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행정이 아니라 실질적인 안전 대책이 절실하다 (김영미 위원)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질병이 세계를 뒤흔드는 엄청난 재앙이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중세 유럽. 피부가 흑색이나 자색으로 변해 결국은 죽게 된다는 흑사병(페스트)은 14세기 유럽 대륙을 덮쳤다. 전체 인구의 1/3 이상이 몰살되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선주민의 무려 90%가 몰살되었다. 학살도 있었지만, 스페인에서 유입된 천연두 등의 질병에 대한 면역이 없어서 벌어진 참극이었다. 지난 세기에도 스페인 독감이 맹위를 떨쳤다. 1918년 처음 발생해 스페인에서만 한 달 동안 800만 명의 사망자를 냈고, 2년 동안 전 세계에서 4천만 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끊이지 않던 중세 유럽, 스페인 등 제국주의의 학살이 멈추지 않았던 ‘신대륙’ 아메리카, 1차 세계대전의 참화가 대륙 전체를 휩쓴 20세기 초의 유럽 대륙. 하지만 전쟁이나 학살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죽어갔다. 

 해서 질병의 공포는 끊이지 않는다. 아시아 독감, 홍콩 독감, 소련 독감, 급성호흡기 증후군인 SARS, 조류독감을 거쳐 이번엔 신종 인플루엔자가 나타났다. 

 올 4월 멕시코에서 처음 시작된 신종 플루는 이전 시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발달된 교통의 영향으로 급속도로 전 세계로 확산되어 8월 23일 현재 세계보건기구(WHO)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감염자 수는 20만 9천여 명, 사망자 수는 최소한 2천백85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감염자 수도 4천3백 명을 넘어섰다. 감염자 수 증가 속도가 좀 주춤하고 있지만, 가을, 겨울에는 어떤 상황을 맞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다. 개학이 되어 학생들의 집단감염이 크게 늘어날 거란 우려도 있다.


사진출처 - 한겨레

 개학 후 보건실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평소에 무뚝뚝하고 건강한 근정이(중1)를 만났다. “선생님 체온 좀 재주세요, 어제 축구를 하다 다리가 삐었어요. 밤에 다리가 아프면서 열이 났어요. 근데 뉴스에서 열이 나면 신종인플루엔자에 걸렸다고 하는데...  아이들이 빨리 보건실로 가서 체온 측정하래요, 너무 무서워요” 체온계로 측정하니 36.8도였고, 자기의 체온을 확인한 근정이는 아주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하고는 교실로 들어갔다.

 그 전날 오후 뉴스에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아침에 신용산초등학교를 방문한 모습과 이 학교의 모든 등교생을 대상으로 교문 앞에서 발열 검사를 실시하는 모습이 나왔고, 아이들은 자기도 혹시 신종인플루엔자에 걸리지 않았는가 걱정하여 양호실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 교육부는 초중고 모든 학교에 손소독제를 비치하고 체온계를 구입하여 교문 앞에서 일일체온측정을 실시하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하지만 교과부의 이런 무신경한 전시행정으로 인해 학교는 더욱 혼란에 빠지고 있다. 

 “신종 플루 얘기가 나온 지 꽤 되었지만 우리 학교에서는 아직도 발열검사를 못하고 있어요. 비용 문제도 그렇고, 체온계 구하기조차 쉽지 않거든요.”
 
인천 ㄴ초등학교의 한 교사는 일선 학교의 빠듯한 예산으로는 위생물품을 마련하기도 어렵고, 모든 학교들이 약국이나 의료기 상에서 손소독제와 체온계를 단시간에 구입하다 보니 동이 나서 구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김동석 한국교총 대변인은 “학교 현장은 수많은 학생들이 장시간 밀집해 있는 만큼 신종 플루 감염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도 지원이 제대로 되지 않아 학부모들이 자비로 위생물품을 사서 학교에 비치하는 등 전반적인 준비가 대단히 부족한 상황”이라며 “더욱 체계적이고 세밀한 대책을 마련하는 동시에, 학생 전체에 대한 예방백신 접종을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했다.(2009.9.2 한겨레신문 중)

 개학을 맞아 신종 플루의 집단발병이 우려되는 것에 비해 학생들에 대한 예방 대책은 어이가 없을 정도다. 정부가 발표한 대책은 교문 앞에서의 발열검사가 고작이다. 그리고 신종 플루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학원 감염에 대한 예방대책은 전무한 형편이다.

 6월말부터 신종 플루에 대한 예방교육과 일일보고가 실시되었는데, 교과부는 개학후의 상황에 대비해 현장 교사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체계적이고 세밀한 대책을 세워야 했다. 미리 앞날을 대비하여 신종 플루의 치료 예방을 위한 백신개발과 충분한 검사 장비를 확보하고 학원 감염에 대한 대책들을 준비했어야 했다.

 학교가 학생들의 안전을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의 교육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진정 학생들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보다 강도 높은 보건교육과 학생들이 건강한 생활을 하며 안전하게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노력이 시급하다.

김영미 위원은 현재 불광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 교육조직국장

 글을 쓴다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 부담이 되어버렸다. 결혼 전까지 내 일기장이 열 몇 권이었다면 누가 믿을까? 초등학교에서 글을 배우고 쓸 수 있게 되면서, 방학일기를 몰아 쓰면서 언제부턴가 일기를 쓰는 버릇이 생겼다. 그것은 아마도 책 읽은 후의 감상문을 써오라던 숙제도 한몫했지 싶다. 게다가 매월 언니가 사다준 ‘계림문고’의 소년소녀 명작동화 시리즈도 단단히 한몫 했을 터이다. 책을 읽으면서 책이 가져다 준 감동과 상상력을 드러내어 남기고 싶었고, 그리고 산과 들을 뛰어다니다 저녁 어스름이 지면 이집 저집 불러대던 아이들의 이름들...그 이름을 메아리로 남기고 뿔뿔이 흩어지는 동무들을 보면서 느꼈던 그 야릇한 아쉬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물론 나도 어김없이 엄마의 부르심에 집으로 끌려가듯 들어가야 했지만...

산이 주던 감동, 들판의 향기, 코스모스의 하늘거림과 그 냄새, 저녁 답의 애잔한 노을, 해거름의 알 듯 모를 듯 했던 쓸쓸함... 하루 동안 접했던 그 모든 감동과 느낌과 활동들을 내 언어가 닿는 한 가능한 표현해내고 싶었다. 왜 그랬을까? 그 글을 통해 누구와 무엇과 소통하고 싶었을까? 여튼 그렇게 열심히 썼던 일기장이 두툼한 노트로 열 몇 권이 되었다. 그러나 소위 ‘생활전선’에 뛰어들면서 글은 점점 더 멀어지고, 쓸 수 있는 글이라는 것이 성명서나 기자회견문 종류로 한정되어 버리고, 사고마저도 그 틀에 갇혀 버리면서, 자연과 동무/사람이 주는 감동을 예전처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반편이, 불안과 강박증을 가진 감동 불감 증세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사물을 흘러보아 넘기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일상의 감각이 무디어질 때, 일상은 매너리즘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일상이 새로운 것이 될 때는 내용이 달라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도 중요하다. 같은 일상이라도 다르게 볼 수 있을 때 일상은 항상 변화무쌍함으로 다가올 수 있다.

 일상을 색다르게 볼 수 있도록 하게 하는 힘을 글을 씀으로써 회복할 수 있는 듯하다.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버스와 전철과 마을버스를 교대로 타야 하는 나지만, 버스 운전기사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보호박스 같은 곳에 갇혀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월요일이었다. 아마도 여기 이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곰곰이 일상을 두리번거렸었나 보다. 버스기사에 대한 폭행이 많았다는 뉴스를 언젠가 본 것은 같아 곧바로 추리를 해본다. 아마도 버스승객들의 폭행에 대비하기 위한 것인가 보다. 그럼에도 왠지 안쓰러웠다. 물론 운전 내내 좌석을 떠나기는 힘들지만, 보호대라는 경계로 승객들과 단절된 기사는 편안함과 안전함을 느낄까?, 한 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의 안전은 안전인가? 속박인가? 뭐 이런...

 그러다가 얼마 전 대법원의 판결이 연이어 떠올랐다. 다세대 주택의 복도나 계단도 주민들의 허가 없이 들어오면 불법침입이 된다는... 물론 단서는 안전과 범죄 예방의 효과라는 것. 이제는 지인의 집이 다세대 주택이면, 지인이 집에 있음을 확인하고 가거나, 주민들의 사전 동의를 얻어 공동복도나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 뉴스를 보면서 순간 ‘뭐 이런 0같은..?’ 이라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떠올라야 했다.

 그런저런 경계에 대해 생각을 하다 보니 그 날 아침에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가 떠오른다. 사랑이 결혼을 하면 전쟁이 되는 레퍼토리... 아이가 생기면 더 강해지는 전쟁, 그 안에는 여전히 여자와 남자는 다르고, 아이는 여자의 몫이고, 돈 적게 버는 일/여성운동은 소일거리 이거나 취미이거나 이기적인 활동이라는 사고의 경계가 도사리고 있다. 그 경계로 인해 소통의 단절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경계선은 쉽게 허물어지지 않고 따라서 단절은 지속된다는 결혼한 여성 활동가라면 한번은 경험했을 법한 그 뻔한 레퍼토리가 오늘 아침, 십 수 년 전의 내 경험과 꼭 같은 것에, 그 반복에 진저리치게 만들었었다. 내 딸은 달라질까? 라는 의구심과 함께...

 며칠 전 여성단체들이 모여 정책토론회를 개최했다. 광안리를 지척에 두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모두 한마디씩 했다. ‘토론은 무슨 토론?’, '이런 장소에서 정책을 논의하라는 것은 폭력이다‘, 등등... 들썩이는 엉덩이와 궁시렁대는 입들... 그러나 막상 토론이 진행되자 모두 진지하게 집중하는 모습이라니.

 뭐 모든 시민사회운동영역에서 '이대로는 안 된다‘는 긴장감과 위기감이 일고 있고 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절치부심하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여성운동영역도 마찬가지이고 그 대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소위 대중, 여성들과의 소통의 방향과 방법, 정치권력에 접근하는 자세와 방법, 정권으로부터의 위기 대처방법, 그리고 여성운동들/단체들 및 제 시민사회운동들과의 연대.

 여성운동 안에서의 경계와 단절을 허물고 새로운 연대를 통해 힘을 집결해보자는 것이다. 여성운동은 1990년대를 거치면서, 다름이라는 새로운 화두에 접하고 다름을 이해하는 방식 또한 다르게 접근하면서 그 안에서의 경계들이 만들어져 왔었다. 그리고 그 경계는 허물지 못할 공고한 벽으로 굳어 단절을 유래하기도 했다. 소통의 거부와 소통할 방식을 찾지 못하는 사이에 굳어진 벽들이었다. 이제 그 벽을 새로이 허물자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허물 것인가? 그리고 누가 그 벽을 허물기를 원하는가? 왜 허물려고 하고 허물어야 하는가? 가 먼저 질문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단일한 대오를 만들고 대중들이 수용할 적절한 이슈를 선택하면 그것이 곧 연대가 되고, 광풍이 되어 이 위기를 해소할 수 있을 것인가?


운동의 연대는 운동하는 세력들 내부의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 속의 같음을 발견할 때 가능하다.
사진출처 - 한겨레

 갑자기 일터를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했던 동료이자 친구와의 갈등이 기억난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 이 정도는 니가 날 이해할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생각하고 내가 기억하는 너랑 다를까? 배신감 드네..’ 이런 것들이 밑바탕에 깔려 있음에서 출발했음이 보인다. ‘적어도 친구라면..’ 혹은 ‘여성운동 한다면..’ 이런 자기기대에 기반한 전제들이 실망과 갈등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나만이 옳다는 닫힌 사고에서 출발한다. 지금은 좋아는 하지만 다름을 안다. 그리고 가끔 그 다름이 불편하기는 하여도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 뭐 너니까!’, ‘흠, 나는 아닌데... 너는 그럴 수도 있겠지..’ 혹은 반면교사가 되기도 한다. 그 과정이 나도 그도 쉽게 된 것은 아니라 본다. 그리고 앞으로 또 다른 만남이 오면 그렇지 않으리란 보장도 못한다. 그러나 한계 속에서나마 갈등을 그나마 극복하게 한 것은 갈등을 숨기지 않는 것, 그러기 위한 수많은 부딪힘, 자기성찰 이런 것들이 동반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버스기사의 보호부스, 공용주택 복도와 계단의 외부인 차단, 남편과 아내의 소통의 벽, 그리고 여성운동들 안의 차이, 그로인한 경계들... 둘러보면 우린 너무 외롭다. 경계(boundary)는 곧 그 경계만큼 행동하게 하며 그 경계를 중심으로 각각의 단절이 발생하게 된다. 차이로서 경계는 필요하며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경계는 차이를 발견하고 그 차이를 인정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서만 유용하다. 경계가 벽이 될 때 차이는 곧 단절이 된다. 사람간의 단절은 사람을 더 이상 사람으로 보게 하지 못한다. 사물이나 객관화 시킨 대상이 된다. 기사와 승객의 단절은 그 사이에 기사와 승객의 책임과 권한의 다툼만이 존재한다. 오늘아침 기사의 기분이 어땠는지? 승객은 어땠는지? 같은 맥락은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도 각각의 역할과 의무와 권리만이 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더 외롭고 외톨이이고 항상 경계하는 존재로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경계를 허물지 않되 단절되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경계를 넘나들며 소통하고 연대하고 또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경계를 인정하는 것, 경계를 넘되 내 것으로 남의 것을 채우려 하지 말 것, 혹은 그 반대. 경계란 언제나 변할 수 있다고 보는 것. 등이 아닐까. 연대는 그래서 경계를 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경계를 보고 인정한다는 것은 단일한 관점을 갖기를 바라는 것을 포기할 때, 역지사지를 끊임없이 반복할 수 있을 때, 나나 너나 스스로 말하게 될 수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운동의 연대는 운동하는 세력들 내부의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 속의 같음을 발견할 때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왜, 어떻게 다른지를 먼저 논의해야 한다. 그 속에서 같음이 발견될 것임으로.

 경계심을 유발하는 사회에서 경계를 인정한다는 것은 위험사회를 인정하는 꼴이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절을 위한 경계가 아니라 소통을 위한 경계로 바라볼 수 있을 때, 그 경계는 이미 그 안에 소통과 교류와 성숙을 포함하고 있다. 경계가 성숙이 되기 위해서는 부단한 개인적 조직적 성찰과 논의/소통이 또 필요하다. 때문에 그것은 삶이자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하고 될 수밖에 없다. 지속적으로 경계를 성찰하는 삶은 나와 타인의 삶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주의란 그래서 하나의 언어로 정의되는 단일한 사상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태도와 자세, 방식 등 과정에 관한 것이다. 여성주의는 단지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행복하게 살고 싶은 건 다 똑같으니 제발 남도 좀 생각하며 살자구요. 그 사람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자구요. 그리고 집단으로서 가장 큰 덩어리인 성별경계에서 볼 때, 남성여러분 제발 여성들의 경험과 입장을 생각해 보시라구요. 그리고 다 같이 행복한 게 뭔지 같이 고민해 보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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