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추위의 시작이다. 한라산에는 예년 보다 일찍 많은 눈이 내렸다. 

 가을이 끝나갈 무렵, 원주, 부안, 전주 등지를 다녀왔다. 공동체 운동이 활발하다는 서울의 성미산 마을도 가보게 되었다.

 부안에서 만난 어느 분은 부안과 제주가 참 비슷한 곳이라는 말을 들려주었다. 과거 시대에 부안은 역사적으로 유배지이면서, 민란의 땅이기도 하단다. 제주와 유사하다. 오늘 날에도 새만금, 핵폐기장 문제로 주민들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이 또한 군사기지 문제로 고통을 당하는 제주와 닮아 있다. 부안으로 가는 길에 지나친 군산은 어느 덧 군사도시화 되는 징조를 보았다.

 차이는 있지만, 한국의 ‘지역’은 오늘 날에도 국가의 필요에 부름 받는 동원구조로 머물러 있다. 그 일방주의의 결과로 돌아오는 상처는 두고두고 ‘지역’이 감내해야 할 몫이 된다.  

 원주에서 만난 분은 ‘원주의 꿈’에 대해 들려주었다. 주민이든, 시민활동가이든, 진보정당원이든 모두가 협동네트워크의 일원이면, 이걸 우선시 하는 분위기다. 이들의 횡적 네트워크는 오직 ‘원주’를 매개로 연결돼 있고, 그 안에서 각자의 삶을 구가한다. 이야기를 들려준 그 분은, 서울에서는 결코 희망을 만들 수 없다고 하였다.

 언젠가 TV에서 오키나와 주민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인’이 아닌, ‘오키나와 사람’이라고 답한다고 했다. 부안 사람들에게는 지리상의 조건이 매개가 돼 ‘독립 의식’ 같은 게 있어왔다고 들었는데, 제주에도 그 역사적 연원을 통해 ‘독립’이야기가 세간에 농담처럼 회자된다.

 이 경우들은 ‘지역’의 독자성을 매우 강렬하게 표현한 것이지만, 그 만큼 전통적 삶의 양식과 문화적 조건들의 온전한 완결체로서의 지역의 의미를 일깨운다. 중앙중심 논리가 필연코 내포하는 일방주의에 대한 일종의 방어로서 불거져 나오는 반작용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지역’은 ‘지방’이 아니다. 보편이 관철되는 특수한 ‘부분’으로서만 설명될 수 없는 고유한 맥락이 존재한다. 오늘 날, 지역은 국가를 거치지 않고 세계와 소통하는 독자단위로서 재평가되고 있다. 서울중심의 일극체제가 빚어낸 한국사회의 여러 고질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도, 이제 ‘지역’ 중심으로 가야한다는 흐름이 생긴 지 오래다. 그렇지만 아직 그 흐름은 어떤 물길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세종시 공사현장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이명박 정부는 이 ‘지역’을 과거보다 더 후퇴된 형태로 바라본다. 이명박 정부에 있어서 ‘지역’은 국가의 번영에 복무하는 일개 경쟁력 단위일 뿐이다. 서울을 ‘세계도시’로의 발전을 촉진토록 하는 주변부 동력에 불과하다. 서울의 인구를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역의 몇몇 도시들을 주변과 통합해 만드는 덩어리 체제를 국가발전구조로 놓고, 독자적 단위로서의 ‘지역’들을 이른바 광역경제권으로 묶어세움으로써, 국가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봉건적 지배구조로 재구조화하려는 의도를 출범초기부터 보여 왔다. 지금 벌어지는 세종시 논란도, ‘행정수도이전’이라는 명제는 실종된 채 ‘세종시 수정’이라는 프레임 속에 끌려 다니고 있을 뿐이다. 의도했던 바일 것이다.

 내년에 벌어지는 지방선거는 현 정부에 대한 중간평가라는 모호함에서 벗어나 이러한 보다 가치적이고 맥락적인 차원에서 ‘지역’에 대한 논쟁이 선명하게 부각되는 공간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지역들이 힘을 합쳐 지역연합의 문제제기를 형성하고, 그것이 다시 지역별 역내 구도로서 자리 잡게 해야 한다. 그래야 분권이든, 녹색성장이든, 심지어 4대강이든 오로지 ‘정부사업, 정부예산 따오기’의 삽질경쟁의 시각으로 지역을 몰가치의 늪으로 치환해 버리는 현존 지자체 권력과 대별되는 구도를 전제할 수 있다.

 2010년 지방선거를 향한 여러 논의가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MB체제를 돌파하기 위한 이른바 ‘반MB-한나라당’연대에서부터 진보대연합 논의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도 폭넓다. 진보정당간의 후보단일화 논의도, 이미 정치참여를 선언한 시민사회 진영과 더불어 ‘제3지대 창당’논의로 까지 구체화된다는 소식도 있다.

 비판적 지지론이나 독자후보론과 같은 전통적 틀에 얽매임 없이, 현실을 기반으로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는 분위기다. 어쨌거나, 최소한 MB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절박함이 공통분모로 작용하는 모양새다. “진보개혁세력의 연대를 위해 모든 세력들의 뼈를 깎는 희생과 양보가 있어야 한다”는 최병모 변호사의 주문은 이를 웅변하고 있다.

 그런데, 시간이 부족한 것일까? 그것은 다시 ‘서울의 움직임’이다. 그것이 ‘2010 연대’이든, ‘희망과 대안’이든, 진보정당 통합론이든, 모두 서울이 시발점이 되고, 서울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투어강연식의 지역기획이 있긴 하지만, 하나의 프로그램일뿐더러, 지방선거를 서울발로 얘기하는 것이 맞나 하는 회의가 앞선다. 이런 식의 논의구조라면, 그것이 실재화된다 하더라도, 정작 지역에서는 중앙 회의가 작동구조를 벗어나지 못한 진보정당 정도만 영향을 받을 뿐, 내년 지방선거에서 진보를 새롭게 대변하는 흐름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할 것 같다. 비단 내년 선거만이 아니라, 이번을 계기로 진보개혁의 새로운 실체를 형성한다는 관점에서도 그 접근과 경로의 일방성으로 인해 입체적인 전국전략으로 가기는 힘들다고 보여진다. 그 만큼 ‘지역’의 문제의식은 이미 성장해 있기 때문이다.

 지역의 사회운동은 ‘정치’에 대한 욕망이 한껏 성숙해 있다. 욕망이라기보다는 절박함이다. 지역사회의 변화를 위해 정치는, 그 영역에 대한 인식을 채 가다듬을 새 없이 중요하고 강력한 수단임을 구체적이고 오랜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체득했기 때문이다. 지역에 있어서 사회변화는 매우 실질적인 문제이다. 그래서 그것은 훨씬 분명한 목표, 구체적인 접근과 동시에 깊숙이 보고, 길게 가는 노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제주에서 벌어진 주민소환은 ‘토대 없는 정치투쟁’으로부터 뼈저린 변화의 노력으로 거듭나라는 주문을 일반화 시켰다. 그것의 경험이 아니더라도, 지역의 공감은 바로 여기에 있음을 부안, 전주, 원주를 다니며, 그 곳의 사람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지역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한국사회의 그늘이 관통하는 지역의 변화는 한국사회 변화의 내용을 담보한다. 그래서 강준만은 “한국을 지방이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 지역에서 변화를 준비함으로써 한국사회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 진보의 재구성을 위한 중요한 기획이 되어야 한다. 이념과 입장에 따라 나눠지고 합쳐지는 방식이 아니라, 구분된 이념과 입장에 공통적으로 내재된 자치, 평화, 생태와 같은 가치의 총체로서 ‘지역’안에 진보가 구현되게 하고, 또한 그런 지역들의 네트워트가 서울의 일방주의를 포위하는 형태의 새로운 진보기획이 구상되어야 한다. 이미 우리사회에서 ‘지역’은 그 자체로 진보이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13일 민주노총 김** 성폭력 사건의 항소심에 대한 판결이 있었다. 피해자에 대한 지지모임을 꾸리고 그 회원이기도 한 나는 판결 내용도 궁금하지만 재판에서의 생생한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10시에 시작하는 재판을 방청하였다. 지지모임 회원 4-5명이 이미 와있었고 우리가 관심이 있는 본 사건은 6번째로 판결이 잡혀있었다. 그날의 판결은 성추행이나 성폭력, 강간미수 등의 사건이 대부분이었고 판사가 판결의 이유로 댄 것들이 서로 충돌하기도 하여 본 사건의 판결이 어떻게 날 것인지 긴장되었다. 드디어 6번째 판결... 피고인 5명이 나란히 서있는 가운데 판사의 판결이 낭독되기 시작하였다. 그 사건의 항소심에서 성폭력 사건 가해자인 김** 만 항소하였고, 범인도피에 관하여는 검사측과 피고인측이 모두 항소하였다는 말을 시작으로 하여 한 5분여간 낭독된 판결문은 여성주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세 가지 부분에서 환영할 만한 내용이었다.  

 첫 번째는 운동사회 내에서 상실된 피해자 중심주의를 채택한 것이다. 판사는 성폭력이 매우 중한 죄로 피해자의 입장이 명백한 이상 피해자의 의견을 중요 기준으로 삼아야 함을 강하게 피력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동안 법조계의 가해자 중심주의적인 판결을 꼬집기도 했는데 이는 피해자가 그토록 헌신적으로 활동해온 조직에서조차 채택되지 못한 것이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의 판결에서 피해자의 의지와 의견이 매우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할 근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피해를 당한 약자의 입장을 우선시 한 점에서 한사람의 생존자로서 살아가야하는 피해자의 인권이 지켜진 것이라 생각된다.

 두 번째는 술에 취하여 심신미약의 상태로 저지른 우발적인 행위였다고 판시한 원심의 내용을 뒤집은 것이다. 즉, 술이 이유가 되어 양형이유에 있어 감경요소가 되지 않음을 분명히 하며 원심판결에 항소한 가해자에게 반성하지 않는 태도라며 질책하였다. 그리고 심신미약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심신미약과 범행에 대한 책임은 별개의 문제라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그동안 술에 대하여 유독 관대했던 우리 사회에서 법정이 나서서 경종을 울린 것이라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이런 사건에 대한 공탁에 대한 의미를 분명히 한 점이다. 공탁이란 유가증권 기타의 물품을 변제·담보·보관 등의 목적으로 공탁소에 임치하는 것인데 이번 사건의 경우 피해자의 합의 의사를 공탁으로 변제하려 한 가해자의 의도를 법정이 인정하지 않은 점이다. 2000만원이라는 거금을 공탁함으로써 합의를 거부한 피해자의 뜻을 약화시키려 한 행위에 대하여 그 의미를 분명히 한 점에서 이 또한 환영할 만한 판결이다. 즉, 공탁이 가해자의 사회에 대한 사죄의 의미는 있으나 근본적 해결은 아니며 양형사항에 있어 감경요소가 아님을 적시하였다. 그 동안 돈 있는 사람들의 이런 공탁에 대하여 피해자의 합의의사와 상관없이 인정되고 합의한 사례는 수두룩하다. 이번 판시로 공탁 또한 피해자의 의사를 기준으로 해야함을 분명히 한 점에서 이 또한 반갑다 할 것이다.


사진 출처 - 뉴시스

 조두순 사건이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켜 성폭력 사건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을 넓혔지만 그에 따른 법의 판단은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판사는 “범행이 중하므로 감형은 책임지는 모습이 아니며 형량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책임지는 모습이다”라는 말을 이유로 항소를 기각하였고 이 마지막 말은 성폭력 사건에 대한 책임을 엄중하고 진심으로 받아들일 것을 가해자에게 주문하였다. 어찌보면 당연하게 귀결지어져야할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사회나 법조계에서는 그렇게 되지 못하였던 것이 사실이고 이번 판결이 동종의 사건에 중요한 판례로 작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쁘다. 여성의 옷차림이나 언행이 판단의 중요 기준이 되었고, 여성에 대하여 사회가 부여한 역할 수행이 또한 중요기제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인 남성의 시각이 판결의 기준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라도 법정이 성폭력 사건의 특수성을 인지하고 위에 언급한 세 가지 관점에서 판결을 내린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지만, 만약 발생한다면 피해를 당한 약자의 입장에 사회가 또는 법조계가 나서서 그들을 대변하고 책임을 지우는 사회적 실천이 필요하다. 이런 면에서 지난 11월 13일 민주노총 김** 성폭력 사건의 항소심 판결은 매우 중요한 선례를 남겼고 진심으로 환영한다.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겨울, 비정규직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노사관계 연구본부 연구위원

 한 달쯤 전부터 여의도 직장까지 40분을 걸어서 출근한다. 한강고수부지 억새밭을 지나면 곧바로 KBS까지 이어지는 낙엽길이고 그 중간에 작은 찻집이 있어 잠시 다리쉼을 한다. 진한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버릇처럼 책을 꺼내든다. 시집, 소설책, 인문사회과학 서적. 그날  그날 읽으려고 들고 오는 책이 바뀐다.

 몇 주 전 갑작스런 추위에 집을 나서기 전, 서랍을 뒤졌다. 혹시나 하며 장갑을 찾았는데 역시나 없다. 세 켤레든 네 켤레든 장갑을 모두 잃어버려야 겨울이 끝나고, 장갑을 사야지 하면 또 다시 겨울이다. 그래서 이맘때면 장갑을 잃어버리는 털털함을 책망하기 마련이다.

 마침 KBS 앞을 지나는데 피켓을 든 사람들이 예닐곱 명 서 있다. 피켓 밑에는 ‘KBS 계약직 지부’라 적혀있고 부당한 해고와 원직복직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문득 피켓을 든 손을 보니 장갑을 끼지 않았다. 해고가 되어 싸우다 보니 겨울일 터 언제 장갑을 준비할 정신이 있으랴마는 찻집에 들어설 때까지 그 손이 뒤꽁무니를 쫓아온다. 공원 양쪽 은행나무 가로수에 그들의 시린 손이 단풍으로 걸린다.

 지난 목요일인가. 집을 나서는데 가랑비가 온다. 커다란 우산을 쓴 채 ‘사랑은 비를 타고’(Singing in the Rain)를 흥얼거리며 오는데 KBS 앞이 소란스럽다. 무슨 일인가 멈춰 서서 보니 계약직이라는 이유로 해고된 사람들이 정문 출입을 시도하고 있다. “비정규직도 사람이다, 일터로 가고 싶다.” 막히면 서서 구호를 외치고 그래도 막히면 또 구호를 외친다. “공영방송 KBS가 부당해고 웬 말이냐!” 비에 젖은 그들의 등만 바라보다 찻집에 들어갔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는데, 또 얼마나 비에 젖으려나. 찻집 통유리 너머로 뿌리는 비를 1시간 넘게 바라만 보다 일어섰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계약직지부가 지난13일 오전 서울 여의도 KBS본관 앞에서 그동안 사측과
벌여온 비정규직 문제해결과 고용안전을 위한 교섭 진행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아마 그 때문일 게다. 지난 금요일 토론회에서 도대체 비정규직에게 “연대하다”가 무슨 의미이냐고 묻게 된 것이. 사회에 ‘자리’가 있는 자, 예를 들어 정규직은 자리를 지키거나 나누거나 더 많이 만들기 위해 연대하고 지금까지 그렇게 연대해왔다. 때문에 연대하다는 사실상 무엇 무엇 ‘인 자’의 규범이며 모든 도덕과 문화와 관습, 법 역시 그러하다.

 하지만 한 사회가 무엇 무엇 ‘인 자’와 ‘아닌 자’ 즉 정규직 인자와 아닌 자, 정상인 인 자와 아닌 자, 인문계 고고를 나온 자와 아닌 자, 이성애 인 자와 아닌 자로 나뉘면, 그래서 사회에 자리 자체가 없는 긴 차별의 목록이 만들어지면 무엇 무엇 인자의 규범은 그렇지 않은 자를 배제하는 규범으로 바뀐다. 정규직이 아닌 자에게 연대하다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지 않고 그 말을 쓰게 될 경우 연대가 배제로 바뀌는 것은 불가피하다.

 노동조합 전략에 목소리내기(voice)와 회피(exit) 전략이 있다. 직장에 자리가 있는 정규직은 소리를 지르거나 아니면 다른 직장으로 자리를 옮기면 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지 않던가. 그러나 비정규직은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정규직 조직률은 17.5%이지만 비정규직 조직률은 2.5%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매년 떨어지는 추세인데 어떻게 목소리를 내겠는가. 그렇다고 회피(exit)가 가능한 것도 아니다. 비정규직에게 회피란 사회적 강제이며 일종의 추방이지 결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노동조합 전략 하면 두 가지를 떠올린다. 그것이 무엇 무엇 인자에게는 전략과 규범일지 모르지만 아닌 자에게는 그 말을 사용하는 것조차 배제이다. 다시 한 번 묻는다. 비정규직, 주변인들, 사회적 약자에게 연대하다는 어떤 의미인가. 그들이 연대와 저항의 주체일 수 있는가. 이 사회에 자리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가당키나 한 소리일까.

 이와 비슷한 문제가 최근 논란이 되는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에 있다. 대기업에서는 기존의 정규직 노동조합 외에 소규모의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있을 수 있다. 이들 노동조합은 조합원의 범위가 겹치는 복수노조가 아니기 때문에 현행법으로도 노동조합의 설립을 인정받은 다수노조이다.

 그런데 정부가 주장하는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는 다수노조와 복수노조를 구분하지 않고 한 사업 혹은 사업장에 하나의 교섭단위를 강제하기 때문에 현장에 다수의 조합이 있으면 조합원 수가 최소 1명이상 많은 노동조합만이 단체교섭권을 가지고 사무실을 유지할 수 있다. 즉 정규직 노동조합에 비해 조합원 수가 적은 비정규직 노동조합은 교섭권을 갖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한국의 노동조합은 해당 조합의 조합원 이익만을 대표할 뿐이며 다른 노동조합이나 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모든 종업원의 이익을 대표하는 조직이 아니다. 결국 숫자가 많다는 이유로 특정 이해집단에게만 단체교섭권을 부여하여 다른 노동조합은 헌법에 보장된 노동삼권을 갖지 못하게 된다. 또한 정부는 이 조치를 시행령에 의해 만들겠다고 주장한다. 노동삼권의 제약을 시행령으로 강제하겠다니. 해당 기사를 읽으며 눈을 의심하지만 다시 읽어도 그렇게 씌어있다.

 오늘은 영하의 추위란다. KBS 앞을 지나다보니 계약직 지부 사람들이 장갑을 낀 손으로 피켓을 들고 있다. 모금함이라도 있으면 싶은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다. 멈칫 거리다 다시 걷는 길에 노란 은행나무 잎이 휘날린다. 비정규직에게 또 다시 겨울이 왔다. 그들이 정규직처럼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대답할 자신이 없는 탓인지 아니면 추위 탓인지 장갑 낀 손이 시리다. 

정치권력의 의사를 대변하는 사법부라면 독립을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

이유정/ 변호사, 인하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국가권력을 입법, 행정, 사법으로 나누고 각 기관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권력분립의 원리이다.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이 하나로 통합된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그 권력은 남용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에 심각한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기관을 국민이 선출하여 구성하는 것이 대의민주주의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입법부의 구성원인 국회의원과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여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국가권력의 한 축을 담당하는 사법부의 구성원은 국민이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관료 법관으로 구성된다.  

 법관을 선거로 선출하지 않는 이유는 입법부는 다수결에 의해 선임되고 다수에 대해 책임지는 의원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다수의 의사를 입법으로 관철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사법부는 법의 원리를 규명하고 법이 무엇인지 선언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다수의 요구와 관심에 반드시 부응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대중의 영향으로부터 독립된 법관이 재판을 담당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다수의 의사에 의존하고 다수의 의사를 대변하는 입법과 행정은 소수의 이해를 대변하거나 권리를 보장하기 어렵기 때문에, 다수의 의사(정치권력)로부터 독립된 사법이야말로 소수의 이해와 권리를 보장하기에 가장 적합한 기관이다. 다수가 될 수 없거나, 다수와 이해관계를 달리 하는 사람들, 공동체의 집단적 목표에 의해 희생당하거나 권리를 침해당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다수의 눈치를 보지 않고 법과 정의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사법부야 말로 유일하게 기댈 언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사법이 과연 이러한 기능을 하고 있는가? 지난 주 법원과 헌법재판소가 선고한 두건의 판결이 그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용산참사의 1심 판결에서 법원은 진압현장에 있었던 철거민 피고인들에게 징역 5-6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을 행사하여 법질서를 유린한 행위는 엄중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는 사람들도 있다. 용산 참사의 피고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재개발이라는 다수의 이해관계 속에서 권리를 침해받고도, 정당한 보상을 받을 길이 없는 소수자들이다. 다수가 만든 법률에 그들의 권리는 누락되어 있다. 그런 사람들이 경찰 특공대의 진압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사망하였다면, 피고인들이 그 사망자의 아들이고 이웃이라면, 그들이 던진 화염병 때문에 화재가 발생하였는지 여부도 확실하지 않다면, 더구나 범죄사실의 입증책임이 있는 검사들이 수천페이지의 수사기록을 고의로 제출하지도 않고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면, 이런 사건에서 사법부가 5-6년의 중형을 선고하여 피해자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은 하지 않았어야 옳다. 많은 사람들이 판결에 대해 분노하는 이유는 피고인들의 행위가 정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경찰의 무리한 진압과 그로 인해 발생한 참혹한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오로지 힘없는 피고인들에게만 묻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29일 오후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개정 방송법 등 미디어법 권한쟁의 심판 사건에 대한 심의 모습

사진 출처 -노컷뉴스

 미디어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도 마찬가지이다. 헌법재판소는 표결과정에서의 위법을 모두 지적하면서도 국회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법률이 무효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다수의 눈치를 보지 않고 법과 정의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헌법재판소의  권한을 포기한 채,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잘못은 했지만 결과물은 건드리지 않을 테니 알아서 고쳐라’고 점잖게 훈계하고 끝내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역할인가? 온갖 불법을 저지르면서까지 미디어법을 통과시킨 다수가 과연 자율성을 발휘하여 스스로의 잘못을 고칠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인가? 

 사법부의 존재 근거는 소수의 이해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고, 다수를 등에 업은 정치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법과 정의를 수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법은 단순히 다수가 만들었다고 해서 정당화되는 그런 차원의 법이 아니라, 민주적이고 도덕적이며 형평성을 갖춘 법을 말한다. 민주적인 정당성을 부여받지 않은 사법부가 독립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만약 정치권력의 의사에 휘둘리고 눈치를 보며 앞장서 정치권력의 의사를 대변하는 사법부라면 더 이상 독립을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 지금까지는 사법부의 정치적인 독립을 위해 대법관과 헌법재판관을 선거로 선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지만, 계속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는 생각을 바꾸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루저’논란과 외모지상주의 (김창남 위원)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키가 180센티미터가 안 되는 남자는 루저”라는 발언으로 시끄럽다. ‘미녀들의 수다’(이하 미수다)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여대생의 이 발언은 인터넷을 통해 엄청난 비난을 샀고 급기야 다급해진 KBS가 제작진을 교체함으로써 논란을 잠재우려 하지만 네티즌들은 아예 프로그램을 폐지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일단 그 여대생의 어이없는 발언에 대해 비판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졸지에 루저라는 낙인을 받게 된 수많은 남성들이 분노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은 그런 발언이 논란을 낳으리라는 예상을 제작진과 그 여대생은 정말 하지 못했을까 하는 점이다. 그동안 방송에서의 발언으로 엄청난 비난을 샀던 연예인, 방송인들의 사례가 한두 번이 아니지 않은가. ‘대본에 따랐을 뿐’이라는 여대생의 해명이나  ‘대본은 강제적인 게 아니라’는 제작진의 변명은 더욱 무책임하다. 그런 식의 대본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시청률 경쟁을 위해 일부러 노이즈 마케팅을 하고자 한 게 아니라면, 이 프로그램 제작진의 한심한 ‘수준’을 폭로하는 일일 뿐이다. 이 발언이 나오게 한, ‘키 작은 남자와 사귈 수 있냐’는 질문부터 양식을 의심하게 하는 내용이 아닌가. 

 사실 이 ‘미수다’란 프로그램은 오래 전부터 교묘하게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기면서 출연한 여성들을 관음적 시선의 대상으로 만들어온 혐의가 짙다. 외국 여성들의 눈에 비친 한국인과 한국 문화의 모습을 짚어본다는 취지로 가끔 의미 있는 담론을 들려주었던 예가 없지는 않았지만 전반적으로는 외국 여성들의 외모와 성적 매력을 강조하면서 남성적 시선의 눈요깃감으로 만들어왔다. 제목부터 ‘미녀’를 내세우고 있지 않나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작진을 교체하면서까지 이 프로그램을 지속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키가 180이 안되면 루저”라는 여대생의 말은 그녀가 남달리 특별한 가치관이나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어서 나온 말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우리 사회에 이미 만연해 있는 어떤 ‘상식’을 정확히 보여준다. 남녀를 불문하고 키 크고 잘 생긴 사람과 키 작고 못 생긴 사람에 대한 사회적 대접은 이미 우리 누구나 알다시피 분명히 차이가 있다. 말하자면 키와 외모는 우리 사회에서 사람의 상품 가치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어 있다.  

 육체적 매력으로 평가되는 인간의 상품 가치를 편의상 육체 자본이라 불러 보자. 주목할 점은 육체 자본이 중요하다는 건 남녀를 불문하고 같지만 그 내용에서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이다. 남자의 경우, 육체 자본은 다른 사회적 가치(돈이나 지위, 권력 등)와 결부되는 경우가 많지만 여자의 경우, 그것은 온전히 육체 자체가 가진 가치로 측정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의 상품화, 요컨대 성적 가치의 결정성이 더 중요해 지는 것은 아무래도 남자보다는 여자 쪽이다. ‘미수다’의 여대생이 한 발언은 이제 남성의 성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압박도 여성 못지않게 강화되고 있음을 은연중 암시한다.


사진 출처 - KBS 홈페이지

 육체 자본은 대체로 타고난 유전적 특성에 의해 우선적으로 형성될 가능성이 크지만 현대 사회에서 그게 결정적인 것은 물론 아니다. 성형 수술, 피부 관리, 체형 관리, 헬스 센터, 다이어트 등 다양한 타이틀을 가진 육체 산업들은 사람들의 육체적 매력을 키워주는 것으로 돈을 벌어들인다.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타고나지 않은 사람이 육체 자본을 높이려면 그만큼 돈이 든다는 말인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돈을 들여가며 육체 자본을 높이려는 것에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 육체 자본이 클수록 더 많은 경제 자본을 얻어낼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체 자본을 많이 가진 사람(육체적 매력이 높은 사람)이 이를 통해 돈을 벌거나 돈 많은 배우자를 만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다는 말이다. 물론 그 역도 가능하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더 많은 육체 자본의 소유자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육체 자본과 경제 자본은 상호 교환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경제 가치, 요컨대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모든 다른 가치를 압도하는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육체 자본을 높이기 위해 애쓰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 특히 돈 이외의 다른 가치들은 언제든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로 가득한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의 상품화는 피할 수 없는 일상이며 삶의 조건이다. 그 속에서 시시각각 육체 자본에 대한 압박감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스트레스는 당연히 엄청나다. 한국 사회에 사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스트레스 지수는 아마 세계 어디에 내 놓아도 뒤 떨어지지 않을 게다. 그런 스트레스의 가장 큰 원인 제공자 가운데 하나가 TV이다.    

 우리나라 TV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미인이고 미남이다. 그리고 물론 섹시하다. 언제부터인가 TV에서 공개적으로 섹시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전혀 어색하거나 수치스럽지 않게 되어 버렸다. TV에 출연한 연예인들이 서슴없이 ‘섹시하시네요’ 같은 표현을 쓰고 그 말을 들은 사람은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고맙다’고 말을 한다.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보는 데 대한 분노보다 자신의 육체 자본을 높이 평가해 주는 데 대한 고마움이 앞선다는 말이다. 연예인들은 가능한 한 자신의 섹시함을 과시하고 남들로부터 섹시하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애쓴다. 그만큼 성에 대한 사고가 자유롭고 개방적으로 변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이제 육체 자본이 되돌릴 수 없을 만큼 확고하게 사회의 지배 가치로 자리 잡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미수다’에 나온 문제의 여대생의 발언은 그와 같은 사회적 가치와 문화에 젖어 있는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하나의 ‘상식’을 보여준다. 다만 그것이 ‘키 큰 사람이 더 좋다’는 수준이 아니라 180이라는 구체적 수치와 루저라는 자극적 표현을 통해 표현됨으로써 공분을 자아낸 것일 뿐이다. 자신의 감정과 상식에 충실할 줄은 알았지만 자신의 발언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사고할 만한 지성은 가지지 못했던 한 여대생을 두고 욕하고 돌팔매질하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란 얘기다.

 

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신부들이 용산으로 간 까닭은 (서상덕 위원) 

서상덕/ 인권연대 운영위원


 서울 명동성당 맞은편에는 세칭 ‘판넬골목’이라 불리는 좁은 골목이 있다. 차 한대가 근근이 드나들 수 있는 100미터 남짓한 길이의 골목인데, 한때 이 골목 초입에서 끝이 나는 지점까지 대부분의 담벼락에는 마이클 잭슨, 제임스 딘, 오드리 헵번, 올리비아 핫세, 소피 마르소 등 내로라하는 월드스타 사진부터 그리스도교 성화, 이발소에나 걸림직한 풍경 사진 등 다양한 그림들이 액자에 담겨 걸려 소박하지만 인상적인 풍경을 연출해냈다. 지금은 표구하는 가게는 모조리 사라지고 술집과 밥집들만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이름은 여전히 판넬골목이다.

 이강서 신부(천주교 서울대교구)를 처음 만난 곳도 판넬골목에 위치한 한 허름한 주점에서였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술이 몇 순배 돈 후 군종장교 전역을 앞둔 그가 풀어낸 교회에 대한 비전이나 삶에 대한 진지함이 꽤나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이 신부를 다시 만난 것은 몇 년인가 지난 후 당시 출입처로 드나들던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에서였다. 속으로 ‘그럼 그렇지’ 하는 탄성을 질렀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빈민사목위원회는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함께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공식 조직이다.

 몇 년이나 알고 지내왔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이 신부의 활동이 늘 열성적이면서도 인간적으로 다가왔던 기억만은 뚜렷하다. 그런 그를 용산 참사 현장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가 그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한 번 무릎을 쳤다. ‘그럼 그렇지.’

 알려진 대로 이제 용산은 대표적인 ‘국민’ 전자상가로서의 이미지를 비롯해 미군기지, 호남선 기점, 쪽방촌, 국립박물관 등 수많은 이미지 속에 ‘참사 현장’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더하게 됐다.

 입동을 지내며 겨울의 초입을 넘어선 어느 날 바람이 숭숭 통하는 용산거리 한쪽에 친 천막에서 만난 이 신부는 생각대로 따뜻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경찰들에 밀려 찢기고 쓰러졌을 때도 그 특유의 따뜻함으로 냉정을 잃지 않았던 그였다. 그런 그에게 내 물음은 조금은 당혹스러울 수도 있는 것이었는데 결국은 오히려 내가 당황하고 말았다.

 “왜 다른 사람도 아닌 신부들이 꼭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가?”

 신부들이 용산을 지키고 있는 현재의 핵심을 찌르면서도 교회 안팎에서 적잖이 들리는 질문들의 요지였다. 이 신부는 “순교를 해야만 할 상황이라면 다른 사람이 하는 걸 보고, 누구의 허락을 받고 할 것이냐”는 답을 돌려주었다. 속이 뚫리는 듯 한 느낌이 가슴을 뿌듯하게 만들었다.

이강서 신부는 ‘용산 참사’가 일어난 지 300일이 되도록 누구 하나 나서서 책임 있는 사과
한마디 없는 모습에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사진 출처 - 가톨릭신문

 “어떤 삶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은 어떤 종교, 어떤 지위에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양심에 따라 실존적 결단을 하는 문제입니다.”

 4, 50년 넘게 신앙생활을 했다는 신자들이나 타 종교인들이 내게 자주 하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왜 하필 ‘또’ 신부들이냐?”는 거였다. 이러한 물음에 이 신부는 “얼마만큼 하면 충분히 기도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얼마나 신앙생활을 하면 충분히 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하는 물음을 되돌려 주었다.  

 200일 넘게 용산 현장에서 참사 유가족들과 함께 지내며 나까지 38번째 언론 인터뷰를 한다는 이 신부, ‘시간의 무게’를 누구 못지않게 무겁게 느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그였지만 시간에 대한 기준은 달랐다.

 “믿음에도 다양한 편차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신자와 세례를 준비하는 예비신자로 곧잘 나눕니다. 그러나 ‘신자’와 ‘예비신자’는 세례로 구분되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계명을 하느님의 기준에 따라 사느냐 아니냐가 기준입니다. 하느님 이름으로 모였지만 하느님의 기준이 아니라 세속적 시선만을 유지한 채 충분히 영글지 못한 신앙을 지닌 채 살아간다면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한다 해도 그것이 신앙 성숙의 지표가 될 수 없습니다.”

 속이 후련해졌다. 대화가 깊어지면서 이 신부의 목소리에 조금씩 떨림이 실렸다. 눌러 왔던 생각들이 조금씩 고개를 드는 모양이었다.

 “이제 곧 참사가 일어난 지 300일이 되고 계절이 네 번 바뀌는데, 누구 하나 나서 책임 있는 사과 한마디 없는 이 모습이 과연 이성적이고 올바른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커다란 부조리는 바라보지 못하고 남의 티끌만 눈에 띈다면 그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한 번이라도 용산 참사 현장에 발걸음을 한 1000명이 넘는 신부들, 그들은 우리 시대 헐벗고 굶주리며 병들고 나그네 된 이들을 찾고 있음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 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서울 명동성당 맞은편에는 세칭 ‘판넬골목’이라 불리는 좁은 골목이 있다. 차 한대가 근근이 드나들 수 있는 100미터 남짓한 길이의 골목인데, 한때 이 골목 초입에서 끝이 나는 지점까지 대부분의 담벼락에는 마이클 잭슨, 제임스 딘, 오드리 헵번, 올리비아 핫세, 소피 마르소 등 내로라하는 월드스타 사진부터 그리스도교 성화, 이발소에나 걸림직한 풍경 사진 등 다양한 그림들이 액자에 담겨 걸려 소박하지만 인상적인 풍경을 연출해냈다. 지금은 표구하는 가게는 모조리 사라지고 술집과 밥집들만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이름은 여전히 판넬골목이다.


 이강서 신부(천주교 서울대교구)를 처음 만난 곳도 판넬골목에 위치한 한 허름한 주점에서였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술이 몇 순배 돈 후 군종장교 전역을 앞둔 그가 풀어낸 교회에 대한 비전이나 삶에 대한 진지함이 꽤나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이 신부를 다시 만난 것은 몇 년인가 지난 후 당시 출입처로 드나들던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에서였다. 속으로 ‘그럼 그렇지’ 하는 탄성을 질렀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빈민사목위원회는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함께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공식 조직이다.


 몇 년이나 알고 지내왔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이 신부의 활동이 늘 열성적이면서도 인간적으로 다가왔던 기억만은 뚜렷하다. 그런 그를 용산 참사 현장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가 그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한 번 무릎을 쳤다. ‘그럼 그렇지.’




 알려진 대로 이제 용산은 대표적인 ‘국민’ 전자상가로서의 이미지를 비롯해 미군기지, 호남선 기점, 쪽방촌, 국립박물관 등 수많은 이미지 속에 ‘참사 현장’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더하게 됐다.


 입동을 지내며 겨울의 초입을 넘어선 어느 날 바람이 숭숭 통하는 용산거리 한쪽에 친 천막에서 만난 이 신부는 생각대로 따뜻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경찰들에 밀려 찢기고 쓰러졌을 때도 그 특유의 따뜻함으로 냉정을 잃지 않았던 그였다. 그런 그에게 내 물음은 조금은 당혹스러울 수도 있는 것이었는데 결국은 오히려 내가 당황하고 말았다.


 “왜 다른 사람도 아닌 신부들이 꼭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가?”


 신부들이 용산을 지키고 있는 현재의 핵심을 찌르면서도 교회 안팎에서 적잖이 들리는 질문들의 요지였다. 이 신부는 “순교를 해야만 할 상황이라면 다른 사람이 하는 걸 보고, 누구의 허락을 받고 할 것이냐”는 답을 돌려주었다. 속이 뚫리는 듯 한 느낌이 가슴을 뿌듯하게 만들었다.


이강서 신부는 ‘용산 참사’가 일어난 지 300일이 되도록 누구 하나 나서서 책임 있는 사과

한마디 없는 모습에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사진 출처 - 가톨릭신문


 “어떤 삶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은 어떤 종교, 어떤 지위에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양심에 따라 실존적 결단을 하는 문제입니다.”


 4, 50년 넘게 신앙생활을 했다는 신자들이나 타 종교인들이 내게 자주 하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왜 하필 ‘또’ 신부들이냐?”는 거였다. 이러한 물음에 이 신부는 “얼마만큼 하면 충분히 기도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얼마나 신앙생활을 하면 충분히 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하는 물음을 되돌려 주었다. 


 200일 넘게 용산 현장에서 참사 유가족들과 함께 지내며 나까지 38번째 언론 인터뷰를 한다는 이 신부, ‘시간의 무게’를 누구 못지않게 무겁게 느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그였지만 시간에 대한 기준은 달랐다.


 “믿음에도 다양한 편차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신자와 세례를 준비하는 예비신자로 곧잘 나눕니다. 그러나 ‘신자’와 ‘예비신자’는 세례로 구분되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계명을 하느님의 기준에 따라 사느냐 아니냐가 기준입니다. 하느님 이름으로 모였지만 하느님의 기준이 아니라 세속적 시선만을 유지한 채 충분히 영글지 못한 신앙을 지닌 채 살아간다면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한다 해도 그것이 신앙 성숙의 지표가 될 수 없습니다.”


 속이 후련해졌다. 대화가 깊어지면서 이 신부의 목소리에 조금씩 떨림이 실렸다. 눌러 왔던 생각들이 조금씩 고개를 드는 모양이었다.


 “이제 곧 참사가 일어난 지 300일이 되고 계절이 네 번 바뀌는데, 누구 하나 나서 책임 있는 사과 한마디 없는 이 모습이 과연 이성적이고 올바른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커다란 부조리는 바라보지 못하고 남의 티끌만 눈에 띈다면 그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한 번이라도 용산 참사 현장에 발걸음을 한 1000명이 넘는 신부들, 그들은 우리 시대 헐벗고 굶주리며 병들고 나그네 된 이들을 찾고 있음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 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회고 이라크

 인류사 최고의 지향점인 평화가 한순간에 깨지는 장면을 보았다. 그래도 대한민국의 정상적인 공교육을 마쳤고 특별 하지 않은 사회 조건 속에서 비교적 합리적 사고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여전히 자기중심성의 늪에서 헤어나고 있지는 못하나 다중(多衆)의 이익을 위한 삶을 가끔은 생각하는 나 같은 부류에게도 국제사회의 온갖 비난과 전 세계적인 반전여론을 무시하고 벙커힐 호에서 발사된 토마호크 미사일이 바그다드 한복판을 강타했던 2003년 3. 20일 그날은 잊기 어려운 상처였다. 특히나 개전이 시작된 그날 백악관에 앉아 한가롭게 개전 성명을 발표한 원숭이 부시의 표정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뻔뻔 지수 측정기가 한계 없음을 깊게 각인시킨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라크전은 도덕적인 전쟁이며 이라크에서 위협을 제거하는 것 이외에 야심이 없다”나 뭐라나.

 지금까지 우리가 배웠던 어떤 교과서, 어떤 가르침 중에 “남의 생명을 빼앗아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것이 올바른 삶의 방법이다” 라고 규정한 대목이 하나라도 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산 인간 몇몇이 1970년대 산(産) 위인전에나 이름을 올린적은 있으나 역사의 평가는 냉혹하지 않았던가. 나폴레옹, 히틀러, 도조 히데키, 맥아더... 그리고 부시 (애비와 아들 둘 다). 수없는 죽음의 하치장을 만들어 그 희생자의 무덤 위에서 반세기도 가지 못할 허명(虛名)의 깃발을 세웠던 사람들. 모든 전쟁이 그렇듯 이라크에서의 살육과 호전적 제국주의, 이유를 모르는 죽음들과 그 주검을 가슴에 안으며 통곡하는 살아남은 사람들, 그 모든 것의 원인이 “돈” 때문이었다는 것과 지구상에서 가장 돈 되는 자원이 석유라는 것, 그리고 이라크에 석유의 매장량이 풍부했다는 것은 이미 어지간히 똑똑한 초등학생들도 다 아는 사실이 되었다.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인간이라는 고귀한 생명의 가치가 한순간에 사라져도 된다는 은폐된 광기의 표출이 전 세계의 지형을 흔들 정도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천해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고 그들은 나의 목숨 값을 얼마쯤 매기고 있을까도 생각했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신의 목숨이 돈으로 매매가 된다고 생각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혹독한 전쟁을 겪고 있는 이라크의 고통 받는 민중들에게는 그 질문이 가장 현실적인 사실이었다는 생각을 하면 가정(假定)으로 라도 성립될 수 없었던 질문을 품었던 나의 터무니없는 이성에 분노해야 했다.

니네들은 힘이 세서 좋겠다. 가진 거 많아 좋겠다.
그렇다고 아무나 줘 패면 미친놈 소리 듣는다.
니네 동네에는 어른도 하나 없냐 어찌 그리 막무가내냐
우리 동네에서 너 같은 놈은 열라 맞아 죽는다.

석유가 그렇게도 좋더냐 석유 마시고 살아라.     
전쟁 놀음이 그렇게 신나면 니들끼리 싸워라
니네는 평화란 말이 전쟁이냐 이 배워먹지 못한 놈아
옛말이 하나도 그른 것 없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   

너희 눈엔 하나도 안 보였지만 내 눈에는 다 보인다.  
이유 없이 죽어가는 아이들과 그 부모들의 통곡이
너희들은 전쟁이라 우겼지만 우리는 학살이라 말한다.  
너희들은 정의라 우겼지만 우리는 탐욕이라 말한다.   
“돈과 사람의 목숨을 바꾸는 미련한 세상
 돈과 사람의 목숨을 바꾸는 미련한 세상

                                                                      “미련한 세상” - 이지상 글, 곡

 전쟁이 빨리 끝나기 전에 대규모 병력을 파병해서 미국에 눈도장 확실히 찍고 이라크 재건 사업의 국익을 따내자는 국회의원의 소름끼치는 얘기가 들려올 때는 내가 사는 나라가 맞기는 한가 싶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고 수십만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파병 반대를 외쳤지만  그 사이 젊디젊은 청춘을 팔아 돈을 벌기위해 그들 스스로 가장 추악한 전쟁이라 부르는 살육의 현장에 우리의 병사들을 보낸 참여정부를 원망하기도 했다.

 “남의 집에 불이 나면 휘발유 더 뿌려 완전히 태운다음 다시 집 지을 때 기둥뿌리 하나라도 더 팔아야 네가 잘산다고” “그런 상황에선 네가 직접 휘발유 들고 가지 말고 만만한 옆의 집 아이를 시키라고. 그 아이가 죽건 말건 상관하지 말라고”

 자신의 아이들을 꼭 이렇게 가르쳤을 것 같았던 지독한 파병찬성론자 S의원은 “안보가 남편” 이셔서 아들이 없었고 보수의 원조를 자처하신 K의원은 아들을 군대 근처에도 보내지 않았으며 해병대 출신의 H의원은 본인이 자원해서 이라크에 가겠다고 해놓고는 낙선하신 백수 신분이 오래인데도 여적 소식이 없다.


똑같다 그들의 얘기... 기분 잡치는

 전쟁 참 쉽게 일어난다.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침략한 표면적 이유는 알제리의 태수가 프랑스 장교의 뺨을 때렸기 때문이고 1937년 중일전쟁의 시발(時發)은 노구교를 지키고 있던 일본군 병사가 다리 밑에서 오줌을 누었기 때문이었다. 베트남 전쟁(1964년)의 이유가 된 통킹만 사건도 미국 정보국의 조작 가능성이 제기되는걸 보면 전쟁을 일으키지 못해 안달 하는 특정 이익 집단은 드러나지 않게 많다.

 잘 알다시피 이라크 전쟁은 미국이 80년대 초에 제공한 대량 살상무기를 찾는다는 이유로 시작되었고 아프간 침공은 9.11테러의 주모자로 지목당한 오사마 빈 라덴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9년이 지난 지금 전쟁의 구실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과 다만 특정 이익 집단인 부시와 그 일당이 정권 잡은 기념으로 화끈하게 한탕 땡기기 위해 세계 양심의 조롱을 무릅쓰고 원숭이 짓 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 터무니없는 이유 때문에 20세기 이후 전쟁으로 죽어간 생명이 1억하고도 6천만 명이 넘는다. 미국이 아프간을 침공하고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한지도 9년째 접어들고 있다. 이미 우리나라는 다산 동의 부대를 파견한 적이 있고 그로 인해 종교적 신념을 가진 젊은이 둘과 파견비용 꼬박 모아 부모님대출금 갚으라고 송금 했던 젊은 병사를 잃었다. 정부는 그들이 바친 목숨으로 인해 전쟁으로부터 철수한지 22개월 만에 다시 군대를 파견하는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이라크 파병 때는 수십만의 시민이 모여 반대할 기회라도 있었는데 이번 결정은 그럴 기회도 없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지는 느낌이다. 더 유감스러운 것은 이라크 파병당시 파병을 지지하던 사람들의 논리가 하나도 바뀌지 않고 그대로 방송전파를 탄다는 것이다. 해외 파병이 국위선양과 국민 애국심 강화 측면에서 바람직하다 거나 전쟁터에 생떼 같은 목숨들을 보내면서 국익을 챙겨야 한다거나 UN의 42개국이 파병하고 있으니 파병 안하면 국제사회에서 왕따 된다는 협박 얘기가 대부분이다. 아~ 또 있다 잃어버린 10년 동안 소원해진 한미 공조 관계의 복원이란다. 미국이 아프간을 침공한 이후 그곳에 의료 선교를 자원해서 간 친구 부부가 있었다. 카불 인근의 열악한 병원에서의 진료와 현지 의과대학에서 수술법등을 가르쳤는데 제일 아쉬운 것이 부족한 약품과 의료 기기였고 아이들이 마땅한 시설 하나 없어 총알 껍데기 만지며 놀아야 하는 교육환경 이라는 소식을 자주 전했었다. 주목할 만한 산업기반이 없고 농지가 부족하니 배곯아 퀭한 눈으로 구걸하는 사람들을 보기 안쓰럽다는 말도 꼭 전했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기구가 지난 9년 동안 아프간에 지원한 돈이 약 150억 달러쯤 이다. 우리나라 돈으로 약 16조원이면 그 나라 돈으로 엄청 날 텐데 나는 그 친구로부터 병원이 하나 더 늘었다거나 공장이 지어졌다거나 적어도 수도 카불 시내 사람들이 밥을 굶지는 않는다거나 하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아프간 남자의 평균 수명이 42세라는 말은 들었다. 내가 거기서 태어났다면 지금쯤은 벌써 하늘의 판결을 받고 내세가 있다면 그곳에 가 있어야 한다. 태어나는 영아의 네 명중 한명은 부모 얼굴도 보지 못하고 죽는다. 16조원이면 그 정도의 열악한 상황을 얼마간은 충분히 개선할 수 있는 금액인데도 여전히 그곳의 소식은 암울하다.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미국 젊은 병사들이 매일같이 쏘아댄다는 포탄이나 군수 지원 비용으로 또는 그들의 목숨값 으로 쓰였을 것이고 그중 아주 일부는 부패지수 세계 8위라는 카르자이 정부의 관료들 손에나 쥐어졌을 것이다.

 이전에 파견되었던 특수부대 이름이 “다산”과 “동의” 였다. 병사들 목숨 팔아서 미국상전 잘 모시고 국익 팔아서 자기도 이익 좀 보자는 사람들이 지은 이름이니 허준 선생이나 정약용 선생이 달가워 할 리가 없다. 다산의 시 “애절양”에 나오는 자기 양물을 자른 이가 군포를 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참 그 이름지은사람 양심도 없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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