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교수를 7년 만에 다시 만나다 -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독일 베를린 시내 외곽을 달리던 전철이 한적한 시골역같은 곳에 멈춰 섰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문이 열리길 기다린다. 문은 안 열리고 전철이 다시 움직인다. 그때서야 뭐가 문제였는지 깨닫는다. 독일 지하철에선 문에 달린 단추를 눌러야 문이 열린다. 다음 역에서 전철을 반대방향으로 갈아탔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이번엔 제대로 단추를 눌렀다. 단추가 빨간 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뀌며 문이 열렸다. 전철역 바로 옆 주택가로 들어섰다. 초인종을 누른다. 현관문이 열렸다. 3층에 다다르자 7년 만에 만나는 반가운 분들이 따뜻하게 안아주며 어서 들어오라고 잡아끈다. 송두율 교수와 정정희 여사를 그렇게 7년만에 다시 만났다.

 두 분을 처음 만난 건 2003년 9월이었다. 만났다기 보다는 직접 얼굴을 본게 처음이라고 하는 게 정확하겠다. 그 해 9월 22일 두분은 두 아들을 데리고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1967년 유학 이후 35년 만에 어렵게 성사된 귀향이었다. 1967년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던 송 교수는 그 해 독일로 유학을 갔다. 처음엔 5년 있다 돌아올 생각이었다고 한다. 1972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거두 위르겐 하버마스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곧바로 돌아왔다면 그의 인생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즈음 두 분은 해외에서 유신독재 반대운동에 참여하면서 귀향의 꿈을 가득 한켠에 묻어둬야 했다.

 그렇게 35년이 흘렀다. 두 분은 독일 국적을 취득하고 두 아들은 독일인으로서 자라며 부모의 고향에 왜 가지 못하는지 묻기도 했다. 35년 만에 돌아온 고국은 이들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국가정보원과 검찰은 집요하게 송 교수를 심문하고 그와 관련한 정보를 언론에 흘렸다. 일부 언론은 여기에 적극 개입했다. 국정원·검찰·언론은 핑퐁 게임하듯이 그를 ‘해방 이후 최대 간첩’으로 몰아가는 노골적인 프로파간다 작업을 벌였다. 결국 송 교수는 구속됐다.

 법원은 2004년 3월 징역 7년을 선고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다행히 그 해 7월 2심에서 일부 무죄 및 집행유예로 석방이 됐고 송 교수 부부는 곧 독일로 돌아갔다. 지난 2일 만났을 때 정 여사는 “당시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 몸으로 겨우 독일로 돌아왔다.”고 회상했다. 결국 대법원은 2008년 독일 국적취득 이전의 방북을 뺀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해 고등법원으로 파기 환송했고 이는 그해 8월 확정됐다. 1972년 이후 교편을 잡았고 1982년엔 교수자격까지 취득한 학자를 “알고보니 교수가 아니었다.”는 식으로 몰아가며 기자회견장에선 대놓고 “송 교수님이 아니라 송 선배님께 질문하겠다.”는 뻔뻔한 말을 하던 언론들은 구속 직전까진 나라가 백척간두에 선 양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구속되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모른 체했다.


송두율 교수와 정정희 여사
사진 출처 - 필자

교수 은퇴 이후 더 바빠

 독일로 돌아가고 나서 송 교수는 2009년 가을 정년퇴임했다. 하지만 교수 당시보다 지금이 더 바쁘다고 했다. “한국에선 교수란 자리가 빨리 늙어버리는 것 같아요. 제 지인들을 봐도 그렇죠. 이 곳 독일에선 나이를 먹을수록 학자로서 더 정열적으로 글을 씁니다. 저 역시 힘이 없어 글을 못 쓰는 날이 오기 전에는 계속 글을 쓰려고요.” 아침에 일어나면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하루 종일 책을 쓰는게 요즘 일과라고 했다. 대략 6시간 정도 집필에 몰두한다. 작업은 주로 조용할 때인 저녁 늦게 하는 편이란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게 대여섯 권입니다. 그 가운데 독일어로 쓰는 책이 세 권이죠. 하나는 비엔나에 있는 출판사에서 곧 출간할 예정인데 내가 맡은 부분은 탈고를 거의 했습니다. 1910년부터 2010년까지 한국이 지난 100년 동안 겪어온 정치와 사회 역사를 다뤘습니다. 전문서는 아니고 유럽에서 여전히 한국에 대해 잘 모르니까 핵심 문제를 짚어서 정리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독일어로 쓰는 마지막 한국 관련 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더 이상 한국 문제에 대해 쓰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그래도 내 고향이 한국이니까 쓰게 됐습니다. 두 번째는 일종의 자서전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1967년 유학온 뒤 45년 동안 독일에서 겪었던 내 지적편력을 정리하고 고찰하려고 합니다. 현대성(모더니티)을 철학적으로 고찰한 책도 준비중이죠.”

 몇몇 한국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하자며 제안이 들어온 적이 있다고 했다. 현재 두 가지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하나는 한국에서 여전히 ‘경계인’의 의미에 대해서 오해도 많고 궁금증도 많다며 그에 대한 대중서를 써 달라는 요청을 받고 동의한 뒤 대략 ‘경계인과 세계인’이란 주제로 대학생을 위한 교재 형식으로 구상중이다. “독일에서 반백년 가까이 지내다보니 한국어로 글을 다듬는 게 말처럼 쉽진 않다.”면서 “정리는 얼추 해놨는데 출간을 언제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고 했다. 또 하나는 살아온 과정을 되짚어보는 자서전을 쓰기로 한 출판사와 약속을 했다. 


독일에선 오래되고 천장 높은 게 비싼집

 두 분은 지금 집에서 살기 시작한지 수십 년이 됐다. 뮌스터대 등에서 교수로 일할 때는 송 교수가 기차로 대학에 가서 며칠 지내다가 집으로 오곤 했다고 한다. 집 근처에 김나지움도 있는 등 교육여건이 좋은데다 집 자체도 마음에 들어서 이사 갈 생각을 안했다고 한다. 한국과는 정 반대로 독일에선 오래되고 천장이 높은 집이 비싼 집으로 통한다는 얘길 들었다며 아는체를 하자 송 교수는 무심한 듯 자세하게 집자랑을 했다.

 “천장 높이는 3.5m”이고 거실 바닥의 목재는 “길이가 8m”이고 “19세기 프로이센 장교들이 살던 집”이었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집은 가운데 거실을 중심으로 양쪽 끝을 다 개방할 수 있다. 손님들을 저녁에 초대할때는 작은 파티장이 될 수 있다. 주변에 나무가 많아서 공기도 맑고 새소리를 들으며 아침에 잠을 깬다. 건축양식도 현대 양식으로 넘어오기 직전이라며 ‘희소성’을 강조했다. 자제들을 낳으며 수십 년을 산 집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집 얘기를 듣다가 그가 한국에서 10개월 가까이 겪었던 서울구치소 독방을 떠올렸다. 35년 동안 입식 생활을 해서 한국식 독방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게 너무 힘들어하는 그를 위해 변호인단과 주한독일대사관은 책상을 넣어달라고 요구했더. 1990년대 윤금이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한국 교도소에 수감됐던 케네스 마클 이병은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따라 미국의 기준에 준한 감옥에서 인터넷까지 즐기며 감옥생활을 했지만 당국은 송 교수에 대해서는 선례가 없다며 거절했다.

 송 교수가 수감돼 있을 당시 두 번 그를 면회할 수 있었다. 한번은 정 여사와 둘째아들을 따라서 갔고, 두 번째는 혼자서 갔다왔다. 면회시간은 짧고 가족끼리 할 말이 많은데 끼어드는게 예의가 아니라서 뒤에서 세분이 독일어로 대화하는걸 멀뚱히 지켜보기만 했다. 정 여사는 “당시 그게 마음에 걸려서 대책위원회에 얘기해서 면회날짜를 하루 잡아달라고 했다.”고 했다. 사실 송 교수와 만났다고 할 수 있는 건 두 번째 면회에서였다. 그러고보니 송 교수와 대화를 나누는 건 그 때 이후 베를린에서 처음이었다. 구속 이후 언론 관심이 멀어질 때 나는 꾸준히 취재를 계속했다. 법정심리가 있는 날은 어김없이 기자회견이 열렸고 나는 거의 모든 자리를 함께했다. 사실 정 여사가 나를 기억하고 단독인터뷰에도 응해줬던 게 다 그 덕분이었다. 정 여사는 당시를 떠올리며 “기자 같지 않았다”고 표현했다.

 두 분은 나를 위해 장을 보고 손수 음식을 준비했다. 오랜 해외취재일정 동안 한국 음식을 못먹었을까봐 고기쌈을 준비했다. 집에서 직접 기른 채소도 꺼냈다. 참 맛난 저녁이었다. 독일에 처음 왔을 때는 김치를 담그고 싶어도 재료가 없었다고 한다. 궁여지책으로 중국인 가게나 인도인 가게에서 비슷한 걸 사다가 김치 대용으로 하기도 했단다. 그렇게 몇 십년을 지내다보니 이제는 한국요리를 하면 전통적인 맛이 난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라고 한다. 한편으론 옛 맛을 간직하고 있단 뜻이고 다른 한편으론 평균적인 한국인의 입맛도 많이 바뀐 탓이리라. “가위의 양쪽 끝이 벌어지며 서로 멀어지듯이” 두 분은 가슴속에 간직한 한국과 실제 한국의 거리는 멀어져 있었다. 그 덕에 한국에 와서 상당한 문화충격을 받았다. “초대장을 못 받았다”며 지인의 회갑잔치에 갈 엄두를 못내기도 했다.

 정작 두 분이 기대했던 변화는 너무 더뎠다. 두 분은 민주화된 한국에 용기를 얻어 귀국했지만 고국은 그들이 한국을 떠날 때도 말많고 탈많았던 바로 그 국가보안법으로 송 교수를 잡아넣었다. 정작 송 교수는 수십년 동안 통일이란 화두를 철학적으로 고찰했지만 고국은 그에게 ‘친북인사’란 딱지를 붙였다. 하버마스나 노엄 촘스키, 하워드 진 등 전 세계 석학들까지 송 교수 구명운동에 나섰지만 정작 한국에선 송 교수를 아는 사람 중에서도 짐짓 고개를 돌려 모른척했다. 그나마 송 교수 비난에 동참한 사람들에 비하면 양반이라고 해야 할까.  


거실에서 송두율 교수와 함께. 벽에 걸린 액자는 "깨끗함은 결국 화해와 기쁨으로 통한다"는 뜻이다.
사진 출처 - 필자


밤늦게까지 이어진 이야기꽃

 저녁 7시에 초대를 받았는데 저녁을 먹으며, 또 와인을 곁들여 수다를 떨다 보니 시간이 11시나 돼 버렸다. 두 분에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셋이서 당시 얘기를 떠올리며 추억에 젖었다가 가슴 아팠던 얘기에 먹먹해 했다. 고국에 대한 섭섭함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한국에 대해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송 교수는 “한국에 대한 책은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도 인터넷을 통해 한국 소식을 왠만큼 파악하고 있었다. 정말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서 들었던 많은 얘기 가운데 상당수는 이 글에 담을 수 없다. 예민한 문제들이라서 두 분은 자신들이 한 얘기가 널리 퍼지기를 원치 않았다. 그저 가슴에 묻어둘 밖에.

 오랫동안 두 분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처음 송 교수 책을 읽었던 1995년 이후, 그리고 두 분이 망명하듯 한국을 떠날 당시부터 언제나 나는 이 날을 기다려왔다. 그리고 7년 만에 다시 만났다. 하지만 얘기를 하다보니 벌써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나는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몇 시에 오겠느냐며 약속시간을 정할 때 낮에 가겠다고 할 걸. 이제 베를린을 떠나고 나면 또 언제 다시 그 분들을 뵐 수 있을까.

 그래도 ‘공식’ 인터뷰를 빌어 소개할 수 있는 얘기는 건졌다. 40년 가까이 교편을 잡은 교육자로서 송 교수는 최근의 한국의 교육을 둘러싼 갈등에 대해 자신의 소견을 밝혔다. “독일의 경우 대학 교육은 모두 국가가 책임지는 구조다. 최근 일부 주에서 등록금을 부과하고는 있지만 그마저도 한 학기 500유로에 불과하다. 대학생들에게 버스와 지하철을 무료로 해준다거나 하는 등 각종 혜택도 많다. 한국 사립대학들이 한 학기에 800~1000만원 수준의 등록금을 받는다는 건 상대적인 국민소득을 감안할 때 엄청난 부담이다. 이는 ‘교육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반값 등록금’ 논쟁에 대해서는 “문제는 단순히 등록금이 많고 적고 문제에서 그치지 않는다.”면서 “대학 졸업자 대부분이 실업자가 되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등록금을 반의 반으로 줄이더라도 문제는 고스란히 남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고학력 실업문제, 즉 교육과 고용 정책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장기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세계화니 국제화니 하는 이름으로 영어수업을 의무화하는 곳이 늘고 있다. 심지어 영어수업 가능자를 교수 임용 조건으로 내거는 곳도 있다. 이에 대해 송 교수는 “미쳤다”며 상당한 우려를 나타냈다. “미국에서 유학했다고 하기만 하면 미국에서 빌빌대던 사람도 한국에선 교수로 대접받는다. 이래가지고 학문이 어떻게 발전하고 사회가 어떻게 발전한단 말인가.” 그는 ‘학문의 주체성’이란 측면에서 이 문제를 꼬집었다.

 “영어를 잘 구사해야 한국 학문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한다거나 교육 수준이 높아진다는 생각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어떤 내용을 채우느냐가 중요하다. 아무리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교수라 해도 문제는 어떤 내용을 강의하느냐라고 할 수 있다. 언어는 수단이다. 수단을 목적으로 삼는 건 말 그대로 ‘주객전도’라고 할 수 있다. 영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하는 전문인력을 적극 육성해야 하는건 맞지만 5000만 국민 모두가 영어 도사가 될 필요가 있겠나. 자국어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독일이나 프랑스를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 지역의 특성을 감안하지 않는 세계화는 없다.”


송 교수의 비리(?)를 폭로합니다

 얘기를 하다가 정 여사는 내게 송 교수의 엄청난 비리(?)를 폭로했다. 유학 뒤 정 여사는 사서로서 독일 대학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송 교수가 논문 준비와 유신반대운동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데다 아이들까지 생기자 도저히 직장을 계속 다니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결국 사표를 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워낙 대우가 좋은 자리인 데다가 일을 하고 싶은 욕심에 고민이 정말 많았단다.

“어렵게 사표를 쓰셨겠네요.”
“아녜요. 나는 사표를 도저히 못 쓰겠더라고요. 결국 나는 아쉬워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저 양반이 대신 사표를 썼어요.”

 정 여사는 이어 “그렇게 뒷바라지해서 교수 시켰는데. 한국 가서는 또 옥바라지에 1년 가까운 세월 보내며 내가 폭삭 다 늙어 버렸죠.” 내가 “페미니스트들이 들으면 엄청난 반응이 나오겠는데요. 이제 집안일은 왠만한건 다 떠넘겨도 되겠네요.”하며 맞장구를 치자 정 여사는 그 말이 맞다고 하면서 송 교수를 흘겨보며 이렇게 말했다. “후식은 당신이 좀 가져오시죠.” 송 교수, 멋쩍게 웃더니 말없이 부엌으로 가서는 예쁜 유리컵에 아이스크림을 담아왔다. 우리는 후식을 먹으며 또 수다를 떨었다.

 그러고 보니 거실 한가운데 운치 있게 자리잡은 원목책상을 보고 송 교수에게 “멋진 서재네요. 저기서 글을 쓰시면 글이 더 잘 써지겠습니다.”라고 하자 송 교수가 “아니 이건 저 사람꺼고, 나는 저 옆방에.”했던 게 떠올랐다. 송 교수가 구치소에 있을 당시 바짝 바짝 말라가던 때를 생각하면 송 교수는 앞으로도 안방마님을 잘 봉양해야 할 듯하다.

 추 신: 정 여사는 얼마 전 발코니에 오이를 심었다. 원래는 꽃만 길렀는데 최근 새로 생긴 취미생활이다. 까맣게 윤기 있는 독일 흙은 토질이 워낙 좋아 따로 거름을 안해도 잘 자란다. 올 여름에는 두 분이 하루 종일 먹고도 남을만큼 오이가 열릴 것이다. 하늘 높이 줄기를 뻗으며 풍성하게 열릴 오이처럼 두 분에게 행복과 기쁨이 넘쳐나길 빈다. 그리고 언젠가, 두 분을 서울에 있는 우리 집에 초대해 점심을 대접할 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


변종 삼포세대의 변 - 김현진/ 에세이스트

김현진/ 에세이스트

 <제 5도살장>의 작가 커트 보네거트는 에세이집 <나라 없는 사람>에서 불과 백여 년 동안 인류가 교통이라는 이름으로 지구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보라고 말했다. 정말 그렇다. 석유고 석탄이고 다 꺼내 썼고 심지어 일본 쓰나미에 원자로까지 걱정할 일 천지다. 소위 결혼 적령기를 좀 넘어섰는데 하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바람에 장례식에 오신 손님들이 하나같이 이럴 때 사위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 이럴 때 결혼을 했었어야지, 그 자리에서 누굴 덮칠 수도 없고 어차피 없는 거, 당장 어디서 사올 수도 없는 바람에 잔소리만 잔뜩 들었다. 아버지 돌아가신 것만 해도 충분히 속상한데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신랑이 없다고 슬퍼할 정신까지는 없었으므로 아유 그럼요 사위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하고 넘겼지만 별로 마음이 급하지 않은 걸 보니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충분히 살겠나보다. 물론 어른들이야 걱정이 늘어진다. 서른이 넘었는데 시집도 안 가고, 외로워서 어떡하냐, 애도 낳아야지, 그런 말씀들 들을 때마다 그냥 귀나 후비게 되는 게 내가 철이 없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나도 요즘 유행하는 <삼포세대>인 모양이다. 삼포세대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서 안 하는 안타까움이 있지만 나는 귀나 후비적거리고 있으니 이를테면 살짝 변종 삼포세대인 셈이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게 삼포세대라는데 연애는 포기가 안 되는 건지 내가 별 인기 있는 것은 아니지만 눈이 좀 낮은 덕에 아무거나 걸리면 그냥 닥치는 연애하는 덕을 보는 건지 아예 간택이 안 되는 날까지는 안 할 생각은 별로 없고, 연애 대신 취업을 포기했다. 이것도 투철하게 포기한 건 아니고 회사 생활도 나름 해보고 이력서 냈다 떨어져도 보고 그러면서 증명사진을 보니 관상부터 아, 회사에 충성할 얼굴이 아니구나 싶어 일찌감치 현실에 적응하고 말았다. 결혼 까짓 거, 남자친구가 있어도 외롭고 제일 친한 친구가 있어도 외로운데 결혼한다고 뭐 그리 안 외로울까, 싶기도 하고 결혼하면 결혼한 대로의 좋은 점이 있고 안 하면 또 안 한 대로의 좋은 점이 있겠지, 하고 나쁘게 말하면 심드렁하게 좋게 말하면 태평해지는 것이 나이 먹는 것의 장점인 모양이다. 출산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 이미 인류는 온 지구에 차고 넘치는데, 지구의 인구 대폭발을 걱정하면서 조국의 저출산을 동시에 근심할 수 있는 이들의 심리를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 이미 60억이 있는데 나까지 보탤 필요가 뭐가 있나 싶다. 앞에서 커트 보네거트가 말했던 대로, 지금까지 있었던 인류가 이미 지구를 충분히 망쳤다. 그런데 뭐 그리 아득바득 낳을 일이 있겠는가 싶은 것도 있고 생명은 어떻게든 이어진다는 큰마음을 먹으면 내 새끼 낳겠다는 생각이 별로 안 생긴다. 게다가 인류가 꼭 존속되어야 할 건 뭐람, 인간이 없다면 지구는 평화로울 텐데.


지난해 4월 한 청년단체 회원이 20대의 팍팍한 삶을 풍자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주간경향

 그렇다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 맘대로 내 재미만 보면서 살겠다는 건 아니다. “나에게 인간은 두 종류로 나뉜다, 그것은 회원과 회원이 아닌 사람이다!!!!!!” 라는 인권연대 오창익 국장님의 사자후에 깊은 감명이랄까 위협이랄까 뭐 그런 것을 받아 인권연대에 당장 가입한다거나 사회적 문제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겠다, 역시 연대투쟁의 최고는 입금이지, 뭐 이런저런 다짐을 할 때의 마음은 항상 같다. 어차피 모두가 모두의 가족이다. 라 생각하면 마음 편하다. 물론 그들이 나를 가족으로 쳐주지 않을 때는 약간 서글프지만 어쨌거나, 굳이 억지로 내 아이 낳을 필요도 없고 굳이 법적으로 누군가와 가족이 되어야 할 필요도 없고 어슬렁어슬렁 살다가 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지 싶다. 물론 이것은 이종 삼포세대의 변이다. 그래서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애들이 골비고 나약하고 의지가 부족해서 굳이 삼포세대가 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88만원 세대니 44만원 세대니 삼포세대니 하고 너무 가엾이 여길 것도 없다. 모든 세대는 그 나름대로의 고통을 지닌 법이니까, 모든 세대는 그 나름대로 포기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냥, 너무 착취하거나 너무 잔소리만 하지들 말아 주십사고 하는 소리다.  


대학의 종말 ① - 대학으로 돈 버는 세상 끝내야(이찬수 위원)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1. 한 세대 전만 해도 교육은 근대 문화로의 변화를 선도하는 계몽적 역할을 수행했다. 개인과 집안의 신분을 상승시켜 주기도 했고, 산업 현장과 연결되면서 한국 경제발전의 기초를 담당하기도 했다. 교육이라는 보이지 않는 투자를 통해 격변하는 시대를 경험하며 헤쳐 온 기성세대는, 교육으로 성공한 이든 교육의 기회를 놓쳐 안타까워하는 이든, 한결같이 교육에 집착하는 성향을 보여준다. 그 정점에 대학이라는 것이 있다. 온 사회가 ‘올인’하다시피 하는 대학이란 무엇이며, 오늘의 우리의 대학은 어떤 형편에 처해있는 것일까.

 2. 대학은 본래 교수 또는 학습자들의 모임 또는 조직이었으나, 일제 때 ‘사립학교령’을 설치해 일정 수준의 재산이 있어야 학교 설립이 가능하도록 한 뒤에는 설립자가 교수를 고용하고 학생을 선발하는 흐름이 생겼다. ‘불온한’ 이들의 대학 설립을 제한하려는 전략적 의도에서였지만, 한국 사회에서의 사립대학은 그 뒤 시설로서의 물적 요소와 단체로서의 인적 요소를 함께 가지게 되었다.

 3. 국공립 대학(국가나 지자체 같은 공법인이 설립자가 되어 시설을 설치, 운영한다)과는 달리, 사립대학은 재산을 근거로 구성된 재단법인이 시설을 설치하고 운영하는 주체로 부각된다. 법인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학교의 운영 주체이자 소유자로 자리매김해가면서 교수를 고용하고 학생을 선발해 교육 사업을 벌이는 흐름이 커져간 것이다. 이 점만 놓고 보면 법인 이사 내지는 경영자가 교수나 학생에 대해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난 10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대학생, 시민, 야당인사들이 광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반값등록금 실현을 위한 국민촛불대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4. 하지만 대학은 그 의미와 속성상 ‘시설’만이 아니다. 대학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조직’이기도 하다. 대학은 교사와 학습자의 만남을 위한 조직적 중개자로서의 측면도 크다. ‘조직’이란 개별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을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결합시켜 능률과 합리화를 도모하는 활동 공간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대학은 분명히 하나의 ‘조직’이다. 당연히 조직 구성원 전체가 대학의 주체이기도 하다. 시설 투자를 한 설립자가 주인 의식을 가지는 것도, 학문의 보급자인 전체 교수가 주인 의식을 가지는 것도, 시설 운영의 근간인 등록금을 내는 학생이 주인 의식을 가지는 것도 다 정당하다.

 5. 때론 이 세 주체들이 충돌하곤 한다. 그러나 충돌이 있다는 것은 도리어 학교가 건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경영자, 교수, 학생이 어떻든 주체의식,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대학 교수들은 자신을 단순 피고용자로 여겨 자신을 선발한 경영자의 경영 방식이나 평가 기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때로는 비리도 눈감아주며 스스로 그에 종속되고 마는 경우가 더 많다. 그저 월급을 받으면 그만이라는 냉소적인 회피가 주류를 이룬다. 학생도 별 주체의식 없이 졸업장이라는 자격증만 따면 그만이라는 식의 소극적 처신에 머문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 특별히 사립대학의 온갖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이유는 주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 사립대학의 문제는 대학 구성원이 자기 주장을 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영역으로 도피해 개인의 안일만을 보전하려는 데서 비롯된다. 대학의 주체들이 교육의 공공성에 눈감으면서 소유 의식이 강한 설립자나 경영자의 욕망의 크기에 비례해 문제도 그만큼 커지게 되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이찬수 위원은 현재 한국종교교육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늙은 호박이 더 단거 모리나!” - 여성주의(를 지향하는)자의 고백과 궁금증(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 교육조직국장)

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 교육조직국장

 몇 년 전부터 동문회니 동기회니 하는 모임들이 하나 둘 씩 늘어가고 있다. 아마도 나이 40줄에 들어서면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정작 학교 다닐 때는 얌전하고 적극적이지 않던 친구들이 동창회를 주도하기도 하고, 괄괄한 성격에 많은 일들을 주도해서 모임도 주도할 것이라 여겼던 친구들은 오히려 모임에 적극적이지 않은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나는 명확한 주제가 없이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에 별반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남성들이 많은 집단이 주는 위계적인 문화에 그런 모임들이 벅차기도 하다. 이것도 병이지 싶어 가급적 모임이 있으면 참여를 하는 편이다. 모임참여의 우선 목적은 ‘운동권’이란 테두리 안에 갇혀 지내는 나를 성찰할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사람은 어울려 살아야만 하는 동물이기에 조금 어색해도 자꾸 어울려야 한다는 자기최면을 걸기도 한다.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만남, 소위 언어가 통하는 사람들의 만남이 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운동이란 것이 끼리 끼리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주만나야 교류와 소통이 형성되고 그럴 때 다른 생각들이 만나고, 사람들이 상호변화를 통해 성장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을 굳이 육체적인 것과 사회정치적인 것으로 나누는 것은 아마도 사람이 공동체 속에서 서로를 성장시키며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역설하는 것이리라.  

 나는 육체적인 생명 외에 사회정치적으로 ‘여성주의자로서의 생명’을 선택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무엇이 여성주의인가? 라는 질문은 나를 곤혹스럽게도 하지만 무엇이 여성주의가 아닌가 하는 것에는 제법 답을 내어놓을 수 있다. 물질만능, 위계, 폭력, 차별, 억압, 전쟁, 경쟁, 이기주의, 자연파괴 등. 여성운동이란 남녀관계의 위계적인 권력질서를 해체하고 남성의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한 모든 활동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남성과 여성의 대결로 몰아가는 식으로 여성주의와 여성운동을 해석하는 것은 반대한다. 여성주의를 실천하기 위한 여성운동은 가깝게는 남성의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보일 수 있으나, 결국은 사회정치적인 질서와 문화를 새롭게 재편하는 것에 있다. 그동안 남성 중심으로 구성되고 유지된 사회, 정치, 문화 전반에 대한 재구성과 재조직을 목표로 하는 어쩌면 지난한 대안을 만드는 작업과정이다. 이는 현재의 사회정치문화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 생활패턴을 전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때문에 어쩌면 여성주의, 여성운동은 기존질서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와 도전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일상에서 여성주의는 아주 편협한 이해와 해석의 대상이 되고 여성운동을 하는, 그리고 여성주의를 지향하는 이들에 대해 모난 척, 잘난 척, 남성 적대적이라는 혹평이 붙고 그리하여 때로는 공공의 적이 되기도 한다. 항상 날을 세워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여성주의를 지향하면서 살고자 할 때는 스스로에 의해서보다는 남에 의해 날이 세워지는 경우들이 생긴다.

 나는 전교생이 280여명이던 좀 작은 시골초등학교를 다녔다. 전교생이 얼마 되지 않아 일학년부터 육학년까지 이름과 얼굴을 다 욀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초등학교도 매년 총동문회를 개최하고 체육대회를 진행한다. 올해도 이번 달에 총동문회가 열렸고 매년 참석권유를 받기만 하고 참석치 못했던지라 연휴에 고향 어머니도 뵐 겸 동문체육대회도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체육대회라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인삼각경기도 하고 단체 줄넘기도 하면서 즐거운 한나절을 보내며 흥겹게 그 시간을 즐겼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흡연문제로 남자동창이 시비를 걸고 물건을 던지고, 언쟁이 오가고 급기야 몸싸움까지 날 뻔하다 수습되기까지 눈 깜짝 할 사이에 일어났다. 그로인해 즐겁던 모임은 순식간에 찬물 끼얹은 듯 냉랭해지고 나는 분노와 억울함에 치를 떨면서 그 뒤 며칠을 엉망인 기분으로 보내야 했다. 80년대 겪었던 흡연문제를 이 나이에 다시 겪어야 하나 하는 자괴감과 그 동창 놈과 주변에서 사태가 위기로 진전될 때까지 구경만 하던 친구들에 대한 분노가 좀체 가시지 않아 마침 고향집에 온 동생들과 언니들에게 고자질을 해대면서 분노를 표출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쫓아가 똑같이 복수를 하고 싶은 정도였다. 그러나 내 편이 되어 함께 그 원수 놈을 욕해주길 바랐던 내 기대와 달리 언니는 겪었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여행을 좋아하는 언니가 경남의 시골마을 버스를 탔는데 할아버지 두 분이 타시면서 한 분이 다른 한 분에게 젊은 여자가 옆자리에 탈 수도 있으니 떨어져 안자고 하셨단다. 그러나 그 할아버지 옆 자리에는 불행히도 지팡이를 짚으신 허리 구부러진 할머니께서 앉게 되셨다. 그러자 할아버지 왈 “늙은 호박꽃도 꽃인가?”라고 비꼬시더란다. 버스안의 승객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할아버지를 흘기는 사이 할머니께서 응수하시기를 “늙은 호박이 더 단거 모리나?” 하시더란다. 버스안의 승객들이 같이 할아버지에 대한 고소함과 할머니의 재치에 감탄하여 웃었다고 한다.  

 앞에서 여성주의란 기존질서와 가치에 대한 전복이자 대안을 형성해내는 과정이라고 장황히 언급하였다. 언니의 일화를 듣는 순간은 ‘할머니 참 재치 있으시다.’라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일상으로 돌아와, 그 친구가 전화와 문자로 사과를 하였으나 받아들일 맘이 나질 않았다. 오로지 복수 외에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대응 방식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버스안의 할머니는 충분히 화를 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농담으로 할아버지를 무안함으로 한방에 제압하고 승객들까지 기분 좋게 만드는 그 힘은 어디서 왔을까를 고민하면서 사람이 성숙하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폭력을 이기는 것이 비폭력저항이고 전쟁을 이기는 것은 평화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내 안에는 여전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보복중심의 갈등해결방식이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폭력성이 내 안에 도사리고 있음을 본다. 무슨무슨 주의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삶의 과정이 그러한 주의를 지향하고 실천하고자 노력할 때 설득력이 생긴다. 더불어 안과 밖이 일체가 되는 삶을 살 수 있다. 입 따로, 몸 따로 갈 때 그의 말은 설득력을 잃고 허공에 흩어지게 된다. 나는 얼마나 여성주의자라는 사회정치적인 생명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를 돌아보는 이 순간에도 나는 내 삶의 과정에서 겪어왔던 날선 갈등과 상처의 자국에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그 분노는 가끔 비열하게도 약한 고리를 찾게 되면 폭발한다. 이런 한계와 모순덩어리가 나다. 다만 다행인 것은 그것이 나의 한계라는 점을 안다. 알게 되면 시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아니 매순간 시작해왔는지 모른다. 사람은 고정불변한 존재가 아니지만 변화가 그리 쉬운 것만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나의 한계를 고백하는 순간에도 머리를 떠나지 않는 궁금증이 있다. 왜 남자들은 자기가 모든 여자들의 남편이나, 오빠,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까? 그것도 꽤나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때로는 폭력적인 방식까지 동원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진정한 남편이자 오빠, 아버지는 여성들이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에 있지 않을까? 그것이 사랑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만약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표현 한다고 하면 그래야 한다는 말이다.


기다릴 내일도 없는 청춘의 오늘 (김종천)

김종천/ 객원 칼럼니스트

“오늘은 다만 내일을 기다리는 날이다. 오늘은 어제의 내일이며 내일은 또 내일의 오늘일 뿐이다.” 

 신영복 선생님께서 쓰신 옥중 서간집「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한 구절이다. 암울한 현재를 살아가며 자유의 날을 기다리는 이의 마음을 이보다 잘 표현한 글은 아마 없을 것 같다. 입시 스트레스에 찌들어있던 고등학생 시절, 나는 이 구절을 되뇌며 해방의 수능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수능시험이 끝나고 넉 달을 궁극의 자유 속에서 보냈다. ‘내일을 기다린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왔다. 잔디밭에 둘러앉아 통기타 치며 노래하고, 술잔을 기울이며 시국을 논하는 낭만적인 대학 생활을 기대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학에는 더 이상 그런 풍경이 남아있지 않았다. 캠퍼스를 누비며 청춘의 낭만을 불태워야할 대학생들은 반 평도 안 되는 도서관 책상에 앉아 대기업 직무적성검사, 공무원 시험 기출문제집과 씨름하고 있었다. 고등학생들은 기다릴 내일이라도 있지만 오늘날의 대학생들에겐 기다릴 내일이 없다. 나날이 오르는 등록금과 갈수록 심해지는 청년실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도서관에 앉아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사람들은 형편이 나은 편에 속한다. 이들은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학기당 400만원이 넘는 등록금을 꼬박꼬박 마련할 수 있는 가정은 드물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강의가 끝나면 곧바로 아르바이트를 한다. 4500원 하는 시급으로 한 학기에 약 450만 원 가량 하는 등록금을 내려면 1000시간을 일해야 한다. 학기 중에만 아르바이트를 해서 이 돈을 대려면 하루에 10시간을 일해도 부족하다. 게다가 방값과 생활비까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학생들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이 때문에 대학생들은 독서와 여행을 하며 보내야할 방학을 아르바이트를 하며 보내고 있다.

 학자금 대출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언 발에 오줌 누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학생들은 복리로 이자가 붙는 이 돈에 미래를 저당 잡힌다. 교육과학기술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말 현재 학자금 대출액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된 학생이 2만5366명이다. 불과 3년 사이에 7배(2007년 말 3785명)가까이 늘어났다. 이들은 20대 중반에 이미 신용불량자라는 낙인을 안고 사회로 나서게 된다.

 궁여지책으로 한 선배는 휴학을 하고 비정규직으로 취업해 돈을 벌고 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복학을 했다가 학비와 생활비로 번 돈을 다 쓰고 나면 다시 휴학을 하고 일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또 다른 선배는 과외만 4개를 하고 있는데, '대학에 배우려고 들어온 건지 가르치려고 들어온 건지 모르겠다.’고 하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어떤 선배는 “한 번에 목돈 벌어서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 걱정 없이 다니겠다.”며 원양어선 승선을 계획 중이라고 했다. 비싼 등록금과 심각한 청년실업은 대학생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한다. 지난 10년 동안 자취방에 연탄불을 피우거나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등의 방법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학생이 2300명에 이른다. 대학 등록금 때문에 꽃다운 청춘의 생명이 스러져가는데도 소위 ‘사회지도층’이라는 분들은 우리나라의 대학 등록금이 아주 싼 편이라고 말한다.


지난 6월 10일, 청계광장에서 진행된 반값 등록금 촛불집회 모습
사진 출처 - 필자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무기력해졌다. 등록금이 지나치게 비싸다고 한숨을 쉬면서도 더 많이 일해서 등록금을 채우려고만 하거나 장학금을 받아서 해결하려고 한다. ‘공부 열심히 해서 장학금 받으면 등록금 문제는 나랑 상관없는 일이다’ ‘스펙 열심히 쌓아서 취업 잘 하면 청년실업 문제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라는 생각으로 현실을 애써 외면하려 한다.  

 하지만 ‘반값 등록금’에 대한 대학생들의 열망은 촛불과 함께 점점 더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내일을 희망의 날로 만들기 위해 대학생들이 직접 거리로 나섰다. 3월에 등록금 동결을 내걸고 학교를 상대로 잠깐 싸우던 ‘개나리 투쟁’에서 벗어났다. 지난 5월29일 서울 광화문에서 ‘반값 등록금 실현’과 ‘청년실업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이후 연일 촛불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경찰은 연행과 집회 불허로 맞섰다. 첫날 대학생 73명을 연행한 데 이어, 다음날 집회에서도 학생들의 행진을 가로막았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시위처럼 커질 것을 우려했는지, 청계광장에서의 집회는 무조건 불허하고 있다. 하지만 경찰이 촛불을 끄려고 탄압할수록 촛불은 더 커졌다. 200명으로 시작한 촛불집회는 고등학생과 대학 졸업생, 학부모 등 일반 시민들까지 가세하며 점점 참가 인원이 늘어나더니 지난 6월 10일에는 주최 측 추산 5만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촛불집회가 열렸다.

 내가 다니고 있는 아주대학교 내에도 몇몇 학생이 매일 저녁 촛불을 들고 있고, 셋이서 들던 촛불을 지금은 열한 명이 함께 들게 되었다.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였다. 졸업을 앞두고 있는 선배도 함께 촛불을 들었다. “나는 이제 등록금 다 냈지만, 그 비싼 등록금을 몇 년은 더 내야할 너희와, 미래의 내 아이를 위해 나왔다.”고 말했다.

 청춘들에게 ‘내일’이라는 단어는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꿈과 희망의 말이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청춘들은 내일을 두려워한다. 내일에 대한 부푼 기대를 안고 살아가야할 청춘들이 이처럼 내일을 두려워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2011년의 대학생들은 그 어느 시대의 대학생보다도 가혹한 청춘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토록 어두운 현실을 환히 밝히려는 청춘들의 촛불은 전경으로도, 살수차로도 막을 수 없다. 60년대 군사 정권의 탄압도 신영복 선생처럼 내일의 자유를 꿈꾸는 젊은이들의 열망을 꺾진 못했다. 나는 오늘도 내일의 희망을 위해 촛불을 들러 나간다. 도종환 시인의 시 ‘담쟁이’의 한 구절처럼 작은 힘 하나하나가 모여 언젠가 현실의 벽을 넘는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대지는 흔들어도 웃으며 가자 (이지상 위원)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큰 지진이 있었네요. 2011년 3월 11일. 토호쿠(東北)지역. 진도 9.0. 후쿠시마 원전 파괴 방사능 유출. 희생자와 이재민은 얼마나 되는지 모름. 쓰나미가 휩쓸고 간 폐허의 땅. 우리에겐 무척 익숙한 단어들입니다. 각 기관마다 마치 이 땅에서 일어난 재해처럼 들고 일어나 나눔을 강조했고 전파를 쏜다는 방송이면 죄다 ARS 걸어놓고 누가 많이 모으나 경연을 했지요. 이웃나라의 아픔에 연대의 마음을 전하는 것처럼 살갑고 정다운 일이 없으니 무척 잘된 일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뒤져봐도 일본의 피해상황만 보도가 될 뿐 그 안에 살고 있는 재일 동포에 대한 뉴스는 한줄 찾기가 어렵더라는 말입니다. 걱정이 되었지요. 도쿄조선 중고급 학교는 강당이 무너졌고 센다이의 토호쿠 초 중급학교는 건물자체가 기울었다는데, 그래서 졸업식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데 후쿠시마는 제2의 체르노빌이 되어 방사능 천지가 되었다는데. 그곳에도 조선학교가 버젓이 있는데 이미 4년 전 극우인사인 이시하라의 도쿄도에 빼앗길 뻔 했던 에다가와(枝川)조선학교를 되찾는 모금운동에 참여했던 내가 걱정이 없었다면 말이 안되지요. 이웃나라의 재해복구 성금이 600억원이나 모였지만 그 이웃으로 인해 차별받고 고통 받았던 또 다른 나에게는 단 한푼도 지원이 되지 않는 상황을 이해하는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누구라도 그랬겠지요 “거기에 조선학교가 있는데. 거기에 우리의 아이들이 있는데..” 

 그때도 지진이 있었습니다. 1923년 9월1일 관동 대 지진입니다. 약 15분 동안의 지진 만으로 도쿄의 3/4이 폐허가 되었고 약 14만2천명이 사망할 지경이었으니 당연히 정부의 기능은 마비되었고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요. 그때 터져 나온 민심의 분노를 조선인들에게 돌리기 위해 일본 내무성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탄다”“조선인들이 방화를 저지르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퍼트려 약 6000-9000명의 조선인들이 일본인 자경단(自警團)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던 일은 잘 기억 하실 겁니다. 그날이후 살아남은 조선인들은 어머니의 말 모국어를 잊게 됩니다.

 “생사를 넘나들던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날 이후 말문을 닫았습니다. 젖 먹던 시절 어머니가 불러주시던 자장가도, 고향땅 밟으며 재잘거렸던 수많은 조선말에 대한 기억도 다 지워야 했습니다. 고향집 주변에 사시사철 피었던 꽃의 이름과 이웃들의 정겨운 말투도 다 잊어야 했습니다. 조선말을 한다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몸서리치게 경험한 그들에게 맘 놓고 조국의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란 잠들기 전 이불을 뒤집어쓰고 속삭이는 가족의 안부 몇 마디가 전부였습니다. 낯선 이국땅에서 모국어를 잃어버린 그들은 그렇게 20여 년을 더 살아 해방을 맞았고 그해 12월에만 일본 전역에 약 560여개소의 국어 강습소가 세워졌습니다.”

-졸저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 중 -

 정체성 이라는 게 그런 거지요. 나의 생활이 진창이 될 때면 술 한 병 들고가 잔 올리며 꺼이꺼이 울고 싶은 어머니의 무덤 같은 것. 일본인이 되어 넋 놓고 살아도 생에 단 한번이라도 꿈속에서나 만나는 고향의 바람에 살 부비고 싶은 것. 뼈와 살은 바꿀 수 있으나 도저히 바꿀 수 없는 몸속에 흐르는 조선인 이라는 피 때문에 그들은 학교를 세웠고 조직을 만들었으며 모국어를 가보로 여기며 지난 60여년을 한결같이 교육 시켰습니다. 지난 3월 10미터가 넘는 대형 쓰나미가 원전을 덮치고 이어 방사능 경보로 온 마을이 텅텅 빈 그때도 후쿠시마 조선학교의 교사와 학생 15명은 학교를 지켰습니다. 학교마저 비우면 언제 학교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당장은 죽지 않는 방사능의 공포보다 우선한 것입니다. 결국 이 학교는 폐쇄되고 인근 니이가타로 이전해야 합니다. 센다이의 토호쿠 조선학교는 무너진 강당 대신에 좁은 식당에서 졸업식을 진행했습니다. 갓 입학한 어린 초급학교생 들은 갈라진 벽을 임시로 메운 교실에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지진이 나고 나서 나보다 더한 조바심을 가졌던 김명준 (영화 “우리학교” 감독)이 전화를 했습니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요 우리 이대로 있지 맙시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 여럿이 모여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지진피해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몽땅연필”


사진 출처 - 몽당연필

뜨거운 청년 배우 권해효와 꽃보다 아름다운가수 안치환. 그리고 늘 부족한 내가 공동대표를 맡고 진달래 냄새 가득한 김명준이 집행위원장이 되었습니다. “몽당연필”의 목표액은 기둥뿌리 두개. 조선학교가 다시 세워지는 그날 건물의 수많은 기둥 중에 두 개쯤은 아이들의 고향 남쪽이 전해주는 두 손의 온기로 세웠으면 하는 것이지요. 지진으로 갈라진 토호쿠 조선학교의 벽에 아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적은 글귀가 마음을 흔듭니다.

“대지는 흔들어도 웃으며 가자!” 그 글귀에 우리는 이렇게 화답합니다. 

 지난날 그때 만약 이곳 한국에 있는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강제징용으로 근로정신대로 끌려갔다면 우리의 아버지가 무서운 총칼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 했다면 우리도 이역의 땅에서 핍박받는 조선의 아들, 지척의 갈라진 조국을 어머니로 여기며 오직 “통일” 두 글자만을 그리워하는 조선의 딸.

 사랑하는 아이들아
 고통은 극복 하는 게 아니라 견디는 거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으나 그렇단다
 고통은 견뎌 내는 것. 그것도 웃으며 견뎌 내는 것
 그러니 이제 함께 견디자. 그리고 함께 지키자. 지진과 해일로 방사능 피해로 무너진 너희의 어깨를 아직은  튼튼한 우리의 어깨에 걸고

“대지는 흔들어도 함께 가자, 손잡고 가자 웃으며 당당하게 가자”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위태로운 교직 - 전국완/ 양강중학교 교사

전국완/ 양강중학교 교사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서 작년에만 4명의 교사가 명퇴하였다. 올해도 이미 40대 교사 한 명이 명퇴에 들어갔고, 두 명의 교사가 8월 말 명퇴를 신청한 상태다. 이 글을 끄적거리고 있는 필자도 명퇴 시기를 고민하고 있다. 학교 밖에서는 교직만큼 편하고 든든한 직업이 어디 있냐며 시기어린 부러움의 시선으로 교사들을 바라본다. ‘잘릴 염려 없지, 일찍 퇴근하지, 방학 있지, 퇴직하면 연금 나오지……’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이 있을까마는, 최근 몇 년 사이 ‘그 좋은 일터’를 중도에 관두는 교사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유를 한마디로 말하면 학교생활이 행복하지 않아서이다. 누가 들으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며 비아냥거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 현장에선 교사들의 신음소리가 가득하다. 교직도 엄연히 생계의 수단이지만, 그래도 우리 교사들을 버티게 했던 것 중에 많은 부분은 학생들과의 생활에서 얻는 기쁨과 보람이었다. 한창 몸과 마음에 변화를 겪는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얻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뭉클함과 감동이 이제는 거의 없다. 나이 어린 학생들이지만 한 때 나누었던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웃으로서의 교감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학원공부가 끝나고 매일 밤 11시가 넘어 귀가해 모자란 잠을 자고, 얼굴에 피곤을 덕지덕지 바른 채 학교수업을 듣는 아이들과의 수업시간, 수업시작 후 20여 분을 넘기지 못하고 여기 저기 조는 아이들을 깨우는 일도 이제는 지친다. 하루 열 시간이 넘는 공부에 치인 아이들의 날카로워진 신경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봉변당하는 것도 보통이다. 섣부른 선행학습으로 이미 신선함을 잃은 학교수업을 듣는 일이 아이들에겐 또 얼마나 고역이겠는가.

 생활비의 1/2에 육박하는 사교육비를 대느라 부모들이 밤낮없이 허둥대는 사이, 아이들은 각종 인터넷 게임에 중독이 되어 가고, 우범지대화 되어버린 공원 등지에서 술과 담배와 놀고, 친구들을 때리고 금품을 갈취하는 무서운 아이들로 변신을 한다. 집단따돌림부터 폭력, 금품갈취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학생사안으로 학생생활지도에 학부모면담까지 정신없이 가버리는 교사의 하루가 너무 고단하다.

 이런 현실엔 아랑곳없이 학업성적부진학생 수를 가지고 학교평가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학교간 차등 지급되는 성과급, 이웃나라에서 수 천명이 죽어나가고, 예측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방사능 피해로 전 세계가 떨고 있는 지금, 그래서 국내 과학자들이 당장 올여름 몰려 올 태풍과 함께 닥칠 방사능 오염을 지적하며 정부대책을 촉구하는 뉴스가 나오던 날 ‘원자력...’ 문구가 새겨진 볼펜 한 자루씩 주면서 ‘원자력이 얼마나 안전하고 뛰어난 에너지인지 학생들에게 홍보하라’고 강조하는 교직원회의….

 정신없이 팽팽 돌아가는 학교일상 속에서 아이들에게 치이고, 교육정책에서 소외된 채 영혼 없는 허깨비가 되어 가고 있는 교사들….


교육정책에 경쟁이라는 시장주의를 도입하면서 가장 힘들어지는 건 학생들이다.
교육의 시장화는 교육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사진 출처 - 부산일보

 요즘 경기도에 이어, 서울에서도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서명이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학생인권!’ 환영할 만한 일이다. 다만, 이 말엔 왠지 학생인권을 위협하는 집단이 다름 아닌 교사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 같아 불편하다. 연전에 현 교육감께서 당선되기 전 교사들과의 대화중에 ‘교사인권’ 관련 질문에 대해 ‘수업공간에서 교사는 절대적인 권력자이며, 당연히 절대적 약자인 학생의 인권이 더 중요하다’는 답변을 하신 적이 있다. 완전히 잘못된 말은 아니나, 교사와 학생을 대결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있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학생의 상대는 교사가 아니다. 수업이든 생활지도든 간에 학교의 교실공간에서 교사와 학생의 인권은 하나의 덩어리로 봐야 하지 않을까? 학생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은 종이호랑이격인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 밤잠을 재우지 않는 이 사회의 무한경쟁시스템이며, 현장교사의 소리는 묵살한 채 신자유주의 경제논리로 교육정책을 쏟아내는 오만한 교과부관료들이며, 등록금으로 배불리는 사립대학들이다.

 지금 학교 현장에서 교사들이 토해내는 한숨과 신음은 교원평가가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다. 아이들을 체벌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무한경쟁’, ‘평가를 통한 교사통제’, ‘교육의 시장화’ 라는 세 개의 톱니바퀴 속에 갇혀 질식 직전에 있기 때문이다. 영혼 없는 부품으로의 삶을 강요당하다보니 우울하고 불행하다. 교사가 행복하지 않다는 걸 우리 사회가 배부른 투정으로 일축하지 않기를 바란다.

 요즈음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 가장 힘든 건 물론 학생들이다. 밤잠을 못자고 해롱거리며 도처에 널려 있는 자극에 빠지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배출하는 아이들. 밑빠진 독에 물 붇는 사교육비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는 학부모. 이미 지쳐있는 학생들과 제대로 교감하지 못하고 교육정책에서 소외된 채, 스스로를 지탱해왔던 교육적 신념을 버려가며 현장에서 이율배반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 고통스러워하는 교사들. 이는 우리 교육이 이제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심각한 신호다.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소생하는 길은 각각 다르지 않다. 하나다.

 이제 범사회적으로 우리 경쟁교육에 대해 심각한 논의와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대지는 흔들어도 웃으며 가자 (이지상 위원)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큰 지진이 있었네요. 2011년 3월 11일. 토호쿠(東北)지역. 진도 9.0. 후쿠시마 원전 파괴 방사능 유출. 희생자와 이재민은 얼마나 되는지 모름. 쓰나미가 휩쓸고 간 폐허의 땅. 우리에겐 무척 익숙한 단어들입니다. 각 기관마다 마치 이 땅에서 일어난 재해처럼 들고 일어나 나눔을 강조했고 전파를 쏜다는 방송이면 죄다 ARS 걸어놓고 누가 많이 모으나 경연을 했지요. 이웃나라의 아픔에 연대의 마음을 전하는 것처럼 살갑고 정다운 일이 없으니 무척 잘된 일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뒤져봐도 일본의 피해상황만 보도가 될 뿐 그 안에 살고 있는 재일 동포에 대한 뉴스는 한줄 찾기가 어렵더라는 말입니다. 걱정이 되었지요. 도쿄조선 중고급 학교는 강당이 무너졌고 센다이의 토호쿠 초 중급학교는 건물자체가 기울었다는데, 그래서 졸업식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데 후쿠시마는 제2의 체르노빌이 되어 방사능 천지가 되었다는데. 그곳에도 조선학교가 버젓이 있는데 이미 4년 전 극우인사인 이시하라의 도쿄도에 빼앗길 뻔 했던 에다가와(枝川)조선학교를 되찾는 모금운동에 참여했던 내가 걱정이 없었다면 말이 안되지요. 이웃나라의 재해복구 성금이 600억원이나 모였지만 그 이웃으로 인해 차별받고 고통 받았던 또 다른 나에게는 단 한푼도 지원이 되지 않는 상황을 이해하는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누구라도 그랬겠지요 “거기에 조선학교가 있는데. 거기에 우리의 아이들이 있는데..” 

 그때도 지진이 있었습니다. 1923년 9월1일 관동 대 지진입니다. 약 15분 동안의 지진 만으로 도쿄의 3/4이 폐허가 되었고 약 14만2천명이 사망할 지경이었으니 당연히 정부의 기능은 마비되었고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요. 그때 터져 나온 민심의 분노를 조선인들에게 돌리기 위해 일본 내무성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탄다”“조선인들이 방화를 저지르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퍼트려 약 6000-9000명의 조선인들이 일본인 자경단(自警團)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던 일은 잘 기억 하실 겁니다. 그날이후 살아남은 조선인들은 어머니의 말 모국어를 잊게 됩니다.

 “생사를 넘나들던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날 이후 말문을 닫았습니다. 젖 먹던 시절 어머니가 불러주시던 자장가도, 고향땅 밟으며 재잘거렸던 수많은 조선말에 대한 기억도 다 지워야 했습니다. 고향집 주변에 사시사철 피었던 꽃의 이름과 이웃들의 정겨운 말투도 다 잊어야 했습니다. 조선말을 한다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몸서리치게 경험한 그들에게 맘 놓고 조국의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란 잠들기 전 이불을 뒤집어쓰고 속삭이는 가족의 안부 몇 마디가 전부였습니다. 낯선 이국땅에서 모국어를 잃어버린 그들은 그렇게 20여 년을 더 살아 해방을 맞았고 그해 12월에만 일본 전역에 약 560여개소의 국어 강습소가 세워졌습니다.”

-졸저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 중 -

 정체성 이라는 게 그런 거지요. 나의 생활이 진창이 될 때면 술 한 병 들고가 잔 올리며 꺼이꺼이 울고 싶은 어머니의 무덤 같은 것. 일본인이 되어 넋 놓고 살아도 생에 단 한번이라도 꿈속에서나 만나는 고향의 바람에 살 부비고 싶은 것. 뼈와 살은 바꿀 수 있으나 도저히 바꿀 수 없는 몸속에 흐르는 조선인 이라는 피 때문에 그들은 학교를 세웠고 조직을 만들었으며 모국어를 가보로 여기며 지난 60여년을 한결같이 교육 시켰습니다. 지난 3월 10미터가 넘는 대형 쓰나미가 원전을 덮치고 이어 방사능 경보로 온 마을이 텅텅 빈 그때도 후쿠시마 조선학교의 교사와 학생 15명은 학교를 지켰습니다. 학교마저 비우면 언제 학교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당장은 죽지 않는 방사능의 공포보다 우선한 것입니다. 결국 이 학교는 폐쇄되고 인근 니이가타로 이전해야 합니다. 센다이의 토호쿠 조선학교는 무너진 강당 대신에 좁은 식당에서 졸업식을 진행했습니다. 갓 입학한 어린 초급학교생 들은 갈라진 벽을 임시로 메운 교실에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지진이 나고 나서 나보다 더한 조바심을 가졌던 김명준 (영화 “우리학교” 감독)이 전화를 했습니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요 우리 이대로 있지 맙시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 여럿이 모여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지진피해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몽땅연필”


사진 출처 - 몽당연필

뜨거운 청년 배우 권해효와 꽃보다 아름다운가수 안치환. 그리고 늘 부족한 내가 공동대표를 맡고 진달래 냄새 가득한 김명준이 집행위원장이 되었습니다. “몽당연필”의 목표액은 기둥뿌리 두개. 조선학교가 다시 세워지는 그날 건물의 수많은 기둥 중에 두 개쯤은 아이들의 고향 남쪽이 전해주는 두 손의 온기로 세웠으면 하는 것이지요. 지진으로 갈라진 토호쿠 조선학교의 벽에 아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적은 글귀가 마음을 흔듭니다.

“대지는 흔들어도 웃으며 가자!” 그 글귀에 우리는 이렇게 화답합니다. 

 지난날 그때 만약 이곳 한국에 있는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강제징용으로 근로정신대로 끌려갔다면 우리의 아버지가 무서운 총칼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 했다면 우리도 이역의 땅에서 핍박받는 조선의 아들, 지척의 갈라진 조국을 어머니로 여기며 오직 “통일” 두 글자만을 그리워하는 조선의 딸.

 사랑하는 아이들아
 고통은 극복 하는 게 아니라 견디는 거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으나 그렇단다
 고통은 견뎌 내는 것. 그것도 웃으며 견뎌 내는 것
 그러니 이제 함께 견디자. 그리고 함께 지키자. 지진과 해일로 방사능 피해로 무너진 너희의 어깨를 아직은  튼튼한 우리의 어깨에 걸고

“대지는 흔들어도 함께 가자, 손잡고 가자 웃으며 당당하게 가자”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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