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어디에선가 헤겔은 모든 거대한 세계사적 사건과 인물들은 말하자면 두 번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들에게는 클리셰나 다름없는 마르크스의 아포리즘이 요즘 부쩍 자주 눈에 띈다. 슬라보예 지젝이나 가리타니 고진 같은 이름난 사상가들의 글을 통해서. 이런 현상은 세계 금융위기 이후 <자본론>이 다시 유행한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20세기를 들끓게 했던 현실 사회주의가 정치적 사망 선고를 받은 뒤 세계를 제패한 듯 기고만장하던 신자유주의가 허망한 실체를 드러내자, 세상의 구조를 설명하는 원전으로서 마르크스가 다시 호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헤겔을 인용한 이유는 나폴레옹 1세와 3세가 노정한 역사적 아이러니의 반복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민중들의 위대한 승리로 기억되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1848년 혁명이 나폴레옹 가문의 전제정치로 귀결되고만 아이러니 말이다. 

 마르크스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당통 대신에 코시디에르가, 로베스피에르 대신에 루이 블랑이, 1793~1795년까지의 산악당(몽타뉴파) 대신에 1848~1851년까지의 산악당이, 삼촌 대신에 조카가.” 

 여기서 삼촌은 나폴레옹 1세, 조카는 나폴레옹 3세를 말한다. 나폴레옹 3세, 그러니까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1832년 사촌인 라이히슈타트 공작(나폴레옹 1세의 외아들)이 죽자 보나파르트 가문에서 프랑스 왕위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자기뿐이라고 생각하고 왕이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그리고 1848년 혁명 뒤 수립된 공화정에서 제헌의회 의원으로 정치에 데뷔한다. 이어 대통령 선거에 나서 옛 황제의 조카라는 혈통과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으로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프랑스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각계각층의 국민들에게 그들의 이익을 모두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한다.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에는 높은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헌법을 바꿔 스스로 황제가 된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뒤 황제로 등극한 나폴레옹 1세의 반복이었다.

 가리타니 고진은 <역사의 반복>에서 황제로서 보나파르트의 정책은 그 자체가 모순으로 가득찬 것이었다고 단정한다. 보나파르트는 본질적으로는 보호주의자이지만 실천적으로는 생시몽주의자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모든 계급의 이익을 모두 만족시킬 것처럼 선전했다. 중간계급과 농민들에게는 질서와 번영을, 빈곤층에게는 복지를 약속했다. 빵값을 낮게 유지했고 위생적인 노동자주택을 건설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 쓴 소책자 가운데 <빈곤의 퇴치>(1844년)는 좌파의 지지를 얻기도 했다. 

 “1930년대에 독일이나 일본에서 파시즘이 생겨났는데 그것은 보나파르트주의의 한 양상으로 보는 게 좋다. 우에서 좌까지 모든 당파, 계급, 민족의 지지를 모은 루즈벨트 대통령은 보나파르트주의자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2대 정당이라는 구조를 파괴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국민경제를 희생시키는 시장자유화인가 그것에 대한 보호인가 하는 대립은 눈앞에 놓인 최대의 정치적 쟁점 중 하나였다. 그들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키는 것처럼 행동하는 정치가는 ‘보나파르트주의자’라고 해도 좋다. 물론 그것이 항상 파시스트인 것은 아니다.”(가리타니 고진 <역사의 반복>)  

 파시즘을 보나파르티즘의 한 갈래로 보는 시각이다. 실제로 나폴레옹 3세의 집권 과정과 통치 스타일은 히틀러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다. 먼저 선거를 통해 집권한 뒤 국민투표를 거쳐 합법적인 독재자가 된 점이 그러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왕을 추방하고, 좌익혁명이 유산된 후에 생긴 바이마르공화국의 대표제 속에서 히틀러가 수상이 되고, 국민투표를 통해 총통이 되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루이 보나파르트가 황제가 되었던 과정과 상동 적이라는 것이다.”(같은 책)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며,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때로 그것을 조작하기도 하는 것이 파시즘과 보나파르티즘의 또 다른 공통점이다. 


보나파르트가 삼촌의 후광을 업고 정치를 시작했던 것처럼 박근혜는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정치를 시작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가리타니 고진은 파시즘이라는 개념의 재정립 필요성을 제기한다. “일반적으로 전제적인 정치형태를 파시즘이라” 부르고 있는데 “그와 같은 용법은 잘못된 것이고 오히려 유해하다”는 것이다. 파시즘을 이렇게 왜소화시키면 “파시즘이 가지고 있는 어떤 매력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중략) 한마디로 말하자면, 파시즘은 러시아혁명(사회주의)의 침투에 대한 대항혁명(counter-revolution)이다. 그것은 반혁명(anti-revolution)과는 다르다. 파시즘은 그 자체가 혁명적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흡인력이 있는 것이다.”(같은 책)

 설명이 장황했지만, 누가 떠오르지 않으시는지. 보나파르트가 삼촌의 후광을 업고 정치를 시작했던 것처럼 박근혜는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정치를 시작했다. 보나파르트가 나폴레옹 1세 시절의 영광과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아이콘이었듯이, 박근혜는 박정희 시대의 고성장과 번영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향수의 아이콘이다. 보나파르트가 자신을 모든 계급의 대변자, 갈등의 중재자인 것처럼 포장했듯이, 박근혜는 신뢰와 복지를 내세우며 만인의 연인 같은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박근혜는 노련하다. DJ와 YS이후 사라진 ‘정치9단’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유일한 현역 정치인이다. 최대한 말을 자제하는 극단적인 미니멀리즘의 정치를 통해 어눌한 캐릭터의 단점을 극복할 만큼 영리하며, 진보진영의 독점 테마였던 복지 이슈를 선점할 만큼 과감하다. 복지 이슈에서 여전히 방어적인 조중동과 경제 관료들, 전경련 등이 무안해 할 정도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결정적 순간에 일침을 놓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극대화한다. 

 누군가는 박근혜 주변 인사들이야말로 정통 TK(대구경북)들이어서 이명박 정부보다 훨씬 더 말 안 되는 사람이 많다고 전한다. 박근혜가 집권하면 이명박 정부보다 문제가 많은 인사들이 요직을 차지하게 될 거라는 걱정이다. 돌이켜보면, 박정희의 공화당에서 전두환의 민정당으로 계승된 대한민국 수구정당의 역사가 YS의 민주계를 수혈한 신한국당부터는 족보가 꼬이기 시작한 게 사실이다. 이재오나 김문수, 박형준 같은 변절한 운동권들이 주류를 차지한 이명박 정권은 더욱 이질적인 집단이 되었다. 이른바 친박이 친이와 쉽게 동화되지 않는 이유는 박근혜라는 아이콘과 더불어 자신들이 정통 티케이라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다. 정통 티케이가 보기에 영포라인은 변방의 북소리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이른바 정통 티케이가 정권을 놓친 지가 어언 20년이 다 되어간다는 점이다. 그만큼 이들은 오래 굶었다. 

 지금 우리는 박근혜라는 한국의 보나파르트를 통해 역사의 반복을 목도하고 있다. 박정희라는 비극에 이어 박근혜라는 희극을.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2011년 봄, 제주의 서정(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

- 제주4.3과 해군기지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

 1.
 이른 아침, 딸아이의 등교를 챙기고 잠깐 누웠다는 것이 또 다시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문득 창문으로 비치는 아침 햇살의 기운에 깨어나긴 했지만, 어느 덧 시간은 늦은 아침이다. 그래도 얼른 털고 일어나지 못했던 것은 비단 아침햇살의 따사로움이 준 안락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 지나간 일들의 단상들이 번갈아가며 내 몸의 무게중심을 자꾸만 바닥으로 무너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올 봄은 떨어지지 않는 감기와 더불어 그늘처럼 드리워진 상념으로 새싹이 돋고 꽃이 피는 줄도 몰랐다.

 해마다 4.3 시기가 돌아오면, 육지로부터 이런 저런 단체와 사람들이 제주를 찾는다. 제주 4.3의 역사를 배우고, 그 흔적들을 살펴보기 위함일 것이다. 4.3 63주년을 맞는 올해에도 어김없이 이런 현상은 이어졌다. 그 중 어느 한 단체에서 나보고 제주4.3에 대해 말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해군기지 문제도 언급해 달란다. 4.3과 해군기지...

 이 강의를 준비하는 과정은 나에게 고통이었다. 무엇보다 60여 년 전, 이 땅에서 벌어진 살육의 장면을 상상하고 죽음의 이미지에 나를 밀어 넣는 일은 괴로운 것이었다. 해마다 4.3이 도래하지만, 고백하건데 이 시기에 열리곤 하는 각종 4.3 관련행사로부터 난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좀 떨어져 있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유족은 아니지만, 4.3시기마다 재연되는 비극의 기억에 동참하는 일이 나에게는 무언가 버거운 ‘의무’ 같은 것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현실의 해군기지 문제까지 얹어 누군가에게 들려줘야 하는 일이었다.

 2005년으로 기억한다. 4.3 57주년 위령제가 봉행되는 평화공원.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4.3영령 분노한다. 해군기지 철회하라”, “평화의 섬 역행하는 해군기지 반대한다”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이미 4.3진상보고서가 채택되고, 4.3에 대한 대통령의 공식사과가 있은지 2년이 다 된 시기에 열리는 위령제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4.3유족 일부가 “이런 데까지 와서 시위냐!”며 격렬한 항의와 심지어 발길질까지 해대는 일이 벌어졌고, 그로 인해 심한 자괴감에 흔들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국가’폭력에 의해 크나큰 희생을 치러야 했던 4.3문제가 어렵사리 ‘국가’차원에서 해결 되어가는 마당에, 또다시 해군기지 문제로 ‘국가’에 대해 문제제기 하는 것이 일부 유족에게는 부담이자 훼방처럼 느껴졌던 모양이다. 이 사건은 4.3문제의 해결이 지향하는 상생과 화해, 평화의 논리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 이전에, 유족은 물론 어쩌면 제주의 주민 누구에게나 그것이 피해의식이든 어떤 식으로든 남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4.3과 해군기지 문제는 현실에서 같이 가고 있었다.


강정 바다는 해군기지 건설로 매립될 예정이다. 공사장비가 바다까지 나가 있다.
사진 출처 - 조성봉

 2.
 해군기지 문제를 언급할 때 마다 나는 이 문제가 제주의 숙명과도 같은 일임을 강조하곤 한다. 그것은 제주가 처한 ‘위치’ 때문이다. 이는 해군기지 문제를 염려하는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것이다. 지난 1937년 일제가 제주에 군비행장을 건설한 이래로 매 15년마다 주기적으로 되풀이돼 온 군사기지의 시도는 이를 증명한다. 그만큼 제주는 지리적 위치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인 것이다. 비단 군사기지 문제가 아니더라도 유사 이래 제주는 늘 제주를 둘러싼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세력 확장을 위한 교두보, 혹은 전진기지로 위치지어져 왔다. 그 때마다 제주민들은 외부세력에 의해 때로는 침탈에 따른 가혹한 학대로, 때로는 동원된 강제노역으로, 그리고 죽음으로 유린당해 왔다. 그런 제주가 오랜 고난의 역사를 뒤로 하고 근대에 들어 섬의 척박함이 오히려 천혜의 자원으로 재발견되면서 국민관광지로 각광받게 되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세계의 섬’으로 인정되는 등 ‘기회의 역사’로 나가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 때, 해군기지가 건설되고 있다. 설득력도 없고 명분도 취약한 해군기지 건설이 군사요충지와 평화의 섬이라는 긴장관계 속에서 수십 년 버텨온 제주의 미래를 허망하게도 한순간에 군사적 갈등의 지대로 편향지어버리는 것이다. 많은 도민들은 해군기지가 건설되면, 곧이어 공군기지도 들어오고 말 것이라는 우려에 공감한다.  

 ...

20세기 동북아시아의 역사 속에서 제주는 오히려 그 지정학적 위험성을 더욱 강하게 경험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2차 대전 말기에 일본군이 대규모로 제주에 주둔하게 되면서 제주는 일본 본토 수호를 위한 대규모 전쟁터가 되기 직전에 가까스로 그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 20세기 제주 역사의 최대 비극이었던 4 ․3의 경험도 제주의 지정학적 중요성과 일정한 연관이 없다고 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

만일에 한국, 중국, 일본, 동북아3국이 상호존중, 공동번영의 정신을 버리고 권주의적이고 팽창주의적인 태도로 나아가게 된다면 제주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오히려 지정학적 중요성은 다시 위험성으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만일 일단의 팽창주의적 움직임 속에서 제주의 군사적 중요성이 부각되게 된다면 제주의 운명은 어떻게 될는지 상상해 보아야합니다.
그것이 다른 나라의 팽창주의적 압박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제주는 국제적 위험성 앞에 노출되고 말 것입니다.

...

 2001년 제1회 평화포럼에서 행해졌던 제주도지사의 개막 연설문 중 일부이다. 당시 위 연설의 주인공은 현직 우근민 지사이다. 그런 우근민 지사가 왜 이제 와서 "단 한 번도 해군기지를 반대해본 적이 없다”면서, 어찌 그리 당당히도 해군기지 공식 수용입장을 서둘러 밝혔는지 더 이상 묻고 싶지 않다. 다만, 그게 누구였든 이제 와서 매년 연례행사로 확대 개최하겠다는 그 평화포럼의 제1회 도지사 연설문 내용의 핵심이 바로 위의 그것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내용은  ‘가능성과 위험’ 이라는 논제로 제주의 위상과 미래를 매우 확고하게 설정했다는 것이다. 제주의 대표가 10년 전 국제사회 앞에서 공식 천명한 바로 그 제주의 ‘가능성과 위험’이 이미 지금 첨예하게 현실로서 충돌하고 있다는 것을 제주도민 모두가 똑바로 봐야 한다. 


해군기지 건설을 위해 본격적인 공사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연일 벌어지고 있다.
사진 출처 - 조성봉

 연설문의 내용에도 언급된 바와 같이, 제주 4.3 역시 지리적 위치로 인한 제주의 운명을 배경으로 벌어진 사건이었다. 비록 제주도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므로 이를 확보하기 위해 강경진압작전을 폈다는 식의 구체적인 근거는 없지만, 해방이후 벌어진 한반도를 둘러싼 미.소 양진영이 벌이는 냉전대결에 있어서 한반도는 매우 민감한 위치에 있었고, 여기에 제주도에서 벌어진 5.10 단선반대운동은 당시 미군정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억제’되어야 할 문제였던 것이다. 당시 미 국무부와 군부 사이에 벌어진 주한미군 철수 논란에도 불구하고 4.3 당시 대량 학살을 가능케 했던 초토화 작전이 실질적인 미국의 군사 통제권 하에서 비롯되었고, 궁극적으로 이는 전후 냉전체제에 대응한 미국의 대한반도 전략과 맞물려 있었다는 것이 정부가 채택한 4.3진상보고서상의 내용인 것이다.


 3.

 국가로 인해 제주의 주민들이 고통을 당하는 현실은 4.3이 과거의 역사가 아닌 진행형이라는 생각을 강화시킨다. 나는 4.3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로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해군기지건설이 2002년 안덕면 화순을 근거지로 추진된 이후, 남원읍 위미 2리, 위미 1리, 그리고 지금의 강정마을에 이르기까지 그 양상은 더욱 첨예해졌다. 심지어 강정마을의 한 주민은 "4.3때도 이와 같지는 않았다"고 할 정도로, 제주 해군기지 건설문제 따른 주민 갈등 문제는 4.3 이후 최대의 사건이라는 지적이다. 기지건설 문제로 인한 갈등양상은 마을 공동체내에서 그 동안 쌓아왔던 친척, 이웃 간 관계의 미덕과 한 마을의 공동체성마저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식의 매우 심각한 양상으로 치달았다. 

 국가폭력이라는 관점에서도 다르지 않다.
 해군기지 건설후보지로 강정마을이 정해지면서, 많은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을 치르고 있다. 40여명의 주민들이 각종 사건으로 고소. 고발돼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업무방해, 집시법 위반 등 현행범 신분으로 주민들을 체포해 물린 벌금만 5,000만원을 넘기고 있다. 지난 2009년 9월, 서귀포신문이 전문의에게 의뢰해 강정마을 주민들의 상태를 조사한 결과에서, 조사대상 주민의 40%이상이 ‘죽고 싶다’는 답변을 하기도 했다. 해군기지 문제로 주민들에게 생겨난 단절, 증오, 상처와 같은 것들은 분명 어떤 폭력의 산물인데, 그것이 명백히 국가사업을 매개로 이뤄진 점을 반영하면, 해군기지를 밀어붙이는 당국의 모습은 또 다른 국가폭력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 '행정 절차'라는 형식논리에만 의존한 채 기지건설이 추진되어지는 과정은, 해당 주민에게 있어서는 명백한 '폭력'으로 받아들여졌다. 일련의 기지건설 과정에서 드러난 구체적인 국가의 모습은 동원과 회유, 고소, 조작 등의 모습으로 다가왔고, 그것은 주민들에게 실망과 분노를 넘어 깊은 상처가 되었던 것이다.  


해군기지 건설을 위해 동원된 포크레인이 이제 바다앞까지 다다랐다. 마치 바다를 건져올릴 태세다.
사진 출처 - 조성봉

  4월, 동백이 지는 시절, 강정마을이 쓰러지고 있다. 연일, 포크레인을 앞세워 기지건설을 위해 박차를 가하는 군 당국의 모습은 마치 원래부터 이 곳은 전쟁을 위한 요새임을 하루라도 빨리 낙인찍으려는 듯 보인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기지가 지키고자 하는 국가안보는 도대체 어느 국민을 위한 것인가?. 주민의 희생을 대가로 국민위에 올라서는 기지가 평화를 위한 것이라면, 그 평화는 누구의 평화인가?


'필리핀 처녀와 결혼하세요' - 임아연/ 한밭대 학생

임아연/ 한밭대 학생

 한 여자가 찾아왔다. 친구 집에서 홈스테이를 시작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이웃이 나를 찾아 온 것이다. 이제 겨우 스물 두 살이라던 그는 다짜고짜 내게 한 남자의 사진을 보여줬다. 남자는 얼핏 봐도 나이가 꽤나 있어 보이는 한국인이었는데, 얼마 전 그와 결혼했다며 곧 남편이 데리러 오면 한국에 가서 함께 살 작정이라고 했다. 궁금한 것이 많은 듯 내게 한국어 몇 마디, 한국 문화 몇 가지를 물어 보는 얼굴엔 온통 한국으로 간다는 설렘과 들뜸으로 가득했다.

 갑작스레 찾아온 그에게 나는 축하한다든지, 앞날을 축복한다든지 하는 행복을 빌어주는 말을 하는 것보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던 게 사실이었다. 남편이 몇 살이냐, 어떻게 만났냐, 남편이 영어나 타갈로그어를 좀 할 수 있느냐 등을 꼬치꼬치 물었던 건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이주 여성들이 겪는 문제를 도무지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필리핀 처녀와 결혼하세요' 따위의 현수막을 보게 될까봐, 아니 그걸 읽고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게 될까봐 노심초사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가 꽃다운 청춘을 40대 남자에게 판 건지 어쩐 건지는 내게 솔직하게 털어 놓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일이나 기분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사람을 사고파는 것은 이미 역사책 속에서 노예제도 철폐 이후에 끝난 일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이 말도 안 되는 비인간적 행위들이 모양새를 바꿔 한국 사회 곳곳에서 아직도 일어나고 있는 것은 정말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계급에 따른 봉건 질서가 막을 내린 이후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이 평등해졌다고 말하면서, 미국이나 유럽의 소위 선진국 여성이 아닌 필리핀과 같은 동남아시아 제3세계 국가 여성들만 상대로 거래(?)하는 것만 봐도 자본에 따른 권력이 작용 했다는 걸 알 수 있지 않은가?  


다문화가정 합동 결혼식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백번 양보해서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은 서로 인연이 닿으면 어떻게든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치자. 그래서 그들의 만남이 알선을 통해 이뤄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해도 이렇게 돈 주고 사들인 '사람'을 말이 안 통한다며 무시하고, 화풀이 대상으로 삼아 때릴 수도 있다는 데에 문제가 또 다시 발생한다. 마치 비싼 돈 주고 사들인 물건이 생각보다 맘에 들지 않을 때 보이는 반응처럼 돈을 지불한 만큼 제 값을 하길 사람에게 바라는 형국이 되고 만다. 더 이상 인간은 존재만으로 가치가 있지 않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자본과 권력에 따른 불평등, 비인간적 행위, 인간 존재가치의 추락을 보여주는 일들이 비단 이것뿐이겠냐 마는 몇몇 필리피노들이 내게 들려주는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더 마음이 쓰라렸던 건 이들이 생각해온 한국에 비해, 이들이 경험한 한국이 더없이 초라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한류 문화의 영향으로 포장되어 만들어진 한국의 이미지보다, 그래서 그들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한국보다 실제로 부딪혀 경험했던 한국은 아직도 사회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너무나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종종 집 근처에서 마주치던 그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을 때 이미 한국으로 떠났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직 앳된 얼굴엔 한껏 기대감에 부풀어 생글 거리던 미소로 가득했었다. 철모르고 마냥 좋아하던 그에게 만큼은 뉴스에서 마주치던 이주 여성들의 문제가 피해가기를, 내가 걱정했던 부분들이 한낱 기우였기를 바라본다. 부디 여느 새댁들처럼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부디.


인문대와 경영대를 서성이는 날들 (유혜진)

유혜진/ 객원 칼럼니스트

 나는 교육학을 공부한다. 4년 전 수능을 마치고 한참 원서를 작성하던 그 시절, 부모님은 내가 경영학과나 경제학과에 진학하길 원하셨다. 대학 4년 내내 꼬박 3천만 원 가까운 돈을 대학에 헌납해도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일자리 하나 얻을까 말까한 현실 앞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한민국 부모의 심리였다. 하지만 나는 인문학부에 가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2007년 아직 대부분의 대학에서 학부제가 운영되었던 시절, 우리 학교의 단과대학 구분에 따르면 '교육학과'는 인문학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교육 사회학 분야에 관심이 많던 나였다. 그럴 바에야 임용고시에 유리한 사범대나 교대에 가라는 부모님의 설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철없는' 고집을 부렸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세 질을 한 달 만에 읽어 내려가면서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겠다며 사학과 진학도 진지하게 고민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4년 후, 지금 나는 집과 취업스터디를 오가는 변변치 않은 휴학생에 불과하다. 그때 교대를 갔다면 나는 '최고 신부감'이 될 수 있었을까.

 대학 동기들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고등학교 시절 윤동주의 감성적인 시어에 푹 빠져 그 후예가 되겠다며 국문학과에 입학한 친구가 있다. 그는 지금 최소한의 효도는 해야겠다며 신림동의 한 원룸에서 행정학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있다. 불교철학에 심취했던 또 다른 친구는 4학년이 되자 대학원에 갈 집안 형편도, 기업에 취업하기도 여의치 않음을 깨달았다. 그는 아버지가 '장관'이 아님을 한탄하며 고시촌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했다는 기쁨도 잠시, 대한민국 20대의 혹독한 현실에 정면으로 부닥치고 말았다.

 어떤 이들은 입학 이후부터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들은 경영학이나 경제학으로 전과해 자신의 학적에서 인문학을 지웠다. 또 다른 이들은 가까스로 이중전공을 할 수 있게 되어 취업시장에 턱걸이했다. 남아있는 몇 명만이, 수강생이 10명 남짓으로 준 전공 수업 강의실의 분위기를 전할 뿐이다.    


지난 해 중앙대는 18개 단과대, 77개 학과를 10개  단과대,
46개 학과ㆍ학부로 통폐합하는 대규모의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물론 이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자면 한없이 개인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 고등학교 시절 더 열심히 공부해서 더 높은 수능배치표에 안착하지 못했음을 탓하는 사람도 있다. 혹자는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듣지 않은 자기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아예 자본의 논리가 넘실대는 대학의 현실에 적응하는 능력이 부족했음을 스스로 반성하는 것은 어떨까. 여기에 대고 카이스트 서남표 총장 같은 이라면 '노력 없이, 고통 없이, 희생 없이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고 호통 칠지도 모를 일이다.

 인문학을 홀대하는 대학과 사회 분위기는 하루 이틀이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피부로 느끼는 장벽은 높았다. 사회는 철저하게 '기업화된' 인재만을 원했다. 대학은 이에 장단을 맞출 뿐이다. 상경계열 전공자가 아니면 지원조차 할 수 없는 회사가 수두룩하고 그마저도 온갖 스펙으로 무장한 이들의 피 튀기는 전쟁이다. 이 대열에 합류할 수 없는 학과와 학생들은 사회는 물론, 대학 내에서도 설 자리를 잃고 있다. 해가 갈수록 하는 수없이 전공을 바꾸거나 고시로 발을 돌리는 후배들의 나이가 점점 어려지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자의 90%가 대학을 가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대학이 학생들을 기업에 진출할 산업인력만으로 취급하는 게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학문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것은 진리와 자유의 전당이라 자부하는 대학의 첫 번째 임무다. 하지만 지금 4년의 대학생활은 개인들의 서로 다른 개성과 창의성을 단 하나의 논리로 획일화시키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이는 사회적으로도 자원의 낭비일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폭력에 가까운 처사다. 대학은 자율화가 추진하지만 그 '자율'은 학문과 학생을 위한 자율이 아닌 시장과 자본으로 향하는 자율뿐이다. 빠르게 회계장부를 읽고 마케팅 전략을 세우는 데만 급급한 대학교육 속에서 왜 우리에게는 '스티브 잡스'가 없냐는 하소연은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같은 회사의 노동자가 백혈병으로 숨지고 자살을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 각박한 사회 분위기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대학생으로 사는 것은 힘들다. ‘인문대 학생’으로 산다는 것은 더욱 팍팍한 일이다. 시장논리에 빠르게 편입하는 대학구조 속에서 인간의 역사와 철학, 문학을 논하는 것은 쉽지 않다. 중앙대 등 일부 대학들은 학과 구조조정으로 인문학과를 통·폐합해 실용학문만을 남겨두고 있다. 국문학을 공부하든 철학을 공부하든, 회계학이 대학생으로서 꼭 갖추어야 할 ‘필수교양’이 되었다는 소식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아직 내가 다니는 대학의 인문학과는 목숨을 부지하고 있지만 점점 후배받기 힘들다는 하소연이 많다.

 9월이면 나는 복학해야 하지만 돌아갈 곳이 없다. 1950년대 학교 중앙도서관으로 증축된 이후, 현재 교육대학 건물로 쓰이고 있는 건물이 곧 철거될 예정이다. 역사적 의미와 함께 '우리'에게는 유일한 터전이었던 건물이 사라진다. 그 자리에는 지하 3층 지상 9층의 최신식 경영관이 들어선다고 한다. 같은 학교 학생들이 최신식 인프라를 갖춘 건물에서 공부하게 된다는 소식은 분명 반갑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학생 공청회는 소리 소문 없이 치러졌다. 그리고 우리는 전교생의 교양수업이 이루어지는 '종합관' 언저리에 2개 층만을 빌려 사용할 것이라는 발표만이 있었다. 씁쓸하다. 학교 안에서도, 또 학교 밖에서도 주변부로 밀려나는 듯한 이 느낌은 우리를 인문대와 경영대 사이 그 어딘가를 서성이게 만든다.


자취삼천지교(自炊三遷之敎) (김인아)

김인아/ 객원 칼럼니스트

 이화여대(이하 이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박모(23)씨는 지난 1월 기숙사 추첨에서 떨어졌다. 박씨가 구한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45만원의 방은 창문이 없었다. 주방 바로 옆에 있어 음식 냄새와 각종 소음이 하루 종일 이어졌다. 박씨는 “월세와 생활비를 고려했을 때 구할 수 있는 집은 그것뿐이었다”며 “창문 있는 방을 알아봤지만 매 달 10만원을 더 내야 해 포기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옛 말이다.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생에게는 자취삼천지교(自炊三遷之敎)가 더 다가온다. 적어도 세 번은 집을 옮겨봐야 좋은 환경을 가진 방을 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졸업 전까지 같은 방세를 지출하고 싶다면, 물가 상승으로 세 번 정도는 방을 옮기게 된다는 뜻도 있다. 이 과정에서 자취생과 하숙생이 배우는 세 가지 교훈. 집 없는 설움, 혼자 살면 다 돈이고, 세상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이다. 

 신촌 대학가 하숙비는 지난해와 비교해 최대 10%, 자취는 30% 이상씩 올랐다. 등록금 1000만원 시대에 한 달 생활비는 최소 30~40만원이다. 줄일 수 있는 건 방세뿐이다. 집에서 누리는 안정감, 편안함은 사치다. 한 명이 누우면 꽉 차는 방, 빛 한 줌 없는 방 안에서 멍하니 벽을 바라보는 청춘이 어떤 꿈과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올해 들어서는 하숙집에서 주던 밥도 줄어간다. 주말과 평일 점심에는 편의점의 삼각 김밥이나 컵라면이 당연한 일상이 됐다. 

 신촌 대학가에선 공동 행동을 모색 중이다. 그런데 총학생회 중심이다. 심지어 학생회 선거 때 공약집에서도 학생 주거권 문제는 점점 발견하기 힘들다. 올 봄 등록금 인상 반대 운동에는 5년 만에 2001명이 모인 학생 총회가 열렸다. 반면 주거문제는 일부 지역 출신 학생들만의 문제라고 보는 것 같다. 관심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대만 봐도 수도권 이외 출신 학생이 40% 이상이다. 수도권에 살더라도 거리가 멀어 통학 대신 하숙이나 자취를 선택한다. 대학가에서 주거 문제로 고민 하는 학생은 늘어간다. 주거는 곧 복지다. 누구도 대신 해결해주지 않는다. 학생 스스로 나서야 한다.


반지하 자취방에서 바라본 창문 밖 모습
사진 출처 - 필자
 

 이대는 대학원생을 제외하고 학부생을 위해 2개 동의 기숙사를 운영하고 있다. 학생 수용 비율은 2010년 기준 7.8%로 신입생은 615명, 2~4학년 재학생은 98명만 받을 수 있다. 기숙사 입주를 위한 경쟁률은 신입생 1.7:1, 재학생은 7:1 이상이다. 지방 학생들에게 기숙사 입주는 로또가 된지 오래다.

 이대 국제 기숙사가 2012년 2월 완공을 목표로 공사 중에 있다. 외국인 학생과 교원들에게 안정적인 기숙 시설을 제공하겠다는 배려가 느껴진다. 학생기숙사 증축은 아직도 계획 중에 있다. 재학생들에게 안정적인 기숙 시설과 학교의 배려는 먼 이야기이다.

 공간점거운동, 빈집점거운동, 주택점거운동 등으로 불리는 스쾃(squat) 운동은 공간을 둘러싼 사회적 공공성과 권리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미국의 주택점거운동, 브라질의 땅 없는 사람들의 운동 등으로 나타났다. 머지않아 이대생들의 ECC(이화캠퍼스복합단지)점거운동, 신촌 대학가의 집 없는 젊은이들의 운동도 일어날 법하다. 계획만 있고 해결은 없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말이다.  

 자취 첫날밤이 떠오른다. 잠도 밥도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두려움과 외로움은 잠깐이었다. 잠을 이루지 못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고시텔 월세 57만원과 생활비 30만원을 내주신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 이 큰 도시 안에 돈 걱정 없이 발 뻗고 편하게 잘 공간이 없다는 서러움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스펙을 쌓아 좋은 회사에 취직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 푸른 꿈을 꾸면서 사는 것이 청춘이라고 한다. 하지만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반지하 방에 핀 곰팡이가 내게는 현실이다. 방세 걱정에 파랗게 멍든 가슴이 우리의 청춘이다.

 자취삼천지교를 통해 얻게 된 진정한 교훈.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진리. 싼 방을 구하려 발품을 팔던 그 시간과 노력을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쏟아보았다면, 조금 더 일찍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 적극적으로 요구해 보았더라면 어땠을까. 자취 생활 3년차, 졸업을 앞둔 학생의 뒤늦은 후회다


스무 살의 노동 OTL (김종천)

김종천/ 객원 칼럼니스트

 올 초에 친구의 소개로 한 대형마트에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대학 입학금과 등록금을 합쳐 450만원을 내야 하는 상황에서 책값이라도 벌어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자는 생각이었다. 스무 살에 맞은 생애 첫 직장생활이기에 더욱 들뜬 마음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내가 맡은 일은 설 명절 선물세트 박스를 나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근무를 시작한 지 10분도 안돼 꾸지람을 들었다. 다른 파트 판매원 아주머니의 일을 거들었다는 이유였다. 그때 비로소 나는 마트 소속 직원이 아니라 마트에서 한 파트를 맡은 A업체의 파견노동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마트는 각 파트 별로 담당 파견업체를 쪼개놓고 있었다. 같은 매장에서 일해도 업체가 다르면 경쟁자였다. 자기 파트 물품을 조금이라도 팔기 위해 묘한 신경전이 계속됐다. 과도한 경쟁 탓에 동료애는 느껴지지 않았다.

 노동여건도 열악했다. 5일에 한 번 쉰다는 약속과 달리 주말에도 일을 해야 했다. 그에 따른 수당은 받지 못했다. 출근 시간은 칼같이 지켜야 했지만 퇴근 시간은 마트의 담당 직원 마음대로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물류창고에서 박스를 나르다가 가까이 있던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친구의 파트를 총괄하는 직원이 다짜고짜 욕설을 내뱉으며 “네가 직접 하라”고 했다. 자기 파트 직원이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못마땅한 듯 했다. 나는 “알았다”고 하고 혼자 일을 했다. 그러나 그 직원은 “대답이 건방지다”며 울그락 불그락한 얼굴로 내 머리를 때리고 박스더미에 나를 내팽개쳤다. 그로 인해 머리카락이 한 움큼이나 뽑혔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난 당장 경찰에 신고했다. 출동한 경찰에게 사법처리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나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아주머니들은 “가해자가 마트 소속 직원이니 파견업체 소속인 네가 참으라”고 다독였다. 마트 간부는 “A업체는 앞으로 행사에 참여할 수 없을 줄 알라”고 협박했다. 그 간부는 내게 “억울하면 고시를 보든 해서 성공해라. 넌 지금 하찮은 아르바이트생일 뿐”이라고 무시했다. 다른 직원들도 “남들은 다 참고 넘어가는데 왜 너만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느냐”면서 나를 사회부적응자로 몰아갔다.

 잠시 뒤 내게 아르바이트를 소개해 준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 친구는 “사건을 덮지 않으면 자신에게 불이익이 있을 것”이라며 “제발 사건을 덮어달라”고 했다.

 고민이 됐다. 잘못한 건 마트 직원인데, 내 친구가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나와 친구의 사이도 틀어질 위험이 있었다. 오랜 고민 끝에 친구에게 양해를 구하면서 요청을 거절했다. 부당한 대우를 그냥 참고 넘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저녁 시간이 됐다. 친구들은 멈칫멈칫하더니 나와 멀찌감치 떨어져 걸었다. ‘밥 먹으러 갈 때 뭉쳐 다니지 말라더라’고 했다. 돌려 말했지만 나와 함께 다니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음을 알 수 있었다. 친구들에게 먼저 가서 밥을 먹으라고 한 뒤 혼자 패스트푸드점에 갔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햄버거를 먹는데, 서러움에 눈물이 흘렀다.   

 고등학생 때 접한 노동인권 강의에서 자본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나눠놓고 노동자들 사이에 갈등을 유발하고 분열시킨다는 얘길 들었다. 언제 해고될 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하나로 뭉치는 데 장애가 된다는 말도 들었다.

 내가 직접 겪은 대형마트의 노동현실은 강의에서 듣던 것보다 심각했다. 수직적으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파견노동자의 구분이 마치 봉건시대 귀족과 평민처럼 뚜렷했다. 수평적으로도 파트별로 다른 업체가 경쟁하도록 만들어 놓아 노동자는 말 그대로 파편화된 존재였다. 기대했던 노동의 보람이나 협동의 가치는 느낄 수 없었다. 마치 일한 시간만큼 돈을 받는 기계 같았다.

 그날 저녁 난 바로 해고됐다. 마트는 고작 파견 직원을 해고하면서 사유를 알려주는 친절을 베풀진 않았다. 설렘으로 시작한 스무 살의 첫 직장생활은 이렇게 사회의 어두운 면만 또렷이 각인한 채 20여일 만에 끝이 났다.  

 작업복을 벗고 마트를 나서는데 “억울하면 성공하라”는 간부의 말이 계속 뇌리에 맴돌았다. 실제로 난 억울했다. 다시는 그런 대우를 받으며 일하기 싫었다.

 하지만 ‘그래서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다짐을 선뜻 할 순 없었다. 앞으로 대학생활에서 고시에 합격하거나 경쟁자에 비해 학점과 토익·자격증 등에서 앞선다면 그 간부가 말한 ‘성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 시대 대다수 대학생이 꿈꾸는 성공이고, 나 역시 그러한 성공에 대한 갈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성공하더라도 어느 마트 직원은 스무 살 아르바이트생을 때리고도 면죄부를 받고, 맞은 아르바이트생은 참기를 강요받는 일이 반복될 것이다.

 그렇다면 난 과연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정한 의미의 ‘성공’은 내가 겪은 억울함이 반복되지 않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애 첫 해고를 당한 날 밤은 이런 저런 고민으로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사죄투쟁(이재승 위원)

이재승/ 인권연대 운영위원

 이승만 대통령의 유족들이 51년 만에 4.19희생자들에게 사죄를 드린다며 성명을 발표하더니, 4월 19일에는 묘소에 참배를 시도하다가 4.19유족들에게 제지당했다고 한다. 민주정신의 총체적 결손을 절감하는 이 시대에 이승만의 유족과 관련단체들이 뜬금없이 이렇게 한 연유가 궁금해졌다. 오래도록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사죄의 감정을 때가 되어 표현하였다고는 믿기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4.19 희생자들의 혼령을 필요하게 되었을까?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유족들은 “제주 4.3사건과 관련하여 당시 선포한 계엄령이 불법적”이라고 보도한 <제민일보>가 대통령과 유족들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소송을 제기하였다. 실제로 당시 대한민국 헌법은 계엄령을 법률에 따라 선포하도록 하였는데도 계엄법을 제정하지 않는 가운데 계엄령을 선포했기 때문에 제민일보의 보도는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제 이승만의 유족과 관련단체들이 사죄하기 전에 제주에서 민간인학살, 한국전쟁 중 민간인학살, 사사오입개헌, 조봉암 등 정적에 대한 사법살해, 부정선거와 4.19혁명 등에 대하여 공적으로 어떠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물론 유족들과 관련단체의 견해가 어찌되었든 간에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이고 공적인 평가가 달라지기 어려울 것이다. 유족들의 사죄와 참배가 사망한 정치인의 오명을 털고 뭔가를 시도하기 위한 사과정치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어쨌든 정치인에 대한 평가는 정치인으로서 행적으로 충분한 것이지, 유족들의 소급적 참회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정치인으로서 참다운 명예와 평판은 어디에서 올까? 미국의 대통령 워싱턴(G. Washington)이나 로마 공화정의 정치인 킨키나투스(Cincinatus)의 예를 통해 분명해진다. 나아감과 물러섬의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를 이론적으로 풀어냈다. 그에 따르면 행복한 삶이란 정치적 삶(bios politikos)과 관조적 삶(bios theoretikos)의 조화이다. 정치적 삶이란 공동체 속에서 공동선을 위해 자신의 역량을 최고로 발휘하는 실천적 생애를 말하고, 관조적 삶은 이러한 실천적 삶으로부터 제때에 물러나와 삶을 원리적으로 성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좋은 삶이라는 이러한 두 측면의 조화로운 결합이다. 세상에 나가는 것과 물러나 안빈낙도하는 것, 끝내는 신선(神仙)이 된다는 동양의 철학도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다. 공과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고향으로 복귀하는 워싱턴이나 킨키나투스는 좋은 삶에 대한 귀감이 된 것이다.


4·19혁명 51돌을 맞은 지난 19일 오전 서울 강북구 수유동 국립 4·19민주묘지 유영봉안소
사진 출처 - 한겨레

 존경과 명예는 억지로 얻을 수 없다. 물론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권력을 영원히 보유하기 위해 그는 정상에서 하산하는 일을 잊고 ‘공그리’를 치다가 마침내 전제자로 전락했다. 그는 단지 대통령을 오래하다 퇴진의 기회를 놓친 것이 아니다. 그가 권좌에 있는 동안 갖은 헌정파괴와 인권침해를 저질렀으며, 그에 대하여 정치적 책임을 면할 수도 없다. 그가 시작한 나쁜 통치는 한국현대사에서 80년대 중반까지 쿠데타와 폭정의 길잡이가 되었다. 오래되었다고 해서, 처음이라고 해서 적당히 기념할 수는 없다.

 사죄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상호성을 의미한다. 물론 희생자가 사죄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가해자 측은 사죄를 표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제는 사죄의 진정성이다. 진정성이 담긴 사죄와 더불어, 민주주의를 향한 공적인 동조를 지속적으로 표방한다면 완강한 피해자들조차 사죄를 수용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정황을 보면 진정한 사죄라기보다는 가해자의 명예를 위한 조건부 사죄와 같다. 유족들에게 무조건적이고 절대적 사죄를 기대해본다. 그러면 4.19유족이 사죄의 뜻에 공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승만 유족과 4.19유족간의 사죄와 용서는 다분히 사적인 것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일회적인 사건으로 그치지도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이 문제를 국민적인 차원에서, 국가의 차원에서 공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민주적 헌정을 유린한 독재자에 대한 미움은 단지 관련자들의 관련자들에 대한 인간적인 증오가 아니라 공화국의 정신적 토대로서 애국심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객관적 미움을 완화시키려는 시도들은 바로 공화국의 주춧돌을 뽑아버리는 것과 같다. 이 땅에 헌정유린자들의 동상을 세우고 기념하는 일은 거부해야 한다. 오히려 객관적 미움을 보존하는 방책을 세워야 한다.

이재승 위원은 현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 재직 중입니다.


<나는 가수다>에 투영된 욕망(김창남 위원)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프랑스의 사상가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는 명저 “놀이와 인간”에서 놀이의 가장 기본적인 유형을 몇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경쟁’이다. 경쟁은 놀이의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고 사람들이 어떤 것에 즐거움을 느끼게 만드는 가장 보편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다.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이 모여 즐기던 가위바위보 게임에서부터 엄청난 수익이 오고가는 프로스포츠에 이르기까지 경쟁의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 놀이는 거의 없다.

 경쟁에도 여러 유형이 있다. 두 팀 간의 우열을 가리는 단순한 청백전식 경쟁도 있고 퀴즈처럼 여러 명 가운데 한 사람의 승자를 가리는 경쟁도 있다. 최근 들어 가장 각광받는 경쟁의 유형은 서바이벌이라는 것이다. TV는 온통 서바이벌 경쟁을 내건 오락물로 넘쳐난다. 공중파와 케이블을 가릴 것 없이 조금만 채널을 돌리다 보면 노래, 패션, 요리, 심지어 다이어트까지 서바이벌 경쟁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공중파 채널은 아예 신입사원을 뽑는 과정을 서바이벌 게임으로 만들어 내보내고 있다. 서바이벌은 글자 그대로 생존을 건 경쟁이다. 그 판에서 가능한 한 오래 살아남는 것, 그러니까 매 회 탈락자가 되지 않는 것이 게임의 목표이다.

 서바이벌 경쟁 게임은 한국 사회를 사는 사람들의 현실적 생존 방식과 너무나 유사하다. 우리는 하루하루 서바이벌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간다. 어려서는 좋은 성적을 얻어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가서는 취업을 위해, 취업한 후에는 승진하고 살아남기 위해 경쟁한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대가 열리면서 서바이벌 경쟁은 더욱 치열하고 무자비해졌다. 웬만큼 좋은 대학을 가도, 웬만큼 좋은 직장을 얻어도 끝까지 생존하리라 예측하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삶이 불확실해질수록 서바이벌은 어려워지고 경쟁은 뜨거워진다. 그럴수록 사회는 벌거벗은 욕망들이 적나라하게 사투를 벌이는 정글로 변해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정글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을 벗어나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따라서 어떡하든 생존하겠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TV는 온통 서바이벌 경쟁을 내건 프로그램들로 넘쳐나고 있다.
현재 방송되고 있거나 준비 중인 서바이벌 프로그램들.
사진 출처 - 국민일보

 TV의 서바이벌 게임에 대한 시청자들의 열광은 바로 그런 이중의 욕망과 무관하지 않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대한 열광 속에는, 경쟁의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 어떡하든 그 게임에서 이겨 살아남고자 하는 욕망이 모순적으로 중첩되어 있다. TV를 통해 보는 서바이벌 게임은 시청자들에게 가상의 게임일 뿐이다. TV밖에서 그것을 보는 우리는 그 잔인한 서바이벌의 룰로부터 벗어나 있다. 우리는 그저 나와 무관한 사람들이 벌이는 무자비한 서바이벌 게임을 관전할 뿐이다. 누군가가 거기서 탈락하고 패배한다고 해도 그게 나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니다. 그건 게임일 뿐이고 나는 그로부터 벗어나 그걸 안전하게 지켜볼 수 있다. 내 문제가 아닌 한 서바이벌 게임도 재밌는 볼거리의 하나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 게임 속의 현실은 나의 현실과 닮아 있다. 거기서 벌어지는 탈락은 언젠가 나의 현실에서도 재현될지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TV에서 벌어지는 서바이벌 게임 속에서 현실과 유사한 공포를 느끼고 거기서 탈락한 패배자에 대해서는 연민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이 TV의 서바이벌 게임에 열광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적어도 그 공간에서는 공정한 룰이 적용되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모든 게임은 공정한 룰을 전제로 하지만 현실의 게임에서 공정한 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현실의 불확실성은 그런 룰이 언제 어떻게 불공정하게 작용할지 모른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TV의 서바이벌 게임이라면 당연히 정확하고 공정한 룰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내가 현실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게임의 룰이 적어도 TV 쇼에서만큼은 정확히 작동하리라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그런 믿음이 깨어질 때 시청자들은 분노하게 된다.

 <나는 가수다>에서 첫 번째 탈락자인 김건모를 탈락시키지 않고 재도전의 기회를 준다고 했을 때 엄청난 비난이 쏟아진 건 그 때문이다. 공정한 게임의 룰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있는 TV 서바이벌 게임에서 룰이 깨진 것이다. <나는 가수다>에 쏟아진 시청자들의 비난에는 공정한 게임의 룰이 지켜지지 않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한 분노가 투영되어 있다. 탈법과 비리를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는 대기업, 국민과의 약속 따위는 우습게 여기며 부자와 강자만을 위해 권력을 휘두르는 정부, 언제나 힘 있는 자들의 편에 서는 사법부 등 현실에서 공정한 게임의 룰이 훼손되는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한국 사회 전체가 그런 불공정 게임의 장이 되고 보니 그에 대한 분노는 대상도 불분명하고 구체적이지도 않으며 공허한 느낌을 준다. 그렇게 무정형적으로 쌓인 분노가 <나는 가수다>라는 아주 구체적인 대상을 향해 폭발한 것이다. <나는 가수다>에 비난이 쏟아질 때, 공정 사회를 유린하는 권력집단에는 분노하지 않고 한갓 예능 프로그램에만 분노를 터뜨린다는 힐난도 있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비판이지만 달리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아무리 비난하고 비판해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절망한 나머지 TV 속의 가상현실에서라도 공정성이 실현되는 걸 보고 싶었던 거다. 어쨌거나 숨 막히는 서바이벌 경쟁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이 TV 속의 서바이벌 게임에 열광하는 풍경은 어쩐지 씁쓸하다.

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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