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노무현 두 명의 전직대통령이 재임했던 지난 10년을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라는 차원에서 평가해 주실 것입니다. 한나라당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하는 그 기간에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성찰할 것은 무엇이고, 또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꼼꼼하게 짚어주실 것입니다. 민주파 집권 10년의 교훈은 무엇인지,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엇인지에 대해 차분히 짚어주십니다.

※ 강사 소개 – 이대근
이대근 정치 · 국제 에디터는 명쾌하면서도 색깔 있는 칼럼으로 경향신문의 진보성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왜 그토록 언론장악에 골몰하는지,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생각대로 언론지형이 개편되면, 국민 입장에서의 득과 실은 무엇인지에 대해 차분히 짚어주십니다.

※ 강사 소개 – 최문순
MBC 기자 출신으로 언론노조 위원장, MBC 사장 등을 역임한 최문순 의원은 시민과 함께하는 의정활동, 언론의 자유를 위해서는 힘겨운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 의정활동으로 초선의원임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정치인으로 조명을 받고 있는 분입니다.

 인권연대가 회원과 관심 있는 시민들을 위해 매월 한차례씩 여는 <수요대화모임>의 72번째 초대 손님은 경향신문의 이대근 정치 · 국제 에디터입니다. 명쾌하면서도 색깔 있는 칼럼으로 경향신문의 진보성을 대표하는 이대근 에디터는 김대중, 노무현 두 명의 전직대통령이 재임했던 지난 10년을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라는 차원에서 평가해 주실 것입니다. 한나라당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하는 그 기간에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성찰할 것은 무엇이고, 또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꼼꼼하게 짚어주실 것입니다.

지난 10년은 김대중, 노무현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의 서거를 통해 이미 역사가 되었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생각해봐야 할 많은 것을 남긴 시기이기도 합니다. 한국 정치에 대한 가장 진지하고도 탁월한 관찰자인 이대근 에디터와 함께 민주파 집권 10년의 교훈은 무엇인지,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는 좋은 시간이 될 것입니다.

 함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참가비는 없습니다.

공·안·본·능... 모든 걸 다 들여다보겠다?

국정원-기무사-경찰, 저마다 감시체제 크게 강화... "민주주의 후퇴" 지적
09.09.04 09:06 ㅣ최종 업데이트 09.09.06 12:51 구영식 (ysku)

김경한 법무부장관과 천성관 전 검찰총장 후보자, 노환균 서울중앙지검장의 공통점은? 답은 이들이 모두 '공안통 검사'라는 점이다. 이명박 정부의 특징 중 하나가 이러한 공안파의 약진이다. 
 

'국가통제 강화'의 첨병인 공안파는 군부권위주의 정권 시절 득세했다가 민주파 정부의 등장으로 점차 쇠퇴했다. 민주파 정부의 첫 집권기인 김대중 정부와 국가권력의 권위주의를 해체하려고 시도했던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검찰과 경찰, 국정원 등 권력기관에서는 전통적인 공안파의 힘이 약화되어 왔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 '인터넷 사찰'을 중심으로 하는 '공안본능'이 되살아나고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시민사회나 학계에서 '유사파시즘', '파시즘엑스(X)', '신자유주의 공안국가' 등 다소 과도해 보이는 개념 규정이 등장한 것도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검찰은 7년치 이메일 뒤지고, 기무사는 민간인 사찰하고
 

 
이정희 민노당 의원이 1일 오전 여의도 국회 민주당 대표실에서 열린 '기무사 민간인사찰 관련 민주당, 민주노동당 공동기자회견'에서 기무사가 사찰한 수첩 내용을 제시하며 발언하고 있다.
ⓒ 유성호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검찰에서 공안파가 득세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검찰은 지난해 주경복 전 서울시교육감 후보의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을 수사하면서 최장 7년치 전자우편을 '싹쓸이'해 열람했다. 
 

검찰은 지난해 10월부터 12월까지 수사대상자 100여 명의 전자우편 내용을 조사했다. 주경복 전 후보와 김민석 전교조 서울지부 사무처장의 경우 압수된 전자우편이 2001년 10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무려 7년치를 넘었다. 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다.
 

이런 싹쓸이 전자우편 수사는 "중대한 사생활 침해"라는 지적을 받았다. 또 이는 '통신의 자유'를 규정한 헌법 18조를 위배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검찰은 "법원의 허가를 받은 합법적 활동"이라고 반박했다.  
 

이와 함께 기무사가 군과 전혀 무관한 민간인들을 불법 사찰하고, 국정원이 인터넷 회선을 통째로 감청('패킷 감청')한 사실이 최근 확인되면서 '신공안체제의 도래'라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민주주의 후퇴'의 강력한 징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기무사의 전신인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이 드러난 것은 노태우정권 시절인 1990년 10월이다. 윤석양 이병이 민간인 1300여 명이 포함된 사찰기록을 폭로한 것이다. 이후 시민사회와 야당의 저항이 거세지자 노태우 정권은 "민간인 사찰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보안사도 기무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하지만 19년이 흐른 지난 8월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이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에 의해 폭로됐다. 이 의원이 입수한 기무사 요원 신아무개 대위의 사찰 기록 수첩에 의하면, 기무사는 지난 1월부터 7월까지 민주노동당 당직자와 당원, 약사, 노조 간부, 재일민족학교 책보내기 운동 인터넷 카페('뜨겁습니다') 회원, 한국어린이도서관협회 관계자, 그림책 작가 등을 24시간 사찰했다.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은 '장기적'이고 '조직적'이었다. 수첩상에 드러난 사찰시점인 1월보다 빠른 작년부터 '공안사건'을 만들기 위한 사찰이 진행됐다는 것이 이정희 의원의 주장이다. 또 신 대위의 사찰수첩에 ▲소형차 교체 ▲필요장비 탑재된 승합차 도입 ▲거점 확보 ▲활동매뉴얼 작성 ▲협조자 구축 ▲경찰과의 협력 ▲CCTV 설치 등이 메모된 점은 민간인 사찰이 매우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왔음을 보여준다.
 

이정희 의원은 "군 정보기관까지 동원해 국민을 감시하고 사찰해야만 정권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명박 정부는 정권을 쥐고 있을 자격을 이미 상실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국정원은 패킷감청 하고, 경찰은 댓글 감시체제 도입하고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영등포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열린 '인터넷회선 감청 등 국정원 감청 실태에 대한 긴급 기자회견'에서 곽동기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정책위원이 피해사례 발표를 하고 있다.
ⓒ 유성호
 

국정원도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활동범위를 점차 넓히고 있다. 한나라당은 국정원법을 개정해 국정원의 직무범위를 대폭 확대하려고 시도하고 있고, 원세훈 국정원장도 "정치정보 수집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국정원이 그동안 금지되어 왔던 국내정치정보까지 수집하겠다는 것이다. '정치사찰'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런 국정원이 지난해 6월부터 두 달 동안 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자와 그 가족의 인터넷 사용내용까지 감시한 정황이 드러났다.
 

곽동기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정책위원은 지난달 31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지난해 9월 국보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국정원이 지난해 6월 12일부터 두 달 동안 집과 사무실의 인터넷 회선을 통째로 '패킷 감청'해온 사실을 알게 됐다"고 폭로했다.
 

'패킷 감청'이란 인터넷회선을 통째로 감청하는 방식을 한다. 패킷 감청을 하면 감청대상자의 컴퓨터와 똑같은 화면을 실시간으로 엿볼 수 있다. 즉 감청대상자가 인터넷에서 어떤 검색을 하고 있는지, 메신저로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어떤 파일을 내려받고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다는 것. 단순히 전자우편을 열어보는 기존의 인터넷 감청과는 차원이 다른 최신 감시기법인 셈이다. 
 

특히 곽 위원은 국정원이 자신의 가족 명의로 된 인터넷회선까지 패킷감청을 했다고 주장해 큰 파문이 일었다. 그는 "국정원은 우리 가족들이 인터넷으로 뭘 하는지 모두 엿보고 있었다"며 "국정원이 우리 집 안방에 들어와 앉아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과 국정원의 패킷 감청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국정원장과 기무사령관의 대통령 독대(보고)가 부활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5공 시절의 경찰, 기무사, 국정원으로 돌아가고 있다"(원혜영 의원)는 지적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그런 가운데 경찰도 인터넷 댓글 등을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시스템을 도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2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경찰청 보안과는 지난 7월 '보안사이버 검색·수집 시스템' 강화 사업을 발주했다. 이를 통해 경찰은 특정 인터넷사이트의 게시물과 댓글, 아래한글·엑셀 등으로 제작된 첨부파일을 실시간으로 검색·수집해 이를 데이터 베이스(DB)화할 수 있도록 했다.
 

<경향신문>은 "예컨대 '촛불' '2MB' 등의 단어를 키워드로 설정해놓으면 이 단어가 들어간 모든 글이 자동 수집된다"며 "(특히) 새 시스템은 검색과 수집이 은밀하게 이루어지도록 해 비밀사찰 의혹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촛불 트라우마'로 인터넷사찰 등이 강화되고 있어"
 

오창익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은 이러한 감시·통제의 강화 현상을 '촛불 트라우마'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오 국장은 "국민의 저항이 두려우니까 정부의 의견에 반하거나 정부에 불리한 사람은 무리해서라도 감시해서 사전에 대응하겠다는 욕구가 강하다"며 "이는 촛불 트라우마에 대처하는 이명박 정권 차원의 방어이자 공격"이라고 분석했다.
 

오 국장은 "과거 군사독재정권과 달리 법원이 미네르바사건이나 정연주 사건 등 일부 사건에 전향적인 결정을 내리고 있는 점은 긍정적"이라며 "법원이 이렇게 엄격한 증거들을 요구하기 때문에 수사기관이 더 많은 증거를 확보하려는 과정에서 무리수를 두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오 국장은 "이명박 정부가 공안파트를 강화시킨 결과가 지금 터져 나오고 있다"며 "한나라당이 야당 시절 주장한 것처럼 안보태세 확립  차원이 아니라 애꿎은 시민단체나 일반시민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잘못됐다"고 말했다. "(감시·통제체제가) '반국가'가 아니라 '반정부'를 겨낭하고 있다"는 것.
 

오 국장은 "경찰이나 국정원의 속성상 정권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으면 이들의 준동은 상상할 수 없다"며 "하지만 과거 정권의 사례에서 보듯 이러한 행태는 정권에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라고 강조했다.
 

장여경 진보네트워크 활동가는 지난해 촛불시위가 벌어진 직후부터 인터넷 여론 통제를 목표로 하는 '인터넷사찰'이 강화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장여경 활동가는 "검찰 등이 광범위한 저인망수사를 통해 통신비밀보호권을 침해하는 것이 이명박 정부에서 두드러졌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다만 인터넷 여론 동향을 파악하는 등 인터넷 사찰이 이명박 정부에서 강화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장 활동가는 촛불시위 직후 생겨난 경찰의 인터넷여론대책반, 문화체육관광부의 인터넷모니터링반 등을 언급한 뒤, "인터넷모니터링반은 다음 아고라의 여론을 파악·정리해서 40여개 사정기관과 공유했다고 한다"며 "이렇게 인터넷 여론을 통제하기 위해 사정당국과 수사기관이 인터넷 여론을 적극 모니터링하는 경향이 이명박 정부에서 강화됐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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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은 민주주의 기초에 반하는 행동” [2009.08.27. 제775호]
이순혁
[1972~1984 죽음 앞에 서다]
확고한 인권 신념 지켜온 사형수 출신 대통령…
국가인권위 발족과 실질적 사형제 폐지 길 닦는 업적 남겨

1972~1984 죽음 앞에 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적으로, 의문의 교통사고와 납치·살해 위기를 겪었다. 가택연금과 투옥을 반복하며 반독재 투쟁을 벌이다 1980년 9월17일 신군부의 군사재판에서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기에 이르렀다. 고난 속에서 인권 철학이 뿌리내렸다.

» “사형은 민주주의 기초에 반하는 행동”

지난 2005년 2월2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울 신촌 연세대 교정을 찾았다. 연세대 리더십센터의 초청으로 한·미·중·일 네 나라 대학생을 상대로 특별강연을 하게 된 것이다. 1천여 명의 학생이 ‘동아시아와 젊은 리더십’이란 주제의 강연을 경청했다.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 김 전 대통령은 사형을 선고받던 때를 회상했다.

 

재판장 입 나오면 살고 찢어지면 죽는다?
 

» 군사정권의 모진 박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인권과 민주주의 투사’로 만들었다. 1973년 일본 도쿄에서 납치됐다가 풀려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 사진 한겨레 자료
“큰소리는 쳤지만, 살고 싶어서 재판장에서 재판관 입을 뚫어지게 쳐다봤어요. 무기징역만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무기만 받으면 언젠가는 나올 테니까. 왜 재판관 입을 쳐다봤냐 하면, ‘무’ 하면 (재판관) 입이 (앞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사형의 ‘사’ 하면 (재판관) 입이 (옆으로) 찢어집니다. 입이 ‘나오면’ 살고 ‘찢어지면’ 죽는다, 이것이었죠.”

좌중에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한없이 절박했을 생사 갈림길에서의 고뇌는 ‘입이 튀어나오면 살고 찢어지면 죽는다’라는 말과 웃음으로 그렇게 넘어갔다.

하지만 그의 실제 인생에는 그런 유머로 넘기기에는 너무 엄혹하고 절박한 순간들이 많았다. 앞서 김 전 대통령이 언급한 1980년 신군부 군사재판에서의 내란음모 혐의 사형선고를 비롯해, 1971년 목포에서의 교통사고를 가장한 살해 시도, 1973년 일본에서의 납치·수장 위기까지….

하지만 볕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은 법. 군사정권의 도 넘은 탄압은 자연스레 그를 인권 수호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인권 탄압 피해의 상징과 인권 수호의 상징은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김 전 대통령은 인권의 중요성과 인권 향상의 절박한 필요성을 온몸으로 체득하며 인권에 대한 불굴의 신념을 만들어갔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돼 인권과 관련해 남긴 가장 큰 업적으로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설립과 사형제 폐지 노력을 들 수 있다.

우선 국가인권위원회 설치는 김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으로, 자신의 임기 중인 2001년에 출범시켰다. 출범 준비 단계에서 국가인권위의 위상을 어떻게 할지를 놓고 시민사회단체 쪽과 갈등을 겪긴 했지만,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자체는 우리 사회 인권 향상의 큰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런 국가인권위는 지난 8월18일 김 전 대통령 서거 2시간여 만에 “김 전 대통령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분이셨습니다. 고인이 목숨을 바치며 추구했던 인권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의지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되는 데 큰 밑거름이 됐습니다”라는 추도문을 냈다.

김 전 대통령과 인권을 잇는 또 다른 축인 사형제와 관련해서는 좀더 많은 이야깃거리들이 있다. 우선 본인 스스로가 1980년 9월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 출신이다. 김형태 변호사(천주교인권위원회 이사장)는 “1992년 대선 당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대선 주자들을 불러 여러 현안에 대한 의견을 물었는데, 당시 김대중 후보가 확고하게 사형제는 폐지해야 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며 “김 전 대통령 스스로가 사형수였을 뿐 아니라 바다에 빠져죽을 뻔하기도 해서 그런지, 권력이 사람 목숨을 뺏는 것에 극도의 거부감을 가진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김 전 대통령은 사형제도가 정치적 보복에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을 사형제 반대의 주요한 근거로 들었다. 그는 2006년 국제앰네스티에 보낸 기고문에서 “보다 우려되는 것은 독재자들이 민주주의 주창자들과 정치적 반대자들을 탄압하고 몰아내는 수단으로 사형제를 잘못 사용한 수많은 사례들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인혁당의 가담자들이 잘못 기소된 뒤 사형됐고 나조차도 사형 언도를 받고 거의 사형에 처할 뻔했다”고 밝혔다.

 

1970년대부터 사형제 폐지 활동 나서
 

»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 사진 한겨레 자료

하지만 사형제와 관련한 그의 신념은 개인의 경험 이상의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감사원장을 지낸 한승헌 변호사는 “그분 자신이 해방 뒤부터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기에 형벌로서의 사형에 매우 부정적이었다”며 “1973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사형폐지·고문철폐 운동을 시작했는데 이때에도 (김 전 대통령이) 열심히 참여했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앞서 언급한 기고문 서두에서 “사형은 민주주의 기초에 반하는 행동”이라고 규정한 뒤 “민주주의는 사람의 생명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존중하는 것이며, 생명을 끊는 것은 법의 이름으로 이뤄진다고 해도 인권의 기본적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 글에서 △사형과 범죄 감소율은 무관한 점 △당사자로 하여금 범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날 기회를 줄 수 없는 점 등도 반대 이유로 지적했다. 사형제의 여러 문제점에 대한 종합적 인식을 가졌던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의 이런 신념은 그가 대통령으로 있던 기간 단 한 번도 사형 집행을 하지 않는 것으로 표출됐다. 또 이런 정책 기조는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이어져 우리나라가 10년 동안 사형 집행을 하지 않은 ‘실질적 사형폐지국’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민주주의운동 동지이자 경쟁자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임기 말에 23명의 사형을 한꺼번에 집행했던 점을 감안하면, 김 전 대통령의 이같은 업적은 더욱 도드라진다.

물론 사형제 자체가 폐지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는 김 전 대통령의 신념 때문이 아니라, 의석수 또는 ‘국민 감정’이라는 현실의 벽 때문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한 뒤 대통령직인수위 시절 두 차례 정도 뵐 기회가 있었는데 ‘사형수·양심수와 관련해서만은 실망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했다. 진정성이 있었다”고 말했다. 고은태 국제앰네스티 국제집행위원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형제 폐지 소신만큼은 확고했다. 본인은 사형제를 폐지하고 싶었지만 거기까지 (힘이) 미치지는 못해 실질적 폐지라는 첫 단추를 끼운 것”이라고 말했다. 사형제 폐지 법안은 15대 국회 이후 매번 제출됐지만 통과되지 못하고 자동 폐기됐으며, 17대 국회에서도 절반이 넘는 175명의 국회의원이 사형제 폐지 법안을 발의했지만 국민적 여론 등을 이유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누명 썼던 외국인 사형수 본국 돌려보내

인권운동가들은 살인 누명을 쓴 외국인 사형수 2명을 모국으로 돌려보낸 것도 사형제와 관련한 김 전 대통령의 업적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파키스탄인 모하메드 아지즈와 아미르 사밀은 동료 파키스탄인을 살해한 혐의로 1993년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는데, 이들은 끊임없이 무죄를 주장했다. 이들의 편지를 받은 김수환 추기경의 지시로 천주교인권위원회가 조사에 나섰고, 두 사람을 범인으로 몰도록 진술을 사주한 또 다른 파키스탄인이 누구인지 밝혀졌다. 하지만 당국은 “이미 끝난 사안”이라는 답변만을 내놓고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1998년 광복절 특사 때 이들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형집행 정지로 석방하면서 국외 추방 형식으로 고국에 돌려보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났을 뿐 한국인이 개입된 사건이 아닌 만큼 감형 뒤 본국으로 추방해 파키스탄에서 재판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합리적인 주장은 김 전 대통령이 취임한 뒤에야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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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슬퍼할 힘밖에 없다 [2009.08.25. 제775호]
임지선
[2009, 8, 23, 영면하다]
5월 반쪽이 무너진 뒤, 8월 다시 무너진 반쪽…분향소엔 저항의 분노보다 애도의 정념이…
2009, 8, 23, 영면하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마당에서 엄수된 영결식에서 생정에 그사 존경하고 사랑하던 국민들의 오열 속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영원으로 향했다.

»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마당에서 엄수된 영결식에서 생정에 그사 존경하고 사랑하던 국민들의 오열 속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영원으로 향했다.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고작 87일이 지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내고 석 달도 안 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은 또다시 눈물로 젖었다. 시민들은 ‘데자뷔’를 느끼며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치러냈다. 그때와 닮았지만 어딘가 다른 눈물을 흘리며 그를 보냈다.

김 전 대통령도 눈물을 흘렸었다. 지난 5월29일, 노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김 전 대통령은 권양숙씨의 손을 잡고 통곡했다.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은 심정”이라고 김 전 대통령은 말했다. 지난 7월13일 그가 폐렴 증상으로 입원했을 때, 사람들은 나머지 반이 무너질까 염려했다.

» “편히 가십시오.” 서울시청 앞 시민 분향소.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예우의 차이, 규모의 차이

한 달간 뉴스는 ‘위독’과 ‘안정’ 사이를 오갔으나, 8월18일 오후 1시43분 끝내 모두 무너져내렸다. 서울광장 분향소로 모여든 조문객들은 “이제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전 국민이 고아가 된 것과 마찬가지”라며 김연선(42)씨는 분향소 앞에서 흐느꼈다.

초등학교 4학년, 3학년인 두 아들은 엄마가 울자 눈을 끔벅였다. 아이들은 아직 엄마의 눈물을 이해할 수 없다. 김씨는 아이들을 보며 더 서럽게 울었다. “김대중·노무현 두 지도자를 잃고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답답해 잠도 안 온다”는 김씨에게 두 사람의 상실은 ‘미래의 상실’이다.

그러나 5월의 상실과 8월의 상실은 다르다. 5월, 노 전 대통령 분향소 앞에는 항상 촛불이 있었다. 분향을 마친 이들은 경찰을 굳이 밀쳐내고 거리와 광장에 나서려 안간힘을 썼다. 8월, 김 전 대통령 분향소에 그런 안간힘은 없다.

서거 다음날인 8월19일, 정부는 서울광장에 공식 분향소를 열었다. 첫날에만 시민 1만여 명이 조문했다. 시민들은 대부분 분향을 마친 뒤 방명록에 이름을 남기고 광장을 떠났다. 촛불을 들지도 구호를 외치지도 않았다. 다만 영정 사진을 보며 조용히 눈시울만 붉혔다.

5월의 열정과 8월의 차분함 사이에는 ‘예우’의 차이가 있다. 대학생 김민석(25)씨는 지난 5월, 분향을 마치고 거리에서 촛불을 들었다. 국장으로 예우해주지 않는 정부가 미웠다. 이번엔 다르다. 정부는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르겠다고 8월19일 발표했다. “민주화의 상징인 큰 분이 돌아가셨으니 국장으로 잘 모셨으면 한다.” 김씨는 담담하게 분향소를 떠났다.

정부의 예우는 ‘규모’에서도 차이가 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정부는 서울역에 공식 분향소를 마련했다. 이번 서울광장에 마련된 분향소는 그때보다 3배 이상 넓다. 넓어진 공식 분향소는 ‘시민 분향소’가 들어설 여지를 밀어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알려진 직후 인터넷 포털 사이트 토론 게시판에 “시청 앞으로 모이자”는 누리꾼들의 글이 올라왔다. 8월18일부터 이틀간 시청 앞 광장 한쪽에 시민분향소가 차려졌다. 그러나 주목받지 못했다. 시민들은 시민 분향소 옆의 공식 분향소로 발길을 돌렸다.

» 광주 옛 전남도청 분향소 게시판. 사진 <한겨레> 김태형 기자

5월엔 분노, 8월엔 기억

‘김대중 팬클럽’ 회장이라고 밝힌 한 노인이 8월19일 오후에 찾아왔다. “한 곳에 두 개의 분향소가 있으니 좋지 않아 보인다. 옆으로 옮기는 게 낫겠다”고 말했다. 시민 분향소는 두세 차례에 걸쳐 구석으로 밀려났다. 시민 분향소를 지키던 10여 명의 시민은 이날 저녁 자진 철수를 결정했다. “어르신 장례를 국상으로 잘 치르는데 괜한 불협화음이 날까봐 치웠다”고 분향소 지킴이 엄아무개(44)씨가 말했다.

‘시민 분향소’의 쇠락은 저항의 정념과 애도의 정념 가운데 뒤엣것에 무게가 실렸음을 웅변한다. 지난 5월, 덕수궁 대한문 앞에 차려진 시민 분향소에는 일주일간 100만 명 이상의 조문객이 몰렸다. 지척의 거리인 서울역과 역사박물관에 ‘공식 분향소’가 있었지만, 한사코 대한문 앞에서 서너 시간을 줄서 있다 분향했다. 하지 말라는 것을 굳이 하려 드는, 오히려 보란 듯이 해버리는 태도를 저항이라 부른다. 5월, 사람들은 저항하고 있었다. 그럼 이번에는?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노 전 대통령 서거 때는 조문을 통해 현 정부에 저항을 하려는 의지가 강했는데 지금은 그런 국면은 아니다. 나라의 큰 어른인 김 전 대통령이 고령이고 병원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국민이 차분하게 장례를 치르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애도와 저항은 원래 한 몸의 반쪽이다. 세상을 떠난 이를 슬퍼하는 마음은 그를 핍박했던 이에 대한 증오와 통한다. 5월에는 증오했으나 8월에는 그저 슬퍼하기만 한다. 어쩌면 슬퍼할 힘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 “편히 가십시오.” 조문객의 모습.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지난 5월, 사람들은 목청을 높였다. “MB 아웃(Out)” 구호를 외쳤다. 거리에서 민중가요도 불렀다. 문화제에선 록밴드가 전자음악으로 추모곡을 불렀다. 8월, 사람들은 목소리를 낮췄다. 노래 부르는 이, 구호 외치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런 자리를 기대하고 나오는 이도 드물다. 대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5월에 꺼내든 것이 분노였다면, 8월에는 기억을 꺼내들었다.

전남대를 졸업한 현인(51)씨는 대학 2학년 때 5·18 민주화 항쟁을 겪었다. “우리나라와 민족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던 김대중 선생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젊은 시절, 공장 해고자 남편을 따라 복직 투쟁에 참여했던 오미령(54)씨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기억한다. “김 전 대통령이 당시 노동자들에게 큰 힘이 됐다”고 회고한다.

기억은 역사가 되어 다음 세대로 전해진다. 직장 동료들과 함께 조문을 온 이수길(35)씨는 “어릴 때 아버지께서 5·18 민주화 항쟁과 관련한 비디오를 보여주시며 김대중 선생님 얘기를 하곤 했다”고 말했다. 대학생 이재용(24)씨는 “어릴 때부터 민주화를 위해 애쓰시는 분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중학교 1학년인 김민희양도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노벨평화상을 받은 대통령이라는 것을 듣고서 조문을 왔다”고 또박또박 말했다.

아마도 그것이 저항보다는 애도, 분노 대신 기억을 이야기하는 이유일 것이다. 5월의 분향소를 찾았던 20~30대에게 노 전 대통령은 ‘현실 정치인’이었다. 8월의 20~30대에게 김 전 대통령은 ‘전설’이다. 서울광장 분향소에는 그를 추억하는 40~50대가 많다.

신광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아무래도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 1세대이다 보니 젊은이들 입장에선 노 전 대통령보다 조금 낯설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종산(48)씨는 “노 전 대통령은 우리를 위해 일하는 ‘일꾼’ 같은 존재였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선생’과도 같았다”며 “노 전 대통령을 잃은 당시는 ‘동지’를 잃은 허탈함이었고, 지금은 ‘선생’이 사라진 슬픔”이라고 표현했다.

동지를 잃으면 복수한다. 어른이 돌아가시면 애도한다. 이 땅에 수천 년간 내려온 추모의 법도다. 2009년, 한국인들은 같은 추모의 정념, 조금 다른 법도를 따라 두 대통령을 차례로 보냈다.

“용기와 희망을 저희에게 알려주세요”

» “편히 가십시오.” 조문객들의 모습.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시민 분향소도 없고 촛불도 없고 100만 인파도 없으니, 서울시청 앞 경찰들은 한결 여유로운 표정이다. 그러나 데모가 없다고 분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선생을 애도하는 슬픔은 더 깊은 곳으로 침잠한다. 이명박 시절은 여기에 이르러 거대한 지표석 두 개를 갖게 됐다. 역사는 이 시기를 돌아보며 세 명의 대통령을 기록할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 재임 기간에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고. 그 지표석은 거대한 트라우마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에 꽂혔다.

서울광장 분향소 한쪽에 어느 소녀가 붙였음직한 노란 쪽지가 있다. “용기와 희망을 저희에게 알려주세요.” 그 옆에서 펼침막이 펄럭인다. 김 전 대통령이 남긴 말이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 그것은 강력한 촉구가 되어 차분한 조문객들의 뇌리에 남는다. 신광영 교수는 “추모 분위기는 침착하지만, 민주화 1세대 지도자의 죽음이 사회 전체에 주는 울림은 (노 전 대통령 서거 때보다) 더욱 클 것”이라고 말했다.

신 교수는 특히 “이제부터 새 시대에 맞는 새 인물에 대한 담론이 촉발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 국민이 고아가 됐다”는 추모객의 흐느낌은 그래서 하나의 선언이다. 사람들은 이제 아버지를 찾아나설 것이다. 민주주의를 이끌 새 지도자를 머릿속에 자꾸만 그려볼 것이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김하늬 인턴기자·이영은 인턴기자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셨다. 일요일(23일)인 오늘 국회에서 국장(國葬)이 치러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신지 불과 3개월도 지나지 않아 또 한 분의 전직 대통령이 세상을 달리 하셨다.  

 태어난 곳만 서울이고 어렸을 때부터 대학시절을 대부분 호남지역에서 보낸 나는 호남지역에서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애정이 특별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오죽하면 호남에서의 ‘김대중 정서’가 타 지역의 ‘반 김대중 정서’를 불러 일으켜 대선 낙방의 주요한 이유가 되었을까. 어쨌든 나 역시 그에 대한 정서에서 자유롭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대학원 때문에 서울로 올라왔고, 운동을 지속하고 있던 나는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집권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현안 이슈들로 인하여 당시 정권과 각을 세우며 심심찮게 “김대중 정권 퇴진하라” 라는 구호를 외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는 다른 정책들보다도 이라크 한국군 파병으로 인하여 당시 이라크에 있었던 나로서는 개인적으로 최고의 칼날을 세우며 노무현 정부를 비난했었다.

 
봉하마을 정토원에 안치된 고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영정사진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렇게 운명을 달리 하신 직후,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었고 그 슬픔에 적지 않은 당황까지 하였다. 아마도 당시 흘렸던 눈물은 정치를 지나치게 부정적이고 구조적으로만 본 점과, 내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흑백논리로만 사로잡혀 있었던 자신에 대한 원망과 반성 그리고 감성의 것인 듯싶다. 그러나 솔직히 감성 그 이상을 넘어선 내 스스로 완벽히 인정할 수 없는 그 어떤 종합적인 지점에서의 반성은 아니었다. 그리고 3달이 채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신 김대중 대통령의 죽음을 맞이하며 당혹감과 아쉬움과 슬픔이 또 한 번 가슴속을 지배하고 있다. 이 두 전직 대통령 시절에도 운동을 하며 집권자들에게 비판과 비난의 목소릴 냈으며, 지금도 운동이라는 것을 하면서 현재의 대통령에게도 내용과 정도만 다를 뿐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이 가슴속의 감정에 대해 솔직히 당혹스럽다. 정말 시간이 조금 더 흐른 이후에야 스스로에게 명확한 설명이 되겠지만 지금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고 있는 단어가 있는데 이것은 ‘민주주의’이다. 아마도 이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지금 최소한 나에게 두 분의 전직 대통령과 현재의 대통령이 같은 반열에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고 항변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스스로 원치는 않지만 요 며칠 방송과 신문에서는 드라마틱했던 두 전직 대통령의 개인사를 내비치면서 계속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강조하고 있다. 

‘민주주의’ 

 초등학교 저학년 교과서에서도 볼 수 있는 ‘민주주의’는 현재 2009년을 지나면서 극적으로 그 의미와 정의가 재조명되고 있는 듯하다. 사전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뜻을 누가 모르겠냐 싶지만 이토록 익숙했던 단어가 요즘처럼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평소에는 몰랐다가 희박해지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되는, 상투적인 문장으로 정리되는 그러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10년간 운동이라는 것을 하면서 전혀 느끼지 못해서 원래 있는 것이라 생각했던 그것이 지금에 와서야 이것마저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것만이라도 없는 이 사회가 얼마나 억울한지 느끼고 있다. 이 설명하기 힘들지만 분명히 존재하며 느낄 수 있는 이것은 완벽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전진되었던 민주주의였다. 집회를 하고 시위를 하며 자신의 의견을 표현 할 수 있었고,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처럼 없어서 쩔쩔매지 않았던 그것은 불완전한 민주주의였다. 동의하지 않고 문제가 많다고 믿었던 그 정부정책들도 어느 정도 민의(民意)를 두려워했고 여론을 참고했던 이유는 그동안 존재감이 없었던 민주주의였다.

 아마도 백가지 이상이나 있을법한 대통령에 대한 평가기준들 중 현재 내가 두 분의 전직대통령이 사망한 사실이 슬프고 안타까운 이유는 이 ‘민주주의’가 뒤로 돌아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 때문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 ‘민주주의’를 다시 얻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뜩이나 먹고 살기도 힘든 이 험난한 시기에. 

 이 글을 빌어 고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며 부디 편안한 곳에서 영면하시길 기원합니다.



책소개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미국 연방대법원의 주요 판결 20개 사례를 통해 미국 사회에 법치주의가 뿌리내려지는 역사적 과정을 조명한다. 더불어 하나의 연방대법원 판결이 나오기까지 미국 사회가 겪은 모순과 갈등의 드라마틱한 과정도 다루고 있다.

저자가 이를 통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 미국을 있게 한 저력으로서의 '법치주의'이다. 다양한 민족·인종·언어로 이루어진 이민국가, 그래서 갈등과 분열의 잠재성이 특히나 높을 수밖에 없는 미국이 강고한 사회통합을 이뤄내어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틀이 바로 거기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까닭이다













저자소개
장호순 - 순천향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이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University of North Carolina)에서 언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97년부터 지금까지 순천향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2004년과 2005년에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언론의 자유와 신문기업 규제”, “언론출판의 자유와 사생활 침해”, “방송광고 심의규정의 위헌성에 관한 연구” 등이 있고, 저서로는 <미국 헌법과 인권의 역사>, <언론의 자유와 책임>, <작은 언론이 희망이다> 등이 있다.



목차
개정판 서문

머리말

미국 헌법의 발자취

제1장 사법부와 대통령
  • 대통령의 특권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보다 앞서는가
  • 대통령 비상조치권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 최저임금법은 노사간의 계약의 자유를 침해하는가
제2장 사상과 이념의 자유
  • 공산주의자도 사상과 이념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
  • 폭력행위 선동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제3장 표현의 자유
  • 항의의 표시로 국기를 태울 수 있는가
  • 음란물의 기준은 무엇인가
  • 컴퓨터통신에서 음란성 표현을 제한할 수 있는가
제4장 언론의 자유
  • 공익을 위해 신문 발행을 사전에 중지시킬 수 있는가
  • 공직자를 비판하는 언론보도가 명예훼손에 해당되는가
  • 국가 안보가 우선인가, 국민의 알 권리가 우선인가
  • 신문기업이 누릴 수 있는 언론자유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제5장 공정한 사법제도
  •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는 어디까지 보장되나
  • 강요된 자백을 유죄의 증거로 삼을 수 있는가
  • 불법적으로 입수한 증거를 재판에서 사용할 수 있는가
  • 시민의 기본권은 전쟁중에도 보장될 수 있는가
제6장 평등권 보장
  • 흑인은 백인학교에 입학할 수 없는가
  • 여성노동자에 대한 특별대우가 평등권 위반인가
  • 무엇이 직장내 성희롱인가
  • 주립 군사학교에 여성이 입학할 수 있는가


서평
인권의 나라 미국?

미국의 인권과 연방대법원

미국이 세계 인권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미국 독립선언서는 - 프랑스 인권선언과 더불어 - 인권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 중 하나이며, 이제는 상식이 되어버린 ‘미란다원칙’이나 ‘증거배제법칙’, 그리고 ‘명백-현존 위험의 법칙’의 미국에서 발전한 중요한 인권 법칙들이다. 그 외에도 미국은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인종차별, 성차별 등의 인권문제에 대해 세계적인 기준을 제시해 왔다. 흥미로운 것은 미국의 이러한 인권 발전의 배후에는 ‘연방대법원’이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인권발전을 주도한 것은 위대한 정치지도자도 아니고, 민중들의 거대한 투쟁도 아닌 9인의 대법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인권사를 공부할 때 가장 주의 깊게 살펴할 문서들은 인권이론서, 선언문, 행정부 문서가 아니라 연방대법원 판결문들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 연방대법원의 명판결문과 인권의 역사를 연결시킨 <미국헌법과 인권의 역사>의 기획은 미국의 인권발전을 조망하기에 아주 적절한 것이었다.


이 서평은 홍성수 교수가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 기고한 것으로, 홍성수 교수는 런던정경대학(LSE) 박사과정에서 인권법과 법사회학을 공부하고 현재는 숙명여대 법대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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