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 과정을 마치며

임아연/ 인권연대 2010년 여름 인턴

 “면접 보러 오라”는 전화에 엄마랑 떡볶이를 먹다가 소리를 질렀더랬다. 하이힐을 신고 출근을 했다가 하루 종일 돌아다닌 통에 발에 물집이 잡혔더랬다. 퉁퉁 부은 발을 주무르며 또 언제, 어느 곳에 가서 누구를 만날지 마냥 설레던 첫 날 이었다. 하지만 처음이라는 그 기분 좋은 떨림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던 것 같다. 매일 아침이 피곤했고 주말이 자꾸 기다려졌다. 지원서를 다시 읽었다. 그게 마지막 출근 날이었다.

 사람들은 “왜 인권연대 인턴을 지원했느냐”고 물었다. 상투적이긴 하지만 나는 정말로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10만 명을 먹여 살리는 한 명의 천재’보단 조금씩 사회를 움직여 가는 ‘10만 명’을 만나고 싶었다. 나는 사회가 굴러가는 것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궁금했다. 인권연대에서 일하는 동안 다행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얘기 나눌 많은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니 용기를 내서 그들에게 가깝게 다가가지 못한 게 아쉽기만 하다. 또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절실한 이들에게 항상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든 적도 많다. “마음으로나마 함께 할 게요”라는 가벼운 약속만 뱉어내는 모습에 자괴감이 들었다. 특히 대사관 앞 땡볕에서 버마의 민주화를 외치던 이들에게 그랬고, 성미산을 재벌 대학로부터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그랬다. 나의 역할을 고민했다. 내 자리는 어디일까 생각했다.

 평생 ‘글 밥’을 먹고 싶다 생각했는데 내 행색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배움엔 게을렀고 경험도 없었다. 모진 소릴 견뎌 낼 만큼 마음이 단단하지도 못했다. 인턴을 하는 동안 그걸 깨닫고는 많이 위축돼 속상하기도 했다.


여름 방학동안 함께 한 인턴 활동가들(김민아, 오명원, 임아연, 한빛나)과 사무국 식구들

 마지막 날 오창익 국장님이 말했다. “꿈을 기자나 대학원 가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갖지 말라”고, “그렇게 안 되면 실패한 인간이 되어버릴 테니, 겨우 그 정도 꿈을 꾸면서 너희 자신을 하찮게 여기지 말라”고 했다. 집으로 내려가는 길에 그 말을 곱씹었다. 불현듯 고병헌 성공회대 교수님이 “존재만으로 힘이 되고 위안이 되는 사람이 있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기차 안에서 왈칵 눈물을 쏟았다.

 생각해보면 인권연대에서 인턴을 하며 만난 많은 사람들은 그 존재 자체가 힘이 되는 이들이었다. 목소리 없는 자들의 소릴 대신 말하는 변호사들이 그랬고 사회 어두운 구석을 들춰내 빛을 쬐게 하는 기자들이 그랬다. 또 알아주는 이 없어도 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힘쓰는 활동가들이 그랬다. 이 밖에도 자신의 자리에서 서로 연대하는 많은 ‘벗’들이 함께 있었다.

 흰 바탕에 까만 커서가 껌뻑이는 모습을 두고 한참을 생각했다. 7주간의 인턴 생활을 종이 한 장에 채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짧은 시간동안 워낙 많은 일을 겪고,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니, 각각의 현장에서 느낀 생각들이 뒤엉켜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다만 확실한 건 우리의 존재가, 그리고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힘과 위안을 줄 수 있을 거란 믿음이다. 이것이 ‘사람’을 만나고 돌아 온 길이 기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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