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대안’이 되는 공립대안학교의 설립 확대해야 - 전국완/ 양강중학교 교사

전국완/ 양강중학교 교사

 요즈음 2학기 중간고사가 코앞인데도 수업분위기는 그다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어수선한 수업을 마치고 머리뒤꼭지가 뻐근해져서 교실문을 나서면 한참동안 우울해진다. 수업을 좀 더 재미있게, 입체적으로 준비했어야 했는데……. 여느 선생님처럼 아이들을 확 잡는 카리스마가 내게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강북의 중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작은 일에도 까르르 윗몸을 젖히며 웃어젖히곤 하는 그 친구의 웃음소리에 위로받고 싶었다. 

 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간까지 수업준비를 하고 있던 그 친구의 목소리에도 피곤이 묻어 있었다. 도무지 교사의 지도가 먹히지 않는 한 아이 때문이었다. 교과공부는 작파한 지 오래고, 금품 갈취에 폭행까지 일삼아서 수차례의 선도위원회와 폭력자치위원회를 통해 사회봉사에 등교정지까지 받았는데도 나아지지 않아서 결국 다른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전출’ 결정이 내려졌다고 한다. 이에 어머니는 교무실에 찾아 와서 연일 무릎을 꿇고 울면서 용서를 빌고 있다고 하고……. 담임교사인 친구의 고민은 다른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전출’은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이 아이를 위한 근본적인 처방은 되기 어려울 거라는 데 있다. 생계부담에 이미 지쳐있는 홀어머니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거칠어져 있는 이 학생이 다른 학교에 간다고 해서 스스로 개과천선해서 자기 몫의 삶을 찾아 살아갈 수 있을까?  

 얼마 전 본교에서는 이런 사건도 있었다. 반복되는 비행으로 아이를 인근학교에 강제전출을 시켰다. 그런데 결국 그 곳에서도 전혀 나아지지 않아 본교로 돌려보내진 것이다. 그리고는 학교와 어른들을 조롱이나 하듯 말썽을 그치지 않다가, 끝내는 학교를 뛰쳐나갔으며, 집에도 들어오지 않고 있다.

 중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기 때문에 퇴학이 없다. 결국 학교가 끌어안고 가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당장 다른 학생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경우에 일단 다른 곳으로 보낼 수밖에 없고, 보내져서 적응하면 다행이고 아니면 아예 가출을 하거나 학교를 그만두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리고 그나마 학교 울타리를 벗어난 아이들은 그야말로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우리 사회 사각지대에 방치된 채 그야말로 비행청소년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부적응학생의 문제는 물론 예전에도 있었고,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사회 전체가 극심한 경쟁시스템으로 돌아가고, 경제적인 여건으로 많은 것이 결정되는 세상이다 보니, 가족의 해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고, 이로 인한 ‘가족해체형 부적응아’들이 증가하고 있는 점이다. 기본적인 삶 자체가 흔들리게 되면서 따라오는 이들의 부적응은 잠시 질풍노도기를 맞아 성장통처럼 겪는 방황이 아니라 언제 한 번 피어보지도 못한 열 몇 살짜리 아이들을 되돌아갈 수 없는 나락으로 내모는 심각한 경우들이 많다. 지역교육청별로 Wee센터를 운영하고 있고, 학교마다 상담인턴교사를 배치하고는 있지만 역부족이다.

사진 출처 - 한겨레21

 그리고 비단 이런 극단적인 사안만이 아니더라도, 학력위주의 사회에서 교과 성적으로 줄을 세워야 하는 학교교육과정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아이들은 현재 심각한 부적응을 앓고 있다.

 친구가 고민 끝에 도달한 곳은 ‘대안학교’이다. 실제로 친구는 앞에서 언급한 그 학생의 전출이 결정되면서 일반학교로의 전학은 그에게 같은 실패를 안겨줄 게 뻔하다는 생각에 대안학교를 알아보았다고 한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입학 가능한 대안학교가 있었지만 사립학교인 그 곳의 월 50만 원이 넘는 등록금이 또 문제였다.

 일반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해 뛰쳐나오는 아이들을 끌어안는다는 취지로 설립되기 시작한  대안학교는 현재 전국적으로 30여 개교(중·고등학교 과정)이고, 이 중 9개 정도가 공립이다. 다만, 많은 사립대안학교들이 설립 초기와는 다르게 고액의 등록금을 받는 ‘귀족학교’ 가 되어가고 있고, 또한 ‘입시 대비’에 치중하면서 본래의 설립 취지와 다르게 변질되고 있다는 지적들이 있다.

 결국 위 사례에 해당하는 부적응 학생들을 위한 진짜 ‘대안’은 ‘공립 대안학교’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많은 공립대안학교(중학교)들이 긍정적인 결실을 보이면서 지원자가 늘어나 입학경쟁률이 해마다 높아가고 있다고 한다. 보다 많은 공립대안학교의 설립이 요구되는 것이다. 대안학교들이 긍정적인 효과를 내고 있는 이유는 일반학교와는 다른 소질·적성 계발교육, 체험활동 위주의 교육프로그램 등 교육과정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은 ‘작은 학교’라는 조건일 것이다. 아이들 개개인이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자존감을 되찾으면서 잃어버렸던 자신의 꿈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권영길 의원의 보고서(2010년)에 따르면, 정부와 지자체의 특목고 예산지원이 일반계 고등학교의 3배가 넘는다고 한다. 정작 각별한 지원이 필요한 부적응학생들은 외면한 채 특별한 영재들에게만 지원을 쏟아 붓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교육의 기회균등의 정신에도 위배되는 부당한 차별이다. 또한 요즈음 우리 사회 화두로 떠오른 ‘복지’의 차원에서도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문제이다.

 부적응의 문제는 당사자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악화될 경우 심각한 사회문제와 갈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정부의 적극적인 해결의지가 필요하다 할 것이다. 사회갈등의 문제를 예방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상위 5%에 해당하는 부유층 학생들을 위한 특목고 등 귀족학교에 쏟아 붓는 만큼의 예산을 하위 5%에 해당하는 부적응학생들을 위해서도 반드시 지원해야 할 것이다.

 전국 곳곳에 다양하고 창의적인 공립대안학교들이 많이 세워져서, 가족해체나 과중한 교과공부에 힘들어하는 많은 학생들이 낙오자가 아닌, 우리 사회 건강한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는 날이 빨리 오길 바란다.


'도가니 사태' 교훈.."외양간 제대로 고치자"


굳게 닫힌 인화학교 (광주=연합뉴스) 형민우 기자 = 광주 인화학교 성폭력 사건을 토대로 만든 영화 `도가니'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28일 광주 광산구 삼거동 인화학교 정문이 바케이드가 쳐진 채 취재진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2011.9.28 mimu21@yna.co.kr

법률·제도.사회 문화적 장치 마련 시급

장애우에 대한 성숙한 인식 전환 필요

(전국종합=연합뉴스) 인화학교 성폭력 사건을 다룬 영화 '도가니'의 열풍이 온 나라를 분노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사회의 치부들이 도가니 속에서 들끓는 상태를 상징화해 붙여졌다는 영화 제목은 이제 각계의 과열된 관심과 반응이 뒤섞인 상태에 적용해도 될 듯한 모양새다.

수년간 관심을 촉구해 온 '인화학교 성폭력 대책위원회'가 "지나친 관심은 피해자들에 대한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며 자제를 요청할 정도다.

"일회성 관심보다는 차분하고 진지한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대책위의 당부처럼 이번 사건을 유사 사례의 재발을 막는 법률, 제도, 사회문화적 장치를 늦게나마 마련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장애우 성범죄 형량 강화를" = 장애우를 상대로 한 성범죄를 근절하려면 우선 형량을 대폭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해당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폐지 등 다른 범죄와 차별해 엄격히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피해 입증책임을 장애가 있는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규정이나 피해자들이 범죄 피해 당시 '항거불능' 상태였느냐를 중시하는 관행도 손봐야 하는 것으로 지적됐다.

대전 YWCA 김지찬 상담사는 29일 "장애인 관련 성폭력은 '항거불능 상태'였는지 여부가 재판 과정에서 굉장히 큰 논란이 되곤 해 이 조항을 없애달라는 요구가 있지만 반영되지 않는 것으로 안다"며 "아동 성폭행에 대한 처벌은 강화됐지만, 그동안 장애인 성폭력은 크게 이슈가 되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실제 지난해 4월 아동ㆍ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 개정돼 청소년 성폭행이 비친고죄로 바뀌고 같은 해 7월에는 양형기준도 높아졌지만 일반 장애우에 적용되는 특별조항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인천대 법학과 백원기 교수는 "우리나라는 아동 성범죄 사범에 대한 형량이 낮고 온정주의적 양형이 많은데 법을 개정해서라도 이를 바꾸고, 특히 장애 아동 성범죄에서는 공소시효 적용을 배제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장애우 시설을 세상 밖으로" = 장애우 시설의 폐쇄성은 시급히 개선돼야 할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인화학교처럼 조직적으로 은폐가 시도될 경우 피해가 반복되고 또 다른 싸움으로 확산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정부나 공공기관의 장애우 관련 시설, 법인에 대한 적극적인 감시 체제와 함께 성폭력 상담소 등 외부 관계망 의무화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경기복지재단 신현호 팀장은 "오래전부터 이런 일들이 만연한 것은 족벌 운영체제의 영향이 크다"며 "가족끼리 이사장, 총무직을 나눠 먹으면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래에서 알 수 없고,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을 위에서 아는 것이 불가능한 만큼 학교 등이 시민에게 개방돼 견제되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장애우 스스로 피해를 예방하려면 교육이 필요한데도 그나마 큰 시설만 1년에 1~2회 외부 강사를 초청해 성폭력 예방교육을 할 뿐 열악한 시설은 관련 교육도 전무한 실정이다.

인화학교 성폭력대책위원회가 ,인화학교 명칭 변경 반대(자료사진)

기숙학교 등 장애가 있는 학생들을 교육하는 학교에는 감시단을 붙여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는 "신고할 인지능력이 없는 학생들은 누군가의 관리와 감시가 필요한데 부모만으로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며 "감시감독 기능을 하는 외부 위원회 등 지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장애우도 똑같은 사람" = 도가니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은 일반 시민과 네티즌이지만 실상 장애우에 대한 벽을 쌓는 이들도 그들이다. 장애우의 입장에서는 병주고 약주는 셈이다.

장애우 시설 대부분은 '혐오시설'을 반대하는 주민들 때문에 외진 곳에 있다.

김민문정 고양 여성민우회 대표는 "앞으로는 장애인 시설을 혐오시설이라고 기피하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따가운 시선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시민의식도 성숙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도나 규정을 바꾸는 것보다 시급한 것은 장애우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자 이에 대한 의지라는 지적도 나왔다.

인권연대 오창익 국장은 "인화학교 문제에는 법이나 제도의 미비점도 있겠지만 훨씬 중요한 것은 책임있는 기관이 적절한 역할을 안했다는 것"이라며 "경찰, 법원, 교육청이 제 역할을 잘 했으면 문제가 달라졌다. 책임있는 사람들이 법과 제도 뒤에 숨어 있지 말고 밖으로 나와야 한다"고 꼬집었다.

장애우에 대한 인식과 관련, 인터넷에 오른 한 네티즌의 다음 댓글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장애인은 안쓰럽고, 착하고, 선량한 약자라는 생각도 어쩌면 편견일 수 있다. 장애인들 중에도 성자, 도둑이 있을 수 있고 이른바 '소심남', '엄친딸', '사기꾼'도 다 있다. 그들은 진짜 똑같은 사람이다"

(김채현 우영식 김수진 최정인 손상원 기자)

sangwon700@yna.co.kr

삼척경찰 인권경찰 노력



【삼척=뉴시스】김경목 기자 =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이 20일 강원 삼척경찰서에서 인권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사진=삼척경찰서 제공)

노동자로 살기 좋은 나라(김창남 위원)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8월, 성공회대학교 교수들이 서화전을 열었다. ‘미등록학생 장학금 마련을 위한 성공회대 교수 서화전, 아름다운 동행‘이란 타이틀이 붙은 전시회였다. 나 역시 이 행사 준비 과정에 참여했고 작품도 몇 점 출품했는데 마침 교수 서예모임 회장을 맡고 있다 보니 언론사들과 인터뷰할 일이 많았다. 많은 기자들이 인터뷰 중에 공통적으로 했던 질문이, “교수님들이 학생들 등록금 문제 해결을 위해 이 행사를 기획하신 건가요?”하는 거였다.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공연히 울컥 해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곤 했다. “아니오. 등록금 문제가 이런 식으로 해결될 수는 없지요. 우리는 그저 교수들도 학생들의 고충에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도대체 등록금 문제가 이런 전시회 몇 번 해서 만든 장학금으로 어떻게 ’해결‘될 수 있단 말인가.


지난 8월 24일에 진행된 장학금마련 서화전 ‘미등록학생 장학금 마련을 위한 성공회대학교 교수 서화전
사진 출처 - 한겨레

 한국의 대학 등록금이 전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높은 수준이란 건 잘 알려져 있다. 경제 수준이나 장학금 혜택 수준 같은 걸 감안하면 사실상 세계 최고의 등록금이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의 대학교육이 기본적으로 사립학교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전체 대학에서 사립대학의 비율이 80%가 넘는다. 다시 말하면 대학교육이 국가적 차원의 백년대계가 아니라 사적인 영리를 위한 사업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대학별 장학금으로 등록금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사학 집단이 단지 대학 설립 시에 돈을 냈다는 이유 하나로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 돈을 빼돌려도 건드릴 수 없는 현실에서 등록금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문제는 그 뿐이 아니다. 한국 대학교육 문제의 핵심에는 강고하게 유지되고 있는 대학 서열구조가 있다. 서열 구조의 상층부에 자리 잡은 대학들은 천문학적인 적립금을 쌓아두고도 등록금 올리기에 주저함이 없다. 등록금이 아무리 비싸도 들어올 학생들은 줄을 선다는 배짱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의 대학입시 판은 돈 놓고 돈 먹는 사교육 경쟁의 장이 된지 오래다. 사교육에 돈을 많이 쓴 학생들이 높은 서열의 대학에 들어가는 구조다 보니 대체로 서열 구조의 상층에 자리 잡은 대학에 경제 수준이 비교적 높은 계층의 학생들이 들어간다. 그러니 그런 대학일수록 등록금 문제에 대한 학생들의 문제의식도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다.

 대학 등록금 문제는 단순히 장학금을 확충하거나 정부 지원을 늘리는 차원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기본적으로는 교육이 가진 공공성을 어떻게 회복하는가의 문제다. 마땅히 학생들이 내야하지만 너무 비싸니까 장학금을 늘리고 정부 재정을 확대해서 반값으로 줄여준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교육을 받는 건 시민의 정당한 권리이고 그것을 재정적으로 책임지는 건 국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대학등록금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른바 수익자 부담 원칙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을 거꾸로 생각해 보자. 시민들이 대학을 통해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게 된다면 그 혜택은 결국 국가가 보는 것이다. 등록금 부담은 국가의 시혜가 아니라 의무라는 말이다.

 등록금 문제 해결을 위해, 또 대학의 바람직한 구조 조정을 위해 당장 어떤 식의 정책이 필요한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할 능력은 없지만, 다 아는 이야기 한 가지는 분명하게 환기시키고 싶다. 모든 사람이 대학에 가야만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사고가 만연하게 된 구조야 말로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등록금 문제는 단순히 대학교육 차원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최근 등록금 마련을 위해 한진중공업 등의 현장에서 용역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들의 사례에서 보듯 등록금 문제는 비정규직을 비롯한 노동 일반의 문제와 직접 연관되어 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아니라 ‘노동자로 살기 좋은 나라’가 되지 못하는 한 대학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교사를 우롱하는 교권조례 유감 - 허창영/ 전남대 공익인권법센터 연구원, 전임 간사

허창영/ 전남대 공익인권법센터 연구원, 전임 간사

 최근 서울시교육청이 학생인권조례 초안을 공개하면서 다시금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악의적인 공격이 노골화되고 있다. 인권단체들은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반면, 학생인권조례를 반대하는 세력들은 ‘교권침해’를 조장해 학교교육을 무력화시킬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일부 보수단체들은 성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성인식을 왜곡’시키고,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 이러한 억지가 부담스러웠는지 서울시교육청 학생생활지도정책자문위원회는 조례 초안에서 ‘성소수자’ ‘성적지향’ ‘성별정체성’에 관한 권리조항을 삭제하는 ‘굴복’을 결단했다.

 학생인권조례가 담고 있는 내용은 학생 또한 사람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미 헌법에서 확인하고 있고 법률에 의해 보장되고 있는 권리들을 조례를 통해 재확인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반대하는 세력들은 마치 없는 내용을 새롭게 만들어낸 것처럼 호들갑이다. 체벌금지에 대해서도 조례가 초중등교육법에 위배된다는 섣부른 주장을 하면서, 나아가 체벌이 헌법정신에 위배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 근거 없는 비방과 비난만 퍼부을 뿐 본질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이다.


서울시교육청 학생생활지도 정책자문위원회 한상희 위원장과 박영미 부위원장이
지난 9월 7일 시교육청에서 '학생인권조례 초안과 학생생활교육혁신 시안' 등에 관해 발표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그렇지만 이런 비방과 비난은 그나마 ‘무지의 소치’로 치부하면 그만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교권조례’에 대한 논의이다. 전라북도교육청은 얼마 전 학생인권조례와 함께 교권조례를 입법예고했고, 전라남도교육청은 아예 학생, 교사, 학부모의 권리를 모두 담은 ‘교육공동체 인권조례’라는 정체불명의 조례를 추진 중이다. 광주에서도 모 교육의원이 교권조례를 추진하고 있다. 학생인권 보장과 함께 교권도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 말은 위험한 의도를 담고 있다.

 교권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교사의 교육권’으로 정치나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독립되어 자주적으로 교육할 권리를 의미한다. 여기서의 외부는 학교 이외의 세력, 학부모집단, 나아가 교육행정당국도 포함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교사의 권력 또는 권위’로 교사라는 전문성과 역량에 기반해 지위를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이 두 가지는 엄밀히 다른 의미임에도 교권이라는 애매한 말로 한꺼번에 사용되고 있다. 문제는 교권조례를 통해 보장하려는 것이 ‘교육권’인지 ‘권위’인지도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학생인권조례 논의 속에서 나온 것을 고려하면 정황상 ‘권위’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교사의 권위는 보장되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교사의 전문성과 역량,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자연스럽게 형성되거나 인정되는 것인가. 권위주의를 내세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면 당연히 형성되고 인정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폭력과 억압을 앞세워 복종을 강요하는 무시무시한 공권력의 얼굴과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지금의 교육구조 속에서는 교사의 권위가 형성되기 어렵다. 경쟁과 일등주의의 강요에 침묵하고, 학생들을 억압하는 교육행정에 동조하며, 교육자로서 자주적인 교육을 포기하도록 밀어붙이고 있는 상황에서 교사의 권위는 강요가 아닌 이상 형성될 수 없는 것이다. 교권조례는 바로 이러한 구조적인 모순을 외면한 채 교사들을 ‘순응하는 객체’로 두려는 것이다.

 교사의 권위가 인정되려면 가장 우선적으로는 학교 구조 속에서 상대적 약자인 학생들의 인권이 먼저 보장되어야 한다. 학생인권 존중을 통해 일방적 주입식 교육에서 소통하는 교육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교사와 학생 간 대립 구조가 해소되고, 상호 존중하는 학교문화가 조성될 수 있다. 다음으로 ‘교육권’이 학생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교육행정당국과 부당한 교육제도를 향해 행사되어야 한다. 자주적 교육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교육활동의 기능인으로 전락한 교사에게 권위는 있을 수 없다. 왜곡된 교육구조를 해소하지 않고 모순의 현실에 안존하는 한 교사의 권위는 포장될 수는 있어도 형성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인권을 기반으로 인권 친화적 학교문화가 만들어지고, 부당한 교육에 대한 저항이 본격화될 때 교사의 권위는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외면한 채 교권조례로 권위를 확보하겠다는 것은 또 다시 교육행정당국이 제시하는 ‘당근’을 덥석 무는 꼴이다. 학생인권을 교권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보는 순간 교권을 보장하겠다는 본말은 전도되고, 단지 학생인권을 억압하는 결과만 남게 될 것이다. 결국 교권조례는 학생에게도 교사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학생들 공대를 떠나 약대로 가다 (김인아)

김인아/ 객원 칼럼니스트

 개강이다. 전공과목인 생물분자공학의 수강 인원은 여덟 명. 50명이 들어가는 공간의 앞  줄만 간신히 채웠다. 식품저장학, 식품분석실험 등 다른 전공과목도 수강생이 열 명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강의실과 실험실에서 함께 지냈던 친구들이 사라져 간다. 늦은 밤 함께 실험실을 지키던 그 많은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내 주변을 보면 약대 진학 열풍으로 짐작된다. 식품공학 전공 강의를 듣는 대신 약대 준비를 위한 입시과목으로 몰려간 듯하다. 3년 전 230명 정원의 일반화학 강의는 약대 준비생들로 인해 수강생이 400명을 넘겼다. 콩나물시루 속에서 강의를 듣다보니 강의의 질도 떨어져 간다.  

 이공계 출신 여학생들이 약대 입시 열풍을 이끌고 있다. 한국약학교육협의회 통계를 보니 2012학년도 약학대학입문자격시험(PEET) 응시자는 1만3077명인데, 이중 여성이 8638명이다. 66.1%다. 전체 약대 합격률을 보면 남녀 비율이 3:7이다. 대부분 이공계 출신자들이 이 시험을 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여대에서 약대 열풍이 더 두드러진다. 의치약학 입시전문 교육기관의 신입생 분석 자료를 보면 으뜸이 이화여대 출신이란다. 실제 지난해 12월 이화여대 자연과학대학 3학년 학생의 29.3%인 88명이 자퇴했다. 경제적 사정 같은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약대 진학을 목표로 했을 의도적 자퇴란 말이 학생들 사이에서 떠돈다. 

 이화여대 공대에 다니는 김모(23)씨도 지난해 3학년 2학기를 마치고 약대 진학을 결심했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과도한 취업 경쟁 속에서 느끼는 불안감이 가장 큰 이유였다.  

 “요즘에 대학만 졸업해서는 전공 살려서 취업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요. 공대니까 취업이 쉽겠다고 하지만 취업도 취업 나름이죠. 비정규직이 대부분이고, 평생직장은 꿈도 못 꿔요. 대학원가서 석․박사를 하면 괜찮을까 생각했는데 선배들 말을 들어보니까 오히려 취업문이 더 좁아진대요. 거기다 들어가는 돈하고 시간은 오죽한가요? 따지고 보면 약대를 가는 게 훨씬 낫죠. 나중에 결혼해서 애 낳고 키울 때도 안정적인 직업이 있으니 안심이잖아요.”  

 김씨는 자신의 여동생 역시 함께 약대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김씨의 동생은 모 사립대 자연과학대학에 입학 후 바로 약대 준비를 시작했다. 자연대에 진학한 이유 역시 약대 입시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주변 친구들 중에 생물학, 화학 같은 순수 자연과학을 전공하는 경우가 있어요. 근데 그 친구들 보면 경영이나 경제학 복수 전공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예요. 대학원 진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구요. 아마도 동생이 약대 준비를 할 계획이 없었더라면 아마 다른 전공을 선택 하라고 했을 거예요. 돈 잘 벌고 취업 잘되는 쪽으로요.”  

 김씨의 고민은 이공계 여성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다. 2010년 여성과학기술인력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정규직 여성 비율은 10.6%였다. 반면 비정규직의 경우 31.1%로 약 3배정도 더 높게 나타났다. 심지어 정규직 여성 신규채용비율은 전년도에 비해 1.7% 감소한 15.3%로 나타났다. 취업도 힘들다. 그러나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기는 더 힘들다.


약대 입시 설명회 모습
사진 출처 - 한겨레

 결혼으로 가정을 이루면 또 다른 문제가 시작된다. 가장 활발히 연구를 해야 하는 시기에 출산과 육아로 공백 기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연구 중단으로 기술 개발이나 논문과 같은 연구 실적을 내기도 힘들다. 성과가 부족하면 연구책임자로의 승진도 연구비 지원도 어려워진다. 엄마 과학자로 살아가기는 현실적으로 쉽지만은 않다.  

 이제 곧 졸업이다. 내년 2월이면 4년간의 대학생활도 끝난다. 함께 졸업을 앞 둔 08학번 동기는 단 한 명. 나머지 26명의 친구들은 저마다의 사정으로 졸업을 연기했다. 그리고 일부는 약대로 떠났다.  

 4년간 등록금으로 4000만원이 들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탓에 매 달 집세와 생활비로 100만 원 정도를 꼬박꼬박 쓰고 있다. 명절이나 주말에 고향집에 내려가 부모님을 뵐 때면 반가움보다는 죄송한 마음이 앞선 지 오래다.   

 실험실에서 늦은 밤까지 청춘을 바쳤다. 그러나 남는 것은 졸업장 하나다. 취업 준비는 별개다. 하고 싶은 일만을 꿈꾸며 살기에 현실은 차갑기만 하다. 전문직만이 대우받는 현실. 전공과 취업이 따로 노는 현실. 여자 공대생에게 약대 진학만이 유일한 해법처럼 보이는 이 현실을 바꾸어 볼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일까. 오늘도 답답함만 커져간다.


사람이 '영어'보다 아름다워 - 임아연/ 한밭대 학생

임아연/ 한밭대 학생

 "영어 좀 늘었겠는데." 단풍이 한창 무르익어갈 10월, 필리핀에 교환학생 자격으로 온지 1년 3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적어도 첫인사로 이 말은 듣지 않았으면 싶다. 여전히 부끄러운 내 영어 실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동안 가보지 못한 다른 세상을 한참이나 여행하고 돌아온 사람에게 가장 궁금해 할 게 영어라는 사실이 조금은 서글프기 때문에.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필리핀에서의 영어공부 방법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보다 이 나라의 사람들과 사회는 어땠는지, 내 20대에서 이 경험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긴 여행을 통해 무엇을 깨달았는지에 대해 얘기하는 게 훨씬 흥미로울 것 같다.  

 나처럼 취업을 눈앞에 둔 대한민국의 많은 청춘들이 대세에 떠밀리듯 외국행 비행기를 탄다. 저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미국이나 캐나다, 혹은 필리핀을 택하는 많은 이들이 품은 목적은 아마도 영어일 것이다. 얼마 전 한국에서 온 친구와 함께 필리핀 여행을 끝내고 공항에서 친구를 배웅하는 중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한국 학생을 봤다. 수화물 무게가 넘쳤는지 그는 짐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그 큰 가방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거의 대부분 무거운 토익 책과 영어(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취업용 영어) 관련 서적들이었다. 그가 짊어진 취업의 무게, 영어의 무게를 그대로 보는 듯 했다.  

 관계 맺기 위한, 또 다른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언어는 애당초 없었다. 필리핀에 있는 대부분의 한국인이 타갈로그어를 비롯한 필리핀 전통 언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심지어 누군가는 필리피노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 "얼굴 시커먼 애, 냄새나게 생겼어" 따위의 어이없는 댓글도 서슴지 않았다. 이곳에서의 가장 큰 깨달음은 '말'이 통한다고 마음조차 통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유창한 영어실력보다 낯선 세상을 향해, 사람을 향해 열려있는 마음이 더욱 절실했다. 토익 900점이 한 사람의 의사소통 능력, 대인관계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걸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어학 연수 박람회장에서 사람들이 상담을 받고 있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부끄러웠다. 거세게 몰아치는 한류열풍으로 이들에게 한국이 '꿈의 나라'처럼 그려질 때, 그러다 가끔씩 "한국 학생들이 영어 공부하러 많이 오죠. 다른 나라에 비해 싸니까."라는 필리피노의 말을 들을 때면 속 빈 강정 마냥 겉만 번지르르 해 보이는 한국이 부끄러웠다. 수많은 한국인이 이곳을 거쳐 가지만, 이들이 갈구하듯 서로 친구가 되려 하기보다 영어를 위한 수단으로서 대상화시키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느껴왔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낯선 내가 딸의 친구, 심지어 7촌 조카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보름씩이나 집에 묵고 간다고 해도 흔쾌히 방을 내어주고, 따뜻한 밥을 지어 줄 만큼 이들은 한국인에게 호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필리핀에서의 마지막 원고를 청탁받고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할지 적잖이 고민했다. 글을 쓰기에 앞서 이곳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싶었고, 앞으로 한국에서 펼쳐질 나의 새로운 삶에 대해서도 생각해야만 했다. 나의 처지,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의 바람, 사회적 요구에 의해 결국 귀결된 것은 취업이었다. 내가 제 아무리 1년 여 시간 동안 필리핀이라는 다른 사회를 보면서 한국 사회를 이해하고, 내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한들, 결국엔 '필리핀 교환학생' 이 한 줄로 이곳에서의 내 삶이 표현될 것이다. 기껏해야 '영어 좀 할 줄 알겠거니' 하는 정도로 나를 파악하게 될 테지. 참으로 우울한 일이다.    


악마의 맷돌(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1. 칼 폴라니의 관점

 최근 이제야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의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홍기빈 옮김, 책세상)을 읽었다.  

 폴라니는 1940년대에 쓴 글들을 통해, 19세기 말 시장이 정치적으로 규제를 받는 상태에서 아예 정치적인 규제에서 벗어나 자기 조정을 바탕으로 한 시장이 생겨난 것이 인류의 재앙이 시작된 것으로 본다. 자기 조정 시장이 생겨나 사회를 정치 영역과 경제 영역으로 제도적으로 분리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렇게 해서 분리된 경제 영역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경제활동의 일부에 지나지 않던 시장이 경제활동 전반을 지배·규정하는 것으로 격상되고, 무수히 많은 시장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총체적 시장을 형성하게 되고, 그런 가운데 모든 사회적인 가치의 생산을 판매와 구매에 적합한 형태로 바꾸게 됨으로써 상품이 될 수 없는 노동·토지·화폐마저 상품으로 만들어 인간 삶 자체를 근본에서부터 위협하게 된다는 것이다. 폴라니는 노동을 제반 인간 활동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하고, 토지는 자연 전체를 일컫는 다른 이름일 뿐이며, 화폐는 구매력의 징표일 뿐이기 때문에 본질상 상품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현실의 시장에서 노동·토지·화폐가 상품으로 묘사되고 실제로 거래되는데, 실은 이 세 가지 상품은 전적으로 허구적인 상품이라는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시장이 자기 조정의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품 허구의 체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셈이다. 그 이후 사회는 상품 허구가 사회 전체와 관련하여 결정적인 조직 원리를 제공하고, 그 조직 원리가 사회의 거의 모든 제도에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쳐 시장 메커니즘이 현실 세계에서 상품 허구의 원칙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폴라니는 이러한 자기 조정의 시장에 내재된 재난에 맞서 사회가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폴라니는 19세기가 끝날 무렵 보통선거가 보편화됨으로써 노동 계급이 국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도 그 일환으로 본다. 그래서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한쪽에서는 정부와 국가를 권력 거점으로 만들고, 다른 쪽에서는 경제와 산업을 권력의 거점으로 만듦으로써 권력을 둘러싸고서 사회 자체가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2. 21세기 악마의 맷돌의 위기

 폴라니는 상품 허구의 원칙에 입각한 자기 조정 시장을 그 속에 모든 인간의 삶과 가치를 집어넣어 분쇄해 버리는 ‘악마의 맷돌’이라고 말한다. 21세기로 접어든 이후, 오늘날 전 세계는 ‘세계화’, ‘신자유주의’, ‘탈규제’, ‘자유무역’ 등을 내세운 가운데 폴라니가 말하는 ‘악마의 맷돌’을 인터넷을 통한 전 세계 동일 실시간이라는 어처구니를 통해 훨씬 더 높은 속도로 돌리고 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21세기 ‘악마의 맷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자가 엔진을 달아 현기증 나게 돌아가고 있다. 어느 누구도 책임질 수 없고, 어느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경제를 담당하는 ‘영웅적인’ 주체로서의 개인은 물론이고, 개별 기업이나 국민국가나 정부마저 이 ‘악마의 맷돌’ 속에서 갈아엎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화된 악마의 맷돌’이라 할 수밖에 없는 21세기 이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목도하면서 전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1930년대에 진행된 파시즘과 전쟁이 그 귀결로서 저절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에 이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더블 딥의 가능성에 대한 공포는 ‘악마의 맷돌’이 크게 삐거덕거리면서 전체가 와해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공포이다. 폴라니에 따르면, 자기 조정 시장을 통해 경제 영역이 정치 영역과 분리되면서 동시에 경제 영역이 정치 영역을 장악하게 된다는 것이고, 이는 시장이 사회 전체를 좌지우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악마의 맷돌’이 갑자기 멈추면서 와해된다는 것은 세계 전체의 사회적 삶의 영역 전체가 위기를 맞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대적인 공포, 마치 일본의 원전 폭파와 같은 직접적인 공포를 훨씬 능가하는 대대적인 공포가 세계 전체를 휘감고 있는 것이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2008년의 위기에 이어 계속되어 온 경기부양책으로도 그다지 큰 효과가 없자 이번 9월 9일에 또 4천500억 달러에 달하는 경기부양책을 발표했다. 이는 자기 조정 시장이 얼마나 근본적으로 허구인가를 여실히 드러낼 뿐만 아니라, 한번 속도를 내기 시작한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악마의 맷돌’이 계속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데, 어떻게 정치를 비롯한 사회의 전 영역이 동원될 수밖에 없는가를 확연하게 드러낸다.

3. 악마의 맷돌 속 한반도

 문제는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이 ‘세계화 된 악마의 맷돌’이 묘하게도 우리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거센 파찰음을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내외적으로 이 파찰음은 분명 한반도의 위기를 예고하고 있다.

 국내의 정치에서 ‘복지’가 사회정치적인 이슈로 정확하게 자리매김 된다는 것이 과연 더 이상 자기 조정 시장에만 삶을 맡겨놓을 수 없다고 하는 근본적인 성찰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조선일보에서 연재하는 ‘자본주의 4.0’처럼 자기 조정 시장의 ‘악마의 맷돌’이 크게 삐걱거리는 것에 대한 기계적인 수리에 의한 것인지를 지금으로서는 그 귀결을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세계 전반적인 추세를 볼 때, 후자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자기 조정 시장은 이미 마치 절대적인 존재인 양 자리를 잡고 있어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만큼이나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역시 ‘절대적인 진리’인 양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이 ‘복지 이슈화’의 기회를 자기 조정 시장의 ‘악마의 맷돌’에 저항하는 강력한 장치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야 한다. 그래야만 ‘시장으로부터의 인간 삶의 해방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우리가 ‘시장으로부터의 인간 삶의 해방구’를 확대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최근 한진중공업 사태 해결을 위한 국회 청문회에서 여실히 확인했다. 이 청문회에서 특히 조남호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비인격적인 기계성을 통해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세계화된 악마의 맷돌’이 얼마나 강고하고 무서운가를, 그 ‘악마의 맷돌’이 돌아가는 데 노동에 관련된 법률들이 얼마나 크게 기여하고 있는가를, 그 속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사라지고 없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제 스스로 돌아가는 ‘악마의 맷돌’에 삶을 의존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복지 이슈화’를 어떻게든 인간 삶의 해방구를 마련하는 쪽으로 끌고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진 출처 - 한국일보

 그런데 ‘복지 이슈화’를 정확하게 이런 방향으로 끌고 가기에는 주변 상황이 너무 힘겹게 돌아가고 있다. ‘한미 FTA의 국회 비준’에 대한 찬반의 논의 틀이 ‘절대적 존재인 악마의 맷돌’을 근본적으로 문제로 삼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찬성 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런가 하면, 미국과 중국 중 누가 이 ‘악마의 맷돌’의 어처구니를 장악할 것인가를 놓고서 대대적인 신경전을 벌이는 가운데, 한반도 내의 남북의 분단 문제가 이명박 정권 들어 크게 교착됨으로써 미중 간의 어처구니 장악 신경전을 위한 일종의 돌쩌귀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또한 일본은 묘하게도 한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 등에 대해 영토 분쟁을 계속 재생산해 내고 있다. 그런 가운데 평화헌법 9조를 어떻게든 폐지 내지는 대폭 개정하는 쪽으로 여론을 몰아가고 있다. 이 역시 동아시아 권역에서의 자기 조정 시장을 둘러싼 주도권 투쟁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군사력을 내세운 영토적인 제국주의에서 경제력을 내세운 순수 시장적인 제국주의로 바뀌었다고는 하나, 그래서 법적·형식적으로는 제국주의적 대외관계를 벗어났다고는 하나, 실질에 있어서는 자국의 경제 영역의 확대를 위해 여전히 정치군사력에 입각한 무력경쟁이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해서, 특히 한반도의 남북을 중심으로 심심찮게 격발되고 있는 것이다.

4.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모든 대내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무슨 마술적인 해법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가장 중요한 원칙은 철저히 상식에 입각한 ‘이상 아닌 이상’을 모든 정책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시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경제 성장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활동하기 위해 경제 성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격을 갖추는 것은 즉 인격을 갖추는 것은 의식주의 욕구를 더 많이 더 과시적으로 경쟁적으로 충족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동물적일 수밖에 없는 의식주의 욕구를 넘어서서 장구한 세월을 통해 인류가 남겨놓은 사회문화적·인문예술적인 가치들을 함께 향유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결코 유토피아 즉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 비록 억압된 형태긴 하나 이미 늘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철학자 하버마스(Ürgen Habermas, 1929- )의 개념을 빌려 말하면, 이는 생활세계를 사회적 삶의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고, 폴라니의 개념을 빌려 말하면, 이는 전인격적인 사회를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버마스의 관점을 소개하기로 한다. 하버마스는 폴라니의 위 글보다 약 40년 뒤 80년대에 쓴 『의사소통행위이론: 기능주의적 이성 비판을 위하여』(장춘익 옮김, 나남)에서 나름의 사회역사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하버마스는 흔히 말하는 넓은 의미의 사회를 체계이자 동시에 생활세계로 파악한다. 그러면서 하버마스는 체계에 해당되는 것으로 시장과 국가를 들고, 시장은 화폐를 매체로 해서 작동하고 국가는 권력을 매체로 해서 작동한다고 말한다. 그런 반면, 생활세계를 상호이해에 입각한 의사소통적인 것으로 보면서 그 상징적인 구조들로 비축된 지식으로서의 문화, 소속과 연대를 가능케 하는 질서인 사회 그리고 언어와 행위 능력을 갖춘 인간성 등 세 가지를 든다. 중요한 것은 하버마스가 제시하는 체계와 생활세계의 관계이다. 시장과 국가라고 하는 체계가 그것들이 생겨날 수 있는 바탕인 생활세계를 식민화한다는 것이 요체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생활세계를 화폐와 권력을 매체로 작동하도록 함으로써 진정한 상호이해와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공공의 장을 파괴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폴라니가 시장과 국가를 대립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역사적인 단계에서 글을 썼다면, 하버마스는 시장의 자본을 중심으로 국가가 결합된 역사적인 단계에서 글을 썼다고 할 수 있다. 체계가 생활세계를 식민화한다는 것은 폴라니가 자기 조정 시장이 ‘악마의 맷돌’이 되어 일체의 인간 삶을 갈아엎어 상품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을 더욱 철학적인 개념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하버마스가 국가기관들이 폴라니가 말한 ‘악마의 맷돌’을 돌리는 데 대거 동원된다는 것을 더욱 심각하게 표현함으로써 폴라니에 비해 더 비관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 할 것이다. 폴라니는 인간의 사회적 삶이 결코 ‘악마의 맷돌’ 속으로 순응적으로 완전히 포섭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보고, 그것에 저항하는 계급적인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국가와 정부에 대한 계급적인 장악 여부에 따라 나름의 해방 가능성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볼 때, 그동안 국내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근대화 극복에 관한 사회이론이라든가 이와 맞물려 있으면서 동아시아의 연대와 평화를 추구하는 동아시아론이 갖는 함의는 크다 할 것이다. 다만, 동아시아론이 동아시아 중심의 자기 조정 시장이라고 하는 ‘악마의 맷돌’을 전제로 한 것일 경우에는 연대도 평화도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말하자면, 지역주의에 의거한 블록화라고 하는 세계화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분명히 ‘세계화 된 악마의 맷돌’이 결정적인 위기에 처할 때, 새로운 형태의 파시즘과 그에 따른 전쟁이 예고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 대대적인 재난을 피하기 위한 국가적인 정책을 도모하는 데 국내외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화를 위한 강정 마을의 투쟁은 분명히 한미일 연합의 ‘악마의 맷돌’을 강화하기 위한 군사전략에 대한 투쟁이다. 이에 대한 투쟁이 국가 공권력에 의해 철저히 억압되는 광경을 보면서 거시적인 차원에서의 우려를 금치 못하는 까닭이 결코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에 우리는 이미 시작된 내년의 선거 국면을 예의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정말이지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왜 가치가 있고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국내외적으로 어떤 근본적인 정책들을 마련해 실천해야 하는가를 잘 느끼고 알고 있는 지혜롭고 탁월한 지도자, ‘악마의 맷돌’을 더 잘 돌리고자 하는 국회의원과 대통령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악마의 맷돌’이 낳는 재난을 벗어나 함께 허리띠를 졸라매고 평화를 위한 연대, 연대를 통한 공감의 모듬살이를 구축해 내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선출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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