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요즘 대한민국에서, ‘포퓰리즘’만큼 뾰족한 언어가 또 있을까?
지난 6·2 지방선거 당시, 조중동과 한나라당이 진보진영의 ‘무상급식 정책 연대’에 대해 퍼붓던 이 저주의 정치적 수사는, 이제 이명박 대통령의 ‘서민 정책’을 향하고 있다. 물론 약간의 전선 변화는 있다. 예를 들어 한나라당의 비주류, 홍준표 최고위원 같은 사람은 “더 많은 포퓰리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일관된 우파 정치집단인 조선일보와 경제신문들만이, 일관되게, 포퓰리즘은 안된다고 부르짖는다. 대체 포퓰리즘이 뭐길래 이렇게들 난리인가?  

 재미있는 건 나라마다 포퓰리즘에 대한 정의가 다르다는 것이다. 먼저 네이버 백과사전. “일반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행태를 말하며 종종 소수 집권세력이 권력유지를 위하여 다수의 일반인을 이용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반대되는 개념은 엘리트주의(Elitism)이다. …중략… 대중주의라고도 하며, 인기영합주의·대중영합주의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포퓰리즘의 근본 요소는 개혁을 내세우는 정치 지도자들의 정치적 편의주의나 기회주의이다. 예를 들면 선거를 치를 때 유권자들에게 경제논리에 어긋나는 선심 정책을 남발하는 일이 전형적이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엘리트주의에 반대되는 개념이라면 민중주의 혹은 인민주의로 번역하고 설명하는 게 옳을 텐데, 네이버는 인기영합주의, 대중영합주의에 대한 설명에 치중하고 있다. 네이버의 번역은 우리 사회 언어적 주류의 해석에 해당한다. 2008년 6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시위에 대해 소설가 이문열이 “위대하고도 끔찍한 디지털 포퓰리즘”이라고 표현한 것은, 비록 그가 비아냥대는 표현이 아니라고 부연했음에도 불구하고, 포퓰리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포퓰리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우파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마이뉴스>는 촛불시위에 대한 우파들의 공세를 비판하는 기사를 쓰면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이야말로 끔찍한 포퓰리즘”이라고 제목을 뽑았다. 좌우를 막론하고 포퓰리즘을 부정적 수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스피커를 보수우파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나라밖으로 눈을 돌려 보면 사정은 많이 다르다. 캠브리지 사전은 포퓰리즘을 “보통사람들의 요구와 바람을 대변하려는 정치 사상, 활동”이라고 정의한다. 위키 백과 영문판은 “정치철학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 혹은 정치사회적 사상이나 담론-엘리트와 민중을 동등하게 놓는-의 한 종류로 정의되며, 사회·정치 시스템의 변화를 촉구한다. 다양한 정치 혹은 사회 운동의 참여자들에 의해 차용되는 수사적 스타일로 정의되기도 한다.”라고 소개한다. 네이버의 설명보다 훨씬 중립적이다. 그런데 위키 백과 한글판으로 넘어오면서 네이버와 위키백과 영문판이 교묘하게 합성된다. “포퓰리즘, 또는 대중주의 또는 인기영합주의는 ‘대중’과 ‘엘리트’를 동등하게 놓고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주장하는 수사법, 또는 그런 변화를 뜻하는 말이다. 이것은 이데올로기, 정치철학, 또는 단순한 담론으로 정의된다.” 이런 걸 토착적 변용이라고 해야 할까?


2008년 6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시위에 대해
소설가 이문열이 “위대하고도 끔찍한 디지털 포퓰리즘”이라고 표현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포퓰리즘이 악마의 화신처럼 통용되기 시작한 계기는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이 실시한 일련의 경제 정책 때문이다. 쿠데타에 참여해 노동부장관이 된 그는 노동조건의 개선과 임금 인상 등으로 노동자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처음 대통령이 됐을 때는 외국 기업의 국내 진출을 규제하고 철도 등 공익 사업을 국유화했으며, 사회보장 제도를 실시하는 등 사회주의적 정책을 실시했다. 군부 쿠데타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났던 그가 페론시대를 그리워하던 아르헨티나 국민들에 의해 두 번째로 대통령에 선출된 것은, 죽기 1년 전인 1973년이었다. 장하준 캠브리지대 교수가 지적했다시피, 아르헨티나의 경제위기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도입한 1980년대에 시작된다. 그 전까지 아르헨티나는 명실상부한 남미의 경제 선진국이었다. 페론의 포퓰리즘이 국가경제를 파탄냈다면 어떻게 두 번씩이나 대통령이 될 수 있었겠는가.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이렇게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역사와 사실을 왜곡하는데 일가견이 있다. 

 이문열이 끔찍하다고 표현한 촛불집회에 대해 김대중은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인터넷, 휴대전화를 통해 직접 민주주의가 실현된 중대 변화”라며 “그리스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두 사람의 시각 차이는 곧 정치철학의 차이다. 엘리트주의(혹은 대의제민주주의)로 무장한 이문열이 촛불집회를 포퓰리즘이라고 깎아내릴 때, 민중주의(혹은 직접민주주의)를 신봉하는 김대중(그가 대통령으로 재직할 때 그렇게 통치했다는 뜻은 아니다)은 위대한 변화라고 상찬하는 것이다. 우리가 배웠던 상식은, 직접민주주의와 간접민주주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조건(예를 들어 인구나 비용)의 문제라는 것이었는데, 어느 샌가 좀 더 많은 참여가 좀 더 많은 오류를 상징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정치인이 표(=표심=민심)를 의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진대(“모든 정치는 기본적으로 포퓰리즘”이라고 말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를 기억하자), 우리 사회에서 그것은 포퓰리즘이라는 한마디로 폄하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류의 입장에서) 설정한 사회발전의 길을 벗어나는 모든 정책을 선심정책으로 비난하는 권위주의적 엘리트들이다. 국민들은 모두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들이고, 자신들은 국가의 백년대계를 생각하는 선지자들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쪽방촌 투기와 위장전입도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 개인적 결단인지 모른다!) 무상급식은 국민들의 거지근성을 키우고, 근로 의욕을 꺾으며, 국가재정을 파탄낼 것이기 때문에 절대 안 되지만, 20조원이 넘게 드는 4대강 사업은 국가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국민의 대다수가 반대하는 4대강 사업-한반도 대운하 1단계 사업-을 모든 민주적 절차와 합의를 무시하고 강행하는 이명박 정권은 포퓰리즘 정권이 아니다.  

 슬라보예 지젝 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제기해야할 질문은 ‘포퓰리즘이 필요한가’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포퓰리즘이 필요한가’다. 언어를 놓치면 다 놓친다. 포퓰리즘을 문자 그대로 ‘민중주의’라고 읽자. 우리는 지금 포퓰리즘이 너무 적어서 문제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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