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2009년 9월 10일자 동아일보 사설 : 「법정과 맥아더 동상을 공격하는 세력의 정체」

 용산 참사 사건 법정에서 재판장 한양석 부장판사는 법정소란 행위가 외부단체의 지시나 사주에 의해 벌어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같은 날 인천 자유공원에서는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가지 풍경을 깊이 들여다보면 뿌리가 닿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사법부의 권위와 한미동맹의 상징을 흔들어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기반을 무너뜨리려는 세력이 우리 사회에 엄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들이다. …… 단순히 재판진행 방해 차원을 넘는 것이었다. 좌파단체들이 도심에서 벌이던 조직적인 불법 집회시위를 법정으로 옮겨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 도심 불법시위보다 훨씬 심각한 국기(國基) 문란이다. …… 이런 세력의 목표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 체제와 한미동맹을 무너뜨리려는 것임을 국민 모두가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땅굴을 파듯이 우리 사회의 밑동을 야금야금 위협해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위 사설의 논리는 이렇다. ‘재판거부 행위 → 외부 단체 지시․사주 → 자유민주주의 부정 세력 → 좌파단체 국기문란행위, 땅굴세력’ 이라는 도식이다. 이런 황당무계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의 단순 무식함이 부럽기까지 하다. 그렇게 단순하게 세상을 한 가지 시선으로만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다면, 거칠고 험한 세상에 무슨 고민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용산참사 사건에서 검찰이 수사기록 3,000여 쪽을 법원의 증거개시 명령에도 불구하고 변호인들에게 공개하지 않는 상태에서 피고인을 변호해야 되는지 여부를 놓고 변호인단 내부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이유를 불문하고 피고인을 보호하는 것이 1차적인 변호인의 책무이므로 변론해야 한다는 입장과 이런 상황에서 피고인을 변호하는 것은 검찰의 불법적 행동을 사실상 묵인하고 있는 법원의 재판을 정당화시켜주는 들러리 역할밖에는 안되므로 재판을 거부해야 한다는 입장 등이 팽팽하게 대립하였다. 결국은 다수 입장에 따라 재판을 거부하고 변호인 직을 사퇴하기로 최종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재판 참여 및 거부 입장을 놓고 벌어진 변호인단의 치열한 논쟁은 어느 누구의 입장이 옳고 그른 것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이 사건을 바라보는 피고인 보호라는 방식에서의 시선의 차이가 존재했을 뿐이고, 내부에서는 서로의 의견을 충분히 존중하였다. 이러한 입장정리에 따라 변호인들은 재판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고, 흥분한 일부 유가족들이 법정을 잠시 소란하게 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법정소란의 그 모든 원천과 죄악은 검찰에 있었다. 검찰이 정정당당하게 법률에서 말하는 ‘공익의 대표자’로서 ‘인권옹호 기관‘으로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수사를 하였다면 왜 떳떳하게 수사기록을 공개하지 못하는가에 대하여 우리 사회와 언론이 이성을 갖고 있다면 진지하게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문제였다. 공익적 기능을 고민하는 언론이라면 보다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성찰은 모르쇠하면서 표피적․일시적인 행위만을 문제삼아 마치 국기문란사범처럼 호도하는 것은 스스로 언론이기를 포기한 적반하장의 만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법정에서 검찰의 증거 비공개 내지 은익 문제로 인하여 발생된 재판의 파탄 상태를 두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세력의 발호처럼 호들갑을 떠는 그들의 실체, 실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들여다보자.

 먼저 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부모형제가 경찰의 집회․시위 진압과정에서 5명이나 사망했는데도 검찰이 수사결과를 공개하지 않는다면 훌륭한 당신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존중하는 만큼 조용히 침묵하고 구속되어 재판을 받겠는가. 동아일보의 논리를 거꾸로 전개해보자. 그러면 ‘우파세력 → 자유민주주의 수호 세력 → 재판 순응’의 논리가 될 것이다. 그러면 우파세력이면 헌법과 형사소송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피고인의 정당한 권리를 검찰이 짓밟고, 법원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그대로 순응하는 것이 옳다고 할 것인가.


1일 오후 서울 대한문 앞에서 진보신당,이명박 정권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
회원과 유가족들이 용산 참사 문제해결을 촉구하는 삼보일배를 하다 경찰에 가로막혀 있다.

사진출처 - 한겨레


 수사기록 공개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문제는 좌파, 우파 세력의 편 가르기 다툼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문제이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유지와 수호를 위하여도 반드시 지켜야 할 문제다.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면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보호받아야 할 피고인의 정당한 권리와 이익을 위하여 수사기록을 공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이는 곧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수호하는 것이다.

 거꾸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보호되어야 할 정당한 권리를 부정하는 자들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세력들인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썩어 빠진 낡은 이념의 펜을 휘두르는 당신에게는 차라리 돼지 꼬리에 진주를 다는 일이 훨씬 보람 있는 일이라고 권유하고 싶다.

 용산참사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며, 현 정권의 비인간적이고 물신적인 사고방식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사건이다.

 인간의 생명보다 돈과 물질을 숭상하고, 권력을 사용함에 있어 인간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자들에 의하여 짓밟힌 영혼의 절규와 눈물이 흐르는 사건이 용산참사 사건이다.

 용산의 눈물은 비록 현재는 별다른 울림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언젠가는 우리를 성찰하게 만든 시대의 눈물이었다는 사실이 널리 인구에 회자될 것이고, 현 정권의 가슴을 찢어 놓는 사건이 될 것이다.

 어느 활동가의 편지가 생각난다. “난 용산참사와 관련하여 하루라도 빨리 감옥에 가고 싶다”고, 하여 그가 흘리는 용산의 눈물이 정의의 강물처럼 흐를 날도 곧 오리라고 믿고 싶다.
 

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둥중입니다.

 지워야 하는데 아직 지우지 못 하는 문자가 있다. 오늘 문득 문자를 뒤지다 지워지지 않은 그 문자를 발견했다. <쌍차정책부장부인자택아파트에서자살> 그 문자를 받던 순간의 답답함이 떠올라 마음이 콱 메었다.


 7월 20일이었다. 그 날 하루는 이 대한민국의 실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세 가지 집회가 한꺼번에 일어났다. 오전부터 말 그대로 듣보잡인 사람이 인권위원장 취임식을 하겠다고 국가인권위원회로 오고 있었고 순천향병원에서는 용산 사태 추모대회가 있었다. 인권은 모른다는 법학 교수의 말은 정치가 무슨 장난이냐는 생각에 사람들을 어이없게 했다. 또 용산 사태가 반 년째였다. 반년이 되어 잊지 말자는 것보다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어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준비한 집회였다. 사람이 죽은 지 반년이 지났고 검찰에서는 수사기록을 공개하지도 않고 있다. 그래도 ‘공권력’과 충돌해서 ‘국민’이란 사람들이 죽었는데 대통령은 단 한 마디도 사과하지 않은 상태다. 억울해서 이대로는 장례지내지 못 하겠다는 유족들이 시체를 메고 밖으로 나오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그래야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또 같은 시각 평택에서는 정리해고 당한 쌍용차 직원들이 싸우고 있었고 그들을 ‘국민’으로 취급하지 않는 공권력은 사정없이 최루탄을 날렸다. 스스로를 ‘죽은 자’로 칭하는 이들은 살아있지만 죽은 자였다. 더 이상 이들이 국민이 아니라면 공권력이 그들에게 영향을 끼치진 못 해야 할진데 법의 바깥에 있는 자로 치부된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강한 공권력으로 탄압을 받고 있다.


 나는 인권위원장 취임식 저지를 위해 인권위로 향했다. 건물 앞은 이미 경찰들이 빡빡하게 서서 문을 막고 있었다. 인권위원장 자격검증을 위한 공개질의서를 준비한 활동가들은 입구에서 한 발자국도 들어가지 못 하고 있었다. 겁이 많은 인권위원장은 이미 경찰들을 불러 몇 뼘 되지도 않은 인권위 문을 들어가지 못 하게 했다. 사실 그건 문제도 아니었다. 더 놀라운 것은 휠체어 장애인들이 오르내릴 수 있는 경사로마저 경찰들은 차단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약자의 편에 서는 가장 힘 센 기구가 인권위였는데, 그 인권위가 인권을 침해하는 사건이었다. 인권위 건물을 들어가지 못 하는 활동가들은 분통이 터졌고 다칠 걸 알면서도 방패로 돌진했다.


 국가는 국민을 바보로 알고 기업은 모두 제 덕이라고 착각한다. 국가는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기준으로 국민과 국민 아닌 것을 나누고는, 국민 아닌 자들은 만만하게 생각한다. 얼마나 모순적인가. ‘국민 아닌 자’로 취급한다면 아예 공권력을 행사할 자격이 국가에겐 없는데도 말이다. 기업은 어떤가. 경제가 발전한 것은 기업의 덕이고 노동자들을 고용한 것은 감사해야 할 일이 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기업은 그렇게 무책임하게 직원들을 마구잡이로 해고하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의 일터이고 쉽게 나갈 수 없다며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을 불법이라며 최루액을 쏘고 물과 전기를 끊으면서까지 끌어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권이 너무 절실해진 시대에 그 어떤 때보다 인권이란 말이 많이 들린다. 하지만, 지금 인권이라는 말은 너무 무력하다. 너무나 상식적이기에 인권이 침해된다는 말을 부르짖으면 양심에 찔려할 거라는 건 착각인 셈이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 아는 양심, 이런 나의 생각이 여전히 이상적인 착각인가. 환상을 깨고 나쁜 것을 직시해야만 이 모든 비상식적인 사태들을 막을 수 있는 걸까. 타협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이런 생각을 절실하게 느낀 건 경찰 때문이다. 누군가 경찰의 양심은 따로 있다 했다.


 단순히 그들도 또 하나의 희생자들일 뿐인가. 경찰과의 대치 앞에서 이건 진짜 싸움이 아니라고 위로하면서 그들을 가엾게만 생각해야 하는가. 난 그 날 그런 마음이 싹 사라졌다. 경찰을 미워하되 경찰 개인은 미워하지 말라고 말했다. 하지만 난 그 말을 더 이상 믿고 싶지 않다. 그들이 경찰이기 전에 경찰 개인이라면 더욱 질타해야 한다. 경찰에게 윗사람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경찰 양심’이 있다면 경찰 개인에게는 우리 모두 아는 ‘양심’이 있을 터이다.


 

지난 7월 20일, 취임식을 앞두고 경찰이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입구 경사로를 막자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항의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난 장애인이 올라가는 경사로를 막고 서는 그에 항의하는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는 웃으며 영상을 찍는 여경의 모습을 한참이나 보았다. 지금 자신 앞에 서 있는 우리들의 근거가 전혀 납득되지 않아서일까? 아주 잠시라도 저들이 왜 서 있는지 생각은 하는 걸까. 그들은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모든 경찰이 그렇진 않은 거라며 일말의 이해라도 놓지 말아야 하는 걸까. 이렇게 생각하고 마는 건 내 타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경찰 개인들도 사정없이 미워해야만 한다는 거다. 내 주위에 경찰이 있다면 그는 그저 내 친구라고 위로하고 말 뿐이 아니라 캐묻고 따질 수 있어야 하는 거라고. 그렇게 마음먹었다. 왜 선이란 건 일상에서만 유효한 건가. 단지 착한 친구, 착한 아버지인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경찰들과 가까이 마주하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을 때쯤, 바지에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쌍차정책부장부인자택아파트에서자살>.


 나라 돌아가는 꼴이 너무 부당해서 화를 냈지만, 내가 지금 그렇게 힘든 사회에 살고 있다는 걸 피부로 체감하는지가 확실치 않아 인권활동을 하면서도 늘 줄타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스스로 감정의 과잉에 속지 않으려고 했는데. 경찰과 대치하는 인권위 현장 앞에서 누군가의 자살했다는 문자를 보는 순간 눈물이 눈동자를 덮었다. 속상하다. 속상하다. 화난다. 화가 난다. 너무도 정직한 감정들이 밀려왔다.


 나는 영화를 찍는답시고 한창 준비 중인 상태였고 그 날 저녁엔 배우들과 리허설을 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내 하는 일이 너무 보잘 것 없어지고 내 영화 내용이 뭐가 그리 의미가 있으려나 싶었다. 그런 생각 때문에 무기력해지는 내가 또 싫지만, 어쨌든 난 계속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국민인 것을.


 그래 잊지 않으려고 쓰는 글인 것을. 잊지 않고, 나 그저 사소한 선에 집착하지 않기 위하여. 나도 알고 너도 알고 우리 모두 아는 ‘양심’을 지키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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