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빠이의 추억(안수찬 한겨레 탐사보도팀장)

안수찬/ 한겨레 탐사보도팀장

 나는 유치원을 다니지 못했다. 젊은 나이에 결혼하여 아득바득 살림을 일구던 부모님은 아들을 유치원에 보낼 여력까진 없었던 것 같다. 대신 소꿉놀이를 했다. 나에게도 소꿉친구가 있었다. 동네에서 가장 예쁘고 말쑥했다. 우리는 뒷산에 올라 진달래를 따먹었다. 여자 아이는 풀잎 뒤에 매달린 달팽이를 손가락 끝에 올려놓고 배시시 웃었다. 여자 아이가 하자는 일이면 무엇이든 했다. 어느 날, “교회에 가자”고 여자 아이가 말했다. 교회에 가면 돈 내지 않고 다닐 수 있는 유치원이 있다고 했다.

 지방 도시의 교회에는 널찍한 강당이 있었다. 코흘리개들은 마룻바닥에 앉아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점심 무렵이 되면, ‘뽀빠이’를 나눠 줬다. 라면을 구워 만든 과자였다. 과자 봉지 안에는 작은 ‘별사탕’도 있었다. 그저 입에서 스스르 녹는 별사탕은 별천지였다. 별사탕을 먼저 먹을지, 나중에 먹을지 항상 고민이 심했다. 뽀빠이가 아름다운 것은 그 안에 별사탕이 있기 때문이다.

 뽀빠이 때문에 그 아이와 멀어지게 될 거라고 상상도 못했다. 100여명의 코흘리개들이 오직 뽀빠이만 쳐다보고 교회에 나오는데, 교회 어른들이 나눠주는 뽀빠이는 항상 부족했다. 뽀빠이를 먹지 못하는 아이들이 늘 있었다. 날이 갈수록 쟁탈전이 치열해졌다. 아이들은 줄을 서지 않고 우르르 몰려 들어 어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드센 아이들은 꼭 뽀빠이(그리고 별사탕)를 차지했고, 숫기 없는 아이들은 뒤로 밀렸다. 어떤 아이는 울었다. 어른들이 말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내일은 꼭 (뽀빠이를) 받을 거야.” 그건 옳지 않았다. 힘이 약한 아이들도 과자를 받을 수 있도록 줄을 세우고 차례를 정하면 부족하나마 공평하게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교회 어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성들여 기도하고 또다시 뽀빠이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나는 보았다. 나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뽀빠이를 매일 받아먹을 자신이 없었으므로 나는 교회를 드문드문 나가기 시작했다. 동네에서 가장 예쁘고 말쑥한 아이는 그런 나를 타박했고, ‘뽀빠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 아이에게 나는 서운했다. 우리는 국민학교 입학 직전에 헤어졌다. 그 아이가 이사를 갔다. 이사 가던 날, 나는 눈물을 흘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 뒤로 콧물 흘리는 지저분한 사내 놈들과 구슬치기를 시작했다. 사내 녀석들은 진달래 대신 솔방울을 모아 전쟁놀이를 했다.

 뽀빠이의 기억이 도드라지는 때가 있다. 해외 취재 때, 현지 한인 교회에 나간 적이 있다. 취재에 도움을 준 교민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다. ‘뽀빠이 문제’를 가슴에 품고 살아온 지 30여년만에 교회에 나간 셈인데, 또 한번 놀랐다. 목사의 설교는 “요즘 한국 교회에서 이단 종파가 ‘잠입’해 장로와 집사 자리를 차지한 뒤, 목사를 몰아내는 사태”에 대한 개탄과 “그들이 저지르는 악행”에 대한 험담과 “그런 일이 우리 교회에선 없을 것으로 믿는다”는 당부 섞인 경고가 주를 이뤘다. 나는 예배가 편치 않았다. 사랑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증오의 언사만 귀에 담은 듯 했다. 뽀빠이의 기억은 정화되지 못했다.

 나는 믿음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기자라는 직업 자체가 믿기보다 의심하는 일을 주로 한다. 다만 믿음의 개별성을 믿는다. 사상·양심의 자유의 맥락에서 종교의 자유가 있고, 그것은 각 인간에게 주어진 불가침의 영역이다. 나의 사상·양심·종교를 잣대로 타인의 사상·양심·종교를 타박하면 안 된다. 믿음의 개별성을 믿는다는 것은 믿음의 다양하고도 고유한 형태를 존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슬람과 명절 차례를 거부하는 개신교와 식사 때마다 기도하는 가톨릭의 금기와 습속을 나는 진심으로 존중한다.

 다만 (모든 믿음을 존중함에도) 모든 믿음을 좋아하진 않는다. 예컨대 교회의 붉은 십자가 전광판은 ‘싫다’. 밤거리를 헤매는 노숙자에게 화장실을 개방하겠다는 뜻이 아니라면, 부족한 전기를 쏟아 부어 홍등가처럼 번쩍이는 네온사인을 주택가 곳곳에 밝혀야할 이유가 없다. 밤마다 문을 걸어 잠그는 교회에 왜 유혹의 네온사인이 필요하겠는가. 예컨대 대통령의 기도는 ‘싫다’. 대통령이라면 공개석상에서 반복적이고 노골적으로 특정 종교의 기도를 행하지 말아야 한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정교분리 원칙이 엄연한 헌정국가의 수반은 헌법의 경계를 시험에 들게 하는 일을 공식적으로 일삼지 말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여러 종류의 중층적 시선을 느끼며 살아가는데, 유독 대통령은 오직 목사의 시선만 의식하며 사는 것 같아 ‘싫다’.

 낮은 곳에 임하여 묵묵히 사랑을 실천하는 목사·장로·집사·신도가 있는 것을 안다. 비종교인인 내가 종교인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조건 없는 헌신과 사랑을 실천할 때다. 그러나 헌신과 사랑이 아닌 것을 향하여 기도할 때, 나는 그 종교에 정나미가 떨어진다.

사진 출처 - 한겨레21

 종교는 인격으로 현현한다. 어느 종교건 믿음을 가진 자들이 믿음을 바탕으로 사람의 힘을 입증할 때, 그 믿음이 빛난다고 나는 믿는다. 선량하게 살아가는 대다수 기독교도와 불교도와 무슬림을 나는 존중한다. 그러나 코란을 끼고 인질을 참수하는 무슬림은 싫다. 신도 머릿수대로 가격을 매겨 교회 매매 광고를 내는 목사는 싫다. 신도들의 돈을 받아 외제차를 몰고 산사를 드나드는 스님은 싫다.

 이런 일반론에 입각해 두루 평균적으로 봐주려 해도, 자꾸 목사들이 더 자주 더 많이 눈에 밟힌다. 다른 종교보다 월등한 ‘사회적 영향력’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기도는 결코 조용하지 않다. 코흘리개들에게 뽀빠이를 먹을 수 있다는 당근과 먹을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를 던져놓고 기도를 익히게 하려했던 장로의 무능과 무감이 나는 싫다. 박애와 봉사의 말씀 대신에 다른 종파에 대한 증오와 공격의 언사를 늘어놓는 목사의 무능과 무감이 나는 싫다. 여론을 통한 성찰과 회개는 내팽개치고 하나님의 용서만 구하는 대통령의 무능과 무감이 나는 싫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특별히 사랑할리 없다고 나는 믿는다.

 올해 초, 일본 지진에 대해 “일본 국민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무신론·물질주의로 나간 것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말했던 조용기 목사가 다시 기사에 등장했다. 교회 사유화 논란 끝에 물러나기로 했으나 사실은 순복음교회의 실권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인류의 재앙에 하나님의 경고를 들이대고, 신자들의 공동체여야 마땅한 교회를 집안 재산으로 여기는 것이야말로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습속이다. 그런 목사들이 가장 힘 있고 돈많은 한국 개신교회를 대표한다면, 나는 그들이 믿는 신이 ‘싫다’. 그들까지 보듬어 안는다면 참 졸렬한 하나님 아닌가.

※ 웹진 <단비뉴스>에 실린 칼럼을 첨삭·보완한 글입니다.


전남대, ‘꽤’ 옹졸하다 - 허창영/ 전남대 공익인권법센터 연구원, 전임 간사

허창영/ 전남대 공익인권법센터 연구원, 전임 간사

 현재 광주는 전남대학교에 있는 ‘헌혈의 집’ 문제로 시끄럽다. 중앙일간지에는 잘 소개가 안 되고 있지만 지역 언론에는 연일 관련 기사가 실릴 정도로 ‘뜨거운 감자’다. 급기야 정치권까지 가세해 북구의회가 유감을 표시하고, 시의원이 1인 시위에 나설 만큼 이슈가 되고 있다. ‘전남대학교 헌혈의 집’을 놓고 이전을 요구하고 있는 학교 측과 이전 불가를 주장하고 있는 대한적십자사가 맞서고 있는 것이다.

 사정은 이렇다. 전남대학교 후문 쪽에는 1997년에 생긴 ‘헌혈의 집’이 있다. 대한적십자사가 기부채납 방식으로 건물을 지었으며, 전남대는 3년간 무상사용을 허가했다. 이후 2009년까지 3년마다 계약을 갱신해 12년간 무상으로 사용을 해왔다고 한다. 그러던 중 전남대는 2009년 3월 광주전남혈액원에 ‘헌혈의 집’ 반환을 요청했다. 교육, 연구 공간의 부족이 이유였다. 그렇지만 광주전남혈액원이 재사용을 요구했고 전남대는 2011년 4월 30일까지 2년간만 연장을 허용했다. 당시 허가서에는 “학교가 필요하다고 요청할 경우 반환할 뿐 아니라 허가기간이 종료된 경우 원상회복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전남대는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만 보면 전남대의 요구가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 아니 정당하다. 총장이 직접 나서 ‘정당한 재산권 행사’라고 강변하지 않아도 모두들 동의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그렇게만 판단할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선 학교가 겉으로 내세우고 있는 ‘교육, 연구 공간의 부족’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헌혈의 집은 고작 건평 40평 정도에 지나지 않는 좁은 공간이다. 공간이 부족하다는 말의 진실성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좁은 곳을 어떤 교육, 연구 공간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대학에서도 구체적인 사용계획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전남대 헌혈의 집 모습
사진 출처 - 뉴시스

 또 하나는 그간 전남대가 헌혈의 집을 홍보의 수단으로 잘 활용해왔다는 점이다. ‘전남대 헌혈의 집’은 전국 대학에 설치된 21개 헌혈의 집 중 헌혈 실적이 1위라고 한다. 이에 대해 모 교수는 “5·18정신의 현대적 승화”로 이해하기도 했다. 80년 광주에서 피를 나누었던 것이나 8-90년대에 불의에 저항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운동에 앞장선 것, 2000년대에 피가 부족한 이웃과 동료들을 위해 헌혈운동에 나선 것 모두 같은 봉사정신의 발로라는 해석도 덧붙였다. 대학이 이런 해석에 동의하는지는 모르지만 대학을 홍보하는데 있어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던 것은 사실이다. 총장이 송년사에서 “4년 연속 헌혈 1위라는 영예”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전남대의 교시가 ‘진리, 창조, 봉사’라는 점에서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지역에서의 우려의 목소리가 있고, 전남대 구성원 5명 중 4명이 이를 반대하고 있지만 대학의 입장은 강경하다. 총장이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반환을 거부하는 혈액원에 대해 “사람이 할 짓거리입니까?”라고 격앙된 어조로 얘기한 것에서 거듭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간 전남대의 배려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왔고, 대학 차원에서 헌혈을 독려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경영대 뒤쪽에 대학 소유의 25평 공간을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그렇지만 유동인구를 고려하면 이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대안이다.)

 때문에 이토록 대학이 강경한 이유는 일종의 ‘괘씸죄’일 가능성이 높다. 혈액원은 2011년 4월 30일에 계약이 만료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2년 동안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 3월에 와서야 대학에 재사용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동안 별다른 요청이 없다가 갑자기 재사용을 요구했으니 대학으로써는 뜬금없을 수 있다. 또 혈액원의 태도가 여론의 유리함을 등에 업은 ‘막무가내’로 해석 수도 있다.

 그렇지만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지역사회에서의 대학의 공적 역할이니 국립대가 가진 사명이니를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가 지적한 ‘소탐대실’이라는 말이면 충분하다. 헌혈의 집이라는 좁은 공간을 돌려받고 지역사회로부터 외면을 받는다면 전남대가 얻을 것은 무엇인가? ‘헌혈 전국 1위’가 가진 대학의 영예를 어떤 경제적인 가치와 바꿀 수 있는가? ‘봉사’를 교시로 삼고 있는 전남대에 남겨지는 오점을 무엇으로 치유할 것인가? 결국 작은 것을 얻고 큰 것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얻을 게 없는 다툼을 끌고 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전남대의 경고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참 대학 못났다’라는 말까지 들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위대한 탄생(김희수 위원)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누구나 기억하고 있는 자유, 평등, 박애를 이념으로 하였던 미완의 프랑스 혁명도 본질은 빵과 자유에 대한 인간의 요구였다. 튀니지를 시작으로 북아프리카 및 지중해 일대에 위치한 국가에서 발생하여 현재도 진행 중인 속칭 ‘재스민 혁명’도 결국 빵과 자유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진행형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 현대사의 4·19 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항쟁 등도 모두 동일한 주제였다.  

 현재의 우리 화두 역시 빵과 자유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 푸른 기와집에서 사시는 지존께서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태에 대하여 “원전을 포기하는 것은 인류가 기술면에서 후퇴하는 것이라면서 더 안전한 원전을 만들어 내야지 포기하면 안 된다.”고 말씀 하셨단다. 후쿠시마 제1원전의 두 달 간 방사능 물질 누출량만 따져도 1945년 히로시마 원자폭탄 폭발 당시 40배가 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결국 일본 총리는 원전 증설 백지화를 선언하였다. 그런데도 지존께서는 시민의 생명·건강권을 얼마나 존중하고 계시는지 위 발언으로 또다시 충분하게 보여 주셨다. 이전에도 그분은 ‘광우병 소 수입’으로 촉발된 촛불 시위 등 일련의 과정을 통해 국민의 건강권을 엄청 챙기신 나머지 청와대 뒷동산에서 눈물까지 흘리신 분이라는 것을 우린 모두 알고 있다.

 시민의 자유를 엄청 존중하시는 법치주의 그 자체인 그분의 태도는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너무도 잘 아는 내용이다. 미네르바, PD 수첩, KBS 사장 사건 등 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례를 짧은 시간 안에 축적 시킨 출중한 능력을 보여주신 분이다. 좀스럽게 G20 정상회의 때 낙서한 사람까지 처벌하면서도 ‘낙서금지법’은 왜 안 만드시는지도 궁금하다. 시민의 자유를 넘어서 시민의 생명과 건강까지 지극 정성 보다 듬는 그분한테 존경심으로부터 눈을 떼기 힘들다.


채용게시판을살펴보고 있는 구직자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지존께서는 청년 실업 등의 일자리 문제에 대해서는 최근 “우리의 청년 실업률이 8∼9%인데 미국, 영국, 프랑스 보다 좋은 성적”이라고 말씀하셨단다. 그분이 누구신가. 그분은 747공약. 7%의 경제성장에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위 경제대국 건설을 약속하고 지존으로 등극하신 분이 아닌가. 그런데 무능과 거짓이 성적표로 곧 나타났다. 그러자 그분은 “임기 내 한번이라도 7% 성장하면 된다.”고 까지 말씀을 하셨단다. 이 정도면 지존은 지도자의 지존이 아니라 국민을 상대로 희극을 연출하신 연극계의 지존임이 분명해 보인다. 왜 ‘나는 가수다.’처럼 ‘나는 연극인이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하지 않은지도 궁금하다. 빼어난 연출과 연극으로 권력을 꿰어 찬 후 심각한 청년 실업 문제에 대하여 좋은 성적이라고 하였다. 되뇌어 볼수록 기쁨이 넘치지 않는가. 일자리 좋은 성적표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포만감. 

 빵과 자유에 대한 궁핍증은 힘없는 시민이나 사회적 약자와 아픔을 함께하고, 같이 고민하고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는 자칭 ‘기업(재벌) 프렌들리 대통령’을 뽑은 국민의 선택에 의한 ‘위대한 탄생’의 결과다.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위대한 탄생이어서 불량품이더라도 리콜도 할 수 없다. 깜깜한 밤하늘에 쏟아져 내려오는 별빛 같은 희망과 탄생도 우리에게는 선택 사항일 뿐이다.   

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둥중입니다


역사가의 윤리적 전환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문화연구학과 교수

 4월의 마지막 주말에 “4·3트라우마, 그 치유의 모색”이라는 주제로 개최된 학술대회참석을 위해 제주도를 다녀왔다. 나는 <상흔의 역사에서 치유의 역사학으로〉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는데, 서양의 여러 나라에서 진행되었던 과거청산과 화해를 위한 사례들을 참고삼아 우리의 아픈 과거사를 애도하고 치유하는 방안을 모색하려는 내용이었다. 역사학자, 심리학자, 정신과의사, 민속인류학자 등이 각각 다른 시각에서 과거 상흔(傷痕)의 생채기들을 어떻게 보듬고 포옹할 것인가를 학문적으로 진단해 보려는 것이 오전순서의 주요 내용이었다. 오후에는 일본식민시대의 ‘위안부’,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 ‘대구 10월 항쟁’ 피해자, ‘여순사건’ 피해자 등의 증언에 이어 관련 활동가들의 현황보고가 있었다. 다음 날에는 제주4·3평화공원과 평화기념관, 너븐숭이 4·3위령성지,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 등 기억의 터전을 답사했다. 제주4·3평화재단이 주최하고 제주4·3연구소가 주관한 1박 2일 동안의 모임을 통해 필자가 배우고 느낀 몇 가지를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자 한다. 

 이 땅의 산하에는 억울하게 목숨을 앗긴 혼령들의 흔적과 목소리가 곳곳에 묻혀있다. 할아버지-아버지 세대를 포함한 우리는 식민시대와 제국주의, 냉전(분단)체제와 독재정권이라는 ‘극단적인 20세기'의 광기가 잉태한 시대적 폭풍우를 온 몸으로 견뎠다. 해방이후에는 근대화, 통일조국, 한국적 민주주의 건설이라는 구호에 맞춰 불법감금과 집단학살, 야만적인 고문과 성폭력 등이 공권력의 이름으로 실행되었다. 아직까지도 올바른 이름을 부여받지 못하고 있는 각종 ‘사건들’과 ‘사태들’의 희생자/생존자/유족들은 국가권력의 오남용과 이데올로기적 칼날에 베여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시키고 참여정부가 계승했던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불행했던 과거를 둘러싼 진상규명과 망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했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고도 아득하다. 

 과거가 해소되지 않은 분노와 트라우마로 가득하다면, 역사가는 잠들지 못하는 영혼을 초혼가로 달래며 씻김굿을 춤춰야 하는가? “빨갱이 가족이라고 손가락질 할까봐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나는 소똥말똥으로만 살았습니다.” 책으로만 읽었던 사건의 생존자가 토해내는 기억(증언)의 실타래가 만드는 무늬를 바라보면서 나는 ‘역사가의 이상한 운명’을 숙고해 본다. 과거에 진정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를 실증적으로 따져 기록함으로써 ‘과거의 대변인이자 미래의 안내자’를 자임했던 옛날 역사가와는 다른 새로운 종류의 역사가가 최근에 출현(출몰?)하고 있다. “그는 선배들과는 달리 자신의 주제와 자신이 맺고 있는 밀접하고 친숙하고 개인적인 관계를 기꺼이 인정하고 그 관계를 심화시킴으로써 낯선 과거를 더 잘 이해하는 지렛대로 삼았다.” (피에르 노라, 〈기억과 역사 사이에서〉, 《기억의 장소》1권. 필자가 편집인용.)


제63주년 위령제가 열린 4.3평화공원에서 가족의 비석을 껴안고 오열하는 4.3유가족
사진 출처 - 제주의소리

 말하자면, 객관적인 관찰이나 가치중립적인 거리 두기로 과거를 차갑게 분석하고 설명하는데 머물지 말고 감정이입적인 감성으로 무장하여 “역사가 그저 [죽은] 역사에 지나지 않는 것을 막아내”고자 애쓰는 것이 새로운 역사가의 숙명이라는 뜻이다. 생각해 보라. 과거에 정녕 무슨 일이 제주도에서, 여수에서, 대구에서, 그리고 광화문에서 (왜) 발생했는지를 따지는 이쪽과 저쪽의 해석이 충돌하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증언이 모순되며 국가권력의 부침에 따라 그 기념연설이 변주(變奏)된다면, 누가 감히 역사적 진실을 최종적으로 판단하고 판결할 것인가?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희생자/생존자/유족들이 넋두리처럼 읊조리는 파편적인 신음과 외마디에는 실증적인 잣대로는 측정할 수 없는 과거에 대한 또 다른 무거운 진실이 실려 있다. 치유되지 못하고 방치된 아픈 기억들이 정상화, 과거와의 화해, 혹은 국론통일이라는 이름으로 희석, 표준화, 그리고 화석화 되려는 오늘, 역사가들이 직면한 과제는 억압된 목소리에 예민하게 주파수를 맞춰 그 메시지를 공감적으로 접수하여 경청하는 것이다. 

 제주4·3 평화기념관에는 백비(白碑)―묘비명이 적혀있지 않은 맨 묘비―가 전시되어 있다. 60여 년 전에 발생해 대략 3만 명이 희생되었던 사건에 대한 진실공방은 ‘4·3반란’, ‘4·3사태’ 혹은 ‘4·3민중항쟁’이라는 명칭들이 반영하는 논쟁과 갈등보다도 더 오래 계속되리라. 쓰여 지지 않는 역사 혹은 단정할 수 없는 과거에 대한 공백 남기기는 과거사실 그 자체에 대한 부정이나 탐구의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백비야말로 과거가 남긴 희미한 흔적들과 경쟁적인 목소리들을 반죽하여 제멋대로 ‘만들어지는 역사’를 향해 죽은 자들이 던지는 소리 없는 웃음이 아닐까. 묘비명 없이 누워있는 창백한 묘비를 바라보며 나는 ‘불안한 과거’를 색칠하는 당파적인 역사서술의 어리석음과 ‘위험한 현재’의 비탈길에 서서 ‘오지 않을 미래’를 마중해야 하는 역사가의 한계와 겸손함을 동시에 배운다. 실증주의적 국가 만들기의 신화를 깨고 그 틈바구니로 얼굴을 내미는 새로운 종류의 역사가들이 자기 고백적인 윤리적 전환을 모색해야 할 순간이다.


법조계의 50년만의 변신, 로스쿨 (조재희)

조재희/ 객원 칼럼니스트

 태양은 뜨거웠다. 일병 계급장을 막 달았다. 행정반 사무실에 앉았어도 사병의 여름은 더웠다.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사법시험이 폐지된다는 뉴스가 실렸다. 법대를 다니던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로스쿨이 도입된다고 했다. 반가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자세한 내용은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입학의 어려움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등록금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보초를 서면서도, 행군을 하면서도 걱정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마음껏 놀았던 지난날들이 후회스러웠다. 스펙 관리를 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많은 법대 학생들이 나와 같았을 것이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다. 사법시험 폐지 년도는 목전으로 다가왔다. 고시반이 위치한 인문사회관 4층은 황량하다. 신규 수험생은 찾아보기 힘들다. 노장 수험생들만이 텅 빈 고시반을 지키고 있다. 법대 자체는 존치 논쟁에 휩싸였다. 학교에서는 고시반을 대체할 로스쿨 준비반을 계획하였다. 일종의 자구책을 마련한 셈이다. 하지만 저물어져가는 고시반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로스쿨의 입학 요건과 관련이 있다. 로스쿨 입학을 위해서는 학점, 공인  영어점수, 법학적성시험(LEET) 점수가 필요하다. 즉, 취업시장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학점관리를 열심히 하고, 영어 학원을 다니면 그만이다. 법학적성시험도 이름만 그러할 뿐이다. 실질적인 평가요소는 속독과 추리, 그리고 작문 능력이다. 굳이 준비반이 필요치 않은 것이다. 

 사법시험은 50년 가까이 법조인 선발을 담당해왔다. 그간 훌륭한 법조인들도 많이 배출시켰다. 그러나 심각한 사회적 병폐 또한 야기하였다. 법조계는 배타적 독점으로 점점 더 폐쇄화되었다. 한때는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이 가능한 시험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달라졌다. 이제 사법시험은 개인의 노력만으론 합격하기 힘들다. 수험서와 강의, 심지어 공부법까지 정형화되어 버렸다. 이를 갖추기 위해 만만치 않은 비용이 필요하다. 생활비까지 포함하면 월 평균 120만 원 이상이 소요된다 한다. 합격까지는 적어도 3년 이상의 긴 시간이 걸린다. 즉, 합격을 위해선 가정 형편상의 여유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사법시험 합격자 3명 중 1명은 강남출신이 차지하고 있다. 사법시험을 통해 부와 권력이 세습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정부는 로스쿨 도입이 많은 사회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중 하나가 폐쇄적인 법조계의 개방이다. 로스쿨 입시 과정에서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이 입학하였다. 그러나 다양한 대학의 학생들이 입학하진 못하였다. 로스쿨 측의 평가기준을 충족하였다 해도 입학을 보장할 수 없다. 명문대 졸업이란 묵시적 요건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등록금 또한 만만치 않다. 로스쿨의 연간 등록금은 평균 1,500만원이다. 이는 웬만한 ‘중산층’에게도 부담되는 금액이다. 등록금이 입학의 실질적 진입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로스쿨이 오히려 법조계의 폐쇄화를 가속시키고 있다. 이는 특권층의 재생산 문제로 연결될 수 있다. 사법시험의 사회적 문제가 또 다시 반복되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6일, 3000여명의 로스쿨 재학생들이 변호사 시험 합격률을 50%로 제한하자는
대한변호사협회의 주장에 반발하여 단체로 자퇴서를 제출하는 집단행동을 벌였다. 도입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로스쿨 제도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이 필요해 보인다.
사진 출처 - 민중의소리

 전문가들 사이에서조차 로스쿨의 미래에 대한 의견은 엇갈린다. 물론, 로스쿨의 긍정적 측면을 주장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이들은 로스쿨 제도의 성공적인 정착을 예견한다. 로스쿨 제도가 사법시험의 병폐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시선이 압도적이다. 법조종사자 중 79%가 로스쿨 폐지를 주장한다. 이들 중 42%는 사회계층의 단절을 우려한다. 제도 자체가 상위계층에 유리하다는 이유에서이다. 또한, 선발과정의 공정성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지금의 방식으로는 혈연, 지연, 학연이 개입할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이는 로스쿨의 ‘현대판 음서제’라는 별명과 관련성이 크다. 

 ‘한국형 로스쿨’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변화할 것이다. 초기이니만큼 많은 부작용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변화 과정에서 사법시험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어야 한다. 더 이상 법조계가 ‘가진 자들의 전유물’로 남아서는 아니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한 로스쿨이었다.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해 봐야한다. 자칫하면 ‘사다리 걷어차기’식 제도로 악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삽질이 무엇이기에(김 녕 위원)

김 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4대강 공사를 위해 설치한 낙동강 구미취수장의 임시보가 무너졌습니다. 이 사고로 경북 구미시와 일대 50여 만의 식수 공급이 중단되었습니다.” 라는 소식이 바로 며칠 전인 5월 8일 밤 9시 MBC 뉴스 데스크에서 보도된 바 있다. 공영방송 9시 뉴스에서도 이젠 4대강 사업의 문제점이 보도되나 싶었다.  

 정부가 애초에 제시한 청사진은 물 부족 해결, 홍수 예방, 수질 개선, 그리고 과도한 개발로 황폐화된 하천 생태계를 복원하고 침체된 지역경제를 살린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비참하다. 16개의 보 건설과 준설로 인해 4대강 본류의 수질은 악화되었고 침수지역은 지천까지 넓혀졌으며, 생물종은 절반으로 줄었고, 4대강 사업이 올려놓은 땅값이익은 그 대부분이 외지인에게 돌아갔다. 허나, 법조인들은 이런 문제를 소송을 통해 바로잡겠다고 하고 정치권은 선거를 통해서 바로잡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보고만 있는 국민은 어떡해야 하는가, 어떡해야 했는가. 강변에서 농사짓던 농민들은 생존 기반을 잃었고, 보도조차 통제된 채, 4대강 공사 노동자들은 쌓이는 피로와 허술한 안전조치로 인해 조용히 죽어나갔다. ‘사람을 잡는 개발’이자 ‘죽음의 행렬’이다.

 4대강 공사가 시작된 2009년 11월 이래로 지금까지 4대강 공사장에서 숨진 노동자와 이 사업과 연관되어 목숨을 잃은 국민은 모두 30명이다. 2012년 정권 재창출을 위해 올해 말 완공을 목표로 공사를 채근하는 대통령 때문에 안전관리는 뒷전인 채, 달리는 공사차량에 운전자가 치여 죽고, 준설중인 굴착기와 준설선에서는 노동자가 물에 빠져 죽었다. 나흘간 4명의 노동자가 공사현장에서 목숨을 빼앗겼는데도 정부는 4대강 사업 중단은커녕 친수구역개발사업으로 규모와 영역을 오히려 훨씬 키웠다(정의구현사제단 소식지,「빛두레」, 2011년 5월 1일자 참조). 사업목적과는 너무 다른 이런 삽질, 그 무모하고 무식한 ‘속도전’, 그야말로 누구를 향해 분노하고 통곡해야하는지 묻고 싶으면서도, 참으로 ‘가관’이다. 정부와 대통령은 왜 애도의 말 한마디 없이 쉬쉬하는가? 어찌 이리도 잔인할까?

 작년 2010년 7월 7일은 경부고속도로 개통 40주년 된 날이었다. 한국경제발전사, 아니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 세계적으로도 거의 유례가 없을 그 미친 ‘쾌거’ 역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요구했다. 총 428km의 고속도로를 불과 2년 5개월(1968년 2월 1일 착공, 1970년 7월 7일 개통)에 완성했는데, 토목기술의 부족을 머릿수로 메우는 식으로 공정을 밀어붙였기에 연인원 850만 명이 도로 건설에 동원되었고, 가장 위험한 공사였던 터널공사도 인력으로 기술부족을 메우다 보니, 경부고속도로 건설 도중 총 77명이 사망했는데 그 중 대부분이 터널공사 낙반사고로 인한 사망이었다고 한다.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왔던 당제터널 구간 근처인 금강휴게소에다 박정희 대통령은 위령탑을 세워 개통식 날에 직접 제막을 했다고 하며, 이은상은 추모글에서 이들을 “조국근대화를 위한 민족행진의 전사”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하지만, 순직 노동자 유가족들은 정부로부터 보상금 한 푼 못 받았고, 다만 소속 건설사에서 유가족에게 50만원(현재가치로 약 500만 원가량) 정도의 위로금을 지급했다고 알려졌을 뿐, 이들은 너무나 억울하게, 너무나 빨리 잊혀졌다. 겨우 도로공사 측에서 매년 위령제를 열어 왔다는 사실에서나 위안을 찾아야 할까.(「조선일보」, 2010년 7월 7일,「동아일보」, 1970년 7월 7일 참조). 비슷한 논리인 이명박 정부는 4대강 개발 순직 노동자들에 대해 어떻게 나올까. 아니, 그때 어떻게 대해준들, 글쎄, 그게 다르랴.


2009년 11월 이래로 지금까지 4대강 공사장에서 숨진 노동자와 이 사업과 연관되어 목숨을 잃은
국민은 모두 30명이다. 노동자들의 안전을 외면한 '속도전' 공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사진 출처 - 프레시안

 필자가 믿는 그리스도교의 핵심 중의 하나가 사람의 존엄성에 대한 가르침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라는 성서 구절은 이와 관련하여 흔히 인용되거나 상기되는 아주 유명한 구절이다. 일부를 인용해보자.

 “당신의 작품,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달아 놓으신 달과 별들을 우러러 보면/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주십니까?/ 그를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손수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발밑에 거느리게 하셨습니다./ 크고 작은 온갖 가축과/ 들에서 뛰노는 짐승들하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물길 따라 두루 다니는 물고기들을/ 통틀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구약성서 시편 8:3-8)(강조 추가)

 곧,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졌기에 사람 안에는 하느님이 담겨 있다. 따라서, 사람에게 모질게 대하는 것은 곧 하느님께 모질게 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저 하늘과 달과 별들을 선물로 받은 존재이자, 모든 피조물의 으뜸이며, 자연만물을 다스리는 이이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곧 하느님이 담겨 있고 우주가 담겨 있다.  

 올해 내 4대강 사업이 다 완공되면 국민들이 비로소 자기의 뜻을 알아줄 거라는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 그것에 공사 기간을 어떻게 해서라도 맞추라는 상부의 지시와 독촉, 시공사들 간의 경쟁에 떠밀리며, 삽질은 앞으로도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갈 것이다. 그리고, “과연 누가 센지 제대로 한번 붙어보자!”라는 식으로 기나긴 장마와 홍수의 계절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크고 작은 온갖 가축과 들에서 뛰노는 짐승들하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물길 따라 두루 다니는 물고기들을 통틀어 다스리게”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시키셨는데, 삼백 몇 십만 마리 가축들이 졸지에 매장되어도 가축들에게는 커녕 국민들에게도 변명 말고는 한마디 사과조차 없던 정부이다. (생매장 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미 돼지는 새끼 돼지들에게 젖을 물렸다는 언론보도가 생각난다. 그게 신기했나?) 벌써 30명을 넘고 있는 ‘물길’ 순직 노동자들과 국민들의 희생에 대해 철저히 침묵으로만 일관하는 정부에게 묻고 싶다, “아니, 도대체 사람을 무엇으로 여기는데, 그리고 그 삽질이 도대체 무엇인데?”라고.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역사가의 윤리적 전환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문화연구학과 교수

 4월의 마지막 주말에 “4·3트라우마, 그 치유의 모색”이라는 주제로 개최된 학술대회참석을 위해 제주도를 다녀왔다. 나는 <상흔의 역사에서 치유의 역사학으로〉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는데, 서양의 여러 나라에서 진행되었던 과거청산과 화해를 위한 사례들을 참고삼아 우리의 아픈 과거사를 애도하고 치유하는 방안을 모색하려는 내용이었다. 역사학자, 심리학자, 정신과의사, 민속인류학자 등이 각각 다른 시각에서 과거 상흔(傷痕)의 생채기들을 어떻게 보듬고 포옹할 것인가를 학문적으로 진단해 보려는 것이 오전순서의 주요 내용이었다. 오후에는 일본식민시대의 ‘위안부’,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 ‘대구 10월 항쟁’ 피해자, ‘여순사건’ 피해자 등의 증언에 이어 관련 활동가들의 현황보고가 있었다. 다음 날에는 제주4·3평화공원과 평화기념관, 너븐숭이 4·3위령성지,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 등 기억의 터전을 답사했다. 제주4·3평화재단이 주최하고 제주4·3연구소가 주관한 1박 2일 동안의 모임을 통해 필자가 배우고 느낀 몇 가지를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자 한다. 

 이 땅의 산하에는 억울하게 목숨을 앗긴 혼령들의 흔적과 목소리가 곳곳에 묻혀있다. 할아버지-아버지 세대를 포함한 우리는 식민시대와 제국주의, 냉전(분단)체제와 독재정권이라는 ‘극단적인 20세기'의 광기가 잉태한 시대적 폭풍우를 온 몸으로 견뎠다. 해방이후에는 근대화, 통일조국, 한국적 민주주의 건설이라는 구호에 맞춰 불법감금과 집단학살, 야만적인 고문과 성폭력 등이 공권력의 이름으로 실행되었다. 아직까지도 올바른 이름을 부여받지 못하고 있는 각종 ‘사건들’과 ‘사태들’의 희생자/생존자/유족들은 국가권력의 오남용과 이데올로기적 칼날에 베여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시키고 참여정부가 계승했던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불행했던 과거를 둘러싼 진상규명과 망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했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고도 아득하다. 

 과거가 해소되지 않은 분노와 트라우마로 가득하다면, 역사가는 잠들지 못하는 영혼을 초혼가로 달래며 씻김굿을 춤춰야 하는가? “빨갱이 가족이라고 손가락질 할까봐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나는 소똥말똥으로만 살았습니다.” 책으로만 읽었던 사건의 생존자가 토해내는 기억(증언)의 실타래가 만드는 무늬를 바라보면서 나는 ‘역사가의 이상한 운명’을 숙고해 본다. 과거에 진정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를 실증적으로 따져 기록함으로써 ‘과거의 대변인이자 미래의 안내자’를 자임했던 옛날 역사가와는 다른 새로운 종류의 역사가가 최근에 출현(출몰?)하고 있다. “그는 선배들과는 달리 자신의 주제와 자신이 맺고 있는 밀접하고 친숙하고 개인적인 관계를 기꺼이 인정하고 그 관계를 심화시킴으로써 낯선 과거를 더 잘 이해하는 지렛대로 삼았다.” (피에르 노라, 〈기억과 역사 사이에서〉, 《기억의 장소》1권. 필자가 편집인용.)


제63주년 위령제가 열린 4.3평화공원에서 가족의 비석을 껴안고 오열하는 4.3유가족
사진 출처 - 제주의소리

 말하자면, 객관적인 관찰이나 가치중립적인 거리 두기로 과거를 차갑게 분석하고 설명하는데 머물지 말고 감정이입적인 감성으로 무장하여 “역사가 그저 [죽은] 역사에 지나지 않는 것을 막아내”고자 애쓰는 것이 새로운 역사가의 숙명이라는 뜻이다. 생각해 보라. 과거에 정녕 무슨 일이 제주도에서, 여수에서, 대구에서, 그리고 광화문에서 (왜) 발생했는지를 따지는 이쪽과 저쪽의 해석이 충돌하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증언이 모순되며 국가권력의 부침에 따라 그 기념연설이 변주(變奏)된다면, 누가 감히 역사적 진실을 최종적으로 판단하고 판결할 것인가?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희생자/생존자/유족들이 넋두리처럼 읊조리는 파편적인 신음과 외마디에는 실증적인 잣대로는 측정할 수 없는 과거에 대한 또 다른 무거운 진실이 실려 있다. 치유되지 못하고 방치된 아픈 기억들이 정상화, 과거와의 화해, 혹은 국론통일이라는 이름으로 희석, 표준화, 그리고 화석화 되려는 오늘, 역사가들이 직면한 과제는 억압된 목소리에 예민하게 주파수를 맞춰 그 메시지를 공감적으로 접수하여 경청하는 것이다. 

 제주4·3 평화기념관에는 백비(白碑)―묘비명이 적혀있지 않은 맨 묘비―가 전시되어 있다. 60여 년 전에 발생해 대략 3만 명이 희생되었던 사건에 대한 진실공방은 ‘4·3반란’, ‘4·3사태’ 혹은 ‘4·3민중항쟁’이라는 명칭들이 반영하는 논쟁과 갈등보다도 더 오래 계속되리라. 쓰여 지지 않는 역사 혹은 단정할 수 없는 과거에 대한 공백 남기기는 과거사실 그 자체에 대한 부정이나 탐구의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백비야말로 과거가 남긴 희미한 흔적들과 경쟁적인 목소리들을 반죽하여 제멋대로 ‘만들어지는 역사’를 향해 죽은 자들이 던지는 소리 없는 웃음이 아닐까. 묘비명 없이 누워있는 창백한 묘비를 바라보며 나는 ‘불안한 과거’를 색칠하는 당파적인 역사서술의 어리석음과 ‘위험한 현재’의 비탈길에 서서 ‘오지 않을 미래’를 마중해야 하는 역사가의 한계와 겸손함을 동시에 배운다. 실증주의적 국가 만들기의 신화를 깨고 그 틈바구니로 얼굴을 내미는 새로운 종류의 역사가들이 자기 고백적인 윤리적 전환을 모색해야 할 순간이다.


능동적 삶을 복원하고 싶다(장경욱 위원)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어디에 빠져 사는 사람이 좋다. 취미, 운동, 드라마, 쇼핑, 게임, 일 무엇이든지 빠지면 흥겹다. 열정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인생은 어떠한가. 열정을 갖고 재미와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삶을 능동적 삶이라 불러본다. 

 삶은 수동에 빠지기 쉽다. 먹고 사는 문제에서 한결같이 힘들기 때문이다. 입에 풀칠 할 일이 힘들다. 지겨워도 일해야 산다. 짤리면 끝장이다. 항시 불안하다. 인생에 재미와 열정을 더하기보다 세상에 더 많이 지배당한다. 재미, 열정, 삶의 애착이 사라진다. 머리가 텅텅 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일하는 노동자의 삶이 그렇고 공부하는 대학생의 삶이 그렇다. 수동에 빠져 살아가는 삶은 누가 보든지 흥겹지 않다. 일자리 걱정, 취업 걱정에 한치 앞도 볼 수 없다. 재미와 열정을 더하는 삶을 살아갈 마음의 여유가 없다. 살아남아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구조조정에, 청년실업에 자존감이 무너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끝내 자살한다.

 능동적 삶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것을 위협하는 위기의 한국사회에서 비명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는다. 수동에 빠져 숨죽여 살아가는 삶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기 때문이다. 자신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기 전까지는 우리 사회의 위기를 남의 집 불구경 하듯 한다. 위기에 응전하여 함께 술렁거리지 않는다. 나약해진다. 배짱이 없기에 맞서지 않는다. 생계 걱정에 혼자 끙끙 앓으며 자신의 이해관계에만 민감해진다. 생사여탈권을 자본권력에 넘겨주고 자본의 이윤논리, 경쟁논리에 복종한다. 자본에 아부하고 자본의 논리를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피도 눈물도 상식도 없는 세상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삶을 길들이는 지배 권력에 복종하여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고 살다가 결국에는 자신도 경쟁의 낙오자가 되어 솎아지게 된다. 솎아내기에 걸려서도 뭇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체면을 따지다 대들지 못한다. 인생의 위기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것이 없어 자포자기하고 만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구조조정의 위기상황에서 노동자는 능동적 삶을 복원해야 한다.


제121주년 세계 노동절인 지난 5월 1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노동자대회에 참석한
대학생들이 등록금 인하와 임금 인상등을 요구하며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배짱은 가장 튼실한 유도책이다. 눈치보고 체면을 따지고 더욱 움츠려들어 자본에 사정을 해서야 자본의 솎아내기를 당할 수 없다. 자본에 순응하고 복종하며 잃어버렸던 배짱을 회복해야 한다. 경쟁을 위해 이윤을 좇아 노동자를 솎아 노동자를 갈라놓는 자본의 논리를 거부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유능치 못해 솎아진 것으로 자책하면 아무 것도 할 게 없다.

 자신의 개인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노동 전체의 이해관계에 민감해져야 한다. 실리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투쟁과 협상에서 자본권력의 기망과 회유, 탄압을 극복하기 위해 꼭 지녀야 하는 태도이다. 그것이 순응하는 삶에 빠져 상처받은 자존감을 살려내는 길이다.

 노동자의 능동적 삶은 노동이 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한국사회를 이루기 위한 대안이다. 노동자가 위기의 한국사회를 바꾸기 위한 일에 열정을 갖고 대안사회의 상을 좇아 지혜를 닦고 힘을 길러야 한다.

 능동적 삶은 인간의 본성에 꼭 맞다. 배짱과 열정, 대의와 지혜를 가진 우리들은 인간의 본성에 위배되는 수동적 삶을 거부하고 능동적 삶의 실현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장애물을 곳곳에서 제거할 것이다. 치솟는 등록금, 청년실업에 신음하는 청년학생들의 능동적 삶은 누가 복원해 줄 것인가.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인생의 위기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어 자살하는 수많은 한국인들을 위해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들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따뜻하게 감싸 줄 우리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과 함께 배짱 갖고 세상에 맞서고 싶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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