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황미선 위원)

황미선/ 인권연대 운영위원

 7월 12일...... 그 날이 다가온다.  

 3년이 지났어도 근본적으로 달라진 게 없다. 오히려 그 시험을 봐야하는 아이들은 몸에 밴 오랜 습관처럼 문제풀이로써 대비하고 있다. 이 시험을 시행한 자들은 학력성취도평가라고 명명하나 일제고사로 더욱 알려진 그것....  그것이 바로 다가오는 7월 12일, 문제 많다는 일제고사의 형태로 치러진다. 일제고사의 문제점은 교직단체뿐만 아니라, 학부모들에게 시험에 대한 선택권을 주었다는 이유로 해직된 교사들에 의해 주목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교과부와 해직교사 사이에 진행된 법적 다툼에서 해직교사가 승소함으로써 교과부의 판단착오와 과도한 직권 남용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교과부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일제고사의 근본적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해결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문제점을 인식하면서도 그 문제점을 그대로 안고 있는 시험을 시행한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문제를 더욱 심화시킨다고도 볼 수 있다. 초등학교 6학년의 경우 국어, 영어, 수학은 전집(모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전체 조사로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듬)의 형태로 보고, 사회와 과학은 표집(모집단의 특성을 잘 반영할 수 있는 표본을 추출하는 방법으로, 확률적으로 모집단을 대신할 수 있는 일부의 대상을 선발하여 조사하는 것)의 형태로 본다고 한다. 

 교육을 행한 자가 교육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 가를 알아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전집으로 이루어질 경우 나타나는 문제, 예를 들어 시험결과에 따른 전국 소재 학교의 서열화, 그에 따른 지역, 학생, 학부모 교사들의 서열화, 그리고 그에 따른 사교육 시장의 부정적 활성화 등의 문제점을 고려하여야하는 것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교과부는 표집으로 보면 사라질 여러 가지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 경쟁으로만 치닫는 교육이 우리 청소년들의 자살률을 세계 1위로 만든다든가 인성교육이 우선이어야 한다는 등의 이유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일제고사는 교과부가 주장하는 효과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다양하고 창의적인 사고를 중시하는 교육의 내용면에서 볼 때 일제고사의 획일적 시험내용은 학생들의 학력 신장도 가져올 수 없고.... 지역마다 다른 스펙트럼을 가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여 치른 시험의 결과를 가지고 학교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도 공정하지 않다. 그렇다면 교과부가 이런 지침을 내려보낸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일제고사 실시 후 발생할 문제점들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교육단체가 비판하고 있는 사교육의 활성화를 위해서 인가? 아니면 그냥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무리들(?)에 대한 교과부의 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가? 만약 교과부가 이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고 있다면 이는 교과부가 매우 심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3월 8일 대전 중구 태평동 유평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교과학습 진단평가 시험을 보고 있는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일제고사의 문제점을 알면서 교과부에서 지침을 내렸으니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따르는 것이 옳은 일인가? 교사들에게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자기주도적으로 학습하는 아이로 교육하라면서 교사들이 소신을 가지고 자기 생각을 가지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 교과부의 태도는 올바른 것인가? 아이들이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사람으로 자라도록 교육하라면서 교사들은 수동적이고 기계적인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20년이 넘는 교직경력에서 올해 네 번째로 6학년 담임을 새로 개교한 혁신학교에서 맡게 되었다. 3월부터 몇 개월 지나지 않았지만, 초등학교에서 6년의 교육을 받아온 아이들은 행복한 학교생활을 꿈꿀 수 있다는 것을 반신반의하며 즐거운 표정으로 등교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요즈음 아이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어온다. 시험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냐고... 계속 문제풀이를 해야 하냐고.... 그러나 나는 아이들에게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없다. 아이들을 중심에 두라며 우리 교육의 중심에는 아이들이 없다.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사유의 물꼬를 어떻게 틀 것인가?(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세상을 살다보면 가끔씩 헷갈리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상급식’을 둘러싼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가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른가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이에 속한다. 최근 ‘반값 대학 등록금’에 관한 논의에서도 이 문제가 중요한 사안인 것처럼 대두되고 있다. 예컨대 7월 3일 일요일 아침 KBS의 토론에 나온 어떤 인사가 “대학 등록금을 아예 전체적으로 반으로 낮추는 것은 등록금을 충분히 낼 수 있는 부자의 자녀들에게도 혜택을 주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했다. 이 주장을 한 그 인물은 분명 보수 진영에 속한 인물이었다.

 나는 이 주장을 듣는 순간 묘한 상념에 빠졌다. 갑자기 이 주장이 “동일한 혜택을 받더라도 수혜자들의 재정적인 능력에 따라 그 수혜에 다른 비용을 달리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 그 순간 바로 이어서, “부모의 재산과 소득을 철저히 조사해서 그 정도에 따라 대학 등록금을 각자 아예 다르게 내도록 해야 한다.”라는 주장으로 바뀌어 들렸기 때문이다.

 이는 빈부의 격차가 개인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의거해서 생겨나는 것이라는 인식을 암암리에 깔고 있고, 따라서 빈부의 격차를 사회구조적인 차원 즉 정치적인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른바 선별 복지를 제시한 그 보수 논객의 주장이야말로 진보 진영의 정치가나 논객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주장으로 탈바꿈된다. 다만, 그 함의를 잘 따져 그 속에 담겨 있는 ‘갸륵한’ 뜻을 더욱 심도 깊게 변환해야 할 것이다.

 사회구조적인 연관을 염두에 둘 때, 부와 가난이 결코 각자의 능력이나 성실성에 의거해 결정되어 나타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은 상식이다. 제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하루에 잠을 네 시간 이상 자지 않을 정도로 성실한 자라 할지라도, 그가 사회역사적으로 구축된 제도와 장치를 비롯해 그동안 축적된 사회 전체적인 역량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부를 쌓을 수 있을 것인가. 그 사회적인 제도와 장치에는 가난하게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충분히 허용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부와 가난이 결정되는 변수들 중 대부분은 사회구조적인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300만 명의 대학생들 중에는 거금의 대학 등록금을 아예 ‘껌 값’ 정도로 생각하는 부모를 가진 학생으로부터 말 그대로 등록금을 내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한 부모를 가진 학생에 이르기까지 그 빈부 격차의 스펙트럼은 다양할 것이다. 그런데도 마치 슈퍼에 가서 다 같은 값을 주고 탄산음료를 사먹듯이, 똑같은 등록금을 내고 대학을 다니는 것이다.(물론 가난한 학생들에게 일정하게 장학금을 준다는 것을 완전히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사립대학이 80-90% 이상을 상회하는 가운데 대학교육이 완전히 상품으로 인식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대학에서의 교육은 일종의 상품이다. 상품의 가격이 소비자의 뜻과 맞지 않으면 사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동일한 상품은 동일한 가격에 구매해야 옳다.”라는 현실을 반영한 주장이 예사로 제기되기도 한다. 대학교육을 상품이라고 할 때, 정확하게 말하면 그 상품은 교육내용이 아니라 대학졸업장이 되고 만다. 대학교육을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처럼 보게 되면, 언젠가 부가가치세를 매겨 마땅하다는 험악한 주장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난 6월 10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조건없는 반값등록금 실현을 위한 국민촛불대회'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그런데 고맙게도 보수 진영의 논객이 사회구조적인 측면을 충분히 감안해서 부의 정도에 따라 등록금을 차등 납부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 그의 주장을 좀 더 밀고 나가면, 사회 전체적으로 통용되는 온갖 재화와 서비스에 대해 빈부의 격차에 따라 대금 지불을 차등으로 해야 한다는 엄청난 주장으로 연결된다. 십 분 양보해서 전체 교육에 한정해서 보더라도 그 보수 논객의 주장은 모든 학교 교육(폭을 확대하면 심지어 사교육과 사회적인 평생교육을 다 포함할 수도 있을 것이다.)에 있어서 빈부의 격차에 따라 등록금을 차등 납부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를 한 단계만 더 밀고 나가면, 만약 그렇다면 도대체 학부모가 아닌 국민들이 거의 없을 것이니까, 아예 등록금을 없애고 ‘상당한 차등 비율의 누진세 제도에 입각한 교육 특별세’를 신설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야말로 진보 진영에서 염원해 마지않는 보편 복지로의 길이 아닌가.

 아니, 그렇다면 선별 복지와 보편 복지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인가? 없다. 사실 조금만 달리 생각해서 사회 전체적인 비용을 중심으로 해서 보면, 어차피 전체 국민들이 교육비 전체를 담당해 온 것 아닌가. 물론 이를 모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결국 문제는 누가 왜 무슨 이유로 어느 정도로 그 교육비를 담당해야 하는가이다. 교육받는 사람들이 교육비를 내고 얼마나 많은 이득을 얻는가를 개인별로 일일이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러나 사회구조적인 구도를 바탕으로 포괄적으로 계산할 수는 있다. 결국 교육에 의해 부유한 자들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이득을 얻은 것이고, 가난한 자들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손해를 본 것이다. 그 불균형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점에서 있어서는 선별 복지건 보편 복지건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이다.  

 한 가지만 더 생각하고 말을 맺고자 한다. 국방과 교육을 비교해 보자는 것이다. 국방비를 아예 국가에서 총책임지고 지불하듯이, 교육도 그렇게 하면 안 되는가 하는 것이다. 교육이야말로 모든 국민들의 삶의 질을 방어해 내는 ‘실질적인 국방’이라 할 수 있다. 튼튼한 국방이 필요한 것은 바로 교육에 의한 실질적인 국방의 내용을 안정되게 유지하자는 데 있는 것이다. 교육이 목적이라면, 국방은 수단이다.

 국방을 어느 특정한 개인이나 기업 등의 이익을 위해 활용한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그렇게 활용하기 위해 국방의 내실을 상품화해서 완전히 시장 논리에 편입시켜야 한다고 하면, 아예 매국노로 찍혀 입을 여는 순간 매장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국방의 목적인 교육은 왜 상품이라고 함부로 떠들고 실제로 교육을 상품화하여 매점매석을 일삼으려 하고 어떻게 하면 시장 논리에 편입시킬 수 있을까를 노심초사 안달하는 것이 용납되는가. 물론 그렇다고 국가가 나서서 대학을 비롯한 많은 교육기관들에 재정 지원을 한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서울대학교마저 법인화하여 상품 중심의 교육으로 치달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다든지, 부도덕하기 이를 데 없는 자들로 판명이 난 인물들이 대학의 운영권을 갖도록 한다든지, 편의를 명목으로 대학 내에 온갖 상점들을 끌어들여 대학 환경을 시장화 하는 쪽으로 치닫는다든지 하는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한 것은 관련 책임자들이 교육을 얼마나 시장 논리에 입각해서 활용하고자 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른바 ‘반값 대학 등록금’이라고 하는 현안이 그 속에 얼마나 강력한 폭발력을 지니고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교육의 본질과 정체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서 완전히 잘못 가고 있는 교육 체제 자체를 뒤집어엎을 수 있는 폭발력을 지닌 것이다. 보수 진영조차 알게 모르게 이미 그 강력한 자장에 깊게 발을 들여놓고 있다. 특히 진보 진영에서는 물러서지 말고 이참에 이 현안을 활용하여 대다수의 시민들에게 교육을 통한 진정한 삶이 어떤 것인가를 확연하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책 입안자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모두 사유의 물꼬를 전연 창조적인 방향으로 틀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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