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서 여성의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 '여성의 시각'으로 사회를 논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군 위안부 문제, 스와핑, 성매매 여성들의 시위, 위안부 누드 사건에서 박근혜 패러디까지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된 여러 이슈와 사건들을 재해석하며, 페미니즘에 대해 많은 이들이 갖고 있는 선입견을 상쇄시킨다.
여성주의는 우리를 고민하게 한다. 남성 중심적 언어는 갈들 없이 수용되지만, 여성주의는 기존의 나와 충돌하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주의는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남성에게, 공동체에, 전 인류에게 새로운 상상력과 창조적 지성을 제공한다. 남성이 자기를 알려면 '여성 문제를 알아야 한다. 여성 문제는 곧 남성 문제다. 여성이라는 타자의 범주가 존재해야 남성 주체도 성립하기 때문이다.
저자소개
정희진 - 1967년 서울 출생. 서강대 종교학과와 이화여대 여성학과에서 공부했다. 현재 국가 안보와 젠더를 주제로 여성학 박사논문을 쓰고 있다. 대학을 6년 만에 겨우 졸업한 후 여성운동단체인 ‘여성의전화’에서 5년간 상근자로 일했다. 대학과 시민단체, 노동조합 등에서 여성학을 강의하며, 다양한 여성조직에서 자문위원,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쓴 책에《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 가정폭력과 여성인권》, 편저자로 일한《한국여성인권운동사》와《성폭력을 다시 쓴다 ― 객관성, 여성운동, 인권》이 있다. 이외 다수의 공동 저서가 있다. 사회운동, 평화, 인권, 탈식민주의, ‘아시아’, 인간 관계의 심리학과 정치학에 관심이 많다. 삶에서 권력, 언어, 외로움, 열정이 선사하는 고통을 상대화하는 길은,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목차
|머리말 | 소통, 경합, 횡단의 정치, 페미니즘
1부
“태초에 목소리가 있었다”
위험한 여성들 / ‘대중적인’ 여성운동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 협상과 공존의 사유, 페미니즘
공략하지 말고 낙후시켜라
어머니는 말할 수 있을까?
어머니가 없는 사람들 / 움직일 수 없는, 변할 수 없는 여성
“성(姓)을 갈다”, 어머니의 섹슈얼리티 / ‘더러운’ 노동, 불가능한 임무
혐오스런 아줌마, 신성한 어머니
여성주의, ‘가장 현실적인’ 세계관
1. 여성주의가 필요한 이유 / 2. 말과 성차별
3. 여성주의 언어란 무엇인가 / 4. ‘위안부 누드’의 지배 에로티시즘 정치학
사랑과 섹스
1. 남자는 외롭다? 여자는 더 외롭다! / 2. 여성의 섹스, 남성의 섹스
3. 다이어트와 섹스 / 4. 스와핑에 대하여
5. 여관의 정치경제학 / 6. 늑대와 여우의 사랑?
2부
가정폭력의 정치학
진보와 보수는 누구의 전선인가 / 진보의 개념을 넓히다?
인류 공통의 역사, 가정폭력 / 가정은 사회가 아닌가
무엇이 정치적인 문제이고, 그것은 누가 정하는가
진보 없는 한국의 ‘진보’
아버지를 닮은 아들들의 폭력 / 과거사 청산 담론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
‘순결한’ 피해 여성과 ‘타락한’ 매춘 여성?
‘피해자다움’이라는 성역할
피해의식은 남성의 전유물 / 남성 언어로 말하기의 고통
피해자 중심주의와 여성 범주의 딜레마
여성의 눈으로 다시 보는 인권
누가 인간인가? 그것은 누가 정하는가? / 성폭력 가해자의 인권?
개인적인 것은 왜 정치적인 것인가? / 여성 인권 문제와 탈식민주의
인권의 시각에서 다시 묻는 여성 차별과 폭력 / 무엇이 인간의 권리인가?
3부
나이 듦, 늙음 그리고 성별 183
‘육체 분석학’으로 세상을 볼 때 / 한국 사회의 연령주의 정치학
여성의 늙음과 남성의 나이 듦 / 여성의 순환에 의존하는 남성 질서
영화 <집으로>와 <죽어도 좋아>의 여성 노인 / 몸에 새겨진 계엄령
‘성판매 여성’의 인권 201
성매매, 근절과 허용의 크레바스로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문제라고 보는가’
‘성판매 여성’이라는 범주 / ‘강제’와 ‘동의’의 구분은 ‘중요하다’
권력은 듣는 자에게 있다 / 성과 사랑은 노동이어야 한다
성매매를 둘러싼 ‘차이’의 정치학 221
국가, ‘포주’에서 ‘보호자’로 / ‘성판매 여성’과‘페미니스트’
왜 구매자인 남성의 이름은 없는가 / 성폭력, 인신매매로서 성매매
성 노동자로서 성판매 여성 / ‘제국’적 상황, 성폭력과 ‘성 노동’을 넘어서
여성 억압을 누가 말할 것인가?
군사주의와 남성성 241
<알 포인트>의 근대성과 남성성 비판 / 군사주의와 성별화된 시민권
한국 ‘평화운동’의 군사주의와 남성성 / 남성 섹슈얼리티와 군사주의
남성 연대 대신 타자와의 연대를
|후기 | 변태하기 위하여
서평
페미니즘으로 본 소수자 인권
<페미니즘의 도전>은 제목 그대로 페미니즘에 관한 책이다. 특히 이 책은 페미니즘을 성찰적이고, 유연하고, 대화적인 공존의 정치학으로 재구성함으로써, 페미니즘에 대한 기존의 오해와 편견을 불식시킨다. 그래서 페미니즘에 대해 막연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 페미니즘 하면 대립, 반목, 독선, 편협, 투쟁 등의 키워드를 떠올리던 사람들이라면, 꼭 한번 읽어야 할 책이다. 또한 소위 ‘진보운동’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에도 마찬가지다. 이 책을 읽고 내심 뜨끔해 할 대목이 많을 것이다.
이 책에서 드러난 저자의 시각을 굳이 분류하자면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포스트모더니즘 저작들이 흔히 보이는 현학성이나 비실천성과는 거리가 멀다. 쉽지 않은 이론들을 기저에 깔고 있으면서도, 사랑,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 군사주의 등 현실적인 문제들이 알기 쉽게 다뤄지고 있기 때문에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도 읽는데 부담이 없다.
그런데 이 책에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이 책이 소수자 인권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인권은 곧 소수자의 인권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이는 다수자에게는 인권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옹호해야 할 인권은 다수자의 인권이 아니라, 침해받기 쉬운 소수자의 인권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특정 소수자의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한 주장이나 운동은 자칫 편협하거나 일면적일 수 있다. 실제로 어떤 소수자의 가치와 입장이 배타적으로 관철된다면, 그것은 다른 가치와 충돌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그것은 ‘보편적 가치’를 얻을 수 없게 된다. 예컨대, 자원이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장애인을 위한 엘리베이터 시설과 무주택자를 위한 신규주택 건설의 이해관계는 서로 충돌할 수 있으며, 소수인종을 배려하기 위한 조치가 다수인종의 빈민층을 소외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는 여성문제에서 더욱 빈번하게 드러난다. 이성애 여성을 기반으로 한 여러 정책들은 이주 남성을 소외시키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고, 성폭력을 문제제기 하기 위해 남-녀간의 대립과 여성범주의 단일성을 강조하는 것은, 남성에 대한 성폭력이나 같은 성 간의 성폭력 문제를 주변화시킬 수 있으며, 가정폭력 피해자의 입장을 법정에서 관철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피고인의 공정한 재판받을 권리와 충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여성차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여러 조치들은 다른 차별의 기제, 즉 빈곤, 장애, 인종, 출신지역으로 인한 사회적 차별을 간과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특히 여성주의에 반감을 가진 이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확대·재생산되면서 여성주의의 주장을 반박하는 주된 논거로 작동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운동이나 소수자 인권운동은 결코 ‘보편적’일 수 없다는 것인가?
저자가 이러한 문제를 ‘횡단의 정치’를 통해 다뤄나간다. 저자는 페미니즘이 여러 의미체계 중 ‘하나’임을 전제하면서, 페미니즘 진영 내부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여성 범주의 단일성을 부정한다. 횡단의 정치는 자신이 기반을 둔 정체성과 멤버십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본질화하지 않으며, 타자를 자신에게 편입시켜서 동질화시키는 대신, 상대방의 상황으로 자유롭게 이동한다. 이렇게 페미니즘과 여성의 범주를 상대화시킴으로써, 페미니즘은 비로소 보편적인 가치로 승화될 가능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분명, 여성주의는 사회의 어느 한 단면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보편성을 지향한다. 저자에 따르면, 여성주의는 기존의 남성의 객관성이 전적으로 틀렸고, 여성의 객관성이 전적으로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성주의는 정치적 올바름, 통일성이나 단일성의 가치보다는 대화의 가치를 강조한다. 여성주의는 남성적 객관성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것을 부분화시키고 맥락화시키며, 차이를 보편으로 환원하기 보다는 차이로부터 기존의 보편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그런 점에서 여성주의는 차별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여성주의는 ‘서로 다른 각자의 처지(차이)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연대’이자 ‘협상, 생존, 공존을 위한 운동’으로 재구성된다. 또한 이렇게 될 때 여성주의는 다른 사회적 차별이나 다양한 다른 억압적 기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연대하는 보편주의 정치학으로 거듭날 수 있다.
다른 소수자 인권운동도 마찬가지이다. 소수자 인권운동 역시 (저자가 여성주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기존의 보편을 해체하면서, 다른 소수자의 처지와 차이를 이해하고 소통하면서 함께 연대해야 한다. 그럴 때 그것은 어느 한 ‘부분’의 가치를 넘어설 수 있게 된다. 개별적 처지와 이해관계에서 출발한 주장이나 운동이 다른 개별적 처지와 이해관계와 제한없이 연대하고 소통할 때, 그것은 비로소 ‘부분’이 아니라 ‘전체’가 되며, ‘특수’가 아니라 ‘보편’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회적 차별은 언제나 여러 다른 억압적 기제와 얽혀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소수자 인권운동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으며, 상호침투하고 서로 횡단하면서 연대해야 한다. 결국 ‘특정 소수자’의 인권이 ‘보편적’일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연대와 횡단이 중단없이 계속될 때인 것이다. 이렇게, 인권의 불가분성은 자유권과 사회권의 문제에서 뿐만 아니라, 각 소수자의 개별인권 사이에서도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서평은 홍성수 교수가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 기고한 것으로, 홍성수 교수는 런던정경대학(LSE) 박사과정에서 인권법과 법사회학을 공부하고 현재는 숙명여대 법대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한국 사회의 주요 화두 중 하나인 인권을 원론부터 실제 이슈에의 적용에까지 고루 접할 수 있도록 구성한 인권 입문서. 10명의 지식인과 인권 활동가들이 아홉 개 글에서 한국 인권 담론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짚어 나간다.
1부에서는 인권에 대해 알아야 할 기본지식을 담은 글을을 실었다. 한국의 인권 현실을 역사적 맥락에서 총체적으로 짚었고, 인권 발전을 위해 시민사회와 사회복지 정책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살펴보았다.
2부에서는 비교적 새로이 제기된 인권 문제들을 다뤘다. 직장 내에서의 노동자 감시 등 정보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인권 침해 문제를 다뤘고, 한편으론 여성주의와 동아시아 철학의 시각에서 인권의 개념을 정리했다.
3부에서는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인권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룬 글을 실었다. 비정규직 문제 등 노동문제와 동성애자, 장애인 등 소수자 문제에서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현안들을 살폈다.
각종 사례와 조문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인권을 인권 운동가들이나 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닌 일상 생활에서 부딪치는 문제로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각 글마다 생각해 볼 거리를 수록해 교육 현장에서의 활용성을 높였다.
저자소개
김동춘 - 1959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역사비평」과 「경제와 사회」의 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2004년 한겨레신문 선정 '한국의 미래를 열어갈 100인'으로 뽑힌 바 있다. 현재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황해문화」 편집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1960년대의 사회운동>, <한국사회노동자연구>, <한국사회과학의 새로운 모색>, <분단과 한국사회>, <전쟁과 사회> 등이 있다
조효제 - 옥스퍼드대학에서 비교사회정책학 석사, 런던정경대학(LSE)에서 사회정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동아시아조사과 연구위원, LSE 대학원 강사,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준비기획단 위원을 역임했다. 2008년 현재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겸 NGO대학원 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 <인권의 정치학>, <시민사회의 변화와 주권의 급진적 재편>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세계인권사상사>, <전지구적 변환>, <머튼의 평화론> 등이 있다.
한홍구 - 1959년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워싱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걸어 다니는 한국 현대사’라 불리는 저자는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일명 ‘김일성 전문가’이다. 그는 꿈꾸는 권리조차 박탈당했던 한국 현대사의 금기들을 통쾌하게 고발해온 논객으로 유명하다. 한겨레21에 연재된 「한홍구의 역사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감춰진 현대사를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전달해서 지적 만족과 함께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기도 했다. 지은 책으로 『대한민국사』 1~4권, 『한홍구의 현대사 다시읽기』등이 있다.
제2부 인권의 새로운 환경
정보기술사회와 인권 / 허상수
동아시아 인권담론의 의미와 한계, 그리고 재구축을 위하여
- 한국철학계의 인권담론을 중심으로 / 조경란
'여성'과 '인간'을 넘어서
- 인권의 성별 정치학 / 정희진
제3부 인권의 현실
노동하는 인간의 권리 / 신원철
성적 소수자의 삶과 인권의 전망 / 서동진
장애인 인권의 동향과 대안 / 김용득, 이동석
글쓴이 소개
서평
인권을 위한 강의
이제 대학에서 인권관련 강의를 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제도권에서 알음알음 열리던 인권강좌가 이제는 대학 교양 강의의 하나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1990년대 이후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현대사회와 인권”, “세계화시대의 인권”, “평화와 인권”, “소수자와 인권”, “인권법” 등의 강좌를 개설해 놓고 있다. 이런 성과 중 하나로 지난 1998년 출판된 <현대사회와 인권>(나남, 1998)은 실제 강의에서 사용된 강의안과 학생들의 리포트를 모아 놓은 좋은 자료이다.
이번에 새로 출판된 <편견을 넘어 평등으로>은 ‘성공회대 인권평화센터’가 대학 새내기 학생들의 인권 교양강좌를 위해 집필한 것이다. 인권에 관한 의미 있는 성과물을 내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 인권전문연구기관에서 발간한 책이라서 일단 더욱 신뢰가 간다. 대학 강의를 위해 집필되었지만, 인권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읽어볼만한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책의 구성은 여느 교과서처럼 총론과 각론으로 나뉘어져 있다. 총론에서는 한국의 인권상황과 인권과 시민사회, 인권과 사회복지 등의 문제를 다루고, 각론에서는 정보기술사회, 동아시아 인권담론 등의 최신이슈, 그리고 여성, 노동자, 성적 소수자, 장애인 등 소수자의 인권문제를 다룬다. 각 장은 모두 평이하게 서술되어 있으며, 각 장 말미에는 ‘참고문헌’과 ‘생각해볼 문제’까지 정리되어 있는 전형적인 인권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각론에서 선정된 각 인권주제들도 훌륭한 글들이지만, 여기서는 총론의 세 기고 글에 특별히 주목해 보고 싶다. 인권에 대해 문제제기는 으레 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서구의 인권사에서 출발하곤 하지만, 김동춘 교수의 “한국의 인권상황과 인권문제”는 인권을 ‘우리의 맥락에서’ 문제제기하고 있다. 한국현대사의 ‘근대성’과 ‘국가(폭력)’문제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분석이 ‘인권’의 관점에서 새롭게 재현되는 것이 흥미롭다. 조효제 교수의 ‘인권과 시민사회’ 역시 기존의 시민사회론에서 인권이 차지하는 위치를 재조명한 보기 드문 시도이다. 국가와 시민사회 그리고 인권이라는 거대한 주제들이 얽혀있는 맥락들을 알기 쉽게 풀어내면서, 시민사회가 인권의 가치를 추구하고 생성하는 장이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이영환 교수의 “인권과 사회복지”는 한국적 맥락에서 ‘사회권’문제를 접근하고 있다. 사회권은 인권의 중요한 테마이지만, 상대적으로 홀대 받아온 게 사실이다. 이 글은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도입된 이래, 더욱 중요한 테마가 되고 있는 한국의 사회권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자유권에 초점이 맞춰진 앞의 두 글과 자연스럽게 짝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아쉬움도 있다. 이 책이 ‘인권’교과서를 표방한다면, 이 책 한권으로 인권일반을 적절하게 개관할 수 있어야 할 것이고, 그러려면 각 주제들이 적절하게 선별되어 배치되어야 할 것이다. 먼저 이 책에서 선정한 주제들을 다른 인권교과서에 비교해 본다면, 총론에서는 인권의 개념과 원리, 인권사, 인권사상사, 인권운동사, 인권의 국제적·국내적 보호 등이, 각론에서는 수형자, 형사피의자, 아동, 청소년, 이주노동자, 군인 등 소수자의 인권, 그리고 북한인권, 발전권 등의 최신 쟁점 등이 빠져 있다. 물론 세부 주제 몇 가지가 빠지는 것은 불가피하며, 그 자체로는 전혀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한권의 교재로서 완결성을 생각해보면,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일단, 총론에서 인권 개념이 정초되고, 개념적으로 실천적으로 발전해온 역사에 대한 기술이 빠져 있다. 물론 인권에 우리 맥락에서의 접근은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지만, 세계사적으로 인권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가에 대한 이해는 인권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완결성을 갖춘 인권입문서라면 세계사적으로 인권문제가 어떻게 제기되고 해결되어 왔는지에 대한 개관은 간단하게라도 다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각론에서도 최신 인권주제들만 주로 다뤄지고, 고전적인 자유권 문제가 누락된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총론에서 김동춘 교수가 지적한대로, 한국사회는 자유권의 보장이 아직 완벽하지 않은 상황에서 소수자, 정보 등 새로운 인권문제가 떠오르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수형자와 형사피의자의 인권, 사상과 표현의 자유 등의 문제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론에서는 그런 이슈들이 전혀 다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은 문제가 아닌가 한다. 독자들이 이 책을 보고 ‘우리 사회에서 자유권 문제는 이미 낡은 문제가 되어 버렸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는 걱정이 단순한 기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왜 책의 제목을 <편견을 넘어 평등으로>으로 달았는지도 의문이다. 이 책에 기고된 글들은 ‘편견’과 ‘평등’이라는 키워드에 특별히 귀속된다고 할 수 없으며, 현대인권문제의 핵심은 편견을 넘어 평등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도 않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뉘앙스를 가진 “편견을 넘어 평등으로”를 표제로 단 이유가 궁금하다. 차라리 책의 부제인 “인권을 위한 강의”가 좀 심심하고 재미없긴 해도 책이 추구하는 바를 오해 없이 전달하기엔 더욱 적절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지난번 서평에서 소개한 <인권: 이론과 실천>과 함께 읽을 것을 권해보고 싶다. <인권: 이론과 실천>이 ‘서양인’이 쓴 보다 ‘이론적’이고, 보다 ‘보편적’인 인권입문서라면, <편견을 넘어 평등으로>는 ‘한국인’이 쓴 보다 ‘실천적’이고, 보다 ‘한국적’인 인권입문서이다. 이 두 권의 책들이 각각의 부족한 점을 메우면서 생산적인 하모니를 이룰 것임은 자명하다. 이로써 우리도 ‘인권’에 입문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두 권의 훌륭한 저작을 갖게 된 것이다!
이 서평은 홍성수 교수가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 기고한 것으로, 홍성수 교수는 런던정경대학(LSE) 박사과정에서 인권법과 법사회학을 공부하고 현재는 숙명여대 법대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법학이 이끌어오던 인권 담론의 지평을 넓혀 역사, 사회, 정치, 권력의 맥락에서 그 작동 매커니즘을 설명한 인권 교과서이다. 오늘날 실생활에서뿐 아니라 국가정책 집행이나 국가간 관계에서도 인권개념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이 책은 인권 개념의 역사와 의미 그리고 그 개념이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인권침해의 피해자들이 실제겪고 있는 현실이 인권에 대한 법학, 철학, 사회과학의 접근과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인권침해에 대한 저항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복잡하게 얽힌 연관성에 대해 분석해야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인권 영역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몇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소개
마이클 프리먼 - 인권학 분야에서 권위 있는 에섹스 대학 인권연구소 위원으로 재직하며 몸소 인권운동을 실천하고 있는 학자다. 국제앰네스티(AI) 영국지부장, 국제대의원회의 의장대리 등을 역임하였고 현재 에섹스 대학교 정치학 교수이다. 민주주의 이론, 사회과학의 철학, 인권, 집단살해, 다문화주의와 소수민 권리, 종족분쟁 등을 연구하고 있다.
옮긴이
김철효는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에섹스 대학에서 인권학을 공부한 뒤 국제앰네스티와 천주교평신도 국제연대운동단체 ‘팍스 로마나’ 국제사무국에서 인턴 활동을 하는 등 인권 분야에 남다른 관심을 가져왔다. 귀국 뒤엔 앰네스티 한국지부에서 인권 캠페인을 담당했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난민 담당 간사를 맡기도 했다. 현재 국제이주기구(IOM) 서울사무소의 프로젝트 코디네이터이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감사의 말
제1장 | 서론: 인권에 대해 생각해보기
1. 인권의 현실 2. 인권의 개념 3. 사회과학과 인권 4. 인권법 넘어서기 5. 인권에 대한 학제적 접근
제2장 | 기원: 자연권의 흥망
1. 왜 인권의 역사를 말하는가? 2. 권리와 폭군: 고대의 권리개념 3. 정의와 권리: 중세의 권리개념 4. 근대의 자연권 5. 혁며의 시대 6. 자연권의 쇠퇴
제3장 | 1945년 이후: 권리의 새 시대
1. UN과 인권의 부활 2. 세계인권선언 3. 이론에서 실천으로 4. 소결
제6장 | 보편성, 다원성, 차이: 문화와 인권
1. 문화제국주의의 문제 2. 문화상대주의 3. 소수민 권리 4. 선주민 5. 자기결정권 6. 여성의 권리
제7장 | 이상주의, 현실주의 그리고 탄압: 인권의 정치
1. 인권을 둘러싼 현실정치 2. 부메랑 이론 3. 인권을 둘러싼 국내정치 4. 인권의 통계학 5. 세계정치 속의 NGO
제8장 | 발전과 지구화: 경제와 인권
1. 개발 대 인권? 2. 발전권 3. 지구화 4. 국제금융기구 5. 경제적 및 사회적 권리
제9장 | 결론: 21세기의 인권
1. 역사로부터 배우기 2. 인권에 대한 비난 3. 개입의 문제 4. 마치며
부록 | 버지니아권리선언, 미국 독립선언, 인간(남성)과 시민의 권리선언(1789), 세계인권선언
옮긴이 후기
서평
실천을 위한 인권이론
인권 입문서
한국에서는 최근 몇 권의 인권서적들이 연달아 출간되었다. 덕분에 필자는 한국에서 공수해 온 여러 권의 책들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행복한 고민을 해야 했다. 그 중 가장 먼저 집어 든 책은 <인권: 이론과 실천>이다. 사실 필자는 작년부터 이 책을 상당 부분 번역해 왔고, 저자와 저작권 문제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한글번역서가 이미 출간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필자가 이 책을 번역하여 한국에서 소개하고 싶었던 이유는, 그동안 수많은 서구의 인권문헌을 뒤져보았지만, 이 책만큼 포괄적면서도 알기 쉽게 인권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책은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대학의 ‘인권’수업에서 이 책을 교재로 채택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번역서가 이미 출간되었다는 소식에, 그동안의 번역작업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번역자의 훌륭한 번역과 성의 있는 역주까지 첨부되어 있는 책을 읽어보면서 그런 생각은 싹 사라졌다. 우리도 이제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인권 입문서’를 갖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천을 위한 인권이론의 필요성
이 책의 한글판은 <인권: 이론과 실천>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사실 원제는 <인권: 학제적 접근>(Human Rights: An Interdisciplinary Approach)이다. 직역의 어색함을 피하고자 제목을 바꾼 듯하지만, 사실 원제가 이 책의 문제의식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한마디로 ‘인권에 대한 이론적 정당화’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여러 사회과학 분과들이 ‘학제적(학문교류적, interdisciplinary)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권이론의 성과는 많이 부족한 수준이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UN을 위시한 국제기구들, 인권NGO들, 그리고 학계 모두 인권이론을 정초하기 위한 노력은 충분치 않았다. 인권을 최초로 사회적 의제로 제기한 18세기 근대시민혁명의 시기는 물론이고, 1948년 세계인권선언이 선포되었을 때, 그리고 1993년 비엔나선언이 발표될 때에도, 인권에 대한 이론적 정당화는 곁가지에 불과했다. 코소보사태, 이라크전쟁, 북한인권 등 최근의 인권문제에 관련해서도 이론적 논증은 한발 물러서 있는 느낌이다. 특히 UN이 인권의 철학적·이론적 정당성에 소극적이었던 이유를, 저자는 ‘철학적 정당성의 딜레마’라는 말로 요약한다. 인권 개념에 철학적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하면 논란거리가 될 것이고, 그렇다고 철학적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으며 그 도덕적 영향력을 읽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UN은 인권의 철학적 정당성을 슬며시 피해갔다는 것이다. 이 점은 NGO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학계 역시 인권의 이론화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나마 인권이론을 주도한 것은 법학이었다. 그런데 법학은 ‘법률에 명시된 것’을 다루는 학문이다. 하지만 인권은 ‘법률규정에도 불구하고’ 또는 ‘법률규정에 아직 규정되지는 않았음에도’ 존중받아야할 인간의 권리이다. 그래서 법학은 한편으로 법률규정에 규정되지 않은 인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법률실증주의), 다른 한편으로 실정법을 넘어서는 인권의 정당화에 대해서는 추상적인 자연법적 논증으로 도피했다(자연법론). 법률실증주의가 인권을 실정법의 좁은 틀 속에 가두어 버린다면(제1장), 자연법론은 객관적으로 증명가능하지 않은 형이상학으로 인권을 도피시킨다.(제2장)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고문이나 불법구금 같은 노골적 인권침해가 사라진 것은 불과 10여 년 전 일이며, 아직도 기본적인 인권문제들 중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것들이 적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인권을 이론적으로 규명하겠다는 것은 한가롭거나 사치스러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대신 인권은 실천의 현장에서 제기되었고, 지난하고 험난한 투쟁의 과정을 경유하면서 조금씩 그 의미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런 실천적 과정을 겪으면서 비로소 ‘인권’을 조금씩 쟁취해온 사람들에게 ‘인권의 이론화’라는 테제는 여전히 낯선 것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재의 우리가 직면한 인권상황은 이러한 ‘이론의 빈곤’을 방치해도 좋을 만큼 간단하지가 않다. 싱가포르의 태형이나 파키스탄의 명예살인에 대해 우리는 어떤 개입을 해야 하는가? 히잡을 착용하는 교사의 권리와 종교중립적 교육을 받아야 할 학생의 권리의 충돌은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테러방지를 위한 불가피한 인권제한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재화가 한정된 상황에서, 저소득층의 최저생존권과 장애인의 이동권 중 어느 것을 우선해야 할 것인가? (국가가 아니라) 다국적 기업과 국제금융기기의 인권침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세계인권선언), “인간은 단순히 인간이기 때문에 인권을 갖는다”는 식의 선언적 문구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저자는 보다 치밀한 인권이론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문제에 맞서 싸우기 위한 근거를 갖기 위해서는 이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4장) 그런 점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인권이론은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실천을 가능하게 위한 전제조건으로서의 인권이론이다.
인권에 대한 학제적 연구
인권이론을 위해 저자는 사회과학의 여러 분과들이 인권을 함께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과학의 정교한 눈으로 인권을 바라볼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실로 엄청나다. 정치학은 인권보장·침해의 정치적 조건들을 분석하는 눈을 제공하며, 사회학은 인권보장·침해의 사회적 조건들, 즉 사회구조나 사회운동을 분석하는 길을 열어준다. 심리학은 인권에 대한 대중들의 심리와 인권침해자의 심리상태를 분석해서 인권보장을 위한 중요한 이론적 논거를 제시하고, 인류학은 인권의 보편성과 문화적 차이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할 것을 경고한다. 또한 최근의 지구화에 따른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국제관계학의 논의가 새롭게 그 중요성을 획득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사회과학의 분과들의 학제적 교류를 통해 인권 문제에 접근한다면, 인권이론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제6장~제8장).
그렇게 보면, 인권활동가나 인권연구자가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진다. 제3세계 아동인권문제를 접근하기 위해서는 다국적기업의 메커니즘도 알아야 하고, G7회담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북한인권문제를 접근하기 위해서는 식량경제학, 미국의 외교정책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이다. 최근의 중요한 이슈인 신자유주의화에 따른 사회권의 약화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경제성장과 사회권의 관계에 대한 비교정치이론의 성과물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국제금융기구, 다국적 기업, 국가를 둘러싼 국제정치경제학적 지식도 알아야 한다. 제3세계의 인권문제에 접근 할 때는 문화제국주의로 귀결될 가능성에 대해 인류학의 진단을 거쳐 봐야 한다. 힘들어 보이지만, 복합적인 인권현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설득력 있고 실현 가능한 ‘실천적 제언’을 내놓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과정이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분과의 연구자들과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활동가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인권포럼이 무엇보다도 필요할 것이다.
철학적 정당화와 사회과학의 현실분석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인권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논점들을 요령 있게 정리하고, 방대한 관련 문헌들을 충실하게 분석하여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실천적, 이론적 성과를 인권운동사와 인권이론사적인 관점에서 상세하게 정리해준다. 이 책 하나만으로도 그동안의 인권운동과 인권학의 성과를 일별하기에 충분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기본적으로 ‘인권입문서’이자 ‘인권교과서’로서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 나름의 비판적 관점도 덧붙여져 있는데, 거기서 추측할 수 있는 저자의 입장은 (번역자의 소개대로) 서구의 전형적인 자유주의 인권이론인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 책이 다양한 인권이슈들을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나 실천적 지침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이슈들을 보다 명확하게 생각하도록 도와주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러한 교과서적 저술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이지만,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다. 그보다는 저자가 인권의 철학적/이념적 정당성에 대한 논점을 살짝 비껴가는 듯한 인상을 주는 점이 아쉽다. 인권이념의 과잉과 이상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현실적·분석적 사회과학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인권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가 불필요한 것은 결코 아니다. 철학적 인권이념은 비록 추상적이긴 하지만 일종의 ‘방향타’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관념적 이론과 비관념적 이론(87-88쪽), 규범적 철학과 사회과학(138쪽), 윤리적 진지함과 과학의 분석적 정연함(139쪽), 윤리적 이상주의와 과학적 현실주의(226쪽), 인권의 윤리학과 인권의 사회과학(229쪽) 등의 구분을 제시하면서 ‘철학적 이념’과 ‘사회과학적 현실분석’ 사이에 놓인 긴장관계를 인지하지만, 그 긴장의 해소에 대해서는 미래의 과제로 남겨 두고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 인권의 철학적 정당화에 깊은 통찰을 제시한 롤즈(Rawls)나 하버마스(Habermas)의 이론에 대한 검토가 빠져 있는 점 또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아울러 저자의 ‘법학이 주도해온 인권연구’에 대한 비판은 적절하지만, 인권법학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면, 인권법학과 인권의 사회과학이 어떻게 협력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검토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인권연구자와 인권활동가를 위한 제언
이 책의 저자 마이클 프리먼은 대학에서 인권을 가르치는 학자이면서 동시에 국제엠네스티 영국지부장을 역임한 인권활동가이기도 하다. 그런 저자는, 사회과학이 이제 인권을 중시하게 되었음을 환영하면서, ‘인권활동가’들이 인권의 사회과학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주문으로 책을 마무리 한다. 자신의 인권이론은 결코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보다 나은 실천을 위한 이론’임을 재차 환기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의 제언이 우리 인권연구자들과 인권활동가들 모두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길 기대해 본다.
이 서평을 작성하신 홍성수씨는 런던 정경대학(LSE) 박사과정에서 인권법과 법사회학을 공부하였고 현재 숙명여대 법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인권에 대한 개념을 소개하는 일종의 인권법총론으로 법학계의 열악한 인권 이해에 대해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고, 다양한 인권사례들을 수록하였다.
저자소개
이상돈 - 한국전쟁 중 피난지 부산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 자랐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고, 해군장교로 군 복무를 마친 후, 미국에 유학해서 뉴올리언스에 위치한 튤레인 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83년부터 중앙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2001~03년 동안에는 학장을 지냈다. 미국 조지아 대학 딘 러스크 센터 교환연구원(1988년), 조지타운 대학 풀브라이트 방문학자(1993~94년)를 지냈고, 1996년 가을 학기에는 로욜라 로스쿨에서 교환교수로 강의를 했다. 저서로는 <비판적 환경주의자>(2006년), <세계의 트렌드를 읽는 100권의 책>(2006년), <지구촌 환경보호와 한국의 환경정책>(1995년),<국제거래법>(1992년),<미국의 헌법과연 방대법원>(1983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중상모략>(공역, 2007년), <에코스캠>(1999년)이 있다. 1995년~2003년간 조선일보 비상임 논설위원을 지냈고, 그 후에도 조선일보, 문화일보 등에 기고를 했으며, 2007년 들어서는 동아일보에 고정적으로 기고를 해 오고 있다.
목차
제1부 인권의 개념과 한계
1. 인권사상의 기초
2. 근대적 인권사상의 이론적 특성
3. 근대적 인권사상의 실천적 한계
제2부 인권과 주권
4. 정치모델과 인권
5. 하버마스의 인권이론
제3부 현대사회와 인권
6. 인권 개념의 절차화
7. 인권 개념의 세계화
8. 인권 개념의 지역화
제4부 인권의 실현
9. 인권실현모델 - 국가주도와 시민주도
10. 국가인권위원회
서평
근대적 인권개념을 넘어서
1. 인권을 둘러싼 몇 가지 문제
한국사회에서 인권이 담론화된지도 이제 꽤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은 ‘인권’을 이야기하고 싸우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인권’이라는 담론이 갖는 의미를 차분하게 평가해 볼 시점이 된 듯하다. 그런 점에서 이상돈 교수의 <인권법>이 다루고 있는 몇 가지 쟁점들은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첫 번째 쟁점은 “인권의 보편성”과 “근대적 인권개념”에 대한 의문이고(제1부), 두 번째는 그러한 의문을 바탕으로 해서 “인권개념의 재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이고(제2부, 제3부), 세 번째는 그런 이해를 토대로 어떻게 “인권실현의 모델을 만들 것인가”(제4부) 하는 것이다.
2. 근대적 인권개념의 한계
이 책은 먼저 근대적 인권개념의 한계에서부터 시작한다.(제1부) 근대적 인권개념은 18-19세기 근대시민혁명과 더불어 발전하였다. 이에 따르면, 인권이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보편적이고 고정불변하는 권리이며(보편성), 이것은 누구에 의해서도 침해받아서는 안되며(불가침), 누구에게 양도할 수도 없는(불가양) 권리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이러한 ‘근대적 인권사상’이 ‘정치적 소외, ’사회경제적 소외‘, ’문화적 소외‘라는 세가지 실천적 한계를 노정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정치적 소외란 근대적 인권개념이 민주주의적 주권원리와 충돌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며, 사회경제적 소외란 근대적 인권개념이 사회적 약자의 실질적 자유보장에 취약할 수 있다는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문화적 소외란 근대적 인권개념이 보편적 인권이라는 명목 하에 타문화권 고유의 이념을 폭력적으로 무시할 수 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근대적 인권개념은 현대사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인권문제를 해결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개념이다. 현대적 인권문제가 인권과 주권의 충돌, 사회·경제적 권리이나 문화적 권리의 위상 문제, 문화적 상대주의의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얽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위의 세 가지 소외를 낳는) 근대적 인권개념은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인권은 보편적이다’, ‘인권은 불가침, 불가양의 천부적 권리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주장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학적 기능’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리고 그 수사학적 기능은 중세봉건권력과 맞서 싸웠던 부르주아혁명 시기에는 의미가 있었을지 몰라도, 현대사회에서는 오히려 부정적인 역기능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장애인의 접근권은 ‘천부인권’이다”라는 근거로 장애인 엘리베이터 설치를 주장하는 것은 실천적으로 위력적인 논거가 된다. 하지만 점심을 굶는 어린이의 인권, 최소한의 주거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독거노인의 인권 또한 천부인권라면, (재화가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다른 천부인권보다도 장애인 접근권이 우선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당장 서울 시내에서 수만명의 어린이가 점심을 굶고 있는데, 수억의 예산을 들여 지하철에 엘리베이터 설비를 하는 것은 어떠한 타당성이 있는가? 절대적인 권리가 이렇게 어느 하나를 위해 어느 하나를 양보해야 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합당한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소위 ‘근대적 인권개념’은 적절한 이론적 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근대적 인권개념은 재화가 풍부한 서구선진국의 이해관계를 편파적으로 반영하기도 한다. 전체 국민에게 일정한 수준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해줄 수 있을 만큼의 풍부한 재화를 가진 선진국들은 최소한의 인권을 확보하는 것이 비교적 용이하다. 하지만 재화가 부족한 나라에서는 어떤 인권부터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장애인접근권과 최소한의 음식을 먹을 권리가 충돌할 때, 후진국은 어느 한 권리만을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서구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인권’을 부당하게 ‘선택적’으로만 실현하는 것일 수 있고,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이러한 인권침해국에 대한 ‘응징’을 위해 ‘전쟁’을 불사하는 어이없는 사태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근대적 인권개념으로는 이러한 난관에 대해 어떠한 답도 제공하지 못한다. 그저 ‘인권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이다’는 ‘공문구’만을 남발할 뿐이다.
3. 인권개념의 새로운 모색과 대안
그렇다면 근대적 인권개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인권개념의 재정립은 인권학과 인권운동의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어버린다. 저자는 하버마스(J. Habermas)의 토론정치이론을 이론적 토대로 삼아(제2부), 인권개념에 대한 재구성을 시도한다.(제3부) 그것은 한마디로 “인권개념은 실체가 아니라 (대화적 의사소통의 과정에서) 절차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107쪽)는 명제이다. 즉, 저자는 인권이 원래부터 보편적으로 일정한 내용을 담고 있는 실체가 아니라, 인권담론에 대한 공정한 공론경쟁을 통해 비로소 ‘절차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인권과 주권, 사적 자율성과 공적 자율성, 자유주의와 공화주의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하버마스의 후기 법-정치이론을 응용한 결과물이다.
이렇게 보면, ‘인권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라는 명제는 기각되며, 대신 인권담론의 ‘형성절차’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가 중요한 논점으로 부각된다. 어떠한 인권개념도 선험적으로 절대적인 것으로 전제되지 않으며, 모든 가치들은 구성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공론을 통해 재해석되고, 그러한 합리적 절차의 결과물로서 인권은 비로소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인권개념을 유동적으로 만든다는 단점이 있지만, 인권개념을 역동적인 개념으로 재정립하는 장점도 있다. 특히 인권담론의 해석주체로서의 인권담지자의 역할에 주목함으로써, 자칫 시혜적이고 후견적(paternalistic)이기 쉬운 근대적 인권개념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넘어서기도 한다.
그리고 저자는 마지막 제4부에서 이러한 새로운 인권개념에 기반했을 때, 다양한 인권의 실현기제들이 어떻게 제자리를 찾아야 하는지를 논한다. 인권이 절차를 통해 구성되는 것이라면, 그 절차를 세심하게 가다듬는게 당면과제가 될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기존 국가기구의 역할, 그리고 시민적 공론을 형성하는 시민사회의 역할이 모두 중요하다. 여기서 국가인권위원회는 그 중간에서 국가와 시민사회를 매개하는 ‘의사소통촉매기능’(241쪽)을 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실천적 제안이다.
4. 해결되지 않은 과제
이 책은 근대적 인권개념의 한계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인권개념을 이론적으로 도출해 내고, 그것을 기반으로 한 국가의 인권실현기제까지 분석하고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는, 이른바 ‘자기 완결성’을 가지고 있다. 인권에 대한 기존의 연구가 대개 사회학적 현상분석이나 철학적 고찰에 머물거나, 법제도에 대한 피상적 접근을 넘어서지 못하며, 학제간 연구라고 해도 대개 여러 학문분과의 시각이 나열되는 것에 불과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책이 갖는 의미는 더욱 크다. 인권관련출판이 이미 ‘거대산업화’되어 버린 서구에서도 이러한 종합적 고찰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 책의 주장이 안고 있는 ‘실천적 난점’이다. 형사피의자의 인권을 이야기할 때, 재소자의 인권을 주장할 때, 장애인의 인권을 옹호할 때, “인권은 보편적이고 불가침의 권리이다”라는 모토만큼 선명한 주장은 없다. 이것은 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그 주장이 사회적 인정을 받는데 크게 기여한다. 대부분의 인권교재가 인권의 절대성/보편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일테다. 하지만 이 책은 실천적 우위를 포기하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인권개념의 절차적 재구성을 주장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완성도는 높지만, 그 주장이 시민사회에서 동의를 얻기에는 또다른 난관이 존재한다. 성숙하고 건강한 공론영역이 존재하고, 그것이 정치권력을 적절하게 견제하는 사회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근대적 인권개념’을 포기하고, 인권의 다원성, 절차성 등을 주장하는 것은 실천적 차원에서는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의 척박한 공론현실을 고려해 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우리 공론에 여전히 희망을 걸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재소자에 대한 성폭력문제가 연일 신문 헤드라인을 강타하고 있다. 당신은 재소자의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인권’이 침해당했다는 근거로 항의를 조직하는 일부터 시작할 것인가? 아니면 재소자의 인권을 어떻게 정의하고 구성할 것인가를 주제로, 공론영역에서의 사회적 합의절차를 밟아나가는 지리한 노정부터 차근차근 시작할 것인가?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향상된 우리 인권현실이 이제 그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너무 앞서나간 것일까? 어느 선택지를 택하건 그 치열한 고민은 이제 시작되어야 한다.
이 서평은 홍성수 교수가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 기고한 것으로, 홍성수 교수는 런던정경대학(LSE) 박사과정에서 인권법과 법사회학을 공부하고 현재는 숙명여대 법대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아연 동아시아 연구총서 4권. 인권의 이념을 도덕과 법, 정치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규범적 토대를 중심으로 논의하였다. 책의 전반부에서는 주로 유교적 지식인들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논하였으며, 후반부에서는 인권의 이념이 과거의 자유주의적인 정당화의 방식을 넘어서 '정치적 정의론'으로 재구성될 수밖에 없는 일련의 이유들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소개
임홍빈 - 1954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철학, 사회학, 교육학 등을 연구하고 같은 학교에서 철학 석사와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 문과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고대 부설 철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기술문명과 철학>, <근대적 이성과 헤겔 철학>, 옮긴 책으로는 <정신분석 강의>, <윤리학 사전> 등이 있다.
목차
아연 동아시아연구총서 발간에 부쳐
서문
감사의 말
제1장 인권의 윤리
제2장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본 인권담론
제3장 인권이념에 대한 비판적 담론의 비판
제4장 인권이념에 대한 상대주의적 반론들
제5장 보편적 인권이념을 위한 두 가지 변론: 전통주의를 넘어서
제6장 인권담론의 세계화: 그 제도적 조건들
제7장 인권담론의 관점에서 본 한국의 규범문화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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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인권의 이념과 아시아가치론 (아연출판부, 2003)
‘인권의 보편성’의 문제는 인권을 학문적으로 접근하건 실천적으로 접근하건 언제나 부딪히게 되는 문제이다. 여기서 ‘인권의 보편성’이란 인권은 시공간에 의해 한정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원리가 적용되어야 함을 말한다. 세계인권선언의 “인류가족 모든 구성원의 타고난 존엄성과 평등하고도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전세계의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기초이며…”라는 구절과 1993년 비엔나선언 및 행동계획에서의 “모든 인권은 보편성, 불가분성, 상호의존성과 상호관련성을 갖는다.”는 구절은 이러한 인권의 보편적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다원주의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이른바 ‘문화적 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는 이러한 인권의 보편성을 강하게 비판한다. 이는 초월적 또는 초문화적 인권은 존재하지 않으며, 합의된 바도 없으므로 어떠한 문화도 자신의 이념을 다른 문화에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또한 그런 점에서 서구에서 주장하는 인권의 보편성 주장은 서구제국주의의 오만과 편견을 담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문제는 여기서 일종의 딜레마에 빠진다는 것이다. 먼저 인권의 보편성을 강조하다 보면, 인권규범이 특정한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권규범의 지역적-시대적 특수성을 강조하다 보면, 인권의 보편성 자체를 부정하는 상대주의로 기울게 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인권의 보편성 문제를 경유하지 않고, 여러 인권문제에 대한 일관성 있는 접근은 불가능하다. 실제로 인권의 보편성 문제는 북한인권문제, 이라크인권문제, 일부 동아시아국가의 인권침해문제, 한국의 국가보안법문제 등에서 핵심적인 논점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를 둘러싼 서구와 동아시아 사이의 논쟁이다. 아시아적 가치론은 아시아에는 정치·경제·문화의 영역에서 서양과는 다른 유교적 가치체계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하면서, 서양의 인권개념은 보편적일 수 없다고 한다. 반면 서구에서는 서구의 인권은 보편적인 권리라는 점을 주장하면서, 비서구사회에 대한 서구화를 정당한 것으로 관철시키려고 한다. 실제로 서구에서는 중국이나 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들의 인권침해를 문제 삼아 정치·경제·문화적 개입을 감행하려고 한다. 하지만, 아시아국가의 일부 지도자와 학자들은 ‘아시아적 가치’의 고유한 가치를 주장하면서, 서구의 시각에서 아시아의 인권문제를 바라보는 것에 비판적이다.
[인권의 이념과 아시아가치론]은 이러한 문제를 철학적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다룬 전문 학술서이다. 아시아가치론과 관련된 논점은 실로 광범위하다. 서구적 근대성과 근대적 이성의 한계를 둘러싼 논쟁이 기본에 깔려 있고, 자연법 논쟁, 포스트모더니즘 논쟁, 문화적 다원주의,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등의 논의가 아시아가치론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들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책의 논지를 따라가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핵심적인 주장은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저자는 아시아적 가치관을 인류의 소중한 규범적 자산으로 보는데 인색하지 않지만, 아시아적 가치를 서구의 인권이념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이미 종교다원주의로 진입한 우리 현실에서 유교적 가치에 대한 강조는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가치들 중에서 특정한 관점만을 선택적으로 강조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교적 가치관은 우리의 민주적 법치국가의 도덕적 기초가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유교적 가치관은 농업사회의 혈연공동체에서 나온 일원론적이고 통합주의적 규범체계이며, 계층적으로 규정된 의무중심의 덕윤리라는 점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유교적 가치관은 근대 이후 형성된 시민사회나 근대적 국가체제의 제도들과 상응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리고 저자는 보편적 인권개념이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저자는 아시아가치론자들이 인권철학의 발원지가 서구라는 이유로 보편적 인권개념을 배척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인권은 그 발생적 기원을 초월해서 정당화되고 실현되어야 하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고 주장하고, 더 나아가 인권은 국민국가 체제 내 뿐만 아니라 세계사회의 정치적 의제라는 점을 지적한다. 저자의 이러한 보편적 인권에 대한 정당화는 독일의 철학자 회페(O. Höffe)와 하버마스(J. Habermas)의 인권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책보다 좀더 쉽고 실천적인 관점에서 아시아가치론과 인권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문헌으로는 성공회대 인권평화연구소에서 엮은 [동아시아 인권의 새로운 탐색](삼인, 2002)과 여러 학자들이 공동집필한 [아시아적 가치](전통과 현대, 1998)가 있다. 전자에는 1부와 2부에서는 주로 아시아적 가치론과 인권에 관한 일반론을 3부에서는 월드컵과 관련하여 민족주의와 인권에 관한 논문이 실려 있다. 후자에는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싱가폴의 리콴유와 한국의 김대중이 펼쳐낸 흥미로운 논쟁부터 시작하여, 일본과 한국의 학자들의 아시아적 가치와 한국의 정치·경제 문제, 그리고 논쟁에 대한 평가논문까지 모두 10편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다.
인권의 보편성에 관한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리고 아마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권의 보편성 자체를 포기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물론 한 사회의 특정한 가치관을 ‘보편성’으로 격상시켜 세계지배를 모색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끊임없이 경계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인류의 보편적인 권리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고전적 자연법론의 입장에서처럼 인권의 보편성을 고정불변하게 미리 주어진 어떤 것으로 파악해서는 안될 것이다. 여기서 만약 보편성을 다양한 문화적 차이가 서로 교류하고 대화하면서, 확인해 나가는 과정 그 자체로 재해석한다면, 인권의 보편성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서평은 홍성수 교수가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 기고한 것으로, 홍성수 교수는 런던정경대학(LSE) 박사과정에서 인권법과 법사회학을 공부하고 현재는 숙명여대 법대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각 시대에 각 계층의 인권을 떠받치고 있는 정치적·경제적 사상, 권력의 형태, 근·현대에서의 인권보장의 전개와 대응의 양상 등을 사회경제적·정치적·법적 차원에서 다양하게 접근하여 서술
저자소개
스기하라 야스오 – 일본의 진보적 법학자로서 다른 저서로는 <헌법의 역사>등이 있다.
옮긴이
차병직 - 현재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변호사(법무법인 한결), 이화여대와 서울대 법과대학 강사이며 고려대학교 법과대학과 대학원에서 심재우 교수 지도로 형사법을 공부하였고 저서로는 『NGO와 법』,『사람답게 아름답게』,『시간이 멈춘 곳 풍경의 끝에서』등이 있다.
목차
<인권의 역사>
서문
1. 문서에 의한 국민의 권리보장제도 등장
2. 입법권에도 대항할 수 잇는 '인간의 권리'등장
3. 근대시민헌법의 인권보장의 특색과 '빛'
4. 근대의 두가지 상이한 권리보장의 구상
5. 근대시민헌법에서의 인권보장의 '그림자'
6. 1871년 파리크뮌과 인권보장의 구상
7. 현대 시민헌법과 인권
8. 인권보장의 전면적인 장애물로서의 전쟁과 군비확장
9. 일본국헌법과 인권의 보장
10. 21세기의 인권보장을 위하여
11. 맺음말
<인권의 역사적 맥락과 오늘의 의미>
1.인권에 대한 생각
2.인권의 어원
3.자연법과 자연권
4.권리의 문서화
5.혁명과 인권 선언의 시대
6.세계인권선언과 인권의 국제화
7.오늘의 의미와 과제
8.해결을 위한 생각
서평
<인권의 역사>,<인권의 역사적 맥락과 오늘의 의미>
1. 인권사에서 시작해 보는 인권공부
인권이 21세기의 시대적 화두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며, 세상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인권/인간다움이라는 잣대로 바라보려는 시도 역시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일이 아닌 듯 하다. 하지만 정작 인권을 ‘공부’해보겠다는 나선다면, 상황이 그다지 만만치는 않다. ‘인권’을 제목으로 담고 있는 책은 수없이 많지만, 인권공부를 위한 입문서로 쓸만한 책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권공부를 시작해 보겠다면, ‘인권사’에서부터 출발해 보는 게 순서가 아닐까 한다. 어떤 분야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인권’은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인권의 역사에 대해서는 좋은 입문서가 나와 있다.
2. 스기하라의 <인권의 역사>
먼저 소개할 책은 <인권의 역사>라는 책이다. 일본의 진보적 법학자 스기하라가 저술하고 석인선 교수가 번역한 이 책은, 10년 전에 나온 책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장 좋은 인권사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인권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선물이 아니라, 인권은 처절한 민중의 투쟁 속에서 쟁취되어온 역사적 산물이라는 점을 실감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먼저 근대시민혁명을 통해서, 근대적 인권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특히 저자는 프랑스혁명이 인권보장의 특색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면서, 프랑스혁명을 주로 다루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근대적 인권이 인류에 던져준 ‘빛’으로, 국가통치에서 국민의 ‘인권’과 ‘자유’가 그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했다는 점, 그럼으로써 봉건체제와 결별할 수 있게 해 준 점, 자본주의가 꽃을 피울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준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학, 예술, 과학에서의 비약적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이러한 근대적 인권의 ‘빛’과 함께 ‘그림자’도 동시에 조명한다. 그 ‘그림자’란 ‘자유’의 보장이 가져온 부작용이었다. ‘노동계약의 자유’는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권리를 오히려 약화시켰고, ‘경제활동의 자유’는 사회적 약자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오히려 악화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계급은 근대시민혁명 이후에도 끊임없이 인권의 ‘실질적 보장’을 위해 싸웠고, 이러한 투쟁의 성과는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헌법의 변화로 나타나게 되었다. 사회복지국가가 새로운 국가의 지도이념이 되었고,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사회권’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참정권이나 강화되고, 기존의 자유권이나 청구권적 기본권도 더욱 강력하게 보장된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일본의 진보적 법학자답게 인권보장의 전면적 장해물로서 전쟁과 군비확장을 경계한다. 그리고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실질적 인권의 보장을 오히려 약화시키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그러면서 현재의 인권보장의 과제로 민주주의의 강화, 사인간의 인권보장, 외국인의 인권보장, 여성의 인권, 어린이의 인권문제, 국제적 인권보장 등을 거론하고 있고, 소위 ‘새로운 인권’(제3세대인권)의 과제로 평화적 생존권, 환경권, 알 권리, 프라이버시권, 교육의 자유 등을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이 1992년에 집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과제들은 우리에게 전혀 ‘낡은 과제’가 아니다.
3. 차병직의 <인권의 역사적 맥락과 오늘의 의미>
다음으로 소개할 책은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차병직 변호사의 <인권의 역사적 맥락과 오늘의 의미>라는 책이다. 불과 126쪽 짜리 얇은 책이지만, 이 책이 담고 있는 정보는 만만치 않다. 책의 앞부분은 인권의 어원부터 시작해서, 인권의 역사를 간략하게 짚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인권에 대한 현대적 의미와 과제, 그리고 해결방안을 정리하고 있다. 내용면에서 학술적인 엄밀함은 부족하지만, 입문서로서는 손색이 없는 책이다. 짧지만 담을 것은 다 담았고, 저자가 결론으로 제시한 인권의 과제도 중요한 논점을 잘 정리해 놓고 있다.
또한 이 책은 책의 절반이 ‘부록’인데, 부록에서는 세계의 주요 인권선언을 번역해 놓았다. 마그나 카르타, 권리청원, 인신보호법, 권리장전, 버지니아 권리선언, 미국독립선언,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세계인권선언까지 13세기부터 20세기까지 주요 인권선언을 총 망라해 놓은 것이다. 이러한 인권선언을 단순히 ‘문서’가 아니라, 민중들의 처절한 투쟁 속에서 나온 ‘역사적 산물’이라고 생각하면서 읽는다면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앞서 소개한 <인권의 역사>를 읽으면서, 해당 역사적 문서들을 함께 읽어 간다면,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4. 나가며
이 두 권의 책은 워낙 알기 쉽게 서술되어 있어, 인권에 문외한인 사람이 읽기에도 전혀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분량도 짧아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오히려 아쉬운 점은 아직까지는 인권의 역사를 좀더 체계적이고 포괄적으로 다룬 연구서가 없다는 점이다. 이 두 책으로 입문한 독자들이 좀더 읽을 만한 인권사 책은 현재로서는 마땅한 것이 없다. 인권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수십 권의 서양서적들을 생각하면, 우리나라에서의 인권연구는 아직 걸음마 수준에 불과한 듯 하다. 그래도 인권사에 대해 좀더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노명식 교수의 <프랑스혁명에서 파리꼬뮨까지>(까치, 1994)를 추천하고 싶다. 이 책은 프랑스 혁명사를 다룬 역사책이지만, 근대시민혁명 자체가 인권보장을 위한 투쟁이었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미국에서의 인권보장에 대해서는 장호순 교수의 <미국헌법과 인권의 역사>(개마고원, 1998)가 읽을 만 하다. 이 책은 미국의 연방대법원 판례에서 나타난 인권관련 사건들을 흥미진진하게 요약하고, 그 의미를 조명하고 있는 책이다.
이 서평은 홍성수 교수가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 기고한 것으로, 홍성수 교수는 런던정경대학(LSE) 박사과정에서 인권법과 법사회학을 공부하고 현재는 숙명여대 법대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강간죄의 객체, 강간죄의 폭행 협박의 정도, 성폭력범죄 피해자의 형사절차적 보호, 가정폭력에 대한 국가개입의 방식,가정폭력 피해자의 가해자에 대한 반격행위에 대한 형법적 평가 등의 주제를 다룬 책. 국내의 형사법률, 이론, 판례 및 실무관행이 명시적 묵시적으로 남성중심적 관념을 보유하고 있는 데 대하여 철저한 비판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소개
조 국 - 1965년 부산에서 태어났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과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로스쿨에서 공부했다. 울산대학교, 동국대학교를 거쳐 2001년 12월 이후 서울대학교에서 법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다. 2000년 이후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부)소장으로 시민운동에 참여하였고, 2007년 12월 대법원장 지명으로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으로 임명되어 인권침해와 차별에 대한 조사와 구제에 일조하고 있다. 전공인 법학연구를 삶의 중심에 놓으면서도, 여력이 되는 대로 전공 밖의 세상일에 관여하고 있다. 법의 제정, 해석, 집행의 문제, 그리고 인권의 보장과 신장의 문제가 애초부터 세상 일과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없으므로. 학술서로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 『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 『로스쿨 형법총론』 등을, 에세이집으로는 『성찰하는 진보』를 발간했다.
목차
제1장 남성중심적 강간죄 형법규정과 해석론 비판
제2장 형사절차에서 성폭력범죄 피해여성의 처지와 보호
제3장 매맞는 아내에 대한 법적 보호의 한계
제4장 매맞는 여성의 대남성 반격행위에 대한 남성중심적 평가
서평
<형사법의 성편향>
법치국가적 인권보장 vs 여성주의
근대적 인권은 국가권력에 맞서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고자 하는 투쟁의 과정에서 발전해 왔다. ‘인권’하면 피의자나 수형자의 인권이 떠오르고, 인권을 ‘국가의 지배’에 맞선 ‘인간의 권리의 수호’라는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죄형법정주의, 법익보호원칙, 비례성원칙, 형사절차의 정형화 등이 ‘민주적 법치국가’의 핵심이념으로 자리 잡은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그러한 이념을 바탕으로 성립된 근대 (형사)법체계는 ― 인권보장이라는 나름대로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 남성 편향적이고 여성 차별적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강간, 성희롱, 아내 구타, 형사절차에서 성폭력범죄피해여성의 보호 등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여성이 불리한 지위에 놓이게 된다는 것은 이미 오랫동안 지적된 바 있다. 그래서 여성주의운동진영에서는 강간죄객체규정의 확대, 강간죄 성립요건의 재구성, 형사절차에서 성폭력범죄피해자 보호 강화, 매 맞는 여성에 대한 보호 강화, 성희롱의 범죄와, 비동의간음의 범죄와, 반여성적인 포르노그래피 규제 등을 주장해 왔고, 그 중 일부는 법체계 내에서 수용되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법치국가에서 이러한 여성주의의 주장이 전적으로 수용될 수만은 없다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여성 주의적 관점‘만’을 전적으로 수용하다보면, 인권보장을 위한 법치국가 원리가 불가피하게 침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간죄의 성립요건을 완화하는 것은 증거재판주의의 원칙을 무력화시키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고, 형사절차에서 성폭력범죄 피해여성에 대한 보호는 법정에서 피고인의 방어권의 축소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가 법치국가의 인권보장체계를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 이상, 여성 주의적 관점의 도입이 법치국가원칙을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난감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여성인권의 진정한 실현을 위해, 근대시민혁명의 성과인 법치국가적 인권보장체계를 무력화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법치국가원칙을 수호한다는 명목 하에서 여성의 경험과 느낌을 무시해서도 안 될 것이며, 반대로 여성 주의적 관점만을 강조하여 법치국가원칙의 침해가능성에 눈감아서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의 논의는 한쪽의 입장만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편에서는 여성의 경험과 느낌을 무시하고, 그것을 ‘중립성’이나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해왔다. 이 입장은 ‘중립’이 여성에게는 ‘차별’과 ‘억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철저히 눈감아 왔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여성 주의적 관점의 도입이 법치국가적 인권보장체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세심하게 고려하지 못했다. 이 입장은 성폭력특별법을 제정하면서 사형제도가 선고될 수 있는 범위를 확대하는 오류를 범하는가 하면, 형사절차에서 성폭력범죄피해자 보호가 피고인의 소송상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을 충분히 염두에 두지 못했다.
여성주의와 법치국가적 인권보장 : 절충? 타협?
<형사법의 성편향>은 바로 이렇게 중요하고도 어려운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법을 제시하는 책이라는 점에 그 의미가 있다. 이 책은 형사법의 남성편향을 치밀하게 비판하면서도, 여성 주의적 관점의 도입이 법치국가원칙을 침해할 위험에 눈감지 않는다. 그래서 저자는 한편으로 강간죄문제(제1장, 제2장), 형사절차에서 성폭력범죄 피해여성의 보호의 문제(제2장), 매 맞는 아내의 문제(제3장, 제4장)에서, 남성 편향적 형사법체계의 전면적인 개혁을 주장함으로써, 진정한 여성인권의 회복을 꾀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비동의간음의 범죄화, 간통죄 존속, 성매매에 관한 단선적 범죄화,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과도한 규제 등에 대해서는 오히려 반대의 입장을 개진한다.(제5장) 저자는 한편으로 여성주의의 입장을 형사법체계에 내에 상당 부분 수용하려고 하지만, “모든 반여성적 행위를 일률적으로 범죄 화하려는 여성주의의 요구”(290쪽)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요컨대, 저자는 여성주의의 문제제기가 법치국가의 인권보장체계에서 어떻게 조화롭게 수용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에 대해, ‘어설픈 절충’ 내지 ‘정치적 타협’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러한 입장이 여성주의진영과 법조계 모두에게 불만족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법치국가 형사법의 원칙과 여성주의의 문제제기 중 어느 하나를 배제하지 않는 한, ‘좋은 의미의 절충과 조절’은 불가피하다고 하겠다. 또한 여성주의의 관점은 ‘국가형벌권’을 통해서‘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문제해결을 위한 법적 수단으로는 ― 형벌 외에도 ― 민사제재, 행정제제, 제3의 대안(중재, 조정 등)이 있으며, 법 이전에 교육적·사회문화적 해결방안도 있다. 무엇보다도 민주적 법치국가에서 국가형벌권의 행사는 이러한 해결방안 중에서도 ‘최후의 수단’일 뿐이다. 그래서 이러한 관점에서 법치국가원칙과 여성주의의 입장을 조절하고 절충하다 보면, 여성 주의적 관점의 도입이 곤란하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론은 여성 주의적 관점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사안의 ‘형사법에 의한 해결’에 비판적인 입장을 개진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형사법 이외의 다른 해결방안의 모색을 제안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논증이 ‘정치적 타협’이나 ‘어설픈 절충’과 명백히 구분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의의와 전망
마지막으로, 이 책의 미덕은 무엇보다도 ‘읽기 쉽다’는 점에 있다. 전문연구서임에도 불구하고 정돈된 논리를 유려한 문체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법학자는 물론이고 비법학전공자나 일반시민들도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연구서로서의 품격을 전혀 잃지 않고 있으니, 이런 류의 연구서로서는 가히 모범적이라고 할 만 하다. 또한 이 책은 국내외의 연구 성과를 성실하게 인용하고 검토하고 있는데, 이 점은 이 책의 학문적인 가치를 더해 줌은 물론이고, 관련 분야를 좀 더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책은 여성주의의 도전과 관련한 ‘형사법’의 문제를 다루고 있을 뿐, 형사법 이외의 다양한 법적·제도적 대안을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못하다. 물론 이 점은 <‘형사법’의 성편향>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의 불가피한 한계라고 할 수 있지만, 어쨌든 아쉬운 일임은 분명하다. 앞으로 법체계 전반의 성편향과 (형사법 이외의) 여러 법적·제도적 대안에 대한 후속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며, 이 책은 그러한 후속연구를 위한 훌륭한 발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 서평은 홍성수 교수가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 기고한 것으로, 홍성수 교수는 런던정경대학(LSE) 박사과정에서 인권법과 법사회학을 공부하고 현재는 숙명여대 법대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아직까지도 세계 곳곳에 존속해 있는 인신매매 거래망과 노예 판매현장의 충격적인 실상을 폭로하고 이에 대한 현실적 해결 방안을 모색한 책.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에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노예가 존재하고 있다. 물론 ‘노예’를 정의하는 방식에 따라 그 수는 훨씬 더 늘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세 가지의 간결한 조건을 토대로 노예를 정의함으로써 ‘현대의 노예’에 좀더 가까이 접근하려 한다. 이 책의 저자인 E. 벤저민 스키너는 아이티의 포르토프랭스, 아프리카의 수단, 루마니아를 비롯한 인접 국가들, 그리고 인도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세계를 두 발로 돌아다니며 두 눈으로 목격한 노예제의 참상을 낱낱이 기록한다.
아직까지도 엄연히 노예로 존재하는 사람들, 즉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 관한 진실을 명확하게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도덕적 목격자의 구실을 하는 저널리즘의 진수를 맛볼 수 있게 해준다.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노예제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빈곤과 폭력, 노예의 굴레라는 악순환 속에서 유린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공유하도록 돕는다.
저자소개
E. 벤저민 스키너 (E. Benjamin Skinner) - 1976년에 태어나 미국 위스콘신과 아버지가 영국 식민지의 관료로 있던 북부 나이지리아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퀘이커교도의 집회에서 처음으로 노예제에 대해 배웠다. 웨슬리언 대학을 졸업한 후, 2003년 《뉴스위크》 국제판에 아프리카 수단에 관한 글을 쓰게 되면서 실제로 잔존해 있는 노예제를 접했고, 복음주의자 단체와 함께 노예를 모두 사들여 해방시킬 목적으로 그곳에 잠입하기도 했다. 이후에 혈혈단신으로 유엔평화유지군과 함께 수단내전의 최전선으로 갔던 그는 전세계에 산재해 있는 노예들을 찾아 나서고 있다.
이 책에서 스키너는 현대사회의 노예를 규정하는 데 있어 필요한 요건 세 가지를 제시한다. ‘강요나 사기를 통해,’ ‘생존을 넘어선 보수를 전혀 받지 않고,’ ‘강제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전세계에 퍼져 있는 노예 암거래 네트워크와 노예 채석장, 도시 아동시장과 매음굴까지 숨어들었던 저자가 직접 체험한 일들을 바탕으로 쓰인 것이다. 《뉴스위크》 국제판, 《트래블앤레저》, 《포린어페어스》 등의 정기간행물에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과 관련된 광범위한 주제에 관해 기고하고 있으며 현재 브루클린에 거주하고 있다. 이 책은 스키너의 첫번째 저서이다.
옮긴이
유강은 - 국제문제 전문 번역가. 옮긴 책으로 <팔레스타인 현대사>, <The Left 1848~2000>, <미국민중사 1, 2>, <핀란드 역으로>, <전쟁 대행 주식회사>, <세계를 뒤흔든 공산당 선언>, <세계를 뒤흔든 시민 불복종>, <전쟁에 반대한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등이 있다.
목차
리처드 홀브룩의 서문
지은이의 말
1. 가난한 사람들의 재산
2. 기원: 3막짜리 연극
3. 오른손이 소유한 사람들
4. 인간과 민족보다 앞서는 도덕률
5. 민족 안의 민족
6. 새로운 중앙 항로
7. 존 밀러의 전쟁
8. 비슈누 신의 자식들
9. 계시: 불의 검을 든 천사들
10. 작은 희망
맺음말: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전쟁
주석
감사의 말
찾아보기
서평
21세기 노예제, 그 참혹한 현장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 에 관한 불편한 진실을 묻는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세계 곳곳에 존속해 있는 인신매매 거래망과 노예 판매현장의 충격적인 실상을 폭로하고 이에 대한 현실적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자 하는 한 편의 흥미진진한 르포르타주이다. 이 책의 저자인 E. 벤저민 스키너는 아이티의 포르토프랭스, 아프리카의 수단, 루마니아를 비롯한 인접 국가들, 그리고 인도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세계를 두 발로 돌아다니며 언제 어떻게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두 눈으로 목격한 노예제의 참상을 낱낱이 기록한다. 저자의 용기 있는 취재와 거리낌 없는 묘사는 아직까지도 엄연히 노예로 존재하는 사람들, 즉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 관한 진실을 명확하게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도덕적 목격자의 구실을 하는 저널리즘의 진수를 맛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러므로 이 책,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할 그 도덕적 가치, 즉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에 관한 충격적인 보고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칫 선정적인 서술로 흐르거나 값싼 동정심에 호소하기 쉬운 소재를 다루면서도 저자의 냉정한 관찰자적 시각으로 인해 독자는 마치 자신이 직접 여행하는 듯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처음 몇 주 동안 내가 직면한 가장 큰 과제는 한 명의 노예라도 찾아내는 것이었다. 내가 찾던, 대부분 뒤가 구린 인상의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난 뒤 거울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천지 사방에 노예들이 있었다. 나는 종종 속박 상태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주어야 할까 의심을 품었다. 한 차례 예외가 있긴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이 책이 훗날 훨씬 더 많은 이들을 구하리라는 희망을 품은 채 한 사람을 구하는 행동을 자제했다. 지금 이렇게 쓰면서도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이 책에서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노예들 자신이다. 노예들의 이야기는 가슴 미어지는 슬픔을 담고 있지만, 이 와중에서도 독자들은 노예들의 저항과 자유를 향한 갈망을 이끌어내는 소리 없는 존엄을 발견할 것이다. 국제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았으면서도, 그리고 심지어 자신이 인간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이들은 조금씩 자신의 존엄을 향한 행보를 시작해나간다.
이 책의 저자, E. 벤저민 스키너는 2003년, 아프리카 수단에서 충격적인 노예제의 실상을 목격한 후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서 창궐하는 노예제의 현실을 알리고자 고군분투하고 있다. 두바이의 대규모 하렘에서부터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의 불법 홍등가까지, 그리고 인도의 노예 채석장에서부터 아이티의 어린이 시장에 이르기까지, 스키너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세계의 이면을 탐험하면서 인간을 사고, 팔고, 사용하고, 버리는 또 다른 세계를 낱낱이 전한다.
‘현대판 노예제’가 아니라 ‘현대의 노예제’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100만 명의 죽음은 통계이다.” 스탈린이 했다고 전해지는 말이다. 노예의 처지를 이보다 더 적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말이 있을까? 그러나 벤저민 스키너는 여기에만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인간의 예속은 오늘날 모든 곳에서 불법이다. 그렇지만 만약 법적 노예제를 폐지한 세계에서 한 명의 노예라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리고 면밀하게 살펴본다면, 곧바로 수백만 명의 노예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에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노예가 존재하고 있다. 물론 ‘노예’를 정의하는 방식에 따라 그 수는 훨씬 더 늘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세 가지의 간결한 조건을 토대로 노예를 정의함으로써 ‘현대의 노예’에 좀더 가까이 접근하려 한다. 이 책에서 그는 ①강요나 사기를 통해 ②생존을 넘어선 보수를 전혀 받지 않고, ③강제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을 ‘노예’라 부르며, 이 세 가지 조건 중 하나라도 충족하지 못하면 ‘노예’라 규정하지 않는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예’를 저임금에 과도한 노동을 하는 막노동자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가 ‘노예처럼’ 일할 때, 혹은 제3세계 어딘가에서 일당 2달러에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할 때 붙여지는 ‘노예’호칭처럼 말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람들이 ‘현대판 노예’가 아닌 것은 이들이 단지 비유적인 차원에서의 노예가 아니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분명히 해두자면 이 책에서 말하는 ‘노예’란 과거에 존재했던 노예의 ‘현대판’이 아니며, 사실상의 노예제가 존재하고 있다는 말도 아니다. 더도 덜도 말고, ‘노예’는 단지 ‘지금-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말 그대로의 ‘노예’를 지칭할 때만 사용되는 말이라고 이해하기로 하자. 이렇게 엄격하게 정의하고도 저자는 21세기의 ‘노예’가 역사상 가장 많은 수치를 나타낸다고 말한다. 이 책의 서문을 쓴 리처드 홀브룩은 독자들이 이와 같은 현실을 좀더 생생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이, 우리 모두는 노예제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역사책을 통해 노예제에 관해 읽으며, 다큐멘터리와 영화를 통해 노예제를 보고 있다. 노예제는 무시무시하다. 노예제는 비인간적이다. 노예제는 없어졌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노예제는 모든 대륙에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 (…) 벤 스키너는 독자를 세계 최악의 지옥 같은 곳들로 데리고 들어간다. 현대의 노예와 인신매매업자들의 가슴속으로 들어가면서, 이 문제의 뿌리를 찾기 위한 힘들고 기나긴 길을 걸으면서 스키너는 현대 세계를 배회하는 유령들을 찾아낸다.
우리가 노예제라고 하는 가장 비열한 수단조차 묵인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을 막을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없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와 같은 비열한 수단을 우리가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선진국 국민들의 우아하고 안락한 삶이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지탱되기 위해서는 지구 반대쪽에서 노예제가 광범위하게 유지되어야 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 역시 고삐 풀린 세계화가 드리워놓은 거대한 그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는 바로 이와 같은 불편한 진실들, 즉 노예제가 창궐하게 된 배경을 하나씩 드러내 보인다. 가령 식민이후의 제3세계 ‘파탄국가’에 광범위하게 드리워진 이른바 ‘도둑정치kleptocracy’의 폭력이나 사회주의멸망 이후 ‘자본 없는 자본주의화’를 감내해야 했던 동유럽의 상황, 그리고 인도에는 노예가 없음을 강변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원숭이에 비유하는 인도 고위 관료의 인종주의적 발상 등은 왜 노예제가 여전히 번성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힌트가 되어준다. 물론 여기에는 또 한 가지 중요한 배경이 깔려 있다. 그것은 바로 노예제의 현실을 알면서도 침묵하거나 방조하는 광범위한 공모자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름끼치는 범죄의 실상들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서 언급되는 노예들의 구체적인 존재방식과 발생메커니즘은 다양하다. 먼저 이 책의 첫번째 장에서 저자는 미국 뉴욕에서 비행기로 3시간 거리에 있는 아이티의 포르토프랭스로 떠나는 것으로 노예현장의 취재를 시작한다. 이 장의 제목이 「가난한 사람들의 재산」인 이유는 서인도 제도의 작은 나라, 아이티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더부살이restavek’라 불리우는 사람들을 소유한 가구의 소득이 월 평균 30달러 이하로 아이티에서조차 하층중간계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라는 데 있다. ‘더부살이’들은 주로 10세를 전후로 한 아이들이다. 대개의 경우 중계업자를 통해서 거래가 이루어지는데, 어처구니없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노예(‘더부살이’)로 팔면서 돈을 받는 경우가 드물며 중개인들의 거짓 약속, 즉 학교를 보내주겠다는 약속만을 믿고 쉽게 자기 자식을 포기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 약속은 거의 대부분 가짜인데, 실제로 ‘더부살이’의 80%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전체 학교의 80%가 사립이며, 한 해 385달러에 이르는 도시 고등학교 등록금이 평균적인 아이티인의 연소득을 상회하는 수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학교를 보내준다는 약속이 아이들의 부모들에게 얼마만큼의 무게를 지니고 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장「오른손이 소유한 사람들」에서 저자는 아프리카의 수단으로 간다. ‘오른손이 소유한 사람들’이란 쿠란Koran에서 노예나 전쟁포로를 의미한다. 수단에 가장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가재家財노예제’는 사실상 1956년 제국주의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이후에 본격화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식민 이후에 종족분쟁이 끊이지 않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 흡사하다. 아랍이 지배하는 통일국가를 원했던 북부인들과 아랍의 지배란 곧 예속을 의미했던 남부인 사이의 갈등은 종족말살의 폭력과 노예제의 창궐로 이어졌는데, 이조차 국제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영국의 식민지지배 이전부터 수단에는 부모가 자식을 담보로 신용대부를 받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1988년 기근 시기에 남부의 부족인 딩카족의 부모들은 자식 한 명당 100달러씩을 받고 북부 부족인 바가라족에게 자식을 전당잡히는 식으로 이어졌으며, 남부와 북부 사이의 종족간의 보편적인 예속관계로 이어지게 되어 21세기 최대의 종족학살사태라는 비극을 낳게 된다. 2003년, 30만 명 이상의 사망자와 300만 명 이상의 난민을 낳은 남부와 북부 사이의 유혈충돌, 다르푸르 사태는 현재진행형이며, 그럼에도 여전히 국제사회는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실패한 사회주의의 현장, 동유럽이다. 그중에서도 최악의 ‘유토피아’의 길을 걸었던 루마니아와 몰도바이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1990년대에 시작된 루마니아의 인신매매는 역사상 그 어떤 형태의 노예무역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었다. 인간거래액은 연간 100만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성 인신매매는 히드라와 같아서 성매매 집결지 한 곳을 폐쇄하면 다른 곳에 작은 게 두 개 생겨나는 식으로 그 생명력이 강하다.
루마니아에서 사람들이 몰락의 길을 걷는 과정은 뻔했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100분의 1로 떨어진 화폐가치로 평범한 사람들은 평생 모은 재산이 휴지조각이 되었고, 국가의 공공영역의 기능은 사실상 마비 상태가 된다. 이 상황을 틈타 나타나기 시작한 인신매매조직은 젊은 여성들을 꾀어 암스테르담과 같은 매춘도시로 데리고 나가 매춘부로 팔아먹는 식으로 쏠쏠한 재미를 보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몰도바가 유럽에 공급되는 성노예의 최대 수출국이 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자는 노예제를 말할 때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세계 최대의 노예인구를 가진 인도의 처참한 현실을 소개한다. 인도 전국적으로는 800만 명 정도가 가장 오래된 예속의 형태인 농업 노예제 하에서 일을 하며, 벌써 10억 명을 돌파했다는 인도 인구 중 6억 명이 하루에 2달러 미만으로 살아가고, 2억6,000만 명은 1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하루를 살아간다. 이들 중 상당수는 ‘노예’이며, 또 그중 상당수는 어린이를 포함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인도는 뿌리 깊은 카스트제도를 가지고 있는데다 채무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노예거래가 엄청나게 광범위한 문화로 남아 있는 곳이다.
빈곤은 노예와 같은 말
다른 많은 문제들도 그러하겠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노예제’ 또한 이렇다 할 해결책이 있어 그것을 집행하기만 하면 되는, 그런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은 명백하다. 저자가 말하듯 “정부가 전반적인 양심을 일깨울 수는 있지만, 개개인의 양심을 법으로 규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활동을 하면서 다짐한 것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관찰만 할 뿐 개입하지 않는 저널리스트로서의 본분에 충실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저자도 인간인지라 예외적으로 개입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아이티의 포르토프랭스에서 노예상태였던 캉세즈 엑시유라는 소녀를 구한 일이었다. 저자는 글을 읽고 쓸 줄 몰랐던 캉세즈에게 장학금을 주어 학교를 다니게 해주었는데, 몇 달 뒤 저자는 인도의 허름한 인터넷카페에서 캉세즈로부터 온 이메일을 받고 감동했다는 일화를 전한다.
저자가 보기에 지금까지 노예제 근절을 위한 노력에는 두 가지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노예’가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하게 정의하지 않음으로써 예속이라는 현대의 전반적인 현상 가운데 일부분만을 대표할 뿐인 상업적인 성노예제만을 표적으로 삼아왔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를 이른바 ‘넘침효과trickl-down’를 통해 설명하기도 하지만, 성매매여성들을 표적으로 삼는 식의 대응으로 이어지는 발상은 부도덕하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이다.
두 번째는 노예제 근절을 위한 창의적인 접근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저자가 보기에 노예제의 가장 근본적인 배경에는 빈곤의 문제가 놓여 있으며, 이를 무시하는 것은 사과가 떨어질 때 중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일회용 사람들>의 저자 케빈 베일즈가 밝힌 바와 같이 “오늘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노예가 존재하지만 전체 인구 대비 비율은 역사상 가장 작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낙관적인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가령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소액 신용대출 프로그램이나 비정부기구에 대한 보조금을 강화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또 노예제의 실질적인 폐지는 각국 정부가 그 키를 쥐고 있겠지만, 그럴 의지나 능력이 없는 경우 시민사회와 민간 부분의 적극적인 결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도 지적한다. 또 공정무역의 확산을 통해서도 노예제의 폐지의 길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결국 자유시장을 통해서는 빈곤의 종식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시장은 세계에서 빈곤을 종식시키는 가장 효율적인 장치가 될 수 없다. 각국 정부와 무역기구가 게임의 규칙을 강제하기만 한다면, 공정 시장 역시 세계에서 노예제를 종식시키는 가장 탁월한 장치가 될 수 있다. (…) 나는 또한 노예제에 맞선 대중운동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지지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노예 근절을 위한 간단한 행동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노예제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빈곤과 폭력, 노예의 굴레라는 악순환 속에서 유린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공유하고자 하는 데 의의를 갖는다. 의 한국어판인 이 책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세계 곳곳에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판매 수익의 일부를 유니세프에 기부한다. 이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21세기에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노예제에 관한 혼란과 고민을 털어놓으면서 독자들에게도 진중한 제안을 던진다. 노예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을 이기기 위한 그 어떤 행동이라도 당장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초창기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다양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성공은 어느 정도는 다양한 전투 계획 덕분이었다. (…) 노예제 반대에 앞장선 사람들은 서로 무척 다른 도구를 사용했지만 공통의 대의 아래 단결했다. 그때처럼 지금도 어떤 사람이든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 (…) 오늘날 노예제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대에 비해 한결 눈에 띄지 않는다. 따라서 오래전에 노예제가 사라진 것처럼 자신이나 남을 속이기는 어렵지 않다. 원한다면 마음속으로 노예제를 현실이 아니라 역사책의 한 귀퉁이에 놓아둘 수도 있다. 나도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