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시민권의 개념사

홍성수/ 숙명여대 법과대학 교수

 더 이상 ‘인권’은 진보의 전유물이 아니다. 국내외 보수진영에서도 북한‘인권’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 강대국이 분쟁지역에 개입할 때 명분으로 내세우는 것은 해당지역 주민의 ‘인권’이다. 이제 인권이라는 말 자체가 진보나 보수를 표상하기 어려운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인권을 옹호하는 주장이 인권에 의해 논박되는 경우도 있다. 형사피의자의 인권이라는 고전적인 주제는 피해자의 인권도 중요하다는 반론에 부딪히곤 하고, CCTV 설치로 인한 인권침해는 ‘범죄로부터의 자유로울 권리’와 대립한다. 최근에는 전교조 교사들의 개인정보보호권이 학부모들의 ‘알 권리’와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인권의 개념 자체가 혼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바로 이 인권개념의 역사를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는 ‘인권’(최현 저, 책세상, 2008)을 펼쳐 보는 것은 아주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인권에 관한 굵직굵직한 단행본들이 여러 권 출간되어 있지만, 이 책은 그 중에서도 가장 짧으면서 가장 평이하게 쓰여진 훌륭한 인권 대중서라고 할 수 있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100쪽 남짓의 이 깜찍한 책에 인권개념의 역사가 알차게 정리되어 있다. ‘안티고네’에서 보여지는 인권개념의 원형에서 출발해서, 근대와 현대의 인권개념을 시대 순으로 경쾌하게 스케치하고 나더니,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 독자들을 위해 책 말미에서는 지구화시대의 인권에 대한 전망까지 맛볼 수 있게 해준다. 인권사에 대한 훌륭한 저술인 ‘인권의 역사’(스기하라, 한울, 1995)와 비교해 보면, 난이도는 더 평이하고, 현대적 쟁점까지 포괄되어 있는데다가, 그림까지 곁들여져 있는 편집은 더욱 훌륭하다. 누군가 인권입문서를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이제 주저 없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또한 그동안 인권논의에서 잘 다뤄지고 있지 않던 ‘다문화사회에서의 인권문제’에 대해 비교적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소개하고 있는데, 이미 다문화사회로 진입한 우리 현실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고대 인권 사상에서 출발해서, 자유권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인권사상을 소개한 뒤, 이것이 20세기 이후의 사회권으로 발전해 나가는 점을 차례로 서술하고 있는 것은 여느 인권사 책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인권개념사를 ‘시민권’과 연관시키는 서술은 이 책만의 특징이다. 책의 서두에서 인권을 ‘도덕적·당위적·추상적 차원에서 논의된 인간의 권리’로, 시민권을 ‘제도적·법적·현실적으로 보장된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인권의 ‘이념’이 시민권의 ‘제도’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면서 발전해 왔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인권과 시민권의 동학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면서, ‘기본권’이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기왕에 ‘개념’에 천착하기로 했다면, 인권, 시민권, 기본권 등 우리 사회에서 사용되고 있는 인권 관련 개념을 모두 다루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듯이 인권이념의 추상성은 제도화된 시민권을 통해 극복되고, 시민권의 한계가 인권논의의 개방성에 의해 보완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통찰이다. 하지만, 이 인권과 시민권의 상호작용에, 우리 헌정질서가 기초하고 있는 ‘기본권’에 대한 논의가 생략된다는 것은 어색한 일이다. 우리의 헌정질서가 ‘기본권’을 보장하고 있고, 국민들은 기본권을 근거로 하여 권리를 보장받고 구제를 받는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인권과 시민권의 개념사를 다루면서 기본권을 빠뜨린다는 것은 이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된다.

 이 문제를 좀 더 넓게 보면 우리 인권 논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기본권을 연구하는 (헌)법학자들은 초실정적인 인권이념의 풍부한 논점들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고, 반면 인권이나 시민권을 연구하는 인문사회학자들은 기본권이 우리 헌정질서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규범’이라는 사실에 눈감곤 한다. 인권논의들의 상당수가 이미 우리 헌법재판소의 판례와 헌법이론을 통해 이미 규범화된 것이 많고, 기본권은 이미 헌법재판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규범을 도외시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또한 철학적인 인권이념이나 사회학적인 시민권이론이 독자적인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은, 헌법상 기본권이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권이 미처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헌법학의 기본권이론으로 해명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질 때, 헌법재판소의 기본권 판례들이 담아내지 못하는 인권보호의 사각지대가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할 때, 인권/시민권 논의의 독자적 가치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권을 말하고, 연구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헌법의 기본권이론과 헌법재판소 판례‘도’ 뒤적거려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