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막힌 순간(은수미)
은수미/ 사회학 저는 말로 사는 사람이고 말을 좋아하는 사람이며, 말로 소통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지만, 말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는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정의”, “민주”, “자유”, “인권”, “존엄”, “사랑”, “평화”... 제게 소중한 단어가 입안에만 맴돌며 문득 말을 막는 날이 있습니다. 여의도에 꽃비가 내리던 며칠 전의 아침도 그러했습니다. 혼자 외롭게 목숨을 끊었을 젊은이, 작업장에서 얻은 백혈병으로 아파하고 절규하며 눈을 감았을 노동자... 그 숱한 이름이 벚꽃놀이가 끝난 윤중로, 무수한 발길이 사그라진 길 위로 꽃비와 함께 흩날렸습니다. 그래서 이번 칼럼은 제가 좋아하는 시를 소개하려 합니다. 이 시들은 2년 전 이맘때 쯤 제가 그림과 함께 프린트하여 연구실에 붙여두었던 것들입니다. 첫 번째 시는 백무산의 [인간의 시간] 중 일부입니다. 잠든 씨 알갱이들과 언 땅 뿌리들을 이 시를 처음 읽은 것은 강릉 교도소에 있을 때였으며 간혹 다시 읽어보는 시 중의 하나입니다. 두 번째는 나희덕의 [살아라, 그리고 기억하라]입니다. 덩굴이 나무 위로 기어오르고 있다
저는 나희덕의 작품을 즐겨 읽습니다. 소장과 대장, 약 50센티 정도를 자르고 교도소의 차가운 바닥에서 투병하고 있을 때 나희덕의 [빨래는 얼면서 마루고 있다]를 읽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참으로 좋아하는 시인입니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작품을 다 읽은 것 같습니다. 세 번째 시 역시 나희덕의 [고통에게 2]입니다. 절망의 꽃잎 돋을 때마다 어디서 눈이 하나씩 열리는가 그만 지고 싶다는 생각 ..... 그러나 꽃보다도 적게 산 나여. 어제 2009년 9월 해고된 동료가 대법원에서 부당해고를 인정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복직판결을 받았다는데도 아직 축하 전화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기 때문에 기뻐하기도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오늘 전화를 해야겠습니다. 말을 해야겠습니다. 동료와 함께 봄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