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 전국완/ 신목중학교 교사

전국완/ 신목중학교 교사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퇴행하듯 하는 세상일에 신경 쓰다 다시 병이 도질 것 같아서 뉴스고 신문이고 외면하고 산지도 꽤 되었다. 이렇게 눈과 귀를 틀어막고 사느라고 했지만, 너무도 엄청나고 황당한 사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니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세상 소식이 조금씩 새어들어 왔다. 용산참사,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죽음, 동료교사들의 잇단 징계와 구속……. 그럼에도 나는 적당히 슬퍼하고, 적당히 분노하며 또 적당히 잊어버리며 오늘까지 살아왔다. 

 더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런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정말 돌아버리지 않고 내 밥벌이를 지키기 위해 ‘불편한 사건’들에 적당히 외면하며 살아왔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스스로를 힘없는 백성이라고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매주 열리는 교직원회의 시간,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지 않는 일방적인 전달시간도 더 이상 불편해하지 않는다. 매일같이 쏟아져 들어오는 각종 공문에 대한 처리도 순순히 한다. 매일같이 강조되는 ‘방과 후 수업 강화’ 방침에도 더 이상 따지지 않는다. 며칠 전까지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홍보하던 ‘고교선택제’가 교육청의 한 마디 사과발표도 없이 ‘공문’ 한 장으로 하루아침에 ‘사실상 폐기’ 되었음에도 모멸감에 잠시 분개하다가는 그냥 넘어간다. 또 ‘학교의 자율’이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포장된 교장의 교사초빙 및 유임권한 확대에도 그저 ‘학교가 무슨 사조직이냐?’고 몇 마디 궁시렁거리고는 끝이다. 얼마 전 ‘학업성취도 평가’라는 이름으로 전국적으로 치러진 일제고사에도 별 저항 없이 순순히 응한다. 학기말 시험이 끝나고 가족끼리 체험학습을 신청한 학생에게, 일제고사 당일엔 허가해 주지 말라는 교육청 지시를 전하며 ‘무단결석’임을 경고한다.

 뭐라 따져볼라 치면 무슨 금과옥조나 되는 것처럼 ‘공문’을 들이대며 ‘공문=원칙’의 공식을 신봉하는, 그 어떤 고민이나 이견도 허용치 않는 학교 관리자들 앞에서 이제 그냥 손을 들고 싶어진다.

 이렇게 살다보니 그동안 나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던 영혼이 거추장스러워진다. 말로는 교육의 주체라고 하지만, 모든 교육정책의 수립과 집행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현장교사로서 의견을 말할라치면 하는 족족 시퍼런 칼날을 들이대 모가지를 댕강 잘라버리는 이 황당무계한 시대에, 높으신 분들이 짜놓은 교육과정에 주어진 교과서대로 가르쳐서 특목고나 대학에 잘 보내는 것만이 교사가 할 일이 되어 버린 지금, 우리에게 무슨 영혼이 필요한가?


초ㆍ중ㆍ고교생들의 학업 수준을 파악하기 위한 국가 수준의 학업성취도 평가가
지난 10월 13일 전국 1만1천496개 초ㆍ중ㆍ고교에서 실시됐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그리고는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교원 평가'를 통해 교사도 본격적으로 경쟁을 시킨단다. 우리 공교육의 왜곡과 실패, 사교육에 잠식당하게 된 원인이 교사들이 경쟁을 거부하고 ‘철밥통’을 차고 앉아 버티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다. 이 정부 들어 더욱 가속이 붙어 내년쯤이면 이빨 뿐 아니라 손톱, 발톱 다 빠진 호랑이처럼 영혼이 거의 남아있지 않을 우리 교사들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지금도 매년 이루어지는 학교평가에서 각 단위학교가 경쟁적으로 하고 있는 ‘실적 부풀리기’가 교사들 간에도 일어날 게 뻔하지 않을까? 나아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돌진하는 로봇이 되어가지는 않을까? 

 결국 로봇들이 가르치는 학교가 사교육을 이길 수는 있을까? 사교육을 이긴다는 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로봇들이 가르친 우리의 아이들은 어떤 삶을 살아갈까? 그 아이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은 또 어떤 모습일까?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보이는 것, 과정이나 방법보다는 결과, 경제적인 효율성만을 중시하는 천박한 사고방식이 만연해 가고 있는 지금, 그 물길을 더욱 거세게 부추기는 일련의 교육정책들을 보며 내가 교사로서 그래도 살아남으려면 점점 거추장스러워지는 영혼을 과감히 내던져 버려야 하는 것인지 하는 고민을 심각하게 해 본다. 

 이런 황당한 고민을 하는 지금, 먼 옛날 흐릿한 기억 속 서부영화 한 장면이 떠오른다. 백인들과 한바탕 추격전을 벌이던 인디언들이 말을 타고 달리다가 잠시 멈추고 자신이 내달려온 길을 한참동안 돌아보던 장면이 말이다. 그들이 멈춰 선 것은 미처 따라오지 못한 자신들의 영혼을 기다리는 것이라는데…….


역사가 반복 (안)된다고?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문화연구학과 교수

 이곳 네덜란드에서는 연말분위기가 조금 일찍 시작된다. 어린이와 뱃사람의 보호성인인 신터클라스(Sinterklass, 영어로는 Nicholas) 축일 이브 날인 12월 5일에 선물과 축복을 나누며 한 해를 마무리한다. 일찍이 네덜란드인들이 신대륙으로 건너가 뉴 암스테르담(현재의 뉴욕)을 건설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신터클라스 명절이 미국으로 건너가 (귤이 대서양을 건너 탱자가 되듯이) 12월 24일에 활약하는 산타클로스로 재탄생 되었다는 학설도 그럴 듯하다. 그런데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전통의 재창조 혹은 원조 찾기'가 아니라, 신터클라스 축제일에 네덜란드인들은 선물과 함께 자신이 직접 쓴 시를 교환하면서 함께 읽는 오랜 전통을 즐긴다는 사실이다. 이날만큼은 학교와 직장은 물론 언론매체와 국회 등지에서도 야유와 풍자가 넘치는 '시인들의 왕국(네덜란드는 입헌군주정이다)'이 되는 셈이다.

 지난 넉 달 동안의 짧은 체류 경험에 비추면, 교수정년퇴임식에서도 송사와 답사가 시 읽기로 진행될 정도로 시 쓰기와 낭송이 네덜란드에서는 어느 정도 일상생활화된 것처럼 보인다. 내가 거주하는 라이덴(Leiden)에서는 1980년부터 도시건물의 여백에 세계 40여개 국가의 시를 그 나라 언어(원어)로 장식하는 문화운동을 시민단체가 주관하여 전개해 왔다. 13년에 걸쳐 총 101편의 시로 도시를 시인의 마을로 색칠하는 행사는 전체 시를 담은 책자 《벽 위에 쓴 시(Dicht op de Muur: Gedichten in Liden, 1992)》의 간행으로 완성되었다.  '대안 이미지'(Tegen-Beeld, Counter-Image)라는 주관예술단체의 명성에 어울리도록, 미운 현실에 대항하는 질서를 꿈꾸며 억압에 맞서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헌신하는 내용을 주제로 하는 세계적인 시들이 선정되었다고 한다.

사진 출처 - 필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던 청교도들이 일시 피난, 정착했던 '망명객의 도시 = 라이덴'이라는 오래된 명성과 잘 어울리는 도시 프로젝트인 셈이다. 필자가 책자를 (네덜란드어를 모르니까) 대충 살펴보니까 아쉽게도 한국시인의 작품은 보이지 않았다.


라이덴(Leiden)에서는 1980년부터 도시건물의 여백에 세계 40여개 국가의 시를
그 나라 언어(원어)로 장식하는 문화운동을 시민단체가 주관하여 전개해 왔다.

사진 출처 - 필자

 '더치페이'라는 신조어를 잉태할 정도로 셈이 정확하고 실용적인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시는 물과 기름같이 어울리지 않는 이물질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어쩌면 시를 쓰고 읽는 행위는 천박한 현실과 낯 가름하고 더 좋은 내일을 다짐하는 일상적인 업무와 역사적 과제의 일종이 아닐까. 이런 명분을 담고, 네덜란드인들의 문학 사랑을 흉내 내며, 나의 문학청년 시절의 결기를 되살려, 오늘은 독자 여러분들과 한 편의 시를 읽으며 올해를 환송하고자 한다. 멀리서 기원하오니, 부디 겨울의 남은 추위를 잘 이기시고 새해에는 행운과 기쁨으로 가득 찬 또 다른 나날이 되옵소서.

교생실습

아마도 일천구백팔십일년 봄이었겠지(요).

내가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얻기 위해 교생실습을 나간 곳은
서울시내에서 축구와 주먹으로 손꼽히는
어느 공고 야간 졸업반

영문도 모르고 다닌다는 영문학과 퇴폐총각 샘
터벅머리 머시마들과 함께 공부한 것은 

보이스 비 엠비셔스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은 뛰누나
이 따위 머리 쥐나는 영어문법과 독해가 아니라

컨퓨젼 윌 비 마이 에피타프
침묵이 비명을 삼켜버리고
힘 가진 놈이 제 법대로 아름답다면
지식은 한갓 라면이나 끊이면 보람이겠지

너무나도 비장(悲壯)한 음조와 노랫말을 담은
외국산 팝송 '묘비명' 이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미안하지만, 그때는 일천구백팔십일년

내가 걸음마 할 때부터 종일 대통령이었던 농민의 아들
막걸리 대신 시바스 리걸로 잔이 넘쳐 돌아가시고
남쪽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고립되어 꽃잎처럼 스러졌네. 

세계가 서울로 마구 모였다는 팔팔 올림픽은 그 다음 이야기
사우스 코리아 전직 대통령이 황혼이 깃들기 전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린 것은 아직 먼 훗날

컨퓨젼 윌 비 마이 에피타프
알고 있는 자 4월의 나무처럼 분연히 일어서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운명은 바보들의 손아귀에 (아직) 잡혀있네

우리가 견뎠던 이 땅의 혼란과 시련이 7080 운동가요
후렴처럼 반복된다면

음탕하게 늙어버린 중년 주름에 각인된
나의 부끄러운 교생실습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어머니.


현재 유럽 연합 의장국인 스웨덴은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 계획안을 유럽 연합에 제시해 놓은 상태이고, 이번 주에 브뤼셀에서 개최되는 유럽 연합 회의에서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안이 논의될 것으로 예상된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이 계획안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계획안을 즉각 거부하였고,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예루살렘은 분리될 수 없으며, 항상 이스라엘의 수도로 존재할 것이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이스라엘의 입장은 별로 새로울 것이 없고 1994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이후 계속돼온 양 측의 기존 입장들을 재확인 한 것에 불과하다.

 스웨덴의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창설 계획안에 대하여 팔레스타인 국제문제 연구소장인 마흐디 압둘 하디(PASSIA, Mahdi Abdul Hadi)는 필자에게 “스웨덴의 계획안은 UN 결의에 입각하여 움직여왔던 유럽 연합의 기존입장에서 나온 것이며, 이스라엘의 동예루살렘 유대화 정책에 시의 적절하게 경종을 울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정부는 하루가 다르게 예루살렘을 독점적인 유대인의 도시로 만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유대화 정책은 국제법을 위반하는 것이며, 유럽인들이 믿고 있는 국제사회의 도리와도 충돌되는 것이다. 스웨덴의 계획안은 국제법을 위반하는 예루살렘 유대화 정책에 제동을 걸려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마흐디 압둘 하디(PASSIA, Mahdi Abdul Hadi) 팔레스타인 국제문제 연구소장
사진 출처 - 필자

 이스라엘은 1967년 전쟁 이후 현재까지 동예루살렘을 불법적으로 점령하고 있으나, 알아크사 모스크는 여전히 팔레스타인인들 정체성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2000년 9월 28일에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야당지도자가 1천명의 이스라엘 경찰을 이끌고 알 아크사 모스크를 방문하면서 2차 팔레스타인 민중봉기가 촉발되었다. 이와 같이 알 아크사 모스크와 동예루살렘 문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정치에서 예민한 쟁점이며 핵심적인 상징이 되어왔다. 

2009년 12월 2일 이스라엘은 셰이크 아크리마 사브리(Sheikh Ekrima Sabri)에게 6개월 동안 동예루살렘에 위치한 알 아크사 모스크의 출입을 금지했다. 셰이크 사브리는 현재 알 아크사 모스크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설교자이며, 이슬람 고등 위원회의장이다. 셰이크 사브리는 1994년 10월부터 2006년 6월까지 팔레스타인 종교 최고지도자(the Grand Mufti)를 역임하였다.  


 이번 셰이크 사브리에 대한 알 아크사 모스크 출입 금지 명령은 그가 일주일 동안 메카 순례를 다녀온 날인 지난주 2일에 발생했다. 사브리의 딸인 루바바(Lubaba Sabri)는 필자에게 이 사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모스크 출입 금지 조치는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조치이다. 이스라엘은 나의 아버지가 팔레스타인인들을 알 아크사 모스크에 모이도록 고무시킨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나의 아버지는 알 아크사 모스크를 파괴하려는 행위들을 막고 모스크를 보호하는 것을 자신의 필생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의 알 아크사 모스크 주변에 굴착기를 동원한 굴 파기 등을 비롯한 모스크 파괴 행위를 중단시키도록 압력을 행사해야한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 셰이크 사브리는 “우리는 인간에 관한 논의로부터 출발해야한다. 세계인들, 특히 유럽인들은 이스라엘의 인권 위반 행위들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한다. 오늘날 예루살렘 문제는 예루살렘 주권을 대상으로 한 유대교도와 무슬림 간의 종교 분쟁이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알 아크사 모스크에서 설교하고 있는 셰이크 아크리마 사브리.
셰이크 사브리는 1994년 10월부터 2006년 6월까지 팔레스타인 종교 최고지도자(the Grand Mufti)를 역임하였다.

사진 출처 - 필자

그에 따르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유대교도와 무슬림들 간의 종교 이념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 결코 아니며, 역사적으로 1917년 영국의 밸푸어 선언과 강대국들의 개입으로 촉발된 이후, 더욱 복잡하고 어려운 양상으로 전개되어 왔다.  

 이스라엘은 알 아크사 모스크 주변뿐만 아니라 동예루살렘에 위치한 예수의 묘가 있는 장소로 알려진 성묘 교회(the Church of Holy Sepulcher) 주변도 2009년 11월 23일부터 굴착 공사를 시작하였다. 요르단 정부는 2009년 12월 3일 이 공사에 대하여 이스라엘 측에 항의 서한을 전달하였다. 올 해 7월 이후 현재까지 동예루살렘 세이크 자흐라 지역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이 계속해서 강제 퇴거당하고,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퇴거당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주택을 점령하고 있다. 이스라엘 당국은 11월 한 달 동안 동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주택 14채를 파괴하고 170채에 대한 파괴 명령을 내린 반면,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은 계속됨으로써 동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인들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알 아크사 모스크 주변의 굴착 현장 모습
사진 출처 - 필자

 마흐디 압둘 하디(Mahdi Abdul Hadi) 소장은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충돌의 새로운 장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정부는 예루살렘에서 운영 중인 팔레스타인 기구들을 더 많이 폐쇄시키고, 더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을 추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현재 상황을 상당히 비관적으로 전망하고 있다. 스페인은 곧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 계획안을 유럽 연합에 제출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 정치에서 유럽 연합 지도자들은 개별적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이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독립 국가를 건설할 권리는 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주장을 피력해 왔다. 따라서 유럽 연합이 어떤 결의를 한다할지라도, 그 결의가 예루살렘 유대화 정책에 제동을 거는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대학을 졸업한다.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다 서울엘 왔고 휴학도 했고 전과하느라 놓친 이수학점을 위해 한 학기를 더 다녔다. 드디어 졸업한다. (사실 아직 기말시험을 보지 않은 터라 약간 불안은 하다만) 어쨌든 어떻게든 이번엔 졸업해야 한다. 하긴 요즘은 대학을 졸업해도 졸업한 게 아니라더라. 기본 1년은 취업준비생으로 살아야 한단다.  

 대학생활 남은 건 빚뿐이라, 라고 말하기는 싫다. 빚지는 대학생 얘기야 이미 흔하지 않은가. 대학생활이야 후회는 없지만 그에 비해 감당해야 할 등록금이 너무 크니까, 대학생활마저 그만한 값어치를 했나 하고 따져보게 된다. 그래도, 내게 대학생활은 소중한 시절이었다.

 2년 전, 제 때 대학 들어가고 휴학 없이 4년을 깔끔하게 다니고 졸업한 내 친구는, 취업이 안 되니 영어공부를 한답시고 상경을 했다. 만날 때마다, 소화도 안 되고 잘 체한다고 말했었다. 취업 때문에 심적 부담이 크구나 싶었지 내 일 같진 않았다. 사실 오만했다. 그게 ‘나는 잘 취업할 거니까’가 아니라, ‘취업에 목매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회가 규정하는 88만원 세대 담론에 휩쓸리기도 싫었고, 내몰리듯 대학 왔고 거기에 목매어서 다시 수능을 친 스스로에게도 속상한데, 떠밀리듯 취업 준비하고 싶진 않았다. 살아가는 게 게임하듯 스테이지가 있는 게 싫었다. 학생으로 살아가다 직장인이 되고 다음 단계는 결혼, 이런 뻔 한 시나리오 말이다. 영어공부를 하고 싶었지 토익준비를 하고 싶진 않았고, 기업에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땐 엄마와 싸워도 당당했고 내 소신에 대해 떵떵대며 말했다. 시각을 더 넓히자 싶어 내가 못 보는 것들을 쫓아서 여기저기 쏘다니고 사람들과 일을 꾸미며 살았다. 그게 결국은 내 취업에까지 도움이 될 거라고도 믿었다, 솔직히 그랬다. 내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사는 게 결국은 더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한국대학생연합 소속 대학생들이 지난 5월 2일 보라매 공원에서
'등록금 인하와 청년실업 해결을 촉구하며 집회를 열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이제 졸업한다. 지금 내 심정이 어떠냐 하면, 사실 갈팡질팡하는 내가 좀 속상하다. 후회는 없지만, 한편으론 내가 다른 방식으로 맹목적이었다는 생각도 한다. 이미 먹어버린 빨간 약을 어쩔 수는 없고 그렇다고 자신감은 떨어지고. 믿었던 것들이 흔들리고 자꾸만 편하고 안정되고 싶어지는 마음이 새록새록 자란다. 자기 합리화 해버리고 싶고 그래서 자책하고 후회하기도 한다. 확신은 없더라도 내가 좀 더 믿고 끌리는 쪽으로 살다보면 뭐든 확신할 수 있을 거라고, 적어도 나를 배반하며 살진 말자고 생각했건만. 살아가는 거 어차피 ‘불안’한 거라면 나는 안정에 반대되는 뻔한 ‘불안’말고 다른 질감의 불안을 안고 살아가리라 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뻔하게 불안해진다. 불안하고 불안해하다 늙고 병들어서 힘들지 않기 위해 지금 이러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이런 문제야 사회를 탓하고 사회 시스템을 바꿔야 하는 일이라고 외치고 싶지만, 또 그건 아주 허무해지는 일이다. 쉽게 허무해지지 않는 사람이야 사회운동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만큼의 뚝심도 사회제도를 바꾸는 일에 대한 큰 열정도 없는 것 같다. 정말 현실적인 일에 부딪치면 어디 원망도 누구 탓도 하기 어려운 것 같다. 그러니까 당장 몇 달 후면 학자금 대출 상환이 시작되는데 말이다. 자꾸 그걸 외면하려고만 하다보면 생각과 현실과의 괴리만 커지고 더 무기력해지는 법이다. 차라리 몸을 굴려 알바라도 해서 돈을 버는 게 더 나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 지금 내 삶에 후회해? 또 그건 아니다. 대학 졸업 앞에서, 지금 이 문턱을 어떻게 넘느냐가 내겐 너무 절실하다. 어정쩡하게 흘러가다 보면 서른이 되었을 때 지금과 똑같은 불안으로 고민할 게 뻔하니까. 아마 그땐 결혼 문제가 더해지려나. 십 년이 지나도 지금과 같은 불안을 느끼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렇다면 나는 지금 현실적으로 닥친 이 문턱을 어떻게 넘느냐가 절박한 내 문제다.   

 빚은 천 만 원이 넘고 당장 원금상환은 시작될 거고, 이러다가 안락한 집하나 못 갖고 살 건데, 나는 자꾸 칭얼대고 탓 하고 서글퍼지기만 하다만, 그렇다고 모두가 말하는 그런 현실적인 어른이 되기는 싫고, 무력한 청춘도 되기 싫은데, 그렇다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라고 되뇌일 수밖에.  

 아주 좋아하는 말이 있다. “타인의 행복에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부디 너의 행복을 거머쥘 수 있도록 보람찬 나날이 되어야 해. 꼭.” 처음 서울에 와서 사회에 비판적인 시선도 갖고 인생에 대한 고민도 많을 때 아주 많은 힘이 됐던 말이다. 오랜만에 되뇌어 본다. 그때와는 또 다르게, 더 영리하고 지혜로운 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한대수는 ‘호치민’이라는 제목의 노래에서 사회주의 베트남 건국의 지도자 호치민(胡志明)을 이렇게 소개한다.(랩이니까 그냥 소리 내어 읽으면 된다. 단, 한대수 식의 경상남도 사투리로. 이 노래에서 멜로디는 후렴구-‘호치민 호치민 호치민’-가 전부이며, 괄호 안의 ‘아 그래요’는 표준어를 구사하는 20대 여성의 평어체 대사다. )

 “호치민에 대해서 말하자면 참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학자의 집안이고 불란서 점령 당시에 
 왜 서양세력이 자기 나라를 이렇게 장기간 동안 점령하느냐
 거기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또 워낙 문학가 집안이니까 여러 책을 보면서 
 연구를 하게 되죠  

 호치민 호치민 호치민   

 그래서 적을, 적을 이기려면 적을 알아라라는 
 요런 명언이 있으니까 불어를 열심히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아 그래요)
 그런데 불란서를 가야 되겠는데 유람선의 요리사 조수로 취직하게 됩니다
 불란서에서 불란서 공산주의자들과 접촉이 이루어지고
 또 거기에서 맑시즘을 배웠고
 드디어 어떠한 계기에서 모스크바를 방문합니다 (아 그래요)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 대학교에 입학해서
 과연, 제국주의, 자본주의 요런 데 대해서 공부를 하게 됩니다 

 여기에다가 러시아의 힘을 얻고 중국에 또 이사를 갑니다
 여러가지 민중의 고통, 민중의 핍박, 또 프롤레타리아
 거기에 대해서 배우고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옵니다

 호치민 호치민

 미국이 이젠 등장하는데 그 부패된 고딘디엠 정부를 지원하면서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아주 지속된 전쟁의 끝없는 폭격
 약 3200일의 끝없는 폭격을 밤낮으로 당하면서
 미국의 강력한 군사력을 이겨낸 유일한 사람입니다 (아 그래요)”

 부정확한 서술이 일부 있기는 하지만, 한대수 특유의 직관이 십분 발휘된 드라마틱한 설명이다. 부정확한 서술이 있는 곳은 마지막 부분이다. 마치 10년 전쟁 전체를 호치민이 지휘한 것처럼 한대수는 노래했지만, 호치민은 전쟁이 끝나기 6년 전인 1969년 베트남 독립기념일에 세상을 떠났다. 호치민이 주로 활약했던 건 프랑스와의 전쟁이었고, 미국과의 전쟁을 주도한 것은 남베트남 출신의 레 두안이었다. 이미 1960년께 권력의 상당부분은 호전적이었던 레 두안에게 넘어가 있었고, 호치민은 당의 상징적인 얼굴로서, 외교적 대표로서만 활동하고 있었다. 실용주의자였던 호치민은 인민들의 고통만을 가중시킬 것이라는 이유로 미국과의 전면전을 망설였다.

 나는 평소, 북한의 사회주의가 왜 유난히 교조적이고 전투적인지, 왜 수많은 사회주의 국가 중에 유일하게 북한에서만 부자 승계가 이뤄지는지 궁금했다. 한때는 모든 걸 기후 탓으로 돌리며 비과학적 결론에 이른 적도 있었다.

호치민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쿠바나 베트남 같은 사회주의 나라들이 북한보다 훨씬 유연하고, 부자 승계도 없는 이유를, 날씨가 따뜻해서 먹을 것이 풍부하니까 사람들이 욕심이 적기 때문인 것으로 마구잡이로 재단했다. 하지만 베트남을 좀 더 들여다보면서, 사회과학에서 이런 식의 ‘기후 결정론’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됐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레 두안이라는 인물은 갑자기 죽지만 않았다면 거의 김일성처럼 됐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짐작하다시피, 호치민의 권력 행사는 대단히 민주적이었다. 주석의 이름으로 강제하는 일이 거의 없었고, 모든 결정을 토론에 의존했다. 호치민은 반대했으나 강경파들에 의해 강행된 토지개혁이 민심의 반발에 부닥쳐 결국 호치민이 나서 사과를 해야했던 것도 좋은 사례다.

 호치민의 생애 중 나를 가장 감동시키는 대목은 한대수의 노래에 나와 있지 않다.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고 독립에 성공한 뒤, 호치민은 으리으리한 총독궁을 놔두고 그 옆의 정원사(우리로 치면 마당쇠) 오두막에서 살았다. 적어도 주거 면에서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던 백범 김구의 소원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이런 겸손함과 청빈함으로 민중들의 마음을 얻었다.

 호치민은 여러가지 면에서 김구와 닮았다. 어릴 때부터 독립 운동에 매진했고, 사심이 적었다. 유교적인 가치관을 가슴 밑바닥에 깔고 있었다는 점도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호치민이 제국주의를 몰아낼 수단으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데 반해, 김구는 사회주의 역시 외세의 일종으로 보아 배격했다는 점이다. 프랑스와 미국, 러시아, 중국 등 세계를 떠돌며 국제감각을 익힌 호치민이 실용주의적 관점으로 사회주의를 채택한 반면, 한국과 중국에 시야가 국한돼 있던 김구는 일체의 외세를 배제하고 우리 민족만의 독립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이상주의자에 가까웠다. 호치민이 한 때 미국을 이용해 프랑스를 몰아내려고까지 했을 정도로 국제정치에 민감했던 데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역할을 한 사람이 이승만이었다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이승만은 신탁통치안을 교묘하게 비틀어 ‘찬탁=공산주의’라는 프레임을 만들어내고, 이를 반공 세력의 결집 기회로 활용한다. 이어 반공의 깃발아래 미국과 친일파, 지주들을 등에 업고 남쪽에서 권력을 잡았다.

백범 김구
사진 출처 - 백범 김구 기념관

이 때 형성된 극우 헤게모니는 군부독재와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지나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김구 선생을 존경하지만, 해방 공간만 생각하면 속이 쓰리다. 나는 지금 김구가 사회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을 아쉬워하는 게 아니다. 호치민의 실용주의와 국제감각을 말하는 것이다.

 생전의 노무현은 이렇게 썼다. “김구 선생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존경할 만한 사람은 왜 패배자밖에 없는가?’ 하는 의문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왜 패배했는가? 역사에서 올바른 뜻을 가진 사람은 왜 패배하게 되는가? 이런 질문은 ‘우리 역사에서는 정의가 패배한다’는 역설적 당위로 귀착되었고, 나는 그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노무현이 만난 링컨>에서)

 노무현 스스로도 ‘패배하는 정의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견처럼 보여 슬픈 대목이다. 노무현은 도덕적 수단(당정분리, 권력기관의 자율화)으로 우리 사회의 부도덕(지역주의, 수구언론)을 이기려고 했던 반(反)마키아벨리주의자였다. 그 불가능해 보이던 실험은 예상대로 패배했다. 노무현이 미처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김구는 단지 정의의 편이기 때문에 패배한 것이 아니다. 아까 말한 대로, 숨가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를 잘 몰랐거나 일부러 무시한 채 어떤 진공 상태의 이상만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상주의자로서 노무현의 패배는 민중들의 삶의 조건에 대한 실체적 관심보다는 일종의 당위로서의 정치투쟁(수구언론과의 싸움을 포함하여)에 치중함으로써 민중들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안목에 남달리 예민했던 노무현은 현실의 민중들이 원하는 것을 포착하는데 상대적으로 서툴었다.

 이명박은 노무현의 전도된(뒤집힌) 형태다. 역사에 무감하고 도덕에 무관심하다. 역사적으로 부도덕한 자들은 도덕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부도덕을 증명한다. 식언은 예사다. 그리고 자신이 특정 계급의 대표라는 사실을 기술적으로 숨기고 있다. 지지율이 떨어질만 하면 재래시장에 나가 떡볶이를 먹으며 서민 경제를 걱정한다.(이런 정치 쇼야말로 노무현이 가장 혐오했던 것이다) 그리고 신혼부부 보금자리 아파트 같은 기만적인(언발에 오줌누기라는 의미에서!) 술책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있다. 위장 전술은 지금까지 잘 먹히고 있다. 한 편으론 정부 기관이 앞장서서 직장 폐쇄를 강행하고, 파업권 등 각종 헌번적 권리를 짓밟고 있다. 리영희 선생이 예견한 대로, 이 정권 하에서 서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질 것이고(실제로 그렇지 아니한가), 범죄는 늘어날 것이며, 계급 갈등이 격화되는 투쟁 사회로 나아갈 것이다. 방송을 장악해 정권을 연장한다면 그 갈등은 더욱 커져 폭발 직전에 이를 것이다. 이 정권에 조금이라도 합리적인 사람이 남아 있다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명박의 감동적인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는 (사담 후세인이 주도한) 이라크 혁명 정부의 청렴성과 과단성, 비전을 상찬하는 대목이 나온다.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정부의 평등의식(준공기념식을 준비하는 현대건설에게 차양을 치려면 수상이 앉아있는 단상과 객석에 똑같이 치던지, 아니면 걷어버리라는 지시가 내려졌다)에 놀라며, 말레이시아가 무서운 속도로 우리를 따라잡을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한다. 이 때(1995)까지만 해도 인간 이명박에게는 역사의식과 평등의식이 남아 있었다. 이제 와서 그때를 돌이켜보라는 것은 정녕 부질없는 권유일까.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전문)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며칠 전, 그러니까 2009년 11월 27일은 우리 정치사에 두고두고 회자될 날이 될 것 같다. 이 날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마음에 있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거짓말을 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런 반성의 말을 덧붙였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후회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그대로 밀고 나가겠단다.

 대통령의 이런 고백에 국민들은 참 당혹스럽다. 우선 다른 걸 다 떠나서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다. 선거법 위반이다, 사기다, 갖가지 비난이 쏟아지고 있지만 가장 심각한 건 이번 사태가 국가 지도자인 대통령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조차 뿌리째 흔들어버렸다는데 있다. 우리 국민들은 정치인들의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으로 흩어져버리는 걸 수도 없이 목격했다. 하지만 이번처럼 ‘애초부터 생각이 달랐는데 당선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고백은 사상 초유의 사태다. 그렇다면 2년 전 대통령 선거는 도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이 땅에서 민주주의는 어떤 의미와 무게를 지니는가?

 늦었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고백에 반성이 따르고 거짓말에 속은 당사자들의 의견을 존중하겠다는 의지가 따른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번 대통령의 ‘후회와 반성’ 속에는 그런 의지가 전혀 깃들어 있지 않다. 대통령의 입장은 ‘비록 내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거짓말을 했지만 내 생각이 옳기 때문에 밀고 나가겠다’는 것이다. ‘미안하다. 이해해라.’

 

 그런데 세종시 문제만 그런 걸까. 혹시 4대강 사업은? 모두가 아는 대로 4대강 사업의 전신은 한반도 대운하였다. 뜨거운 논란 속에 반대여론이 비등하고 사업계획의 허점이 드러나면서 대통령은 임기 중에 대운하를 추진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대신 4대강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이 4대강 사업은 이름만 바꾼 한반도 대운하 사업이라는 의혹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다. 4대강 사업이 마무리될 즈음 우리는 다시 한 번 대통령의 고백을 접할지도 모른다. ‘미안하다. 사실은 4대강 사업이 한반도 대운하 사업이었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공사를 마쳤는데, 이제 물길만 이으면 된다. 국민들 다수가 반대했지만 내 생각이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거짓말을 했다. 이해해라.’

 이런 상황에서 명색이 주권자인 우리는 대통령의 선의만 믿고 그의 거짓말을 이해하고 따라야 할 것인가?

 서울 방향으로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다 행정중심복합도시라는 안내판을 마주쳤다. 대통령의 뜻대로 세종시 원안 추진이 백지화된다면 전국 고속도로와 국도의 표지판은 물론 새로 만들어진 지도와 각종 데이터도 모두 수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랏일 치고는 너무 경박스럽지 않은가.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해서 법안을 만들고 그 법률에 의거해 추진되던 일이 하루아침에 백지화될 처지에 놓여 있다. 국민들의 뜻도 아닌데 말이다. 이런 우리사회의 정체를 무엇이라 불러야 하나. 한국적 민주주의? 이명박식 민주주의? BJR 민주주의? 어떤 수식어를 갖다 붙이든 ‘민주주의’라는 네 글자가 참으로 초라해 보인다.

어느 날 아침 출근을 위해 지하철 역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려 한다. 평소 몸이 기억하고 있는 대로 발걸음이 내디뎌졌고, 순간 앞사람과 충돌할 뻔 했다. 어제와 달리 에스컬레이터는 하행이 상행으로, 상행이 하행으로 바뀌어 있었고, 우측보행이라는 표어 같은 것이 바닥에 붙어 있다. 한동안 주로 다니는 지하철역에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에스컬레이터를 타려할 때마다 발이 꼬이는 황당한 경험을 해야 했다. “아차~. 에이 씨~.” 우측보행이라니.......

 그리고 나서 얼마 후 밥 먹으며 TV를 보는데 우측보행을 생활화하자는 내용의 공익광고 같은 것이 화면에 흐른다. 선진국에서는 우측보행이 생활화되어 있다는 둥, 어떤 아이가 아빠로 보이는 사람의 손을 잡고 가고 있고, 맞은편에서는 유럽인쯤으로 보이는 백인이 뭔가를 보면서 아이의 정면으로 걸어오고 있는데, 아이는 어느 쪽으로 걸어가야 하느냐고 아빠로 보이는 사람에게 묻고, 아빠로 보이는 사람은 아이에게 서로 부딪히지 않고 길을 가기 위해서는 우측보행을 해야 한다는 식의 뜬금없는 얘기를 한다.

 고등학교 시절 나의 사촌 형이 대학교 앞 차도에서 뒤에 오던 무보험 차량에 치어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 칠순을 앞에 둔 나의 어머니는 일방통행로에 서 있다가 뒤에서 오던 차에 발목을 치어 지금도 원활한 보행에 지장을 느끼신다. 내가 아는 대학생 한명은 이면도로에서 뒤에 오던 차가 왼쪽 무릎을 치어 평생 등산하기 어렵게 됐다.

 난 어려서부터 좌측보행, 정확히는 좌측통행을 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으면서도 좌측통행을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누군가에 의해 주입된 행동을 하기 싫은 것이다. 그런데 나이 먹고 나서 정부가 우측통행 아니 우측보행을 하라고 하니 더 하기 싫다. 더군다나 우측보행을 하는 것이 마치 선진국민, 문명인의 보행방식이라는 식의 얘기를 들으니 하기 싫은 기분을 넘어 역겹게 느껴진다.

 난 지금 화가 나있다. 왜 내가 걸어가는 방향을 정부가 일률적으로 정하려고 하는가? 좌측통행도 자연인의 보행방향을 획일화 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전체주의적 관점이라는 거부감이 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평생을 몸에 익혀 살아온 통행방식을 자기들 입맛대로 바꾸고 또 다시 이를 획일화 시키려 한다. 게다가 그것에 선진국형, 문명국형이라는 식의 수식어까지 붙여 한순간에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을 후진국형, 야만국형 인간으로 만들었으니 화가 안 날 수 없다.

 사람의 의식과 행동은 자연스럽게 조화되어야 한다. 설령 아무리 우측보행이 보행방식에 있어서 우수하더라도 그것으로 인간의 행동을 강제하려는 순간, 우측보행은 그 자체로 최소한의 가치도 갖지 못한다. 차량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최선의 통행방식이 무엇인지, 사람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최선의 보행방법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 그것을 넘어 우측보행을 일률적인 인간의 보행방법으로 반드시 지켜야 할 어떤 문화적 규범, 법률로 만들고(실제로 한나라당 박대해 의원은 이를 입법추진중이다), 인간의 의식에 주입하려는 것은 규범, 법률을 가장한 인간에 대한 폭력이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심지어 어떤 교통문화 단체에서는 이와 같은 우측보행을 파쇼적인 발상이라거나, 레드 콤플렉스의 반영이라고 아주 강하게 비판한다. 난 현재 진행 중인 우측보행 계도 광고가 정부가 강제력(예산, 광고 내용, 실제 생활에서의 에스컬레이터 등의 배치 변경 등)을 통해 인간의 행동유형을 획일화 시키려는 발상에 연결된 것이라는 점에서 전체주의적인 시도라고 비판하고 싶다. 더구나 이번 정부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에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붓는 것은 자신의 존재 근거인 국민을 기만하고 또 무시하고 있는 증거라고 비판하고 싶다. 복지예산 증액은커녕 이를 줄이기 급급하면서도 이처럼 근거 없고,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인 정책으로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정부(물론 이보다 4대강 공사에 쓰일 천문학적인 액수의 예산을 생각하면 목구멍으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에 대하여 능력이 없으면 차라리 잠자코 있으라고 비판하고 싶다.

 현재의 보행문화, 통행문화에 문제가 있더라도, 정부로서는 이로 인한 손실을 줄이기 위한 노력에 앞서 차도와 인도(보도)가 구분되지 않은 전국에 산재한 많은 보차비구분도로에서 발생하는 교통사고를 줄이기 위한 대책부터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지방에 가보면 갓길을 걷는 사람들이 빠르게 곁을 지나쳐가는 차량으로 인하여 느끼는 위협이 과연 어느 정도 될 것인지, 그로 인한 생활상의 스트레스는 어느 정도일지 감히 가늠하기 힘든 도로들이 무수히 많다.

 이런 위험스런 상황이 정부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장님 정부고, 무능력하며 무책임한데다 낭비벽 심한 정부다. 더 위험한 것은 이런 정부가 전체주의적, 파쇼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세종시 논란이 뜨겁다. 정부와 지방 정부, 해당 주민들, 국민 여론, 정부 여당 내부, 정당 간 등 나라가 들썩거린다. 세종시와 관련해서는 참여정부 시절 수도권 집중 억제와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한 신행정수도 정책으로 처음 등장했고, 이후 헌법재판소의 ‘관습헌법’ 판결로 행정중심복합도시(행복도시) 정책으로 수정되었다. 그러나 현 정부에서 이 정책을 대폭 수정하려고 한다. 이러면서 시끄러워졌다.   

 나는 세종시 정책을 잘 알지는 못한다. 그런데 내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의 말 바꾸기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한나라당 후보였던 이명박 현 대통령은 행복도시 정책을 계승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본인이 대통령이 되면 행복도시가 안 될 거라고 하는데 자신은 ‘꼭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역설했다. 공식 석상에서 약 열 다섯 차례의 세종시 공약 이행 발언을 해 왔음에도 최근 말을 뒤집었다. 그리고 행동대장으로 정운찬 신임 총리를 내세우고 뒤에 숨어 있다. 더불어 작년 미국 쇠고기 수입 파동 때도 느꼈지만, 역시 이번에도 해당 정부기관에서는 정책변경에 대한 근거 자료를 확 바꿨다.  

 현 정부 들어와 세종시 공약만 수정, 폐기된 것은 아니다. 대학 등록금 반 값, 통신비 인하, 신혼부부 아파트 공급, 저소득층 복지예산 감소 등 하나 둘이 아니다. 더불어 경제성장률 7%, 임기 내 국민소득 4만 불과 7대 강국 진입, 주가 5,000포인트, 300만 명 일자리 창출도 결과적으로 헛공약 남발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미국에서 느닷없이 서울-평양 남북연락사무소를 설치하자는 쇼도 씁쓸한 해프닝으로 끝났다.  

 이렇게 공약 폐기와 헛공약 남발을 일삼는 이명박 정부는 ‘나들섬 프로젝트’ 또한 올 해 슬그머니 간판을 내렸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이명박 대통령은 강화도 북서쪽 한강하구에 약 900만평(여의도의 10배) 크기로 복토하여 인구 20만 명 규모의 국제 비즈니스 신도시를 건설한다고 밝혔다. 동북아 물류거점 확보와 남북경제협력의 터전으로 만든다는 취지다. 그러면서 지난 정부의 성과물이라 할 수 있는 개성공단의 확대·발전을 경계하였다. 그러나 통일부의 2008년 계획에도 존재했던 나들섬 구상이 2009년에는 조용히 사라져버렸다. 현인택 현 통일부장관이 나들섬 구상의 핵심 인물이었음에도 말이다. 

 열흘 전에 강화도 평화전망대를 다녀왔다. 한강하구를 건너 정면으로 북한 황해남도 당두포가 자리하고, 북서쪽으로는 정부가 구상했던 나들섬이 보였다. 그런데 깜짝 놀랐다. 섬 가운데가 잘려 두 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는 서해 바닷물로 인한 조수 간만의 차와 한강하구 유역의 물살 흐름이 유동적인 것에서 기인한다. 정부가 기존 섬에 엄청난 토사를 쏟아 부어 900만평의 섬으로 만든다 해도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의도적으로 개성공단 2단계 발전을 축소하고, 현 남북관계의 냉랭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허울뿐인 정책이었기에 폐기되었다고 보여진다.


한강하구의 조수 간만 차이로 나들섬이 두 섬으로 나뉘어졌음
사진 출처 - 필자

 이렇게 ‘빚 좋은 개살구’ 대북정책을 일삼는 이명박 정부가 지난 9월, 미국에서 ‘그랜드 바겐’ 정책을 제시했다. 결국 북핵 폐기와 북한 체제 보장을 동시에 일괄적으로 타결하자는 정책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정책이 과연 현실성이 있냐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모두 비현실적이거나 정치적 위장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얼마 전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조차 정운찬 총리와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그랜드 바겐 정책에 대해 엇갈린 해석을 내놓을 정도로 다듬어진 정책이 아니다.  

 남한 정부는 최근 북한의 대남 유화적 태도를 엄격한 상호주의를 펼친 대북정책의 치적이라고 홍보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남북 교류협력사업 진행에 대한 승인을 불허하면서 기다림의 전략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그랜드 바겐 정책을 ‘비현실적이며 얼빠진 제안’이라고 부정적으로 일축하였다. 결국 행동 대 행동 원칙 해법이 아닌 그랜드 바겐이라는 ‘한 방 해법’은 지난 정부와 다른 대북정책을 내놓겠다는 쇼로 그칠 가능성이 크다.

 오바마 대통령의 방한에 맞춰 한미 간에 아프간 파병, 그랜드 바겐, FTA가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그랜드 바겐이 미국 대북정책과 유사성을 갖추고 있다고 수사적 발언으로 대국민 홍보를 하리라 예상된다. 그러나 다음 달 보즈워스 미국 대북 특사의 평양 방문으로 개최되는 북미회담의 결과는 그랜드 바겐 원칙과는 멀어 보인다. 일괄 타결이 아니라 행동 대 행동 원칙 속에서 북미관계의 진전이 불가피해 보인다. 더불어 일본 하토야마 총리도 곧 방북하겠다는 언론 보도도 나왔다. 결국 북핵해결에 있어 남북관계가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이 소외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분명하다. 이명박 정부는 ‘one shot deal’이라는 그랜드 바겐 정책을 폐기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행동 대 행동 원칙으로 남북관계를 조금씩 진전시키는 정책이 필요하다. 남북이 주도해가는 분위기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현실적으로는 남북이 미국, 중국, 일본 등과 공동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 결국 그랜드 바겐 정책으로는 더 이상 한국이 설 자리가 없다. 더 이상 늦춰져서는 안 된다. 쇼는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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