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창영/ 전남대 공익인권법센터 연구원, 전임 간사

 현 정부 들어 많은 부분이 후퇴하고 있다는 소리가 자주 들린다. 87년 이후 눈물겹게 쌓아왔던 민주주의의 성과가 ‘좌빨들의 편향’으로 공격받으며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더구나 ‘촛불세력의 반성’ 운운하는 대통령의 한심한 발언은 불의의 시대라는 진단에 힘을 더해 주고 있다.  

 일련의 후퇴 속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경찰이다. 경찰의 후퇴는 한심한 수준을 넘어 위험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이미 촛불국면에서 보여주었던 경찰의 대응은 군사정권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시국치안에 힘쓰지 말고 민생치안에 힘쓰라는 국민의 요구는 물대포 직사로 간단하게 무시되었다. 또한 촛불 관련자들에 대한 검거열풍도 군사정권이 보여주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찰 활동에 국민은 없고 정권의 요구만 고스란히 남게 되었다.  

 그런 경찰 활동이 최근 들어 공안경찰로 굳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지난 4월 일부언론에서는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울경찰청이 진보성향 교육감 후보의 동향을 감시하고 있다는 정황을 보여주는 문건을 공개했다. 문건에 따르면 경찰은 정보과 형사들에게 좌파 후보들의 선거 전략과 지원세력, 자금 및 조직 현황 등을 파악하라고 되어 있다. 반대로 우파 후보들에 대해서는 우파 후보 승리를 위한 전문가들의 의견이 무엇인지 파악하도록 하고 있다. 군사정권 시절에나 가능했을 법한 일이 벌어지자 소위 진보후보들은 “경찰의 선거개입”이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경악할 일은 또 있다. 경찰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던 전남대 학생을 벌건 대낮에 학교 안까지 들어와 강제 연행하는 일이 발생했다. 봉고차를 대동한 사복경찰들이 몸싸움까지 벌이며 강제 연행했고, 경찰을 깡패로 오인한 시민들이 경찰에 신고하는 헤프닝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연행된 학생은 2008년 이적단체로 규정되어 있는 한총련의 의장 대행을 한 이후로 경찰의 수배를 받아왔다. 수배를 받고 있었다고는 하나 그 혐의라고 하는 것이 실익이 불분명한 국가보안법 위반이었고, 고작해야 학교에 숨어 지내야 하는 연약한 존재였다. 과연 이 학생에게 군사정권 시절에나 있었던 대학 안에서의 연행을 할 만큼 ‘현존하는 명백한 위험’이라는 것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 본관 건물
사진출처 - 문화일보
 

 이 뿐만이 아니다. 곳곳에서 공안경찰로 급격하게 후진하고 있는 경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수사권 조정’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참여정부 시절 활발하게 논의되다가 좌절되었던 것이 검찰의 일탈을 기회로 해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공수처 설치, 중수부 폐지 등 검찰을 개혁해야 한다는 여당 의원들의 주장도 힘을 실어 주고 있다. 수사권 조정은 검찰에게만 인정되고 있는 수사권을 경찰에게도 일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안이 있지만 수사의 개시와 진행은 경찰이 하고, 종결은 검찰이 하도록 하자는 식이다. 그런데 수사권 조정은 경찰 활동이 완전하게 민생치안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과거 경찰은 정보와 보안 등 소위 공안부서가 밥을 먹여주는 꼴이었다. 그러던 것이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수사와 생활안전부서로 무게 중심이 이동했다. 시국치안에서 민생치안으로 조금씩 이동해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런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경찰의 수사권 조정 요구도 설득력을 갖게 된 것이고, 시민사회와 국민의 지지 또한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경찰 스스로는 실력이 쌓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경찰 활동의 변화 없이는 동의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경찰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

 수사권 조정이 경찰에게는 검찰과의 자존심 문제를 넘어 사활의 문제일지 모른다. 그러나 국민의 입장에서는 정보와 보안에 무게가 실린 공안경찰에게 수사권이라는 무기까지 주어지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국민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정권의 입만을 바라보는 경찰활동에 날개를 달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수사권과 공안은 별개의 문제일 수 있으나 국민의 감정은 논리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경찰이 진심으로 수사권 조정을 하고 싶다면 공안의 탈을 벗어야 한다. 정치인들의 수사가 아니라 국민의 힘을 얻어야 가능한 일이다.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


 “갈등의 시대를 끝내고 통합의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작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이 치러진 직후 라디오를 통해 행한 이명박 대통령 연설의 표제다. 그는 이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시대를 향해 나아가야 하며, 이를 위해 관용과 타협을 친구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어느 덧 노무현 서거 1주기가 다가 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통합의 정치’를 필생의 업으로 삼았던 사람이다. 그가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별명이라고 밝혔던 ‘바보 노무현’도 실은 여기에 기인한다. 그는 분열을 조장하는 지역주의 정치의 종식, 민주주의 세력의 통합을 위해 끊임없는 결단에 임했다. 그런 결과, 그는 2000년 총선에서 보다 유리했던 서울의 종로를 버리고 부산에 출마하는 선택을 하였다. 결국 낙선의 고배를 마셨고, ‘바보 노무현’이 되었다. 그러나 2년 후,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른바 ‘야권연대’가 오랜 시간 회자되었다. 위기 앞에서 늘 연대와 통합의 필요는 등장했다. 연대와 통합은 분명 이익의 희생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그 이익의 희생이 공평하게 적용되도록 하는 것이 명분이다. 여기에서 상대적으로 힘을 갖춘 세력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 불편과 희생을 감수하고 이해를 뛰어넘는 명분으로 시대의 돌파구를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것이 이번 지방선거 야권연대 논의의 핵심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지방선거 야권연대 논의의 관건은 민주당이 제대로 시대를 읽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미, 소위 ‘중앙’의 야권연대는 깨졌다. 그나마 몇몇 지역에서 그 불씨가 유지되고 있지만, 그 속내를 일일이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그 과정의 험난함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곳에 민주당이 있을 것이다. 제주만 하더라도 어려운 사정 끝에 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의 도지사 후보 단일화가 성사되었지만, 여기에 민주당 후보는 있을 지언정 민주당은 사실상 없었다. 당초 사실상의 전략공천을 의도했던 유력후보가 도덕성을 문제 삼는 여론에 밀려났지만,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그 유력후보에 대한 미련 앞에서 민주당의 시대정신도 밀려나 있었다. 결국 민주당의 후보가 단일 후보로 결정되었지만, 이 후보는 당분간 한나라당과 동시에 자신을 후보로 공천한 정당인 민주당과도 싸워야 하는 운명에 처해졌다.

 
제주 야권도지사 후보단일화 경선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고희범 후보(가운데)가 단일후보로 결정되었다.
사진 출처 - 제주의소리

 부자정책, 일방주의의 국정을 펴는 이명박 대통령의 통합론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지만, 민주주의의 위기 앞에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얘기하는 한나라당 정권을 넘어설 진짜 민주주의가 불안하다. 87년 6월 항쟁 이후, 분열로 얼룩졌던 이 나라 민주주의 세력의 ‘회복’이 아니라, 암울한 현실의 희망을 만들어내는 ‘진실한 통합’에 나서야 한다. 민주당이든 국민참여당이든 노무현 정신의 계승을 자임한다면, 스스로 ‘바보’가 될 준비도 해야 한다. 바보는 당장의 이익 보다는 시대의 고통을 먼저 본다. 그 고통의 한복판에 뛰어 들어 진실함을 발휘할 때, 얼마간 ‘삐쳐있던’ 희망도 비로소 환하게 웃음을 주지 않을까? 

 바로 몇 시간 전 제주의 야권 도지사 단일후보 경선결과를 발표하는 행사를 치렀다. 이 자리에서 후보단일화 경선에서 패배한 한 후보는 이렇게 말했다. 

 “6월 항쟁때 다른 생각, 다른 의견, 다른 세력들이 모였지만 구호는 오직 하나였다. 독재타도! 호헌철폐!”

 우리가 바보가 되는 순간, 각기 다른 정당, 시민세력들이 외칠 구호는 단 하나다. ‘사람 사는 세상’, 그것이 아닐까?
 이번 지방선거에서 반드시 이뤄내야 할 반MB·반한나라당의 승리, 어쩌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하나의 구호를 손에 잡히는 희망으로 만들어내기 위한 ‘바보들의 통합’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아닐까?

 * 이 글을 쓴 고유기 위원장은 ‘제주희망정치(준)’의 운영위원으로도 참여하며, 최근 제주 야권연대를 위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느낀 점을 쓴 것입니다.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김정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조선) 국방위원장이 중국을 방문 중이다. 일부에선 ‘이러다 조선이 동북4성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한국 정부는 2008년부터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며 2년 이상 강경자세를 유지해 왔다. 대북 인도적지원도 끊겼다. 그렇게 강하게 나가면 조선도 더 못 버틸 것이고 그러면 남북관계가 ‘정상화’된다고 했다. 그렇게 ‘마냥’ 기다리기만 했다.

 상식을 기준으로 생각해보자. 평양에 있는 정책담당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뭐하러 자존심 굽히며 한국에 무릎을 꿇겠는가. 60년을 이어온 ‘혈맹’ 중국이 있는데 말이다. 해마다 대규모 인도적 지원도 해주고 경제지원도 해준다. 대접은 또 얼마나 극진한가. 결국 기다리며 압박한 결과가 동북4성인 셈이다.

 남북관계에서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는 말은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11월12일 청와대에서 열린 언론사 논설실장단 오찬간담회 자리에서 처음 썼다고 한다. 정석구 한겨레 선임논설위원이 5월4일자 칼럼에 쓴 증언을 들어보자.

 “이 대통령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자신 있는 말투로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했다. ‘남북문제는 김대중 정권 초기에도 8개월, 노무현 정권 초기에도 10개월(?) 등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런 (대화 중단) 전략을 써왔다. 대화 중단하고 이대로 있는 것도 하나의 전략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정권은) 북한과 색깔이 다르니 (다른 정권에 비해 대화 중단 기간이) 몇 달 더 걸릴 것이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정 위원도 지적했듯이 기다리기 전략의 결과를 우리는 지금 목격하고 있다. 바로 조선이 경제와 정치 안보 모든 면에서 갈수록 중국의존도가 심해진다는 점이다. 이제는 거의 생명줄이나 다름없을 정도다.

 10년 전인 2000년 조선의 대중국 무역의존도는 일본과 비슷한 25% 수준이었지만 2008년에는 73%가 됐다. 교역액은 10년 사이에 5배 넘게 증가했다. 조선에 대한 총투자액의 90%를 중국이 차지하고 석유는 이미 사실상 100% 중국에서 수입한다. 중국은 꾸준하고 ‘통 큰’ 대북지원을 통해 명분과 실속을 동시에 챙기고 있다. 지난 2007년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은 신압록강대교 건설을 제안하면서 공사비 전액(약 2200억 원)을 부담하겠다고 나섰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집행한 대북지원예산 2조 366억 원(식량차관 8715억 원 포함)의 10%가 넘는 액수다.  

 북중교역은 최근 질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조선의 대중 주력 수출품은 2000년대 초반 어패류 등 동식물성 식품(38.51%)이었지만 최근에는 철광석, 석탄, 아연 등 광물성자원(41.3%)으로 바뀌었다. 중국은 대북 총투자액의 70%도 지하자원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 2006년 1월 17일 중국 베이징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지난해 원자바오 중국 총리는 조선을 방문해 중국 훈춘과 조선 함경북도 나선항을 잇는 93㎞ 도로를 건설해주는 대가로 나선항 부두 개발권을 확보했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동북지역 개발을 국가적 과제로 삼고 있는 중국은 북·중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대북 인프라(SOC) 투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으로서는 북중 경협 확대가 곧 동북지역 개발인 셈이다.

 북중교역과 남북교역은 반비례관계다. 남북교역이 약화되면 북중교역이 늘어났다. 북중교역은 2001년과 2008년 증가세가 두드러졌고, 2002년과 2006년, 2007년에는 증가세가 둔화되었다. 다시 말해, 최근 급격히 증가한 북중교역은 지난 2년간 ‘관계’ 자체가 없어져 버린 남북 간 갈등의 산물이다. 미국이 이란을 경제 제재하는 사이에 중국이 어부지리 챙기는 것과 닮은꼴이다.

 그러고 보면 이번 정권은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 아니라 ‘기다리는 것 말고 전략이 없다’는 말이 더 맞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한마디로 ‘무대뽀’였고 천안함 사고 이후엔 거의 정신줄 놨다고 보면 너무 심한 말인가.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모두 말을 아끼며 신중한 자세를 견지하는데 한국 혼자만 난리치는 것을 보면 뒷감당 어찌하려 그러는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조선(=북한) 연계”를 자꾸 흘리는 것과 검찰이 즐겨 쓰는 ‘피의사실 공표’가 묘하게 닮았다는 생각은 나 혼자 드는 망상일까?)

 이와 관련 에이던 포스터 카터 영국 리즈대 연구원은 지난달 15일 미국 주간 뉴스위크에 기고한 ‘조선을 잃어버리고 있다: 한국은 북방정책 펴야’라는 글은 여러 가지로 의미심장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는 이 대통령을 G20 정상회의 의장이 아니라 조선을 잃은 남한의 대통령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는 “한국의 우파들은 북한이 중국의 동북 4성이 된다고 비판하지만 그것은 제 얼굴에 침 뱉기”라면서 “한국의 근시안적 보수파들은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에게 쌀을 보내는데 필요한 적은 돈에도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 역시 귀담아 들을 대목이 아닐까 싶다.

 이 글을 쓰면서 처음 생각한 화두는 “조선이 중국에 팔려가고 있다”였다. 거기서 나오는 질문을 던져보자. “조선을 중국에 팔아버린 자는 누구인가.” ‘퍼주기’라는 조악한 유언비어를 유포했던 자들과 거기에 고개 끄덕거렸던 이들이여, 가슴에 손을 얹고 눈물 흘리며 반성할지어다.


홍미정/ 건국대학교 중동 연구소 연구교수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에 따르면, 정통 유대교 랍비이며 반시온주의자였던 모세 히르쉬(Moshe Hirsch)가 2010년 5월 2일 예루살렘에서 8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는 시온주의를 반대하면서 이스라엘 국가가 ‘점령된 팔레스타인 땅’에 건설되었다고 주장하는 정통 유대교도 분파인 네투레이 카르타(Neturei Karta)의 최고 지도자였다. 이스라엘 점령민들(Israeli Settlers)은 유대인 랍비 모세 히르쉬를 ‘이스라엘 국가의 적’이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장례식을 공격하였다. 히르쉬는 근본주의자 이스라엘 점령민들에게 염산공격을 당하여 한쪽 시력을 이미 잃었다.  

 모세 히르쉬의 장례식날, 텔아비브 시장 론 훌다이(Ron Huldai)는 “모든 극보수 정통 유대교 분파에게 제공되는 지원금을 중단하도록 ‘침묵하는 대중들’이 나서야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스라엘 국가를 부정하는 극단주의자 하레디 단체들, 즉 극보수 정통 유대교 단체(Ultra-Orthodox Communities)들에게 지급되는 국가의 지원금은 중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러한 이스라엘 국가에 반대하는 이스라엘내의 하레딤들은 이스라엘 인구의 10퍼센트를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히르쉬는 야세르 아라파트 수반이 통치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서 유대인 업무에 관한 고문으로 일하였고, 팔레스타인인들과 특별한 유대 관계를 형성하면서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을 지지하였다. 히르쉬는 아라파트를 형제이자 친구로 생각하였고 ‘점령된 팔레스타인 땅’에 건설된 이스라엘은 해체되어야한다고 역설하였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예루살렘 행정 고문인 하템 압델 까데르(Hatem Abdel Qader)는 “랍비 히르쉬는 팔레스타인인이며, 우리가 매우 경의를 표하는 팔레스타인 유대인이다. 우리의 문제는 유대교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시온주의와의 문제다.”라고 밝혔다. 

랍비 모세 히르쉬가 야세르 아라파트와 함께(2003년 9월 16일)
사진 출처 - 네투에리 카르타

 네투에리 카르타는 ‘도시의 수호자’란 뜻이며, 1938년 예루살렘에서 반시온주의를 내걸고  창립되어 현재까지 시온주의와 투쟁하면서 이스라엘 국가 해체운동을 하고 있다. 이 단체 회원들은 수 천 명에 불과하지만, 때때로 예루살렘 중심가에서 이스라엘 국기를 불태우면서 이스라엘 국가라는 실체를 거부하는 반 이스라엘 시위를 조직한다. 이 단체는 가자의 하마스 통치와 레바논의 헤즈볼라를 지지한다. 이 단체 회원들은 2006년 이란에서 마흐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개최한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대회에 대표단도 파견하였다.(http://www.nkusa.org/aboutus/index.cfm)

 이와 같이 보수적인 정통 유대교 단체들이 반대하는 ‘유대국가 이스라엘’ 영토 확장 사업을 위하여, 이스라엘은 오늘도 팔레스타인인들이 거주하는 서안, 가자에 대한 무장 공격을 계속하고 있으며, 동예루살렘에서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재산권을 강탈하는 이스라엘 점령촌 확장 사업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이 가운데 미국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회담을 주선하고 있다. 이 회담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과 아랍인들이 ‘이스라엘을 유대국가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동시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건설과 관련되는 사항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국경 획정, 난민 귀환권, 동예루살렘 주권, 천연 자원, 이스라엘 점령촌 등을 의제로 채택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대신에 ‘이스라엘 안보’를 주요 의제로 다룰 것을 요구하고 있다. 현재 이스라엘이 강력하게 추진하는 점령촌 건설을 포함한 ‘점령지 유대화 정책’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땅에 대한 소유권을 현실적으로 빼앗기 위한 것이며, 199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계속돼온 팔레스타인인들과의 협상 과정에서 분명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김 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필자는 ‘소신’이라는 말을 참 좋아하며, ‘소신 있는 사람’이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의연함‘이라는 형용사를 붙일 수 있는 사람이나 행동 역시도 멋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필자는 조각가 로댕의 비서였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쓴『로댕 어록』속의 로댕의 어떤 말이 가슴에 와 닿아 적어서 오랜 동안 벽에 붙여 두고 지냈었다. 기억나는 대로 적어보면, “깊고 의연하고 성실하십시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생각이 남들과 다르다 하더라도 그 발표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그들은 이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에게 깊은 진실인 것은 모두에게도 진실이기 때문입니다.”가 그것이었다. 이러한 ‘소신’은 참 아름답다고 생각되며 로댕의 이러한 격려는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적신다.    

 한편, 2010년 3월 24일자 어느 주요 일간지 1면에서 필자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헤드라인이 하나 있었다. 워낙 ‘소신’ 없는 이들이 많아서인지, 혹은 ‘소신’을 들먹이기엔 자신감들이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쉽게 신문에서 접하지 못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소신’이라고 믿던 터에, 그 단어가 들어간 헤드라인이 한눈에 들어왔나 싶다. “李대통령 ‘4대江 사업은 내 소신’,” “생태계를 복원하는 생명 살리기…반대하는 사람들 설득해야”가 그것이었다. 그 기사를 일부 인용하자면, 이명박 대통령은 3월 23일 국무회의에서 “생명을 살리고 죽어가는 생태계를 복원하며 깨끗한 물을 확보하는 것이 4대강 살리기 사업의 목표이자 내 소신”이라며, 최근 천주교 주교회의의 반대 성명 등에도 불구하고 4대강 사업을 차질 없이 추진해 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는 “4대강 사업은 1995년 국회에서부터 이야기해온 나의 소신”이며 “경부고속도로와 경부고속철도도 정치적으로 반대가 많았다.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과 버스전용차로도 상대 당이 시장 사퇴하라고 공격하곤 했다. 서울시 공무원들도 내게 와서 원상으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결국은 반대하던 사람들을 설득시켰다”고 말했다. 이어서, “정치적 목적으로 무조건 반대하는 사람도 우리의 소중한 국민이다. 생각을 바꾸든 안 바꾸든 성실하게 설명하고 알려야 할 책임이 정부에는 있다”고 했다. 그 후 4월 27일자 다른 일간지에는 “전국 하천 ‘4대강 방식’ 개발 추진,” “청와대 이미 승인” 등의 헤드라인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다른 한편, 4월 26일에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4대강 사업 저지를 위한 천주교 연대’(천주교연대)는 4대강 살리기 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첫 생명·평화미사를 열었다. 천주교연대의 집행위원장인 사제는 미사에서 “우리는 정치 때문에 이곳에 온 게 아니라 정의 때문에 왔다”고 말씀을 시작하였고, 미사에 앞서 천주교연대 상임대표 사제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명동성당은 1987년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공간으로 국민 모두에게 의미가 있다”며 “생태와 환경이라는 더 큰 가치를 위해 교회의 염원을 담아 명동성당에서 기도회를 열기로 한 것”이라 했고, “정부는 (최근 여론 악화의 원인이) 홍보 부족 때문이라고 여기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라 정부가 대화하려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5월 10일에 1만 명이 참가하는 대형 미사가 예정되어 있는 명동성당은 이제 4대강 반대운동의 중심이 될 것이며 이러한 움직임은 전국적인 서명 운동과 함께 전국적인 생명·평화 미사로 이어질 것이다. 이러한 반대 운동은 천주교뿐 아니라 불교계, 더 나아가, 개신교계 내에서도 퍼져 나가고 있다. 예를 들어, 불교계는 4월 17일에 ‘4대강 생명살림 수륙대재’를 개최했고 개신교 목회자 800명은 이미 4월초에 ‘생명과 평화를 위한 2010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을 발표하고 4대강 사업 중단을 촉구한 바 있다. 범종교계의 이런 흐름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다. 4대강 사업은 살아 흐르는 강물을 막고 강과 함께 살아가는 뭇 생명의 터전인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는 사업이기에, 생명의 가치를 중시하는 종교계로서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투신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닌 것이다.

 
‘4대강 사업 저지를 위한 천주교연대’ 소속 사제와 신도들이 황사가 섞인 비가 내린 지난 4월 26일 저녁
서울 중구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우산을 쓴 채 생명평화 미사를 올리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아울러, 세계적 권위의 과학전문지『사이언스』최근호도 국제적인 전문가들의 의견을 인용하며 “토목공사를 밀어붙여 불도저란 별명을 얻은 건설회사 시이오(CEO) 출신인 이 대통령의 청계천 살리기 사업이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다”고 소개하며 “4대강 사업은 유역관리 방법으로는 시대에 뒤떨어진 발상이다”고 비판했다. 작년 11월 유엔환경계획이 마련한 한국의 녹색성장에 관한 검토보고서 초안에서도 “4대강 사업은 논쟁적이며, 습지에 끼치는 영향 평가와 영향을 줄일 조처를 촉구하고 있다”고『사이언스』는 전하고 있다. 세계적인 과학전문지가 ‘4대강 사업’을 특집기사로 다룰 만큼 이 사업은 이제 세계 과학계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 이 대통령의 ‘불도저’ 식의 ‘소신’이 과연 옳았는지 무모했는지, 그 결말 역시도 이젠 국제적인 관심사이리라.   

 2년 전인 2008년 6월 30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에서 촉발되었던 촛불집회 한가운데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개최한 시국미사의 강론 제목을 필자는 지금 새삼스레 떠올리게 된다. “대통령의 힘과 교만을 탄식함”이 그것이다. 그 강론의 마지막 부분은 대통령이 우선 쇠고기 협상의 실패를 겸허히 인정할 것, 먼저 국민의 소리를 듣고 그 진실을 깊이 헤아린 다음 국민과의 대화에 나설 것, 그리고 쇠고기 문제를 정치적, 이념적인 갈등으로 몰아가지 말 것 등을 호소하고 있다. 그런데, 그 후엔 무슨 일이 있었는가. 겸허한 자기성찰 없이, 마냥 승리했다고만 믿는 교만한 권력에게도 교훈이 있었을까. 그것이 없었다면 또 이런 패턴이 반복된다 해도 이상할 게 있을까.   

 다시 서두의 로댕에게로 돌아가 보자. “깊고 의연하고 성실하십시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생각이 남들과 다르다 하더라도 그 발표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그들은 이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에게 깊은 진실인 것은 모두에게도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소신은 언제, 그리고 누구에게, 가능한 것일까.  

 이렇듯, ‘소신’은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고 무모한 것일 수도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속도전식으로 몰아붙인 ‘위업’이라 스스로 자평하는 70년대, 80년대 경제개발과 중동 건설, 경부고속도로 건설, 거대한 어항을 만든 것인 청계천 사업의 치적을 강조하며, 이번에도 자기가 옳을 것이다, 나중에 모든 책임은 자기가 지겠다는 그 소신... CEO가 아니라 분명히 대통령인데... 아! 그 소신, 참으로 괴롭고, 무섭다. 제발 비극적이지 않기를...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최근 4대강 사업, 무상급식 등에 대한 찬반집회를 열거나 서명운동을 하는 것은 선거법에 어긋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근엄한 표정으로 정부에도 충고를 건넸다. 법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얘기다. 권력 앞에서도 할 말은 하는 선관위의 보무당당함이 언뜻 근사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선관위가 밝힌 이유를 읽다보니 웬걸, ‘이게 뭐야’ 하는 헛웃음이 절로 난다.

 무상급식과 4대강 사업 등은 정당과 입후보예정자들이 이번 선거에서 공약으로 채택하고 정치논란이 계속 되고 있기 때문에 ‘선거쟁점’에 해당하고 선거쟁점에 대한 정부, 정당, 단체의 활동을 선거법의 적용을 받기 때문에 선거법 위반이다...

 정당과 입후보자가 공약으로 내세우기만 하면 그것이 무엇이건 그 공약에 대해 시민들이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선거법 위반이라는 얘기다. 이보다 더 권력의 입맛에 맞는 법 해석이 있을까. 더구나 4대강 사업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데 말이다.

 비유가 극단적이라고 나무라지 마시라.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 정부가 북진통일을 결심하고 여당이 이를 공약으로 채택했다면, 그리고 야당이 이에 결사반대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 선거쟁점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주인인 유권자 시민들은 잠자코 전쟁의 참화를 기다려야 하는 건가. 정부가 만약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시민들을 반체제인사로 규정해 처벌할 수 있는 입법을 추진하고 여당이 이를 공약으로 채택했다면 또 어떻게 되는 건가. 선거쟁점이기 때문에 암울한 미래를 예감하면서도 그저 잠자코 기다려야 하는 건가. 정부와 여당이 만약 선거를 앞두고 전격적으로 일본과의 합병을 선언한다면 어떻게 되나? 선거쟁점이라 선거가 끝날 때까지 의사표현을 유보하고 기다려야 하나?

천주교 인천교구 고촌성당 들머리에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펼침막이 걸려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내가 생각해도 좀 유치하고 극단적인 비유다. 하지만 국민의 기본권을 이렇게 안이한 법 해석으로 규제하려는 선관위의 태도를 접하고는 달리 어떻게 응대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공정한 분위기 속에서 이번 지방선거를 깨끗하게 치르기 위해서는 정부, 시민단체의 준법의식과 모범적인 활동이 중요하다”는 당부에 이르러서는 약이 살살 오른다. 덮어 놓고 강바닥을 파헤쳐 나와 내 가족, 내 이웃들이 마시는 상수원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고 아무렇게나 쌓아둔 준설토가 날려 때 아닌 황사까지 날아드는 판에 선거쟁점이기 때문에 입 다물고 뒷짐 지고 지내라고? 한번 물어보자.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잘 운영하고 있는 선진국 중에 이렇게 주권자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나라가 어디에 있나?   

 대한민국 국민은 선관위의 계몽을 받을 만큼 그렇게 수준 낮은 국민이 아니다. 한쪽에선 포크레인이 강바닥을 부지런히 긁어대고 시멘트 덩어리로 흐르는 강물을 막고 있는데 이런 중요한 사안에 대해 눈 감고 입 다물고 있으라니. 대한민국 선관위, 제발 국민의 수준에 맞게 좀 처신하시라.


위대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어린 나이에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라는 책을 읽으면서 우주에 대해 상상하곤 했다. 우주는 무한한 것이라고 하는데 나이 어린 나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주가 무한하다고 하면서 빅뱅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빅뱅이 한 점(Spot)이 폭발하여 현재의 우주가 되었다는 것인데, 도대체 얼마나 큰 점이길래 무한하다고 하는 건지, 그 한 점(Spot)이 무한하다면 그 한 점(Spot)의 밖에는 무엇이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한 점의 밖은 무(無)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무(無)라는 개념 역시 이해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분자가 세상을 구성하는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라고 생각했던 것이 불과 몇 세기 전인데, 이제 인간은 분자보다 작은 원자, 원자에서 더 나아가 전자, 핵, 양성자, 중성자는 기본이고, 300여종의 소립자가 더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인간의 인식의 한계는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계속 확장되고 있다. 물론 과학의 수준이 현재 상태에서 파악할 수 있는 한도까지만 인간은 인식한다. 그러나 인식 범위의 확장 가능성은 열려있다.  

 이 모든 것이 의심에서 출발하고, 궁금증에서 유발된 것이다. 그런데 사회 인식 범위의 확장가능성은 열려있는가? 

 천안함이 침몰한지 벌써 20여일이 훨씬 더 지났다. 연일 TV, 신문, 인터넷 등을 통해 천안함과 관련된 속보가 보도되고 있다. 그런데 천안함과 관련된 그 어떠한 의혹도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어뢰 공격이 있었다면 왜 화상을 입은 승조원이 없을까, 군이 보유하고 있는 Tod 영상은 왜 중간이 뭉텅이로 없을까, 군 통신망을 놔두고 왜 국제상선망으로 통신을 했을까, 해경과 해군 사이에는 왜 진술이 일치하지 않을까 등등 천안함 침몰에 관한 국방부의 발표와 관련하여 의문과 궁금증은 갈수록 증폭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당시 천안함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과학의 발전은 과학적 발견과 그 발견을 위한 노력을 통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러나 사회의 발전은 과학의 발전과는 다른 양상을 띠고, 경우에 따라서는 후퇴라는 양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사회 발전의 밑바탕은 정확한 사실의 발견 내지 이를 위한 노력이고, 밑바탕이 마련된 후(내지 밑바탕을 마련하려는 노력과 동시에) 더 나은 사회를 구상하고 실천하는 단계를 거쳐야만 한다.

 
백령도 해상에서 침몰한 1200t급 초계함 천안함의 선수 부분이 수면위로
보이고 있는 가운데 해경 함선이 주변을 지나고 있다.

사진 출처 - 옹진군청

 그런데 천안함을 둘러싼 여러 정황은 전반적으로 매우 부정적이다. 정보를 소지하고 있는 기관이 스스로 침묵하거나 정보를 알고 있는 자에게 침묵하도록 강요하거나 거짓 정보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발표하는 등의 행위를 하고 있다. 각개 분야의 전문가들이 여러 의견과 의문을 쏟아내는 형국임에도 정작 천안함의 침몰 과정에 대해 모든 자료를 보유하고 있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침몰했던 천안함의 선체를 직접 확인하고 있는 군 당국의 신뢰할 수 없는 발표로 인하여 정확한 사실 관계조차 파악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제는 군 당국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로써 천안함 사건을 통해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는 여러 계기들이 사장되고 있다.  

 게다가 천안함 사건에 대해 누구 하나 책임지려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 궁극적 해결책은 아니겠지만, 이처럼 온 국민을 슬픔으로 눈물짓게 하고, 전군의 사기를 땅바닥까지 떨어뜨린 중대한 사안에 대해 누구 하나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이 없는 현재와 같은 상황은 이전 정권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천안함이 왜 침몰했는가를 파악하는 문제는 우주가 끝이 없는 것인지, 전자, 양성자, 중성자, 핵보다 더 작은 물질이 있는지 파악하는 문제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후자는 인식의 범위를 넓히기 위한 우연한 발견과 그러한 발견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으로 충분할 수도 있지만, 전자는 이미 인식 가능한 사실이 존재하고 있고, 그 사실은 있는 그대로 드러나야 그 사실을 바탕으로 발생가능한 동종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고 개선점도 찾을 수 있다. 그래야 적어도 장래에 비슷한 사고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고, 구조적인 문제점을 해결하여 더 나은 해군을 만들 수 있으며, 무엇보다 징병제가 유지되는 한 줄도 없고, 빽도 없고, 힘도 없어 군에 자녀를 빼앗길 부모들이 조금이라도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천안함 희생자 분들의 삼가 명복을 빕니다.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황미선/ 인권연대 운영위원


아이들은.....

 얼마 전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서 강서교육청 소재의 학교 교장선생님을 모시고 교사들을 대상으로 학업성취도 평가에 대한 연수를 실시하였다. 업무가 많아 바쁜 학기 초에 평가에 대한 연수를 받아야하는 교사들의 입장에서는 평가에 대한 명쾌한 내용을 기대하였으나 평가와 상관없는 교장선생님께서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 대한 홍보성 얘기를 길게 들어야 해서 교사들 사이에서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강사가 평가에 대한 명쾌한 내용을 이야기하기 힘든 이유는 현재 시행되고 있는 평가로는 교육적인 논리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교육과정상의 평가는 다양성과 자율성, 창의성을 중요하게 여겨 가르친 교사가 수행평가 방식으로 평가하도록 권유하고 있으나 현재 시행되는 평가는 그 수행평가에다가 획일적인 일제고사식 평가를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어 실시토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횟수도 학기당 1회(연2회)에서 2회(연4회)로 늘어나는 추세여서 당연히 시험에 대한 압박감은 아이들이나 교사, 학부모에게 모두 클 수밖에 없다. 현재 중학생들이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형태로 치루고 있는 이 시험은 사실 학원연합회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공정택 전 교육감이 학교에 강압적으로 실시하게 한 시험이다. 아이들에게 부담만 안겨주고 성적에 들어가지도 않는 일제고사 형태의 시험은 교육청에 시험의 실시여부와 참여도를 보고해야하는 교감과 시험에 대하여 문제제기를 한 교사들 간의 충돌을 야기했고 문제제기를 한 많은 교사들은 시험이 이루어지지 않는 저학년을 담당하는 웃지 못 할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인사의 자율권이나 민주적 인사는 허울만 있을 뿐 강제적으로 시행되는 정책 앞에서 제도 자체가 무력해 질 수 밖에 없다.

 공 전 교육감은 리틀 이명박으로 일컬어지는 사람으로 이명박의 교육정책을 가장 잘 따른 사람이다. 그가 교육계 비리의 몸통으로 불려지며 교육 관료들의 승진이나 인사에 깊숙이 개입하여 권한을 남용한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재임기간동안 펼친 정책들을 아무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하여 이행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 일제고사 형태의 학력평가를 강제적으로 치르게 한 이후 시험지 회사의 주가가 치솟았고 사교육기관들은 어려운 사회분위기 속에서도 크게 성행하였다. 공 교육감이 새롭게 도입하여 시행한 고교선택제나 국제중 설립 또한 사교육을 활성화하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문제가 있어 고교선택제도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고 국제중 또한 마찬가지이다. 6조원이 넘는 막대한 예산을 사용하여 교육대통령이라 여겨지던 서울시 교육감이 가져야하는 교육에 대한 관점과 공공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면서 우리는 아이들을 위해 어떤 인식과 선택을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교사들은.....

 교사들은 평가를 하는 주체라는 막연한 생각에서 이제는 평가를 받아야하는 존재가 되었다. 모두 평가를 받고 그에 따른 인센티브를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유독 교사만 평가를 거부하는 모양이 억지처럼 보이지만 지금 학교에서 이루어지려 하는 교원평가는 결코 교육의 질을 높일 수 없는 제도이다. 아니 오히려 교육의 질을 담보할 수 없으면서  교사가 가지고 있는 교육적 소신이나 신념마저 저버리게 만드는 심히 우려되는 제도라고 생각한다. 일 년에 4번 하는 공개수업이 동료평가의 유일한 잣대이며 학부모나 학생평가는 인기투표로 전락할 공산이 매우 크다. 이런 상태에서 어떤 교사가 교육적 소신을 가지고 바른 가르침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 교사가 가진 소신은 어떤 한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줄 수도 있고 가르침이라는 것은 지난한 기다림과 인내를 요구하는 행위이다. 이것을 단지 1년이라는 기간에 평가받아야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질 높은 교육을 위해서는 교육환경에 대하여 투자하고 여건을 조성하여 좋은 교사가 되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한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교원평가는 『서울학생 7560+운동』처럼 정말 사회적 정서에 편승하는 허울뿐인 제도이다. 얼마 전 서울지역 학생들이 체격은 크지만 체력은 허약한 것으로 나왔다는 뉴스를 접하고 개인적으로 누군가 투자안하고 시행되는 정책 하나 만들겠구나 생각했는데 결국은 내 예상이 정확하게 맞았다. 1주일 중 5일을 60분씩 운동하자는 이 운동은 정부에서 하는 것은 하나 없이 관련 유인물을 만들어 학생들이나 학부모가 매일 확인하고 체크하여 학교에 제출하라는 것이다. 현재 시행되려는 교원평가제도 또한 마찬가지다. 20여 년 전 일 년에 몇  차례 시행되는 공개수업만 잘하면 되었던 그 시절... 매일 진행되는 수업은 신경 쓰지 않고 남들이 보는 수업만 신경 쓰며 수차례 연습까지 해가며 공개하던 그 수업.... 그 전철을 다시 되밟자고 하는 이 시점에서 교원평가는 다시 재고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자기반 수업은 네 차례씩이나 빼먹고 아이들은 방치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이나 교사한테 이런 평가가 성행하는 학교라는 곳은 어때야 옳은 것일까? 교사가 가르치면 아이들이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다. 그러나 그 방식은 다양해야하고 획일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평가가 단순히 시험문제 풀이식으로만 진행되어서는 곤란하다. 강가에 있는 각양각색의 돌처럼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는 아이들을 시험이라는 한 가지 잣대로 서열화시키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개성과 다양성을 말살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교라는 곳은 각기 다른 능력과 개성을 지닌 아이들이 각자가 원하는 다양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폭적이고 막대한 지원과 투자가 필요하다. 수영장 없이 수영교육을 필수로 받으라고 하는 현재의 교육과정은 학교의 현 실체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교사들은 어떠한가? 교사로서의 자질과 수준이 높은 교사가 되도록 여건을 조성하고 제도적으로 뒷받침을 하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학급당 학생 수를 줄여서 교사가 아이들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가르치는 것이 가능하도록 여건을 만들고 가르치는 일 외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잡무를 없애 오로지 아이들과 교육내용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사 스스로 자기 발전을 하도록 지원해야하고 교사의 발전이 상시적으로 학생들에게 피드백 될 수 있도록 보장해야한다. 창의적 사고를 지닌 민주적이고 자율적 인간 육성은 단순한 평가 방식으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 이제 교육의 다양성과 공공성에 기반을 둔 학교교육에 대한 폭넓은 인식과 기대를 새롭게 가져야한다고 생각한다.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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