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맷돌(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1. 칼 폴라니의 관점

 최근 이제야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의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홍기빈 옮김, 책세상)을 읽었다.  

 폴라니는 1940년대에 쓴 글들을 통해, 19세기 말 시장이 정치적으로 규제를 받는 상태에서 아예 정치적인 규제에서 벗어나 자기 조정을 바탕으로 한 시장이 생겨난 것이 인류의 재앙이 시작된 것으로 본다. 자기 조정 시장이 생겨나 사회를 정치 영역과 경제 영역으로 제도적으로 분리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렇게 해서 분리된 경제 영역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경제활동의 일부에 지나지 않던 시장이 경제활동 전반을 지배·규정하는 것으로 격상되고, 무수히 많은 시장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총체적 시장을 형성하게 되고, 그런 가운데 모든 사회적인 가치의 생산을 판매와 구매에 적합한 형태로 바꾸게 됨으로써 상품이 될 수 없는 노동·토지·화폐마저 상품으로 만들어 인간 삶 자체를 근본에서부터 위협하게 된다는 것이다. 폴라니는 노동을 제반 인간 활동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하고, 토지는 자연 전체를 일컫는 다른 이름일 뿐이며, 화폐는 구매력의 징표일 뿐이기 때문에 본질상 상품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현실의 시장에서 노동·토지·화폐가 상품으로 묘사되고 실제로 거래되는데, 실은 이 세 가지 상품은 전적으로 허구적인 상품이라는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시장이 자기 조정의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품 허구의 체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셈이다. 그 이후 사회는 상품 허구가 사회 전체와 관련하여 결정적인 조직 원리를 제공하고, 그 조직 원리가 사회의 거의 모든 제도에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쳐 시장 메커니즘이 현실 세계에서 상품 허구의 원칙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폴라니는 이러한 자기 조정의 시장에 내재된 재난에 맞서 사회가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폴라니는 19세기가 끝날 무렵 보통선거가 보편화됨으로써 노동 계급이 국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도 그 일환으로 본다. 그래서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한쪽에서는 정부와 국가를 권력 거점으로 만들고, 다른 쪽에서는 경제와 산업을 권력의 거점으로 만듦으로써 권력을 둘러싸고서 사회 자체가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2. 21세기 악마의 맷돌의 위기

 폴라니는 상품 허구의 원칙에 입각한 자기 조정 시장을 그 속에 모든 인간의 삶과 가치를 집어넣어 분쇄해 버리는 ‘악마의 맷돌’이라고 말한다. 21세기로 접어든 이후, 오늘날 전 세계는 ‘세계화’, ‘신자유주의’, ‘탈규제’, ‘자유무역’ 등을 내세운 가운데 폴라니가 말하는 ‘악마의 맷돌’을 인터넷을 통한 전 세계 동일 실시간이라는 어처구니를 통해 훨씬 더 높은 속도로 돌리고 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21세기 ‘악마의 맷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자가 엔진을 달아 현기증 나게 돌아가고 있다. 어느 누구도 책임질 수 없고, 어느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경제를 담당하는 ‘영웅적인’ 주체로서의 개인은 물론이고, 개별 기업이나 국민국가나 정부마저 이 ‘악마의 맷돌’ 속에서 갈아엎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화된 악마의 맷돌’이라 할 수밖에 없는 21세기 이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목도하면서 전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1930년대에 진행된 파시즘과 전쟁이 그 귀결로서 저절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에 이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더블 딥의 가능성에 대한 공포는 ‘악마의 맷돌’이 크게 삐거덕거리면서 전체가 와해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공포이다. 폴라니에 따르면, 자기 조정 시장을 통해 경제 영역이 정치 영역과 분리되면서 동시에 경제 영역이 정치 영역을 장악하게 된다는 것이고, 이는 시장이 사회 전체를 좌지우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악마의 맷돌’이 갑자기 멈추면서 와해된다는 것은 세계 전체의 사회적 삶의 영역 전체가 위기를 맞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대적인 공포, 마치 일본의 원전 폭파와 같은 직접적인 공포를 훨씬 능가하는 대대적인 공포가 세계 전체를 휘감고 있는 것이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2008년의 위기에 이어 계속되어 온 경기부양책으로도 그다지 큰 효과가 없자 이번 9월 9일에 또 4천500억 달러에 달하는 경기부양책을 발표했다. 이는 자기 조정 시장이 얼마나 근본적으로 허구인가를 여실히 드러낼 뿐만 아니라, 한번 속도를 내기 시작한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악마의 맷돌’이 계속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데, 어떻게 정치를 비롯한 사회의 전 영역이 동원될 수밖에 없는가를 확연하게 드러낸다.

3. 악마의 맷돌 속 한반도

 문제는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이 ‘세계화 된 악마의 맷돌’이 묘하게도 우리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거센 파찰음을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내외적으로 이 파찰음은 분명 한반도의 위기를 예고하고 있다.

 국내의 정치에서 ‘복지’가 사회정치적인 이슈로 정확하게 자리매김 된다는 것이 과연 더 이상 자기 조정 시장에만 삶을 맡겨놓을 수 없다고 하는 근본적인 성찰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조선일보에서 연재하는 ‘자본주의 4.0’처럼 자기 조정 시장의 ‘악마의 맷돌’이 크게 삐걱거리는 것에 대한 기계적인 수리에 의한 것인지를 지금으로서는 그 귀결을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세계 전반적인 추세를 볼 때, 후자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자기 조정 시장은 이미 마치 절대적인 존재인 양 자리를 잡고 있어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만큼이나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역시 ‘절대적인 진리’인 양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이 ‘복지 이슈화’의 기회를 자기 조정 시장의 ‘악마의 맷돌’에 저항하는 강력한 장치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야 한다. 그래야만 ‘시장으로부터의 인간 삶의 해방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우리가 ‘시장으로부터의 인간 삶의 해방구’를 확대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최근 한진중공업 사태 해결을 위한 국회 청문회에서 여실히 확인했다. 이 청문회에서 특히 조남호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비인격적인 기계성을 통해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세계화된 악마의 맷돌’이 얼마나 강고하고 무서운가를, 그 ‘악마의 맷돌’이 돌아가는 데 노동에 관련된 법률들이 얼마나 크게 기여하고 있는가를, 그 속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사라지고 없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제 스스로 돌아가는 ‘악마의 맷돌’에 삶을 의존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복지 이슈화’를 어떻게든 인간 삶의 해방구를 마련하는 쪽으로 끌고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진 출처 - 한국일보

 그런데 ‘복지 이슈화’를 정확하게 이런 방향으로 끌고 가기에는 주변 상황이 너무 힘겹게 돌아가고 있다. ‘한미 FTA의 국회 비준’에 대한 찬반의 논의 틀이 ‘절대적 존재인 악마의 맷돌’을 근본적으로 문제로 삼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찬성 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런가 하면, 미국과 중국 중 누가 이 ‘악마의 맷돌’의 어처구니를 장악할 것인가를 놓고서 대대적인 신경전을 벌이는 가운데, 한반도 내의 남북의 분단 문제가 이명박 정권 들어 크게 교착됨으로써 미중 간의 어처구니 장악 신경전을 위한 일종의 돌쩌귀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또한 일본은 묘하게도 한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 등에 대해 영토 분쟁을 계속 재생산해 내고 있다. 그런 가운데 평화헌법 9조를 어떻게든 폐지 내지는 대폭 개정하는 쪽으로 여론을 몰아가고 있다. 이 역시 동아시아 권역에서의 자기 조정 시장을 둘러싼 주도권 투쟁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군사력을 내세운 영토적인 제국주의에서 경제력을 내세운 순수 시장적인 제국주의로 바뀌었다고는 하나, 그래서 법적·형식적으로는 제국주의적 대외관계를 벗어났다고는 하나, 실질에 있어서는 자국의 경제 영역의 확대를 위해 여전히 정치군사력에 입각한 무력경쟁이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해서, 특히 한반도의 남북을 중심으로 심심찮게 격발되고 있는 것이다.

4.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모든 대내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무슨 마술적인 해법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가장 중요한 원칙은 철저히 상식에 입각한 ‘이상 아닌 이상’을 모든 정책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시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경제 성장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활동하기 위해 경제 성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격을 갖추는 것은 즉 인격을 갖추는 것은 의식주의 욕구를 더 많이 더 과시적으로 경쟁적으로 충족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동물적일 수밖에 없는 의식주의 욕구를 넘어서서 장구한 세월을 통해 인류가 남겨놓은 사회문화적·인문예술적인 가치들을 함께 향유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결코 유토피아 즉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 비록 억압된 형태긴 하나 이미 늘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철학자 하버마스(Ürgen Habermas, 1929- )의 개념을 빌려 말하면, 이는 생활세계를 사회적 삶의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고, 폴라니의 개념을 빌려 말하면, 이는 전인격적인 사회를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버마스의 관점을 소개하기로 한다. 하버마스는 폴라니의 위 글보다 약 40년 뒤 80년대에 쓴 『의사소통행위이론: 기능주의적 이성 비판을 위하여』(장춘익 옮김, 나남)에서 나름의 사회역사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하버마스는 흔히 말하는 넓은 의미의 사회를 체계이자 동시에 생활세계로 파악한다. 그러면서 하버마스는 체계에 해당되는 것으로 시장과 국가를 들고, 시장은 화폐를 매체로 해서 작동하고 국가는 권력을 매체로 해서 작동한다고 말한다. 그런 반면, 생활세계를 상호이해에 입각한 의사소통적인 것으로 보면서 그 상징적인 구조들로 비축된 지식으로서의 문화, 소속과 연대를 가능케 하는 질서인 사회 그리고 언어와 행위 능력을 갖춘 인간성 등 세 가지를 든다. 중요한 것은 하버마스가 제시하는 체계와 생활세계의 관계이다. 시장과 국가라고 하는 체계가 그것들이 생겨날 수 있는 바탕인 생활세계를 식민화한다는 것이 요체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생활세계를 화폐와 권력을 매체로 작동하도록 함으로써 진정한 상호이해와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공공의 장을 파괴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폴라니가 시장과 국가를 대립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역사적인 단계에서 글을 썼다면, 하버마스는 시장의 자본을 중심으로 국가가 결합된 역사적인 단계에서 글을 썼다고 할 수 있다. 체계가 생활세계를 식민화한다는 것은 폴라니가 자기 조정 시장이 ‘악마의 맷돌’이 되어 일체의 인간 삶을 갈아엎어 상품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을 더욱 철학적인 개념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하버마스가 국가기관들이 폴라니가 말한 ‘악마의 맷돌’을 돌리는 데 대거 동원된다는 것을 더욱 심각하게 표현함으로써 폴라니에 비해 더 비관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 할 것이다. 폴라니는 인간의 사회적 삶이 결코 ‘악마의 맷돌’ 속으로 순응적으로 완전히 포섭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보고, 그것에 저항하는 계급적인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국가와 정부에 대한 계급적인 장악 여부에 따라 나름의 해방 가능성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볼 때, 그동안 국내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근대화 극복에 관한 사회이론이라든가 이와 맞물려 있으면서 동아시아의 연대와 평화를 추구하는 동아시아론이 갖는 함의는 크다 할 것이다. 다만, 동아시아론이 동아시아 중심의 자기 조정 시장이라고 하는 ‘악마의 맷돌’을 전제로 한 것일 경우에는 연대도 평화도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말하자면, 지역주의에 의거한 블록화라고 하는 세계화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분명히 ‘세계화 된 악마의 맷돌’이 결정적인 위기에 처할 때, 새로운 형태의 파시즘과 그에 따른 전쟁이 예고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 대대적인 재난을 피하기 위한 국가적인 정책을 도모하는 데 국내외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화를 위한 강정 마을의 투쟁은 분명히 한미일 연합의 ‘악마의 맷돌’을 강화하기 위한 군사전략에 대한 투쟁이다. 이에 대한 투쟁이 국가 공권력에 의해 철저히 억압되는 광경을 보면서 거시적인 차원에서의 우려를 금치 못하는 까닭이 결코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에 우리는 이미 시작된 내년의 선거 국면을 예의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정말이지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왜 가치가 있고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국내외적으로 어떤 근본적인 정책들을 마련해 실천해야 하는가를 잘 느끼고 알고 있는 지혜롭고 탁월한 지도자, ‘악마의 맷돌’을 더 잘 돌리고자 하는 국회의원과 대통령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악마의 맷돌’이 낳는 재난을 벗어나 함께 허리띠를 졸라매고 평화를 위한 연대, 연대를 통한 공감의 모듬살이를 구축해 내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선출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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