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황미선 위원)

황미선/ 인권연대 운영위원

 7월 12일...... 그 날이 다가온다.  

 3년이 지났어도 근본적으로 달라진 게 없다. 오히려 그 시험을 봐야하는 아이들은 몸에 밴 오랜 습관처럼 문제풀이로써 대비하고 있다. 이 시험을 시행한 자들은 학력성취도평가라고 명명하나 일제고사로 더욱 알려진 그것....  그것이 바로 다가오는 7월 12일, 문제 많다는 일제고사의 형태로 치러진다. 일제고사의 문제점은 교직단체뿐만 아니라, 학부모들에게 시험에 대한 선택권을 주었다는 이유로 해직된 교사들에 의해 주목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교과부와 해직교사 사이에 진행된 법적 다툼에서 해직교사가 승소함으로써 교과부의 판단착오와 과도한 직권 남용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교과부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일제고사의 근본적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해결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문제점을 인식하면서도 그 문제점을 그대로 안고 있는 시험을 시행한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문제를 더욱 심화시킨다고도 볼 수 있다. 초등학교 6학년의 경우 국어, 영어, 수학은 전집(모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전체 조사로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듬)의 형태로 보고, 사회와 과학은 표집(모집단의 특성을 잘 반영할 수 있는 표본을 추출하는 방법으로, 확률적으로 모집단을 대신할 수 있는 일부의 대상을 선발하여 조사하는 것)의 형태로 본다고 한다. 

 교육을 행한 자가 교육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 가를 알아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전집으로 이루어질 경우 나타나는 문제, 예를 들어 시험결과에 따른 전국 소재 학교의 서열화, 그에 따른 지역, 학생, 학부모 교사들의 서열화, 그리고 그에 따른 사교육 시장의 부정적 활성화 등의 문제점을 고려하여야하는 것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교과부는 표집으로 보면 사라질 여러 가지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 경쟁으로만 치닫는 교육이 우리 청소년들의 자살률을 세계 1위로 만든다든가 인성교육이 우선이어야 한다는 등의 이유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일제고사는 교과부가 주장하는 효과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다양하고 창의적인 사고를 중시하는 교육의 내용면에서 볼 때 일제고사의 획일적 시험내용은 학생들의 학력 신장도 가져올 수 없고.... 지역마다 다른 스펙트럼을 가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여 치른 시험의 결과를 가지고 학교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도 공정하지 않다. 그렇다면 교과부가 이런 지침을 내려보낸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일제고사 실시 후 발생할 문제점들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교육단체가 비판하고 있는 사교육의 활성화를 위해서 인가? 아니면 그냥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무리들(?)에 대한 교과부의 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가? 만약 교과부가 이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고 있다면 이는 교과부가 매우 심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3월 8일 대전 중구 태평동 유평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교과학습 진단평가 시험을 보고 있는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일제고사의 문제점을 알면서 교과부에서 지침을 내렸으니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따르는 것이 옳은 일인가? 교사들에게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자기주도적으로 학습하는 아이로 교육하라면서 교사들이 소신을 가지고 자기 생각을 가지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 교과부의 태도는 올바른 것인가? 아이들이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사람으로 자라도록 교육하라면서 교사들은 수동적이고 기계적인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20년이 넘는 교직경력에서 올해 네 번째로 6학년 담임을 새로 개교한 혁신학교에서 맡게 되었다. 3월부터 몇 개월 지나지 않았지만, 초등학교에서 6년의 교육을 받아온 아이들은 행복한 학교생활을 꿈꿀 수 있다는 것을 반신반의하며 즐거운 표정으로 등교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요즈음 아이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어온다. 시험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냐고... 계속 문제풀이를 해야 하냐고.... 그러나 나는 아이들에게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없다. 아이들을 중심에 두라며 우리 교육의 중심에는 아이들이 없다.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사유의 물꼬를 어떻게 틀 것인가?(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세상을 살다보면 가끔씩 헷갈리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상급식’을 둘러싼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가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른가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이에 속한다. 최근 ‘반값 대학 등록금’에 관한 논의에서도 이 문제가 중요한 사안인 것처럼 대두되고 있다. 예컨대 7월 3일 일요일 아침 KBS의 토론에 나온 어떤 인사가 “대학 등록금을 아예 전체적으로 반으로 낮추는 것은 등록금을 충분히 낼 수 있는 부자의 자녀들에게도 혜택을 주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했다. 이 주장을 한 그 인물은 분명 보수 진영에 속한 인물이었다.

 나는 이 주장을 듣는 순간 묘한 상념에 빠졌다. 갑자기 이 주장이 “동일한 혜택을 받더라도 수혜자들의 재정적인 능력에 따라 그 수혜에 다른 비용을 달리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 그 순간 바로 이어서, “부모의 재산과 소득을 철저히 조사해서 그 정도에 따라 대학 등록금을 각자 아예 다르게 내도록 해야 한다.”라는 주장으로 바뀌어 들렸기 때문이다.

 이는 빈부의 격차가 개인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의거해서 생겨나는 것이라는 인식을 암암리에 깔고 있고, 따라서 빈부의 격차를 사회구조적인 차원 즉 정치적인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른바 선별 복지를 제시한 그 보수 논객의 주장이야말로 진보 진영의 정치가나 논객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주장으로 탈바꿈된다. 다만, 그 함의를 잘 따져 그 속에 담겨 있는 ‘갸륵한’ 뜻을 더욱 심도 깊게 변환해야 할 것이다.

 사회구조적인 연관을 염두에 둘 때, 부와 가난이 결코 각자의 능력이나 성실성에 의거해 결정되어 나타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은 상식이다. 제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하루에 잠을 네 시간 이상 자지 않을 정도로 성실한 자라 할지라도, 그가 사회역사적으로 구축된 제도와 장치를 비롯해 그동안 축적된 사회 전체적인 역량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부를 쌓을 수 있을 것인가. 그 사회적인 제도와 장치에는 가난하게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충분히 허용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부와 가난이 결정되는 변수들 중 대부분은 사회구조적인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300만 명의 대학생들 중에는 거금의 대학 등록금을 아예 ‘껌 값’ 정도로 생각하는 부모를 가진 학생으로부터 말 그대로 등록금을 내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한 부모를 가진 학생에 이르기까지 그 빈부 격차의 스펙트럼은 다양할 것이다. 그런데도 마치 슈퍼에 가서 다 같은 값을 주고 탄산음료를 사먹듯이, 똑같은 등록금을 내고 대학을 다니는 것이다.(물론 가난한 학생들에게 일정하게 장학금을 준다는 것을 완전히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사립대학이 80-90% 이상을 상회하는 가운데 대학교육이 완전히 상품으로 인식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대학에서의 교육은 일종의 상품이다. 상품의 가격이 소비자의 뜻과 맞지 않으면 사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동일한 상품은 동일한 가격에 구매해야 옳다.”라는 현실을 반영한 주장이 예사로 제기되기도 한다. 대학교육을 상품이라고 할 때, 정확하게 말하면 그 상품은 교육내용이 아니라 대학졸업장이 되고 만다. 대학교육을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처럼 보게 되면, 언젠가 부가가치세를 매겨 마땅하다는 험악한 주장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난 6월 10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조건없는 반값등록금 실현을 위한 국민촛불대회'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그런데 고맙게도 보수 진영의 논객이 사회구조적인 측면을 충분히 감안해서 부의 정도에 따라 등록금을 차등 납부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 그의 주장을 좀 더 밀고 나가면, 사회 전체적으로 통용되는 온갖 재화와 서비스에 대해 빈부의 격차에 따라 대금 지불을 차등으로 해야 한다는 엄청난 주장으로 연결된다. 십 분 양보해서 전체 교육에 한정해서 보더라도 그 보수 논객의 주장은 모든 학교 교육(폭을 확대하면 심지어 사교육과 사회적인 평생교육을 다 포함할 수도 있을 것이다.)에 있어서 빈부의 격차에 따라 등록금을 차등 납부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를 한 단계만 더 밀고 나가면, 만약 그렇다면 도대체 학부모가 아닌 국민들이 거의 없을 것이니까, 아예 등록금을 없애고 ‘상당한 차등 비율의 누진세 제도에 입각한 교육 특별세’를 신설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야말로 진보 진영에서 염원해 마지않는 보편 복지로의 길이 아닌가.

 아니, 그렇다면 선별 복지와 보편 복지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인가? 없다. 사실 조금만 달리 생각해서 사회 전체적인 비용을 중심으로 해서 보면, 어차피 전체 국민들이 교육비 전체를 담당해 온 것 아닌가. 물론 이를 모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결국 문제는 누가 왜 무슨 이유로 어느 정도로 그 교육비를 담당해야 하는가이다. 교육받는 사람들이 교육비를 내고 얼마나 많은 이득을 얻는가를 개인별로 일일이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러나 사회구조적인 구도를 바탕으로 포괄적으로 계산할 수는 있다. 결국 교육에 의해 부유한 자들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이득을 얻은 것이고, 가난한 자들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손해를 본 것이다. 그 불균형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점에서 있어서는 선별 복지건 보편 복지건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이다.  

 한 가지만 더 생각하고 말을 맺고자 한다. 국방과 교육을 비교해 보자는 것이다. 국방비를 아예 국가에서 총책임지고 지불하듯이, 교육도 그렇게 하면 안 되는가 하는 것이다. 교육이야말로 모든 국민들의 삶의 질을 방어해 내는 ‘실질적인 국방’이라 할 수 있다. 튼튼한 국방이 필요한 것은 바로 교육에 의한 실질적인 국방의 내용을 안정되게 유지하자는 데 있는 것이다. 교육이 목적이라면, 국방은 수단이다.

 국방을 어느 특정한 개인이나 기업 등의 이익을 위해 활용한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그렇게 활용하기 위해 국방의 내실을 상품화해서 완전히 시장 논리에 편입시켜야 한다고 하면, 아예 매국노로 찍혀 입을 여는 순간 매장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국방의 목적인 교육은 왜 상품이라고 함부로 떠들고 실제로 교육을 상품화하여 매점매석을 일삼으려 하고 어떻게 하면 시장 논리에 편입시킬 수 있을까를 노심초사 안달하는 것이 용납되는가. 물론 그렇다고 국가가 나서서 대학을 비롯한 많은 교육기관들에 재정 지원을 한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서울대학교마저 법인화하여 상품 중심의 교육으로 치달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다든지, 부도덕하기 이를 데 없는 자들로 판명이 난 인물들이 대학의 운영권을 갖도록 한다든지, 편의를 명목으로 대학 내에 온갖 상점들을 끌어들여 대학 환경을 시장화 하는 쪽으로 치닫는다든지 하는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한 것은 관련 책임자들이 교육을 얼마나 시장 논리에 입각해서 활용하고자 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른바 ‘반값 대학 등록금’이라고 하는 현안이 그 속에 얼마나 강력한 폭발력을 지니고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교육의 본질과 정체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서 완전히 잘못 가고 있는 교육 체제 자체를 뒤집어엎을 수 있는 폭발력을 지닌 것이다. 보수 진영조차 알게 모르게 이미 그 강력한 자장에 깊게 발을 들여놓고 있다. 특히 진보 진영에서는 물러서지 말고 이참에 이 현안을 활용하여 대다수의 시민들에게 교육을 통한 진정한 삶이 어떤 것인가를 확연하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책 입안자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모두 사유의 물꼬를 전연 창조적인 방향으로 틀어나가야 할 것이다.


학생인권은 화장실에서부터 (홍승권 위원)

홍승권/ 인권연대 운영위원

 나는 평소 신경을 집중하면 얼굴이 잘 달아오르는 체질이어서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면을 자주 하는 편이다. 화장실에 수건이 있으면 고맙고 수건이 없으면 화장지를 조금 뜯어 수건 대용으로 삼는다. 요즘은 옛날 같지 않아서 웬만한 공중화장실에는 늘 화장지가 칸마다 잘 비치되어 있다. 얼마 전만 해도 일부 화장실은 입구에서 자판기에다 동전을 넣고 화장지를 뽑아 쓰거나 밖에 설치된 덕용화장지를 각자 쓸 만큼 뜯어다가 쓰곤 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의 화장실은 엄청 깨끗해지고 편리해졌다.

 얼마 전 학교운영위원으로 활동할 때의 일이다. 회의를 마치고 화장실에 가서 얼굴에 찬물을 묻히고서 수건을 찾으니 없었고 변기 칸에서 화장지를 찾으니 아예 없었다. 결국 대충 바람에 말릴 수밖에 없었는데, 행정실장님께 왜 화장지가 없느냐고 여쭈었더니 아이들이 화장지를 물에 묻혀 벽이나 천정에 붙이는 장난을 하기 때문에 없앴노라고 한다. 그러면 교직원용, 학생용을 구별하지 말고 화장실을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함께 쓰면 아이들이 함부로 장난을 못 치지 않겠냐고 했더니 ‘좋은 생각이긴 한데..’ 하며 난처한 표정을 지으신다.


사진 출처 - 참세상

 아마도 대부분의 학교가 이와 같은 실상이리라 생각된다.
아이들이 생리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교실에서부터 화장지를 챙겨야 하다니...
아이들이 거의 매일 교육적 효과와는 무관한 일로 익숙하지 않은 힘든 상황을 겪어야 하는 셈이다. 특히나 저학년 아이들은 이에 적응하는데 엄청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내야 할 것이다.

 화장지를 좀 아끼려고 이렇게까지 아이들에게 불편을 감수하도록 해야 할까?
이참에 학생화장실과 교사용 화장실을 통합하면 좋지 않을까? 아이들이 선생님 보는 앞에서 함부로 종이를 낭비하며 장난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학교에서 화장실을 통합하게 되면 중고등학교의 흡연지도도 한층 나아지리라 생각된다. 학생과 선생님이 함께 쓰는 화장실에서 감히 담배를 아무렇지도 않게 피워대지는 않을 테니까...

홍승권 위원은 현재 삼인출판사 부사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성추행 사건, 우리는 ‘침묵의 공범’ (조재희)

조재희/ 객원 칼럼니스트

 친구들과의 약속에 늦었다.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도로가 붐볐다. 버스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내리기가 무섭게 약속장소로 뛰기 시작했다. 금요일 밤 홍대 앞은 북적인다. 사람들을 헤치며 발걸음을 바삐 옮겼다. 그 순간 한 여자가 나를 붙잡았다. 일행으로 보이는 두 여자도 보였다. 그들은 한 남자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나에게 이 남자를 잠시만 붙잡고 있어 달라고 했다. 곧 경찰이 올 거라고도 했다. 사정은 이러했다. 북적이는 거리를 여자들 일행이 걷고 있었다. 그 뒤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일행 중 한 여자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봤다. 그 여자의 치마 밑에 무언가가 있었다. 바로 남자의 휴대폰 카메라였다. 남자는 황급히 도망치려 했다. 여자들은 필사적으로 붙잡으려 했다. 주변에 도움을 청해도 소용이 없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었다. 괜히 나에게도 피해가 오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나는 경찰이 도착 할 때까지 도움을 줬다. 그러나 나 또한 확신할 수 없었다. 만약 그 여자가 나를 붙잡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내가 그저 무수한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면, 나서서 도움을 줬을까? 아마 나 또한 ‘간접적 방조범’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간접적 방조범’은 성 추행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어느 정도 범죄 발생에 일조한다. 이들에게도 일정한 책임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비단 ‘간접적 방조범’뿐만이 아니다. 범행 현장에 없었어도 ‘침묵의 공범’은 될 수 있다. ‘침묵’이라는 부작위도 사회의식을 형성한다. 범죄의 심각성을 축소시키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침묵의 공범’이 된다. 얼마 전 의대생 집단 성추행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도 다양한 ‘침묵의 공범’들이 존재한다.  


15일 오전 고려대 정문 앞에서 한 졸업생이 고대 의대생 성추행자들을 출교조치를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성추행 사건의 ‘침묵의 공범’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사진 출처 - 뉴시스

 대학생들은 MT를 떠났다. 그곳에서 집단 성추행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반 성추행 사건들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들은 사람의 몸을 치료할 예비 의사들이다. 명문대에 재학 중인 수재들이기도 하다. 또한, 피해자는 바로 같은 학교 학생이다. 그들은 6년간 같이 수업을 들었다. 심지어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한 동기였다. 단순한 성추행에 그치지 않았다. 성추행 장면을 휴대폰으로 촬영하였다. 참으로 파렴치한 행동이다.    피해 학생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가해 학생들 중 한명은 대학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피해 학생에게도 잘못이 있다 한다. 그래서 사과할 수 없다고 한다. 해당 대학은 미온적 대처로 일관한다. 심지어 같은 교실에서 시험을 쳤다는 언론보도도 있었다. 피해자는 다시 한 번 정신적 충격에 빠졌을 것이다. 

 이 사건의 ‘침묵의 공범’은 누구일까? 해당 의대생들이 재학 중인 대학교가 그러하다. 출교 조치를 요구하는 여론은 거세져 갔다. 그러나 아직 가해 학생들에게 징계조차 내리지 않았다. 마치 여론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듯하다. 대학의 정문 앞에서는 릴레이 시위가 벌어졌다. 웹상에서는 인권위 제소 페이스북 모임이 만들어졌다. 성추행 의대생들을 규탄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들은 재학생들이 아니다. 트위터를 통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다. 재학생들 또한 대학과 다르지 않다. 그들도 ‘침묵의 공범’에 해당한다. ‘침묵의 공범’은 ‘간접적 방조범’과는 다르다. 이들은 피해가 두려워서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해당 대학은 이미지 실추를 걱정할 것이다. 재학생들에게는 울타리 의식이 작용한다. 가해자가 내 선배이거나 후배 혹은 동기이다. 이 때문에 감싸주고 있는 것이다. 

 사건은 대학생들의 성 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의 의식을 되돌아보자. 개개인의 스펙은 어느 때보다 뛰어나다. 이에 비해 성의식은 미성숙한 것이 사실이다.    성의 개방화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로 야기되는 성의 문란이 문제이다. 대학생의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러한 책임에 의해 자유를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번 사건의 가해자들은 그러지 못하였다. 같은 대학생으로서 비판을 가해 마땅하다. 그러나 타 대학의 학생들조차 생각보다 조용하다. 사건 내용은 같은 대학생으로서 분개할 일이다. 하지만 대부분이 방관적인 태도이다.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침묵의 공범’인 셈이다.   

 하루에도 이 사건과 관련된 수많은 기사가 쏟아진다. 이를 모르는 대학생은 거의 없다.     물론 비판을 가하는 학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천적 행동으로 옮기는 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부끄럽지만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나도 ‘침묵이 공범’이 된 셈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달라져보자. ‘성추행’은 어느 중범죄보다도 가볍다 할 수 없다. 특히나 대학생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가치관을 형성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대학과 재학생들부터 움직여야 한다. 이미지도, 울타리의식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존재한다.   바로 올바른 성가치관과 피해자의 인권이다. 다른 대학생들도 ‘침묵의 공범’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자신과 무관하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정당한 비판과 실천적 행동은 많은 작용을 한다. 자신의 의식을 성숙시킬 수 있다. 또한 사회의 의식을 바르게 변화시킨다. 이제 능력뿐만 아니라 성 의식도 압축 성장시킬 때다.


“콘돔 쓰면 안전하다고? 이거 말도 안 된다. 자궁 내 루프 이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4월6일)

 16년간 지속된 인기 강의의 한 대목이다. 서울의 한 명문대에서 이번 1학기에만 400명의 학생이 이 강의를 수강했다. 인기는 높지만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문제 강의다. 바로 한양대 ‘성의 이해’다.

 강사의 말은 교재에 견주면 애교 수준이다. 교재는 <성 과학의 이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아주 그냥 가관이다.

 “성폭력은 남성에게 내재하고 있는 고유한 본능이다. 만일 미개한 곳에서 억제되지 않고 산다면 성적인 욕구가 만족되지 못할 때는 언제나 강간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p.234)

 “완전한 질외사정인 경우는 정자의 존재가 부정되므로 원칙적으로 임신이 될 수 없다.”(p.88)

 이 수업은 남학생만 듣는 게 아니다. 그런데 남성 중심의 시각만 일방적으로 전달한다. 과학적 근거도 부족하다. 설사 남학생만 듣더라도 여성을 이렇게 비하해서 얻는 것은 무엇일까. ‘성의 이해’는 단순한 음담패설을 넘어 잘못된 성 지식을 제공하고 여성에 대한 성적 편견을 확산시킨다. 서울의 명문대에서 지금껏 이 강의가 16년째 계속됐다는 것 자체가 뉴스다.


성의 이해 수업이 진행된 강의실 앞에 붙여진 대자보

 이런 돌출적 강의는 사실 대학 일상의 성차별이 배경으로 자리하기 때문에 지속될 수 있다. 이 대학에 다니는 여성 오모(21)씨는 축제 때 경험을 털어놨다. 동아리 주점을 하면 거리에서 손님을 끌어오거나 테이블을 돌며 술을 나르는 일은 모두 여학생에게 떨어진다는 내용이다.

 “여자들이 해야 손님들이 많이 온다고 선배들이 시켜요.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하는 게 낫다고. 억지로 할 수 밖에 없죠. 삐끼짓 할 때 예쁜 애들이 많다고 해야 주점 인기도 올라간대요. 짧은 치마나 핫팬츠를 입고 오라고 말하기도 하죠.”

 오 씨는 결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그냥 남학생들 틈바구니에서 아주 조금 문제의식을 느끼는 공대생일 뿐이다. 축제는 축제니까 참고 넘어가려 했지만, 강의 시간에 이런 말을 들으면 눈이 뒤집힌다고 말했다.

 “전공 수업이었죠. 교수가 학생들끼리 서로 질문과 답변을 해보라고 했어요. 근데 여학생이 나서면 1점씩 더 가산점을 준다고 하더군요. 여자들은 이렇게 해서라도 점수를 따야 하지 않겠냐고 하면서. 불쾌했죠. 점수 더 준다는 건 여학생들한테 더 이익을 주겠다는 게 아니었어요. 말 그대로 여성을 깔 본 거죠. 여자란 이유 그 하나로.”

 오 씨가 불만을 얘기하는 건 쉽지 않다. 괜히 말꼬투리 잡는다. 넌 왜 이렇게 예민하냐. 그 정도도 못 받아주면서 사회생활은 하겠니. 심지어 ‘꼴페미’라고 조롱받는다. 꼴통 페미니스트의 줄임말이란다. 함께 고민해 보자고 작은 목소리를 낸 건데, 너그럽지 못한 개인의 성격 탓으로 몰아간다. 이건 성차별에 이은 두 번째 폭력이다.

 친구들은 그나마 낫다. 이야기라도 해볼 수 있으니까. 교수 선배로부터 “넌 왜 이렇게 예민하니” 이런 말을 들어보라. 불만은 곧 반항으로, 그 대가는 불이익으로 나타난다. 권력을 잡고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자꾸 이러니 문제를 제기하기 보다는 참고 감춘다. 괴롭고 또 무서우니까.

 ‘성의 이해’ 강의에 대한 문제제기는 일찍부터 있었다. 하지만 학교 당국은 “학생들의 강의 평가가 B+~A다. 우수 강의란 뜻이다. 제재를 가할 방법이 없다”고 한다. 이 대학의 양성평등센터라는 곳이 내놓은 대답은 더 웃긴다.


교재 <성 과학의 이해> 중에서 성폭력에 대한 언급 부분

 “현재 사안은 강의 내용이나 강사 스타일에 관련된 것이어서, 센터에서 구체적인 도움을 드릴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명백한 성희롱 언행이라고 판단된 경우가 아니면 센터에서 개입하기 어렵습니다.”

 이 강의를 진행하는 강사에게 전화 통화를 시도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바쁘다”였다. 반론을 듣고 싶었지만 그는 인터뷰를 거절했다.  

 먼저 나선 건 학생들이다. 지난 4월 인터넷에는 ‘한양대 성의 이해 수업에 문제 제기하는 사람들’이란 카페가 개설됐다. 이들은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강의 내용과 교재에 대해 반박했다.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으로 나와 함께 대자보를 쓰고 학교 곳곳에 게재하기도 했다. 언니네트워크,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단체들도 성명서를 발표하며 힘을 보탰다. 7월에는 해당 강사에게 질의서를 보내는 것은 물론 총장과 학장에게 서한을 보내는 등의 활동도 전개할 예정이다.

 하지만 이들의 작은 노력은 다시 한 번 짓밟혔다. 강의의 잘못을 지적한 대자보는 강제로 철거됐다. 일부는 대자보를 붙이는 학생들의 사진을 무단으로 찍기도 했다. 이들은 강의 반대 활동과 그에 따른 언론 보도가 학교 망신을 불러왔다고 했다. 묻자. 잘못된 성지식을 주입시키고 성차별을 당연시 여기는 태도. 그걸 가르치는 수업이 버젓이 이뤄지는 망신보다 더한 망신이 있을까.

 1학기가 끝났다. 이번 학기 한양대 ‘성의 이해’는 학생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한양대뿐 아니라 다른 대학들도 과연 성 지식과 성 차별 항목에서 낙제를 면할 수 있을까.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성의 이해’가 또다시 6월 28일부터 진행되는 여름계절학기 과목으로 개설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는 정말 누가 좀 말려야 하지 않을까.

* 사진 및 내용 출처는 한양대 <성의 이해 >수업에 문제제기하는 사람들 모임인
cafe.daum.net/realsex와 해당 카페 운영자와의 인터뷰입니다.


영어 권하는 사회 (유혜진)

유혜진/ 객원 칼럼니스트

 5년 전, 처음 대학에 입학하고 모든 것이 새로워 눈이 휘둥그레진 나. 그 중에서도 교양 영어 시간은 유독 즐거웠다. 영문법을 기계적으로 외우고 몇 가지 문제유형에 맞추어 답을 골라내는 연습이 전부였던 고등학교 영어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내게 영어는 그저 대학 입시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대학은 달랐다. 친구들이나 교수님과 직접 영어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주어졌다. 매주 A4 반쪽 분량의 영어 에세이도 썼다. '어젯밤 내가 꾼 꿈'과 같은 사소한 주제부터 '이랜드 파업, 대선, 탈레반에 대한 생각'까지. 한국말로도 쉽게 쓰지 않던 글을 영어로 꾹꾹 눌러 썼다. 주어와 동사 목적어가 전부인 꽤나 단출한 문장이었지만 열심히 썼다. 글을 쓰고 나면 교수님은 내 생각에 동의를 하거나 반박하는 내용을 담아 코멘트를 달아주었다. 점점 재밌어졌다. 내 생각을 좀 더 정교하게 표현하고 싶었고, 더 정확한 단어를 쓰고 싶었다. 열심히 사전을 뒤지고 교수님께 질문했다.

 하루는 교수님께서 좋아하는 언어가 무엇인지 물으셨다. 고등학교 때부터 줄곧 프랑스어가 좋아 꾸준히 공부해왔던 나였다. 프랑스어를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교수님께서는 자신도 프랑스어를 잘 할 줄 안다고 반가워했다. 프랑스어로 번역된 한국 문학 작품들도 읽었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내게 제안했다. 함께 언어를 공부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교수님께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나는 교수님께 프랑스어를 배우는 방식이었다. 공통언어는 영어였다. 그렇게 나는 매주 교수님의 사무실을 찾았다. 두 시간 동안 쉴 새 없이 영어와 한국어, 프랑스어가 튀어나왔다. 우리의 공부는 자유로웠다. 교수님은 나를 위해 헌 책방에서 시몬 보부아르의 '제2의 성' 원본을 구해왔다. 하루 한 페이지 남짓이었지만 함께 책을 읽고 질문을 주고받다. 가끔은 샹송을 듣기도 했다. 한국의 노동운동에 관심이 많으셨던 교수님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자료들에 대해 물어왔다. 내가 미처 몰랐던 한국의 근현대사에 대해 말씀하실 때면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또박또박 한국어 단어들을 MP3 파일로 녹음하는 긴장의 순간도 찾아왔다. 즐거웠다. 비록 나의 영어 실력과 프랑스어 실력은 교수님의 한국어 실력에 비해 더디게 늘었지만, 매 순간이 깨달음의 연속이었다. 1년 간 함께 하며 '아, 대학에서는 이렇게 공부하는 구나' 싶었다. '영어'를 매개로 새로운 세상을 보고 또 다른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기쁨을 맛 봤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 후로 내가 만난 또 다른 대학의 영어는 '영어 강의'가 주는 스트레스로 똘똘 뭉쳐있었다. 그 곳에는 제대로 된 '영어'도, 제대로 된 '배움'도 없었다. 수업의 80% 가량만을 영어로 설명하고 한국말로 설명하는 교수님의 수업이 있었다. 학생들은 수업의 80%는 딴 짓을 하다가 마지막 20% 시간에만 집중을 했다. 원서 내용을 그대로 파워포인트에 옮겨 수업시간 내내 읽는 것이 한 학기 강의의 전부인 수업도 있었다. 어쨌든 강의실에선 영어가 흘러나왔다. 시험도 파워포인트 그대로였다. 영어강의가 절대평가임을 감안했을 때, 학생들에겐 최고의 인기 과목일 수밖에 없었다. 일부는 수학문제풀이가 많은 경제학 수업으로 몰려갔다. 한 학기 동안 필요한 영어는 제한된 경제학 용어와 필수 동사들뿐이었기 때문이다. 칠판에 적힌 교수님의 풀이와 교과서만 있다면 한 학기는 웬만큼 버틸 수 있었다. 영어 실력과 전공 실력, 어느 하나 향상되지 않았다. 학생들은 '비싼 등록금을 내고 뭐하는 짓이냐'며 푸념할 수밖에 없었다. 영어라는 형식에 치우쳐, 교육의 내용과 본질은 잊혀진지 오래였다. 제대로 영어를 배우기도 전 강의실에서 영어는 하나의 콤플렉스요, 스트레스일 뿐인 것이었다.


올해 초 카이스트에서는 4명의 학생이 자살해 큰 논란이 됐다. 징벌적 등록금제와 함께
100% 영어강의는 카이스트 학생들에게 큰 부담이 됐다는 분석이 많았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사실상 대부분의 4년제 대학에서는 영어강의를 실시하고 있다. 대학 영어 강의의 명분은 '글로벌 캠퍼스'의 실현이다. 전공을 영어로 설명하며 영어 원서 책을 보는 것이 대학의 경쟁력과 학생의 경쟁력 모두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다. 하지만 의문이다. 몇몇 대학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이 실질적인 경쟁력의 강화일까. 이해하기 힘든 영어 강의 내용으로 학생들에게 부담감만을 가중시키는 것이 경쟁력의 향상인지 말이다.  

 실제로 내가 들었던 영어 강의들도 대학 당국이 주장하는 '경쟁력'과는 사뭇 거리가 멀었다. 고등학교 영어교육과 대학 교양영어 강의와 연계되지 않은 영어강의의 무리한 도입은 학생들의 좌절감만을 키웠다. 수능과 내신에서 고득점을 했던 친구들도 강의내용을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다며 매번 고민을 늘어놓았다. 고액의 영어회화 학원을 다니거나 영어 과외를 받았던 친구들은 조금 수월한 눈치였다. 그리고 수업의 흐름은 아버지의 직장에 따라 혹은 조기 유학으로 해외 연수의 기회가 있었던 친구들 위주로 돌아갔다. 교육 불평등의 한 양상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강의실을 벗어난다고 해서 영어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 취업을 위한 스펙의 또 한 축엔 '토익 점수'가 버티고 있다. 대학생들 사이에선 이미 '토익 점수=영어 실력'이라는 공식이 깨진지 오래지만 우리는 또다시 수많은 비용과 시간을 투자할 수밖에 없다. 사회가 요구하기 때문이다. YMCA의 한 조사에 따르면 대학생 10명 중 7명이 영어시험 응시료와 강좌 수강료를 위해 연 평균 65만원에 육박하는 비용을 지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대학생의 절반가량이 영어를 위해 해외연수를 떠나는 것을 감안하면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영어 사교육에 쓰고 있는 것이다. 등록금 1000만원 시대, 대학생과 학부모들의 어깨는 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대학에서 '영어 교육'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대학평가를 위한 '영어강의'와 토익점수를 위한 '영어와의 사투'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대학은 '글로벌 캠퍼스'를 주창하며 영어강의는 대폭 늘려놓았지만 강의 내용과 운용은 부실했다. 사회에서는 '글로벌 인재'가 필요하다고 역설했지만 누구 하나 영어를 가르쳐주는 이 없었다. 또다시 고등학교 시절처럼 스타강사와 족집게 강의를 따라 사설 학원으로 내몰릴 뿐이었다. 더 이상 나에게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즐거움이란 없었다. 오늘날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영어는 더 높은 학점을 받기 위한 경쟁, 취업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의 장과 같은 것이다.

 맹목적으로 영어를 권하는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함께 올바른 영어교육에 대해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다. 이제 막 시작된 대학가의 여름방학. 즐거움이 사라진지 오래다. 해외연수를 위해 비행기에 몸을 태우고, 토익학원으로 향하는 청춘들의 발걸음이 또다시 무거워지는 계절이 시작됐다.


부모가 망각하는 것들(김영미 위원)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사람은 혼자서 사는 개인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다.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치지 못하는 부모는 부모의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내가 소중하면 남도 소중하다는 걸 가르쳐 주는 건 부모가 가르쳐야 할 몫이다. 상대방의 입장은 생각하지도 않고 가시 돋친 말로 친구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행동. 나의 행동으로 상대방이 고통을 당하건 말건 상관없다는 아이들의 태도. 공부만 잘하면 그런 건 대수롭지 않다고 키우는 부모는 부모역할을 다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석이는 학급에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지만 학급의 학생들은 석이를 “문제 메이커”로 부른다. 얼마 전 교실서 신체의 질병으로 힘들게 생활하는 학생을 “무뇌아, 쓰레기” 등으로 수업시간에 옆의 학생과 쪽지로 비웃다가 그 학생과 싸움으로 번져 석이의 부모가 담임교사를 만났었다. 석이 부모는 “그 학생에게 직접적으로 욕을 안했으니 문제가 없지 않느냐?, 또 한 대 맞았으니까 죄가 없어진 것 아니냐”며 소리를 높이고 담임교사가 석이만 미워한다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일주일이 지난 다음 방과 후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던 석이는 무릎으로 상대편학생 어깨를 차는 바람에 쇄골이 골절되었다. 석이는 다친 학생을 보건실로 부축하지도 않고 바라만 보고 미안이라고 사과만 하고 집으로 갔다. 이일을 석이는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았었고 나중에 담임교사로부터 내용을 전해 들었던 부모 또한 다친 학생의 부모에게 전화조차 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목요일 석이는 교실서 야구공을 던지는 놀이를 하다 다른 학생의 눈을 정면으로 맞추어서 실명의 위기까지 가는 상황이 되었다. 석이는 공을 던져서 다치게 한 학생의 염려보다는 공을 던지기는 했지만 공을 가져온 학생에게 책임을 전가하느라 급급했다. 다친 학생의 치료를 무사히 끝내고 돌아온 담임교사에게 석이 부모는 석이의 주장과 같이 야구공을 가져온 학생의 처벌을 주장했고, 또 그 학생 부모에게 전화로 항의를 하고, 다시 교장실에 전화를 걸어서 석이만 처벌하면 안 된다고 하고 다음날 교장실을 방문해서는 담임교사가 자신의 아이만 미워하고 처벌한다는 어처구니없는 말들만 늘어놓았다.


지자체에서 진행하는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올바른 부모 역할에 대한 강의 모습
사진 출처 - 뉴시스

 교육은 사회적인 존재로서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체득하는 과정’이다. 학교만 하는 게 아니라 가정과 학교와 사회가 함께 하지 않는다면 교육다운 교육은 불가능하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아이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않고 ‘어른이 되지 못한 미완성품’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아이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그들에게 책임과 의무를 부여하고 스스로 책임을 질 줄 아는 자주적 책임감과 주인의식을 길러 주어야 한다.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에게 자격증을 주듯  ‘부모 자격증’ 이런 걸주면 어떨까? 가슴 따뜻한 사람. 사람과 잘 어울릴 수 있도록 사람답게 키우는 것도 또한 부모의 몫이다. 서프라이즈라는 인터넷 사이트에 ‘시골훈장’이라는 분이 쓴 ‘자녀를 망치는 열 가지 방법’이라는 글 중에 다음과 같은 글들을 올려놓았다.

『 잘못된 품행을 야단치지 않고 스스로 잘 할 것이라고 내버려 두고 훈계나 훈련이나 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무식해서 용감한 독불장군이 되어 사회로부터 격리 될 것입니다.  
  또래들과 다투거나 입장이 다를 때 언제나 아이편이 되면, 장차 이웃과 사회가 모두 그 아이의 적이 될 것입니다.

  훈계하는 스승을 헐뜯는 자녀의 꾀에 넘어가면 장차 부모를 속이고 늙으면 업신여기며 불효를 당할 것입니다. 
  아이가 나쁜 말을 사용할 때, 그냥 웃어넘기면 재치를 키워 장차 더욱 나쁜 말로 이웃에게 상처 줄 것입니다. 』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늘어가는 이 시대에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한번쯤 새겨 들어야할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는 것은 완벽하지 못해도 가슴 따뜻한 사람. 대화로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  더 높은 지위와 더 많은 부와 명예를 쫒아 허겁지급 살지 않는 사람 그런 여유로 힘겨운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키울 수는 없을까?

김영미 위원은 현재 신연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비추! 청년인턴 (손정원)

손정원/ 객원 칼럼니스트

 ‘베이비붐 세대’, ‘386 세대’ 등 특정 세대를 지칭하는 닉네임이 있다. 필자처럼 청년실업 100만 시대의 청년들은 ‘88만원 세대’로 불린다. 미취업 또는 저임금 비정규직이 지금의 젊은 세대를 표현하는 핵심어인 셈이다. 이런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가 내놓은 대책 가운데 하나가 ‘청년인턴제’이다. 미취업 청년에게 현장 경험과 취업 기회를 제공한다는 취지에서 마련됐단다. 

 2009년 3월, 정부 산하 청소년 활동기관에서 일을 시작했다. 10개월 계약직인 줄 알고 일을 시작했는데 공식 명칭은 ‘청년인턴’이었다. 당시 채용 담당자는 “부처에서 일반 계약직 T/O를 주지 않는다”며 “신분만 청년인턴일 뿐 급여는 일반 계약직과 다를 바 없다”는 친절한 설명을 해줬다. 기관 전체 직원 40명 중 절반인 20명이 비정규직이었는데, 청년인턴은 그 중 일부였던 셈이다. 


10개월짜리 비정규직 ‘청년인턴’

 애초 ‘청소년 해외봉사단 코디네이터’라는 업무를 보고 지원했기에, 신분 명칭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정규직이건 비정규직이건 열심히 하면 될 것’이란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열심히 일할수록 정규직이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사실도 명확하게 다가왔다. 

 어느새 연말이 왔다. 계약직에게 12월이란 마치 ‘선고일’과도 같다. 그 해 겨울, 비정규직 20명 가운데 정규직을 선고 받은 이는 단 1명도 없었다. 12개월 단위로 계약한 보통의 비정규직들은 계약기간을 12개월 더 연장했고, 이미 24개월 동안 계약직으로 일한 이들은 하는 수 없이 다른 둥지를 찾아 떠나야 했다. 

 계약기간이 10개월이던 청년인턴은 딱 한 달 만 연장이 가능했다. 한 달의 추가계약 기간이 지난 뒤 담당 직원이 조용히 불렀다. “더 이상 계약 연장이 안 된다.” 이어지는 설명. “11개월 경력으로는 어딜 가도 쓸모가 없으니, 한 달 만 쉬었다 나오면 돼.” 다시 청년인턴 채용공고가 날 것이니 그때 지원하면 재고용이 된다는 얘기였다. 반드시 1달 간의 공백을 거친 뒤 다시 10개월짜리 계약을 새로 맺어야 하는 이유는, 12개월 이상 근무하면 퇴직금을 줘야 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두 번째 계약만이라도 12개월을 단위로 했다면, 그 제안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청년인턴으로서는 퇴직금도 받을 수 있고, 무엇보다 경력단절 없이 일할 수 있는 1년 단위 계약직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일선 현장에서 청년인턴은 ‘더욱 질 나쁜 비정규직’에 다름 아니었다. 결국 다시 구직자의 신분으로 돌아왔다.


지난 2009년 5월 1일 119주년 노동절을 맞아 울산대공원 동문에서 지역 노동단체와 시민단체 등이
'민생민주 살리기 울산대회'를 연 가운데 대회 관계자들이 피켓을 설치하고 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예산은 예산대로 낭비, 청년은 청년대로 불만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동안 취업시장의 문은 더욱 좁아져 있었다. 전 직장의 직원 말처럼 11개월짜리 청년인턴 경력은 어디에도 쓸모가 없었다. ‘T/O가 없어 청년인턴이라는 이름만 빌렸다’는 설명을 누가 들어주겠는가. 당장 생계부터 문제였고, 시간을 갖고 ‘제 자리’를 찾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렇게 헤매길 두 달, 결국 다시 청년인턴이 됐다. 이번엔 금융 관련 공기업에서 사회공헌 업무를 봤다. 여기서의 청년인턴은 정말 잉여 인간에 가까웠다. 초기 몇 달은 일이 거의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년인턴 동기 몇몇이 모이면 하나같이 ‘일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책상에 앉아 다른 일을 하자니 민망하다고도 했다. 하지만 결국, 대부분 청년인턴 기간 동안 다른 구직활동을 했다. 기관에서도 면접 등에 대비하라며 3일 간 무급휴가도 줬다. 

 부서 직원과 점심을 먹을 때였다. 그는 청년인턴에게 정을 주기 어렵다고 말했다. 언제 떠날지 몰라 일을 가르쳐 주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평생직장의 개념으로 일하는 공기업 직원에게 청년인턴은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과 같은 존재였다. 결국 정은 못 주되 업무시간에 취업 공부를 하거나 이력서를 작성하는 등 ‘딴짓’을 해도 눈감아주었다. ‘공부’가 아니라 ‘일’을 하고 싶어 찾아왔건만, 그리고 여기서 잘 배워 정규직이 되기를 희망했건만, 현실은 이와 달랐다. 

 다시 연말이 되었다. 이번엔 청년인턴 90명 중 4명이 정규직이 됐다. 나머지는 각자 제 갈 길을 준비했다. 담당한 직원이 조용히 불렀다. “사회공헌 업무에 사회복지사가 있으면 좋겠다. 파견직으로 전환해 일해 보는 것은 어떠냐”는 얘기를 했다. ‘한 달 쉬었다 나오라’는 제안보다는 인간적이긴 했다. 그러나 파견직은 파견업체 소속으로 월급도 더 박했다. 청년인턴으로 일하면서 세금을 포함해 120만원 가량 받았는데, 파견직이 되면 파견업체에서 떼는 몫이 있어 급여가 100만원에도 못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2년 뒤엔 또다시 갈 곳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청년인턴 하지마! 다쳐! 조심해!

 결국 두 번째 청년인턴직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정부가 공언한대로 청년인턴이 취업의 기회를 준 것은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이었으며, 되레 다른 구직 활동에 손해가 됐다. 어떤 곳에서도 1년 미만의 경력은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소수의 성공사례가 있다. 정부는 이들을 가리키며 청년인턴이 돼보라고 권유한다. 일단 채용인원을 늘려 취업률을 높이고자하는 심산일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에게 청년인턴은 ‘잠깐 일자리’였으며, 되레 직업 선택의 폭을 좁게 하는 효과만 가져왔다. 

 청년인턴을 염두에 둔 청년에게, 또 청년인턴제를 확대, 재생산하는 정부에 말하고 싶다. ‘청년인턴 하지마! 다쳐! 조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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