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야 하는데 아직 지우지 못 하는 문자가 있다. 오늘 문득 문자를 뒤지다 지워지지 않은 그 문자를 발견했다. <쌍차정책부장부인자택아파트에서자살> 그 문자를 받던 순간의 답답함이 떠올라 마음이 콱 메었다.


 7월 20일이었다. 그 날 하루는 이 대한민국의 실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세 가지 집회가 한꺼번에 일어났다. 오전부터 말 그대로 듣보잡인 사람이 인권위원장 취임식을 하겠다고 국가인권위원회로 오고 있었고 순천향병원에서는 용산 사태 추모대회가 있었다. 인권은 모른다는 법학 교수의 말은 정치가 무슨 장난이냐는 생각에 사람들을 어이없게 했다. 또 용산 사태가 반 년째였다. 반년이 되어 잊지 말자는 것보다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어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준비한 집회였다. 사람이 죽은 지 반년이 지났고 검찰에서는 수사기록을 공개하지도 않고 있다. 그래도 ‘공권력’과 충돌해서 ‘국민’이란 사람들이 죽었는데 대통령은 단 한 마디도 사과하지 않은 상태다. 억울해서 이대로는 장례지내지 못 하겠다는 유족들이 시체를 메고 밖으로 나오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그래야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또 같은 시각 평택에서는 정리해고 당한 쌍용차 직원들이 싸우고 있었고 그들을 ‘국민’으로 취급하지 않는 공권력은 사정없이 최루탄을 날렸다. 스스로를 ‘죽은 자’로 칭하는 이들은 살아있지만 죽은 자였다. 더 이상 이들이 국민이 아니라면 공권력이 그들에게 영향을 끼치진 못 해야 할진데 법의 바깥에 있는 자로 치부된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강한 공권력으로 탄압을 받고 있다.


 나는 인권위원장 취임식 저지를 위해 인권위로 향했다. 건물 앞은 이미 경찰들이 빡빡하게 서서 문을 막고 있었다. 인권위원장 자격검증을 위한 공개질의서를 준비한 활동가들은 입구에서 한 발자국도 들어가지 못 하고 있었다. 겁이 많은 인권위원장은 이미 경찰들을 불러 몇 뼘 되지도 않은 인권위 문을 들어가지 못 하게 했다. 사실 그건 문제도 아니었다. 더 놀라운 것은 휠체어 장애인들이 오르내릴 수 있는 경사로마저 경찰들은 차단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약자의 편에 서는 가장 힘 센 기구가 인권위였는데, 그 인권위가 인권을 침해하는 사건이었다. 인권위 건물을 들어가지 못 하는 활동가들은 분통이 터졌고 다칠 걸 알면서도 방패로 돌진했다.


 국가는 국민을 바보로 알고 기업은 모두 제 덕이라고 착각한다. 국가는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기준으로 국민과 국민 아닌 것을 나누고는, 국민 아닌 자들은 만만하게 생각한다. 얼마나 모순적인가. ‘국민 아닌 자’로 취급한다면 아예 공권력을 행사할 자격이 국가에겐 없는데도 말이다. 기업은 어떤가. 경제가 발전한 것은 기업의 덕이고 노동자들을 고용한 것은 감사해야 할 일이 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기업은 그렇게 무책임하게 직원들을 마구잡이로 해고하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의 일터이고 쉽게 나갈 수 없다며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을 불법이라며 최루액을 쏘고 물과 전기를 끊으면서까지 끌어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권이 너무 절실해진 시대에 그 어떤 때보다 인권이란 말이 많이 들린다. 하지만, 지금 인권이라는 말은 너무 무력하다. 너무나 상식적이기에 인권이 침해된다는 말을 부르짖으면 양심에 찔려할 거라는 건 착각인 셈이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 아는 양심, 이런 나의 생각이 여전히 이상적인 착각인가. 환상을 깨고 나쁜 것을 직시해야만 이 모든 비상식적인 사태들을 막을 수 있는 걸까. 타협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이런 생각을 절실하게 느낀 건 경찰 때문이다. 누군가 경찰의 양심은 따로 있다 했다.


 단순히 그들도 또 하나의 희생자들일 뿐인가. 경찰과의 대치 앞에서 이건 진짜 싸움이 아니라고 위로하면서 그들을 가엾게만 생각해야 하는가. 난 그 날 그런 마음이 싹 사라졌다. 경찰을 미워하되 경찰 개인은 미워하지 말라고 말했다. 하지만 난 그 말을 더 이상 믿고 싶지 않다. 그들이 경찰이기 전에 경찰 개인이라면 더욱 질타해야 한다. 경찰에게 윗사람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경찰 양심’이 있다면 경찰 개인에게는 우리 모두 아는 ‘양심’이 있을 터이다.


 

지난 7월 20일, 취임식을 앞두고 경찰이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입구 경사로를 막자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항의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난 장애인이 올라가는 경사로를 막고 서는 그에 항의하는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는 웃으며 영상을 찍는 여경의 모습을 한참이나 보았다. 지금 자신 앞에 서 있는 우리들의 근거가 전혀 납득되지 않아서일까? 아주 잠시라도 저들이 왜 서 있는지 생각은 하는 걸까. 그들은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모든 경찰이 그렇진 않은 거라며 일말의 이해라도 놓지 말아야 하는 걸까. 이렇게 생각하고 마는 건 내 타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경찰 개인들도 사정없이 미워해야만 한다는 거다. 내 주위에 경찰이 있다면 그는 그저 내 친구라고 위로하고 말 뿐이 아니라 캐묻고 따질 수 있어야 하는 거라고. 그렇게 마음먹었다. 왜 선이란 건 일상에서만 유효한 건가. 단지 착한 친구, 착한 아버지인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경찰들과 가까이 마주하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을 때쯤, 바지에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쌍차정책부장부인자택아파트에서자살>.


 나라 돌아가는 꼴이 너무 부당해서 화를 냈지만, 내가 지금 그렇게 힘든 사회에 살고 있다는 걸 피부로 체감하는지가 확실치 않아 인권활동을 하면서도 늘 줄타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스스로 감정의 과잉에 속지 않으려고 했는데. 경찰과 대치하는 인권위 현장 앞에서 누군가의 자살했다는 문자를 보는 순간 눈물이 눈동자를 덮었다. 속상하다. 속상하다. 화난다. 화가 난다. 너무도 정직한 감정들이 밀려왔다.


 나는 영화를 찍는답시고 한창 준비 중인 상태였고 그 날 저녁엔 배우들과 리허설을 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내 하는 일이 너무 보잘 것 없어지고 내 영화 내용이 뭐가 그리 의미가 있으려나 싶었다. 그런 생각 때문에 무기력해지는 내가 또 싫지만, 어쨌든 난 계속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국민인 것을.


 그래 잊지 않으려고 쓰는 글인 것을. 잊지 않고, 나 그저 사소한 선에 집착하지 않기 위하여. 나도 알고 너도 알고 우리 모두 아는 ‘양심’을 지키려면.




 교직 생활 20년이 넘으면서 매 해 경험하는 일이지만 해마다 담임을 맡게 되는 아이들이 모두 참 다르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같은 학년을 연이어서 담임을 하여도 아이들이 참 다른 것을 보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 속에 미세한 차이가 생활의 또 다른 재미(?)를 주는 것 같다. 올해는 내 교직생활에서 6번째로 2학년을 담임하게 되었다. 28명이라는 다소 경감된 학급 아동수를 내심 반갑게 생각하면서 '올해는 어떤 녀석들일까?' 하는 설렘과 두려움을 가지고 아이들과의 대면을 시작하였다. 사람과의 관계는 서로간의 눈빛에서 오고가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의도를 가지고 아이들의 눈빛을 살피던 중 유난히 작은 체구에 교사의 눈빛을 갈구하는 아이가 있었다. 궁금한 것도 많고 질문도 많았으며 교사가 지시한 것에 대하여 항상 귀 기울이는 아이로 여느 아이들처럼 교사의 특별한 관심을 좋아했다.  


  그 아이에 대하여 처음 놀란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교사의 과제에 대하여 그 아이가 보인 반응이 나타났을 때였다. 평소 교사가 하는 말에는 집중력 있게 듣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 내용에 대한 이해도는 집중도에 비례하지 않았던 것이다. 수업시간에 교사가 설명을 한 후 그 내용을 이행해보라고 한 것에 대하여 본인이 원한 만큼의 결과가 도출되지 않자 얼굴이 빨갛게 되도록 울고 감정 조절이 안 되어 무릎을 꿇은 상태로 아이들 책상 주변을 빙빙 돌면서 소리를 지르더니 급기야 손톱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할퀴며 자해를 하는 것이었다. 너무 놀라 아이를 붙잡고 일단 이상행동을 저지시켰다. 그리고 왜 그러는 지를 물어보았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른 과제 해결에 대하여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나타난 행동에 비해서 그 이유가 너무 단순해서 속으로 놀랐다. 일단 그럴 경우에는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당부하고 달래주었다. 그리고 학부모총회날 그 아이의 학부모로부터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부모는 맞벌이고 취학 전에는 할머니가 키워주셨으며 그때까지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고 학교 들어오고 나서 이상행동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1학년 담임선생님이 이런 이유로 수업을 진행하기 어려워했다는 것과 그 이후로 놀이치료를 받아 현재에 이르는 중이라고 했다.  


 면담 후 그 아이에 대하여 좀 더 각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교사가 필요할 때에 언제든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앞자리에 앉도록 하여 세심하게 관찰을 하였으며 개인행동을 일지형태로 기록하였다. 보통의 아이들은 학교에서의 결과물을 통해 성취욕을 가지도록 지도하지만 이 아이는 반대였다. 성취욕이 너무 강하여 결과물에 대한 좌절감이 걱정스러울 정도로 큰 것이 문제였다. 과정에 대하여는 집중하지 못하고 결과에 대하여만 집착하여 원하는 만큼의 결과가 도출되지 않을 시에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감당할 수 없는 좌절감을 느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간다. 다만 그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결하고 조절해나가느냐가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방법일 것이다. 이제 겨우 9살인 그 아이가 겪을 인생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 내용적으로 어렵지 않은 2학년 과정에 대하여 나타난 좌절감의 표현은 이후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해갈 학습량에 대하여 어떤 식으로 표출될 것인가? 그리고 경쟁만이 학력을 높일 것이라는 믿음아래 펼쳐지는 정책들은 그 아이에게 어떤 무게로 다가올 것인가? 우리는 행복을 인생의 목표로 알고 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과 그 과정은 달라도 누구나 행복을 느끼며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지금의 학교교육은 아이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일까? 교육을 받고 하나씩 깨우쳐가면서 누리는 기쁨은 이미 옛날이야기에 불과한 것일까? 다수의 아이들이 그렇지 않다면 지금의 교육이 지향하는 바를 좀 돌아봐야하지 않을까?


 
지난 3월 31일에 치러진 '교과학습 진단평가시험' 풍경, 초등학교 학생들이 칸막이를 세운 채 시험을 보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벌써 한학기가 지나 여름방학이다. 다음 학기가 지나면 그 아이는 한 학년 더 올라 갈 것이다. 더 많은 과제를 해결해야하고 한 단계 높은 수준의 학습내용을 감당해야하며 또 더 깊은 좌절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모두 알고 있다. 해마다 특별한 관심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어느 반이랄 것도 없이 모든 반에 그런 아이들이 있다. 다만 몇 명이 있느냐가 관심사이다. 경쟁을 통해서 1등만이 인정을 받고, 친구들을 이겨야만 내가 살며, 최고의 결과를 도출해야만 세상이 알아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잃어버렸을 때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 아이들이 소중하다고 말하면서 막상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데에는 과감하지 못하다. 우리 교육이 경쟁과 효율성만을 강조할 때 우리 아이들은 상처받고 좌절하고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잃어간다. 이는 어른들의 책임이다. 그리고 그런 아이는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많다. 비단 그 아이 한사람에 대한 것이라 치부하지말기를 바라며 교육에 대한 가치와 철학을 다시 생각해보고 그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하는가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인권연대 주최 이번 교사인권강좌에서 강의를 마친 후 필자는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에 맞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요? 인권교육이라는 것이 말은 그렇지만 과연 실제로 얼마나 실행되고 확산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라도 좀 강하게 맞서야 하지 않을까요?”라는 취지의 질문을 받았었다. 그 때 필자는 선뜻, “이대로 가다가 교육은 결국 바닥을 칠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더 나아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경찰이 쏘아 대는 물대포와는 상대가 안 될 것 같이 보이지만, 언제 젖는지도 모르게 온몸을 젖게 만드는 이슬비, 그런 이슬비가 결국 물대포보다 강하지 않을까요?”라고 답했었다. 이어서,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라는 시처럼 담쟁이들은 손에 손을 맞잡고 결국은 그 담을 넘지 않겠어요?”라고도 했다. 그 후 필자는 “그 답이 과연 충분한 답이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 “바닥을 치는 것이 희망이기도 한 이유”와 “이슬비가 물대포보다 강한 이치”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 


 악화일로의 경제상황에 대한 뉴스를 접하면서 우리는 가끔씩 “바닥을 쳤다”는 말을 듣곤 하는데 우리는 그 말을 “이젠 더 나빠질 리는 없으니 조금이라도 좋아질 것”이라는 뜻으로 알아듣는다. 또한 살아오면서 가끔씩 끝 모를 절망이나 실패 혹은 슬럼프에 빠져들게 되면 우리는 “차라리 바닥을 빨리 쳤으면 좋겠다. 바닥을 치면 그땐 올라가는 일만 남지 않겠냐?”라고 생각한다. 정호승 시인은 <바닥에 대하여>라는 시에서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하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하며,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하며 그 시를 끝맺는다.  


 필자가 여기서 이해하는 ‘바닥까지 내려감’은 곧 ‘희망’이다. 새벽동이 트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면, 가장 어두운 순간 바로 다음엔 곧 빛이 터져 나오는 거 아닌가? 역대 정권들이 하나같이 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수많은 조치들을 발표하고 시행해오고 있지만 교육을 물속에 점점 깊이 빠뜨려 왔다면, 곧 ‘바닥’을 칠 것이고, 그리고는 수면 위를 향해 올라갈 차례가 아닐까? 인권을 무시하여 교육을 물속에 빠뜨렸다면 인권을 존중하는 방향, 인권이 교문을 넘어 학교 안에 확산되게 하는 방향이 곧 수면 위로의 방향일 것이다. 걸상과 허리가 맞지 않아 걸상에 허리를 맞추다가 수많은 학생들이 걸리게 되는 척추측만증, 학생이 안경 쓰는 것은 이미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게 된 안타까운 시력 희생, 초등학생에게까지도 성적이 떨어진 것을 유서 쓰고 투신할 만큼의 불효로 여기게 만드는 교육풍토와 가정교육, 명문대 합격을 위해 인권을 유보함은 당연하다는 식의 ‘입시독재’ 논리……. 더 이상은 내려갈 곳이 없음이 모두에게 자명해지고 있지 않은가? 하여, 교육은 이제 곧, 드디어, 바닥을 치고 오른다! 이것을 “바닥을 치는 것이 희망이기도 한 이유”라고 보는 것은 좀 궁색한가?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말도 우리는 가끔씩 듣는다. 필자는 문득, “무엇이 약한 것인가? 왜 약하다고 하는가? 약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강하기에 강한 것을 이기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오래 전에 읽었던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었다. 그 글을 풀어쓰자면, “사람의 숨은 약하기 짝이 없으나 갈비뼈를 들어올리고 내리는 것은 바로 그 약하기 짝이 없는 숨 아닌가?” 예전에 읽었던 법정 스님의 <무소유>의 글도 풀어쓰자면, “눈 오는 겨울 산에서 살면 흔히 나무들이 부러지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 약하고 약한 눈송이들이 큰 가지들 위에 점점 쌓이면 그 무게를 못 이겨 키 큰 나무들이 통째로 부러진다.”는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물대포’와 ‘이슬비’는 어떤가?


 
지난 7월 29일 오후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인근에서 점거 파업 중인 쌍용차 노조원에게
물을 전달하려는 민주노총과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을 경찰이 물대포를 쏘며 해산시키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물대포’로 비유되기엔 약할 만큼 이명박 정부의 공권력 남용 및 과잉진압은 많은 경우에 인명 피해로 이어지곤 한다. 작년의 촛불집회, 올해 초의 용산 참사,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쌍용 자동차 사태에 이르도록, 최루액과 경찰특공대 등을 갖춘 공권력은 이미 허용 정도를 넘어 정당성을 상실한 폭력으로 바뀌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지난 7월 6일 천주교 마산교구 상남동 성당에서 제3차 전국사제시국기도회가 열렸다. 미사에 앞서 행한 연설에서 강기갑 의원(민주노동당)은 “박정희 대통령은 부마사태와 YH사건, 전두환은 박종철의 죽음 등을 겪으면서 무너졌는데, 정의구현사제단이 고문치사 은폐조작사건을 폭로하면서 6월 항쟁이 시작되었듯이, 이명박 정권은 새벽에 6명을 불태워죽이고서 3,000쪽의 조사기록을 밝히지 않으니 말로가 뻔하다.”고 말하면서 용산 참사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은폐와 3,000쪽의 검찰조사기록 은폐가 묘하게 대응된다 싶다.  


 ‘민주주의 회복과 인권·생명수호를 위해’ 봉헌되는 미사, 수많은 사제들과 신자들의 동참, 용산 참사 유가족들이 갖게 되는 정의와 희망의 연대감, 참사 후 반년이 지나도록 장례마저 못 치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신자, 비신자를 떠나 사람 마음 안에 자리 잡게 되는 정부에 대한 실망과 분노,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양심의 가책, 그러면서 서서히 배우지만 절실히 깨닫게 되는 ‘인권’의 소중함과 불가양도성, 민주주의에 대한 상실감과 목마름……. 이런 모든 것들은, 당장의 위력으로는 ‘물대포’에 비견할 수는 없겠지만, 서서히, 결국은 모두를 똑같이 적시는, 흔히 우산까지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만 홀딱 젖게 하는, ‘이슬비’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하여, 우리에게 남게 되는 것은 결국은 ‘희망’이다. ‘바닥’은 끝 모를 끝이 아니다. 시작일 뿐이다. 강하게 차고 오를수록 상승의 탄력이 붙을 것이다. 그리고 ‘이슬비’는 ‘물대포’를 이기리라. 결국에는 ‘물대포’를 쏘는 발사체인 대포도 녹슬게 만들리라. 약한 것은 약하지 않다. 약하게 보일 뿐이다. 지브란의 말처럼 “갈비뼈를 움직이는 것이 숨”이라면, 국가의 갈비뼈를 들어올렸다가 내려놓으면서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것은 국가가 강하게 훈련시킨 근육이 아니라 우리 시민들의 올곧은 ‘숨’, 곧, 혼과 의지와 꿈, 시민의식, 특히 인권의식 아닐까? 이것이 약할까?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기자 사회의 낭만이 사라졌어.”


 초년 시절인 1998년 무렵, 인사동 한 술집에서 선배 기자가 말했다. 그가 다니는 신문사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웠다. 술파는 것과 아무 관련 없는 주류 신문, 뭘 고쳐 바로 잡는 것과는 더구나 관계없는 보수 신문, 하물며 정중동의 미덕과는 한참 거리가 멀어서 툭하면 노골적으로 고함치는 조중동 등이 그의 머리 위에 붙어 다니는 꼬리표였다. 그것은 때로 높은 사람들을 굽실거리게 하는 후광이었고, 때로 낮은 사람들로부터 밉살받는 낙인이었다. 그날 저녁, 그는 낙인의 괴로움을 토로하는 중이었다. 언론사가 서로 싸우는 일의 피곤함에 대해 동의를 구하는 중이었다.


 예전에는 안 그랬다 했다. 소속사 상관없이 기자들끼리 뭉쳤다 했다. 그가 기억하는 낭만이란 예컨대 이런 것이다. 부처 출입 기자들이 일제히 ‘당꼬’(담합)한다. “오늘은 조용하네요. 기사꺼리 없습니다. 청장 간담회가 있는데, 특별한 일 있으면 다시 보고하죠.” 소속사 상관없이 모든 기자들의 아침 보고 내용이 똑같다. 오전 11시, 청장이 기자실로 내려온다. 특별한 내용이 있을리 없다. 브리핑하라고 부른 자리가 아닌 것을 청장도 알고 기자도 알고, 심지어 신문사 데스크들도 짐작하고 있다. 청장은 휘하 국장 몇몇을 데리고 기자들과 함께 북한산 계곡에 개고기 먹으러 간다.


 폭탄주 몇 잔 돌았고, 계곡에 발도 담갔고, 아랫도리 뜨끈해지는 고기도 먹었으니, 이제 화투장을 펼친다. 어쩐 일인지 국장들이 자꾸 돈을 잃는다. 앞에서 자꾸 쌍피를 푼다. 훗날 개평을 줄 지언정 노름판에서 딴 돈, 사양하는 법 없다. 오늘 처음 고와 스톱의 차이를 익힌 기자들조차 어쩜 자꾸만 돈을 딴다. 그러다 언쟁도 한다. 판돈과는 아무 상관없는 주제다.


 “김 기자님, 평소에 좋게 봤는데, 지난번 그 기사는 너무 하셨어요.” “아니 박 국장, 김 기자 기사가 뭐 어때서. 내 비록 김 기자한테 물먹고 우리 회사에 가선 열나게 쪼였지만, 기자라면 당연히 그 정도 지르는 맛이 있어야지.” “에이, 이 기자, 기분 좋은 날, 왜 목소리 높이고 그래. 자자, 술이나 마시자.” “아니지, 우리가 거지도 아니고 말이야. 밥 좀 얻어먹는다고 이런 수모를 왜 당해야 하나 말이야.”


 이 순간, 기자는 하나다. 서로 배려하고 추켜세우고 존중한다. 왜? 우리는 무슨 신문 기자, 무슨 방송 기자가 아니라, 그냥 기자니까. 우리는 기자라니까. 저들은 공무원이고…. 소속 매체의 꼬리표가 사라지고, 오직 기자 개인의 자격으로 서로 어깨동무하고 노래 부르고 술 마시고 판돈까지 따오는 이런 종류의 ‘낭만’이 가능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나, 배신자가 나오면 안 된다. 아침 보고 때 딴 소리 하는 기자가 있으면 안 된다. 개고기 먹을 때 삼계탕 먹겠다고 샛길로 빠지는 기자가 있으면 안 된다. 둘. 공무원 가운데 내부 제보자가 나오면 안 된다. 기자들이 술 먹고 놀았다고 다른 언론사에 알리는 간 큰 공무원은 없어야 한다. 그렇게 간이 크려면 스스로 청렴해야 하는데, 예전에는 그런 이가 드물었다. 셋, 북한산을 등반하다 그 낭만의 자리를 목격하고 휴대폰으로 찍어 인터넷에 올리는 시민들이 나오면 안 된다. 물론 예전에는 그러고 싶어도 휴대폰이 없어 곤란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낭만이 사라진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소수의 사이비 기자들을 제외하면 이렇게 흐물텅하게 먹고 노는 술자리는 사라졌다. 기자들도 많이 나아졌고, 공무원들도 예전과는 다르다. 그런데, 기자 사회의 낭만이 사라진 진짜 이유는 거기에 있지 않다. 1998년, 인사동에서 들었던 선배 기자의 토로에는 다른 맥락이 있었다. 그는 전혀 다른 세상이 오고 있음을 비감하고 있었다. ‘함께 있으면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던’ 친구들이 곁을 떠나고, 거리의 광풍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낭만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것, 시장경쟁이었다.


 시장경쟁은 음습한 담합의 낭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기자 개인의 영토를 뺏고, 그 땅에 뿌려진 연대의 씨앗을 고사시켰다. 나쁜 일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언론계에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망하는 신문사가 곧 나온다는 이야기였다.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경쟁자를 제쳐야 했다. 조선일보 기자와 중앙일보 기자가, 한겨레 기자와 경향신문 기자가, 술자리에서 상사의 흉을 보고 소속사의 구태를 토로하며 어깨동무하는 일이 사라졌다. 조직이 사활을 건 경쟁을 하면, 구성원 개인의 입지는 줄어들기 마련이다. “이 기사 내보내면 신문사가 망해. 이 신문사 망하면 너는 어디 가서 기자질 할 거야?” 자본의 얼굴을 한 데스크의 압박 앞에서 ‘기자’는 무너지고 ‘월급쟁이’가 자랐다.


 회사가 주는 월급 받아 사는 게 무슨 죄악이겠는가. 단란한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살겠다는 데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 그러나 그런 월급쟁이 언론인이 많아질수록 시민들은 불행해진다. 언론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 집단이다. 언론은 시민사회를 ‘대의’한다. 권력자들에겐 권력이 있고 부자들에겐 돈이 있으니, 힘없는 서민들에게 ‘말’을 돌려주어 권력과 돈 앞에 당당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한다. 누구도 그들을 선출하진 않았다. 그들에게 그런 권능을 부여하지도 않았다. 오직 자청했다. 언론의 정당성은 언제나 사후적으로 완성된다. 시민이 직접 제어할 통로가 마땅치 않다. 따라서, 시민의 정의를 대변하지 않고 권력과 돈 가진 자들을 대변하는 언론이 많아지면, 결국엔 나라가 망한다.


 ‘공익적 개입’이 거의 유일한 통로다. 투표로 언론 권력을 선출할 방도는 없다. 그렇다고 정부가 직접 개입하면 언론의 토양 자체가 사라진다. 그래서 공익 기금, 공적 부조 등의 형식을 빌어 정부는 언론을 도울 수 있다. 서로 다른 생각을 지닌 이들이 적절한 경제적 토대 위에서 지속적으로 말과 글을 시민들에게 전하도록 도울 수 있다. 미국을 제외하면, (세계가 그들의 공장이고 은행이고 시장이며 군사기지인 거대 제국이 어찌하여 공장은 사라지고 은행은 망하고 시장은 위축되는데 제국의 군사기지만 여전한 한국의 ‘모범’이 될 수 있는지를, 나는 미국 시민권을 따기 전에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주요 선진국의 대부분은 그래서 여러 기금을 만들어 작은 언론사를 배려하고 돕는다. 농업의 사회적 가치를 이해하고, 농사꾼들이 정부 보조금을 받아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과 마찬가지다.


 
야당 의원들과 시민들이 지난 25일 저녁 서울역 앞에서 열린
‘언론악법 원천무효 국민선언 촛불문화제‘에서 촛불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미디어법이 통과 됐던가? 그렇다는 이도 있고, 아니라는 이도 있다. 시민 전체가 기억의 혼란에 빠져드는 미증유의 사태 앞에서 만의 하나, 미디어법이 직권상정과 대리투표와 날치기의 권능으로 의회를 통과했다고 치자. 그것은 언론 다양성이 아니라 시장 경쟁을 북돋는 법안이다. 다양한 채널이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언론사는 몇몇 곳만 살아남을 것이다. ‘다양한 기자’는 확실히 사라질 것이다. 채널의 다양성과 언론의 다양성은 별 상관이 없다.


 시장 경쟁 자체가 ‘다원성’과는 별 상관이 없다. 그것은 독점 또는 과점을 향하는 경로에 불과하다. 정부와 한나라당이 그토록 모범으로 떠받드는 미국이 그 미래다. 미국에는 수많은 방송 채널과 수많은 신문이 있다. 그런데 그 90%가 6대 거대 미디어 기업 소유다. 자본가, 금융 전문직, 행정관료, 연애·스포츠 스타 등에 관심이 많은 언론사들이다. 언론기업을 경영할 자유는 있겠지만, 시민들의 ‘표현의 자유’가 온전히 구현되고 있는지에 대해선 이미 결론이 나온 상태다. 미국은 독점 미디어 기업의 나라다. 언론 자유의 나라가 아니다.


 거대 미디어 기업에 저항하는 언론사들이 제법 버텨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희망 섞인 관측이다.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인데, 그런 ‘저항’ 언론사조차 살아남기 위해 인력 구조조정, 상업 콘텐츠 강화, 거대 자본 유치 등의 노력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도·경영·기술·제작 등 언론의 모든 분야 종사자들은 거대 미디어 기업의 여러 자회사들에서 단기계약, 파견근로 등의 형태로 일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목숨은 파리의 그것보다 조금 더 무거울 것이다. 사주, 광고주, 주주, 데스크의 손가락질 하나에 일자리를 잃을 것이고, ‘기자’라는 소명의식 따위, 그런 기자들을 엮는 연대의식 따위, 낭만에 밥 말아먹는 소싯적 이야기가 돼 버릴 것이다.


 그래도 나는 생뚱맞고 얄궂게도 ‘낭만’에 대하여 생각한다. 내가 꿈꾸었던 기자에 대하여 생각한다. 기자는 격정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문학과 정치에 대한 동경이 이 꿈 뒤에 숨어 있다. 소설가, 정치가가 되려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자는 (문학의) 창작과 (정치의) 소통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다. 타인의 삶에 관심을 두고 그들의 삶에 영향을 끼쳐 의미 있는 존재가 되려 한다. 동시에 자유로운 실존을 지키려 한다. 조직의 억압과 구속을 최소화하면서 나만의 영토를 가꿔 두루 인정받으려는 꿈이다. 사주·광고주·주주·데스크 등에 휘둘리며 시키는 대로 쓰는 기자란, 애시당초 그런 꿈에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런 기자들이 많아지면, 언론 다양성이 지켜진다. 그런 기자들의 자리가 사라지면, 언론 다양성은 멸종할 것이다.


 지 금, <한겨레> <경향신문> <시사인>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MBC> 등은 치욕스런 통폐합의 미래 앞에 서 있다. 조중동은 국내 대기업, 초국적 미디어 기업 등을 끌어들여 방송사를 만들려 한다. 잘만 하면 다른 종편 채널이나 보도전문 채널 등을 통폐합할 것이다. 어차피 이 나라의 광고주는 3~5개 정도의 거대 미디어 기업을 후원할 만큼만 넉넉하다. 딱 그만큼만 살아남을 것이다. 광고 시장을 장악하면, 여윳돈으로 신문과 인터넷과 시사주간지 시장을 유린할 것이다. <한겨레> 등에서 일 해온, ‘실력은 있으나 너무 깐깐하지 않은’ 기자들을 높은 연봉으로 유혹할 것이며, 앙꼬를 다 내주고 겨우 버티는 매체가 있다 한들 쭉정이로 만들 것이다. 그런 매체들을 플랫폼 삼았던 독립 PD, 프리랜서 작가, 시민 기자, 저항 지식인 등은 블로그나 미니홈피에 영상과 글을 올리는 데 만족해야 할 것이며, 그러다 이메일 압수당하고 블로그 폐쇄당한 끝에 감옥에 갈 것이다.


 지금, 여기서, 즉각적인 반대가 필요하다.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에 대한 언론인들의 투쟁은 그래서 두말 필요 없이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즉각적인 구제도 필요하다. 150만원의 월급을 받으며 사는 기자들이 있다. 여유 인력이 없어 탐사보도는 꿈도 꾸지 못하는 기자들이 있다. 격무에 시달리다 마흔 줄에 심근경색이 와도 병원 치료비 구할 곳이 마땅치 않은 기자들이 있다. 각 언론사마다 ‘고립적으로’ 후원회원을 모으고 선의의 기부를 받아도 닥쳐올 언론사 통폐합에 속수무책인 기자들이 있다.


 지금이야말로 소속 매체의 경계를 넘어 기자들끼리 어깨동무하고 서로를 추켜세우는 낭만이 필요하다. 그런 낭만이 가능하려면 뜻있는 언론인을 돕는 물적 토대가 필요하다. 따로 흩어져 각자 살 길을 도모하지 말고, 더 많은 기자, 더 좋은 기자를 시민사회가 품어 안을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선의의 기업과 시민의 돈을 모아 ‘참언론재단’을 만들자. 공부도 하고, 서로 노하우도 주고받고, 취재비도 지원하고, 어려우면 경제적 도움도 주자.


 6개월 탐사 취재 아이템에 2천만 원쯤 주자. 기사를 써서 인터넷 매체에 싣고, 신문에 연재하고, 책으로도 내고, 나중에 다큐로 만들어 극장에서도 상영하자. 기자 개인도 살고, 언론도 사는 길이다. 이런 일을 각 언론사는 도모할 수 없지만, 재단이라면 가능하다. 개별 언론사가 얼마 안 되는 인력으로 인터넷도 하고 방송도 하고 신문도 내면서 살아남으려 용쓰지 말고, 시민사회에 산재한 ‘광범위한 기자’들을 끌어안고 활용하자. 자유로운 영혼의 기자들이 더 많은 시민을 더 오래 만나 더 좋은 기사를 쓰도록 돕자. 그리고 그들이 매체 장벽을 넘어 두루 기여할 수 있도록 돕자. 어쩌면 좋은 언론사의 체질을 강화하는 선의의 매체 합병이 참언론재단과 같은 공익·시민적 조직에 의해 이뤄질 수도 있다.

 

 거대 자본으로 규모를 키우는 앞에서 고립된 뉴스룸 운영으로 살아남길 꿈꾸는 것 자체가 망상이다. 조금 늦었지만, 이제야말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언론사를 시민에게 개방하자. 고립적인 채용, 고립적인 임금 테이블, 고립적인 뉴스 플랫폼을 헐어 버리자. 뜻이 있고 능력이 있는 ‘자유 기자’들에게 물적 토대를 제공하자. 그 시민들이 곧 뜻있는 언론사의 노동과 자본과 시장이 되게 하자.


 거대 미디어 기업들이야 계속 기업가·특목고 졸업자·미국 유학생·연예스타 따위의 기사를 쓰라고 내버려 두고, ‘우리’는 노동자·실업고 졸업자·국내 박사·대학로 연극인 등에게 관심을 쏟자. 물론 그 가운데는 새로운 시선으로 기업가·특목고·연예스타의 가치를 발견하는 ‘진짜 보수’ 성향의 기자들도 있을 것이다. 무슨 상관인가. 그런 이들까지 두루 품어 안는 것까지가 진정한 언론의 다양성이다. 그런 일이 가능하도록 시민사회의 돈을 모으자. 신문사 하나, 방송사 하나 세우는 데 그치지 말고, 시민의 언론 전체를 살찌우는데 쓰자. 그러고도 누가 살아남는지 진짜 한번 겨뤄 보자. 그러지 않고서야, 기자 사회의 낭만은 정말이지 사라질 것이다. 멸종할 것이다. 지금 죽음 앞에 서 있는 것은 언론사가 아니라 언론인이며 시민의 자유다.



  춘천-서울 민자 고속도로가 뚫리고 난 뒤 기대와 절망이 교차되고 있는 때에 그 녀석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사업수완이 뛰어났던 그는 그동안 나이트클럽, 골프연습장, 결혼식장, 바다이야기 게임장등을 운영하면서 돈을 꽤 모았고, 그래서 제법 숱한 아우들을 거느리며 동네에서 행세하는 유지가 되어있다.


   “나, 요즘 골프장 때문에 먹고 살잖아 !”


 나는 그가 경춘가도 어디쯤에다 18홀 짜리 골프장을 열었다는 이야기로 듣고 겉으로는 반색하면서도 속으로는 ‘어휴!, 또 나랑은 엉뚱한 길로 가는 구나’며 투덜대고 있는데, 그 녀석은 엉뚱하게 “야, 00리 골프장 반대 주민들, 우리가 풀고 길 열어 줬어”면서 한방 먹이며 내 생각의 꼬리를 자르고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식당에는 그의 아우들이 어깨에 힘 잔뜩 주고 꾸역꾸역 콩국수를 들이키고 있었다. 그는 영화 ‘똥파리’의 상운처럼 속으로는 여린 가슴을 지닌 양아치라기보다 세상 물정에 밝고 그래서 동네 역관계도 적절히 탈 줄 아는 ‘합리적’인 초기 자본가에 가깝다. 그런 그도 춘천에서는 제법 주먹깨나 휘두르고 행세한다지만 한낱 외지자본의 길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춘천 - 서울 고속도로가 열리면 누구에게 좋지?”라는 내 궁금증을 민자 고속도로를 따라 밀려들어 오는 돈방석에 올라타고 있는 중학교 동창 놈이 풀어 준 셈 이다. 하긴 앞으로 민자 고속도로 주변 춘천시 지역에만 골프장이 16개가 들어설 계획이라고 하니 이제 춘천시민 누구나 멋진 그린에서 골프를 치게 될 날이 멀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서울 사람들에게는 늘 대학시절 낭만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인 강촌이 꽤 오래전부터 강변마다 들어선 펜션으로 흉측해졌지만 민자 고속도로 개통으로 땅 값이 천정부지로 뛰고 있고 기업형 대규모 펜션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라며 지역신문이 장황한 기대감을 늘어놓는다.


 
서울-춘천간 민자고속도로 개통식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그 리고 아예 “춘천 서울 고속도 개통... 부동산 시장 들썩”이라는 제목을 1면에 달고, 춘천 땅이 활발하게 거래되고 값이 올라가려면 어찌해야 한다는 전문가의 친절한 조언까지 부쳐놓았다. 민자 고속도로 개통 덕에 바야흐로 춘천 시민들이 개발 시기 강남부자들처럼 거액을 횡재 할 날이 눈앞에 다가온 모양이다. 또 골프장, 리조트에 널린 일자리 탓에 지역경제가 쾅쾅 돌아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아 보인다.


 그것뿐인가?


 분히 수도권과 불과 38분 거리일 뿐인 춘천에 매력을 느낀 각종 기업들이 쇄도 할 것이므로 춘천시민들의 숙원인 인구 50만 돌파도 현실이 될 것이다. 수도권의 이웃인 춘천시민들은 ‘용역’으로 취직하고, 부동산 수수료 챙기며 골프장, 리조트에서 ‘고객님’의 만족을 위해 서비스하면서 대한민국 최첨단 자본주의가 주는 안락함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동해안 가는 가장 빠른 길 ‘서울 춘천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이제 ‘개나리 꽃피는 마을’ 춘천은 수도권의 ‘이웃’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지하철 6호선 응암역 근처에 작은 공원이 있다. 주 도심처럼 복잡하기야 할까마는 명색이 역세권이라 큰 아파트도 몇 동 있고 높게 지은 상가도 있으니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잠시 쉬어가기엔 부족함이 없는 공간이다. 으레 역 주변이 그렇듯 과일이며 채소를 파는 승합차도 있고 낮술에 취한 노인네들 다투는 소리도 있고 근처에 있는 병원생활이 답답해 밖으로 나온 환자도 있다. 누군가 망해서 나간자리에 새 꿈을 안고 입주한 상가에서는 아치형 풍선 아래서 현란한 몸짓으로 가게를 홍보하는 아가씨들이 있고 앞으로 남학생들이 몇이 킥킥 웃으며 지나간다. 대형마트로 장 보러 가는 엄마는 솜사탕을 먹고 싶어 하는 아이의 손을 거부하지 못하고 리어카 앞에서 잠깐 실랑이를 하기도 한다. 다들 열심히 산다.


 “별일 없이 산다”고 “내가 이렇게 사는 줄 안다면 너는 깜짝 놀랄”거라고 노래하는 가수와 나를 빼놓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별일 있이 사는 것 같다. 


 그 공원에 또 별일 있이 사는 사람이 있다. 능글맞은 말투와 표정으로 지나치는 사람들의 행색까지도 살피며 “신문한번 보시라구”라는 말을 간첩 접선 시도하듯 전하는 신문 판촉 요원이 그이다. 내가 좋아하는 신문 이라면야 캔 커피라도 한잔 사주며 수고하신다고 맞장구치겠지만 그 양반 꼭 조중동만 판다. 처음에는 못 봤지만 그의 손에는 봉투가 들려져 있다. 바로 눈앞에서 봉투를 흔들면 가지런히 펼쳐진 배춧잎사귀 몇 장이 부채가 되어 무더운 여름날 그 맞기 힘들다는 돈바람 쐬어준다. 영 달갑지 않으니 시원할 까닭도 없다. 나야 그렇다 치고 동네 아줌마 몇 분 그사이에 홀딱 넘어간다. 이유야 어떻게 되었든 단돈 십 만원 변통하기도 어려운 요즘 세상에 언놈이 그와 같은 돈을 공짜로 하사한단 말인가. 그 정도 돈이면 두어 달 치 아이의 급식비를 낼 수 있고 매일같이 사달라고 졸라대는 아이의 메이커 신발값을 반쯤은 댈 수 있고 매월 말 한숨 쉬는 만큼 빠져나가는 공과금의 몇 분의 일쯤은 담당할 수 있으니 늘 빠듯한 규모의 삶을 사는 아줌마들에게 그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은 아이의 고사리 손에 쥐어준 솜사탕보다 더 달콤한 것이겠다. 그가 나에게 접근해 온다면 나는 단 한마디의 말로 불쾌한 흥정을 거부할 수 있다. “나 한겨레 보는 남자야!” 그러나 그와 나는 단한번의 대화도 하지 않았다. 그가 나의 정체를 알아 봤거나 내가 그를 에둘러 피해갔거나...



백화점 앞에서 한 일간지 판촉사원(모자쓴 이)이 뒤춤에 상품권이 담긴 봉투를 들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한겨레 기획위원인 홍세화 선생은 한겨레, 한겨레 21 구독신청서를 꼭 들고 다닌다. 최근에 새로 맡은 직책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인이니 구독신청 용지가 세장이다. 수없이 다니는 강좌의 말미에는 꼭 그 용지를 들이밀고 구독신청을 받는다. 풍부한 학식과 경험에 나오는 그의 열강에 감동한 사람들은 예의 선한 웃음과 함께 건네는 구독용지를 거부하지 못한다. 얼마 전 모 단체 후원 감사의 밤이 끝난 뒤풀이 자리에서도 그는 용지를 들고 테이블을 돌며 구독신청을 받고 있었다. 누가 봐도 진보적 일간지의 기획위원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잡지사의 편집인이며 더군다나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인 그가 해야 할일은 아니다.


 시민사회 단체의 행사에 이름 새겨진 화환 좀 돌리고 열심히 하는 후배들 어깨나 도닥거리고 무슨 무슨 단체의 이사쯤으로 이름 올리고 회의는 바빠서 못가거나 일 년에 한번 얼굴 비추고 가끔씩 생기는 지면에 “요즘 세상이 어째...”류의 칼럼 몇 자 적으면 충분히 어르신 대접 받는 연배임에도 그는 여전히 현역 언론인으로 발품을 팔고 있다. 줄을 세우면 보이지도 않을 새카만 후배 언론인도 하지 못하는 그 험한 일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다. 그에게 구독신청서를 적어서 돌려주는 사람들의 표정도 모두 밝다. 기쁜 일 함께 나눠주어서 고맙다는 표정이다. 나도 그랬다 꽤 비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정기 구독을 신청하면서 나도 저분처럼 나이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감사한 마음.


 “프랑스에 폴리틱스 라는 주간지가 있는데 말이지요. 그 사람들 독자 관리하는 게 우리와는 사뭇 달라요. 아주 질겨요. 자기들 밥줄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명확히 아는 거지요. 근데 질겨도 우리 조중동처럼 돈으로 처바르는 짓은 안 해요” 대학생 인권학교에서 만난 홍세화 선생이 우리 일행에게 잠깐 들려준 프랑스 잡지의 예는 무척 흥미로웠다. “폴리틱스”라는 잡지는 독자가 구독을 끊을 때 6번의 편지를 받는다고 한다. 정기구독 만료 2개월 전. 1개월 전에는“귀하의 구독기간은 언제 까지 입니다”  보름 전에는 “연장을 안 할 시에는 결호가 생깁니다.”구독이 끝나는 시점엔 “귀하에게 폴리틱스 라는 잡지가 더 이상 의미 없는 것입니까?”라는 다소 신파적 메시지가, 구독 만료 이후에도 2달치를 무료 공급하면서 다시 한 번 “아직 생각이 바뀌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동안 구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잡지는 광고를 실지 않는다고 한다. 순수한 독자들의 구독료로만 운영해야하니 독자 한사람 한 사람이 소중한 것이다. 구독료야 말로 잡지를 꾸려가는 사람들의 생계인 것이다.


 어줍지만 나도 몇 장의 음반을 만들었다. 대학 강의도 하고 단체를 만들어 모금도 했다. 그러니 나의 밥줄은 음반을 구입해준 청자(廳者)들이고 학생들이 수강신청을 부족하지 않게 해주니 대학에서 받는 월급의 근원은 학생들이다. 7억여 원이 넘는 모금에 참여해준 사람들 때문에 “에다가와 민족학교 지원모금”이라는 단체는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밥줄인  그 사람들에게 살갑게 다가가지 못했다. 음반 구입방법을 물어오는 이에게는 인터넷에서 대충 검색해 찾아오라는 말밖에 못했고 강의 내용의 새로운 부분들에 대한 학생의 의견을 무시했다. 공연이나 강연을 의뢰하는 이들을 까칠한 요구로 곤란하게 만들었으니 살아야할 인생의 절반을 넘긴 나이에도 나는 아직 내 밥줄에 대한 진정성이 부족한 것이다.


 조중동 판촉요원의 불쾌한 유혹을 보면서 “한겨레”나 “경향“은 왜 안 되나? 싶을 때가 있다. 물론 그들이야 만 원짜리 몇 장의 호객행위로 신문시장을 왜곡시키지만 그럼에도 “별일 있이 사는”조중동 판촉요원인 그의 열심을 내가 선호하는 신문에게서 볼 수 없는 것은 무척 아쉬운 부분이다. “한겨레”나 “경향”같은 진보적 일간지의 모든 기자가 호주머니에서 정기구독 신청서를 꺼내는 장면을 상상한다. 이 정권 들어서 생긴 재정악화로 고민하는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가의 가방에 수북히 모아둔 회원가입 신청서를 상상한다. 참 좋은 일이다. 나도 이참에 음반 몇 장씩 들고 다니며 여기저기 들이 밀까한다. 물론 홍세화 선생처럼 폼 나지는 않겠지만...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정부가 ‘대한늬우스’를 새로 제작해 극장에서 상영한다고 해 화제다. 우리가 어린 시절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볼 때면 꼭 거쳐야 하는 몇 가지 절차가 있었다. 우선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모두 일어나 국기에 대한 예의를 표해야 했고 그 시간이 끝나면 이어서 바로 그 ‘대한늬우스’가 상영되었다. 월남 파병 군인들을 환송하는 환송식, 반공 궐기대회 장면, 국제기능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에게 표창을 주는 대통령의 모습, 전국적인 쥐잡기 행사 같은 것들이 극장을 찾는 국민이 다 함께 보아야 하는 ‘늬우스’들이었다. 그 시절 곧 시작될 영화 속 환상의 세계를 가슴 터질 듯 기다리던 아이들에게 ‘대한늬우스’는 그저 빨리 지나갔으면 싶은 시간이었을 뿐이다. 영화보기를 좋아해 어지간히 자주 극장을 찾았던 나이지만 그 숱한 ‘대한늬우스’를 관심 있게 보았던 기억은 단 한 번도 없다.  


이명박 정부가 새로 기획한 '대한늬우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내가 ‘대한늬우스’를 재미있게 보게 된 것은 오히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최근의 일이다. 요즘도 KTV같은 채널에서 과거의 ‘대한늬우스’ 필름을 더러 볼 수 있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우연찮게 과거에 제작된 ‘대한늬우스’ 필름을 보게 되면서 나는 이 낡은 흑백 필름이 뜻밖에도 꽤 재미있는 볼거리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재미란 물론 어린 시절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나 향수와 무관하지 않다. 그래, 그 시절엔 저렇게들 살았었지, 뭐 그런 거 말이다. 하지만 그런 아련한 향수보다 더 큰 것은 그 시절의 ‘늬우스’들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코미디였는지를 새삼 반추하는데서 오는 재미다. 생각해 보라. 쥐 잡는 날을 정해 전국적으로 쥐약을 배포하고 집집이 쥐덫을 놓아 쥐를 잡는 광경이나 ‘덮어 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따위 표어와 함께 가족계획 캠페인을 벌이는 장면, 반공 궐기 대회에 모인 군중 앞에서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치며 혈서를 쓰는 아저씨들, 그리고 그 대열의 맨 앞에 서서 어깨띠를 두른 채 무표정하게 서 있는 명 연예인들의 모습이란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코미디인가. 그건 마치 요즘 가끔 TV에서 보여주는 60, 70년대의 한국 영화를 볼 때, 기둥을 붙잡고 우는 배우의 신파 연기를 보면서 낄낄 웃음이 터지는 것과도 비슷하다. 시대의 맥락이 바뀌면서 심각하고 진지한 비극이 배꼽 잡는 희극으로 뒤바뀌는 순간이다. 웃을 일 별로 없는 요즘 웃음이 필요한 분이라면 왕년의 ‘대한늬우스’를 한번 찾아보시라. 강추다.

 정부가 새로 기획한 ‘대한늬우스’는 개그콘서트를 패러디한 코미디 형식이라고 한다. 그래도 과거와 같은 ‘진지한’ 뉴스 형식으론 안 먹히리라는 생각은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대명한 21세기에 극장에서 정부 정책 홍보 영상을 틀겠다는 발상 자체가 기막힌 코미디라는 건 왜 생각을 못했을까. 코미디는 의외의 반전에서 최고의 웃음이 터지는 법이다. 대 놓고 코미디하겠다는 걸 보고 웃어줄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럴 바엔 차라리 수십 년 전의 진짜 ‘대한늬우스’처럼 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쥐잡기 캠페인 같은 거 한번 다시 해 보면 어떨까. 아마 사람들이 엄청 재미있어 할 게다.

 

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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