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처녀와 결혼하세요' - 임아연/ 한밭대 학생

임아연/ 한밭대 학생

 한 여자가 찾아왔다. 친구 집에서 홈스테이를 시작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이웃이 나를 찾아 온 것이다. 이제 겨우 스물 두 살이라던 그는 다짜고짜 내게 한 남자의 사진을 보여줬다. 남자는 얼핏 봐도 나이가 꽤나 있어 보이는 한국인이었는데, 얼마 전 그와 결혼했다며 곧 남편이 데리러 오면 한국에 가서 함께 살 작정이라고 했다. 궁금한 것이 많은 듯 내게 한국어 몇 마디, 한국 문화 몇 가지를 물어 보는 얼굴엔 온통 한국으로 간다는 설렘과 들뜸으로 가득했다.

 갑작스레 찾아온 그에게 나는 축하한다든지, 앞날을 축복한다든지 하는 행복을 빌어주는 말을 하는 것보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던 게 사실이었다. 남편이 몇 살이냐, 어떻게 만났냐, 남편이 영어나 타갈로그어를 좀 할 수 있느냐 등을 꼬치꼬치 물었던 건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이주 여성들이 겪는 문제를 도무지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필리핀 처녀와 결혼하세요' 따위의 현수막을 보게 될까봐, 아니 그걸 읽고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게 될까봐 노심초사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가 꽃다운 청춘을 40대 남자에게 판 건지 어쩐 건지는 내게 솔직하게 털어 놓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일이나 기분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사람을 사고파는 것은 이미 역사책 속에서 노예제도 철폐 이후에 끝난 일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이 말도 안 되는 비인간적 행위들이 모양새를 바꿔 한국 사회 곳곳에서 아직도 일어나고 있는 것은 정말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계급에 따른 봉건 질서가 막을 내린 이후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이 평등해졌다고 말하면서, 미국이나 유럽의 소위 선진국 여성이 아닌 필리핀과 같은 동남아시아 제3세계 국가 여성들만 상대로 거래(?)하는 것만 봐도 자본에 따른 권력이 작용 했다는 걸 알 수 있지 않은가?  


다문화가정 합동 결혼식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백번 양보해서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은 서로 인연이 닿으면 어떻게든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치자. 그래서 그들의 만남이 알선을 통해 이뤄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해도 이렇게 돈 주고 사들인 '사람'을 말이 안 통한다며 무시하고, 화풀이 대상으로 삼아 때릴 수도 있다는 데에 문제가 또 다시 발생한다. 마치 비싼 돈 주고 사들인 물건이 생각보다 맘에 들지 않을 때 보이는 반응처럼 돈을 지불한 만큼 제 값을 하길 사람에게 바라는 형국이 되고 만다. 더 이상 인간은 존재만으로 가치가 있지 않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자본과 권력에 따른 불평등, 비인간적 행위, 인간 존재가치의 추락을 보여주는 일들이 비단 이것뿐이겠냐 마는 몇몇 필리피노들이 내게 들려주는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더 마음이 쓰라렸던 건 이들이 생각해온 한국에 비해, 이들이 경험한 한국이 더없이 초라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한류 문화의 영향으로 포장되어 만들어진 한국의 이미지보다, 그래서 그들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한국보다 실제로 부딪혀 경험했던 한국은 아직도 사회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너무나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종종 집 근처에서 마주치던 그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을 때 이미 한국으로 떠났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직 앳된 얼굴엔 한껏 기대감에 부풀어 생글 거리던 미소로 가득했었다. 철모르고 마냥 좋아하던 그에게 만큼은 뉴스에서 마주치던 이주 여성들의 문제가 피해가기를, 내가 걱정했던 부분들이 한낱 기우였기를 바라본다. 부디 여느 새댁들처럼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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