 있던 강의였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듣고, 궁금했던 점도 질문하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노동하는 인간, 인간적인 노동…….

  하종강 선생님께서는 “노동자라는 단어 말고도 같은 뜻의 근로자라는 단어가 있는데 왜 굳이 노동자라는 단어를 선택해서 쓰느냐”는 질문을 받으셨고, “노동자와 근로자는 국어사전만 찾아봐도 그 차이를 금방 알 수 있다”는 답변을 하셨다고 했다. 강의록을 정리하면서 문득 그 기억이 나 검색을 해보았지만 큰 차이는 느낄 수 없었다.

☞ 노동자 (勞動者) [명사]
1 노동력을 제공하고 얻은 임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 법 형식상으로는 자본가와 대등한 입장에서 노동 계약을 맺으며, 경제적으로는 생산 수단을 일절 가지는 일 없이 자기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삼는다. ≒노공(勞工).
  : 노동자들은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 그는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싸웠다.
2 육체노동을 하여 그 임금으로 살아가는 사람.
  : 일용 노동자
  : 계속적인 비에 공사판의 노동자들은 며칠째 일을 못하고 있다.
  : 인텔리가 아니 되었으면 차라리 노동자가 되었을 것인데 인텔리인지라 그 속에는 들어갔다가도 도로 나오는     것이 구십구 퍼센트다.≪채만식, 레디메이드 인생≫

☞ 근로자 勤勞者 [명사]  발음〔글ː--〕
 근로에 의한 소득으로 생활을 하는 사람.
  : 경기가 점차 회복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근로자의 임금 인상 문제가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 이번 협상은 회사 측이 근로자들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기로 함에 따라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노동력으로 임금을 받아 생활을 유지하는 것'과 '근로에 의한 소득으로 생활을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답을 찾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고민하고 있는 나와는 달리 의외로 빠른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근로자가 노동자보다 더 큰 개념이다, 노동은 육체노동이고 근로는 육체노동에 정신노동도 포함하는 것이다, 노동 개념에 시간을 더하면 근로가 된다, 노동에 대한 반사적 거부감 때문에 근로라는 말을 만들어내지 않았겠느냐 등 다양한 대답들을 들었다. 아르바이트 할 때나 들여다보았던 근로기준법 상의 근로자와 사용자의 정의도 찾아보고 옥편이나 포털 백과사전을 찾아보기도 하였지만 크게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없었다. 그러다 <전국환경미화원연합(http://cafe.naver.com/kjsch)> 카페의 게시판에서 “근로자의날 폐지하고 노동절로 바꿔야 한다”는 제목의 글을 읽게 되었다. 과거에는 노동절이었지만 근로자의날제정에관한법률이 제정되면서 날짜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나보다 먼저, 같은 의문을 가진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다. 근로부가 아닌 노동부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노동조합이라고는 하지만 근로조합이라는 말은 쓰지 않고, 노사협의라는 말은 쓰지만 근사합의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그 글에 의하면 근로자란 부지런할 근(勤)에 일할 노(勞)를 써,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 즉 사용자와의 상하관계를 염두에 두어 부지런히 일하느라 고생했으니 하루 쉬어라 하는 정부와 재벌들의 선심성 의도가 담긴 단어라고 했다. 반면에 노동자라 함은 노동력을 상품으로 사용자에게 대등하게 계약을 체결하여 생산의 주체로서 당당한 사회의 구성원임을 담고 있다고 했다. 결론은 '주는 대로 놀 것이냐, 당당하게 권리를 찾을 것이냐'에 대해 근로자의 날을 노동절로 바꿔나가는 작은 실천부터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담긴 글이었다. 절차나 결론이야 어찌되었든,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작은 것에서부터 실천하고 싸워나가고 있는데 나는 이토록 기본적인 단어의 뜻조차 제대로 모르고 살아왔으니 정말 한심하고도 부끄러웠다. 이렇게 하루하루 모르는 것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채워나가는 미래의 완성된 나를 상상하면서 다이어리 한켠에 근로자와 노동자의 차이에 대해 간략히 적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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