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최상돈이란 가수가 있다. 노래를 참 잘한다. 곡도 잘 만들어서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다. 4.3 현장을 찾아다니며 연출되지 않는 공연도 한다. 군사기지 싸움 현장에도 달려와 늘 주민들과 함께 선다. 주민들과 막걸리 잔이라도 기울일라 치면, 곧 그의 ‘목포의 눈물’ 요청이 쇄도 한다. 미안한 얘기지만, 나는 조용필이나 한영애의 그것보다 최상돈의 ‘목포의 눈물’을 더 좋아한다.

 그런데 그는 정작 자기 노래를 담은 음반 한 장 아직 못냈다. 수십 년 동안 노래에 온 삶을 바치며 장가도 못간 그가 제대로 된 음반 하나 갖고 있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올봄 즈음에는 ‘상도니 노래 날개 달아주기’ 모임이 시작되었다. 뜻맞는 사람들끼리 십시일반 모아서 최상돈을 ‘데뷔’시키자는 것이다. 말이 ‘데뷔’지, 그의 노래, 아니 그의 삶을 오롯이 한 장의 음반으로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평생 현장에 헌신해 온 그에게 최소한의 보답이라도 하자는 취지도 덧붙여진다.

 그의 음반에는 그의 노래가 좋아서 후원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도 빼곡히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음반이 만들어지면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전국 투어에도 나서기로 했다. 제주와 같은 아픔을 겪었던 지역들, 예를 들어 평택이나, 부안 등지를 다니면서 현장의 가수끼리 만남을 엮고 비슷한 처지의 지역끼리 서로 보듬고 교류하자는 것이다. 서울 대학로의 공연장에서도 제주 가수의 노래를 통해 ‘제주’를 들려주면 좋겠다.

 

 
제주의 소외된 현장에서 늘 함께 하는 가수 최상돈, 최근 그의 음반을 내기 위한 노력이 모아지고 있다.
사진 출처 - 필자

 비단 제주의 가수 최상돈을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정작 최상돈은 머쓱해하며, 그럴 필요 없다 말리기도 하고, 자신 때문에 모여서 걱정하고 때로 옥신각신 하는거 보면서 상처도 받았다고 하지만, 이번 일은 최상돈 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지난 6월, 박원순 변호사 블로그를 보니까 광주의 행복발전소라는 곳에서 ‘광주전남 가수 키우기 프로젝트’라는 것을 벌이고 있음을 소개하고 있었다. 참 좋아 보인다. 지역에서 거리문화, 현장예술을 끌고 가고 있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그들의 삶이란 녹녹치 않다. 그런데 문제는 지역에서조차 그 사람들을 무슨 무슨 행사를 벌일 때 ‘써 먹을줄’만 알았지 키우려는 생각은 잘 안하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프로젝트 수준은 아니더라도 그들의 삶과 현장문화를 지키기 위해 함께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제주 속담에 ‘동네 심방 안 알아준다(동네 무당은 알아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실력이나 재능은 있지만, 오로지 언제든지 찾으면 볼 수 있는 동네(지역)사람이라고 도무지 키워줄 생각 안한다. 그래서 무슨 무슨 집회나 현장 행사에는 노래 불러달라고, 공연해달라고 하면서 그들의 삶이야 어떻든 술 한 잔 같이하면 그만이라는 현상을 빗대어 볼 수 있는 말이다.

 이를 좀 더 확장하게 되면, 언제까지 서울과 제도가 주도하는 문화 권력에 의존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물론, 서울에도 여전히 거리의 문화는 마이너이다. 한편, 아직 지역의 문화는 서울로 상징되는 문화 권력에 예속된다. 민중문화니, 독립문화니 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때문에 지역에 좋은 가수, 좋은 예술가가 있어도 큰 행사나 기획을 준비하게 되면 무대에 누구를 초청할까 하면서 서울의 리스트부터 뒤지게 된다.

 모든 텍스트는 서울에서 온다. 우리 사회에 대한 시각, 이런 저런 이야기, 시대 담론은 말할 것도 없고, 지역의 문화와 자연에 대한 이야기조차 서울에서 나온다. 제주만 하더라도, 최근 한창 각광을 받고 있는 ‘올레’와 관련된 책은 서울에서 나온다. 물론 올레를 걸었던 경험과 이야기는 누구든지 풀어낼 수 있겠지만, 누구보다 제주의 생태와 문화를 잘 이해하고, 어릴 때부터 살아온 터전이기도 한 고향의 이야기가 서울에서 전해지다니, 반성할 일이다. 우리 안에서부터 ‘책 내는 버릇’이 바이러스 처럼 퍼졌으면 좋겠다. 그것은 제주를 남기는 기록이고, 제주를 알리는 홍보이자, 제주를 키우는 문화재생산이기도 하다.

 돌아보면, 제주의 삶과 문화를, 자연을 누구보다도 잘 엮은 책으로, 음반으로, 영화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안 곳곳에 있음을 본다.

 그런데, 그들의 삶이란 작정하고 제도에 얹혀 가거나, 혹은 서울권력과 매칭되는 방식이 아니면 힘겹기 마련이다. 그리고 필히 그것은 주류질서 내에서 스스로 변질될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최상돈처럼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으로 인한 삶의 힘겨움이야 견뎌내겠지만, 그 속에서 피어난 예술은 서울이나 주류의 그것과 견줄 수 없는 값진 산물일진데, 너무 아깝지 않은가! 제도가 아닌, 서울로부터 내려오는 주류질서 밖 이 곳에서 우리 스스로 창조하는 문화의 질서란 다름 아닌, 지역 공동체에 혼을 일으키는 일이다. 사회 전체적으로는 문화다양성을 열어가는 길이다.  

 수년 전, 서울 출장 갔을 때의 일이다. 출장일을 마치고 혼자 어스름한 저녁의 인적도 드문 서울 거리를 걷고 있는데, 어디서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자세히 보니 건너 편 잘 보이지도 않는 어두운 모퉁이에서 한 여성이 기타를 치며 마이크까지 세우고 매우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때, 저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내내 놓지 못했던 기억이 새롭다. 사람이라곤 드문 어두운 겨울 거리의 저녁, 삭막한 공간에 퍼지는 그 노래 덕에 나의 무겁던 발걸음도 행복해졌지만, 그녀의 노래는 앞으로 어떻게 이어져 갈까 하는 의문도 더해졌다.

 지역의 가수를 키우자. 상업적 공간으로 방치되고 있는 지역의 대학로를 메시지가 생산되는 예술장소로 만들어가자. 주류적 생산체제에 쫓겨 촌(村)으로 들어가 자신 만의 예술을 갈구하는 사람들, 16mm 카메라 둘러매고 이곳저곳 사람과 시대를 담으려 애쓰는 예술가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문화게릴라들을 ‘데뷔’시켜내야 한다. 공감과 연대를 통한 비주류의 방식으로 말이다.

 * 제주의 가수 최상돈에 관한 이야기는  http://cafe.daum.net/sdXover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한가롭게 떠 있다. 지난 해 가을에는 서울 거리의 가로수를 보며 가을을 느꼈는데, 올해는 들판에 나가 누워 하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다행이다.

  어제 신문에 일부 보수단체 회원들이 DJ의 묘를 파헤치겠다고 국립현충원으로 달려간 상황이 보도되었다. 최소한 죽음 앞에서 허허로운 관용이나 최소한 혼란스러워 할 줄 아는 인간의 심성마저 똑부러진 살기(殺氣)아래 파묻고 있다. 어쭙잖은 이념이 인간의 예의를 추월했다.

 기실, 해방 이후 한국사회가 고통스럽게 견뎌왔던 학살과 증오가 오늘 날에 재생되는 느낌이다. “노무현의 시신을 북으로 보내라”했던 경악스러운 망언의 기억과 다를 것 없는 맥락이다. 그런가 하면, 국가정보기관의 민간인 사찰 얘기가 터져 나오고, 경찰은 ‘과업’으로 ‘촛불’, ‘2MB'따위 키워드가 들어간 글이 자동으로 수집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한다.

  그 편린들 건너,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습관처럼 이어 온 ‘투표’가 부정당했다. 도지사 소환투표 날, 투표장에 갔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완장’에 감시당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특히, 아무리 새벽 밭일이 분주해도, 투표는 ‘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여 왔던 행위자체를 부정당한 촌로들은 인생의 끝물에서 알 수 없는 자기분열을 겪어야 했다.

 제주시 어느 동에 사는 한 여성은 몇 번이고 투표하러 갈려고 했는데, 그 때마다 직면하는 눈초리와 무언의 억눌림으로 결국 포기해야 했다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심정을 모멸감이라 표현했다. 올 여름, 8월 26일 제주도 전역에서는 이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


김태환 제주도지사에 대한 주민소환투표가 실시된 8월26일 오전 제주 서귀포시 대천동
강정초등학교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한 시민이 투표를 하고 있다.

사진출처 - 한겨레

  투표장은 발길이 뜸했고, 그나마 있던 발길은 제지당했으며, 그래도 투표에 나선 4만 6천의 제주 주민들마저 싸늘함과 불안한 두려움으로 긴장했다. 투표가 폭력으로 대체될 수 있다니. DJ 서거 후 읽은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1967년 국회의원 선거와 71년 대선 등의 분위기가 이와 같았다. 학살과 증오를 배경으로 한, 검열과 분류의 암울한 과거 시스템이 재생된다면 철저히 이렇구나 하는 느낌, 참혹했다.

 DJ서거를 애도하는 신문광고를 전면에 싣고는 그의 생전 얼굴 밑에 “투표하지 말아주세요”라고 버젓이 적어놓은 그들은, DJ의 묘를 파헤치겠다는 광기어린 반항만큼, 사실은 과거의 암울한 질서를 파헤쳐 재생시켜놓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는지 모른다.

 최근 읽은 두 편의 소설에서 영감을 얻었다. 세상은 결코 한 쪽만을 허락하지는 않는다는. 현기영이 10년 만에 발표한 ‘누란’ 속의 허무성은 자신의 트라우마로 인해 늘 현실 속에 재생되는 과거와의 단절을 위해 한 달간의 노숙생활을 거쳐 지리산으로 떠난다. 그 곳에서 좀 더 오래 전, 죽음의 기억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보다 오래된, 다름 아닌 한국 근대 학살의 기억에 대응함으로써 결국 자신을 통해 재생되는 가까운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하는 것이다. 근본부터 다시 파헤치러 떠난 것이다.

 멸망과정이 아닌, 멸망 이후 폐허의 세상 위를 표류하는 부자(父子)의 행보를 그린 ‘더 로드(THE ROAD)'는 철저히 세상은 한 쪽이 아님을 보여준다. 사실은, 그 폐허란 ‘다시 바로잡을 수 없는 것을 그린 지도’를 폐하고, ‘송어가 사는 깊은 골짜기에 모든 것이 인간보다 오래된’ 새로운 지도를 비로소 생성(재생)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의 현실이 그와 같다고 하면, 세상은 틀림없이 다른 한 쪽을 숨겨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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