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
범정부 차원의 인권 홀대가 낳은 조직적 고문 사태… 경찰 감시조사기구와 자치경찰제 전면 도입 필요
» 강희락 경찰청장이 지난 6월22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출석해 양천경찰서 고문 사건에 대한 질의에 답하고 있다. 한겨레 탁기형 기자

고문은 조직적으로 지속됐다. 수법도 전문적이다. 서울 양천경찰서만은 아닐 거다. 마포경찰서와 서초경찰서에서도 고문 사건이 터졌고, 비슷한 제보도 잇따르고 있다.

강북경찰서 서장은 실적 경쟁에 내몬 경찰 지휘부의 책임이 크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했다. 실적만 강조하면 유사한 사건이 이어질 거라고 경고한 그가 내놓은 해법은 조현오 서울경찰청장의 퇴진이었다.

 

‘법질서’의 말뜻을 뒤집어버린 이명박 정부

경찰 지휘부가 실적을 강조한 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 때문에 현 사태를 성과주의로만 설명하는 건 본질적이지 않다. 조 청장이 유별났다지만, 경쟁에 내몰린 학생들이 다 커닝을 하는 건 아니다.

더구나 그 과정이 고문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고문은 인간을 파괴하고 법치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악질 범죄다. 전쟁과 민간인 학살 빼고, 국가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죄질 나쁜 범죄일 게다. 실적을 위해 고문을 한다지만, 고문의 뒤끝이 어떤지는 1987년 박종철 사건이나 2002년 서울지검 고문치사 사건을 통해서도 이미 확인됐다. 조직을 위해 일했다지만, 조직은 고문 가해자를 보호해주지 않는다.

사실 경찰은 일상적으로 고문의 유혹을 느끼기 쉽다. 범죄자가 분명해 보이는데 범행을 부인하면 화가 나고, 몇 대 때려서라도 자백을 받고 싶어질 수 있다. 공권력이 갖는 관성의 힘은 그래서 무섭다.


과정은 어떻게 되어도 범인만 잘 잡으면 그만이라는 공권력의 욕구와 유혹을 통제하기 위해 문명국가들은 법치주의를 고안해냈다. 수사 활동이 범인 검거만 우선할 게 아니라, 법에 정한 절차를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원리다. 형사법은 인권 보장은 외면하고 범인 검거에만 골몰하는 경찰 등 수사기관의 관성을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범인 검거만 생각한다면 형사법은 효율을 떨어뜨리는 걸림돌일 뿐이다. 저비용·고효율에 적합한 기업이 아니라, 국가가 수사 활동을 진행하는 까닭이다. 수사가 사람을 겨냥하기에 한없이 신중해야 하고, 혹시 있을지 모를 실수를 줄이는 통제장치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법의 지배, 법질서다.

하지만 현 정권은 대통령부터 법의 지배, 법질서란 말뜻을 거꾸로 뒤집어버렸다. 법의 지배가 겨냥하는 건 대통령 자신과 경찰처럼 크든 작든 권한을 휘두르는 이들인데, 언제부턴가 국민을 윽박지르는 구호가 됐다. 대통령은 일을 하다 보면 접시를 깰 수도 있다며, 과정보다는 결과만을 강조했다. 정권에 코드 맞추기가 체질이 된 경찰은 선무당처럼 굴었다. 범정부 차원의 인권 홀대는 고문 사태로 이어졌다.

경찰 지휘부나 대통령의 요구는 언제나 인권에 맞춰져야 한다. 욕구와 감정이 실적을 좇을 때, 지도자들은 관성의 힘을 거스르는 이성의 길잡이 역할을 해야 한다. 실적과 인권을 똑같이 강조해도 안 되고, 오로지 인권만 강조해야 그나마 균형을 맞출 수 있다.

고문 사건이 터지자 이명박 대통령은 “법 집행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인권을 지키는 일”이고 “어떤 이유로든 수사 과정에서 고문은 용납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당사자들은 억울하겠지만, 강희락 경찰청장과 조현오 서울경찰청장은 물러나야 한다. 그래서 고문 사건이 터지면 경찰 지휘부가 책임진다는 작은 교훈이라도 남겨야 한다.

 

지휘부가 책임진다는 교훈 남겨야

지휘부의 퇴진만으로 끝낼 일은 당연히 아니다. 고문 근절의 약속이 구두선에 그치지 않으려면, 경찰을 근본적으로 혁신해야 한다. 난맥상을 보이는 경찰 인사를 혁신하고, 구조적인 개혁도 해야 한다. 경찰 혁신은 상식의 복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모든 권력에는 반드시 감시가 필요하다는 상식, 권력은 독점되면 안 되고 쪼개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상식이 바탕이 돼야 한다. 경찰만을 감시하는 독립된 감시조사기구가 출범하고, 자치경찰제를 전면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경찰을 지속적으로 감시하는 한편, 자치경찰제를 통해 경찰에 대한 시민적·민주적 통제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자치경찰제는 1997년과 2002년의 대통령 선거 공약이었지만, 아직도 이행하지 않고 있다. 그냥 놔두면, 경찰은 더 큰 사고를 칠 거다. 그 피해는 시민들의 몫이 될 거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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