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권선언 60주년과 재소자 인권의 의미

 지난 2008년은 1948년 12월 10일 파리에서 반포된 세계인권선언이 60돌 환갑을 맞는 해였다. 세계인권선언은 ‘우리 시대 인류양심의 최고의 표현’이자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약속’으로 불린다.

 ‘아름다운 약속’의 핵심은 사람이면 누구든지 인권, 즉 존엄성을 누리며 사람답게 살 권리를 존중, 보호, 증진하겠다는 것. 이러한 약속은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재소자도 비켜가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인권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은 약자와 소수자에게 보장하는 것이다. 약자와 소수자한테도 인권이 보장될 때 강자와 다수자가 인권을 누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다.   

 재소자로 통칭되는 교정시설의 수용자들은 사회적, 경제적 약자를 넘어 정신적, 도덕적 약자라는 점에서 가장 대표적인 약자집단이다. 재소자의 인권상황은 그래서 어느 사회에서나 인권보장의 실질적 척도로 기능한다.   


재소자집단의 프로필

 우리나라의 재소자 수는 08년 9월 현재 47,408명이다. 이중 31,842명은 기결수로 선고형량을 복역 중이고 15,503명은 미결수로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나머지 63명은 감호처분대상이다.   

 기결수는 살인범 3,957명, 강도범 4,121명, 조직폭력범 1,838명, 폭행상해범 988명, 사기횡령범 3,545명, 절도범 5,393명 등이다. 기결수 중에는 누범(16,177명)이 초범보다 많다.

 연령별로는 40대(9,846명)가 가장 많고 30대(9,350명), 20대(6,384명), 50대(4,378명) 순이다. 60대 이상도 1,269명이나 되고 16세 이상 20세 미만도 251명이다.      

 그 밖의 재소자 통계, 예컨대 학력별 통계라든가 형기별 통계 등은 공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재소자의 대부분이 빈곤층 출신으로 학력이 일반시민과 비교해서 현저히 낮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교육권, 특히 평생교육을 받을 권리

 사람은 누구나 교육을 받을 권리, 특히 문해(literacy)교육 등 초등교육을 받을 권리를 갖는다. 우리나라처럼 선진국 초입에 서 있는 지식경제사회에선 중등교육도 인권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인권은 포기하거나 양도할 수 없기 때문에 초중등학교의 중도탈락자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언제든지 초중등 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다.

 더욱이 지식주기가 짧아지는 시대상황에서 교육권은 불가피하게 평생교육을 받을 권리로 바뀐다. 우리 헌법도 국가는 평생교육을 진흥해야 한다고 규정하여 국가에 평생교육 진흥의무를 부과한다.

 우리나라에서 2005년에 발생한 초중고교과정 탈락자 수는 초등학교 중퇴자 16,793명을 포함해서 총 55,525명에 달했다. 이들 중 43%(23,645명)가 학업에 복귀하지 않았다.

 미복귀 탈락자 중 상당수는 교정시설로 흘러들어온다. 학업중퇴 수용자는 수용기간 중 중단됐던 초중등교육을 계속 제공받을 수 있어야 한다.    


재소자교육의 모습

 교정시설에선 다양한 학과교육과 직업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학과교육으로는 수용자의 학력수준에 따라 초중고교 검정고시 교육, 방송통신대학 교육, 독학학위 취득교육, 전문대학 위탁교육이 실시된다.  

 문자해독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가장 기초적인 문해(literacy)교육이 제공되며 소년수용자에게는 방송통신고교 교육과정이 제공된다. 정보화 교육과 외국어 교육도 가능하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형태로 직업교육훈련이 실시되며 출소예정자에 대해서는 특별히 창업교육 기타 출소준비교육이 제공된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 교정시설은 교육훈련 측면에서 구색을 갖춘 것 같지만 실질은 딴판이다.  

 아프지 않은 이상 재소자는 주간에는 거실 밖에서 작업을 하든가 교육을 받는 것이 원칙이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단적인 예로 2007년 12월 현재 직업훈련 중인 수용자는 모두 3,279명에 지나지 않는다.

 작업시설과 교육프로그램이 부족한 탓에 현재 재소자 중 과반수는 여러 명이 함께 쓰는 거실을 하루 종일 지킨다. 이런 상황에서 교정시설이 범죄학교로 둔갑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할 것이다.


인문학적 평생교육의 중요성

 교정당국에서는 초중등과정을 이수하지 못한 재소자들에게는 최우선적으로 계속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다만, 성인 수용자에게 계속교육을 제공하는 특성상 교육내용과 방법에서 많은 창의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2007년 이래 인권연대가 교도소 내에서 인문학 교육을 시도하여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일방적인 인성교육이나 실용적인 직업교육과 달리 자기성찰을 주된 목적으로 삼는 인문학적 교육이 처음으로 교도소 담장을 넘은 셈이다.

 여기에 참여했던 고병권의 진단에 따르면 “범죄의 기술은 삶의 기술의 부족, 즉 삶을 풍요롭게 가꿀 수 있는 기술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만약 당신이 지금과 다르게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당신은 인문학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주도적 사고역량으로서의 인문학적 교육을 제공한다는 것은 대부분 암기대상으로 전락하는 철학사강의를 개설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필요한 것은 정답이 없는 질문을 던져서 스스로 깨우침을 얻는 자기성찰의 길로 초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쓸모 있는 직업교육의 중요성

 중범죄를 저지른 장기 수용자들은 갖가지 자격증을 취득한 후 출소해도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과차별이 심한데다 쓸모없는 기술교육을 받은 탓이다.

 출소-실업-재범-재입소의 회전문식 인생경로를 방지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노동시장에서 쓸모 있는 직업교육훈련이다. 효과적인 직업훈련체계를 갖추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다.

 재범의 위험을 줄이려면 교정행정의 초점을 직업교육훈련에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교도소별로 효과적인 선택과 집중을 함으로써 교정체계 전체로서는 매우 다양하고 수준 높은 직업교육이 제공되도록 기본방향을 잡으면 될 것이다.    


맺음말

 재소자들은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에서 어려서부터 폭력에 노출되며 사람대접을 제대로 못 받고 자란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정, 동네, 학교, 법집행기관 중 어느 한군데서도 인격적 대접을 경험하지 못한 탓에 반사회적 품행으로 기운 경우가 많다.    

 국가의 교정시설이 단순히 자유가 제약된 상황에서 죄 값을 치르게 하는 형집행 기능을 넘어서 진정으로 수용자의 교정교화를 원한다면 수용자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인권피해자’로서의 또 다른 자아를 끄집어내서 치유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무 생각 없이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관성적 삶의 모습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인문학적 교육이다. 일자리로 통하는 실용적인 직업교육과 자기성찰로 이끄는 인문학적 교육을 평생교육의 관점에서 보편적으로 제공할 때 비로소 교정시설은 범죄학교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곽노현 위원은 현재 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 교수로 재직 중에 있습니다.


 성서(요한복음 5,1-18)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예루살렘에 있는 ‘베짜타’라는 연못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따금씩 물이 휘도는 일이 있곤 했는데 그 때 제일 먼저 그 물에 몸을 담그면 어떤 병도 다 낫게 된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연못 주변에는 물이 휘도는 순간 먼저 뛰어들 태세로 온갖 병자들이 모여 있었다. 거기에는 삼십팔 년이나 병을 앓아온 중증 환자도 물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리며 자리를 깔고 누워 있었다.

 내내 변방에서만 활동하던 예수가 어느 날 예루살렘이라는 이스라엘의 중심지로 올라가게 되었다. 거기서 그가 목격한 현장이 바로 저 베짜타 못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경쟁의 현장이었다. 베짜타 못가는 이른바 선착순의 논리에 따라 일등만 구원되는 곳.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남을 밟아야 하는 곳, 저마다 남의 어깨를 딛고 일등을 향해 치닫지만 결국 자신은 물론 훨씬 더 많은 이들에게 더 큰 아픔과 상처를 남겨줄 수밖에 없는 그런 곳이었다. 그곳에 삼십팔 년 된 병자도 언제일지 모를 그 막연한 일등을 꿈꾸며 자리를 깔고 누워있었다. 하지만 늘 경쟁에서 밀렸다. 처절한 경쟁 사회에서 소외된 현대인의 자화상이라고나 할까.

 그 처절한 현장이 예수의 눈에 들어왔다. 특히 그 오래 된 병자를 보고 예수가 물었다: “낫기를 원하느냐?” 병자가 답한다: “선생님, 그렇지만 저에겐 물이 움직여도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 가는 동안에 딴 사람이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병자는 남이 먼저 연못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자신의 병이 낫지 못한다 생각했다. 자신이 먼저 들어간다면 자신 때문에 남은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당연히 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일등을 지향하는 사회에서의 성공이란 누군가의 희생과 탈락을 근거로 해서만 성립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는 그를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정말 예수다운 방식으로 그를 이렇게 구원한다: “일어나 네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어느 새 병이 나아서 요를 걷어들고 걸어갔다.”

 일어나 요를 들고 걸어간다는 것은 그가 치유되었다는 증거이자, 자신을 격리시켰던 사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공개적 증거였다. 다소 비약처럼 느껴지는 이 간결한 대화와 치유의 사건이 말하고 있는 것은 진정한 치유란 경쟁사회에서 일등하는 방식이 아닌, 경쟁사회를 벗어나게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다른 이를 소외시키거나 낙오시키지 않고서 누군가를 치유하고 살리는 행위, 그것이 예수가 행했던 방식인 것이다. 물론 예수는 성서에 따르면 병을 고쳐주고도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성인은 “공을 이루고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功成而不居)는 노자의 가르침과 통한다고나 할까. 이 예수는 누군가를 반드시 죄인으로 만들고 마는, 더 많은 이들을 낙오시키고는 소수만이 의인이 되어 하느님 나라를 독점하는, 그러한 사회적 구조를 거부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예수가 병자를 치유한 날이 ‘안식일’(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이었다. 오늘날도 이스라엘에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지만, 고대 이스라엘에서 안식일은, 율법이 정하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밀가루 반죽과 설거지는 물론 글쓰기 같은 것도 거의 할 수 없는 날이었다. 노동을 피하고 그저 쉬는 날이었다. 물론 예수도 그러한 율법적 문화 안에서 태어나 살아간 이로서, 당연히 안식일을 지키고자 했다. 하지만 문자화된 법적 규정 그대로가 아닌, 법의 ‘정신’을 지키고 실현하는 방식으로, 진정한 안식을 추구했다. 가령 예수가 보건대 병자에게 안식은 치유이고 굶주리는 이에게 안식은 한 끼 식사였다. 그러니 병자 치유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굶는 이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안식일이라도 기꺼이 노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예수의 정신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안식일에 벌어진 그 치유 사건을 두고 당시 지도자들은 예수가 안식일 법을 어겼다며 비판하고 박해하기 시작했다. 예수를 사회적 관례와 질서의 교란자로 간주하고서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고자 했다. 이에 대해 성서는 이렇게 전한다: “이 때부터 유다인들은 예수가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하신다 하여 예수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예수를 죽이려는 마음을 더욱 굳혔다.”

 예수 시대 지도자들에게는 이상하게도 병자가 치유되는 살림과 생명의 사건보다는 예수가 규정과 관례를 어겼다는 사실만 크게 보였다. 고통스러운 병도 앓지 않고 굶을 일도 없던 풍요로운 사람들이었던 탓인지, 아픈 자, 굶는 자의 고통은 안중에 그다지 없었다. 관례적 규정에 어긋나는 행동은 그러한 규정을 관리하는 자신들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예수가 이른 나이에 십자가라는 처절한 사형 틀에서 죽게 된 것은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몇 일전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일제고사’(학업성취도평가)가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학생들의 학력 수준을 파악하고 각종 문제점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전국의 학교와 학생들을 서열화할 뿐더러 일등을 향한 무한경쟁 체제를 강화시키는 부작용이 만만치 않은 행사이기도 했다. 학업 성취도가 떨어진 학교나 학생을 지원해서 학교들 간, 학생들 간 격차를 줄이는 정책을 시행하기 위한 자료를 얻기 위해서라지만, 그렇지 않아도 뜨거운 경쟁적 일등 지상주의에 다시 불을 붙여 더 많은 심리적 낙오자들을 만들게 될 가능성도 못지않게 큰일인 것도 분명했다. 외고나 자사고 같은 곳에 대한 지원이 일반고보다 세배 이상이나 많다는 며칠 전 뉴스 보도대로라면, 학교 간 격차를 해소하겠다는 계획과 의지도 의심스럽게 느껴지는 상황이다.  

 또 다른 문제가 있다면 일제고사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서 대안적 체험학습이라도 떠날라치면 그 학습을 주도한 교사에 대한 징계도 대번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기독교 정신대로 세워졌다는 학교들도 일제고사를 거부하고 체험학습을 떠나는 교사를 징계하기는 마찬가지이거나 때로는 더하기도 하다. 예수는 일등 지상주의를 거부했지만, 예수를 따른다는 기독교 학교도 일등 지상주의로 내몰기는 매한가지이거나 상대적으로 더 한 경우가 많다. 일착으로 연못에 들어간 날랜 행위만이 하느님의 축복인 냥 가르치기가 다반사이다. 만일 그러한 경쟁 지상주의에 반대했던 예수처럼 행동하면 죽거나 떨려나갈 수밖에 없기는 여전한 상황인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평등 사회를 꿈꾸었던 예수의 선배 요한(루가복음 3,5-6)도 여전히 제 명에 못 살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당시 헤로데 왕의 실정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참수당한 요한을 성인으로 모시고 그 말씀을 따른다면서도 정작 교회 안에서조차 그 요한의 정신은 실종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요한이 오늘 우리 시대에 다시 태어난다면 여러 걸음 양보해 참수는 아니더라도 온갖 징계와 보복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예수와 요한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신앙의 이름으로 사형시켰듯이, 오늘 교회도 신앙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여전히 무수한 죄인을 양산해 놓는다. 요한의 말을 기억하고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그리스도교인 아니던가. 그런데 어찌 예수를 따른다면서 경쟁 사회에서의 첫째를 하느님 앞에서의 첫째와 동일시하고 학교의 말째를 하느님 나라에서의 말째로 만들어놓을 수 있겠는가. 무수한 죄인들, 셀 수 없는 낙오자를 양산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한숨만 나온다. 이것저것 양보한다 해도, 학자적, 교육적 양심대로 한 일을 두고 칭찬까지는 아니더라도 정말이지 규정과 관례 운운하며 징계하고 정죄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종교문화연구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유엔 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 프랭크 라 뤼(Frank La Rue, 이하 특별보고관)는 지난 10월 13~14일 동안 한국에서 열린 “동아시아 지역의 사이버 표현의 자유 현황과 과제”의 국제심포지엄과 “한국의 표현의 자유 현황과 유엔특별절차 활용방안” 국제 워크샵 참석차 한국을 방문하였다. 유엔 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제도)는 유엔인권메커니즘 중 하나로써 표현의 자유에 관련된 인권침해사항이 발생하였을 때 피해 당사자 또는 피해 당사자와 연관된 개인이나 단체에서 특별보고관에게 관련 사항을 알리고 이에 대해서 개입을 요청하면, 특별보고관은 그 사항에 대해서 당사국에 관련 사항을 질의하고, 필요시 당사국에 방문하여 조사방문을 수행할 수도 있고, 이에 대해서 유엔차원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제도이다.  

 하지만 이번 유엔 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의 한국 방문은 한국의 표현의 자유 침해사실에 대한 보고관으로서의 조사방문이 아니라, 아시아 인권단체인 포럼-아시아와 민변을 포함한 인권시민단체들이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한국의 표현의 자유 현황과 앞으로의 과제를 논의하는 목적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표현의 자유 사례에 대해서 언급을 하거나 한국 정부에 대한 어떠한 코멘트도 할 수 없는 순수 학술차원의 방문이었다는 점에서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런데, 10월 13일자 동아일보에는 흥미로운 기사가 떴다.

 "4박5일간 진보단체들만 접촉, 일정 안맞아 정부면담 거절, "한국 인권상황 왜곡전달" 우려" 

 그리고 이어 조선일보에서는 이 기사를 받아서 

 "좌파단체들만 면담… 한국 인권상황 왜곡 우려"

(역시 조선이 한수 위, 동아는 진보인데 그대로 받아 베낀 조선은 헤드라인에 좌파, 이 미세한 차이가 어쩌면 조선과 동아의 차이일수도 ^^)를 내보냈다. 내용은 간단하다. 특별보고관이 한국 진보단체만 만나고, 법무부 면담을 거절했고, 그러니까 진보이야기만 들으면 편향될 수 있다라는 이야기이다.

 어처구니없는 보도와 관련해 주최측은 정정보도를 요청하는 보도자료를 배포하였으나, 다음날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서

 "유엔 표현자유 특별報告官과 자유 대한민국의 명예" 를 통해서 "좌파 이념에 입각해 민주질서를 흔드는 불법·폭력 집회를 주도하거나 옹호한 사람들의 얘기만 듣고 대한민국의 인권상황을 세계에 전하는 보고서를 작성한다면 우리는 유엔 특별보고관으로서 자격을 인정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특별보고관의 자격도 인정할 수 없고, 이 초청을 추진한 세력은 한국국민의 명예를 실추시킨 반국민집단이라고 낙인을 찍었다.

 하지만 프랭크 라 뤼 보고관이 만난 개인과 단체는 소위 동아, 조선이 찍고 싶은 진보, 좌파단체 뿐만 아니라 외교통상부 관계자와 국가인권위 관계자들, 고려대학교 로스쿨 관계자들도 있었다. 아주 기본적인 사실관계도 제대로 파악이 안 된 기사이기에 좀 더 멋진 논리로 반박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다른 이유를 찾자면, 설령 고려대학교와 외교통상부, 국가인권위 담당자들을 만나지 않았다고하여도 이 심포지엄이 특별보고관 뿐만 아니라,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그리고 아시아 인권단체인 포럼아시아가 추진했던 행사임에도 어떻게든 정치적으로 자신들의 신문사와 반대편에 있는 단체들의 행사를 진보 또는 좌파로 맞추고 싶은 그들의 비합리적, 비상식적 과도한 의미부여에 있다는 것이다. 참가자들과 초청자는 조선과 동아가 믿고 싶어 하는 단체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법무부의 태도도 정말 우습다. 법무부는 이 사실이 언론에 의해 조금 이슈화되자 보도자료를 통해 법무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듯 빠져나가려 했다. 보도자료의 내용을 보면  “1개월 이상의 지속적 면담 요청에도 면담 일정 조정 무산” 또한 “'09년 10월 7일 특별보고관을 법무부 차원에서 면담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고 판단, 외교통상부에 관련 사실을 전달함”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외교통상부에서는 덜컥 특별보고관과 15일에 면담을 하였다. 이건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 이는 법무부가 일정조정하다가 특별보고관측과의 면담이 무산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말 못할 또는 말 할 필요도 없는 이유 때문에 일정이 안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왜 동아와 조선에게는 특별보고관이 정부 측은 안 만나고 진보, 좌파단체만 만나려고 했다는 것으로 이해가 되는지 도통 모르겠다.

 사실 그 특별보고관이 누구를 만날지는 특별보고관이 결정을 한다. 특별보고관이 이 행사를 주최하는 주최측의 꼭두각시가 아닌 이상 법무부의 아무개를 만날지 외교부의 누구를 만날지는 자신이 알아서 결정할 것이고, 주변에서 그 과정을 지켜보았던 실무자의 입장에서는 특별보고관 한국 방문일정 조율 중에 특별보고관이 가능하다고 제시한 날짜에 법무부측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외교부는 가능하다고 했기에 면담이 되었던 것이고 이는 그 자체가 특별보고관이 동아와 조선이 말하는 진보좌파단체만 만나려는 의도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건 기본적인 사실관계일텐데, 법무부는 보도자료까지 내면서 자신들은 노력했지만 특별보고관이 만나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뉘앙스가 느껴진다.

 전체행사의 코디 중 한 명으로 활동했던 개인이 지켜본 프랑크 라 뤼 특별보고관은 한국 방문동안 거의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했고, 동아와 조선이 걱정하는 좌파 빨갱이만 만난 게 아니고, 외교통상부, 국가인권위, 고려대학교, 심포지엄에 참석한 정부담당자, 심포지엄과 워크샵에 참석한 수많은 개인, 학자, 엔지오활동가, 정부관계자, 국경없는 기자회 관계자, 국제앰네스티, 포럼아시아, 심지어 동향인 과테말라 유학생도 만났다.  

신종플루의 확산에 대한 우려로 학교행사가 취소되고, 학급단위로 체험학습을 하기로 결정된 순간 선생님은 지난 여름 가족들과 함께 봤던 연극 ‘완득이’를 떠올렸단다. 지방공연 중이라는 극단 측과 협의 끝에 결국 우리 학교 학생들만을 위한 공연을 약속받았고, 너희들의 의견은 한 마디도 물어보지도 않은 채, 덜컥 예약까지 마쳐 버렸다. 놀이공원 타령을 하며 입이 한 뼘이나 나와 있던 너희들의 불만을 뒤로 한 채 우리는 이렇게 대학로에 입성하게 되었더랬지.

 공연 예약을 해놓고도 걱정이 많았단다. 대부분 유복한 집안에서 왕자님 공주님으로 자라온 너희들이 협소하고 어두침침한 지하의 소극장 연극을 잘 감상할 수 있을까? 너희와는 많이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우리 사회 약자들의 삶을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이런 염려를 뒤집어 보면, 사실 그것이 바로 선생님이 이 연극관람을 굳이 밀어붙인 이유였단다.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가르칠 수 없는 것들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거의 부족한 것 없이 살아가는 천진한 너희들, ‘글로벌 시대’에 뒤지지 않기 위해 세계지도를 가슴에 품고 교과공부 외에도 텝스와 토플을 공부하느라 주변을 돌아 볼 여유조차 없는 너희들에게 도심 한 구석 가난한 달동네 옥탑방에 사는 우리 이웃의 삶을 보여 주고 싶었다.

 지하철에서 단속원을 피해가며 천 원짜리 스타킹을 파는 난쟁이 아버지와, 가난한 외국인에게 인심 사나운 한국 땅에서 ‘그 짝 사람’이라는 멸시를 받으며 식당 종업원으로 살아가는 베트남인 엄마의 일상을 통해 장애인, 이주노동자들의 팍팍한 삶과 우리 사회 인권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고 싶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움츠리고 있었던 주인공이 주변 인물들과 좌충우돌하며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해 가는 모습은, 상황은 다르겠지만 가족 또는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갈등과 아픔(성장통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을 겪고 있을 너희들에게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완득이는 친구들의 놀림감인 난쟁이 아버지를 자신이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고, 또 ‘쪽팔리고 창피해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베트남 엄마의 존재도 결국은 받아들이게 된다. 킥복싱에서도 3전 3패를 당하지만, ‘아유, 쪽팔려!’하고는 금세 다시 일어선다. 완득이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감동은 자신을 움츠려들게 했던 비루한 현실과 패배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 실망하고 아파하지만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건강함을 지녔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당당하고 세상에 당당한 모습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혼자 커가는 사람은 없단다. 힘든 현실 속에서도 상처 난 가슴을 보듬어 주고 온정을 나누어 주는 가족과 친구, 이웃이 있기에 우리는 삶을 지탱하고, 꿈도 가꿀 수 있는 것이란 걸 보여 주고 싶었다.


 완득이의 긍정적인 변화와 성장은, 조폭선생처럼 굴지만 가슴가득 완득이를 사랑하는 담임 ‘똥주’와 베트남 엄마, 난쟁이 아버지의 진정어린 노력, 또 여자친구 윤하의 관심과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 세상이 그래도 살만한 것은 ‘똥주’선생님처럼 자신의 안락과 풍요로운 삶은 접어둔 채, 어려운 이웃의 상처를 보듬어 주는 ‘꽃보다 아름다운’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란다.

 끝으로, 어찌 보면 초라할 수도 있는 소극장에서 혼신의 연기로 우리를 웃기고 울리는 배우들의 뜨거운 열정을 보여 주고 싶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있단다. 물질적인 안락함과 풍요와는 상관없이, 각기 다른 자신들의 ‘꿈’을 가꾸기 위해 땀을 흘리면서 행복을 만들어 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나의 이런 바람이 과한 욕심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것들 중 하나만이라도 들어맞았다면 선생님은 대만족이란다.

  막상 연극이 시작되면서 너희들은 놀라울 정도로 빨려 들어갔지. 열정적인 배우들의

연기 덕분이었겠지만, 관람하는 내내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암전 때마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모습을 보며 선생님도 많이 행복했다. 연극이 끝나고, 재잘거리며 극장을 나오는 너희들 얼굴마다에 피어오른 환한 미소는 가을햇살보다 더 눈부시고 예뻤단다. 애초에 가졌던 걱정들이 기우였음을 확인하면서 너희들이 가진 가능성을 제대로 보지 못한 나의 편협함을 잠시 반성해 본다. 그리고 이런 기회를 좀 더 가지게 된다면 학업에 대한 중압감에 짓눌려 있는 너희들의 몸과 마음도 크게 기지개를 켤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사랑하는 나의 제자들아!

 우리가 대학로 소극장에서 만났던 완득이를 세상 속에서 다시 만나게 되거든, 친구 윤하처럼 믿어주고 좋아해 줄 수 있겠지? 그리고 너희가 가는 길에 무수히 맞닥뜨리게 될 장애물 앞에서 완득이처럼 잠시 동안 무릎이 꺾일지언정 영영 엎어지지는 않을 거지? 금세 털고 일어날 거지? 누가 뭐래도 너희 스스로를 사랑하며 당당할 수 있겠지? 주변의 이웃과 벗들의 시린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속 깊은 어른으로 자라줄 거지? 

 

저널리즘의 궁형(안수찬 한겨레21 기자) 

안수찬/ 한겨레21 기자

 기자가 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권력자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본다. 예외가 없지 않지만 드물다. 좋은 기자도 그만큼 희귀하다. 언론사에 들어가면, 첫 6개월을 ‘수습 기자’로 지낸다. 경찰서 3~4곳을 맡아 기자 훈련을 시작한다. 갓 대학을 졸업한 20대 중후반의 신참 기자는 경찰서장과 ‘대당’한다. 수습 기자의 첫 임무는 서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는 일이라는 우스개가 이 바닥에 있다. 서장을 당당히 대할 수 있어야 ‘출입처’인 경찰서를 장악할 수 있다는 믿음이 기자들에겐 있다.

 ‘원론적으로’ 경찰 취재 경험은 좋은 기자의 자양분이 된다. 힘 있는 자는 경찰서에 가지 않는다. 힘없는 자들이 피해자 또는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 앞에 줄지어 선다. 10여 년 전 겨울, 수습 기자가 되어 처음 경찰서 형사과를 찾은 날을 잊을 수 없다. 중년 남자가 팬티 차림으로 유치장 창살을 오르고 있었다. 그는 만취 상태였다. 형사인가 싶어 말을 건 양복 신사는 알고 보니 사기 피의자였고, 이런 자가 조폭이구나 싶은 험상궂은 남자가 실은 경찰이었다. 퇴학당한 중학생들이 공사장에서 돌려 마신 본드 냄새, 그러잖아도 팍팍한 직장생활의 우울한 퇴근길에 느닷없이 봉변을 당한 샐러리맨의 피냄새, 이 사건에 관해 할 말이 무지하게 많지만 배운 게 없어 두서없이 머리만 조아리는 퇴학생 보호자들의 술 냄새. 그 모든 것이 뒤섞인 비릿하고 습습한 공기가 경찰서 전체에 스멀거리고 있었다.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경찰서는 악다구니의 집합소다. 서민과 권력이 서로 갈등하는 최전선이다. 그런 경찰 취재를 통해 수습 기자는 대학의 온실에서 서민의 뻘밭으로 삶의 근거지를 옮기게 된다. 경찰이 ‘법과 질서’의 눈으로 ‘사건’을 다룰 때, 기자는 ‘인간과 정의’의 눈으로 ‘사람’을 만난다. 거기서 기사를 길어 올린다. 원론적으로는 그렇다. 실제 진행되는 일은 사뭇 다르다. 사람을 만나려면 사건을 취급하는 경찰과 친해져야 한다. 어울리는 일이 잦아진다. 피의자의 처지보다 경찰의 고충에 공명하는 일이 많아진다. 서장·과장 등 간부들이 기자에게 먼저 다가오기도 한다. 그들은 승진에 목을 매고 있고, 기자들이 함부로 휘두르는 펜 끝에 식구들의 생계가 끝장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은 ‘경찰 간부의 눈으로’ 세상 보는 법을 기자들에게 전염시킨다. 이 과정은 이후 기자 생활 내내 반복된다. 검찰, 법원, 행정부, 국회, 청와대 등에서 거듭 된다.

 언론의 ‘출입처 시스템’은 감시견 역할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원론적으로는 그렇다.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권력자는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시민사회의 대표를 ‘자임’한 기자는 권력 기관에 스스로를 ‘파견’시킨다. 시민의 눈으로 권력의 부패와 전횡을 감시한다. 기사로 폭로하여 경종을 울린다. 결과적으로 ‘출입처 시스템’은 특종 보도에도 도움이 된다. 권력기관은 고급 정보가 오가는 길목이다. 비밀스런 문서와 음험한 이야기들이 횡행한다. 문서를 건네줄 내부 제보자와 친밀해지기만 한다면, 특종을 건져 올릴 수 있다. 이 방식은 기자들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어느 기자가 첫 기사를 썼는지, 시민들은 아무 상관이 없다. 오직 기자 사회의 평판과 관련이 있다. 묻혀진 진실을 캐낸다는 특종의 ‘원론적’ 의미는 출입처 경쟁에서 이겨 직업적 성공을 거두려는 기자의 ‘실용적’ 가치로 종종 격하된다.

 언론의 존재이유를 망각하지 않고, 날 서린 비판의 눈으로 권력자들을 감시하는 기자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열의 아홉은 ‘감시견’ 대신 ‘반려견’이 되어 간다. 드물게 비판기사를 쓴다 해도 권력자들의 언어로 보도한다. 그들이 쓰는 기사에서 세상은 권력자, 명망가, 권위자, 유력자의 각축장이다. 여기에 이데올로기는 없다. 진보건 보수건 ‘파워 게임’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면, 결정적 부패 보도조차 “그 놈이 그 놈”이라 생각하는 필부들의 상식에 지푸라기 하나 더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기자의 뿌리에 해당하는 서민들이 감동하거나 분노하지 않아도 큰 상관은 없다. 기자는 다른 방식으로 생존하는 법을 터득한다. 스스로 파워 게임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신문이 대통령을 만들었던가?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대통령을 만든다”고 생각하는 기자들이 별처럼 많았다는 이야기다.


출입처 시스템이 파워 게임의 링으로 변질되어 가는 동안, 그 링에 오르지도 못한 언론인 집단이 있었다. PD들이다. 공중파 방송의 ‘시사교양국’에 둥지를 튼 이들은 ‘교양’에서 ‘시사’로 진화를 거듭했으나, 끝내 출입처 시스템에 편입하지는 못했다. 같은 방송국의 청와대 출입 기자들이 매일처럼 고위 관료와 얼굴을 맞댈 때, 이들은 인터뷰 요청서를 수없이 보내다 마침내 거절당하는 일을 밥 먹듯이 겪었다. 대신 PD들은 골목과 거리로 떠밀렸다. 고위 당국자가 은밀히 전하는 문서 한 장이면 해결될 일을 그들은 골목의 서민과 거리의 군중을 수없이 만나 확인했다. 해고자 대표의 한 마디와 노동부 장관의 한 마디를 평등하게 다루는 ‘객관주의 저널리즘’ 대신 해고자들의 사연을 일일이 파고들어 소개하는 ‘뉴 저널리즘’을 택했다. 기자보다 성실하거나 탁월해서가 아니라, 기자와는 ‘다른 입장에서’ 세상을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그들이 권력을 만들었던가? 전혀 아니다. 대신 그들은 권력자, 명망가, 권위자, 유력자를 끊임없이 불편하게 했다. 황우석 박사가 자신의 농장에 각 언론사 기자들을 초청해 견학시킬 때, 초대받지 못한 PD들은 황 박사가 거느린 연구자와 그에게서 시술받은 환자들을 만났다. 재경부 출입 기자들이 FTA의 외국 사례를 분석한 여러 문서를 들고 우왕좌왕할 때, PD들은 FTA에 신음하는 멕시코의 서민들을 직접 만났다. MBC <PD수첩>의 탐사고발, KBS <다큐 3일>의 민생르포는 한국 언론이 빚어낸 최고의 성취였다. 그걸 PD들이 개척했으니 흔히 일러 ‘PD 저널리즘’이라 하지만, 실은 탐사 저널리즘의 본령이다.

 몰카를 쓴다고? ‘고위 소식통’을 익명인용하면서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기자들보다 낫다. 반론을 충분히 싣지 않는다고? 기계적 객관주의로 사안의 본질을 비틀어버리는 기자들보다 낫다. 이슈를 선정적으로 다룬다고? 노조원에게 전기총을 쏘는 경찰의 선정적 진압 작전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단신 처리하는 기자들보다 훨씬 낫다. 시민의 눈으로, 시민들의 이야기에 뿌리를 두고, 권력을 향해 따져 묻는 탐사·기획·심층 보도는 원래 기자들의 몫이었다. ‘반려견’이 되어버린 기자들이 그 임무를 망각했을 뿐이다.

 방송에 대한 탄압이 이들 시사교양 PD들에게 집중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초창기 KBS <다큐3일>은 찜질방에서 먹고 자는 사람들, 대리운전으로 생계를 잇는 사람들에 주목했다. 민주 정부 집권 이후에도 왜 하층민들의 삶이 여전히 고단한지 물었다. 요즘 <다큐 3일>은 한일 민간 교류 행사 따위에 주목한다. 세상은 그저 평온하다. MBC는 시사교양프로를 통폐합하라는 압력에 처했다. “거기서 거기인 프로를 왜 여러 개 만드느냐”는 핀잔을 듣고 있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거기서 거기인 3개 보수신문이 멀쩡히 발행되는 이유는 말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언론은 1분짜리 리포트의 총합이다. 캐묻지 말고 파고들지 말고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아야 선진 언론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심층탐사 PD들의 입에 재갈이 씌워지고 있다. 이미 이빨이 뽑혀 반려견이 된 기자들에겐 그 일이 강 건너 불구경 같을 것이다. 저널리즘 전체가 궁형에 처해지고 있다는 것을 여전히 모른다. 그러고도 기자 맞나.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아내가 결혼했다?

 출근을 할 때 문 앞에서 나를 배웅하는 건 이제 아내가 아니라 갓 두 돌이 된 아들 몫이다. 아들은 처음엔 가지 말라며 울기도 하고 했지만 요샌 인사를 꾸벅 한 다음 내가 집어 온 조간신문을 받아들고 엄마에게 간다. 그 틈에 얼른 현관문을 닫고 출근을 한다.

 아내가 잠에서 깨는 시간은 아들이 눈을 뜨는 시간과 거의 일치한다. 아내는 곧바로 아들을 위해 아침을 준비한다. 아들은 아내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아침을 먹는다. 내 것까지 신경을 쓰게 하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시간대가 맞질 않기도 해서 구내식당에서 아침을 먹은 지 꽤 됐다.

 아내와 나는 문자메시지를 자주 주고받는 편이다. 내용은? 절반 이상은 아들에 관한 얘기다. 퇴근 후 아내와 나누는 대화는? 역시 절반 이상은 아들이 주제다. 그 중에서도 아내는 어쩌면 꺼내는 거의 모든 얘기가 아들과 연관될 거다. 우리는 오늘 아들이 뭘 하고 놀았는지, 낮잠을 몇 시간이나 잤는지, 어떤 이쁜짓을 했는지, 뭘 얼마나 먹었는지 하며 대화를 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나 할까. 아들은 제 엄마 아빠가 가까이 붙어 있는 걸 꽤나 싫어한다. 특히 자기 전에는 그 정도가 심하다. 장난삼아 아내 옆에 꼭 붙어 있어 봤는데 아들은 고개를 처박고 울먹인다.  결국 아내 옆자리는 아들 차지가 된 지 오래다.

 갓난아기 때는 아들을 따로 재우도록 버릇을 들이려 했다. 하지만 새벽마다 일어나야 하는 게 너무 힘들어 결국 셋이서 자게 됐고 어느새 아들이 가운데 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이런 상황이 솔직히 불만스럽다. 나는 지금도 아들을 따로 재우는, 2+1을 아내에게 주장하지만 아내는 내가 한쪽에서 자는 2+1로 응수할 뿐이다.

 유명한 소설이자 영화인 <아내가 결혼했다>를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주인공 남편이 느꼈을 당혹감에 충분히 공감한다. 하지만 좀 더 현실감 있게 말한다면, 자식을 낳는 순간 세상의 모든 아내는 결혼한다.

 나는 그런 현실을 충분히 이해한다. 다만 가끔은 아들이 부럽다. 아내가 이젠 내게 신경을 안써주는 것 같아 섭섭하다. 아내와 멀어지는 것 같아 두렵다. ‘가족한테서 고립된 중년 가장’ 얘기가 예전처럼 먼 나라 얘기로 느껴지질 않는다.

나는 날마다 아들에게 버림받는다

 갓 두 돌이 된 우리 아들은 내가 문을 여는 소리만 들리면 냉큼 뛰어와서 온 집안이 들썩일 정도로 반갑게 나를 맞는다. 놀아달라며 나를 애타게 쳐다본다. 오로지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이 순간을 1초라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이 내 손을 잡아끈다. 나 역시 아들과 놀아주는 시간이 둘도 없이 소중하다.

 아들 수준에 맞는, 남이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놀이를 한다. 요샌 날씨가 추워져서 힘들지만 목욕도 같이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나는 내 삶의 초창기를 복습하고 되새김질한다.

아들과 함께하는 순간은 영혼의 정화의식같은 시간이다. 나는 아들과 일체감을 느낀다. 그리고 파국이 찾아온다.

 한참을 뛰어놀다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 그 즉시 아들은 나를 외면한다. 얼굴 들이밀지 말라며 나를 밀친다. 내가 장난으로 삐진 것처럼 하면 재미난 구경꺼리인양 입으로 손을 가리며 키득키득 웃는다. 하루 종일 행복한 데이트를 즐기고 나서 다음날이면 전혀 기억을 못하는 교통사고 후유증을 앓는 여성을 소재로 한 로맨틱코미디 영화가 있다. 그래도 그 영화에선 잠들 때까지는 기억을 하는데. 우리 아들은 잠이 오면 나를 밀쳐낸다.

 아들은 취침 시간에 내가 팔베개를 하거나 품에 안으려 하면 화를 낸다. 그리고는 엄마 옆으로 기어들어간다. 갓난아기 티를 벗고 나서 한 번도 아들을 품에 안고 자본 적이 없다. 팔베개를 하고 자 본 적이 없다. 내가 날마다 “잊혀진 여인”이 되어야만 우리 식구들에게 행복한 잠자리가 찾아온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아빠는 질투중

가끔은 나 자신도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나는 아내의 관심과 사랑을 모조리 빼앗아간 아들놈을 질투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들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는 아내를 질투하는 것일까?

 내가 가끔 섭섭한 건 아들에게 배웅을 맡기고 아들의 아침을 준비하느라 바쁜 아내일까, 아니면 내가 건네주는 조간신문을 받자마자 그걸 엄마에게 전해주느라 뒤도 안 돌아보고 냉큼  고개를 돌려버리는 아들일까.

 아들이 잠들어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혼자만 듣는 아내가 나를 서운하게 하는 건가, 아니면 다만 아내 옆자리를 돌려달라는 내 간절한 외침을 모른 척하는 무심한 아들놈이 나를 서운하게 하는 건가.

 아빠는 오늘도 질투하며 잠이 든다. 그리고 남편은 샘을 내며 아침에 눈을 뜬다.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문화연구학과 교수


 필자는 현재 '연구년'(창조를 위한 재충전이 아니라 집중연구와 생산력을 강조하는 요즘 한국의 대학가에서는 '안식년'이라는 낭만적인 용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을 맞아 네덜란드에 머물고 있다. 교내외 기관의 지원을 받는 연구과제 2개를 수행하며 국가기관이 후원하는 해외한국학 파견교수 자격으로 이곳에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때로는 다소 쓸쓸하지만, 모두가 어려운 시절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해외체류근무(?)를 고맙고 소중하게 체험하고 있다.

 조그만 대학촌에 정착한지 한 달 보름 정도가 지났는데, 오늘은 그동안 내가 단편적으로나마 관찰했던 우리 업계(대학/인문학) 이야기를 몇 가지 해 보려고 한다. 첫째, 소위 '인문학의 위기'는 한국적 상황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 (혹은 최소한 네덜란드도 예외가 아닌) 현상인 것 같다. 내가 방문한 대학에서도 수강생이 적거나 인기 없는 인문학 분야가 구조조정 대상이 되어 작년에 40여 명의 교수들이 직장을 잃었고 수업과목도 많이 축소되었다. 관련 연구소들도 시장경제의 칼날을 피해가지 못했는데, 이슬람국제연구원은 폐쇄되었고 나의 공식초청기관인〈동양학국제연구원(The International Institute for Asian Studies)〉도 얼마 전 좀 더 협소한 공간으로 이사를 했다. 옛 빌딩에서 혼자 연구실을 사용하던 호사를 누렸던 나는 다른 방문교수와 함께 연구실을 공유하게 되었으니 그 불똥이 나에게도 튀긴 것일까.

 둘째, 네덜란드 동업자 교수들은 좀 더 열악한 환경에서 교육·연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연구/교육조교의 도움에 많이 의존하는 한국의 대부분 대학교수들과 달리 이곳 교수들은 온갖 잡무와 행정업무를 스스로 감당해야만 했다. 개강 전에 학과사무실에 들러 출석부를 얻고, 필요한 참고서적을 도서관에 예약하고, 수업자료를 복사하여, 행정실에서 해당 강의실 열쇠를 수령하고서야 수업을 시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정해진 연봉 외에는 부수입원이 원천적으로 거의 없다. 다른 대학에서의 특강은 품앗이 형태로 진행되었고 일반인 대상 교외 강연은 지식인 사회봉사의 일종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한국의 '이름 날리는' 일부 교수들이 대기업 '자문/고문역'과 '사외이사' 등과 같은 빛나는 명함을 새겨 정규수입보다 더 많은 돈을 챙길 수 있는 횡재는 이곳에서 불가능하다. 같은 역사업계에 종사하는 네덜란드 동료학자는 "우리는 한국처럼 (영어)논문 아무리 많이 발표해도 보너스 한 푼 없다"고 푸념했다. 그렇다면 네덜란드 교수들은 과연 무엇으로 사는가? 막스 웨버가 말한 '직업으로서의 학문'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조건 없는 헌신이야말로 그들이 일용하는 양식인가.


네덜란드 라이덴 시의 모습
사진 출처 - Discover Leiden

 셋째, 한국과 비교하면 네덜란드에 전반적인 교육시스템은 좀 더 보편적인 평등권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였다. 교육에 따른 금전적, 신분적 불평등을 방지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의대입학생들을 일정한 시험을 통과한 후보자들 중에서 추첨으로(!) 결정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필자는 깜짝 놀랐다. 전문교육이 개인적인 부와 특권의 밑천이 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묘책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학입학도 어렵지 않고 대학별로 전체 순위가 있다기보다는 각 단과대학별로 다른 전통과 특징을 가질 뿐이다. 예를 들면, 한국(어)학과 일본(어)학 을 배울 수 있는 곳은 네덜란드에서 라이덴 대학이 유일하다. 예술체육대 등 모든 학과를 총망라해서 특정대학만이 최우수대학으로 선망되는 한국 실정과는 아주 다르다.

 내 수업에 등록한 수강생들도 상호 경쟁적이라기보다는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과목을 느긋하게 배우겠다는 것이 기본태도이다. 학생참여와 토론을 장려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발표하면 보너스 점수를 부여 하겠다"고 공지했는데 신청자가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 한국에서의 경우에는 거의 80% 이상의 학생들이 다투어 발표신청을 한다. 상대평가에 따른 성적시스템 때문에 다른 학생이 받는 보너스 점수는 내 점수를 빼앗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사상 유래 없는 취업난에 시달리는 한국의 대부분 대학생들이 이런 '제로섬 게임'의 악몽에 시달리는 반면, (대학원 진학 계획이 없는) 많은 네덜란드 대학생들은 낙제를 면하는 65점 이상 성적에 만족한다고 한다. 나쁜 학점이 좋은 직장을 구하는데 장애가 되지 않느냐고 되짚어 물어보니까, 너무 높은 학점 소유자는 학창시절에 사교활동이 부족했던 부적합한 직장후보생으로 찍힐 우려가 있다고 한다. ㅎㅎㅎ

 오호라, 교수들은 '생기는 것 없이' 온갖 잡무와 업무에 시달리고 대학생들은 우등생 되기에 목숨 걸지 않고 평균적으로 빈둥거린다면 이 나라의 장래는 누가 이끌고 책임질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네 처지 네 대학 네 나라 걱정이나 제대로 해라'이다. 다소 속물적인 기준으로 따지자면, 네덜란드는 노벨상 수상자를 15명이나 배출한 세계 TOP 10 안에 손꼽히는 인재국가이다. 도대체 무슨 특별한 교육철학과 교육정책의 비밀이 있단 말인가. 혹시 이곳 대학에서 교수와 학생이 교실에서 은밀히 주고받는 것은 '지식(knowledge)'이 아니라 '질문(question)'이 아닐까. 결국 이상적인 선진대학은 네가 떨어져야 내가 붙는 겁나는 취업사관학교가 아니라 아름답지 않은 현실과 세상만사에 대한 '의심(doubt)의 숙성공장'이어야 하지 않을까.

 근데, 당신 정말 유럽역사 전공자 맞아? 네덜란드에 대해서 쥐뿔도 확실하게 아는 게 없잖아! 그렇다. 우리나라가 직면한 모든 잘못과 어려움의 근원은 분수도 모르고 불평 많고 비판만 일삼는 나 같은 삼류 사이비 역사가(인문학 교수)들이다. 그러므로 되풀이 경고하건대, 허튼 생각 말고 "철자법 맞는 논문이나 열심히 써라 이 철밥통들아."

장윤미/ 국민대 학생

 용산 국민법정 기소인 모집 캠페인을 하느라 서울역에 있었다. 용산 국민법정은 용산 사건에 대해 인권의 기준으로 다시 한 번 심판해보겠다는 것이고 책임자들을 국민의 이름으로 소환해보자는 취지다. 오고가는 분주한 사람들의 틈을 잡고 유인물 돌리며 기소인이 되어달라는 말을 꺼냈다. 그냥 스쳐가 버리는 사람도 있었고 잠시라도 멈추어서 얘기를 듣는 사람도 있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기소장까지 써 주기도 했다. 마침 서울역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30대를 막 넘은 것 같았고 표정이 밝진 않았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유인물을 건네며 ‘용산 국민법정을 하려 합니다’, 라는 말을 꺼냈다. 그런데 채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천 원만 줘요”

 당황한 나는 멈칫거리며 그 짧은 순간 돈을 줘야 하나 말아야 하느냐 고민했다. 불친절하게 들이대니 돈을 주는 게 영 내키지 않아 급히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꺼냈다.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그는 비웃음이 가득 섞인 얼굴로 코웃음을 치며 내 앞을 지나갔다. 마치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아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이다. 순간 나는 멍해져서 가버리는 그를 돌아볼 생각도 않고 허공만 보고 있었다. 이 사람은 대체 뭔가. 왜 나에게 이렇게 대하는 걸까.

 그러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그는 나를 조롱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런 거 하지 말고 나도 불쌍하니까 돈이나 달라, 거리낌 없이 줄 수 있니? 못 주잖아. 거칠게 말하면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너 같은 사람 잘 안다는 듯한 그 조롱의 눈빛이 계속 떠올랐다. 이런 느낌 처음도 아닌데 그날따라 유난히도 마음이 찝찝했다. 뭘까. 천 원만 달라는 그 한마디에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이 초라해지는 그 기분, 새삼 바르르 떨렸다.

 또 하나, 최근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술자리에서였다. 지인들이 모인 술자리였는데 내 옆에 있는 분은 내가 사회 운동하는 걸 못미더워하는 듯했다. 일단 너부터 잘 해야 한다는 말을 꺼냈다. 백 번 맞다고 생각했다. 나 하나 바뀌지 않으면서 사회 변화를 얘기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고 나서 그가 꺼낸 한 마디.

 ‘그리고 진짜 도와주고 싶으면 니가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도와줘라. 그게 진짜 돕는 거다.’ 타이르듯 한 말이었다. 사실 흔히 듣는 말이다. 내가 잘 돼서 돈 많이 벌면 훨씬 더 크게 도울 수 있다고, 어른들이 쉽게 하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의 입에서 그런 얘기를 듣는 건 참 씁쓸한 일이었다. 연민에 젖어, 희생정신에 젖어, 그렇게 남을 돕고 싶어 안달 난 착한 아이로만 취급받는 것이 싫었다. 내가 믿고 있는 게 있는데 그걸 무기력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건 나를 부정하는 것 같았다.

 캠페인을 하며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움직이는 것, 남들 싸우는데 옆에 가서 같이 힘이 되어주는 것. 이런 게 훨씬 더 값진 것, 아니,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런 게 현실적인 거야” 라고 했을 때 “그 현실이 대체 뭔데요”라고 말하지만 그 말은 공격 안 하니만 못 한 너무나 허약한 말이 되어 버린다.


‘용산 철거민 사망사건 국민법정 준비위원회’(위원장 강경선)는 14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강로사고현장(오른쪽 건물) 옆에서 발족 기자회견을 열어 “다음달 18일 사회 각계
대표인사 9명과 50명의 국민배심원으로 구성된 국민법정을 열겠다”고 밝히고 있다.
‘용산 국민법정’은 경찰의 강경진압과 무분별한 재개발 문제를 다룰 예정이다.
이호중 준비위원장(서강대 법대)은 “국민법정은 시민 이름으로 시민 법정에 세워
용산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게 목적”이라고 말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정부가 하는 저소득층 정책을 보면 답답한 마음이 든다. 마치 자비로운 일이라는 듯이 유가환급금을 준다고 하고 저소득층에게 저이자 대출을 해준다고 하는 그런 정책들, 인간이라면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것이 있고 그게 인권이라는 것인데, 원래 가진 걸 자꾸 빼앗아 가놓고선 조금 주고 생색내고 자꾸 채무를 만드는 악순환에 빠뜨리는, 그래도 그게 현실적이라는 말에, ‘이거라도 어디야’, 하면서 겨우겨우 살아내는 모습들. 왜 돈으로 돕는 것은 위대하고 자비로운 일이 되고 사회운동을 하는 일은 쉽게 선동이라 치부되고 현실성 없는 이상적인 일로 취급받는 걸까.

 그래도 더 속상한 건 그런 말들에 흔들리는 나다. 난 여전히 ‘잘 싸우지 못 한다’ 요즘 겪는 이런 일들은 내가 왜 인권운동에 끌렸고, 몇 년 동안이나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왜 계속 인권운동을 하고 있는지를 되묻게 한다. ‘어쨌든 좋은 일이니까, 한편으론 나에게도 좋은 일이니까, 내겐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니까’, 이 정도의 답변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내 고민이 여기에서 머물러서는 안 될 것 같다. 자원봉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면. 내가 나 스스로를 자원 활동가라고 칭하는 것도 내 의지로 내 활동을 구성하고 방향을 고민하고 싶기 때문이다.

 요즘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엄마와 통화하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엄마는 공부를 하다 모르는 게 있으면 곧잘 전화해서 이런저런 걸 물어 본다. 어느 날 나는 불쑥 이런 얘길 꺼냈다. “엄마, 그래도 내가 엄마 공부할 때 이렇게 꼼꼼히 가르쳐주고, 돈 없어도 내 있는 거 다 꺼내서 선물사고 그러는 게 더 기특한 효도 아니겠나?” 딸의 말에 엄마는 한 마디 툭 던지셨다. “그래도 난 니가 돈 많이 벌어오는 게 훨씬 좋다.” 난 낄낄대며 웃었지만 전화를 끊고는 눈물이 왈칵 났다. 아, 내가 믿는 건 뭐지? 사실 되게 무력한 거 아닌가. 이게 진짜라고 믿는 것마저 나의 착각이 아닐까. 그나저나 나는 왜 아직도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걸까. 매 순간 선택을 하며 살아야할진대 아직도 나는 확신을 갖지 못 하고 말만 앞서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 말들은 허영일 뿐이다.

 돈이 아니더라도 옆에서 함께 하는 게 더 좋은 것이고, 얄팍한 거 말고 더 근본적인 것들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내 마음은 당장 가족 앞에서부터 휘청거린다. 물론 마음가짐도 좋고 돈도 많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그게 참 어렵다. 내가 지금 믿는 윤리를 가지고선 겨우 겨우 살 궁리를 하며 살 거라는 게 미리 보인다. 어찌 보면 참 빤한 세상이지만 그게 또 맞다.

 이 정도 생각할 수 있는 게 지금 내 역량인 것 같다. 어쨌든, 믿다가도 의심하고 지치니까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고, 엎어지고 주저앉고 그러면서 살아간다. “저는 세상과 싸우는 법을 배우는 중입니다. 뭐가 옳은지는 제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아직 좀 서툽니다. 아마 계속 서툴 거예요. 그렇다고 서툰 게 싫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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