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연대 주최 이번 교사인권강좌에서 강의를 마친 후 필자는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에 맞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요? 인권교육이라는 것이 말은 그렇지만 과연 실제로 얼마나 실행되고 확산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라도 좀 강하게 맞서야 하지 않을까요?”라는 취지의 질문을 받았었다. 그 때 필자는 선뜻, “이대로 가다가 교육은 결국 바닥을 칠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더 나아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경찰이 쏘아 대는 물대포와는 상대가 안 될 것 같이 보이지만, 언제 젖는지도 모르게 온몸을 젖게 만드는 이슬비, 그런 이슬비가 결국 물대포보다 강하지 않을까요?”라고 답했었다. 이어서,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라는 시처럼 담쟁이들은 손에 손을 맞잡고 결국은 그 담을 넘지 않겠어요?”라고도 했다. 그 후 필자는 “그 답이 과연 충분한 답이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 “바닥을 치는 것이 희망이기도 한 이유”와 “이슬비가 물대포보다 강한 이치”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 


 악화일로의 경제상황에 대한 뉴스를 접하면서 우리는 가끔씩 “바닥을 쳤다”는 말을 듣곤 하는데 우리는 그 말을 “이젠 더 나빠질 리는 없으니 조금이라도 좋아질 것”이라는 뜻으로 알아듣는다. 또한 살아오면서 가끔씩 끝 모를 절망이나 실패 혹은 슬럼프에 빠져들게 되면 우리는 “차라리 바닥을 빨리 쳤으면 좋겠다. 바닥을 치면 그땐 올라가는 일만 남지 않겠냐?”라고 생각한다. 정호승 시인은 <바닥에 대하여>라는 시에서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하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하며,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하며 그 시를 끝맺는다.  


 필자가 여기서 이해하는 ‘바닥까지 내려감’은 곧 ‘희망’이다. 새벽동이 트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면, 가장 어두운 순간 바로 다음엔 곧 빛이 터져 나오는 거 아닌가? 역대 정권들이 하나같이 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수많은 조치들을 발표하고 시행해오고 있지만 교육을 물속에 점점 깊이 빠뜨려 왔다면, 곧 ‘바닥’을 칠 것이고, 그리고는 수면 위를 향해 올라갈 차례가 아닐까? 인권을 무시하여 교육을 물속에 빠뜨렸다면 인권을 존중하는 방향, 인권이 교문을 넘어 학교 안에 확산되게 하는 방향이 곧 수면 위로의 방향일 것이다. 걸상과 허리가 맞지 않아 걸상에 허리를 맞추다가 수많은 학생들이 걸리게 되는 척추측만증, 학생이 안경 쓰는 것은 이미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게 된 안타까운 시력 희생, 초등학생에게까지도 성적이 떨어진 것을 유서 쓰고 투신할 만큼의 불효로 여기게 만드는 교육풍토와 가정교육, 명문대 합격을 위해 인권을 유보함은 당연하다는 식의 ‘입시독재’ 논리……. 더 이상은 내려갈 곳이 없음이 모두에게 자명해지고 있지 않은가? 하여, 교육은 이제 곧, 드디어, 바닥을 치고 오른다! 이것을 “바닥을 치는 것이 희망이기도 한 이유”라고 보는 것은 좀 궁색한가?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말도 우리는 가끔씩 듣는다. 필자는 문득, “무엇이 약한 것인가? 왜 약하다고 하는가? 약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강하기에 강한 것을 이기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오래 전에 읽었던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었다. 그 글을 풀어쓰자면, “사람의 숨은 약하기 짝이 없으나 갈비뼈를 들어올리고 내리는 것은 바로 그 약하기 짝이 없는 숨 아닌가?” 예전에 읽었던 법정 스님의 <무소유>의 글도 풀어쓰자면, “눈 오는 겨울 산에서 살면 흔히 나무들이 부러지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 약하고 약한 눈송이들이 큰 가지들 위에 점점 쌓이면 그 무게를 못 이겨 키 큰 나무들이 통째로 부러진다.”는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물대포’와 ‘이슬비’는 어떤가?


 
지난 7월 29일 오후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인근에서 점거 파업 중인 쌍용차 노조원에게
물을 전달하려는 민주노총과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을 경찰이 물대포를 쏘며 해산시키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물대포’로 비유되기엔 약할 만큼 이명박 정부의 공권력 남용 및 과잉진압은 많은 경우에 인명 피해로 이어지곤 한다. 작년의 촛불집회, 올해 초의 용산 참사,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쌍용 자동차 사태에 이르도록, 최루액과 경찰특공대 등을 갖춘 공권력은 이미 허용 정도를 넘어 정당성을 상실한 폭력으로 바뀌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지난 7월 6일 천주교 마산교구 상남동 성당에서 제3차 전국사제시국기도회가 열렸다. 미사에 앞서 행한 연설에서 강기갑 의원(민주노동당)은 “박정희 대통령은 부마사태와 YH사건, 전두환은 박종철의 죽음 등을 겪으면서 무너졌는데, 정의구현사제단이 고문치사 은폐조작사건을 폭로하면서 6월 항쟁이 시작되었듯이, 이명박 정권은 새벽에 6명을 불태워죽이고서 3,000쪽의 조사기록을 밝히지 않으니 말로가 뻔하다.”고 말하면서 용산 참사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은폐와 3,000쪽의 검찰조사기록 은폐가 묘하게 대응된다 싶다.  


 ‘민주주의 회복과 인권·생명수호를 위해’ 봉헌되는 미사, 수많은 사제들과 신자들의 동참, 용산 참사 유가족들이 갖게 되는 정의와 희망의 연대감, 참사 후 반년이 지나도록 장례마저 못 치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신자, 비신자를 떠나 사람 마음 안에 자리 잡게 되는 정부에 대한 실망과 분노,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양심의 가책, 그러면서 서서히 배우지만 절실히 깨닫게 되는 ‘인권’의 소중함과 불가양도성, 민주주의에 대한 상실감과 목마름……. 이런 모든 것들은, 당장의 위력으로는 ‘물대포’에 비견할 수는 없겠지만, 서서히, 결국은 모두를 똑같이 적시는, 흔히 우산까지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만 홀딱 젖게 하는, ‘이슬비’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하여, 우리에게 남게 되는 것은 결국은 ‘희망’이다. ‘바닥’은 끝 모를 끝이 아니다. 시작일 뿐이다. 강하게 차고 오를수록 상승의 탄력이 붙을 것이다. 그리고 ‘이슬비’는 ‘물대포’를 이기리라. 결국에는 ‘물대포’를 쏘는 발사체인 대포도 녹슬게 만들리라. 약한 것은 약하지 않다. 약하게 보일 뿐이다. 지브란의 말처럼 “갈비뼈를 움직이는 것이 숨”이라면, 국가의 갈비뼈를 들어올렸다가 내려놓으면서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것은 국가가 강하게 훈련시킨 근육이 아니라 우리 시민들의 올곧은 ‘숨’, 곧, 혼과 의지와 꿈, 시민의식, 특히 인권의식 아닐까? 이것이 약할까?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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