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란 임신부 유산… 인권위 권고마저 거부

국가인권위와 경찰이 23일 과잉 수사 여부를 놓고 정면으로 부딪쳤다. 사전통보 없는 새벽 압수수색으로 임신부가 유산에까지 이른 사건에 대해 인권위가 요구한 ‘경찰관 주의’ 조치를 경찰이 거부한 게 이유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경찰이 인권위 권고를 무시하는 사례가 급증하면서 충돌이 잦아지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날 임신부 홀로 있는 집을 심야 압수수색해 신체의 자유를 침해한 경찰관에게 주의조치를 내리도록 경기경찰청에 권고했으나 거부됐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지난해 7월 “경찰관들이 살인 사건과 관련, 한모씨(40)의 임신 중인 부인이 홀로 있는 집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신체의 안전과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했다”며 해당 경찰관에게 주의조치를 취할 것을 경기경찰청에 권고했다.

한씨는 지난해 7월 인권위에 낸 진정서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집으로 도망 온 사촌동생을 설득해 자수키로 하고 함께 경찰서에 간 사이 경찰관들이 증거물을 제출받는다며 임신한 처가 혼자 있는 집에 갑작스레 방문했다”고 밝혔다.

한씨는 당시 참고인 진술을 위해 경찰서에서 밤을 지샜다. 경찰이 한씨 아내 혼자 있던 집에 온 시간은 새벽 3시30분쯤이었다. 경찰관 7~8명이 한꺼번에 찾아와 아무런 설명 없이 한씨 사촌동생이 입었던 피묻은 반바지를 달라고 요구했다는 게 한씨의 주장이다. 사전에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고 한다.

놀란 한씨 아내는 경찰관들이 돌아간 뒤 하혈을 하다 이튿날 오후 병원에서 유산 통보를 받았다. 

인권위는 “심야시간 경찰관 여러 명이 동원된 위압적인 상황이었다”며 “주거의 평온을 보장하기 위한 업무상의 주의 의무와 국민의 기본권 보호라는 헌법적 책무를 위반한 것으로 봐 주의조치를 권고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경기경찰청은 인권위에 “살인사건 피의자의 증거확보를 위한 긴급성이 요구되고, 형사소송법상의 적법 절차를 준수해 정당하게 직무를 집행한 것으로 귀책사유가 없다”며 권고 불수용 의사를 통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인권위의 권고 사항에 대한 경찰의 미처리율도 현 정부 들어 점점 늘고 있다. 민주당 김희철 의원이 경찰청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경찰의 인권위 권고사항 미처리율은 2006년 2%, 2007년 1.8%에서 2008년 8.1%로 늘고 올해 8월까지는 20%로 급증했다. 

경찰 인권위원을 지낸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국가인권위의 권고 결정은 수용 가능한 것만 권고한다는 원칙이 있다”며 “현 정부의 ‘인권 푸대접’ 기조를 눈치보며 따라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용균·이로사기자 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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