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정/ 변호사, 인하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법관을 선거로 선출하지 않는 이유는 입법부는 다수결에 의해 선임되고 다수에 대해 책임지는 의원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다수의 의사를 입법으로 관철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사법부는 법의 원리를 규명하고 법이 무엇인지 선언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다수의 요구와 관심에 반드시 부응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대중의 영향으로부터 독립된 법관이 재판을 담당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다수의 의사에 의존하고 다수의 의사를 대변하는 입법과 행정은 소수의 이해를 대변하거나 권리를 보장하기 어렵기 때문에, 다수의 의사(정치권력)로부터 독립된 사법이야말로 소수의 이해와 권리를 보장하기에 가장 적합한 기관이다. 다수가 될 수 없거나, 다수와 이해관계를 달리 하는 사람들, 공동체의 집단적 목표에 의해 희생당하거나 권리를 침해당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다수의 눈치를 보지 않고 법과 정의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사법부야 말로 유일하게 기댈 언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사법이 과연 이러한 기능을 하고 있는가? 지난 주 법원과 헌법재판소가 선고한 두건의 판결이 그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용산참사의 1심 판결에서 법원은 진압현장에 있었던 철거민 피고인들에게 징역 5-6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을 행사하여 법질서를 유린한 행위는 엄중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는 사람들도 있다. 용산 참사의 피고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재개발이라는 다수의 이해관계 속에서 권리를 침해받고도, 정당한 보상을 받을 길이 없는 소수자들이다. 다수가 만든 법률에 그들의 권리는 누락되어 있다. 그런 사람들이 경찰 특공대의 진압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사망하였다면, 피고인들이 그 사망자의 아들이고 이웃이라면, 그들이 던진 화염병 때문에 화재가 발생하였는지 여부도 확실하지 않다면, 더구나 범죄사실의 입증책임이 있는 검사들이 수천페이지의 수사기록을 고의로 제출하지도 않고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면, 이런 사건에서 사법부가 5-6년의 중형을 선고하여 피해자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은 하지 않았어야 옳다. 많은 사람들이 판결에 대해 분노하는 이유는 피고인들의 행위가 정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경찰의 무리한 진압과 그로 인해 발생한 참혹한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오로지 힘없는 피고인들에게만 묻고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도 마찬가지이다. 헌법재판소는 표결과정에서의 위법을 모두 지적하면서도 국회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법률이 무효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다수의 눈치를 보지 않고 법과 정의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헌법재판소의 권한을 포기한 채,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잘못은 했지만 결과물은 건드리지 않을 테니 알아서 고쳐라’고 점잖게 훈계하고 끝내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역할인가? 온갖 불법을 저지르면서까지 미디어법을 통과시킨 다수가 과연 자율성을 발휘하여 스스로의 잘못을 고칠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인가? 사법부의 존재 근거는 소수의 이해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고, 다수를 등에 업은 정치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법과 정의를 수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법은 단순히 다수가 만들었다고 해서 정당화되는 그런 차원의 법이 아니라, 민주적이고 도덕적이며 형평성을 갖춘 법을 말한다. 민주적인 정당성을 부여받지 않은 사법부가 독립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만약 정치권력의 의사에 휘둘리고 눈치를 보며 앞장서 정치권력의 의사를 대변하는 사법부라면 더 이상 독립을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 지금까지는 사법부의 정치적인 독립을 위해 대법관과 헌법재판관을 선거로 선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지만, 계속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는 생각을 바꾸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
정치권력의 의사를 대변하는 사법부라면 독립을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
2009. 11. 25. 10:26
정치권력의 의사를 대변하는 사법부라면 독립을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