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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에도 없는 형살이 [2009.09.30. 제780호]
전종휘
[줌인] 징역 다 살고도 최장 7년까지 더 갇혀야 하는 보호감호…
2005년 폐지됐으나 예외 조항 탓에 현재 77명, 앞으로 187명에게 적용
» 사회보호법을 폐지하게 도와달라며 2005년 2월 한겨레신문사에 쏟아진 청송보호감호소 수용자들의 편지. 사진 한겨레 자료
2005년 2월 중순께 한겨레신문사에 편지 60여 통이 며칠 사이 잇달아 배달됐다. 모두 같은 곳에서 보내온 편지들로, 글쓴이는 전부 달랐으나 내용은 얼추 비슷했다.

“긴 수감 생활 동안 사랑하는 아내한테 이혼을 당하고, 어머니를 여의고, 어린 자식들에게 상처를 준 사람입니다. 하지만 죗값을 다 치르고도 언제 출소할지 모르는 기약 없는 감호 생활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보호감호제가 폐지될 수만 있다면 강력범을 상대로 한 유전자 검사에 스스로 응해서라도 하루빨리 딸들 곁으로 가고 싶습니다.”

80%는 흉악범이라 보기 힘든 절도범

정아무개씨는 징역 3년형을 마치고 만기 출소했으나 보호감호 처분을 받고 2004년부터 경북 청송보호감호소에서 다시 수감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한겨레>에 편지 보내기 운동’을 주도한 강아무개(당시 41살)씨는 당시 감호소에서 한겨레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유전자 채취가 인권침해라는 것을 잘 알지만, 두 번 다시 죄를 짓지 않겠다는 (피감호인들의) 각오를 표현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시 범행을 저지를 경우 자신들을 쉽게 잡을 수 있도록 유전자 정보를 수사기관에 남기는 한이 있더라도 보호감호는 벗어나게 해달라는 요구였다..

보호감호는 유죄에 따른 징역을 확정받은 범죄자 가운데 강력 범죄를 여러 차례 저지른 누범들에게 징역살이를 끝낸 뒤 보호감호소에서 최장 7년까지 ‘보호’와 ‘감호’를 추가로 받도록 한 사회보호법상의 제도다. 하지만 징역 뒤 보호감호는 이중 처벌이라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법적 개념만 보호감호일 뿐 실제 운용은 징역을 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교도소와 같은 시설에서 같은 밥을 먹고 교도관들의 통제를 받았기 때문이다. 또 보호감호 중인 이의 80% 가까이는 흉악범이라고 보기 힘든 절도범이라는 조사 결과도 있었다.

수많은 인권단체들의 분투 속에 2005년 중반 ‘사회보호법 폐지 법률’이 국회를 통과했고, 드디어 2005년 8월4일 사회보호법은 공식적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법원은 더 이상 판결문 뒤에 “보호감호 처분을 명”하지 못했다. 이중 처벌 논란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걸로 끝난 것일까?


오대수(43·가명)씨는 현재 경북 청송제3교도소에 갇혀 있다. 그는 2001년 3월 강도·성폭행 혐의 유죄가 인정돼 징역 7년을 선고받아 지난해 만기 출소했다. 그러나 집에 가지 못했다. 보호감호자들이 모여 있는 이곳으로 이감됐다. 2005년 사회보호법이 폐지됐는데, 3년 뒤 징역형을 마친 그가 왜 보호감호를 받는 걸까?

사회보호법은 2005년 목숨을 다하면서 외마디 비명을 남겼다. ‘사회보호법 폐지 법률’ 2조에 “이 법 시행 전에 이미 확정된 보호감호 판결의 효력은 유지되고, 그 확정판결에 따른 보호감호 집행에 관하여는 종전의 ‘사회보호법’에 따른다”고 규정한 것이다. 법을 없앨 당시 법무부와 일부 여론은 거의 ‘인간 쓰레기’에 가까운 ‘흉악범들’이 사회에 쏟아져나오면 범죄가 다시 들끓고 사회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열린우리당의 사회보호법 폐지 주장에 법무부 보호국장을 지낸 정동기 당시 대구지검장(청와대 민정수석을 거쳐 얼마 전 정부법무공단 이사장 취임)이 나서서 “보호감호제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는 논의는 자칫 범죄에 대한 국가의 대응력을 약화시키는 커다란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결국 2조의 어정쩡한 절충이 이뤄졌다.

오씨는 바로 이 조항에 걸려 청송제3교도소로 온 것이다. 그는 억울하다고 생각한다. 보호감호 처분은 이중처벌이니 금지한다고 해놓고, 법 폐지 이전에 나온 것은 이중 처벌이 아니라고 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청송제3교도소는 다른 교도소와 비교해 시설이나 처우가 다르지 않다. 다른 교도소와 순환 근무하는 법무부 교정본부 소속 교도관들이 감시를 한다. 본형인 징역형을 살 때나 지금 보호감호 처분을 받고 있는 때나 다른 것은 없다.

» 사회보호법이 폐지되기 전인 2003년 8월 들여다본 당시 청송보호감호소 내부 취사반. 1년에 한 번 돌아오는 가출소 심사를 통과 못하면 7년까지 이곳 밥을 먹어야 했다. 사진 한겨레 자료

징역형과 보호감호 처분, 다른 게 없어

사건 이후 그를 면회 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를 더 이상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는 아버지는 그와 아내를 강제로 이혼시켰다. 일찍 결혼한 탓에 벌써 고2가 된 딸이 어디 사는지도 알 수 없다. 한국방송통신대 법대 4학년에 재학 중인 그는 “나가면 다시 트레일러 기사로 열심히 살겠다”며 여전히 보호감호 상태에 있는 이들을 당장 석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법무부에 따르면, 현재 청송제3교도소에서 오씨처럼 보호감호 처분을 받고 있는 이는 모두 77명에 이른다. 2005년 이전에 징역형과 보호감호 처분을 동시에 선고받았으나 아직 징역형이 끝나지 않은 이들도 있다. 무기수 11명을 포함해 모두 187명이다. 이들은 앞으로 보호감호 처분을 받아야 한다. 숨이 다해야 감옥문을 나설 수 있는 무기수의 경우 보호감호는 불필요한 것이지만, 흔히 무기수의 상당수가 말썽 부리지 않고 10∼20년가량 지나면 형집행이 정지되기 때문에 판사는 보호감호를 함께 선고한 것이다. 무기수였다 탈옥 뒤 강도 행각을 일삼은 신창원씨도 22년6개월 징역형과 보호감호 처분을 추가로 선고받은 바 있다.

보호감호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의 철학적 바탕은 ‘범죄는 사회적인 것으로, 온전히 개인의 잘못만은 아니다’라는 데서 출발했다. 실제 송문호 전북대 교수(법학)가 2003년 당시 청송보호감호소 수용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학력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 1022명 가운데 71.4%(730명)가 중졸 이하의 학력 소지자였다. 입소 전 경제 수준에 대한 물음에도 응답자 1008명 가운데 71.2%(719명)가 하층이었다고 대답했다.

여기, 보호감호 처분 중인 77명 가운데 한 인물이 있다. 그의 얘기를 전하는 것 자체가 가난하거나 한부모 슬하에 있는 아동에게 낙인 효과를 강화할까 두렵지만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오씨처럼 지난해 징역형을 마치고 보호감호 처분을 받고 있는 박오성(51·가명)씨. 그는 서울 왕십리가 고향이다. 일찍 친어머니를 여의고 ㅁ초등학교 2학년이던 9살 때 계모 손에 이끌려 경기 수원역에 버려졌다. 혼자 어찌어찌 기차를 타고 다다른 곳이 서울 영등포역. 성매매 집결지에서 일하는 어느 누나를 만났다. 박씨는 “몸 파는 누나가 나를 동생처럼 키워줬다”고 말했다.

» 2005년 6월21일 사회보호법 폐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법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황석주 기자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나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그는 주변 형들과 어울리면서 오토바이 세계에 빠져들었다. 형들과 함께 오토바이를 훔치다 상습절도 혐의로 3년형을 받은 게 18살 때인 1976년. 1979년 만기 출소한 그는 여덟 달 만에 다시 절도 혐의로 2년형을 받았다. 1988년에는 강도상해 혐의로 구속됐다. 고위 공무원 등만 범행 대상으로 삼았던 탓에 언론은 그에게 ‘신사강도’라는 별칭을 붙여줬다. 청송보호감호소를 그때 처음 구경했다. 2002년 14년 만에 사회 구경을 한 그에게 ‘청송’ 동기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1년 뒤 박씨는 강도·성폭행 사건에 엮였다. 자신은 밖에서 차를 대기하고 기다리다 동기들이 현금 등을 빼앗아오면 도망하는 구실을 했다. 눈 가린 채 이뤄진 피해자와의 대질 때 피해자가 “저 사람은 성폭행범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결국 5년 징역형과 함께 보호감호 처분을 받았다. 그가 감방에서 보내고 있는 시간만 인생의 절반에 해당하는 25년째다. 앞으로 보호감호 7년을 꽉 채울 경우 2015년이 돼야 교도소를 나설 수 있다.

오씨나 박씨는 청송제3교도소에 있는 인물 가운데 비교적 양호한 축에 속한다. 개중에는 청송에 들어오게 해달라며 일부러 물건을 훔치는 이들도 있는가 하면, 아동 성폭행을 10차례 이상 저질러 다른 감호자들이 보기에도 사회에 내보내면 안 될 것 같은 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징역의 연장선상과 다름없는 현재의 보호감호 처분을 계속 받게 하는 건 4년 전 사회보호법 폐지 취지와 모순된다. 대한민국 헌법은 죄형법정주의를 천명하고 있다. 이들은 처벌받도록 법이 정한 죄형과는 상관없는 처벌을 계속 받고 있는 셈이다. 이들의 ‘보호’와 ‘감호’를 위한 별도의 예산도 책정되지 않아 일반 교도소 업무를 다루는 법무부 교정본부 쪽이 이들을 책임지고 있다. 이들의 처지는 일반 수형자와 전혀 다르지 않다.

최후의 1인은 2035년에나 석방

이들을 계속 보호감호 상태에 남겨두고 싶다면 일정한 자유의 박탈을 빼고는 일반 사회인들이 누리는 최소한의 조건들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생각이다. 형벌이 아니라 ‘보호’와 ‘감호’이기 때문이다. 그럴 예산과 의지가 없으면 석방하는 게 맞다는 것이다. 또 현재 한 달에 1명가량에 그치고 있는 가출소를 확대함으로써 법 폐지 정신에 맞게 수용자를 대폭 줄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사회보호법이 폐지된 마당에, 단순히 누범이란 표지 때문에 이들을 보호감호 처분하고 있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며 “이들을 하루빨리 석방하는 조처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무기수를 뺀 유기징역 수감자 가운데 미래의 보호감호 처분을 기다리는 마지막 수용자가 청송제3교도소 문을 나서는 때는, 길면 2035년이 될 예정이다.

사회보호법이란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이 첫 대상자

애초 사회보호법을 잉태한 건 전두환 신군부였다. 1980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불량배 일제검거에 관한 계엄포고 13호’를 발동해 전국적으로 6만여 명을 검거했다. 그리고 이 가운데 3만9천여 명을 강제로 군부대에 보냈다. 이른바 ‘삼청교육대’다. 명분은 우리 사회의 ‘인간 쓰레기들’을 ‘청소’하겠다는 것이었으나, 사실은 공포정치를 펼치는 것이었다.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이 사회에 쏟아져나오면 군부정권의 실상이 탄로날 것이 두려웠던 신군부는 1980년 12월 사회보호법을 제정했다. 광주 학살 직후 군인들이 모여 만든 국가보위입법회의를 통해서다. 사법부가 처벌적 성격의 징역형을 피고인에게 선고할 때 죄질이 좋지 않은 이들에게는 최대 7년까지 ‘보호감호’ 처분을 추가로 내릴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1983년 청송보호감호소가 문을 연 뒤 ‘청송’은 지리적으로 격리된 상황을 반영하듯 ‘최악의 구금시설’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2005년 사회보호법이 폐기되기까지 청송에서는 의문의 죽음과 수용자들의 집단 단식 등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1984년에는 박아무개씨가 교도관들의 구타와 고문 끝에 숨진 뒤 유족 몰래 화장되는가 하면, 1987년 7월에는 처우 개선과 근로보상금 인상을 요구하는 수용자들의 단식농성이 벌어졌다. 2002년에도 가출소를 확대하고 사회보호법을 폐지하라고 요구하는 단식농성이 잇따랐다.

청송=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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