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잊혀져서는 안 될 부끄러움
인권연대 인턴 윤광훈

사실 후속 모임 일정이 잡히기 전까지 '대공분실'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당일 오전부터 부리나케 인터넷을 뒤져가며 조사한 결과, 고문으로 숨진 고 박종철 열사가 수사받던 장소라는 사실만 겨우 알고 사무실을 나섰다. 내리쬐는 햇볕에 팔이 따가울 정도로 무더운 여름 오후 1시, xx역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대공분실' 입구에 도착했다. 미안하게도 이미 십여명의 대학생들이 더위에 지친 얼굴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짧은 안부 인사를 나누고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님의 안내로 '대공분실' 견학이 시작되었다. 국장님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달리 낮고 엄숙했다. 아마도 장소가 주는 무거움 때문이리라.

남영동 대공분실의 정문

두꺼운 철제 철문은 내부를 외부와 완전히 격리시킨다


대공분실의 첫인상은 육중한 철문에서부터 시작된다. (국장님 표현에 따르면) 자동차가 와서 부딪쳐도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한 철문은 철문 안쪽의 세상을 바깥 세상과 완전히 분리시킨다. 밋밋한 색깔의 벽돌 담장은 사람의 키를 훌쩍 뛰어넘기 때문에 밖에서는 안쪽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지금은 철문의 왼편에 '경찰 인권센터'라는 현판이 걸려있지만, 조사실로 사용되던 당시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고 지나치거나 그저 공장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피조사자가 출입하는 건물 뒷문

피조사자는 건물 뒷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다

정문으로 출입하는 조사관이나 경찰, 관계자와는 달리 피조사자는 정문에서 우측으로 가면 나오는 뒷문을 이용한다. 건물 뒷편에는 마치 교도소 담장을 연상시키는 회색 벽돌벽이 건물을 에워싸고 있다. 벽 위쪽은 침입자를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쇠창살이 쳐져 있다. 사진 좌측에 보이는 3단짜리 계단을 올라가면 피조사자만이 출입하는 뒷문이 나온다.








철문으로 분할된 공간

공간분할의 무서움


남영동 대공분실은 당대 가장 유명했던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공간분할'이다. 하나의 방으로 만들어도 될 공간을 벽과 문으로 분할하여 여러 개의 방으로 만드는 식이다. 공간분할로 얻을 수 있는 효과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노리는 효과는 '공간감 상실', '공포감 조성' 등이라고 한다. 그것을 뒷받침해 주듯 분할된 공간에는 빛이 들어오지 않아 앞뒤를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둡다. 지금은 출입문에 비상구등이 켜져 있지만, 당시에는 그것조차 설치되어 있지 않아 한번 들어오면 출입구를 찾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뒷문에서 이어지는 이 분할된 공간들을 통과하면서 피조사자는 수차례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빛마저 차단된 공간에서 이유 모를 구타. 피조사자가 느꼈을 공포를 상상하니 끔찍했다.



밑에서 바라본 나선 계단 입구

위에서 바라본 나선 계단 중간

 
위치감을 잃게 하는 나선형 계단

수차례 폭행당한 피조사자는 이 나선형 계단을 통해 5층 조사실까지 직행한다. 한 명씩 차례로 계단을 오르기 전에 국장님은 한 가지 퀴즈를 냈다. 15초의 간격을 두고 한 명씩 계단을 오르되 조사실에 도착했을 때 몇 층인지 알아맞춰 보라는 것이었다. 곧이어 한 명씩 계단을 올랐다. 고작 두명이 어깨를 맞대로 겨우 올라갈 수 있는 넓이의 계단을 혼자서 빙글빙글 올라가니 과연 위치감을 상실할 수 밖에 없었다. 모두가 계단 끝까지 올라왔을 때, 대답은 4층, 5층, 6층으로 다양했다. 심지어 우리는 국장님의 언급으로 꽤나 주의를 기울여 계단을 올랐음에도 답이 제각각이었다. 정답은 5층이었다. 그러나 수차례 구타를 당하며 계단을 오른 피조사자들 중에서는, 이 건물이 7층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8층에서 조사를 받았다는 대답이 나오기도 한다고 국장님은 말씀하셨다.


조사실 층의 긴 복도

조명등을 밖에서 조작하는 스위치

조사실과 입구가 동일한 모양


각 조사실들의 위치와 구조는 철저하게 계산되었다

조사실은 수용소를 방불케 했다. 긴 복도를 따라서 좌우로 똑같이 생긴 철문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심지어 조사실 복도로 들어오는 입구도 조사실 문과 동일하게 설계되어 위치를 기억하고 있는 조사관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문을 통해 빠져나갈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비상구등'이 달려 있지만, 당시에는 불빛이 없어서 운 좋게 조사실을 빠져나와도 복도를 벗어날 길이 없었다고 한다.

각 조사실 문 옆에는 조사실의 전등을 조작하는 스위치가 달려있다. 피조사자는 밖에서 불을 꺼주면 잠 들고, 불을 켜주면 일어나는 등 '빛의 자유'와 더불어 '시간 감각'을 상실하게 된다.

복도 양 옆에 지그재그로 배치된 조사실들은 문이 열리는 방향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배치해 놓았다. 이렇게 해 놓으면 설사 두 문이 동시에 열리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각 방에 있는 피조사자들은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이렇듯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건축가의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다.


고 박종철 열사가 고문받던 조사실

고 박종철 열사가 취조받던 탁자


간접적, 문화적 폭력으로 피조사자를 굴복시킨다

여러 조사실 중 한 곳의 문을 여니 네 평 남짓의 작은 공간에 침대와 욕조, 화장실, 그리고 취조를 받던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눈에 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 박종철 열사의 흑백 사진이 지난 날의 아픔을 잊지 말아 달라는 듯, 방 한가운데 놓여 엄숙함을 더하고 있었다.

일견 악날했던 대공 수사관들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평범한 모습의 방이라고 생각한 순간, 보통의 방들과는 다른 몇 가지 차이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선, 방에 화장실과 세면대가 있었지만 칸막이가 비정상적으로 낮았다. 동시에 문쪽 천정 가장자리에 장치된 CCTV들이 눈에 들어왔다. 즉, 피조사자가 배변을 보거나 샤워를 하는 모습을 감시자가 전부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런 장치들은 피조사자에게 비인격적인 모멸감을 느끼게 하여 피조사자의 내면 세계부터 무너뜨린다. 국장님 말씀에 따르면, 실제로 피조사자들은 처음 며칠간 배변을 참아보지만 결국 별 수 없이 카메라 앞에서 용변을 보게 되고, 그것에 익숙해지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조사자가 옆에 있어도 자연스럽게 용변을 볼 정도로 익숙해졌을 즈음, 자신을 괴롭히는 조사관 앞에서 벌거벗고 일을 보고 있는 자신을 불현듯 발견하고, 결국 굴복하고 만다고 한다.

방의 벽면은 금속 성질의 흡읍판으로 되어 있다. 고문에 의한 비명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는 장치이다. 또한 천정의 현광등에는 쇠그물이 쳐있어 피조사자가 자살하지 못하도록 해 놓았다. 마찬가지 이유로 책상과 침대, 의자 등은 전부 바닥에 나사로 박혀 있다. 방에는 시계도 없고, 좁고 길다랗게 뚫린 창으로는 머리하나 지나가질 못한다. 따라서 피조사자는 지금이 몇 시인지, 몇 일인지조차 알 수가 없고, 앞서 설명한 나선형 계단을 걸어왔기 때문에 자신이 어디에 있는 건물 몇 층에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시간적, 공간적 감각을 박탈함으로써 피조사자의 정신세계를 굴복시키는 것이다.

국장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 발상의 잔인함에 치를 떨다가 문득 하나의 궁금증이 생겨났다. CCTV며 수세식 변기, 욕조, 침대 등이 지금은 흔한 물건들이지만 이 건물이 지어질 당시에는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이런 최신식 설비가 가능했을까하는 궁금증이다. 그 정도로 정부가 이 사업(?)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방증이 된다.


박종철기념관 내부 전경

박종철기념관

조사실 복도를 빠져나가자 피조사자들이 생활하는 공간과 전혀 다른 새로운 공간이 펼쳐진다. 문은 금속 재질에서 나무 재질로, 창문은 머리하나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가늘고 긴 모양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직사각형 모양으로, 공간은 널찍하게 바뀐다. 이곳은 조사관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다. 문 하나를 두고 비인간적 공간과 인간의 공간이 나누어지는 점에서 다시 한번 '공간분할'의 무서움을 느꼈다. 한 층 내려가니 '박종철기념관'이 눈에 들어온다. 널찍한 공간에 근대 민주화와 관련된 사진, 신문 등과 고 박종철 열사의 생전 모습, 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다. 고작 스물을 갓 넘은 평범한 대학생이 영문도 모른 채 고문을 받았을 것을 생각하니 코 끝이 찡했다.




정문에서 바라본 건물 외관

피조사자를 철저하게 압박하려는 건물 구조

견학이 끝나고 정문을 빠져나오니 건물 외관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한 눈에 봐도 몇 층이 조사실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5층은 다른 층들과는 구별된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위로 갈수록 부피가 커지는 '가분수' 형태로 되어있다. 이런 건물 구조는 피조사자를 압박하고 위축시키는 기작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견학을 마치고 대공분실을 빠져나오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인간이 어쩜 이렇게 치밀하고 잔인할 수 있을까'라는 점이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시설이 인간이 전혀 견딜 수 없을 만큼 낙후되었다든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고문기구가 있었다든가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정신을 굴복시키기 위해 그 많은 기제들을 설계하고 그것들에 시간을 투자했다는 그 '사고(思考)' 자체가 소름끼쳤다. 역사는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다. 쓰라린 과거로 회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건강한 시민의식을 함양할 수 있는 이번과 같은 교육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씁쓸하면서도 가슴은 새로운 배움으로 든든했다.


인권을 배우자

그리고 행복해지자 - 2nd Day

2008/07/15~07/17
2009 인권연대 인턴 윤광훈
둘째날
전날 다들 몇시에 잔 건지... 다들 초췌한 얼굴에, 슬리퍼를 끌고 식당에 들어선다. 큰 접시에 먹을 만큼의 양을 덜고 자그마한 식탁에서 함께 먹는 아침밥은 소박하고 정겨웠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강의할 때가 되자, 식사 시간의 초췌함은 찾아볼 수 없고, 질서 정연하게 준비된 상태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물론,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ㅡ.ㅡ) 강의실 벽면에는 전날 작성했던 자기소개들이 붙어있었는데, 하나하나 읽고 나니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노동하는 인간, 인간적인 노동 - 하종강
둘째날의 첫 강의는 학생들로부터 많은 호평을 받았던 하종강 선생님이 해 주었다. 하종강 선생님은 파워포인트를 이용해 사진, 동영상, 음악 등 모든 시청강 자료를 동원했기 때문에 내용이 풍성하고 강의는 지루할 틈이 없었다. 강의는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는데, 노인, 장애인, 여성에 대한 권리는 모두 인정하면서도 노동자의 권리 주장에는 적개심을 표시하는 한국의 비정상적인 노동 문제 의식을 지적하였다. 일례로 OECD에 속하는 많은 나라에서는 초등학교 때문에 노동 조합을 구성하고 사측과 협의하는 방법을 가르치는데 한국에서는 사법연수원에서조차 근로기준법을 처음보는 학생들이 대다수일 정도로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이 적다고 피력했다.

특히 강의를 마치면서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줄타는 사람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부채는 어느 쪽 손에 들어야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셨다. 답은 '몸이 기울어지는 반대쪽'이다. 자신의 강의가 한쪽에 치우쳐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었는데, 부채를 가운데 들고 있으면 줄에서 떨어져버리지 않느냐'고 말했다. 전날 이지상 선생님이 말했던 '낙엽은 낮은 곳으로 떨어진다'라는 말과 함께 그 의미를 계속 곱씹었다.

법치주의와 인권 - 장경욱
점심 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서 활동하시는 장경욱 변호사님의 강의가 이어졌다. 장경욱 변호사님은 촛불집회로 인해 체포, 구금된 사람들을 위해 활동하신 이력으로도 유명하다. 생생한 현장 경험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어 다들 기대하는 눈치였다.

장경욱 변호사님은 '법치주의란 무엇인지'에 대해 학생들과 토론하는 형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토론식 수업이 생소했지만, 다수의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수업은 원활히 진행되었다.

질문 시간에는 요즘 뜨거운 감자인 '쌍용차 파업 사태'를 비롯해 '촛불집회'와 같은 집회 시위에 관한 질문이 많았고, 장경욱 변호사님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생동감있는 답변으로 응수하였다.
인간다움을 고민한다 - 이찬수
이찬수 교수님은 '강남대 파면사건'으로도 유명하신 분이다. 신문 기사를 통해서만 접했는데, 직접 뵈니 힘든 일을 겪으시고도 항상 입가에 옅은 웃음을 띠고 있을 정도로 긍정적인 분이었다.

강의의 주된 내용은 인권의 뿌리를 종교에서 찾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기독교, 불교 등 다양한 종교를 공부하고 연구하셔서 그런지 여러 종교에 공통적으로 내재된 뿌리에서부터 인권의 개념을 끄집어내는 과정이 신기했다.

이어진 질문시간에는 역시 종교를 가진 학생들의 질문이 줄을 이었는데, 무늬만 천주교인 나로서는 잘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래도 인권의 뿌리를 종교에서 찾는 시도는 참신하다고 생각했다.
인권은 실천이다 - 오창익
드디어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님의 강연차례가 돌아왔다. 인턴을 하면서 국장님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몇 번인가 있었는데, 국장님은 매번 문답식으로 활기있는 강의를 이끌었다. 이번 강의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첫 질문은 '인권이란 무엇인가?'였다. 마치 '사랑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처럼 선뜻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동어반복적인 답만이 머리 주위를 빙빙 돌고있는 사이 정답이 밝혀졌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권리'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질문이 꼬리를 물어 이어졌다. '그럼 사람은 무엇인가요?', '권리란 무엇인가요?', '사람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가요?' 대답이 목구멍에서 턱 막혀 쉽게 터져나오지 않았다. 평소 간단하다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개념임에도 표현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다는 사실에 놀랐다.

학생들과 대화하듯이 진행된 강의는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긴 후에야 마무리되었다.
모듬활동 발표
'언제 저렇게 연습할 시간이 있었지?' 발표를 제일 먼저 마친 나는 느긋히 다른 친구들의 작품(?)을 구경할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빡빡한 강의 일정에 어젯밤의 뒷풀이까지 생각하면 연습할 시간이 전혀 없었을 것 같았지만, 다섯 조 모두 서로 겹치지 않는 형식과 내용의 공연을 선보였다. 율동, 연극, 패러디, 가사를 바꿔 부르기 등 공연 하나하나가 무게가 있었다. '역시 한국사람은 쪼면 다 해내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상품은 책이었다. 잘 한 조부터 원하는 책을 집을 수 있었다. 3번째로 호명된 나는 남아있는 책 중에 가장 두꺼운 책을 골랐다. 내용을 살필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성급히 골랐지만, 가격이 제일 많이 나가는 것 같아 흐뭇했다.
광란의 밤
공연의 부담감을 떨쳐내고 후련한 마음으로 모두 식당에 모였다. 오마이스쿨 측에서 준비해 주신 동태찌게와 제육볶음이 한 상 그득하게 차려졌다. 처음에는 약간 어색했던 술자리는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존댓말은 반말로 차분하던 분위기는 왁자지껄하게 바뀌었다. 나느 새벽 5시에 참을 수 없어 방으로 들어갔지만 몇몇 친구들은 밤을 새기도, 근처의 바다를 보러 가기도 했다고 들었다. 젊음이 부럽다 ㅡ_ㅡ;



인권을 배우자

그리고 행복해지자 - 1st day

2009/07/15~07/17
2009 인권연대 인턴 윤광훈
출발
출근 시간에 맞춰 사무실에 도착했더니 아침부터 부산하다. 학생들에게 나누어 줄 자료집이며, 수첩, 수료증에 더하여 회원들에게 매월 보내드리는 소식지가 책상위에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공교롭게도 소식지 작업과 대학생 인권학교 행사가 겹쳐서 광화문으로 떠나는 11시 반까지 소식지를 접어야했다.
 
약속 시간인 1시가 되기 2분 전인데 도착한 학생은 열 명 남짓. 마음이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했다. 곧 출발인데 왜 안 오지? 그래도 다행히 1시 반에는 출발할 수 있었다.
오리엔테이션
숙소인 오마이스쿨에 도착했을 때, 학생들이 눈에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폐교를 리모델링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운동장에 우거진 잡풀과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건물 외관은 담력시험 장소로는 적합했지만, 강의를 듣고 2박3일은 보내기에는 부족해보였다. 그러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수많은 걱정들은 눈녹듯이 사라졌다.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깔끔한 벽지와 마루바닥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강의실도 강의에 필요한 물품은 모두 구비되어 있어 부족함이 없었다.

강의 전의 간략한 오리엔테이션은 35명이나 되는 학생들의 자기소개로 시작되었다. 이공계 학과로만 이루어진 학교를 졸업한 나로서는 이토록 다양한 전공과 다양한 배경을 갖춘 사람들이 '인권'이라는 단어 하나를 위해 모였다는 것이 여간 신기하지 않았다. 이 날을 위해 제작한 기념 머그컵, 자료집, 국장님 책 등을 나누어 주고, 벽에 붙일 자기소개서를 작성해 달라고 당부한 후, 바로 강의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고 있나? - 홍세화
홍세화 선생님은 역시 강의를 많이 다니시는 분답게 강의가 깔끔했다. '나는 내 의식의 주체인가?'라는 질문으로 강의를 시작하신 선생님은 현대인들이 가지는 '의식의 비주체성'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내 삶의 나침반'인 의식이 타자에 의해 지배되지 않도록 1. 책 2. 강연 3. 체험 등을 통해 지식을 얻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반면 미디어 매체와 제도 교육 외에 내가 얻은 지식의 출처를 생각해보니 전체의 10퍼센트에도 못 미치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이어서 20이 80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10이 90을 지배하는 사회로 변화하는 세태에 대해 학생들과 함께 고민했고, 현재 제도교육의 문제점에 대한 짧은 문답이 오갔다.
우리는 사람이 사는 마을로 간다 - 이지상
저녁을 먹고 다시 강의실로 모였다. 기타와 하모니카 등이 준비되는 것을 보며, 모두들 이색적인 강의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푼 표정이었다. 기대에 보답하듯 이지상 교수님은 '무지개'라는 노래로 강의를 시작하셨다. 중저음의 걸걸한 목소리가 노래와 잘 어우러졌다.

강의 전반은 소위 '인권 감수성'을 고무시키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교수님은 '희망/집착', '과정/결과', '나눔/독점', '공동체적/개인적'을 대비시키면서 결과 중심의 현대 사회를 비판했다. 그런 사회에서는 개인의 '가능성'이 부곽되지 못하고 인간은 결과를 기준으로 서열화된다. 따라서 경쟁이 심화되고 공동체적 가치가 퇴색된다고 말씀하셨다.

인상깊었던 대목은 시인 안도현이 쓴 '가을엽서'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었다. '사랑은 낮은 곳에 있다.' '낙엽이 지는 이유, 낙엽의 자기 희생, 힘없는 사람은 우리를 다치게 하지 않는다'는 말이 가슴에 머무는 동안 교수님은 직접 작사, 작곡한 '폐지 줍는 노인'을 불러주셨다.

강의의 후반부는 '국가가 민중을 길들이는 방법'을 중심으로 설명하면서 사회를 보는 안목을 기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폭력을 직접적 폭력, 구조적 폭력, 문화적 폭력으로 나누고, 특히 문화적 폭력에 대해 일제 시대에 실재했던 사례를 바탕으로 생동감있게 전달해 주셨다. VOS의 '혈서지원'은 충격적이었다.
첫째날을 마치며
취침 전, 조별로 수박을 먹으며 둘째날에 계획된 역할극에 대해 이야기했다.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은 모두 마찬가지였나보다. 조별 모임 후, 10시부터 간단한 뒤풀이를 계획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학생들이 모여 짐짓 놀랐다. 맥주와 과자 몇 봉지가 전부인 조촐한 술자리였지만, 꽤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가 멈추지 않았다. '인권'이라는 공통된 관심으로 모인 사람들. 즐거운 시간이 계속되었다. 
2nd Day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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