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연대가 매월 네 번째 수요일 저녁에 여는 <수요대화모임>의 6월 손님은 김영완 중국 인민대학 법학원 교수입니다. 김영완 교수는 한국, 중국, 일본에서 활발한 연구와 학술활동을 하였고, 지금은 중국 인민대학교 법학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중국에 어떤 인권문제가 있는지, 중국 내 인권 문제를 풀기 위한 근거와 열쇠는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중국 헌법을 근거로 중국 공민의 인권에 대해 살펴보고, 중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 봅니다. 특히 종교와 소수 민족 문제 등 중국의 인권 현안을 중국 헌법의 관점에서 살펴봄으로써 중국의 인권문제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인권연대가 매월 네 번째 수요일 저녁에 여는 <수요대화모임>의 5월 손님은 하승창 희망과 대안 상임운영위원이고, 주제는 “6월 지방 선거와 시민 사회”입니다. 하 위원장은 시민활동가로서 ‘희망과 대안’이라는 이름 아래 대안적 정치 메시지를 전하는 활동을 해오고 계십니다.

 이번 지방 선거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지방의 선진화와 더 나아가 국가의 발전을 이끌 수 있는 중차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거를 통해 시민사회가 어떻게 연대하고 역할을 해야 할지 서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이야기 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백 년 전 사람들 - 1910년대와 3.1 운동

권보드래/ 동국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3.1운동은 일제 식민지 시절, 조선에게는 일종의 ‘알리바이’와 같은 사건이다. 만약 3.1운동이 없었다면, 임시정부 자체가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항일 투쟁이 있었다지만, 간헐적이고 소규모적이었다. 우리가 식민지 시절,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3.1운동이었다. 전체 인구 10% 이상이 거리로 뛰어나왔다. 7천5백 명 이상이 죽임을 당하는 위급한 상황인데도 그랬다.

 하지만 3.1운동 이전의 10년은 너무나 조용했다. 그 이전에 쫓겨 가고 도망간 사람들이 많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탓이지만, 그래도 너무 조용했다.  


일제강점과 함께 찾아온 뒤숭숭한 소문들

 1910년, 지금부터 정확히 100년 전 시작된 일제강점은 풍문과 함께 시작되었다 할 만큼 뒤숭숭했다. 대중들은 최소한의 정보조차 접하기 어려웠다. 언론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뿐이었다. 일제강점이 시작되고, 당장 정치체제가 바뀌는 낯선 경험을 하고 있었지만, 언론을 통한 공론화도 불가능했고, 지도자가 나서 설명해줄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적 호소력과 설득력있게 등장한 것이 루머였다. 루머는 그저 입소문을 넘어 현실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소문은 대중들에게 믿음직하게 받아들여졌고, 여기에 상상력이 보태져 소문은 훨씬 더 생생하고, 가공할만한 것으로 변모하였다. 정보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제주 같은 지역에서는 특히 파괴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능지처참(陵遲處斬). 곧 사람의 피부를 벗겨내는 고문 끝에 죽게 하는 기계가 일본에서 도입된다는 소문도 있었다.

 일본인이 상륙하면 소, 말 등 가축을 모조리 죽이는 것은 물론, 사람까지 피부를 벗겨내며 죽일 것이란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고, 소문의 공포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 지배가 본격화하면서 조선의 일상은 평온해졌다. 폭력적이거나 야만적이지 않았다. 일본 때문에 큰 일이 날 거란 소문은 끝도 없이 이어졌지만, 큰일이란 것도 소수에게만 해당하는 재산 문제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여성들은 모두 일본사람과 결혼시킨다든지, 조선여성이 모두 불임하게 되고, 남성들은 모두 거세될 것이란 등의 소문들도 떠돈다.

 1910년대의 조선은 일제의 안정적 장악 속에 들어가고 만다. <매일신보>를 통해서 본 조선의 일상은 더욱 그렇다. 일제는 복(福), 복락(福樂)이란 말 대신 행복(幸福)이란 말을 의식적으로 자주 쓰기 시작했다. 근대 이전엔 존재하지 않던 말이다. 조선 사람도 이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노력하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해 일제는 치밀한 노력을 전개했다.

 좀 답답할 수는 있지만, 조용히 살면서 개인적으로 경제생활을 열심히 해 나가면 언제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기사가 넘쳐났다. 한두 푼씩 모아서 살림살이를 장만했다는 기사들이었다. 일제는 ‘조용히 살아야 한다’고 강요했고, 실제로 조선의 일상은 지극히 평온하기만 했다. 일확천금의 꿈마저도 통제되었다. 1910년대 후반 금은과 중석 등 광물 가격이 오르고 외국인의 매수 열풍까지 가세, 광산 개발 및 투자 열기가 뜨거웠고 들뜬 소문이 많았지만, 이 같은 꿈은 <매일신보> 지면에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조용한 그리고 작은 개인적인 꿈만이 용납되었다. 근본적으로는 패배감을 안고 살아야 했던 시기였다.

 1910년대 일제는 조선 사람들에게 쾌락을 요구했고, 강요하기도 했다. 1910년대에는 다양한 여가 문화가 활성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매일신보>는 주목할 만한 역할을 하였다.


행복하게 살자, 그러나 조용히

 <매일신보>는 대대적인 지면 캠페인을 전개했다. 승경지(勝景地)를 소개하고, 여가의 담론을 조직하고 쾌락의 필요를 강요했다. 신문사가 직접 나서 굵직굵직한 문화행사를 주관했고, 대중을 문화적 주체로 구성해 나갔다. 왕이 살던 경복궁에서 열린 공진회(共進會)는 당시 인구의 10% 정도인 120만 명이 다녀가기도 했다. 자기 주머니를 털어 차비와 입장료를 부담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다. 일제는 쾌락을 조직했고, 대중은 충실히 쾌락을 쫓았다. 해서 1910년대는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평온하기만 했다.


공포스러운 헌병 통치는 계속되고

 대중들은 쾌락에 동원되고, 또 추구하기도 했지만, 1910년대는 일제의 폭력적 통제에 전방위적으로 노출된 시대이기도 했다.

 양민이 부랑자 단속 대상이 되기도 하였고, 합법적으로 기생 연주회를 여는 한편, 참가자들을 잡아가는 이해하기 힘든 단속을 하기도 했다.

 민중들이 견디기 힘든 것은 헌병의 즉결 처분권이었다. 지금의 <경범죄처벌법>처럼 시시콜콜한 일로 사람들을 처벌했다. 그 처벌은 엄했다. <매일신보>에 ‘태형과 벌금’이라는 코너가 마련될 정도로 헌병의 일상적 폭력은 정도 이상이었다. 남성이 웃통을 벗었다고 태형을 당하기도 했고, 청소를 제대로 했는지 아궁이를 검사하기도 했다. 검은 옷을 입고 거리를 순찰하는 헌병은 공포와 폭력의 원천이었다.

 식민지였기에 ‘질서유지’는 더욱 과격한 제도 폭력에 의존했다. 일제는 1912년 묘지규칙을 공포하여, 개인이나 가족 단위의 분묘를 금지하고, 지역별로 공동묘지를 만들었다. 선산(先山) 관습이 뿌리 깊었던 조선인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횡포였다.


먹고 살기는 너무 힘들어지고

 제1차 세계대전은 한동안 ‘구주(歐洲) 대전’이라 불렸다. 말 그대로 유럽 국가들 사이의 유럽지역을 무대로 한 전쟁이었지만, 그럼에도 세계는 이 전쟁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귀족계급이 최종적으로 부정되고, 국가 간의 경계가 완강해졌으며, 미국과 소련이라는 새로운 강대국이 부상하게 되었다.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일본은 전쟁 특수를 누렸지만, 공업 생산기반을 갖추지 못한 식민지 조선은 전쟁으로 인해 커다란 피해를 강요받아야 했다. 유럽과 일본에서 수입되던 공산품 가격은 폭등했다. 강점 직후 물가 인상으로 휘청거리다 1913-4년 경 겨우 안정을 찾아가던 조선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1910년 일제 강점 이후 3년 동안 쌀값은 지속적으로 올랐고, 물가는 2배 이상 뛰었다. 주택시세도 급등하여 사글세 사는 사람이 늘어났다. 독감이 유행하여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고, 1917-8년에는 쌀값 폭등으로 인한 노동쟁의도 늘어났다.


드디어 3.1 운동

 3.1 운동은 서울에서 처음으로 학생들에 의해서 일어났다.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서 모일 예정이던 33인은 거사 누설로 인한 소요를 염려해 태화관에 모였다. 공원에는 이미 소문을 쫓아 온 학생들로 넘쳐났다. 갑자기 경신학교 학생 한명이 독립선언문을 읽었고, 이게 3.1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학생들의 만세는 “조선은 독립되어야 한다”가 아니라, “조선은 (이미) 독립되었다”였다.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고, 일제는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 3.1운동의 첫날 곳곳에서 물리적 충돌은 있었으나 최소한 총격은 없었다.

 3월 5일 학생들이 재집결하고, 이에 대해 일본 군인들이 무력진압을 했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사망자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고종 장례를 보러 서울에 왔다가 만세운동을 목격한 지역 주민들이 귀향하면서부터 불거졌다. 3월 중순에서 4월 중순까지 지역에서는 매우 격렬한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거족적인 운동이었고, 희생자도 적지 않았다.

 3.1운동은 무력투쟁도 아니었고, 의식적인 민주항쟁도 아니었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사람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것을 목격했으며 앞으로 상태는 더 나빠질 것이라는 막연한 걱정들이 모여 공원에서의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필연의 흐름을 이끌어 낸 것이 바로 3.1운동이 지닌 독특한 지형이었다.

(요약 : 홍수진 간사)

* 권보드래 교수의 강연록은 인권연대 홈페이지 상단 메뉴의 <인권연대 교육센터>의 ‘수요대화모임’ 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학교교육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고칠 것인가?

곽노현/ 방송대 법학과 교수


 학교가 20:80으로 재편되었다. 학교뿐만 아니라 교실 속의 학생들도 그렇다. 민사고, 자사고부터, 외국어고, 과학고, 그 밑에는 자율형사립고, 공립고, 일반 인문계, 실업계, 서울과 지역 등 고등학교마저 완벽한 서열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학교와 학생들이 완벽하게 한 줄 세우기 무한경쟁 때문에 서열로 나눠졌고, 다수인 80%가 20%의 들러리로 전락해버렸다.

 학생들은 자유, 존중, 참여를 배우기는커녕, 온 몸으로 차별과 배제, 그리고 체벌을 배울 뿐이다. 학교체제는 학생들도 사람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유보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그저 잘못된 서열구조를 계속 유지하고 순응하도록 하는 무기력한 학생들만을 양산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오늘’을 돌려주어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의 꿈을 돌려주어야 한다. 아이들을 주눅들게 하고, 다수를 패배자로 만들고, 주체성을 말살하는 교육은 없어져야 한다. 차별과 배제, 그리고 체벌에 깃들여진 학생들, 그리고 무의미한 경쟁에서 패배한 학생들에게는 훨씬 더 많은 지원을 해야 한다. 넘어지고 다친 학생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넘어진 학생들, 조금 느린 학생들, 장애가 있거나 부모의 소득이 낮거나 다른 불편함이 있는 학생들이 모두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게 바로 공교육이고, 연대이다.

 지금은 공공성에 기초한 공교육이 무너진 상황이고, 우리 사회를 유지시켜주는 연대성의 원리도 해체된 상황이다. 그래서 시민들이 너나없이 교육문제 전문가가 될 정도로 교육이 엉망이 되었다.

 국영수 중심의 한 줄 세우기 교육은 그저 폭력일 뿐이고, 교육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교육을 바꾸려면, 교육문제를 고치려면, 지금의 ‘한 줄 점수 경쟁’을 ‘백 줄, 천 줄 재량 발현’ 교육으로 바꿔야 한다.  

 지금 체제에서는 공교육보다 사교육이 더 활성화될 수밖에 없다. 한국은 여전히 저복지국가에 머물고 있다. 사회보장이 별로 안되고, 사회는 불안하기만 하다. 개인의 미래 역시 불안하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 신분을 유지하거나 보다 많은 소득을 얻기 위해서는 교육경쟁을 통해 더 높은 점수를 받고, 더 높은 점수를 받아야 갈 수 있는 학교에 진학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의 체제에서는 그저 암기 위주로 일방적 주입식 강의를 하며, 점수를 끌어 올리는 방식의 교육같지 않은 교육만이 요구될 뿐이다. 교육자로서의 전문성이나, 원리에 대한 이해, 자기주도형 학습은 필요없게 된다. 당연히 입시만을 염두에 두고, 소수의 학생들 가르치는, 사교육이 더 강점을 보이고 있다. 지금의 교교와 대학의 서열구조와 대학입시체계를 전면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교육문제는 더 악화되기만 할 것이다.

 전면적인 교육개혁이 당장 진행되지 않더라도, 초중등 학교 차원에서도 공교육을 정상화시키고, 학생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꾸준히 시도되어야 한다.

 먼저 정규수업과 평가방식을 바꿔야 한다. 가히 ‘교육혁명’이라 불릴만한 대대적인 개혁이 진행되어야 한다. 암기를 넘어 그룹식, 협동식, 문제해결식 수업이 진행되어야 한다. 한 줄 세우기만 강요하는 일제고사는 당장 없어져야 한다.

 학생들에게 최대한 자유를 보장하고, 학생들의 인권이 존중되어야 한다.

 학교 문을 열어 지역사회와 함께 배움이 일어나고, 배움을 실천하는 공간으로 바꿔야 한다. 교육활동 전반에서 무상급식을 비롯한 보편적 복지가 실천되어야 한다.

 교장은 학부모와 교사가 선출할 수 있어야 한다. 내부형 또는 개방형 교장 선출방식으로 바꿔야 한다. 교육재정이 확충되어야 하는 것도 물론이다. 한국의 교육은 조금씩 고쳐봐야 효과도 나지 않을 정도로 중병을 앓고 있다. 진짜 변화를 원한다면, 제대로 고치려면 혁명이 필요하다.

 학생들을 포기하지 않는 책임 교육, 누구도 낙오하지 않는, 낙오할 까닭도 없는 맞춤형 교실, 한 줄이 아니라, 천 줄, 만 줄을 설 수 있는 교육, 수직서열화가 아니라, 수평다양화가 실현되는 교육으로의 혁명이 아니고서는 그 무엇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우상숭배·유일신 잘못 해석, 예수의 ‘보편적 사랑’ 놓쳐

한국은 아시아 국가들 중 기독교도 비율이 높은 편에 속한다. 2005년 인구총조사에서 전체 인구 가운데 약 30%가 개신교(18%)나 가톨릭(11%) 교도로 조사돼 있다. 기독교를 한국보다 일찍 도입한 일본에서 같은 시기 기독교 인구 비율이 0.8%(개신교 0.45% + 가톨릭 0.35%)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의 높은 기독교 인구는 연구대상임에 분명하다.



리영희 프리즘>의 필자로 지난 3일 밤 서울 마포의 아트앤스터디에서 열린 연속강연에 나온 이찬수 목사(종교문화연구원 원장·사진)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인들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후에 분단을 겪으면서 전통적인 것에는 더 이상 기대지 못하고 새로운 것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 새로운 것은 대체로 서양, 특히 미국 문명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종교인 기독교를 믿으면 미국처럼 부강해질 거라고 생각했지요.”

이 목사는 한국 기독교의 비극이 여기서 싹텄다고 했다.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미국의 보수적 근본주의 신앙이었다는 것이다. 불상 앞에서 허리 굽혀 절을 했다는 이유로 강남대 교수 재임용에 탈락한 뒤 복직투쟁과 종교대화 운동을 벌여온 이 목사는 일찍이 한국 기독교의 본질을 꿰뚫은 이로 리영희 선생을 꼽았다.

리영희는 스스로 종교인이 아니라고 했고, 때로 종교 혐오적인 발언도 했다. 이 목사는 “리영희가 비판한 종교의 90% 이상은 기독교였다”고 했다. 그는 리영희의 기독교 비판은 본말이 전도된 제도 종교에 대한 것이었지 종교성 자체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리영희의 사회비평서인 <스핑크스의 코>(2006)에 종교 관련 발언이 나온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부처의 자비의 가르침과 예수의 사랑의 계율을 정신생활의 지침으로 여기고 살아간다. … 일요일에 예배당이나 성당에 가서 신부나 목사의 설교를 듣는다든가 성경책과 찬송가책을 옆구리에 눈에 드러나게 끼고 다니면서 ‘예수 믿으시오!’를 외치는 식의 ‘종교’라면 그런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 나는 다만 나의 삶에서 성경을 읽고 불경을 읽으면서 석가모니와 예수의 삶을 따르고 싶어할 뿐이다.”(48쪽)

이 목사는 여기서 ‘무신론적이지만 가장 유신론적인’ 리영희 종교관을 읽는다. 이 목사가 리영희를 원용해 비판하는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폐해는 우상숭배와 유일신에 대한 오해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문자주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허리 굽혀 불상에 절 하는 것이 우상숭배가 아니라, 욕망과 마음을 굽히고 돈에 허리를 굽히는 행위가 사실상 우상숭배라는 사실에는 눈을 감습니다. 또한 유일신이라는 말은 ‘하느님이 모든 것 안에 계시다(無所不在)’라는 뜻인데, 그저 숫자 ‘하나’라고만 여깁니다. 이것은 초등학생 수준의 종교 이해입니다.”

유일신과 관련, 이 목사는 리영희의 군 시절 당시 회고를 인용했다. “최전방에서 축복기도를 하는데 결국 북쪽을 저주하는 식으로 기도하더랍니다. 신은 없는 데가 없는 보편적 존재인데 인간의 욕망 때문에 전쟁을 벌여놓고는 신의 이름으로 국군만 축복하고, 북쪽 사람들은 저주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겁니다. 리영희의 이 말은 종교학자들이 해온 신학 연구의 정곡을 찌른 겁니다.”

문장과 강연으로 독재에 대항해 험난한 길을 걸으면서도 예수나 붓다의 마음도 동시에 살아 내려고 했던 지식인. 교도의 수는 많지만 종교가 진정한 역할을 해내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한국 사회에서 리영희는 성찰을 촉구하는 존재이다.

[ 출처 : 경향신문 ]

<4기 대학생 인권학교 후기> 인권에 대한 화두를 던지다

인권에 대한 화두를 던지다
-제4기 대학생 인권학교에 다녀와서

임아연/ 4기 대학생 인권학교 참가 학생


 "저는 인권에 그렇게 큰 관심은 없었지만…", "전 인권과 관련된 학과는 아닌데…"

 지난 2월 3일(수) 강화도 '오마이스쿨'에 모인 마흔 명 남짓한 청춘들의 데면데면한 첫 인사였다. 그 중에 몇몇은 나름대로 사회운동을 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곧 대학에 입학할 예비 10학번부터, 아직 교복을 벗지 않은 고등학생도 있었다. 또 언제 대학을 졸업했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선배님(?)들까지 '대학생 인권학교'라기엔 꽤나 폭넓은 연령대가 함께 했다. 그렇다한들 아무렴 어떤가? 모두가 '인권을 배우고 행복해지자'는데.

 그러나 일정은 녹록치 않았다. 2박 3일 동안 무려 7개의 강의를 듣는 건 꽤나 많은 인내심과 집중력과 열정을 필요로 했다. 아침 9시부터 밤 10시, 혹은 그 이상까지 강의는 계속됐는데 놀랍게도 누구도 짜증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수업종료 5분 전부터 술렁이기 시작하는 기존의 학교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더구나 "자신의 관심 밖 영역은 거들떠도 안 본다"고 흔히 불리는 20대의 모습이라기엔 다들 너무나 진지했다. 그만큼 강의 내용은 우리 주변의 이야기, 혹은 나의 이야기였고 '인권' 역시 우리와는 동떨어진 저 먼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화장실 옆 칸에서 '푸드득'하고 소리가 나는데도 맨 끝 칸 구석에서 김치 씹는 소리마저 내지 못하고 점심을 먹어야 하는 대학의 청소용역직원은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평범한 우리의 어머니다. 이제는 너무나 진부해서 마음이 무뎌져버린 여성 인권, 또 너무나 특별해서 '별나게'만 느껴지는 동성애자 인권 모두 우리가 관심 갖고 보듬어야할,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역시, '아는 것은 힘'이다. 캠프를 마친 다음 날, 사촌동생과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동생이 한 도너츠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담을 말했다.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법한 제법 큰 그 도너츠 회사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매일 밥으로 달디 단 도너츠와 커피를 줬다고 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한국 사람이 밥 때에 밥을 먹어야 하는데 도너츠를 준다고? 그것도 매일매일? 동생이 1년을 그곳에서 일했으니 1년 내내 그렇게 도너츠를 밥 대신 먹은 것이었다(나중엔 결국 밥을 따로 사먹었지만). 사실 그 이전에도 피자집에서 밥으로 피자를 주고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 준다는 얘길 많이 들어는 봤는데 조금 놀랄 뿐이었다. 그런데 인권학교에 참여한 이후, 평소에 사소하게 생각했던 그 일이 얼마나 사람의 기본적인 권리를 침해하는 일인지 알고 분노할 수 있게 됐다. 대한민국 수 만 명의 알바생 중 단 몇 명이라도 "동물에게 사료 주듯 하지 말고 밥을 먹게 해달라"고 요구했다면 과연 바뀌지 않았을까 씁쓸하기도 하고. 이렇게 우리에겐 더 많은 앎이 필요하고 더 널리 알게 하는 게 절실한 것 같다.

 때때로 사람들은 "인권'이 밥 먹여주냐?"고 묻는데, '밥을 먹는 것' 자체가 인권을 지키는 일이라는 사실은 모르나보다. 사실 개발독재 아래서 주거권, 재산권 같은 건 발아래 두고 오로지 경제 성장만 외쳐온 분들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개인주의가 이기주의로 치환되고,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덕목으로 삼는 것을 무비판적으로 주입 당해온 우리는 이젠 불편한 진실들을 마주해야 한다. 때론 너무나 혼란스럽고 어려운 일일지언정 계속해서 나의 생각을 흔들어 자극하는 일이야말로 보다 건강하고 발전된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어가는, 결국엔 나의 삶의 질이 더 향상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인권학교는 우리에게 해답을 안겨줬다기보다 화두를 던진 게 아닌가 싶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고 했다. 우리는 어떤 생각으로 살아야 하는지 치열하게 고민해봐야겠다.


<2010년 겨울 교사인권강좌 후기> 인권과 교육의 아름다운 동행

김희윤/ 인권연대 인턴활동가

 100년만의 폭설로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은 새해, 그 매서운 바람을 헤치고 좀 더 나은 2010년을 바라는 교사들이 모였다. 1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간 남영동 인권기념관(前 대공분실)에서 ‘인권과 교육’이라는 주제로 이루어진 교사인권연수에서는 ‘인권’을 실천하기 위한 의욕으로 넘치는 교사들과 역량 있는 강사들과의 만남을 통해 배우고, 그 배움을 실천하자는 열기로 뜨거웠다.  

 첫 강의는 성공회대 사회과학부에 재직 중인 조효제 교수의 강의로 시작되었다. 조 교수는 강의에 앞서 수강생들에게 간단한 소개와 함께 강의를 수강하게 된 동기에 대해 물었다. ‘학생들이 지켜줘야 할 인권보다 때려줘야 할 살덩이로 보여서...’,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상태에서 에너지를 얻기 위해...’라고 답하여 대부분의 교사들은 이번 강의에서 재충전에 대한 기대를 나타내었다. 한분씩 소개를 마친 후 강의가 시작되었다. 조 교수는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어떤 정치현실에 처해있나.’, ‘인권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교사도 인간인데 나의 인권은 어떻게 지켜야하나.’ 라는 세 가지 질문을 던져 한국사회에 팽배해 있는 물신주의와 공공정치의 부재 등의 현실을 겉감과 안감이라는 비유로 쉽게 설명해주었다. 

 두 번째로 고병권 수유+너머 연구원의 강의가 이어졌다. 고 연구원은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을 던지며 일반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는 스스로 판단 이전에 선 판단이 되어있기 때문에 ‘생각 한다’의 정의에 어긋난다고 하였다. 여기서 선 판단의 의미는 습관화된 정신작용, 습성, 습속 등 여러 가지 단어로 대체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하기 위해’서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을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첫날의 강의는 마무리 되었고, 지원자에 한해 남영동 대공분실 견학이 이루어졌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의 안내로 대공분실의 분절되어있는 구조와 박종철 열사가 고문 받았던 장소를 보며 왜 대공분실이 ‘인간을 파괴하는 건축물’인지 소름이 끼치도록 느낄 수 있었다.  

 연수 두 번째 날의 첫 강의는 한양대 문화인류학과에 재직 중인 이희수 교수가 진행하였다. 국내 최고의 중동문화 전문가답게 이번 강의에서도 역시 중동문화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던 편견을 깨주었다. 찬란한 문명과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한류에 열광하고 있는 이슬람을 악의 온상이고 테러지원국이며 잠재적 테러 분자로 여기고 있었던, 우리의 매체에 의해 걸러진 시각에 대해 비판하고 세계를 보는 눈과 교육에 대해 역설하였다. 특히 교사들에게 이슬람의 문화나 역사를 잘못 기술하고 있는 교과서들에 대한 시정을 강조하고, 또한 13억 이상의 거대한 이슬람 공동체를 우리의 가까운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였다.  

 두 번째 강의는 현직 교사인 마산 내서여고 이필우 선생이 맡았다. 이필우 선생은 ‘학생인권교육 실천사례’라는 주제로 자신이 직접 현장에서 겪고 시도해보았던 사례를 중심으로 강의하였다. 이는 이론과 실제의 괴리감을 느끼고 있었던 현직 교사들의 고충을 어느 정도 해소해주었다. 그 방법으로는 학생 자치 기구에 많은 권리와 그에 따른 책임을 부여하는 것으로 간부수련회나 급식문제, 두발자유화 등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여 학생들의 자존감을 높이는데 기여하였고 이는 인권의식의 성장으로 발전되었다.

 세 번째 강의는 ‘인권에 대한 네 가지 의문’이라는 주제로 숙명여대 법학부의 홍성수 교수가 함께 하였다. 인권에 대한 개념이 잘 확립되어 있지 않는 교사들에게 ‘왜 나쁜 사람들(조두순 사건 등)의 인권만 옹호 하는가.’, ‘왜 소수자의 권리만을 생각 하는가.’, ‘표현의 자유와 한계는 어디까지 지켜져야 하나.’, ‘인권은 언제나 다른 가치보다 우위에 있는 절대적 가치인가.’라는 네 가지 질문에 대해 역사적이고 다양한, 또 흥미로운 판례를 제시하여 평소에 가지고 있던 인권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 

 마지막 강의는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이 ‘인권과 시민의식’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즉 한국인의 의식구조 형성 과정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은 물신에 대한 숭배, 존재배반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의식형성은 지배세력에 의해 주입된다. 한국에서의 사회화 과정은 우리에게 비판의식을 주지 않고, 깨어있는 소수 역시 제도교육이 아닌 우연적 계기에 기인한다. 이러한 비주체성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없는 정도의 생활수준에 머무르는 사람들이나, 현재는 이에 속하지 않더라도 장차 낙오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구조를 바꾸려는 의지보다 자기만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하였다. 

 3일간의 강의는 <외박>이라는 영화를 함께 보며 마무리되었다. 이 영화는 홈에버 사태 때 김미례 감독이 여성노동자들과 함께하며 직접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었다. 우리의 평범한 어머니들이 ‘생존’을 위해 시작한 외박은 많은 이들의 눈물샘을 자극하였다. 

 인권연대는 매년 여름 방학에 1회, 겨울 방학에 2회에 걸쳐 교사연수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이번 제 12기 교사 인권 연수는 40여명 선생님들의 진지하고 무게 있는 모습으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대공분실이라는 장소만큼이나 뜻 깊은 연수가 되었다. 우리나라 사교육비 부담은 세계최고 수준이며 OECD평균의 네 배라고 한다. 이번 ‘교육희망, 인권이 해답이다!’의 연수를 계기로 새해에는 인권과 아름다운 동행을 하는 교사들이 교육의 희망을 만들어 주길 바란다.



제4기 대학생 인권학교 - 인권을 배우자, 그리고 행복해지자!

강사소개

홍성수/ 숙명여대 법대 교수
런던정경대학(LSE) 박사과정에서 인권법과 법사회학을 공부하고 현재는 숙명여대 법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법사회학: M. Weber, J. Habermas, N. Luhmann의 사회학이론과 법패러다임’(공저), ‘MT 법학: 나의 미래 공부 시리즈’(공저) 등이 있다.

안수찬/ 한겨레21 기자
1997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민권사회부, 체육부, 여론매체부, 정치부, 문화부 등을 거쳐 현재 한겨레21 사회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5년에는 한겨레신문사 문화센터에서 '안수찬의 언론 아카데미' 강좌를 맡아 강의하기도 했으며, 민주언론시민연합 언론학교, 교수신문사 대학언론기자학교 등에서도 강의하고 있다.

한재훈/ 이천 도립서당 훈장
이천 도립서당 훈장으로 ‘학교’가 아닌 ‘서당’에서 자신이 15년 동안 공부한 한학과 전통사상을 가르치고 있다. 지금은 사회·경제적 취약 계층과 노숙자, 교도소 재소자, 최고경영자를 위한 인문학 강좌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좌도 확대해가고 있다.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프랑스로 망명했다가 2002년 귀국했다. 현재 한겨레신문사 기획위원, ‘학벌없는 사회’ 공동대표, 월간 ‘작은책’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공저) 등이 있다.

윤세진/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잠시 교직생활을 하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공부를 시작, 현재 활발할 연구와 저작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 ‘철학극장, 욕망하는 영화기계’(공저), ‘한국미술 100년 1권’(공저), ‘언어의 달인, 호모 로퀜스’,  ‘예술의 달인 호모 아르텍스’ 등이 있다.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
한겨레신문 객원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현재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 및 인천대 강사, 한국노동교육원 객원교수 등을 맡고 있다. 1994년 ‘항상 떨리는 처음입니다’로 제6회 전태일 문학상을 받았고 저서로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 ‘길에서 만난 사람들’,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 ‘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공저) 등이 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인권연대 사무국장으로 일하는 인권운동가.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활동을 거듭하고 있다. 수사부터 재판, 형 집행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 공부하고 사회적 발언을 하고 있으며, 다양한 인권현안에 대해서도 실천활동을 하고 있다. 성공회대 겸임교수, 광운대 외래교수. 저서로 '십중팔구 한국에만 있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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