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위기 ‘마른 수건 쥐어짜기’의 함정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1970년대 후반 캘리포니아에선 부동산 가격이 과열 조짐을 보였다.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면서 재산세 부담도 늘게 되자 고정수입이 많지 않은 노령층 주택소유자들의 불만이 높아져 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하워드 자비스, 폴 갠 등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들고 나온게 바로 ‘주민발의 13호’였다. 한국에선 일부에서 납세자운동의 전형처럼 얘기하는 이 ‘납세자의 반란’은 이후 캘리포니아 재정을 망가뜨리는 일등공신이 됐다.

 주민발의 13호는 재산세율을 연간 부동산 평가액의 1% 미만으로 제한하고 세율을 올리더라도 연간 2%를 넘지 않도록 했다. 주민투표 끝에 65%가 찬성했다. 1978년 주 의회를 통과한 이 안건은 이후 캘리포니아 주 법과 동일한 효력을 지닌다.

 당장 재산세 납부액이 절반으로 줄었고, 이때부터 캘리포니아 재정은 급속도로 악화됐다. 문제는 주택 가격이 아무리 올라도 재산세는 거의 변동이 없게 됐다는 점이다. 가령 1만달러 주택이 10년 뒤 5만 달러가 되더라도 세금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집값 상승을 따라갈 수 없다. 실제로는 세금이 계속 줄어드는 셈이다. 이 경우 두 가지 현상이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소득불평등이 심해지고 재정압박은 심해진다.

 더욱 큰 문제는 주민발의 13호가 향후 주정부가 세금을 인상하려면 주 의회 의원의 3분의2 이상의 찬성을 얻도록 규정했다는 점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캘리포니아 주 법은 예산안을 통과시킬 때 재적의원 3분의2가 찬성하도록 하고 있다. 세금이건 예산이건 캘리포니아에선 원만한 합의가 힘들다. 세금을 더 거둬야 할 아무리 절박한 이유가 있더라도 3분의1이 반대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특히나 양당제인 미국에서 세금인상에 거부감이 강한 공화당 소속 의원이 주 의회의 3분의1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가 일반적이기 때문에 증세는 꿈도 꾸기 힘들게 돼 버렸다. 이것이 초래한 끔찍한 상황이 바로 작년에 벌어졌다.

 2007년 이후 부동산 거품이 붕괴되면서 캘리포니아 재정은 위기에 처하기 시작했다. 결국 지난해 7월1일 아널드 슈워제네거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재정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253억달러에 이르는 누적 재정적자를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그해 7월부터 시작하는 2009회계연도 예산안을 주의회가 통과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갈등 끝에 결국 주정부와 주 의회는 교육·복지·의료부문 예산 155억달러를 삭감하는 선에서 타협했다.

 당초 예상했던 재정적자 가운데 예산삭감을 제외한 나머지는 산하 지방정부한테서 수십억 달러 빌리고 부동산을 매각하고, 태평양 인근해역에서 석유시추를 허용해 생기는 수입으로 메우기로 했다. 이 막대한 삭감안이 캘리포니아 주민들의 삶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확인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장 우수한 수준을 자랑하던 교육이 직격탄을 맞았다. 교사 3만 명 이상이 해고됐고, 이는 수업 부실화로 이어졌다. 주정부 지원이 줄어든 주립대들은 등록금을 올리면서 가뜩이나 어려운 중산층 이하 서민들의 허리를 휘게 만들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평의회(UCBR)는 학생들의 반발에도 지난해 11월 등록금을 한꺼번에 32%나 올리기로 했다. UC버클리는 전기를 아끼기 위해 시험기간 중 도서관 24시간 개방제도를 없애고 토요일마다 도서관 문을 닫는다. UCLA는 개설강좌 수가 10% 감소했고, 강의를 듣는 학생 수가 30% 늘어난 강좌도 있다.

 빈곤층 의료지원 프로그램도 13억 달러가 줄어들면서 저소득층이 직접적인 타격을 받게 됐다. 주정부 상황만 나쁜 게 아니다.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로 우리에게 유명한 로스앤젤레스 시에서는 지난 2월 경찰관, 소방관 등 공무원 1000명을 정리해고했다. 4월에는 공원과 도서관 같은 공공기관에 대해 1주일에 이틀씩 의무적으로 무급휴가를 가도록 했다. 급기야 잔여 형기가 60일 이하인 수감자들을 조기 석방하는 조치도 등장했다. 캘리포니아의 재정적자는 지금도 190억 달러에 이른다.

 지난 3월 4일 캘리포니아의 대학 재정지원 삭감 반대 시위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최근 성남시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을 계기로 지방재정 위기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한국 지방자치단체들이 방만한 재정운용을 해온 것이야 원체 유명한 일이지만 자치단체 공기업까지 위험하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위기의식이 높아지고 있다. 더구나 지난해 재정조기집행 과정에서 지방채 발행을 독려하는 등 중앙정부가 지방재정악화에 책임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상황이 썩 녹록치 않아 보인다.

 일반적으로 재정위기 상황에서 선택하는 정책수단으로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리는 것은 ‘마른 수건 쥐어짜기’라고 할 수 있다. 재정지출을 줄이고 각종 인건비는 동결하거나 삭감하고 신규투자를 줄이는 것이다. 하지만 긴축재정을 할 경우 가장 먼저 줄어드는 것이 복지예산이라는 것은 외국 경험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캘리포니아에서 보듯 공공부문 일자리를 줄이고 복지예산과 교육예산을 줄이면 한쪽에선 저소득층이 늘어나면서 공적부조예산이 늘어나 복지예산이 더 늘어나는 모순이 발생한다. 다른 한 쪽에선 다들 돈이 없어서 소비도 살아나지 않고 경제는 더 살아나지 않으면서 자연스레 세입감소가 계속된다. 말 그대로 악순환이다.

 정창수 좋은예산센터 부소장에 따르면 복지국가의 대명사인 스웨덴이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공적 부조(기초생활보장)에 쓰는 예산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1% 가량이라고 한다. 그런데 복지국가와는 거리가 먼 미국 연방정부가 쓰는 예산이 GDP 대비 약 4%다. 정 부소장은 “재해 관련 예산을 예방 중심으로 편성할 것인가 사후복구 중심으로 편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동일한 문제가 지방재정위기에서도 발생한다.”고 꼬집는다. 사후복구가 당장 중요하다고 해서 사후복구 중심으로 재해예산을 쓰다보면 해마다 사후복구만 하게 된다. 하지만 예방 중심으로 바꾸면 당장엔 돈이 더 들지 몰라도 어느 순간이 지나면 비용도 적게 들고 피해도 적게 입는다. 캘리포니아가 지금이라도 세금을 올린다면 당장엔 힘들지 모른다. 하지만 저소득층 복지와 공교육을 희생하고, 경찰을 해고하고 재소자를 석방하는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방식이 언제까지 통한다는 보장도 없다. 당장 우리나라에서도 2008년에 종합부동산세가 대폭 완화되면서 지방자치단체 세입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제 우리도 ‘세금 깎아준다’는 감언이설에서 벗어나 ‘세금 더 내고 더 많이 나눠 갖자’는 생각을 하는 것이 재정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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