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50점·절도 20점…검거실적 압박이 가혹수사 불러
범죄별로 점수…단순범→강력범 만들 우려
아동 성추행 등은 점수 낮아 소홀 대처도
시민단체 “고문수사, 인권경시 풍조도 한몫”
한겨레 길윤형 기자기자블로그 송채경화 기자 메일보내기 신소영 기자기자블로그
» 경찰 지휘부의 무리한 실적주의를 비판하며 조현오 서울경찰청장의 사퇴를 촉구한 채수창 서울 강북경찰서장이 28일 오후 강북구 번동 강북경찰서에서 퇴근하며 배웅나온 간부들과 악수를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경찰 평가시스템 어떻길래

채수창 서울 강북경찰서장이 ‘양천경찰서 고문·가혹행위 사건’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한 과도한 실적 경쟁은 경찰 내부에서도 꾸준히 지적돼 온 문제다. 이명박 정권 들어 경찰이 ‘성과’와 ‘엄격한 법 집행’만을 강조했을 뿐, 이를 ‘인권’과 조화시키는 데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일선 지역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현직 경찰서장이 경찰 수뇌부에 직격탄을 날리는 상황까지 벌어져 경찰로선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게 됐다.

경찰의 실적평가는 경찰청이 해마다 내놓는 ‘성과평가 기본계획’을 바탕으로 각 지방경찰청이 작성한 평가 시스템에 따라 이뤄진다. 지난 1월 취임한 조현오 서울경찰청장은 취임사에서 “조직 전반에 성과주의를 도입해 근무 분위기를 쇄신할 것”이라고 밝히는 등 성과주의를 유달리 강조해 왔다.

<한겨레>가 28일 확인한 서울청의 ‘2010년 수사·형사 업무성과 평가계획’을 보면, 시민들을 상대로 한 치안 범죄를 다루는 형사 부서의 경우 범죄별로 구체적인 점수를 정해 놓고 사실상 실적 경쟁을 유도하고 있다. 범죄별 기본 점수는 △살인 50점 △강도살인 70점 △방화·강간 20점 △13살 미만 강제추행 20점 △조직폭력 20점 등이다. 서울청은 이를 근거로 산출된 점수에 따라 산하 31개 경찰서를 가(14개)·나(16개)·다(3개) 등 3등급으로 나눠 관리해왔다. 경찰청 관계자는 “서울청이 ‘다’ 등급을 받은 경찰서 간부들을 상대로 지속적인 감찰조사를 벌이는 등 정도가 좀 지나쳤던 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실적주의에 대해서는 내부에서 꾸준한 비판이 이어져왔다. 서울 한 지구대의 경위급 간부는 “과도한 실적주의는 우리가 지켜야 할 국민을 실적의 ‘대상’으로 보게 하는 문제를 낳는다”며 “사소한 잘못을 한 국민은 훈방조처할 수 있는데도 실적을 올려야 하다 보니 국민을 순식간에 ‘거리의 횡포꾼’으로 만드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범죄별로 점수를 정해놓다 보니,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 등 배점이 상대적으로 낮은 범죄에 대해서는 수사 의지가 약해지는 문제도 나타난다. 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조현오 서울청장이 부산청장에서 경기청장으로 옮긴 뒤 한달 만에 터진 ‘김길태 사건’의 경우에도 성범죄에 대한 평가 점수가 낮아 경찰이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반성이 (내부에서) 나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 서울청의 실적경쟁은 어떤 모습이었나?
이날 채 서장의 기자회견이 끝난 뒤 강희락 경찰청장과 각 지방경찰청장 등은 오후 5시 긴급 화상회의를 열고 대책 마련에 분주했다. 이날 회의에서 경찰 수뇌부는 채 서장을 기강문란으로 직위해제하고, 실적평가의 부작용과 운영상 문제점을 개선해 나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온 국민이 경악하고 있는 양천서 사건 등이 일어났는데도, 정작 경찰 지휘부는 일선 경찰에게 책임을 미루는 등 안일하게 대응하고 있다”며 “양천서 사건의 배경에는 경찰 수뇌부의 인권 경시 풍조가 한몫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채 서장도 “지방청에 가니까 30여명에게 표창을 주는데 거의 다 검거 실적 표창이고, 누구 하나 인권 보호에 앞장섰다거나 국민에게 친절했다고 포상을 받는 것은 보지 못했다”며 “경찰 문화가 이렇게 곪을 대로 곪았다가 결국 양천서 사건이 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길윤형 송채경화 기자 charisma@hani.co.kr


기사등록 : 2010-06-28 오후 07:56:02 기사수정 : 2010-06-28 오후 10: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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