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원/ 인권연대 운영위원


 모처럼 정신적 부담이 크지 않은 선거였다. 선거 때마다 ‘비판적 지지’, ‘사표(死票)’ 논란 때문에 평소 소신을 접고 ‘거악(巨惡)’의 출현을 막는데 나 역시 일조해야 하는지 고민했었는데 이번은 그렇지 않았다. 일찌감치 현역 시장은 저 멀리 달아났고, 후발 주자가 따라 잡는 것은 역부족인 것처럼 보였다. 국내 대표적인 방송, 신문, 여론조사기관들은 입을 모아 20% 가까운 차이가 난다며 사실상 게임종료를 선언했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를 찍더라도 별다른 부담감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오후 6시가 되어 방송3사 공동 출구조사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한 대 얻어맞은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오차 범위 내 접전으로 조사결과가 나온 것이었다. 실제 개표결과는 더욱 드라마틱했다. 처음에는 현역 시장이 앞섰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개표결과는 역전되었고, 박빙의 우세가 새벽 4시 20분 가까운 시간까지 유지되었다. 그리고 다시 역전되었고 현역시장은 힘겹게 승리했다.


6·2 지방선거 KBS 개표방송 화면
사진 출처 - 이데일리

 3.3%의 지지율을 얻은 후보의 책임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논란은 촛불집회와 용산참사에서 느꼈던 생각과 겹치면서 나를 우울하게 했다. 국민 대다수의 공감과 지지를 얻어낸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와 관련된 촛불시위와 달리 용산참사는 극소수의 경제적 약자에 국한하는 문제인 것처럼 오인되었다. 하지만 용산참사 문제처럼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의 권리가 결국은 그 사회의 보편적인 권리 보장 수준을 대변하는 것이다. 3.3%의 득표를 사표라고 간주하는 생각 속에는 용산참사에 대한 국민 다수의 소극적 입장과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김은혜 대변인은 “이번 지방선거 결과에 나타난 민의를 겸허히 받아들이며 더욱 국정에 매진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는 청와대의 입장을 발표했다. 민의를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는 말 보다는 “국정에 매진하겠다”는 말에 무게가 느껴진다. 지금 방식대로 계속 국정에 매진할 것 같아 걱정이 된다.

 이제 곧 월드컵이다. 정부는 조금 마음 놓고 있을지 모르겠다. 뜨거웠던 촛불의 위력이 어느 순간 잦아들었듯이 ‘대한민국’을 외치는 함성 속에 선거에서 표출된 성난 민심이 잠잠해 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겠다. 월드컵 때마다 제일 듣기 싫은 이야기 중 하나가 복잡한 16강 진출 방정식이다. 자력으로 진출하기 힘들 때마다 누가 누구를 이겨주거나 비겨주어야 한다는 등의 계산이 횡행한다. 선거에서의 사표 논란 역시 일정 부분 16강 진출 방정식과 닮은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소수파 후보의 책임을 거론하기 보다는 소수파 후보를 지지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담긴 소망을 끌어내 자신을 지지해 준 국민들의 기대에 더욱 부응하는 것이 보다 확실한 승리방정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번 지방선거 후의 상황이 어느 순간 잠잠해진 촛불 후(後)의 리바이벌이 되지 않으려면 3.3%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 원 위원은 변호사로 활동중입니다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문화연구학과 교수

 이번 학기에는 벨기에 루뱅(Leuven) 대학으로 매주 한 차례 출장강의를 다니는 것 외에도 이런 저런 이유로 필자가 체류하는 네덜란드를 떠나 다른 나라들을 여행할 기회가 자주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유럽공동체(EU)에 속한 나라 국민들은 마치 이웃집 방문하듯이 서로 자유롭게 왕래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예를 들면 도버 해협 해저터널로 영국을 오가는 경우 등), 국경지점의 길을 막고 출입국 검사와 패스포트에 확인도장을 찍는 귀찮고 권위적인 절차 없이 '딴 나라'를 왕래 할 수 있다는 것은 내게는 분명히 낯설고 색다른 경험이었다.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젊은 세대들은 당연히 알고 있는 상식을 가지고 새삼스럽게 호들갑을 떤다고 흉볼지도 모르겠지만, 필자가 느끼는 놀라움과 부러움에는 나름의 까닭이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이 여권을 발급받는 것이 쉽지 않았고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특권은 공무원과 유학생 등의 일부에게만 허용이 되었었다. 나라 바깥나들이가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나들기는 또 얼마나 전 세계적으로 (아직도) 어려운가. 캐나다에 놀러갔다가 미국으로 되돌아오지 못했다는 미국 유학생 이야기, 딴 나라 국경선 너머로 무심코(?) 한 걸음 내 딛었다가 억류되어 국제뉴스거리가 된 철없는 모험가들, 목숨 걸고 멕시코 국경과 카리브 해를 건너는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위험한 일상은 현재진행형이다.

 EU 국가들 사이의 자유통행에 관한 필자의 유난스런 과잉반응은, 아마도, 내가 '분단시대'가 잉태했던 망탈리테(mentalité, 집단적 정신자세)의 포로였다는 부끄러운 고백에 다름이 아니리라. 주지하듯이, 베를린장벽 붕괴이후 공산권을 지칭했던 철/죽/의 장막 같은 냉전개념들은 이제는 낡은 유물이 되었다. 그러나 '끝나지 않은 전쟁'의 연장선상에 있는 남북한은 비무장지대(DMZ)라는 국경선 아닌 국경선 혹은 '비 경계선(non-border)'을 사이에 두고 오늘도 첨예하게 대처하고 있다. 한반도의 허리를 날카로운 경계선 삼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시장경제와 사회통제, 냉전과 세계화라는 대조적인 가치관과 이데올로기가 갈등, 경쟁,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단순히 정치지리상으로만 분리된 남북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강요 혹은 동반하는 편협한 세계관과 이데올로기적 올바름에 갇혀버린 '장기적 분단시대'의 산물이자 증인이다. 이미 반세기가 넘게 지속되는 분단시대가 나를 포함한 동시대인들에게 주입하여 숙성시킨 대표적인 시대정신 중의 하나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경계를 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경구로 요약된다. '동백림 사건', 납북어부 간첩(조작)사건, 미(비)전향 장기수, 탈북자/새터민 등으로 표상되는 일련의 사건과 이슈들은 금지된 국경선과 사상적 틈바구니를 넘나드는 것은 자기 파괴적이며 동시에 반국가·반민족적인 행위라고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경고하고 훈육한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필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내용은, 쉽게 말하자면, "분단시대가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전문용어로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심어놓은 '내 마음 속의 국경선'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세계화'라는 화려한 깃발에 발맞춰 지구촌의 구석구석을 관광, 시찰, 방랑하고 있는 선후배님과 동료 그리고 젊은이들이여. 몸은 국경바깥의 이국적인 골목을 헤매지만 그대가 지참한 세상읽기의 렌즈는 분단시대의 흑백논리로 혹시 때 묻고 얼룩지지 않았는가. (증명)사진에 포착되는 멋진 건물과 맛있는 음식, 다른 피부색깔의 남녀를 우리 편과 나쁜 편, 문명적 서양과 야만적 동양,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 호전적인 이슬람과 사랑의 기독교, 혹은 도회적 청결함과 시골적인 남루함 등이라는 (교육된!) 엉터리 이중 잣대를 적용하여 평가하고 감상하지 않으시길.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자유롭게 다시 태어나기 위해 정녕 붕괴시켜야 할 경계선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지리적인 국경(선)만이 아니다. 특정한 정치문화적인 색깔과 세계관으로 오염된 내 마음 속의 국경선이야말로 진정한 소통과 상호이해를 방해하는 최대의 장애물이다. 건방진 학문용어를 빌려 다시 강조하자면, 이런 성격을 갖는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국경선 즉 '메타-경계선'(meta-border, Michel Foucher/2007)이야말로 새로운 세계질서와 평화의 도래를 위해 우리가 힘써 허물어야할 공동의 장벽인 것이다.

 메타국경 혹은 내 마음 속의 국경선을 과감하게 뛰어넘지 못한다면 역사는 (희극적으로?) 되풀이 된다는 점을 결론삼아 덧붙이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마음속에 그어진 국경선을 발판삼아 고전적인 '냉전의 추억'과 폭력적인 흑백논리가 과거로부터 부활하여 회귀(回歸)하는 것이다. 오호라, 시대착오적으로 반복되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추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이름 없는 영웅들이 희생되어야 하는가. 지난 1-2년 사이 한반도라는 이름의 메타-경계선 내부에서 전개되는 시대상황에 대한 필자의 관찰과 우려가 삼류 역사가의 괜한 헛발질로 마감되길 바랄 뿐이다.

                                                                                                                           

임아연/ 한밭대 학생




 ‘모르는 게 약’이었을까, ‘아는 게 힘’이었을까. 결과적으로 나는 ‘앎’으로 인해서 병이 났고 더는 견디지 못했다.  

 필자는 얼마 전 고심 끝에 난생 처음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쥐꼬리만 한 돈이었지만 대학 신문사에서 일하는 대가로 원고료와 취재비 명목의 월급을 조금씩 받아왔다. 3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을 하자 그야말로 ‘학생백수’가 됐다. 두어 달 동안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받았는데, 경제적으로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더는 부모님께 손 벌리기가 송구스러웠다. 며칠을 알아 본 끝에 학교와 집의 중간 즈음에 있는 수제 삼각김밥집에서 일하기로 마음을 먹고 이력서를 만들었다.

 처음 써보는 이력서에는 인상 좋게 나온 사진을 붙여야 하는 공간과, 주민등록번호를 써넣어야 할 칸도 있었다. 게다가 내가 다운 받은 이력서가 옛날 것이었는지 지금은 폐지되어 있지도 않은 호주와 호주와의 관계 기입란도 있었다. 시작부터가 꺼림칙했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들을 슬며시 지워버린 이력서를 들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가게를 찾았다.

 무뚝뚝해 보이는 사장이 이력서를 대충 훑어보더니 앞치마부터 입힌다. 손에 비닐장갑을 씌우고는 다짜고짜 삼각김밥 만드는 법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수저는 테이블 당 몇 개씩 놔라” 등등 온갖 사소한 것까지 잔소리를 하는 탓에 짜증이 날 지경이다. ‘나도 그렇게 일 못하는 사람은 아닌데…’라고 생각하면서 일을 배움과 동시에 삼각김밥을 정신없이 만들어 팔며 한창 바쁜 저녁시간대가 다 지났다. 8시 반쯤 돼서 좀 한가해지자 사장은 대뜸 “네가 할 만하면 하고, 아니면 말고”란다. 당장 일이, 아니 돈벌이가 급했던 나는 엉겁결에 “알겠다”고 하고 다음 날부터 하루 6시간씩 일을 하게 됐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도 반나절을 맡으면 밥맛이 뚝 떨어진다. 더구나 6시간을 사장 눈치 보며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뜨거운 밥과 씨름하다보면 가게 문을 닫을 때 즈음엔 빗자루질도 못할 만큼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살면서 내 허리에 고스란히 느껴지는 중력의 무게를 그렇게 절감해 본 적이 있었던가. 허리 통증을 참고 비닐장갑 안에서 퉁퉁 불은 손을 겨우 꺼내 놓을 수 있는 시간은 9시가 다 될 무렵이었다.

 하지만 정말 참을 수 없었던 건 틈만 나면 의자에 걸터앉아 인터넷을 하던 사장이 손님이 많아질 시간이면 “기계적으로 일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것이었다. 사람을 보고 ‘기계’처럼 일하라는 그 말이 왜 그렇게 마음에 가시처럼 박히던지…. 그런 말을 당당하게 하는 그 앞에서 ‘근로계약서’ 따위의 단어를 꺼내는 일이란 쉽지 않다. 취재하고 기사 쓰던 일을 대학생활의 주된 업으로 삼고 지내던 시절, 노동자들이 왜 바보같이 자기 권리도 못 찾냐며 답답해하던 때가 있었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고도 가벼운 입놀림이었는지 그땐 몰랐다. ‘사장’ 혹은 ‘고용주’라는 이름 앞에서 일하는 내내 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난 한낱 ‘알바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아르바이트생은 여전히 최저임금제 등에서 소외되어 있다(위 사진은 특정 업체와 관련 없음)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시급 4200원. 사장은 그 돈을 주고 얼마나 나의 일손을 뽑아 먹을까 궁리하고, 나는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돈 벌 수 있을까를 궁리했다. 그 두 가지 생각이 만나는 교차점에서 내 노동의 양이 결정된다면 좋으련만 역시나 나는 한시도 일거리에서 눈을 떼면 안 될 피고용자였다. 가게엔 하루 종일 라디오가 계속 흘러 나왔는데 DJ가 무슨 사연을 읽었는지, 내가 좋아하는 노랠 틀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아주 가끔, ‘다음엔 무슨 일을 해야 하지’라고 생각할 때만 부분적으로 들렸을 뿐.  

 결국 허리통증으로 '임아연의 노동OTL'은 사흘 만에 막을 내렸다. 적어도 악으로 깡으로 한 달은 버텨보려 했건만 내 연약한 의지력 탓인지, 몰랐으면 ‘약’이었을 노동인권에 대한 불편한 고민 때문이었는지 몸이 쉽게 축나버린 것이다. 그동안 일한 사흘 치 일당은 고사하고 “일찍 고만두게 되어 죄송하다”며 사장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했고, 집에서는 “돈을 벌기는커녕 병원비로 외려 돈이 나갔다”는 꾸중 아닌 꾸중만 들었다.

 하지만 나야 아직 등이라도 비벼댈 부모가 있어 이렇게 쉽게 그만 둘 수 있었으나 매일매일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우리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또 나의 친구들이 생각나 많이 서글펐다. 이제는 너무도 쉽게 그들을 향해 ‘아무 권리도 주장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피고용자’라고 비난하지 못할 것 같다. ‘권리’라는 것이 나 혼자 들기엔 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 백 번의 취재와 인터뷰보다 내게 더 많은 이야기를 건넸던 사흘이 그렇게 지나갔다.


이현정/ 흥사단민족통일운동본부 차장


 한반도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간다. 전쟁 발발, 전면적 대결이라는 최악의 상황으로 돌아가고 있다. 천안함 사고로 불거진 남북 대결 국면은 마치 치킨게임처럼 서로 마주보고 달리는 기관차와 같다. 94년 한반도 전쟁 위기와 달리 이번에는 출구 전략도 없어 보인다.

 지난 20일 허울뿐인 민군합동조사단에서 천안함 침몰 사고에 대해 북한 어뢰 소행이라는 결과를 발표했다. 그리고 24일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가 아닌 전쟁기념관에서 남북교류 중단과 자위권 발동 기조의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물기둥 시뮬레이션이 7월에 완료되고, 어뢰 공격을 입증할 가스터빈실도 조사가 되지 않았는데, 정부가 이렇게 서둘러 최종 발표를 하는 것은 그 결과가 지방선거용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꼴이 되었다. 의문점이 이 뿐만이 아니다. 침몰 직전의 TOD 영상만 없다는 - 군은 사고 초기에 영상이 없다고 거짓 발표를 하였음 - 것과 보안상의 이유로 교신기록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발표 5일 전에야 쌍끌이 어선 그물로 낚여 파란 매직으로 ‘1번’이라고 적힌 어뢰는 공개하면서, 이보다 더 확실하게 북한 소행 증거가 될 수 있는 침몰 영상과 교신 기록은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북한의 대응도 만만치 않다. 이명박 정부 동안 남북관계의 중단, 남한의 보복론에 대비한 전쟁 태세, 그리고 확성기 조준 격파사격 등 강경 자세이다. 이러한 것이 맞물려서였을까. 최근 환율 급등과 주가 폭락이 이어지고 있다. 이에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도 천안함 사건에 대한 한반도 리스크를 인정하고 있다. 결국 북한에 고통을 준다는 것이 우리한테 고통으로 되돌아온 꼴이 되었다. 북한의 지난 두 번의 핵실험 등이 있었을 때에도 이처럼 타격을 입지 않았는데,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이는 남북 간에 대화 채널이 사라진 상황 속에서는 한반도 위기가 통제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결국 남북 간 대화 채널을 만들고, 협력 체제를 가져온 6.15공동선언의 정신이 천안함과 더불어 완전히 침몰해 버렸다. 화해와 협력의 남북관계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한 2000년 6.15공동선언이 곧 10주년을 맞이한다. 그러나 10주년의 반가움보다는 슬프게도 한반도에서 그 정신은 사라져버렸다. 어쩌면 이번 천안함 사건과 같은 남북 간 전면적 대결 구도는 이명박 정부 취임 이후 예견된 일인지도 모른다.


이명박 대통령이 북한의 공격으로 드러난 천안함 침몰 사태와 관련,
지난 24일 오전 서울 용산동 전쟁기념관에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현 정부의 비핵개방3000정책, 무조건 기다리겠다는 전략, 6.15와 10.4선언 이행 유보, 맹목적 인권문제 접근, 북한의 구조적 변화 강조 정책 등은 결국 대북공세정책으로 이어졌다. 더불어 지난 2월 개성실무회담에서의 남한 대표단의 강경 자세로 남북 간의 지렛대는 사라져버렸고, 이러한 정세 가운데 천안함 사고 발발은 남북 간에 돌이킬 수 없는 대결 구도를 양산해버렸다. 결국 수 년 동안 중국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방중을 애타게 요청했으나, 미국과 남한과의 외교 등에서 줄타기를 해오면서 거절했지만, 지난 5월 초에 중국을 방문하고 중국의 비호를 받게 됨으로써 한미와 북중 구조라는 냉전의 산물도 남겨버렸다.

 6.15공동선언은 북한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남북관계 발전의 규범적 지위 확보, 분야별 대화의 제도화 실현, 교류협력 확대, 한반도 긴장완화 및 평화정착 계기 마련 등을 통해 남북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왔다. 이는 남한에도 전쟁의 공포가 아닌 평화 공존 확립, 외세의 영향보다는 자주성 확립, 한반도 리스크 감소와 안정적 경제 성장, 대륙 진출로의 가능성 등의 분단 체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 것이다.

 결국 풍전등화와 같은 한반도 대결 상태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6.15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출구 전략도 없이, 미국과 중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남북 대결 구도의 지속이 아니라, 남북 간에 현 상황을 대화와 만남으로 이어가야 한다. 물론 총선을 앞두고 있고, 계속해서 대북강경정책을 펼치는 남한과, 이명박 정부 임기 동안에는 남북관계의 단절을 선언한 북한과의 전면적인 대화와 협력은 현실 불가능하다. 6.15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상대방 체제를 존중하면서 대화의 자세를 취하자는 것이고, 당장 천안함과 관련해서는 북한의 조사단과 중국 등의 국제조사단 등을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전히 남한 정부가 선거용 북풍으로 몰아가기 위해 북한의 제안을 거부한다면, 우리 국민들이 선거 투표나 직접행동을 통해 압력을 넣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의 중심은 어디일까? 가슴, 머리, 손과 발일 수 있겠지만, 중심은 바로 가장 아픈 곳이다. 세상 이치 또한 그러하다. 지금 우리 한반도의 가장 아픈 곳은 전쟁 불안과 남북 간 신뢰이다. 그로 인해 그 동안 추진해온 남북경협사업,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등이 문을 닫았고, 그러할 위기에 처해있다. 이번 남북교류중단 발표에서 현인택 통일부장관이 개성공단을 북한지원사업 범주에 넣었던데, 개성공단은 평화와 경제 차원에서 철저하게 남한에 더 큰 도움이 되고, 그래서 우리가 원했던 사업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 남북 간 협력이 사라지면서 미국과 중국의 외세 영향력이 한반도를 지배하는 구조로 나아가고 있는데, 이는 자주적 외교력 차원과 다자적 안보협력체제에도 매우 부정적인 우려를 낳을 수 있다.

 지난 미국 부시 정권의 이라크 침공 명분은 대량살상무기 제거와 후세인 축출에 있었다. 그러나 대량살상무기 존재는 희대의 사기극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더불어 미국의 7년의 대북 강경책이 성공하지 못해 오히려 북핵 위기만을 불러왔고, 더불어 정권 말기에 온건책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우리 또한 설득력이 부족한 정권의 안보불안 정책, 대북 강경책으로만은 변화보다는 오히려 위기를 맞는다는 역사를 똑똑히 기억해야만 한다. 결국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우리의 경제도 발전시키고, 한반도 안정을 관리하고, 6자회담 등에서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 남북 간 소통과 신뢰 구축 회복, 바로 6.15공동선언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재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24일, 이명박 대통령은 전쟁기념관에서 대북정책의 전면적인 전환을 선언했다. 이 대통령은 "북한이 한반도의 평화를 두 동강 내버렸다"면서 "북한은 자신의 행위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밝혔다.

 이명박 정부 대북정책의 완결편이 벌써 나온 셈이다. 지난 10년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추진해온 햇볕정책은 폐기되었고, 그동안 남북간 합의들도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전면적인 대결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북한도 조평통 성명을 통해 남한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이명박 대통령 임기동안에는 당국간 대화와 접촉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대북선무방송, 주적개념, 팀스피리트 훈련 등 잊혀졌던 단어들이 속속 다시 돌아오고 있다. 그리고 잊혀졌던 단어가 또 하나 떠오른다.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하던...

 잘 살펴보면, 아니 그냥 대충만 살펴봐도 한반도는 과거의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 것 같다. 94년인가 1차 핵 위기 때도 한반도는 전쟁 발발직전 상태까지 갔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폭격계획을 세웠었고, 북한에선 서울 불바다 발언이 나왔다. 이러다간 버르장머리고 뭐고 한반도가 잿더미가 될 아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햇볕정책 아닌가? -햇볕정책도 북한이 좋아서 친북이라서 나왔던 정책은 아닌 거 같은데... 햇볕이란 단어만 나오면 왜 친북좌파가 따라붙는지 난 이해가 안 된다- 아무튼 아무리 인간 말종이라고 해도 다독여가면서 같이 살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온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 햇볕이었다. 이러다간 둘 다 가는 수가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햇볕을 폐기하고 대북정책의 전면재검토를 선언한 현 정부의 선택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이명박 대통령은 ‘궁극적인 목표는 남과 북의 대결이 아니며, 이 위기를 극복해 잘잘못을 가려놓고 바른 길로 가야 한다, 우리에겐 그만한 힘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기대대로 한반도 상황이 전개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26일 조선중앙통신은 대북 심리전 방송을 재개할 경우 서해지구 북남관리구역에서 남측 인원,
차량에 대한 전면 차단조치가 취해질 것이라고 전했다. 이는 사실상 개성공단을 폐쇄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사진은 이날 판문점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햇볕정책을 택하든, 전면적인 대결정책을 택하든 그거야 정책수행자의 몫이고 판단이니까 긴 얘긴 해봤자 입만 아프다. 그리고 이건 지난 10년 동안 주주장장 논쟁을 벌였던 문제이기도 하다. 근데,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있어서 내가 중요하게 보는 것은 이런 것이다. 정권 초기에는 서로의 기싸움도 필요하고 하니 선핵포기니, 상생이니 하는 대북정책을 밀어붙이고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는 단계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대북정책을 확고히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핸들링 하는 능력이고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이다. 상당한 유연성과 전략적 판단이 중요한 대목이다. 근데,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이나 이후 여러 고비에서 보여준 정부의 태도는 실망스럽기도 하고 위태롭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명박 대통령이 더 강경한 발언을 하고 더 강력한 대북제재 조치를 취하더라도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부가 이 상황을 대처하고 위기를 관리할 수 있다는 신뢰를 갖게 하는 것이다. 그 수단이 햇볕이냐 채찍이냐 하는 문제는 이차적이다. 지난 햇볕정책 시기에도 서해교전과 같은 사태가 있었지만 상황에 대처하고 위기를 관리하는 능력은 지금과 달랐다. 이명박 정부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고 하겠지만, 한 것도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상황만 계속 악화시켜왔다. 여기서 사태를 악화시킨 책임이 북한에 전적으로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정부의 책임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이재상 위원은 현재 CBS방송국 PD로 재직 중입니다


감현진/ 에세이스트


 항상 전라도 남자가 좋았다. 물론 여자도 좋다. 아마도 대구에서 태어나서 평생 경상도 사투리로 박정희 때문에 우리가 잘살게 된 거 아이가, 전두환이 그래도 참 화끈했다 아이가, 현철이 그거 뭐 김영삼이 그래도 참 깨끗하다 저거 아들한테만 몰아 줬다 아이가, 뭐 이런 소리만 듣고 커서 그런 것 같다. 훌륭하고 공정한 경상도 남자 분들께 죄송하지만 혈족 여부를 막론하고 내 주위의 아저씨들은 죄다 저런 말을 했다. 그리고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박근혜를 매우 사랑하는데 그들은 다행히 혈족이 아니다. 물론 그들이 누군가의 칭찬만을 한 것은 아니었다. 김대중이 빨갱이라는 것은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것처럼 당연했고, 그를 따르는 전라도 ‘놈’들도 빨갱이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금마들은 김대중 선생님이라고 안 하면 잡아물라칸다 안카나, 하며 혀를 차는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는 셀 필요도 없다.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었을 때도 저거 완전 빨갱이 신문 아이가, 하며 혀를 차는 소리는 열렬히 계속되었다. 빨갱이가 뭔지는 몰랐지만 나쁜 거라는 건 알았다. 적의 적은 친구라고 했던가,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토록 미움 받는 사람들에게 호감이 간 것은 그렇게 자연스러웠다. 그들에게 들어 온 80년의 광주 시민들은 당연히 ‘폭도’였고 그게 아니겠구나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럴 리가 없다, 하고 턱 하고 알아챈 것은 머리보다 혓바닥이었다. 요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머리보다 짤막한 세 치 혀가 훨씬 더 정직했다.

 오랫동안 가마솥 안에서 끓인 순대국과 젓갈을 가득 넣은 전라도 김치를 처음으로 맛보았을 때 머리로 생각할 틈도 없이 혀가 먼저 탄식했다. 얘, 네가 태어나서 스무 해 동안 먹어 온 김치는 김치가 아니라 잔디 뜯어다 대강 양념한 거였다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분지의 지역적 특성상 일단 신선하고 다양한 식재료 조달이 어렵고, 늘 너무 덥거나 너무 추운 날씨 때문에 맛이 얼른 가 버리거나 혹은 맛이 제대로 들지 않는 음식을 먹는 우리에게 끼니란, 음식이란 먹어 ‘치우는’ 것이었다. 아무거나 먹고 치우자, 우리는 종종 그렇게 말했고 빠른 시간 안에 후딱 먹어 치워버렸다. 하지만 절대 ‘아무거나’ 먹자고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먹어 ‘치우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 이후 <광주집>이나 <나주순대국>같은 곳에서 막걸리와 각종 안주를 탐하면서 간혹 80년의 광주를 떠올릴 때마다 생각했다. 맛있는 걸 먹으면서 살아 온 사람들은, 세상에 맛있는 게 있다는 걸 알면서 살아 온 사람들은 보다 용감하고 너그러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몇 년 전 광주 출장을 갔을 때 들른 식당에서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는 두 아이들과 고기를 구워 먹고 있던 그 부모는 먹어 ‘치울’ 생각을 않고 끝없이 먹는 얘기를 했다. 내가 처음 순대국을 먹어 봤을 때 이렇더라, 내가 처음 부대찌개를 먹어 봤을 때 그 맛이 저렇더라, 우리 집에서 만들었던 최고의 송편이 언제 적 그 때 그 송편이었는데 비결은 거기에 넣은 이것이 이러저러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까 이번 주에 비가 오면 만두 빚어 먹고 싶다 저번에 비올 때 해 먹은 그 맛을 낼 수 있을까, 어린 아이들도 풋고추에 된장을 잘도 찍어 먹으며 쉬지도 않고 조근조근 먹는 이야기를 하던 그 가족은 고기를 다 구워 먹고 나자 살뜰하고도 노련하게 누른밥 한 공기와 냉면, 동치미국물에 만 국수를 청해서 바지런히 마지막 젓가락까지 꼴깍 넘기고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광주 금남로에서 시민들이 공수부대와 대치한 가운데 집회를 갖고 ‘전두환 퇴진’을 외치고 있다.
사진 출처 - 5·18기념재단

 산해진미의 문제가 아니다. 김치 한 그릇을 먹더라도 양념 사이에 좀 눕혀 뒀던 배추조각이 아니라 온갖 오묘한 맛을 내는, 말 그대로 ‘김치’를 먹으며 살아 온 사람들은 앞으로 남은 인생에 얼마나 많은 것을 기대할까. 먹고 ‘치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아직 먹어보지 못한 ‘맛’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기대하는 사람들은 인생에도 보다 많은 맛을 기대하지 않을까. 민주주의란, 어차피 더 많은 ‘맛’의 문제가 아닐까. 니 맛도 있고 내 맛도 있어야 하고 이 맛도 있고 저 맛도 있어야 하고 그게 이상할 것 없이 저마다 제 맛이 있고 제 입맛이 있는 게 당연한 것이 ‘민주주의’란 것이 아닐까. 그래서 80년 광주의 도청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꼭 먹는 생각이다.  

 아무도 장사를 치러 주지 않을 것을 알고 삼십 년 전 오늘 새벽 깨끗이 씻고 속옷까지 새 것으로 갈아입은 채 꾸벅꾸벅 졸며 죽을 것을 알면서도 도청에 남았던 그 사람들이 투사로서 생각했던 것은 물론 역사의 장엄한 부름과 민주주의의 승리였겠지만 ‘사람’으로서 생각한 것은 어쩔 수 없이 따뜻한 밥 한 공기 아니었을까. 살아서 내일도 맛있는 밥을 먹어야지, 열심히 싸워서 후세에게는 뜨거운 자유를 먹여야지, 민주주의의 참된 ‘맛’을 보아야지, 그것이야말로 영웅들의 ‘밥심’이 아니었나 생각하면 번번이 눈물이 난다. 우리는 그 이후로도 삼십 년 동안 얼마나 많은 끼니를 그들에게 빚졌는가. 그 빚진 끼니, 앞으로도 빚지고 살아갈 끼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해서 해마다 5월이면 고인들의 영전에 뜨끈한 순대국과 막걸리 한 사발 올리고 싶다. 앞으로도 주신 끼니 소중히 하겠습니다, 하고 인사하면서.


이유정/ 변호사


 5월은 좋은 달이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등 달력에 빼꼭히 기념일이 적혀있는 달이다. 5월은 신록의 계절이기도 하다. 갓 피어난 여린 잎들이 하루가 다르게 무성해지면서 보석처럼 찬란한 초록빛으로 세상을 뒤덮는 아름다운 계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5.18 광주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5월은 슬픔과 분노의 계절이기도 하다. 그러한 5월의 슬픔과 분노를 담아낸 노래가 ‘님을 위한 행진곡’이다. 광주항쟁의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던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와 노동운동에 헌신한 박기순 열사의 영혼결혼식에서 처음 만들어졌다는 그 노래. 그 비장한 가락을 듣고 있노라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는 맹세를 할 자신이 없고,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가 없는 사람들도 저절로 마음이 뜨거워지곤 한다. ‘님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지지 않는 5월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나는 가끔 생각해 본다. 그 때 공수부대가 광주시민들을 무고하게 총칼로 짓밟았을 때 시민들이 겁에 질려 뿔뿔이 흩어졌다면 지금 이 나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죽음의 공포를 무릅쓰고 도청에 남아 끝까지 남아 저항한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과연 가능했을까 하고... 만약 그 때 시민군의 목숨을 건 저항이 없었더라면 군대가 총칼로 장악한 숨죽인 세월은 지금까지도 계속되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각자 패배주의에 젖어 술잔을 기울이며 ‘모난 돌이 정 맞는다’거나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말을 속삭이며 뒷골목에서 슬픔과 분노를 삭였을 것이다.  

 만약 5.18 광주항쟁이 없었다면 87년 6월 항쟁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거리에서 최루탄을 맞아가면서 독재타도를 외치던 사람들, 시위대에게 박수를 보내고 손수건을 흔들고 모금에 동참하던 사람들... 그 모든 일은 광주에 대한 분노와 부끄러움이 있어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87년 6월이 없었다면 그나마 최소한의 민주주의라도 가능했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10년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흥구 교수의 말처럼 우리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 모두는 ‘광주의 자식들’이다. 그리고 광주의 정신은 지금까지도 ‘촛불’로 이어지고 있다.   


5·18민중항쟁 30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 17일 광주 금남로에서 열린 전야제에
참가한 시민들이 옛 전남도청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올해 정부가 주최하는 5.18 기념식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금지했다. 한술 더 떠서 한나라당의 대표라는 사람은 축하화환을 보냈다고 한다. 공수부대가 수많은 시민을 총칼로 짓밟은 과거를 축하하겠다는 것인가.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자는 구호를 내걸고 정권을 차지하고, 지난 정부의 흔적을 모두 없애느라 혈안이 되어 있는 그들에게는 수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5.18 광주의 기억마저도 지워버려야 할 대상인가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5.18 기념행사에 ‘님을 위한 행진곡’ 대신에 ‘방아타령’을 틀겠다는 희한한 발상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행태는 5.18 광주와 그로부터 시작된 우리의 민주주의를 모욕하는 것이고, 현 정부와 한나라당의 뿌리가 5.18 광주 시민을 무고하게 학살한 전두환, 노태우의 ‘민정당’에 닿아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화가 나지만 차라리 잘 된 일이다 생각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본질을 드러낼수록 무엇이 미워하고 분노할 대상인지 더 분명해질 테니까.

 오늘은 5.18이다. 온종일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고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니 고맙다. 마음속으로 조용히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본다. 비장한 가락이 이런 날씨에 딱 어울려서 좋다.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엉겨서 살지 말자고 다짐할 때가 있다. 주변에 엉겨서 너무 힘든 나머지 판단을 그르치는 경우를 자주 봐 왔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이런들 저런들 엉겨서 살자고 해 보았건만, 정몽주는 목숨 걸고 독야청청해 버렸다. 엉기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엉겨 붙어 헤매다 넋이 빠지기 십상이다. 엉겨 독배를 마시게 되는 운명은 가련하다. 

 사법시험 합격 후 연수원 시절, 그 시절처럼 엉겨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내게 대학 시절의 엉김은 뜻을 모아 실천하는 보람과 자기수양의 시간이라도 있었다. 도제식 교육에 편입되기 시작한 젊은 법조인들의 삶은 순식간에 빛이 바랬다. 길들여져 가는 과정에 거부도, 저항도 사라져갔다. 순응하지 아니하는 자는 왕따가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편입되어 순응하는 삶에 적응되는 순간 자기수양은 부질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한 비판과 모욕만은 허용하지 않는 완고한 성을 쌓기에 몰두하였다. 꿈과 비판이 사라진 곳에 남는 것은 엉겨 붙은 기능인들의 일탈과 허세 부리기였다. 넋이 빠져들 독배를 마셨다. 스폰서 검사의 운명은 거기서 비롯된 것이리라. 

 엉기는 이유가 있다. 자신의 처지와 환경,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이해관계에서 스스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엉겨 붙어 판단을 그르친 사람들은 자주 주변을 탓하며 자신의 나약함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낯선 곳에서, 횡포에,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하는 경우 불의에 맞서 저항하지 않고, 두려움에, 거기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날 유혹에 빠지면, 그 누구와도 타협하고 굴복하게 된다. 속절없이 엉기는 것이다.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다.  

 시국사건 변론에서 접견을 가면 으레 하는 말이 있다. 엉기지 말고 거부할 것을. 단 한마디의 진술도.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상대의 따뜻한 말 한마디, 담배 한 가치, 전화 한 통화의 유혹도 뿌리칠 것을. 구속과 중형 처벌 운운의 공격에는 겁 내지 말고 담대할 것을. 두려움과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엉기지 않고 실천한 이들이 정말 부럽고 존경스럽다.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리, 엉겨서 살자고 외치는 사람도 있다. 위기의 순간을 모면하고 순탄한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장래를 위한 차선책으로써 타협과 굴복도 선택할 수도 있다. 독야청청 살아갈 것 같으면 모난 돌이 정에 맞고 깨끗한 물에 고기가 없듯  왕따가 되기 때문이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 자기 합리화를 이어나가다 보면 결국 침묵과 굴종에는 주저함이 없는 반면, 삶의 진리에 대한 열정은 간데없고 진리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게 된다. 

 실용을 위해 진리를 포기한 넋이 빠진 머저리들이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기는커녕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있는 불가사의한 현실이다. 식민과 독재가 근대화를 이루고 경제를 발전시켰다고 환호성을 지른다. 사대 의존병에 걸려 자신을 돌보지 않고 망설임 없이 상전을 위해 독배를 마신다.  

 엉기는 것이 많기에 엉겨야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바로 이 시대의 대학을 거부하는 외침이 들린다. 취업에 저당 잡힌 대학의 현실이 숨 가빴으리라. 대학다움을 찾고자 눈물을 흘렸으리라. 동지와 진리를 찾았으나 역부족이었으리라. 대학의 현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에도 힘들었으리라. 편입되어 갈 뿐 저항하지 않는 대학인들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으리라. 취업 간판을 단 대학에서 꿈과 진리를 포기한 채 엉겨 살아가는 젊은 대학인들의 삶이 죽기보다도 더 싫었던 것이 틀림없다. 진리의 상아탑이기를 포기한 채 취업, 고시 준비에 갇혀 터져 버릴 것 같은 대학의 분위기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는 외침이 주객전도의 세상에 평지풍파를 일으켰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미래의 희망으로 다가온다.


지난 3월 11일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후문에 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씨의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어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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