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부터 휘청거렸던 세계적 경제위기는 극복된 것일까. 우리 경제 역시 위기 상황을 벗어나 회복된 것일까. 서울 G20 정상회의에서 새로운 금융위기의 재발과 경기침체를 방지할 처방전이 나올 수 있을지 관심거리다. 서울 G20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를 통해 우리가 선진일류국으로 진입할 수 있을지도 흥미롭다. 지금의 세계적 경제 상황을 보노라면 각국의 재정지출 확장으로 인한 일시적 경기회복 국면에 지나지 않고 새로운 경기침체의 나락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 때가 많다. 한국의 경제상황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수출 중심의 대기업 성장에 기반을 둔 개방화된 금융 중심의 한국의 경제구조에 비추어 새로운 국제적 금융위기 또는 경기침체를 맞아 휘청거리지 않을 수 없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일상화된 민중들의 생활고는 위기 탈출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 IMF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도입된 정리해고와 노동자 파견제는 실업자와 비정규직 양산으로 이어졌다. 이득은 주식과 부동산 투기, 투기자본의 몫이다. 노숙자들이 곳곳에 늘어가고 있고, 고용의 불안과 가계부채의 증가로 가정경제는 신음하고 있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구조조정은 되레 나날이 민생고를 가중시켰을 뿐, 비정규직의 양산과 차별을 없애는 데 필요한 해법은 반겨지지 않는다. 20 대 80의 사회에서 80의 불만을 달래는 화려한 수사어구들이 만개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집권 후반기 국정방향은 친서민, 공정사회라고 한다. 복지사회의 모토는 차기 대권을 겨루는 유력 정치인들의 유행어가 되고 있기도 하다. 친서민의 공정사회, 복지사회는 민중들의 불만과 생활고를 잠재울 수 있을까.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 준다는 말에 서민들은 믿음을 보낼 수 있을까.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잠시 기대에 젖어 있을 수는 있다.
장관 후보자의 국회 청문 과정을 거치는 순간 이명박 정부의 국정방향은 순식간에 그 운명을 다했다. 친서민, 공정사회의 훌륭한 구호를 내세웠지만, 20의 부자들을 대변할 인물을 등용하였다. 친서민을 표방한 소장수 아들의 총리 낙마는 친서민과 공정사회의 기획, 연출가에 대한 민심의 엄중한 경고다. 친서민, 공정사회와 함께 제안한 것은 부자증세가 아니라 통일세다. 느닷없는 통일세 제안에서 통일의지도 친서민 정책도 읽혀지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가 대북 협력과 교류의 물꼬를 제대로 열어놓고 있었더라면 지금처럼 남아도는 쌀과 보관비를 걱정할 이유도 없고 쌀값 안정을 위한 추가적 재정 지출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쓸데없는 통일세 걱정은 버리고 하루 빨리 대북 쌀 지원을 통해 쌀값 하락에 고통받는 농민들의 씨름을 덜어주는 것이 친서민 정책이다.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2년으로 제한한 비정규직법의 시행에 대하여도 이를 반대하며 비정규직 실업대란을 선동한 정권에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차별받는 구조가 지속되고 이를 조장하는 사회가 공정사회가 될 수는 없다. 대기업이 사내 하청을 통해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현실을 개선하지 않은 채 대통령이 떡볶이를 먹는 친서민 행보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고 친서민 공정사회가 될 수는 없다. 민생고를 해결할 재원은 도처에 넘쳐나고 있다. 여러 계층에 대한 생활의 고통을 헤쳐 나갈 대안도 부지기수다. 친서민 공정사회의 빈수레를 요란스럽게 끌지도 말 것이며, 친서민 공정사회의 좌절을 재원과 예산 부족 탓으로 돌리지 말라. 민생 예산을 삭감하는 대신에 4대강 사업 예산을 늘리는 정권이 부르짖는 4대강 사업을 통한 일자리 창출은 서민 기만이다. 외교만 잘해도 민생 예산은 마련된다. 전시작전통제권을 3년 더 미국의 감독 아래 두기 위해 날려 버릴 돈만 아껴도 서민을 챙길 수 있다. 적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연기하면서 추가적으로 지출할 비용목록들이 민생고를 해결할 재원들이다. 대북방어 명분으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연기를 위해 추가적으로 소요되는 첨단무기 예산, 수많은 한미합동훈련, 다국적 훈련 예산을 지출하는 대신에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대화와 협상을 개시하는 한편 정치적, 군사적 신뢰를 확대함으로써 국방예산을 줄이고 이를 민생 예산으로 전용하는 것이다. 미군이 주둔하는 현실에서 미군 기지로 공여된 땅값만 제대로 받아도, 미군기지로 인한 환경오염 치유 비용, 소음피해 비용에 대하여 우리 정부가 미국에 제대로 배상책임을 구상만 해도, 방위비분담금으로 국민의 혈세를 낭비만 하지 않아도 생돈을 아낄 수 있다. 전략적 유연성 아래 전 세계를 무대로 군사활동을 벌이는 미군기지를 우리 예산으로 건설하면서 민생 예산 부족을 탓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국방비 지출로 민중에게 돌아올 몫은 허구의 안보 외에는 없다. 분단논리에 취하지 않고 평화논리를 꿈꾸는 것이 민생을 해결하는 것이다. 복잡한 셈법이 아니라 누구나 공감이 가는 민생 예산을 마련하는 것이 그 방법이다. 이를 회피하는 갖가지 위선들이야말로 분단의 논리에 사로잡힌 민생고의 원인이 된다. 취업을 포기하는 청년실업자가 속출하는 현실에서, 언제 다시 경기침체의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세계경제 위기의 국면에서 민생의 개선을 위한 몫은 결국 민중 자신에게 있다. 개선되지 않는 일상화된 민생고의 현실에 견디지 못한 민중들은 허구의 기대를 깨고 민생고를 해결을 위한 대안을 직접 찾아나갈 것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
인권으로 바라본 세상
- 민생고(장경욱 위원) 2010.09.03
- SOS, 4River -4대강을 다녀오다(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 교육조직국장) 2010.08.27
- 포퓰리즘(이재성 위원) 2010.08.25
- (프랑스) 혁명의 추억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 2010.08.25
- 권력 밖 문화 게릴라들의 데뷔를 위하여(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 2010.08.25 1
- 좋은 판결 이야기(도재형 위원) 2010.08.03 2
- 정신 못 차린 경찰, 인권교육으로는 어림없다 - 허창영/ 전남대 공익인권법센터 연구원, 전임 간사 2010.08.03
- ‘자살방지용 철망’으로 재소자들의 자살을 막을 수 없다! -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2010.08.03 1
민생고(장경욱 위원)
SOS, 4River -4대강을 다녀오다(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 교육조직국장)
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연합 교육조직국장
여주 이포보 공사현장을 다녀왔다. 7월에 한 번, 8월에 한 번.
아니 정확히 말하면 4대강 반대를 위해 보 위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환경운동연합 활동가들에 대한 지지와 격려, 4대강에 대한 공사를 중단하라는 요구와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집회에 다녀왔다. 7월 집회에도 많이 더웠고, 거름냄새가 역겨웠었다. 나는 그 거름이 장승공원의 나무들을 위해 뿌린 것이겠거니 했다. 그리고 그 때까지는 아직 열흘을 넘기지 않은 농성 덕에 보 위에서 농성하고 있는 활동가들의 상태가 양호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음성을 듣고 망원경으로나마 그들의 모습을 접하자 찡! 하니 가슴이 저려왔다. 그들이 저 보를 오를 때 어떤 심정이었을지, 지금은 저렇게 웃고는 있으나 또 어떤 심경들일지. 아니 자꾸만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 가고 몰려갈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이 먹먹하게 다가 왔다. 언제쯤이나 이런 극한의 상황들이 사라질 것인가? 목숨을 담보로 하는 극한의 투쟁들이 언제쯤 사라질 것인가?
농성 일주일 후부터 생활용품 반입을 제한하고 있다고 했다. 그날도 활동가들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생활용품과 먹거리는 반입을 못하고 말았다. 찜통더위에 식량은커녕 먹을 물조차 반입을 기피하는 것은 뭐하자는 것이냐며 집회에 참석한 이들의 비난과 원망이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그렇게 그 날은 돌아왔다. 더위에 지친 몸을 시원한 에어컨으로 달래가며... 잠시 동안의 더위에도 지치고 힘들어 차량에어컨을 들들볶아대었는데, 종일을 높은 보 위에서 텐트조각으로 햇빛을 가리는 그들의 더위와 갈증에 미안해야 했다.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장난질을 하는 현 정부와 공사업체의 잔혹함이라니.
그리고, 8월에 한 번 더 방문했다. 그 때는 거름냄새가 지난번보다 더 심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상황실의 애기를 들어보니 마을 이장단에서 상황실 철수와 지지방문 방해를 목적으로 일부러 뿌린 것이라고 한다. 그것도 한밤중에 몰래 와서. 현장에는 4대강공사 찬성현수막이 줄줄이 널려있다. 비슷비슷한 문구들, 개발에 대한 염원을 담은 문구들... 언뜻 봐도 같은 사람이 만든 것 같은 현수막들이 여주 주민의 이름으로 걸려있고 그 사이에 하나, 4대강 반대의 현수막이 또한 여주 주민의 이름으로 걸려있다. 적든 많든 부동산과 토지를 소유하는 있는 이들이 찬성 측이라고 한다. 그 날은 찬성하는 주민들의 집회도 있었다. 그리고 현장방문에는 대학생들도 50여명 와서 현장을 둘러보고 자기들끼리 집담회를 하고 있었다. 찬성집회는 어느 순간 대학생들에 대한 공격과 욕설로 얼룩져 버렸고, 상황실을 공격할 기세로 인해 경찰들이 상황실을 보호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살아생전 전투경찰의 보호를 받기는 처음’이라며 웃음을 주고받기는 했으나 마음한편은 찜찜했다. 자식뻘인 대학생들을 향한 욕설과 흥분은 결코 당당하거나 정당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사업이 중단될까 두려워하는 모습, 안절부절하는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내몰고 있는 걸까?
환경 운동가들이 고공 농성 중인 경기도 여주군 4대강 이포보 공사현장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언제부턴가 이 사회에서는 ‘개발은 돈’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고 있다. 그것은 부동산이 재산증식의 주요한 수단인 것과 일맥상통한다. 개발이 곧 돈이 되는 것은 그 개발과 관련한 부동산이 있을 때 확실한 보증수표가 된다. 개발예정지에 외지인들이 부동산을 사들이는 것이 그런 이유이자 증거가 아닐까? 여주 이포보의 갈등도, 찬성 측의 대부분도 부동산을 소유한 이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다수 주민들은 구체적인 이익에 대한 정보보다는 정보와 권력을 점유한 찬성 측의 입장을 전달받을 뿐이라고 한다. 군수와 이장들이 전부 개입되어 있으니 일반주민들이 섣불리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긴 힘들 것이라고 한다. 진실은 결국 권력과 부를 가진 몇몇에 이득이 돌아갈 것이라는 게 아닐까? 지역출장을 위해 오랜 시간 기차나 버스를 타고 다니다보면 보이는 곳곳이 헤집어져 있음을 본다. 산이 통째로 뭉개지고, 강이 파이고, 시뻘겋게 드러난 맨 땅위에 철과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세워지는 모습... 그것이 개발이란 미명하에 진행되고 있는 모습이다. 벼로 출렁이던 들과 나무로 싱싱하던 산과 말갛게 흐르던 강물이나 냇물이 그런 모습으로 대체되고 있다. 나의 고향집 앞산도 통째로 뭉개져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있는 중이다. 앞으로는 회색건물들이 고향집에서 보는 시야의 전부가 된다. 여주 남한강의 공사현장도 마찬가지였다. 시뻘건 피를 토하듯 드러난 흙이 푸른 강나루를 대신하고 있다. 강이 주는 평화란 찾아볼 수 없다. 전쟁하듯이 강을 뒤집고 점령하듯이 강나루를 짓이기고 있다.
그 모습에서 나는 정복, 폭력, 전쟁 같은, 잔혹한 단어들이 떠올랐고 분노가 올라왔다. 파괴된 자연에 대한 숙연함과 더불어 마치 내 몸을 유린당한 것 같은 분노. 강의 야생성이 주는 편안함과 평화는 이제 더 이상 못 본다는 것에 대한 분노. 현장 방문한 이들이 적어놓은 지지와 격려의 글 중에 ‘그냥 흐르게 두라’는 글귀가 있었다. 그렇다 왜 ‘그냥’ ‘흐르도록’ 두지 못하는 것인가? 왜 사물이 본래의 모습으로 자기의 정체성을 가지고 존재하도록 그냥 두지 못하는 것인가? 여성의 몸과 마음과 생각을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관점으로 재단해서 깎고 자르고 통제하듯이 자본과 결탁한 가부장제는 자연마저 자본의 도구로 통제하려고 하고 있다. 여성의 미를 규격화 하듯이 자연의 아름다움마저 규격화를 시도하고 있다. 시멘트로 덧입혀진 인공 강나루가 수풀로 우거진 강나루에 비해 더 아름다울 것이라고 주장하는 배경, 잘 흐르는 강물을 막더니 그 자리에 인공호수를 만들려는 발상의 배경은 아름다움조차도 가공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 외에 다름 아니다. 제발 그냥 두라!! 천박한 심미안과 욕심을 지금이라도 거두라!! 그냥 이대로, 지금 그대로 두어라!!
자연이 파괴된다면 그 다음은 인간의 파괴라는 것을 모르는가? 몸이 없이 생각이 없듯이 자연이 없이 인간의 문명과 문화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아이들도 다 아는 상식을 그들은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개발과 성장의 의미를 다시 쓰는 작업이 필요하다.
지금 이 시각, 비가 온다. 이 비로 인해 더위는 한풀 꺾이겠지만, 비로인한 또 다른 불편들을 생각하니 편하지만은 않다. 벌써 한 달을 넘긴 농성에 활동가들의 몸은 지치고 이러저러한 병의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쉽게 농성을 접을 수 없는 활동가들의 고충을 해결하는 길은 4대강 사업의 문제에 대한 침묵을 걷어낸 국민들의 관심과 참여일 것이다. 아니 활동가들의 고충을 떠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안식을 찾고 찜통더위와 이상한파로 나타나는 이상기후에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도 참여해야 한다. 결국 인간 스스로의 멸망을 막기 위해 나서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여주의 찬성하는 주민들을 직접 만나 묻고 싶었다. “진정 찬성하세요?”, “건설로 인한 이득과 자식들의 미래를 바꾸고 싶으신가요?” 그러나 실제 이 작업은 국가가 해야 한다. 국민의 여론을 수렴하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국민을 섬기는 행위다.
포퓰리즘(이재성 위원)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요즘 대한민국에서, ‘포퓰리즘’만큼 뾰족한 언어가 또 있을까?
지난 6·2 지방선거 당시, 조중동과 한나라당이 진보진영의 ‘무상급식 정책 연대’에 대해 퍼붓던 이 저주의 정치적 수사는, 이제 이명박 대통령의 ‘서민 정책’을 향하고 있다. 물론 약간의 전선 변화는 있다. 예를 들어 한나라당의 비주류, 홍준표 최고위원 같은 사람은 “더 많은 포퓰리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일관된 우파 정치집단인 조선일보와 경제신문들만이, 일관되게, 포퓰리즘은 안된다고 부르짖는다. 대체 포퓰리즘이 뭐길래 이렇게들 난리인가?
재미있는 건 나라마다 포퓰리즘에 대한 정의가 다르다는 것이다. 먼저 네이버 백과사전. “일반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행태를 말하며 종종 소수 집권세력이 권력유지를 위하여 다수의 일반인을 이용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반대되는 개념은 엘리트주의(Elitism)이다. …중략… 대중주의라고도 하며, 인기영합주의·대중영합주의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포퓰리즘의 근본 요소는 개혁을 내세우는 정치 지도자들의 정치적 편의주의나 기회주의이다. 예를 들면 선거를 치를 때 유권자들에게 경제논리에 어긋나는 선심 정책을 남발하는 일이 전형적이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엘리트주의에 반대되는 개념이라면 민중주의 혹은 인민주의로 번역하고 설명하는 게 옳을 텐데, 네이버는 인기영합주의, 대중영합주의에 대한 설명에 치중하고 있다. 네이버의 번역은 우리 사회 언어적 주류의 해석에 해당한다. 2008년 6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시위에 대해 소설가 이문열이 “위대하고도 끔찍한 디지털 포퓰리즘”이라고 표현한 것은, 비록 그가 비아냥대는 표현이 아니라고 부연했음에도 불구하고, 포퓰리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포퓰리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우파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마이뉴스>는 촛불시위에 대한 우파들의 공세를 비판하는 기사를 쓰면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이야말로 끔찍한 포퓰리즘”이라고 제목을 뽑았다. 좌우를 막론하고 포퓰리즘을 부정적 수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스피커를 보수우파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나라밖으로 눈을 돌려 보면 사정은 많이 다르다. 캠브리지 사전은 포퓰리즘을 “보통사람들의 요구와 바람을 대변하려는 정치 사상, 활동”이라고 정의한다. 위키 백과 영문판은 “정치철학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 혹은 정치사회적 사상이나 담론-엘리트와 민중을 동등하게 놓는-의 한 종류로 정의되며, 사회·정치 시스템의 변화를 촉구한다. 다양한 정치 혹은 사회 운동의 참여자들에 의해 차용되는 수사적 스타일로 정의되기도 한다.”라고 소개한다. 네이버의 설명보다 훨씬 중립적이다. 그런데 위키 백과 한글판으로 넘어오면서 네이버와 위키백과 영문판이 교묘하게 합성된다. “포퓰리즘, 또는 대중주의 또는 인기영합주의는 ‘대중’과 ‘엘리트’를 동등하게 놓고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주장하는 수사법, 또는 그런 변화를 뜻하는 말이다. 이것은 이데올로기, 정치철학, 또는 단순한 담론으로 정의된다.” 이런 걸 토착적 변용이라고 해야 할까?
2008년 6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시위에 대해
소설가 이문열이 “위대하고도 끔찍한 디지털 포퓰리즘”이라고 표현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포퓰리즘이 악마의 화신처럼 통용되기 시작한 계기는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이 실시한 일련의 경제 정책 때문이다. 쿠데타에 참여해 노동부장관이 된 그는 노동조건의 개선과 임금 인상 등으로 노동자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처음 대통령이 됐을 때는 외국 기업의 국내 진출을 규제하고 철도 등 공익 사업을 국유화했으며, 사회보장 제도를 실시하는 등 사회주의적 정책을 실시했다. 군부 쿠데타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났던 그가 페론시대를 그리워하던 아르헨티나 국민들에 의해 두 번째로 대통령에 선출된 것은, 죽기 1년 전인 1973년이었다. 장하준 캠브리지대 교수가 지적했다시피, 아르헨티나의 경제위기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도입한 1980년대에 시작된다. 그 전까지 아르헨티나는 명실상부한 남미의 경제 선진국이었다. 페론의 포퓰리즘이 국가경제를 파탄냈다면 어떻게 두 번씩이나 대통령이 될 수 있었겠는가.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이렇게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역사와 사실을 왜곡하는데 일가견이 있다.
이문열이 끔찍하다고 표현한 촛불집회에 대해 김대중은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인터넷, 휴대전화를 통해 직접 민주주의가 실현된 중대 변화”라며 “그리스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두 사람의 시각 차이는 곧 정치철학의 차이다. 엘리트주의(혹은 대의제민주주의)로 무장한 이문열이 촛불집회를 포퓰리즘이라고 깎아내릴 때, 민중주의(혹은 직접민주주의)를 신봉하는 김대중(그가 대통령으로 재직할 때 그렇게 통치했다는 뜻은 아니다)은 위대한 변화라고 상찬하는 것이다. 우리가 배웠던 상식은, 직접민주주의와 간접민주주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조건(예를 들어 인구나 비용)의 문제라는 것이었는데, 어느 샌가 좀 더 많은 참여가 좀 더 많은 오류를 상징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정치인이 표(=표심=민심)를 의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진대(“모든 정치는 기본적으로 포퓰리즘”이라고 말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를 기억하자), 우리 사회에서 그것은 포퓰리즘이라는 한마디로 폄하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류의 입장에서) 설정한 사회발전의 길을 벗어나는 모든 정책을 선심정책으로 비난하는 권위주의적 엘리트들이다. 국민들은 모두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들이고, 자신들은 국가의 백년대계를 생각하는 선지자들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쪽방촌 투기와 위장전입도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 개인적 결단인지 모른다!) 무상급식은 국민들의 거지근성을 키우고, 근로 의욕을 꺾으며, 국가재정을 파탄낼 것이기 때문에 절대 안 되지만, 20조원이 넘게 드는 4대강 사업은 국가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국민의 대다수가 반대하는 4대강 사업-한반도 대운하 1단계 사업-을 모든 민주적 절차와 합의를 무시하고 강행하는 이명박 정권은 포퓰리즘 정권이 아니다.
슬라보예 지젝 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제기해야할 질문은 ‘포퓰리즘이 필요한가’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포퓰리즘이 필요한가’다. 언어를 놓치면 다 놓친다. 포퓰리즘을 문자 그대로 ‘민중주의’라고 읽자. 우리는 지금 포퓰리즘이 너무 적어서 문제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프랑스) 혁명의 추억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문화연구학과 교수
지난 7월 하순에 한국에서 방문한 동료교수들과 합류하여 프랑스혁명기행을 열흘 동안 다녀왔다. 천리 길(4천 킬로미터)을 넘게 달리는 강행군이었지만 세계를 흔들었던 대사건의 주요현장과 기억의 터를 돌아보며 그 역사적 유산과 그 현재적 의미를 다시 음미해 보는 좋은 기회였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혁명'이라는 용어가 동반하는 너무 심각하고 거창한 무게와 찬란함을 싫어하지만, 기행을 통해 얻은 몇 가지 개인적인 단상들을 '프랑스혁명과 인권'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춰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
프랑스혁명은 과연〈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천명했던 압제에 대한 저항권, 사상과 의견의 자유로운 표현, 부당하게 공권력에 의해 구금·체포되지 않은 권리 등을 현재까지 얼 만큼 실현했을까? 프랑스혁명의 의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혁명은 출생에 의한 특권을 재산에 의한 특권으로 대체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야유한다. 성직자-귀족-평민이라는 신분제도가 법적으로는 해체되었지만 사유재산의 신성불가침을 보장함으로써 (많이) 가진 자와 (적게) 못 가진 자 사이의 차별은 더욱 심해졌다는 주장이다. 혁명기간 동안 감옥으로 사용되었고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처형 직전까지 갇혀 있던 센 강 옆의 콩시에르쥬리에 재현된 당시 감옥이 수감자의 빈부차이에 따라 크기와 내부시설이 달랐다는 것을 관찰해 보면 일리 있는 불평이었다.
우리가 프랑스혁명이 잉태한 폭력과 공포의 상징처럼 흔히 알고 있는 기요틴은 사실은 '죽음의 평등'을 위해 특별고안된 것이다. 루이 16세를 포함한 지배계층, 혁명의 과격파와 온건파, 일반시민과 노동자가 동등하게 기요틴 앞에 목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혁명의 궁극적인 승리자는 누구였을까? 지난 200년 동안 축적된 연구결과를 다소 거칠게 요약하면, '재산을 가진 백인남자'가 정답에 가장 가깝다. 권리선언이 보장한 각종 시민권들은 남자에게만 한정되었다는 깨달음이 올랭프 드 구즈라는 여성이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선언'을 별도로 발표하게 된 배경이다. "기요틴에 올라갈 동등한 권리가 있듯이 여성에게도 연설할 권리(=시민으로서의 공민권)를 보장하라"고 외쳤던 구즈 역시 기요틴에 목숨을 빼앗겼다. 무려 150여년 뒤인 1940년대가 되어서야 프랑스여성에게 처음으로 참정권이 주어졌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여성들에게는 프랑스혁명이 없었다"라는 한탄이 근거 없는 억지는 아닌 셈이다.
프랑스혁명이 백인 중심적이었다는 해석은 논쟁의 여지에도 불구하고 사실에서 크게 비켜나지 않는다. 비록 혁명정부가 프랑스 식민지에서의 노예제도의 철폐를 선언했지만 유색인종을 조건 없이 자유, 평등, 우애의 품으로 포옹하지는 않았다. 프랑스혁명에서 용기를 얻은 아이티 흑인들이 식민지배에 반발하여 최초의 흑인공화국을 수립하려고 투쟁할 때, 나폴레옹은 그들의 영웅인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를 체포하여 머나 먼 프랑스 산골짜기 감옥(Fort-de-Joux)에서 사망하도록 방치했다. 여성과 마찬가지로 유색인도 혁명의 괄호 바깥에서 부당하게 신음했던 것이다.
아이티의 영웅인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가 사망한 프랑스 산골짜기 감옥(Fort-de-Joux)
사진 출처 - 필자
주지하듯이, 이데올로기적 좌표의 기준으로 통용되는 사용되는 '좌파(Left)'와 '우파(Right)'라는 용어는 프랑스 혁명의회의 우연한 좌석배치에서 연유했다. 공화정을 지지하는 의원들이 왼쪽 편을 차지했고 입헌군주정을 선호하던 보수온건파들은 오른쪽에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상퀼로트(노동자계층)의 전폭적인 정치적 후원을 받으며 '공포정치'를 주도했던 좌파의 우두머리격인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후대 프랑스인들의 기억과 선호는 어떤 빛깔일까? 답사단의 한 사람이 "프랑스에서 로베스피에르를 포함한 혁명좌파가 너무 심한 푸대접을 받고 있다"고 푸념할 정도로 이들은 냉담한 대접을 받았다. 혁명의 진원지이며 핵심무대였던 파리에는 로베스피에르의 이름을 딴 거리는 물론이고 그 흔한 기념동상이 단 한 개도 없었다. 우리가 찾은 그의 고향(아라스, Arras)에서조차 그를 기리는 기념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일행은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프랑스판 혁명기행안내책자에도 기록되지 않은) 그의 이름을 딴 공립학교를 '발굴'하는 개가(?)를 올렸다.
로베스피에르의 이름을 딴 공립학교
사진 출처 - 필자
한가롭게 '남의 나라' 혁명의 흔적과 발자취를 찾아 헤맸던 필자가 느낀 전반적인 인상은 혁명의 주변인 혹은 이단자에 대한 역사기억 만들기가 (의도적으로?) 축소되거나 억압되었다는 점이다. 선구적 페미니스트 구즈가 거주했던 파리소재 집은 조그만 명패로만 남아있었고, 혁명발발 전 신분의회의원에 선출되어 베르사유에 머물었던 로베스피에르의 숙소는 찾을 길이 없었으며, 진보정당의 전신이었던 자코뱅 클럽이 있던 장소는 현대식 쇼핑센터가 삼켜 버렸다. '베허 버려야 할 왕의 모가지'가 사라진 오늘 날, 혁명의 날카로운 추억은 체 게바라의 캐리커처를 그린 티셔츠로만 전 세계를 떠돌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시인 김수영은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나에게 물었다. 내가 젊은 그대에게 다시 묻노니, 지금 당신은 무슨 냄새를 더듬으며 쓸쓸히 거리를 헤매는가.
권력 밖 문화 게릴라들의 데뷔를 위하여(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
제주에 최상돈이란 가수가 있다. 노래를 참 잘한다. 곡도 잘 만들어서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다. 4.3 현장을 찾아다니며 연출되지 않는 공연도 한다. 군사기지 싸움 현장에도 달려와 늘 주민들과 함께 선다. 주민들과 막걸리 잔이라도 기울일라 치면, 곧 그의 ‘목포의 눈물’ 요청이 쇄도 한다. 미안한 얘기지만, 나는 조용필이나 한영애의 그것보다 최상돈의 ‘목포의 눈물’을 더 좋아한다.
그런데 그는 정작 자기 노래를 담은 음반 한 장 아직 못냈다. 수십 년 동안 노래에 온 삶을 바치며 장가도 못간 그가 제대로 된 음반 하나 갖고 있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올봄 즈음에는 ‘상도니 노래 날개 달아주기’ 모임이 시작되었다. 뜻맞는 사람들끼리 십시일반 모아서 최상돈을 ‘데뷔’시키자는 것이다. 말이 ‘데뷔’지, 그의 노래, 아니 그의 삶을 오롯이 한 장의 음반으로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평생 현장에 헌신해 온 그에게 최소한의 보답이라도 하자는 취지도 덧붙여진다.
그의 음반에는 그의 노래가 좋아서 후원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도 빼곡히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음반이 만들어지면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전국 투어에도 나서기로 했다. 제주와 같은 아픔을 겪었던 지역들, 예를 들어 평택이나, 부안 등지를 다니면서 현장의 가수끼리 만남을 엮고 비슷한 처지의 지역끼리 서로 보듬고 교류하자는 것이다. 서울 대학로의 공연장에서도 제주 가수의 노래를 통해 ‘제주’를 들려주면 좋겠다.
제주의 소외된 현장에서 늘 함께 하는 가수 최상돈, 최근 그의 음반을 내기 위한 노력이 모아지고 있다.
사진 출처 - 필자
비단 제주의 가수 최상돈을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정작 최상돈은 머쓱해하며, 그럴 필요 없다 말리기도 하고, 자신 때문에 모여서 걱정하고 때로 옥신각신 하는거 보면서 상처도 받았다고 하지만, 이번 일은 최상돈 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지난 6월, 박원순 변호사 블로그를 보니까 광주의 행복발전소라는 곳에서 ‘광주전남 가수 키우기 프로젝트’라는 것을 벌이고 있음을 소개하고 있었다. 참 좋아 보인다. 지역에서 거리문화, 현장예술을 끌고 가고 있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그들의 삶이란 녹녹치 않다. 그런데 문제는 지역에서조차 그 사람들을 무슨 무슨 행사를 벌일 때 ‘써 먹을줄’만 알았지 키우려는 생각은 잘 안하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프로젝트 수준은 아니더라도 그들의 삶과 현장문화를 지키기 위해 함께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제주 속담에 ‘동네 심방 안 알아준다(동네 무당은 알아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실력이나 재능은 있지만, 오로지 언제든지 찾으면 볼 수 있는 동네(지역)사람이라고 도무지 키워줄 생각 안한다. 그래서 무슨 무슨 집회나 현장 행사에는 노래 불러달라고, 공연해달라고 하면서 그들의 삶이야 어떻든 술 한 잔 같이하면 그만이라는 현상을 빗대어 볼 수 있는 말이다.
이를 좀 더 확장하게 되면, 언제까지 서울과 제도가 주도하는 문화 권력에 의존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물론, 서울에도 여전히 거리의 문화는 마이너이다. 한편, 아직 지역의 문화는 서울로 상징되는 문화 권력에 예속된다. 민중문화니, 독립문화니 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때문에 지역에 좋은 가수, 좋은 예술가가 있어도 큰 행사나 기획을 준비하게 되면 무대에 누구를 초청할까 하면서 서울의 리스트부터 뒤지게 된다.
모든 텍스트는 서울에서 온다. 우리 사회에 대한 시각, 이런 저런 이야기, 시대 담론은 말할 것도 없고, 지역의 문화와 자연에 대한 이야기조차 서울에서 나온다. 제주만 하더라도, 최근 한창 각광을 받고 있는 ‘올레’와 관련된 책은 서울에서 나온다. 물론 올레를 걸었던 경험과 이야기는 누구든지 풀어낼 수 있겠지만, 누구보다 제주의 생태와 문화를 잘 이해하고, 어릴 때부터 살아온 터전이기도 한 고향의 이야기가 서울에서 전해지다니, 반성할 일이다. 우리 안에서부터 ‘책 내는 버릇’이 바이러스 처럼 퍼졌으면 좋겠다. 그것은 제주를 남기는 기록이고, 제주를 알리는 홍보이자, 제주를 키우는 문화재생산이기도 하다.
돌아보면, 제주의 삶과 문화를, 자연을 누구보다도 잘 엮은 책으로, 음반으로, 영화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안 곳곳에 있음을 본다.
그런데, 그들의 삶이란 작정하고 제도에 얹혀 가거나, 혹은 서울권력과 매칭되는 방식이 아니면 힘겹기 마련이다. 그리고 필히 그것은 주류질서 내에서 스스로 변질될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최상돈처럼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으로 인한 삶의 힘겨움이야 견뎌내겠지만, 그 속에서 피어난 예술은 서울이나 주류의 그것과 견줄 수 없는 값진 산물일진데, 너무 아깝지 않은가! 제도가 아닌, 서울로부터 내려오는 주류질서 밖 이 곳에서 우리 스스로 창조하는 문화의 질서란 다름 아닌, 지역 공동체에 혼을 일으키는 일이다. 사회 전체적으로는 문화다양성을 열어가는 길이다.
수년 전, 서울 출장 갔을 때의 일이다. 출장일을 마치고 혼자 어스름한 저녁의 인적도 드문 서울 거리를 걷고 있는데, 어디서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자세히 보니 건너 편 잘 보이지도 않는 어두운 모퉁이에서 한 여성이 기타를 치며 마이크까지 세우고 매우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때, 저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내내 놓지 못했던 기억이 새롭다. 사람이라곤 드문 어두운 겨울 거리의 저녁, 삭막한 공간에 퍼지는 그 노래 덕에 나의 무겁던 발걸음도 행복해졌지만, 그녀의 노래는 앞으로 어떻게 이어져 갈까 하는 의문도 더해졌다.
지역의 가수를 키우자. 상업적 공간으로 방치되고 있는 지역의 대학로를 메시지가 생산되는 예술장소로 만들어가자. 주류적 생산체제에 쫓겨 촌(村)으로 들어가 자신 만의 예술을 갈구하는 사람들, 16mm 카메라 둘러매고 이곳저곳 사람과 시대를 담으려 애쓰는 예술가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문화게릴라들을 ‘데뷔’시켜내야 한다. 공감과 연대를 통한 비주류의 방식으로 말이다.
* 제주의 가수 최상돈에 관한 이야기는 http://cafe.daum.net/sdXover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좋은 판결 이야기(도재형 위원)
도재형/ 인권연대 운영위원 법학자의 책무 중 하나는 현실 법률문제에 대해 내려지는 법원의 판결을 살펴보고 비판하는 일입니다. 그 목적은 좀 더 나은 판례가 정립되도록 하기 위함이고, 따라서 법학자가 구체적 판결에 관해 칭찬하는 것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얼마 전 대법원이 비정규 근로자에 관해 좋은 판결을 선고한 것과 관련하여 칭찬을 하려고 합니다. 같은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정규직 근로자와 비정규 근로자 사이에서조차 임금이나 복지·고용 등에서 차별이 있다는 것은 이제 우리 사회의 구성원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은 비정규 근로자로 자신의 직업 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공무원 시험 준비에 몇 년을 소비하곤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정규직 근로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인 임금액이 낮아지고 그 지급 기간조차 짧아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임금 외에 특별한 사회보장적 기반이 없는 우리 사회에서 이는 노후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의미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런 차별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정책입니다. 1990년대 이후 기업들은 노동력에 대한 보상을 줄였고, 정규직 인원을 삭감하고 비정규 근로를 확대하였습니다. 결국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별이 확대된 1차적 원인은 기업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업이 이런 사회적 양극화에 대해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업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가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권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외환위기 당시 우리 정부는 인원을 삭감하는 구조조정 방식을 적극 권장하였고, 그 스스로도 공공 부문 근로자의 약 30%를 삭감하는 방식으로 모범을 보였었습니다. 법원 역시 기업의 구조조정 정책에 동조하고 지원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1990년대 초 이후 약 20년 동안 법원은 비정규 근로자를 사법적 보호 범위에서 배제하는 판례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당시 법원의 모습을 보면서 이따금씩 “법리(法理)라는 안대(眼帶)를 스스로 끼고선 현실 문제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한 시기”였다고 생각하곤 하였습니다. 다행히 2008년 이후부터 비정규 근로에 대한 대법원의 태도가 변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른바 “사내하청 대법원 판결 3부작”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7월 22일 대법원은 현대자동차의 사내하청 근로자 관련 판결에서 더욱 분명하게 비정규 근로자를 보호하는 입장을 밝혔습니다(대법원 2010. 7. 22. 선고 2008두4367 판결). 이 판결에서 대법원은 사내하청 근로자가 자동 흐름 방식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일하는 점, 본사가 내려준 작업지시서에 따르는 점, 본사가 근로자의 근태를 파악하는 점 등 고용의 형식보다 실질을 관찰하여 현대자동차가 이들에 대한 노무관리를 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현대자동차가 사내하청 근로자에 대한 노무관리를 실질적으로 행한 이상 이들과 현대자동차 사이에는, 노동법적 보호가 배제되는 도급 관계가 아니라, 파견근로 관계가 성립하고 사내하청 근로자들은 파견법에 따른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 판결의 의미를 평가하자면, 대법원은 쓰고 있던 안대(眼帶)를 풀고 스스로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기 시작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저는 외교부의 고위층이 젊은이들의 투표 행태를 비난하였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야당에 대한 투표를 친북행위로 평가한 그 단순함을 별론으로 한다면, 그 분의 말씀이 맞는 부분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투쟁을 통해 획득하고 지켜져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분은, 민주적 체제를 지키기 위하여 필요한,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적대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즉 시민이 자신의 민주적 체제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전력을 다할 때 민주주의는 지켜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제도가 건강한 시민을 육성하고 보호하여야 합니다. 이 점에서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우리 사회가 그와 같은, 좀 더 나은, 민주적 체제를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합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비정규 근로자 등 사회안전망에서 배제된 자들에 대한 보호를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논의가 활발해지기를 희망합니다. 정부와 법원, 정당 그리고 시민사회가 계속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의미 있는 개선 방안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시민들이 자신의 소질에 맞는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생활하고 노후를 보장받는 좋은 사회, 그리고 모든 시민들이 그 체제를 지키려고 하는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참고) “사내하청 대법원 판결 3부작” - 현대미포조선 사건(대법원 2008. 7. 10. 선고 2005다75088 판결), 예스코 사건(대법원 2009. 9. 18. 선고 2007두22320 판결), 현대중공업 사건(2010. 3. 25. 선고 2007두8881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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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못 차린 경찰, 인권교육으로는 어림없다 - 허창영/ 전남대 공익인권법센터 연구원, 전임 간사
허창영/ 전남대 공익인권법센터 연구원, 전임 간사 최근에 알려진 ‘양천경찰서 고문사건’은 충격 아닌 충격이었다. 충격이라는 것은 아직도 고문이라는 전근대적 수법이 잔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충격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 고문이 완전히 근절되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도 그럴 것이 일부에서는 고문이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서나 있었던 일이라고 ‘추억’할지 모르겠지만, 가깝게는 2002년에도 검찰에서의 고문치사사건이 있었다. 그 이후에도 고문에 대한 증언은 이어져왔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된 사건들만 살펴보더라도 우리사회에서 고문은 여전히 ‘현실의 문제’라는 개연성이 충분하다. 여하튼 이번 일로 그동안 잊혀지려던 ‘고문경찰’이라는 말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인권경찰’임을 표방하고, ‘새롭게 바뀌겠다’고 약속했지만 내부 깊숙한 곳에서는 구태의 악습을 벗지 못했음이 자명해졌다. 양천서 사건 이후 경찰이 보여준 태도 또한 이러한 심증을 굳게 한다. ‘자정결의대회’를 열고 인권교육을 실시하는 등 경찰 스스로 자숙하는 모습을 보이는 듯 했다. 그렇지만 이 또한 ‘눈 가리고 아웅’임이 금방 드러났다. 인권교육을 하러 간 강사에게 “고문을 봤냐”라고 항의하고, 동료직원들은 여기에 호응하는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백번을 자숙해도 모자랄 판에 “봤냐”라는 식의 항의는 희대의 살인마가 “내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봤소”라고 묻는 섬뜩함이 느껴진다. 또 한 직원이 “고문이 아니라 가혹행위”라고 하거나, 서장이 “자연스러운 의견 개진”이라고 한 것에서는 천박함도 엿보인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가 사실이라면 양천서에서의 일은 국제사회가 규정하고 있는 고문임이 명백하다. 물론 우리 형법에는 고문에 대한 정의규정이 없어서 고문죄로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그렇다고 있었던 고문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이런 이유로 국가인권위원회 또한 이례적으로 고문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쓴 것으로 생각된다. 서장의 변명도 궁색하다. 외부의 문제제기로 독이 오른 몇 백 명과 마주서있는 상황에서 터져 나온 불만을 자연스러운 의견개진이라고 하기엔 설득력이 없다. 일련의 모습들은 인권교육만으로 적당히 넘어가려는 경찰에게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물론 인권교육은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강요된 반성이거나 무마를 위한 일회성 인권교육은 답이 될 수 없다. 경찰로 입직하는 과정에서부터 입직 이후 보수교육에 지속적으로 인권감수성을 향상할 수 있는 교육내용이 반영되어야 한다. 경찰관 직무규칙에 ‘경찰관서의 장’으로 명시되어 있는 인권교육의 의무를 경찰법에 ‘경찰청장’으로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양천서 사건 이후 각 서별로 이루어지는 일회성 인권교육은 절대 해답이 아니다. 또 내부의 자정 노력, 내부의 징계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경찰청장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경찰의 특성상 내부에서의 무마도 얼마든지 가능한 조직이다. 외부에서의 감시와 견제가 가능하도록 구조화해야 한다. 경찰위원회를 활성화해 견제의 기능을 강화하고, 경찰옴부즈만, 경찰비리민원조사기구 등 감시와 통제기구를 둘 필요도 있다. 자치경찰제의 전면도입으로 힘을 분산시키는 것도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고문방지국가예방기구’의 도입도 검토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이 1995년에 가입한 ‘고문방지협약’에는 어떠한 유보조항도 달지 않았지만, 국가예방기구의 설립과 고문방지소위원회의 현장방문권을 명시하고 있는 ‘고문방지협약 선택의정서’는 아직까지도 비준하지 않은 상태다. 고문이 현존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글로벌스탠다드’를 주장하는 현 정부의 지향을 고려한다면 선택의정서의 비준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것이 경찰이건 검찰이건 교정시설이건 우리사회에서 고문을 완전히 근절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가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고문경찰’의 악몽을 재현한 경찰을 두고 경찰 스스로의 반성과 성찰만 요구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이제는 시민들이 나서서 경찰의 문제를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
‘자살방지용 철망’으로 재소자들의 자살을 막을 수 없다! -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자살방지용 철망’으로 재소자들의 자살을 막을 수 없다!
전국 구금시설에서 ‘자살 방지용 철망’ 공사가 한창이다. 법무부(교정본부)가 지난 4월 19일 훈령을 통해 7월 말까지 완료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감옥에 갇혀 있는 재소자들은 이런 상황에 대해 불만이 있어도 감히 말할 수 없다. 몇 몇 양심수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국가보안법 ‘일심회 사건’으로 구속돼 4년 째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손정목, 장민호, 박경식 씨가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실로 보내온 편지에 따르면 “거실 내부가 어두워져서 대낮에도 인공조명에 의존하지 않으면 책을 읽을 수가 없”고 “통풍 조건이 나빠져.......열대야 현상이 없는 6월임에도 잠들기 힘든 밤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그나마 작은 위안이었던 쇠창살 너머 푸른 하늘이 이젠 촘촘한 철망에 가리어 회색 빛 하늘로 바뀌어버렸다”고 하니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교정본부는 인권침해에 따른 재소자들의 불만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 무지막지한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7월 15일, 구속노동자후원회와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전해투 등 사회단체 활동가들이 문제를 제기한 양심수 가족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법무부를 찾아갔다. 교정본부에 있는 사무관 한 명과 계장 한 명이 면담을 하기 위해 나왔다. 그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아무런 문제가 없는 데 괜히 생트집을 잡고 있다’는 듯 못마땅해 했다. 그러면서 ‘교도소 자살사고가 심각하다’, ‘재소자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건 우리의 의무다’, ‘생명권 보장은 다른 어떤 인권보다 우선해야 하지 않느냐’며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구금시설 재소자들의 자살률 증가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2006년 법무연수원 자료에 따르면 수형자 10만 명당 자살률이 30.5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를 차지한다. 법무부 통계를 보더라도 2008년 7월까지 4년여 동안 구금시설에서 187명이 사망했는데, 이 가운데 113명이 병으로 사망했고, 74명이 자살을 했다. 지난 해 11월 21일 ‘연쇄살인사건’으로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사형수 정남규 씨, 대전교도소 김 모 씨가 잇달아 자살하면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법무부는 외부에 연구용역까지 줘가며 ‘자살방지대책’을 강구했는데, 그 결과물이 ‘자살방지용 철망’ 설치다. 구금시설 자살자의 “55%(40명)가 조사·징벌 거실 및 독거실에 수용돼 있었고, 주로 옷이나 수건 등을 변조하여 만든 끈을 철격자 등에 거는 방법으로 자살했다”는 분석결과에 따라 창문 뒤에 설치돼 있는 쇠창살(철격자)에 손이 닿지 않도록 막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얼마 전 교정본부에서 철망 공사의 주무를 맡고 있는 담당계장과 통화한 적이 있었다. 그는 여름이라 모기와 해충이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 방충창을 설치하는 것일 뿐이라고 했고 재질이 스테인레스라 시야를 가리지도 않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교도소를 방문해서 안에 있는 재소자들에게 물어보니, 사회에서 쓰는 일반 방충망보다 더욱 촘촘해서 많이 갑갑하다고 했다. 특히 독거실 창문은 화장실 쪽으로 나 있는 것 하나밖에 없는데 이렇게 막아 버리면 흡사 닭장에 있는 느낌이 들 것이다. 교정본부 직원들은 우리에게 볼멘소리로 ‘반대만 하지 말고, 교도소에서 자살을 막을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하라’고 한다. 어떤 방법이 효과적인지는 저들 역시 잘 알고 있다. 재소자들이 인간답게 생활할 수 있는 교도소 환경을 만들어 주고, 세심한 관리를 통해 재소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일, 교정행정 본연의 역할을 잘하면 된다. 그런데도 하지 않을 뿐이다. ‘현실성’이 없고 ‘예산이 부족하다’는 핑계를 대면서....... ‘자살방지용 철망’ 설치를 비롯한 법무부의 자살방지대책은 대단히 위선적이다. 철망 하나 설치하는데 12~13만원의 예산이 소요된다고 한다. 전국으로 합산하면 수십억 원에 이른다. 법무부는 5월 1일부터 재소자들이 외부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때 누구나 적용받아 왔던 건강보험료와 치료비 지원대상과 예산을 대폭 줄였다. 구금시설 재소자들은 법률상 국민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못한다. 구금시설 내부의 의사 수도 턱없이 부족(재소자 565명당 1명-2009년 1월 현재)하고, 변변한 의료시설, 약품조차 구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재소자들은 몸이 많이 아파도 외부병원에서 진료를 받기가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려웠다. 그러다 병으로 사망하는 재소자들이 급격히 늘어나자 법무부는 2006년부터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예탁금을 내는 조건으로 보험료와 진료비를 부담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올 들어 예산삭감을 이유로 지원 대상을 대폭 줄여버렸다. 이렇게 되면 돈 없는 재소자들 같은 경우, 정말 아픈데도 병원 문턱조차 못 가보고 사망할 수도 있다. 구금시설의 자살률 증가는 이런 환경 요인에서부터 비롯된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은 우울증이다. 구금시설 재소자들은 우울증에 걸릴 확률도 높고, 실제 우울증에 걸린 환자들도 상당수 있다. 이들은 감옥에 가둘 게 아니라 의료기관에 보내 치료를 받게 해야 하는데,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 ‘UN 피구금자 최저기준규칙’에 따르면 구금시설마다 재소자들의 심리치료를 담당할 수 있는 정신과 의사들이 상주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자살방지용 철망’ 등 별 효과도 없는 대책에 수십억 원의 예산을 쏟아 부을 게 아니라 재소자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하면서 의료권 보장과 더불어 구금시설 환경을 대폭 개선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시민들의 비판과 강력한 요구가 뒤따라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