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장기 미제 사건’ 수사를 한다며 영장 없이 일반 시민들의 유전자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일고 있다.
서울 종로경찰서 관계자는 24일 “지난달 14일 종각 근처에서 발생한 ‘영풍문고 앞 현금수송차량 탈취 미수 사건’ 피의자의 디엔에이(DNA)와 용의 선상에 오른 이들의 디엔에이를 채취해 대조하는 수사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이 피의자의 디엔에이는 당시 사건 현장에 남아 있던 혈흔에서 경찰이 채취한 것이다.
경찰은 이 혈흔과 사고 현장 주변 폐쇄회로텔레비전(CCTV) 자료 등을 바탕으로 160~165㎝ 키에 안경을 쓴 30대 초반 남성들을 용의 선상에 올려놓고 디엔에이 정보를 채취하고 있다. 경찰은 사고 현장 주변에 근무하는 시민들에게 직접 찾아가 당사자의 동의를 구한 뒤 면봉으로 입안의 상피세포를 긁어내는 방식을 쓰고 있다고 한다.
경찰은 사건이 평일 오전에 발생한 점에 주목하고, 당시 사고 현장 주변 지하철역을 이용했던 시민 3000여명의 교통카드 사용 명세를 확보한 뒤 이 가운데 디엔에이 채집 대상을 지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종로경찰서의 한 간부는 “당사자의 동의를 반드시 얻는 등 수사 절차를 철저히 지키고 있다”며 “수만명의 수사 대상자 가운데 상당한 신빙성이 있는 경우에 한해 수십명 선에서 디엔에이를 채집한 상태”라고 말했다. 경찰은 관할 지구대에 수사본부를 꾸리고 신고보상금도 1000만원까지 올리는 등 수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사건 발생 한 달이 넘도록 수사가 진전되지 않자 디엔에이 수사까지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 두고 ‘모든 시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인권 침해 수사’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디엔에이 활용 수사는 피의자를 특정한 뒤 법원의 영장을 받아 범인 여부를 가리는 게 정상적인 절차다. 이은우 변호사는 “영장을 받을 만큼 혐의가 확보되지 않은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동의에 의해 디엔에이를 채취하는 건 ‘영장주의’를 회피한 사실상의 편법수사”라며 “여러 가지 생물학적 정보가 포함된 디엔에이를 잘못된 방식으로 이용하려는 위험한 태도”라고 말했다. 경찰은 2004년 경기도 화성 여대생 살인 사건을 수사하면서 이 지역의 주민과 대학생 등 4600여명의 디엔에이를 무작위로 채집해 ‘인권 침해’ 논란을 부른 바 있다.
이에 대해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경찰이 수사 목적을 달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합리적인 의심의 근거가 부족한데도 시민들을 범죄자로 보고 신체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명백한 인권침해”라고 말했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