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촛불: 아주 짧은 인권의 세계사(육영수 위원)

육영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프랑스혁명이 연상시키는 공포의 상징물인 기요틴은 사실 평등하고도 인도주의적인 죽음을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혁명이전의 앙시앵 레짐(구체제)에서는 출생과 사회신분에 따라 각기 다른 형식의 사법적인 죽음이 선고되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목을 베는 참수형은 귀족에게만 허용된 특권적 죽음이었고, 제3신분으로 분류되었던 평민 범죄자들은 목을 매는 교수형으로, 이단이나 마법과 수간(獸姦) 같은 도덕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몸을 형틀에 묶은 뒤 뼈를 체계적으로 부러뜨려 목숨을 빼앗았다. 사지를 찢어 죽이는 가장 야만적인 능지처참 형벌은 왕에 대한 반역죄를 감히 도모한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 다소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프랑스혁명 덕분으로 신분의 높고 낮음과 재산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모든 죄인들은 공평하게 고통 없는 찰나적인 참수형을 맞이했던 것이다.  

 위와 같은 끔직한 ‘죽음의 평등’ 외에도 프랑스혁명은 근대적인 인권개념의 탄생지라는 평가에 걸맞는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개혁을 실천했다. 고문과 노예제와 같은 비인간적인 제도가 철폐되었을 뿐만 아니라, 배우(!)와 유대인 및 사형집행인과 같은 직업적·인종적·종교적 소수자들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했다. 그리고 “인간의 여러 권리들에 대한 무지, 망각(소홀), 또는 멸시가 공공의 불행과 정부의 부패를 낳은 유일한 원인”이라고 천명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서〉(1789년)는 지난 200여 년 동안 인권의 중요성을 계몽하는 좌표가 되었다.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며”, 안전과 압제에 대한 저항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소멸할 수 없는 권리”이며, “사상과 의견의 자유로운 소통은 인간의 가장 고귀한 권리들의 하나”라는 조항들은 근대 인권이 지향·성취해야 할 기본목표를 명시했다. 

 유감스럽게도, 근대적 인권의 탄생이 인간성의 자동적인 성장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역사는 일직선으로 행진하지 못하고 때로는 소용돌이에 휘감기며 때로는 위험한 여울목에서 실종되거나 익사한다. 예를 들면, 1792년의 자유로운 이혼법은 나폴레옹의 등장과 함께 가부장권의 손아귀에서 옥죄였다가 왕정복고와 함께 1816년에 취소되었다. 아이티혁명의 흑인영웅 투생 루베르튀르는 프랑스로 잡혀와 외딴 감옥에서 1804년 사망했고, 1830년부터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이슬람교도) 남성들은 뒤늦은 1947년에야 공민권을 획득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서〉가 보편적인 원칙으로서 인권의 청사진을 제공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성―계급―인종의 편견과 차별에서 유래하는 인권의 억압에 관해서는 침묵했다. 오늘날 관점에서 되씹어보면, 남녀평등, 성소수자의 권리, 노동과 복지의 권리, 휴식과 사생활의 권리, 이주외국인의 국적획득과 귀화의 권리 등은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혁명적 과제로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다. 

 민족/제국주의 시대라고 알려진 19세기 후반부에서 냉전시대로 특징되는 20세기는 역설적으로 인권의 중세(암흑)시대였다. 민족‘자결’주의라는 배타적인 신념은 다른 언어적·종교적·인종적 소수민족들을 증오하도록 선동하는 나팔소리로 전락했고, 좌파/우파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무한경쟁의 수레바퀴 밑에서 인권은 산산이 조각나고 깜깜하게 감금당했다. 1944년에 영국과 소련은 곧 출범할 유엔헌장에 인권 항목을 포함시키자는 다른 나라들의 제안에 반대했고, 미국은 모든 인종의 평등에 관한 구절을 포함시키자는 제안을 거부했다.

 바야흐로 인권은 강대국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춰 통제하고 배급해야 할 권력으로 변질했으며, 동시에 특정 이데올로기적 올바름을 후원하고 확장시키는 무기로 작용했다. 이런 세계사적 위기 속에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서〉의 기본정신을 계승·발전시킨 〈세계인권선언문〉이 1948년 유엔의 주도하에 발표되었다. 프랑스혁명이 발생한 150년 후에야 인권은 비로소 재 정렬된 기준선에 서서 힘찬 달음박질의 호각소리를 기다리게 된 것이다.

프랑스 인권선언문
사진 출처 - 네이버

 우연히(?) 〈세계인권선언문〉이 공표된 1948년에 독립국가로 출범한 우리나라가 지난 반세기 동안 경험한 인권의 역사는 어떤 무늬와 빛깔일까? 제1공화국 이승만 독재시절→박정희 제3공화국과 유신정권→전두환/노태우 군사독재정권→문민정부→국민의 정부→참여정부→이명박 정부를 거치는 동안 이 땅에서의 인권은 어떻게 부침하고 왜 후퇴했는가? 독재자를 하와이로 내쫓았던 4·19 학생혁명의 값진 희생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폭력에 맞서는 촛불축제로 부활하는가? 공기관의 민간인 불법사찰, 쥐(G)20정상회담 포스터 농담사건, 창공의 크레인에 위태롭게 고립된 노동권 등 시대착오적인 인권침해의 ‘배후’에는 누가 비겁하게 숨어 있는가? 이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을 심각하게 성찰하는 시간이야말로 이 땅에서 ‘인권적 인간형’이 단련되고 숙성되는 위대한 순간이다. 강조하건대, 누구의 이름을 ‘대한민국 인권탄압 실명사전’에 기록해야 하는지 우리는 (장마더위보다 더 짜증스러울 정도로) 물어보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좋은 질문은 틀린 대답을 늘 이기기 때문이다.

육영수 위원은 현재 중앙대학교 역사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우리는 어떤 나라를 원하는가 -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이스라엘은 적입니다. 그들은 내 고향인 레바논, 그리고 요르단 시리아 팔레스타인 땅을 불법으로 점령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리 이웃이 아닙니다.”

와엘 사브 회장은 아랍에미리트 수도 아부다비 굴지의 대기업 회장이다. 레바논이 고향이지만 아랍에미리트에서 10년 넘게 살고 있는 그는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대단히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반응했다. 아랍에미리트에서 오랫동안 체득한 처세술인 듯 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이스라엘은 중동 평화 문제에서 대단히 중요한 변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이웃나라인 레바논 사람으로서 그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란 질문에 대해서는 단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지난 5월22일부터 28일까지 8일 동안 아랍에미리트와 이집트를 방문했다. 6주에 걸친 순회특파원 일정 중 첫 단추를 중동으로 꿴 셈이다. 아랍에미리트와 이집트를 선택한 것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격변과 침묵, 경제적 번영과 답보를 대조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취재를 하기 위해 만나는 중동 사람들에게 가능하면 이스라엘과 관련한 많은 질문을 던져보려 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내가 만나본 ‘중동’사람들은 이스라엘에 대해 공통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막강한 무력을 앞세워 이웃나라를 힘으로 위압하고 영토를 불법점령하고 수백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강요하는 것이 첫 번째였다. 그리고 그런 깡패 짓을 대놓고 하는데도 말리는 건 고사하고 편만 들어주는 미국에 대한 불만이 두 번째였다. 그것은 마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모든 학생들이 미워하지만 ‘완력’에 밀려, 그리고 학교가 채워준 ‘완장’에 눌려 불만을 삭일 수밖에 없는 학교 규율부장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아랍에미리트에서 사업가로 일하는 한 이라크인 알리 가잘은 이렇게 말했다. “이라크 대통령이 사담 후세인이건 누구건 우리처럼 사업하는 사람에겐 아무 상관없다. 그게 무슨 문제인가. 미국은 십년 넘게 사담과 친구로 잘 지냈고, 그 뒤로도 딴 짓 못하게 막아만 놓고는 건드리지 않고 그냥 뒀다. 그러다가 왜 갑자기 쳐들어와서 이라크를 난리판굿으로 만드는가. 사담이 대통령일 때 나는 이라크에서 기업하는데 아무 문제없었다. 오히려 사담이 무너지고 나니까 극단주의자들이 내 공장을 불질렀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이민 올 수밖에 없었다.”

그와 동업관계인 다른 이집트인 이햅 옴란의 말은 더 냉정하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하나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믿지 않는 것처럼 미국도 믿지 않는다. 왜 중동 평화가 안 되는가. 우리는 평화적 해결을 원하는데 이스라엘이 평화를 원치 않는다.”

두 사람은 종교간 갈등이라는 인식에 대해서도 단호히 손을 저었다. 가잘은 “이라크에 유대인이 많이 산다. 천년 넘게 아무 문제없이 다들 어울려서 평화롭게 살았다. 중동 국가 어디에나 유대인들이 산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사는 아랍인은 지금 어떤 처지인가.”고 반문한다.

이집트인 에즈딘 엘하산은 미국의 이스라엘 편향이 미국에게도 손해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아랍은 원래 상인문화가 발달해서 미국과 정서상 더 잘 맞는 곳”이라면서 “미국이 이스라엘만 옹호하면서 중동권에 반미 정서가 퍼졌고 결국 많은 중동국가가 소련과 가까워졌다”고 지적했다. 결국 그는 “미국은 이스라엘을 얻는 대신 전체 중동권을 잃었다.”는 것이다.

6주간 순회특파원의 핵심 주제는 ‘공공외교’였다. 공공외교는 한국에선 생소한 개념이지만 간단히 말해 ‘상대방 국민의 마음을 직접 얻는 외교’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 외교가 외교관 대 외교관, 정부 대 정부라면 공공외교는 주체가 정부일 수도 있고 시민단체일 수도 있다. 대신 대상은 상대국 정부가 아니라 상대국 국민의 ‘이해와 공감’인 셈이다. 문화외교, 학술교류는 물론 개발원조단체들의 활동도 공공외교에 포함된다.

한국 같은 나라에게 공공외교가 필요한 건 무엇보다도 4대 강대국에 둘러싸이고 분단된 상황에선 힘으로 밀어붙이는 외교는 물론이고 한류 자랑만 하거나, ‘자랑스러운 1만년 역사’같은 허황된 국수주의 경쟁을 벌이거나, 다른 이웃은 나몰라라 하고 특정 이웃만 ‘편애’하는 행태 모두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이란 문제의식 때문이다. 가령 ‘한미동맹’을 되살린다며 남의 나라 대통령 골프차량 운전이나 해주고 쇠고기 받아오는 방식은 접어두고,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관점에서 상대국 국민들의 ‘이해와 공감’을 얻어내는 걸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되려면 전제가 필요하다. 우리는 어떤 나라로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각인시킬 것인가, 이는 우리는 어떤 나라를 알릴 것인가란 주제로 직결된다. 고민은 근본적으로 ‘우리는 어떤 나라를 원하는가’란 토론으로 이어진다.

이스라엘은 미국에 대해서만큼은 대단히 성공적으로 ‘이해와 공감’을 얻어냈다. 이스라엘계 로비단체인 AIPAC는 미국 내에서도 최대 최고 로비단체다. 아무도 이 단체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중동인들의 ‘불신’을 보면서, 그리고 이집트 다음으로 찾아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한 각국 문화축제에서 팔레스타인 부스 앞에서 땡볕에 길게 늘어서 있는 헝가리 시민들을 보면서 나는 이스라엘 ‘공공외교’의 빛과 그림자를 본다.


 9월 런던에서 열리는 ‘템즈 페스티벌’에 초청받은 YG 가수들의 공연을 촉구하는 영국 팬들의 플래시몹 시위
사진 출처 - YG엔터테인먼트

하긴 멀리 볼 것도 없을 것 같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을 ‘점령’하고 있다는 한류를 통해 달러 좀 더 많이 벌어보겠다고 해외에서까지 ‘K팝 공연 촉구 플래시몹’이란 신종 관제데모까지 만들어내고 한류를 무슨 신성장동력이나 되는 듯이 난리치는 정부를 보면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한류에 취한 한국의 슬픈 조급증과 물욕을 본다.  

 우리는 한류가 세계 만방을 '점령'해서 그 덕에 이수만 같은 사람이 달러 많이 벌어들이는 나라를 원하는건가? 독도 문제를 이슈해 보려는 일본 의원 세 명에 온 나라가 난리법석을 떨며 군복입은 아저씨들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어주는 나라를 원하는가? 동계올림픽 한다고 개발업자들 배불려 주고 이건희 회장 사면에 면죄부를 주는 나라를 원하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182억원을 들여 단계적 무상급식을 할 것인지 아니면 또다른 단계적 무상급식을 할 건지 물어보는 걸 주민투표랍시고 하는 나라를 원하는가? 

 우리는 어떤 나라를 원하는 것일까. 그게 해결이 안되면 우리는 어떤 모습을 외국에 알릴지가 해결이 안된다. 그게 안되면 글로벌만이 살길이니 해외 인재 영입해야 한다며 인도 사람 채용해놓고 고작 한국의 문화를 알아야 한다며 삼겹살에 소주로 밤샘시키는 짓이나 벌이는 어떤 나라 대기업처럼 되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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