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지난 9월에 검찰이 인도인 보노짓 후세인 성공회대 연구교수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이유로 박아무개를 기소하였다. 이 사건은 여러 가지 면에서 눈에 띤다. 우선 이런 종류로는 처음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다인종‧다문화적 성격이 강화되고 있는 우리나라 상황에서도 생각할 바가 많다. 발언자가 특별히 폭력행위를 준비했던지 그렇지 않던 간에 발언 자체가 갖는 부정적인 상승 작용 때문에 인종차별적 발언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매우 높다. 특히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강력하게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들도 인종차별적 발언을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보호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정도이다. 인종차별적 발언에 담긴 세상은 이질적인 집단들의 정체성이 공존하는 다원적 질서가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국제사회는 인종차별적 발언을 단순히 개인에 대한 범죄가 아니라 인종 범죄 수준에서 접근하고 있다. 통상 사회적 약자 집단을 향한 차별적이고 공격적인 발언을 증오적 발언(hate speech)이라고 한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증오적 발언은 인종, 성, 연령, 민족, 국적, 종교, 성적 지향, 성정체성, 장애, 언어능력, 사회경제적 계급, 장애, 도덕적 또는 정치적 견해, 직업, 외모(신장, 체중, 머리색), 정신적 능력, 여타 구별요소에 기초하여 사람이나 사람들의 집단을 비하하거나 위협하거나 폭력과 편견에 찬 행동을 선동할 의도에서 이루어진 발언을 의미한다. 어쩌면 인간을 구별하는 특정징표에 의존하여 이루어진 비신사적인 발언이 모두 증오적 발언에 해당할 수도 있다. 국제사회는 그 중에서 특히 인종에 입각한 차별적 발언을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다루고 있다.

 규제옹호론자들은 이러한 유형의 증오적 발언이 저질 표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범죄적 행동이라고 한다. 이들은 알포트(G. Allport)의 편견의 단계이론을 좋은 근거로 원용한다. 알포트는 유대인 집단살해 과정을 심리적으로 다섯 단계로 설명하였다(The Nature of Prejudice, 1954). 처음에는 특정집단(유대인)에 대한 편견을 단순히 표출하는 부정적 발언(antilocution)의 단계에서, 이러한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을 기피(avoidance)하는 단계, 이들을 배제하고 차별(discrimination)하는 단계로 발전하고, 다음에는 그들에 대한 물리적 공격(physical attack)을 가하는 단계로 상승하고, 마지막에는 집단 전체에 대한 절멸(extermination)의 단계에 이른다는 것이다. 증오적 표현은 제1단계인 부정적 발언에 해당하고, 첫 단계에서 방치하면 증오의 감정이 팽배하게 되어 위기의 상황에서 타인종, 소수민족, 외국인에 대한 폭력 범죄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서울 강남역 대로에 홀로 서 있는 후세인. 한국인의 차별 속에 외롭게 서 있는 뒷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사진 출처 - 한겨레

 물론 일상에서는 인종차별적 의도 하에서 공격적 발언을 일삼는 혈통파나 네오나치와 같은 부류들도 있지만, 특별한 공격의도 없이 차별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인종차별적인 발언은 발언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언의 상대방은 사회적 인종적 약자로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위협을 느끼게 된다는 점만큼은 보편적 진실이다. 일각에서는 우리 역사가 앞서 말한 유대인 학살, 아파르트헤이트, 흑인노예제 등을 수반했던 나라들의 역사와 다르다거나 우리 민족은 외국인에 대해 정이 넘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전반적으로 동의하기도 어렵거니와, 있다하더라도 정도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근대자본주의와 인종주의는 깊은 상관성을 가지고 있다. 근대자본주의는 인종을 착취 활용하였으며, 인종적 우열의 논리를 통해서 자본주의는 심화되어 왔다. '순혈' 한국인들과 유럽인종이나 일본인들, '순혈' 한국인들과 주변부의 어두운 피부의 사람들의 관계를 공시적으로, 통시적으로 생각해 보면 친절과 적의가 본질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지배질서에 연관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인종주의는 자본주의적 세계질서의 내면이고, 경제적 억압과 착취의 심리적 표현에 가깝다. 전후 세계질서는 이와 같은 가학적 세계관과 이를 조장하는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였다.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은 "차별, 적의 또는 폭력의 선동이 될 민족적, 인종적 또는 종교적 증오의 고취는 법률로 금지"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제20조 제2항). 인종차별철폐협약은 직접적인 폭력행동뿐만 아니라 인종주의를 전파하거나, 인종적 증오를 고취하거나, 특정인종에 대한 폭력행동을 선동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제4조). 르완다 국제법정은 증오적 표현을 국제관습법에 위반된다고 선언하면서 전쟁범죄의 일종으로 다루었다. 증오적 발언이 단순한 언어적 표출이 아니라 공격, 지배, 살륙의 과정이라는 점을 확인한 것이다. 우리는 증오적 발언, 즉 인종차별적 발언, 장애차별적 발언, 성차별적 발언, 반인도범죄의 희생자에 대한 모욕적 발언 등이 가지는 가학적 성격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아야 한다. 이 문제는 바로 세계관에 대한 세계관의 힘겨운 싸움이다. 그러나 이를 형벌로 간단하게 해결할 생각은 버려야 한다. 형벌이 세계관을 바꾼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전종휘/ 한겨레21 기자

 나는 이른바 캥거루족이다. 마치 어미 캥거루 뱃주머니 속 아기 캥거루마냥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부모님 집에 세들어 살고 있다. 그러던 지난 겨울 함께 살고 있는 어머니와 여러 차례에 걸쳐 다투는 일이 벌어졌다. 아들이자 세입자인 내 입장에서는 결코 유리할 것 없는 다툼이었다.

 까닭은 이랬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던 큰 아들 녀석을 데리고 지금 살고 있는 집의 골목길 앞 쪽으로 주소지를 옮기겠다고 했다. 그 쪽 주소지라야 인근 ㅁ초등학교로 입학하라는 취학 통지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주소지에서는 다른 ㄱ초등학교로 입학해야 한다. 그런데, ㅁ초등학교는 나와 내 누이가 졸업을 한 유서 깊은(?) 초등학교인지라, 어머니는 유달리 그 학교에 애착을 느끼시는 듯했다. 지금보다 더 가난했던 시절, 누나는 시골 초등학교를 다니다 전학 왔고, 얼마 뒤 나마저 입학해 6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공간이라, 누구나 그렇듯, 내게도 ㅁ초등학교에 대한 기억은 애틋하다. 어머니는 주변 이웃들에게 물어봐도 ㄱ초등학교보다 ㅁ초등학교의 평가가 훨씬 더 낫다고까지 주장하셨다. ㅁ초등학교가 ㄱ초등학교보다 더 가깝다는 억지 주장까지 펴는 등 어머니의 파상 공세를 막아내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반대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런 식으로, 살지도 않으면서 주소지를 옮기는 건 주민등록법 위반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머니에게 "요즘 공직자들 청문회하는 것 보세요. (당시는 물론 최근의 청문회가 열리기 한참 전이다.) 내가 공직에 진출할 일은 없지만, 기사에서 당위를 주장하는 기자가 그런 식으로 위장전입해서 되겠어요?"라고 설득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그래도 못내 아쉬워하셨다. "엄마가 무슨 말을 해도, 들어먹는 게 없다"며 속상해하셨다. 그 뒤로도 설전은 몇 차례 파도를 더 타야 했다. 결국 할미의 입김보다는 애비의 입김이 더 세게 작용한 결과, 큰 녀석은 지금 ㄱ초등학교에 잘 다니고 있다.

 그러다 최근 총리나 장관직 지명자들의 청문회를 보면서 열 달 전 기억이 계속 떠올랐다. 위장전입에 탈세에, 우리 사회에서 돈 좀 있고 힘깨나 쓴다는 자들이 저지를 법한 웬만한 탈법은 다 저지른 그들. "이른바 총리하실 분은 물론이고 장관 하실 분들마저 다 저러는데, 저들과는 달리 이른바 공인의 범주에도 끼지 못하는 내 주제에 그냥 어머니에게 위장전입을 하시라고 할 걸 그랬나?"하는 생각도 들고, "저런 범법자들이 청문회에서 고개 한 번 숙이고는 우리나라의 법과 정책을 집행하는 장관 자리에 앉는 게 이명박 대통령이 걸핏하면 입에 달고 다니는 법치의 실체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귀남 법무장관 후보자가, 17일 오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박영선 민주당 의원(오른쪽 사진)이 부동산 거래 등 재산형성 과정에 대해 따져묻는 동안,
입을 굳게 다문 채 땀에 젖은 손가락(가운데 사진)으로 자료를 짚어가며 살펴보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불쌍하게 된 건 법이다. 비로소 법은 그 스스로 딜레마에 빠지게 됐다. 주민등록법상 3년 이하의 징역이나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지른 총리와 장관들이 내리는 명령에 법은 순종해야 하는가? 보나마나 저들은 웬만한 집회는 금지한 뒤 그 집회를 연 주동자를 잡는다며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열 것이고, 총리와 법무장관은 엄단 의지를 담은 담화문을 내놓을 것이다. 자신들의 범법 행위보다 처벌규정상으로는 훨씬 가벼운, 집시법상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돼 있는 집회 주동자들을 반드시 검거한 뒤 처벌해 우리 사회의 기강을 잡겠다며 기염을 토할 것이다. 그들이 불법 집회 참가자들을 잡아갈 때 애용하는 도로 교통법상 교통방해죄(도로에 서거나 앉거나 누워 교통을 방해한 죄)는 기껏해야 20만원 이하의 벌금이나 구류 또는 과료에 그친다는 것을 저들은 알까?

 법무부나 경찰 등이 애용하는 형법 이론에 `깨진 유리창 이론'이 있다. 공중전화 유리가 깨진 걸 그대로 놔두면 거기에 쓰레기가 쌓이고 그러다보면 그 곳에서 더 큰 범죄가 일어나더라, 따라서 작은 범죄가 일어났을 때 강력히 처벌해야 큰 범죄로 이어지는 걸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그 동안 참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미신고 집회 시위가 일어날 때마다 이 이론을 들이댔다.

 이 정부 들어 총리와 장관직 후보자들이 각종 불법, 탈법을 저지른 사실들이 계속 밝혀지고 청와대는 임명을 강행하는 모습을 보며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깨진 유리창 이론을 스스로에게 적용할 수 있는, 터럭만큼의 양심도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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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월 23일 UNHCR(유엔난민고등판무관) 사무실이 있는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 날 기자회견은 이주노동자이자 기독교인이고 난민인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란출신 난민 O씨는 3년9개월째 화성외국인보호소에 수감되어 있다. 그는 두 달 가까이 곡기를 끊은 채 단식투쟁을 하고 있다.

 외국인보호소는 공식적인 국내 체류자격을 얻지 못한 외국인들을 “강제 퇴거” 시키기 위해 일시적으로 수용하는 구금시설인데, 그 환경이나 구금자에 대한 처우는 일반 형사범을 수용하는 교도소보다 훨씬 못하다. 일반적으로 교도소에서 3년 이상 복역한다면 매우 중한 범죄를 저지른 경우라 볼 수 있는데, 난민 O씨는 남에게 해를 끼치는 어떤 범죄행위도 하지 않았다. 다만 출입국 관련 행정절차를 어겼고 본국으로 돌아가면 박해를 받을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난민지위를 인정해 달라고 요구한 죄(?) 밖에 없다.

 올해 2월 대법원은 O씨의 난민인정 요구를 최종 기각했다. 이것은 그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난민 O씨는 2005년 5월 31일 한국에 입국했다. 무슬림이었던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이 곳 저 곳에서 일을 하다가 동두천 모 교회에서 열린 쿠르드 예배에 참석하고 나서부터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다. 그런데 그해 11월 한국에 와 있는 어떤 이란 사람과 술을 마시다 취한 상태에서 그가 권한 “하쉬쉬”라는 담배를 받아 피웠다. 그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경찰이 들이닥쳐 ‘마약 복용’ 혐의로 그를 체포했다. 한국은 범죄와 연관되지 않은 마약흡입 행위에 대해서조차 대단히 엄격하게 처벌하는 나라다. 전인권, 김부선 씨 등 수많은 유명 연예인들이 이 때문에 가혹한 처벌을 받았고 그 문제점 또한 적지 않게 지적되었다. 결국 그는 뜻하지 않게 체포되어 집행유예지만 유죄를 선고받게 되었고, 2005년 12월 12일 “강제퇴거” 명령과 더불어 화성외국인보호소에 갇히게 된다. O씨는 이곳에 수감되자마자 본국으로 돌아가면 기독교로 개종한 것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된다며 난민신청을 하였다. 하지만 법무부는 이듬해 3월 그의 신청을 기각했고, 난민지위를 인정받기 위한 O씨의 3년여에 걸친 기나긴 법정투쟁이 이어지게 되었다.

 대법원은 그가 한국에 입국하게 된 동기가 경제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점, 보호소에 수감된 이후 뒤늦게 세례를 받았고, 이란 영사관 직원에게 개종사실을 알렸다는 사실만으론 난민협약상의 박해라고 부를만한 중대한 인권침해가 있을 거라 예상하기 어렵다는 등의 이유로 난민신청을 기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이란의 현실상황을 모르고 내린 판결이다. 2009년 9월 9일 이란 정부는 “배교자”는 사형에 처하도록 형법을 개정했다. 입국 동기야 어떻든 간에 3년여에 걸친 기나긴 재판과정에서 그의 개종사실을 이란 정부가 확실하게 인지하게 되었고, 만일 이대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의 생명이 위태로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주노동자 차별철폐와 인권·노동권 실현을 위한 공동행동’ 소속 회원들이 23일 오전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화성외국인보호소에 장기 구금된 이란인의 강제송환과
장기 구금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 상임이사국으로 있는 한국의 난민인정 제도에 대해서도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출입국 관련 통계에 따르면 1994년 한국이 난민협약을 비준한 이래 올해 4월까지 난민신청자 2,262명 가운데 107명만이 난민으로 인정을 받았다. 채 5%도 안 되는 수준이다. 특히 비자기간이 만료돼 “불법체류자”로 몰려 외국인보호소에 갇히게 된 난민신청자들의 경우 인정받게 될 확률은 소수점 이하다. O씨는 그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를 걸고 3년9개월을 기다려 왔다. 이것만으로도 개종 때문에 난민지위를 신청한 그의 진정성은 충분히 입증된 것이 아닌가?

 한국을 비롯해 난민협약에 가입한 대부분의 나라들이 난민의 범위를 매우 협소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정치적, 종교적 난민은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지만 ‘경제적 난민’의 경우 아예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하지만 난민을 신청하는 사람들은 대개가 동남아, 중동, 아프리카 등 정치상황이 불안정하고 가난한 나라에서 온 노동자, 서민들이다. 이런 나라들에 있어서 난민 협약상 박해의 사유가 되는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문제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독재국가일수록 경제적 불평등 문제가 심각하다. 당연히 이에 따른 아래로부터의 저항과 불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정권은 이것을 분쇄하기 위해 종교를 내세워 국민을 분열시키고 인권을 탄압한다. 난민 협약이 단지 립 서비스가 아니라면 협약 비준국들은 이런 사정을 정확히 반영해서 원래 취지인 인도주의 정신에 맞게 난민인정 범위를 확대하는 게 바람직하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난민문제를 미등록 이주노동자 문제와 연결시켜 난민인정 절차를 더욱 까다롭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고서도 대외적으로는 “따뜻한 다문화 국가”를 지향한다며 선전한다.

 장기간의 단식투쟁에다 3년 9개월 동안 구금생활을 겪고 있는 난민 O씨의 건강상태는 매우 심각하다. 그를 만나서 문진하고 돌아온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소속 한 의사에 따르면 “하루 내내 지속되는 가슴통증과 복부통증을 호소하고 있고 점점 증상이 심해지고 있으며 최근 흑색 변이 잦다는 것으로 보아 십이지장 출혈도 의심”된다고 한다. 난민 O씨에겐 긴급한 의학적 조치가 필요한데도, 화성외국인보호소가 자체 의료진에 의한 진료가 이뤄지고 있다는 이유로 방치하고 있는 것은 명백한 인권침해다.

 출입국 당국은 그동안 법원에서 난민인정 요구가 기각된 만큼 행정절차에 따라 강제 송환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난민 인정여부와 관계없이 자국에 송환되면 박해를 당할 우려가 있는 사람들은 난민이라 할 수 있다. 본국으로 송환되면 생명마저 보장받기 어려운 난민을 강제 송환하는 것은 국제법상으로도 금지되어 있다. 인권보장을 존재이유로 삼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더더욱 이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난민 심사 및 재판과정이 오랜 기간 동안 진행되었지만 출입국 당국이나 재판부 모두 어떤 편견에 사로잡혀 O씨의 박해 가능성을 정확히 진단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절차가 공정했다고 볼 수 없다. 아무리 본인이 원했다 해도 난민인정을 받기 위해 3년9개월을 교도소보다 더 못한 구금시설에 가둬 놓는 것은 반인권적인 처사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O씨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법무부는 지금 당장 난민 O씨를 화성외국인보호소에서 석방하고 난민 심사를 다시 해야 한다. 이 문제는 단지 O씨의 경우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을 “희망의 땅”으로 여기고 왔다가 절망만 가득안고 다시 위험 속으로 내던져지고 있는 이주노동자, 난민신청자들을 위한 제도개선과 적절한 인권구제조치가 하루 속히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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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월 18일 한국노동연구원의 박기성 원장이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열린 「국무총리실 2008 회계연도 세입․세출결산」에 소관기관 배석자로 나와 “사석에서 노동3권을 헌법에서 빼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느냐”는 유원일 창조한국당 의원의 질문을 받자 “나는 그게 소신이다”라고 한 후 “개헌을 하면 (노동3권을 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사철 한나라당 의원이 무슨 취지로 그런 말을 했느냐고 묻자 “다른 나라는 노동3권이 법률로 보장되면서 견제와 균형이 이뤄질 수 있는데, 우리는 헌법적 권리여서 현실하고 어긋나고 있다”고 설명했다고 한다(9월 18일자 한겨례신문).

 그의 전공이 경제학이긴 하지만, 그런 식의 행동이나 사고방식이 경제학자의 전형적 생각 혹은 올바른 태도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경제학자들 중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시장이라는 경제적 도구 외의 다른 것(예컨대 민주주의)에 의해 작동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결국 9월 18일자 신문에 나타난 위 해프닝은 시장 외의 것에는 무지한 경제학자 중 한 명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치명적 잘못은 아니다. 왜냐하면, 전공 분야 외의 것에 대해서 무지한 것은 거의 모든 학자들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현재와 같이 전공이 세분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다른 전공 분야에 대해서까지 잘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의 더 큰 잘못은 그가 자신의 직책에 맞지 않는 언행을 하였다는 점이다. 그의 행동을 비유하자면, 마치 경제 관련 국책 연구기관의 원장이 우리 헌법의 자유주의적 시장경제를 폐지하고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를 채택해야 한다고 발언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그가 어느 학교의 교수이거나 경제학자에 불과하다면, 이런 말을 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학자들이 노동정책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헌법과 법률에 따라 설립된 국책 연구기관의 수장이라는 점, 그리고 한국노동연구원이 중립적 시각에서 국가의 노동정책을 개선해야 할 책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의 행동은 헌법 정신을 부정하고 연구원의 중립성을 훼손한 것으로서 매우 큰 과오이다. 개인적으로 그런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와 반대되는 일을 해야만 하는 한국노동연구원의 원장으로 부임하지 않는 것이 경제학자로서 올바른 태도였을 것이다. 그는 한국노동연구원의 원장으로 재직하다 임기를 마친 후 다시 학교로 돌아가면 되지만, 그로 인하여 훼손된 한국노동연구원의 중립성은 남아 있는 구성원들이 오랫동안 치유해야 할 상처가 되고 말았다.


단체교섭 성실 이행을 촉구하며 8일 째 전면파업을 벌이고 있는
한국노동연구원 노동조합은 29일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앞에서
집회를 열고 "정운찬 신임 총리는 한국노동연구원 사태를 즉각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사진 출처 - 민중의소리

 그러나 나는 그의 그러한 발언이 진실성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제헌 헌법 이래 한국 헌법에서 노동3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이 계속 유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노사관계의 현실이 그러한 헌법적 규범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무지한 자들이 국가의 규범 체계를 비난하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려 할 때에는 1차적으로 자신의 경험에서 그 정당성을 찾는다. 예컨대 폭력을 행하는 교사는 학생들을 규율하는 방법으로서 체벌(體罰)만을 떠올리고,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권력을 휘두른 경험을 가진 자들은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공권력의 확대나 민간인 사찰과 같은 과거의 도구만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법제화시키고자 노력한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박기성 원장의 발언은 어느 정도 한국 노사관계에 관한 진실성을 담보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경험한 바와 같이, 한국 노사관계의 현실은 헌법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 단결권이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데도, 여전히 사업장에서의 복수 노조의 설립은 매우 어렵다. 공무원이나 교사의 단체교섭권이나 단체행동권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통합된 공무원 노동조합이 민주노총에 가입하려고 하는 행위마저도 불법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현 정부의 힘으로 국책 연구기관의 원장에 취임한 자가 헌법의 노동3권 조항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이렇게 현 정부의 생각을 드러내놓고 얘기하는 바람에 여당 국회의원으로부터 질책을 당하긴 했지만 말이다. 결국 9월 18일의 해프닝은 노동정책에 관한 현 정부의 생각을 읽는 단초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헌법 개정 논의를 비롯하여, 향후 노동법 개정 작업과 관련하여 정부의 움직임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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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조/ CBS PD

 “(김대중 전) 대통령님은 국내뿐 아니라 국제사회도 높이 평가하는 우리 현대사의 위대한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이셨다... 대통령의 발자취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지난 8월 23일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한승수 총리가 읽은 영결사의 한 구절이다. 고인에 대한 평가는 출신지역과 연령, 정치적 성향에 따라 너무나 다양하겠지만 고인과 정치적 경쟁・갈등 관계에 있던 정권이 내린 평가니만큼 최소한 과장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장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정부와 유족 간에 소소한 의견 차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부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다하는 모습에 장례도 순조롭게 치러졌다.  

 그런데 무덤에 떼가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고인이 잠들어 있는 현충원 앞에서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몇몇 보수단체 회원들이 고인의 묘를 파헤치겠다며 곡괭이와 낫을 들고 몰려왔다가 입장을 제지당하자 현충원 앞에서 퍼포먼스를 벌인 것이다. 이를 보고 옆에서 말리던 시민들은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며칠 뒤에는 보수단체 회원들이 현충원 앞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묘의 이장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다행히 이들의 행동은 실제 불상사로 이어지진 않았다. 국립현충원에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묘역에 대한 경비를 강화했고 언론에서는 일부 극소수 극우단체 회원들의 돌출행동 정도로 지나치는 듯하다. 당연히 그래야 하고 정말이지 그러길 바란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도 괜찮은 걸까? 망자에 대한 금기와 예의가 두터운 우리사회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9월 23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안장식에서
유해가 장지에 도착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전직 대통령의 묘를 파헤치겠다는 이런 폭력적인 행동의 밑바닥에는 고인에게 덧씌워졌던 ‘빨갱이’라는 저주가 도사리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36년 전인 1973년과 29년 전인 1980년에 이미 두 차례나 고인의 목숨을 앗아갈 뻔했던 그 저주가 고인이 세상을 떠난 지금까지도 우리가 숨 쉬는 공기 속을 떠돌고 있는 것이다. 고인에게 천형처럼 따라다니던 ‘빨갱이’라는 낙인은 정적을 제거하려는 독재 권력의 악의적인 왜곡과 폭력으로 덧씌워진 것이었고 이는 지난 97년 대통령 선거에서 표출된 국민의 선택을 통해, 또 과거 고인에게 덧씌워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법원의 판결을 통해 입증되었다. 거기에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조문까지. 고인을 평생 동안 괴롭힌 저주를 벗어던지기에 이것으로 부족한가?  

 불행하게도 부족한 것 같다. 상식을 가진 시민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이 증오와 폭력을 우리사회에서 추방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또 다른 것이 필요한 듯하다. 그게 뭘까? 내 짧은 소견에는 우선 한나라당 의원들의 반성을 요구하고 싶다. 왜냐고? 적어도 국회의원 정도 되면 고인에게 덧씌워진 ‘빨갱이’라는 혐의가 악의적인 저주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그 저주를 때로는 선동하고 때로는 방조하며 이용해왔기 때문이다. 친북좌파 빨갱이에, 노벨상 매수에, 100억 원이 넘는 비자금에... 고인에게 덧씌워진 마타도어들을 열거하자면 책을 써도 모자랄 판이다. 내 고향 경상도에는 지금도 고인이 엄청난 비자금을 은닉해 두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이런 왜곡과 오해, 저주와 증오가 한나라당이 집권하는데 한 축이 되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주장일까? 누군가를 ‘빨갱이’로 낙인찍기만 하면 그의 혐의가 사실인지와는 관계없이 그를 공격하고 저주하는 것이 애국으로 통하는 이 비정상적인 사회현상과 관련해 한나라당에 일단의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명예훼손이 될까?  

 물론 이 모든 것의 책임을 특정 개인 또는 집단에게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나는 우리사회가 냉전의 광기를 이미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애국’을 앞세운 독선적인 폭력을 공권력이 묵인하고 방관한다면 냉전의 광기는 언제라도 우리 앞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한나라당에 지난 날 고인에게 퍼부었던 비난과 저주를 소리 내어 반성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현 정부가 ‘우리 현대사의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한 고인에 대한 이 끔찍한 저주와 무례를 초래한 원인이 무엇인지, 마음속으로 한번 깊이 반성해보길 바란다. 그리고 당 대표든 대통령이든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분이라면 이런 폭력적인 행태에 유감이라도 표시하는 게 도리가 아닐까 싶다. 내 생각에,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다.

압둘 사타르 카셈/ 팔레스타인 알 나자 대학 정치학 교수

 이번주 수요산책은 Abdul Sattar Kassem (팔레스타인 알 나자 대학 정치학 교수)이 보내온 기고문을 홍미정 교수가 전해왔습니다. 이 기고문의 번역을 위해 홍미정 교수와 자원활동가이신 손우정씨께서 도와주셨습니다.

 수십 년 동안 미국은 이스라엘이 1967년에 점령한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촌을 건설하는 것에 대해 다음의 입장을 반복해왔습니다. 그와 같은 행동은 평화에 대한 장애물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그 말을 수많은 미국 대통령들과 행정부로부터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건설을 계속했고, 미국은 이스라엘을 단념시키기 위한 어떤 조치도 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이 입으로는 정착촌 반대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이스라엘과 전략적인 협력을 강화한 것은 명백한 일입니다.
 

미국의 조치들

90년대 부시 대통령만이 그런 정착촌 건설의 움직임을 이유로 이스라엘에 재정적인 지원을 거부했지만, 그것도 이스라엘을 멈추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건설을 계속했고 미국의 저지 수단은 사라졌으며, 정착촌 건설에 반대하는 모든 분야로부터 탄원이 계속되었습니다. 아랍세력은 늘 불만을 토로했고, 미국이 이스라엘에 압력을 가할 것을 주문했지만 진정하라는 말만 들었을 뿐입니다. 

 아마 미국은 진심으로 이스라엘의 정착촌 건설이 평화의 장애물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장애물은 입으로만 반대하는 것으로 충분한 정도의 가치 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이스라엘과 협력해야하는 분야의 극히 중요한 이익에 비교하면 그 장애물은 별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르지요. 확실히 미국은 이스라엘과 전략적인 분야에 대한 협력을 우선시하며, 정착촌 건설을 중단시킴으로써 평화를 성취하는 것을 주요한 고려 대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패배자인 아랍 체제는 매우 무능하고 스스로 일을 해낼 의지가 없으며, 미국이 이스라엘에 반대하도록 만들만큼 강하지도 않습니다. 만약 그럴 힘이 있었다면 미국에서 피난처를 찾지 않았을 것이며, 이스라엘을 힘으로 몰아낼 수도 있었겠지요. 아랍은 무능하고, 미국에게 안보, 경제, 재정적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미국에게 언제든지 마음 놓고 이스라엘을 지원할 수 있는 여유를 주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서안 지구에 정착촌을 건설함으로써 유대인 지구를 확대 강화하고 있습니다. 

 제 말은 현실적으로 봤을 때, 미국은 한 번도 이스라엘의 정착촌 건설을 중단시키기 위하여 진지하게 노력을 한 적이 없으며, 여론 외에도 다양한 채널을 통해 이스라엘을 지원해왔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한 재정적,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외교적 지원을 늘리고 있습니다. 만약 미국이 진지하게 노력했더라면,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실제적인 조치를 취하였겠지요. 이런 미국의 정책은 소위 분리장벽이라는 것이 고려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분리 장벽을 쌓기 전에 협의를 했을 것이며, 미국의 사전 동의 없이 이스라엘이 분리 장벽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리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프로젝트를 진행하자 미국은 경계선 수정작업을 맡았습니다. 미국은 팔레스타인들의 불만에 부딪혔고, 이스라엘에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통을 가능한 한 최소화 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소위, 분리장벽 건설을 통한 이스라엘 안보 유지의 필요성을 내세우면서 말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툴카렘 근처의 바까 앗 샤르끼야 마을과 라말라 근처 땅의 1평방킬로미터를 내 주기로 한 이유입니다.
 


정착촌 건설에 반대하는 오바마

 이제 정착촌 건설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는 오바마 대통령이 등장했습니다. 그는 카이로 연설에서 그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의 명백히 밝혔고 이스라엘이 평화의 길로 가기를 부탁했습니다. 처음 오바마가 정착촌 건설에 반대했을 때 그는 건설 자체를 금지할 방법을 언급했으나 지금 그는 일시적인 동결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공고한 말은 흔들리고 있으며 수많은 전임 대통령들처럼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아랍과 이스라엘 관계의 정상화와 정착촌 건설 동결을 연계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새로운 정착촌 건설을 동결하기 위해서는 아랍인들이 이스라엘인들과 관계를 정상화해야한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오바마는 아랍 정부들이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오래 전에 이미 사실상 정상화시켜왔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오바마는 아랍 정부들이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를 공표하고, 낮은 단계부터 잘 조직된 정상화 계획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이집트, 요르단, 모로코, 튀니지, 카타르, 바레인, 아랍에미레이트 정부들은 이스라엘과 관계를 이미 정상화해 왔으며,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조차도 이스라엘과 외교적으로 협력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랍 주민들은 일반적으로 정상화 과정에 반대합니다. 그래서 아랍 정부들은 이제까지 공공연하게 은밀하게 진행시켜왔던 이스라엘과의 협력관계를 공개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인종차별 반대”━“오바마는 무슬림” 14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연설한 텔아비브의
베긴-사다트전략연구소 앞에서 ‘죽음의 신’으로 분장한 미국 시민운동가가 ‘이스라엘의 인종차별
정책이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는 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왼쪽 사진) 이날 요르단강 서안
헤브론의 담벼락에 이스라엘 극우파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아랍인으로 묘사하며 ‘유대인 혐오자’
라고 비난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오바마는 단지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억압하면서 이스라엘과 안보협력을 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를 아랍정부들이 본받기를 원할 뿐입니다. 그는 아랍 정부가 솔직하고 진실하게 국민들을 대할 용기가 있길 기대합니다. 그리고 오바마는 아랍 정부들에게 이스라엘을 아랍-이슬람 지역의 자연스런 일부로서 수용하는 것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는 것 이외의 대안은 없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어떤 조치를 취해서, 아랍 정부들이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을 향하여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한 무엇인가를 성취해 온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면, 아랍 정부들은 관계 정상화를 공개적으로 논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미국 대통령이 이스라엘에게 주문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갈구하던 것에 대한 보답으로 잠시 동안 조금만 용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바마의 주요 문제는 아랍이 최종적으로 이스라엘을 승인해야하며, 아랍은 그 보답으로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이스라엘이 확신하는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평가에 따르면, 아랍은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운다는 허풍으로 시작했고, 이제는 서안 지구에 정착촌 건설을 멈추라는 요구로 끝냅니다. 그래서 전반적인 오바마의 쇼는 이스라엘에게 우호적인 아랍  정부들의 주장을 강화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쇼에 봉착한 장애물

이주와 관련하여 오바마가 봉착한 몇 가지 이슈를 정리합니다.

1. 현 이스라엘 수상은 내부적 이유로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이념에 따른 연합을 할 것이며, 어떤 일탈도 정부를 흔들리게 할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은 미 행정부의 입김에 맞설 정도로 강합니다. 미 의회에는 잘 조직된 유대인과 시온주의자들이 있고 미국인의 상당수를 차지합니다.

3. 아랍 정부들은 정상화를 향한 공개적인 조치들을 감히 취하지 못할 것입니다. 전 아랍 지역이 힘의 균형의 이동에 따른 새로운 세력 구도의 발전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랍-이스라엘-미국의 비공식 동맹은 이스라엘-시리아-헤즈볼라 축의 도전을 받게 될 것이고, 아랍 정부들은 현실적이고 가시적인 위협에 직면할 것입니다.

4.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아랍인들은 미 행정부에 압력을 넣을 위치가 아닙니다. 심지어 일부 안보문제로 인해 이스라엘에 압력을 넣을 입장도 아닙니다.

5. 팔레스타인은 너무 약해서 그들의 민족의 권리와 높은 연봉과 새로운 자동차와 같은 개인의 특권들과 바꾸려 합니다. 그들은 오바마를 난처하게 하거나 미국에서 지지자들을 결집시킬 능력도 없습니다.

6. 오바마는 아랍 정부들이 주도권을 잡지 못하는 단순한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것과, 그들이 자국민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는 독재정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이런 독재 정권은 불안정하며, 국민들을 억압하는 가혹한 조치들을 취하기 때문에 지속될 수 없습니다.
 


벤야민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의 조치들

 네타냐후는 자신이 자유로운 상호작용과 상호의존의 세계에 있는 수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가 영리하고 현혹시키는 다음과 같은 조치들을 취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는 새로운 정착촌의 일시적 동결과 같은 모호한 약속을 조건으로 수백 개의 새 주택 건설을 승인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동결의 시기에 건설될 새로운 정착촌 주택 건설을 허락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난 6개월간 새 건축을 동결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스라엘의 새로운 이주나 새 집을 짓는 것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다른 쪽이 약하고 도전적이지 않는 한, 이스라엘의 정책은 살아남을 것이고 서안을 조금씩 갉아먹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바마의 주요한  문제는 이스라엘인들이 강경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아랍 정부들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허윤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보건복지가족부에서 최근(2009년) 다문화가정의 실태조사를 진행 중에 있지만, 2005년 1차 조사에 따르면 결혼이주민의 52.9%가 최저생계비 이하의 가구소득을 가지며, 특히 결혼이민여성의 57.5%는 절대빈곤층에 속한다고 합니다. 이는 많은 결혼이민여성이 자국의 가난을 피해 보다 나은 삶을 찾아 한국에 왔지만 본국에서 보다 더 빈곤한 상태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쉼터에 입소하거나 상담을 의뢰하는 결혼이민여성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가장 많이 호소합니다. “나는 첫 임신을 했다.  6개월이 되어 간다.  나는 아이를 낙태하고 싶다.  우리는 심한 생활고를 겪고 있다. 남편은 택시 운전을 하고 있지만 거의 생활비를 가지고 오지 못하고 있다. 어느 날은 1만원 어느 날은 빈손으로 들어온다. 남편이 회사에 내야 하는 돈은 하루에 78,000원이고 월급은 66만원이다. 만약 상납금을 내지 못하면 월급을 받을 수 없다.  남편은 아이를 낳고 싶어 한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아이를 낳으면 자신이 알아서 다 한다고 하는데 나는 두렵고 걱정된다. 산후조리는 어떻게 할 것이고 분유 값은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나는 한국에서 우리가 이렇게 가난하게 살줄 몰랐다.”(베트남 N여성)

 대부분 저소득 가정에서 살고 있는 이들은 남편의 임금에 전적으로 의존해 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연령이고 경제활동에 대한 의욕도 강합니다. 하지만 한국어가 서툰 이주여성들이 안정된 일자리를 찾기가 어렵고, 가족들이(남편과 시부모) 일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다행히 일자리를 얻어도 이주노동자들에 비해서 낮은 대우를 받은 사례가 많습니다. 사실 이주노동자들은 일에만 집중할 수 있지만 결혼이민여성들은 가사노동과 육아뿐 아니라 시댁행사에도 꼬박꼬박 참석해야 하기 때문에 일자리의 제한도 많습니다.

 결혼이민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은 60%정도인데, 음식점 종업원 등 서비스직(52%)이 가장 많습니다. 경제활동을 하는 이유로는 생계유지가 51%, 자녀교육비 충당이 17%입니다. 취업을 하지 못한 이유로는 자녀양육이 가장 많고(43%), 다음이 구직 실패(21%)입니다. 심각한 것은 15.5%의 가구가 경제적 이유 때문에 끼니를 거른 경험이 있다고 답하고 있습니다.

“나는 우즈베키스탄에서 E-6(예술흥행)비자로 한국에 왔다.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다 그곳에서 남편을 만났다. 결혼 전 남편은 자상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정말 잘해 주었다. 하지만 나와 결혼하면서 빚을 많이 졌다고 했다. 그래서 언제나 나에게 돈을 벌어 오라고 소리를 친다. 내가 번 돈은 남편이 다 가져가 버린다. 생활이 힘들어서 그런지 늘 싸우게 된다. 이제 남편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남편은 나와 함께 외출하는 것도 싫어한다. 내가 외국인이라는 것이 표 나게 될까봐 마스크를 쓰라고 하고 때로는 10m 떨어져 앞서 간다. 함께 팔짱을 끼고 걸어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없다. 그와 다정하게 웃으며 밥을 먹고 행복했던 시간이 있었나 싶다. 나는 나를 사랑해 줄 다정한 남편이 필요하다. 아무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는 한국에서 나는 너무 슬프다.”(우즈베키스탄 K여성)

 결혼이민여성들은 결혼을 통해 그들에게 친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한국에 왔습니다. 한국 땅에서 남편 외에는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때로는 의지하는 남편에게조차 말을 걸 수 없는 언어의 장벽을 겪습니다. 더구나 자국 출신의 사람들을 만나 의사소통과 정보교환의 도움을 받고 싶지만 쉽지 않습니다. 자국민을 찾기도 어렵지만, 결혼중개업체들이 자국출신끼리 만나면 도망갈 것이라고 남편에게 이야기하고, 그래서 어떤 시부모는 며느리가 도망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한국어도 배우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결혼이민여성들이 사회적으로 고립되기도 합니다.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결혼이민여성들
사진 출처 - 다문화가족지원센터

 결혼이민여성들은 여러 가지 편견에 시달립니다. 한국에 ‘불법 체류할 목적’으로 들어온 여성들, 혹은 ‘가난하기 때문에’ 한국에 와서도 여전히 ‘게으르고’ ‘돈만 밝힌다’고 말합니다.  ‘국적을 취득하면 도망갈 여자들’이라는 편견 때문에 국적취득에 협조하지 않는 남편들도 많습니다. 또 이들이 낳은 아이들은 엄마가 외국인이라 ‘언어지체장애’를 겪게 될 것이고, 아이를 잘 키우지 못해 ‘발달장애’를 보일뿐 아니라 학교에 가면 모두 ‘왕따(집단 따돌림)’를 당할 수 있으니 사회적으로 특별한 관심을 요구하는 집단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정확한 조사나 근거자료도 없는 이러한 무책임한 편견들은 고스란히 차별로 이어지고 결혼이민여성들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특히, 상담을 하다보면 결혼이민여성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들 중에도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로 무시와 차별을 당했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인들은 처음 보는 성인들에게 반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에게는 당연하게 반말을 합니다. 어떤 방글라데시인은 가족들과 함께 외출하였는데 아이들 앞에서 한국인이 자신에게 반말을 해서 기분이 나빴지만 항의도 제대로 못했다고 했습니다. 또 결혼이민여성들은 가족행사에 배제되거나 가정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데 무시된 경험이 많습니다. 심지어 친척들에게도 소개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 결혼이민자여성은 시장에서 “외국인이라 표 나면 안 되니 말을 하지 말라”는 시어머니의 요구에 마음이 아팠다며 상담 내내 울고 가기도 했습니다.

 사실 상담을 하다보면 밝은 이야기보다는 대부분 어려운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됩니다. 그리고 주변에 화목한 다문화가정도 많이 봅니다. 가족의 격려와 지지 속에 통역사로 활동하게 된 결혼이민여성의 기쁜 새 출발도 봅니다. 미용 기술을 배우고, 자국 결혼이민여성의 생활도우미로도 활동합니다. 다문화가정에 대한 정부의 재정적, 제도적 지원도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많은 부분 개방적인 사회로의 모습에 고무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혼이민여성들이 호소하는 어려움을 단순히 외국인 여성의 하소연으로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들도 이 땅의 아내요 어머니요 국민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상처는 우리의 상처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허윤진 위원은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2009년 9월 10일자 동아일보 사설 : 「법정과 맥아더 동상을 공격하는 세력의 정체」

 용산 참사 사건 법정에서 재판장 한양석 부장판사는 법정소란 행위가 외부단체의 지시나 사주에 의해 벌어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같은 날 인천 자유공원에서는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가지 풍경을 깊이 들여다보면 뿌리가 닿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사법부의 권위와 한미동맹의 상징을 흔들어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기반을 무너뜨리려는 세력이 우리 사회에 엄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들이다. …… 단순히 재판진행 방해 차원을 넘는 것이었다. 좌파단체들이 도심에서 벌이던 조직적인 불법 집회시위를 법정으로 옮겨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 도심 불법시위보다 훨씬 심각한 국기(國基) 문란이다. …… 이런 세력의 목표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 체제와 한미동맹을 무너뜨리려는 것임을 국민 모두가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땅굴을 파듯이 우리 사회의 밑동을 야금야금 위협해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위 사설의 논리는 이렇다. ‘재판거부 행위 → 외부 단체 지시․사주 → 자유민주주의 부정 세력 → 좌파단체 국기문란행위, 땅굴세력’ 이라는 도식이다. 이런 황당무계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의 단순 무식함이 부럽기까지 하다. 그렇게 단순하게 세상을 한 가지 시선으로만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다면, 거칠고 험한 세상에 무슨 고민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용산참사 사건에서 검찰이 수사기록 3,000여 쪽을 법원의 증거개시 명령에도 불구하고 변호인들에게 공개하지 않는 상태에서 피고인을 변호해야 되는지 여부를 놓고 변호인단 내부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이유를 불문하고 피고인을 보호하는 것이 1차적인 변호인의 책무이므로 변론해야 한다는 입장과 이런 상황에서 피고인을 변호하는 것은 검찰의 불법적 행동을 사실상 묵인하고 있는 법원의 재판을 정당화시켜주는 들러리 역할밖에는 안되므로 재판을 거부해야 한다는 입장 등이 팽팽하게 대립하였다. 결국은 다수 입장에 따라 재판을 거부하고 변호인 직을 사퇴하기로 최종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재판 참여 및 거부 입장을 놓고 벌어진 변호인단의 치열한 논쟁은 어느 누구의 입장이 옳고 그른 것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이 사건을 바라보는 피고인 보호라는 방식에서의 시선의 차이가 존재했을 뿐이고, 내부에서는 서로의 의견을 충분히 존중하였다. 이러한 입장정리에 따라 변호인들은 재판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고, 흥분한 일부 유가족들이 법정을 잠시 소란하게 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법정소란의 그 모든 원천과 죄악은 검찰에 있었다. 검찰이 정정당당하게 법률에서 말하는 ‘공익의 대표자’로서 ‘인권옹호 기관‘으로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수사를 하였다면 왜 떳떳하게 수사기록을 공개하지 못하는가에 대하여 우리 사회와 언론이 이성을 갖고 있다면 진지하게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문제였다. 공익적 기능을 고민하는 언론이라면 보다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성찰은 모르쇠하면서 표피적․일시적인 행위만을 문제삼아 마치 국기문란사범처럼 호도하는 것은 스스로 언론이기를 포기한 적반하장의 만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법정에서 검찰의 증거 비공개 내지 은익 문제로 인하여 발생된 재판의 파탄 상태를 두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세력의 발호처럼 호들갑을 떠는 그들의 실체, 실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들여다보자.

 먼저 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부모형제가 경찰의 집회․시위 진압과정에서 5명이나 사망했는데도 검찰이 수사결과를 공개하지 않는다면 훌륭한 당신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존중하는 만큼 조용히 침묵하고 구속되어 재판을 받겠는가. 동아일보의 논리를 거꾸로 전개해보자. 그러면 ‘우파세력 → 자유민주주의 수호 세력 → 재판 순응’의 논리가 될 것이다. 그러면 우파세력이면 헌법과 형사소송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피고인의 정당한 권리를 검찰이 짓밟고, 법원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그대로 순응하는 것이 옳다고 할 것인가.


1일 오후 서울 대한문 앞에서 진보신당,이명박 정권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
회원과 유가족들이 용산 참사 문제해결을 촉구하는 삼보일배를 하다 경찰에 가로막혀 있다.

사진출처 - 한겨레


 수사기록 공개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문제는 좌파, 우파 세력의 편 가르기 다툼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문제이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유지와 수호를 위하여도 반드시 지켜야 할 문제다.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면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보호받아야 할 피고인의 정당한 권리와 이익을 위하여 수사기록을 공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이는 곧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수호하는 것이다.

 거꾸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보호되어야 할 정당한 권리를 부정하는 자들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세력들인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썩어 빠진 낡은 이념의 펜을 휘두르는 당신에게는 차라리 돼지 꼬리에 진주를 다는 일이 훨씬 보람 있는 일이라고 권유하고 싶다.

 용산참사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며, 현 정권의 비인간적이고 물신적인 사고방식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사건이다.

 인간의 생명보다 돈과 물질을 숭상하고, 권력을 사용함에 있어 인간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자들에 의하여 짓밟힌 영혼의 절규와 눈물이 흐르는 사건이 용산참사 사건이다.

 용산의 눈물은 비록 현재는 별다른 울림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언젠가는 우리를 성찰하게 만든 시대의 눈물이었다는 사실이 널리 인구에 회자될 것이고, 현 정권의 가슴을 찢어 놓는 사건이 될 것이다.

 어느 활동가의 편지가 생각난다. “난 용산참사와 관련하여 하루라도 빨리 감옥에 가고 싶다”고, 하여 그가 흘리는 용산의 눈물이 정의의 강물처럼 흐를 날도 곧 오리라고 믿고 싶다.
 

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둥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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