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진술서, 이런 것까지…"
공공기관, 타인정보 요구… 인권침해 요소 커
사기업도 근거없이 집평수·삼촌직업 등 요구

이태무기자 abcdefg@hk.co.kr
올해 초 4개월간 중앙부처에서 행정인턴을 한 이모(27)씨는 당시 업무배치에 앞서 열린 오리엔테이션 과정에서 개인정보 유출 위험을 이유로 신원진술서 작성을 거부했다.

그러나 부서배치 첫 날 직원에게 따로 불려가 '행정인턴을 하려면 무조건 신원진술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결국 신원진술서를 작성했다. 그는 "기재사항에는 친구 3명의 직업과 주민등록번호, 거주지까지 포함돼 있었다"며 "'정규직도 아닌 기간제 인턴에게 이럴 필요까지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공무원 임용예정자나 공기업 및 대기업 신입직원 등에게 요구되고 있는 '신원진술서'가 개인정보 유출 등 인권 침해 요소가 많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신원진술서에 불필요한 개인정보는 물론, 직무와 전혀 관련 없는 타인의 정보까지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법적으로 신원진술서 제출을 요구할 근거가 없는 일반기업들마저 신입직원들에게 신원진술서를 강요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신원진술서는 국가정보원법(제3조)과 보안업무규정(대통령 훈령) 등에 따라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와 그 산하기관 임용예정자 등이 작성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실제 상당수 공공기관은 관행적으로 지원단계에서부터 신원진술서 제출을 강요하거나 기재사항 이외의 개인정보까지 요구하고 있다. 대기업과 금융기관 등 사기업들도 신원진술서를 요구하거나 변칙적으로 입사지원서에 필요 이상의 개인정보를 적도록 하고 있다.

최근 한 은행에 입사한 전모(27)씨는 "신원진술서에 가족재산은 물론이고 집 평수까지 묻는 사항이 있었다"며 "부모 재산에 따라 평가 받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 말했다. 모 증권사에 입사한 최모(28)씨도 "대놓고 '돈 많은 지인이 있냐'는 질문을 들었다"며 "사회가 원래 이런 건가 하는 생각에 기분마저 울적해졌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금융권 관계자는 "돈을 만지는 업종 특성상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본인과 주변 사람들 경제상황에 대한 질문이 포함돼 있는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송상교 사무차장은 "개인의 사생활 보호권리에 대한 침해인 것은 물론, 자신들의 조직원마저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행위"라며 "더 큰 문제는 이런 정보들이 학맥과 인맥 등 이른바 '연줄'을 데이터베이스화하는데 쓰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공기관의 신원진술서도 기재내용과 제출절차 등에서 논란을 빚고 있다. 2008년 2월 호주제 폐지와 인권보장 등을 고려해 신원진술서 서식이 일부 변경되면서 호주, 친권자 재산 등의 내용은 삭제됐으나, 배우자 부모를 비롯해 북한 및 해외거주 가족(3촌 이내), 친교인물(교우)의 주민등록번호와 직업, 최종학력, 거주지 등은 여전히 기재해야 한다.

일부에서는 신원진술서 기재내용 이외에 '은밀한' 정보를 요구하기도 한다. 최근 임용된 수도권지역 모 판사의 경우 사법연수원 시절 '개인적으로 아는 법조인과 유명인을 모두 적어내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육군과 해군도 학사장교 모집 때 모든 응시자에게 신원진술서를 받아오다 인권침해 소지가 인정돼 장교 임용예정자에게만 진술서를 받을 것을 17일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권고 받기도 했다. 인권위에는 신원진술서의 사생활 침해와 관련한 진정이 2006년 1건, 2007년 2건, 2008년 3건 등 해마다 꾸준히 접수되고 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인권위 진정건수가 수치상으로 적은 것은 이 문제가 취업과정에서 발생하는 특성상 약자인 개인이 무조건 참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며 "모든 국민의 사생활 비밀과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17조)과의 상충논란도 있는 만큼 이제 공론화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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