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세상, 풍요로운 세상을 바라며(장경욱 위원)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대통령의 새해 인사는 안보와 경제로 시작되었다. 튼튼한 안보를 기반으로 경제성장에 방점을 두면서 한편으로 친서민과 공정사회의 화려한 미사여구도 덧붙였다. G20세대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청년층 일자리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의 새해 인사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미래를 낙관할 수도 없고, 조금의 위로도 얻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고 신뢰할 수 없는 대통령의 지지율만이 미친 존재감을 과시하며 대통령 자신을 혼자만의 일터로 내몰아 가고 있다. 그 뒤에서 수천만의 눈은 의심과 걱정의 눈초리를 세우고 있다. 

 새해 소원으로 우리 안에 평화가 가득하기를 빈다. 반세기를 훌쩍 넘어서까지 계속되는 벼랑 끝 전쟁의 위기를 당한 우리에게 한반도를 둘러싼 평화로운 환경은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유일무이한 간절한 바람으로 다가와 선다. 그 반면 오랜 세월 탈출구를 찾을 길 없는 전쟁의 위기 상황에 만연된 우리에게 전쟁을 불러오는 분단과 정전체제는 지극히 정상적인 평화로운 상태로 간주되는 것도 사실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탈출구는 분명 존재한다. 남과 북이 자주적 주체가 되어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평화를 선언하고 이행하면 그 뿐이다. 탈출구가 있음에도 이를 봉쇄하는 온갖 장벽들이 독버섯처럼 자라나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것이 현실의 큰 문제이다. 6.15, 10.4선언은 우리에게 그 탈출구를 제시하였다. 거기에서 우리 안에 자라난 불신과 대결의 장막을 걷을 방법도 보았고 종전과 평화의 미래도 그려보았다. 그것이 대세로 굳혀져 더는 되돌릴 수 없지 않을까 낙관해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탈출구를 부정하는 정권이 들어선 이후 정세는 금방 역전하였다. 불신과 대결의 장막이 다시 드리워졌다. 그 탈출구를 부정한 자들이 이제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불사하는 군사적 억지력 강화만이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온다고 새해 벽두부터 떠벌이고 있다. 최악의 국면이다.

 2011년 새해에도 또 다시 서해 바다에는 소위 연례적, 방어적이라는 한미합동군사훈련이 예정대로 진행될 모양이다. 이에 반발하는 북한과 중국의 대응은 신 냉전 구도를 더욱 굳힐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고 전면전쟁의 기운이 한반도를 뒤덮을지 모른다. 불안한 새해를 맞아서도 문제의 근원을 해결할 탈출구를 찾기보다는 전쟁의 위기를 목전에 두고도 이것이 더 이상 별 것이 아닌 일상으로 치부되는 우리들의 체념하는 모습이 너무나 두렵다. 

 전쟁을 강요하는 구조와 환경에 종속되어 이에 무디어지면 질수록 결국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전쟁을 불러오는 구조에 맞서 평화로운 세상을 향한 탈출구를 확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의 운명은 벼랑 끝에 선 것과 같다.

 새해에는 더할 수 없는 수준의 나눔의 복지가 우리들의 화두가 되었으면 한다. 요즘 대선주자들 사이에서 복지가 유행이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경제성장이 늘 최고의 공약으로 다루어져왔던 것에 비해 격세지감이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벌써부터 분배정책, 복지정책에 대한 경쟁이 후끈 달아올랐다.

 우리 사회에서 자살률, 이혼율, 가계부채율, 비정규직 비율, 청년실업률 등 화려한 경제성장의 이면에서 사회적 불평등의 대가로 파생된 부정적 모습이 커져만 가는 상황에서 경제성장을 기치로 하는 대선 공약은 수정이 불가피하다. 빈곤한 사회안전망과 사회적 복지서비스를 조금이라도 끌어올리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고는 서민들을 달랠 길이 없는 형국이다.

지난달 22일 청와대에서 열린 보건복지부 2011년 업무보고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G20 정상회의를 개최한다고 해서 서민의 삶이 나아질 것이 없다. G20으로 대기업의 매출과 영업실적이 늘면 늘수록 그에 반비례하여 비정규직 노동자, 사내 하청 노동자, 파견노동자들은 불안정한 고용과 저소득의 일상에서 허덕이고, 예측불허의 상황과 마주하며 고통 받고 있다.

 대기업의 성장에 기반을 둔 한국경제의 성장은 서민의 삶과 동떨어져 있다. 피라미드 같은 대기업과 중소하청기업의 구조는 노동자 서민의 삶을 옥죄고 있다. 나 홀로 부자들의 풍요로운 삶에 대비되는 사회적 불평등은 차이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함께 하는 사회, 나누어 가지는 사회가 부자 사회이다. 나 홀로 부자가 되는 경쟁사회는 더 이상은 지속되기 어렵다. 이제 양극화의 차이를 본때 있게 좁혀줄 복지정책이 나와야 한다. 무상급식 예산 편성에 대한 재정자립도 1위의 지자체장의 반발은 우리가 지지해야 할 복지사회의 수준에 다다르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 길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복지정책도 천차만별이다. 시혜적, 차별적 복지에 반대하고 보편적 복지를 추구하고 더 나눌 수 있는 풍요로운 복지정책을 실현해 나가야 한다.

 겉만 번드르르한 가짜 복지정책을 간파해 내기 위해서라도 우리들 자신의 복지사회에 대한 구체적 요구와 대안을 정립하고 이를 관철해 내야 한다. 우리가 요구하는 복지는 사회적 양극화의 원인이 되는 소득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그 정도 수준을 위한 재정계획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경제위기에서 국민의 혈세로 천문학적 공적자금을 조성하여 망해가는 대기업과 금융기관을 회생시켜 부도난 국가경제를 살려낸 경험은 사회적 양극화의 위기에 처해 이를 극복할 대안으로 등장한 풍요로운 복지사회의 실현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새해에는 우리들 스스로 생존의 위기에 처해 절망치 말고, 말로만 복지를 약속하고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이들을 정치적으로 파멸시키고 우리 스스로의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으면 한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이성의 간지를 뛰어넘는 지혜'(이재성 위원)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요즘 내가 들여다보고 있는 증권업계는 말을 곧이곧대로 하지 못하는 동네다. 주가가 내려갈 것 같을 때는 조심스럽게 “단기 조정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고, 주가가 오를 거 같을 때도 “증시의 하방 경직성을 높일 것으로 예상한다”고 꼬아서 말한다. 돈이 걸려 있는 문제라 까딱 잘못했다가는 책임을 져야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에 직접적인 표현을 삼가다보니 생긴 습성일 것이다. 영어나 한자어가 난무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텐데, 좀 있어 보이려고 일부러 현학적인 표현을 쓰는 경우도 종종 있다.

 북한과의 군사적 충돌을 증권업계에서는 ‘지정학적 리스크’라고 부른다. 에둘러 표현하려고 한 건지, 현학적으로 보이려고 하는 건지 알 수 없으나, 천안함 사건이건 연평도 피격 사건이건 모두 지정학적 리스크라고 부른다. 여기서 리스크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바로 그 리스크다. 7천만 겨레의 운명이 걸린 중차대한 문제를, ‘리스크를 테이킹’하면 한몫 건질 수 있는 수많은 리스크 중의 하나로 부르는 걸 보면, 금융시장이란 한편 냉정해 보이기도 하고, 한편 무모해 보이기도 한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건물 지하의 카지노에서 카드 게임에 열중하는 갬블러의 모습이랄까.

 그런데 왜 ‘북한 리스크’가 아니라 지정학적 리스크인지를 따져보면, 이 용어를 창안한 애널리스트가 왠지 글로벌(역시 이 동네에서 잘 쓰는 용어다)한 안목에 역사의식까지 지닌 사람일 것 같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적어도 지금 청와대와 정부에 앉아있는 당국자들보다는 그럴 거 같다는 얘기다. 북한한테 얻어맞은 건 한국인데, 왜 미국이 항공모함을 서해안에 보내는지, 중국은 왜 미국의 항공모함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북한을 싸고도는지, 일본은 왜 북한 때리기를 계속하며, 러시아는 왜 안보리 의장 성명을 채택하려 애썼는지 등의 질문을 한방에 풀어줄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지정학’이다. 기억의 저편에서 암기 교육 시절의 추억을 끌어오자면, 우리나라는 언제나 ‘지정학적 요충지’였고,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다. 우리는 쉬이 잊어버리지만 한국은 여전히 그런 나라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에 지정학적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흥적이고 편의주의적이며, 대중 영합적이고, 근시안적이다. 전략도 없고, 역사의식도 없다. 허둥지둥하며, 이랬다저랬다하고, 다음날이면 드러날 거짓말까지 한다. 허구헌 날 자존심 타령을 하면서 자존심조차 지키지 못한다. 자존심이라는 감정의 영역으로 외교를 끌고 들어가니 외교가 뜻대로 풀릴 리가 없다. 불법 조업하는 중국 어선을 애써 잡아놓고 처벌도 못하고 돌려보내 굴욕외교라는 비난을 받는 건 지당한 자업자득이다.


연평도 포 사격훈련이 지난 20일 오후 2시30분부터 1시간30분 동안 실시됐다.
사진 출처 - 사진공동취재단

 이에 반해 북한은 전략적으로 기민하게 움직인다. 연평도에서 한국을 때려놓고, 빌 리처드슨 미국 뉴멕시코 주지사를 불러들여 핵에 관한 통 큰 제안을 하는 걸 보라. 북한이 큰 그림을 갖고 다섯수를 내다보는 박보장기의 고수라면, 남한은 한수 한수에 쩔쩔매는 아마추어 수준처럼 보인다. 귀는 얇아서 훈수 두는 사람이 야유를 보내면 쉽게 마음이 흔들린다. 북한을 두둔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북한정권이야말로 한반도 통일의 최대 걸림돌이 된 지 오래니까. 북한 정권은 철저하게 자기네들의 생존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생존이 걸린 문제를 놓고 무얼 못하겠는가. 대북 문제는, 이를 테면 시한폭탄을 품에 안고 링에 오른 선수를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의 문제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상대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것 같다.

 고 리영희 선생은 90년대 초반에 이미 “남북문제는 복안(複眼)적 시각으로 봐야 한다”고 갈파한 바 있다. “최소한의 균형 잡힌 관찰과 이해를 위해서도 두 눈의 원근법적 기능으로서의 각도와 거리의 파악이 필요”한데, “하물며 많은 나라의 이해관계가 얽힌, 다시 말해서 복합적 요소로 구성되고 변화하는 국제적 문제는 양안적 기능만으로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그런데 이 정부에는 복안은커녕 양안적 시각마저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 이유를, 이 정권이 북한 문제를 국내 정치의 하위 요소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확전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가, 표(=지지율) 떨어질까봐 단호한 대응으로 얼른 말을 바꾸는 일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천안함 같은 복잡다단한 사건을 지방선거에 이용하려고 서둘러 조사를 끝내느라 더 큰 의혹을 부르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니 나라의 품격이 제대로 설 수 없고, 백년지대계가 설 수 없다.

 최근 중국이 북한의 나진항을 50년간 사용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청진항이나 단천항도 중국이 독점 개발하기로 했으며, 북한의 지하자원을 중국이 싹쓸이해 가고 있다는 소식은 진작부터 들려왔다. 동북공정프로젝트에서 이미 드러난 바지만, 중국은 북한을 실질적인 ‘동북4성’으로 만드는 오래된 꿈을 실현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 정부의 대책은?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바에 따르면, 곧 망할 거니까, 망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다. 평소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아놓고 망하면 저절로 우리 게 된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무식하면 용감해진다더니 딱 그 꼴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전쟁을 두려워하면 전쟁을 막을 수 없다고 했다.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전쟁을 각오하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정녕 전쟁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어렸을 때 나는 아버지 세대로부터 들었다. 그런데 그 아버지 세대가 지금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말한다. 뭐가 달라졌나. 우리가 그만큼 잘 살게 돼서, 경제력이 있으니까 쉽게 이길 것 같은가? 북한은 100만의 정규군을 가진 나라다. 화력의 대부분을 휴전선에 집결시키고 버튼만 누르면 남한 전역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나라다. 북한의 핵무기와 미국의 핵무기가 치킨 게임을 벌이고 있는 곳이 한반도다. 이명박 대통령은 독일의 빌리 브란트가 되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수나라 양제가 되지는 말기 바란다.(운하를 파는 건 이미 수나라 양제를 따라하고 있지만)  

 역사에 관한한, 나는 헤겔의 ‘이성의 간지’가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다. 자잘한 파도쯤은 거대한 조류에 휩쓸려 내려간다. 문제는 지금 우리가 자잘한 파도에 휩쓸려 익사하기 직전이라는 점이다. 한반도 전역이 불바다가 된 뒤에, 이성의 간지가 무슨 소용인가.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의 전 과정은 우연을 통해서 역사법칙이 굴절되는 그런 과정이다. 생물학 용어를 빌리면, 역사법칙은 우연의 자연도태를 통해서 실현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가 역사의 법칙이라고 믿는다면, 전쟁이라는 우연을 자연 도태시키기 위한 의지가 필요하다. 지혜가 필요하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아저씨(김창남 위원)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올 한 해 가장 많은 관객을 모은 영화가 <아저씨>였다고 한다. 원빈이라는 매우 잘생긴 배우가 주연으로 나오는 이 영화는 사실 우리가 갖고 있는 ‘아저씨’의 이미지와는 그리 큰 상관이 없다. <아저씨>는 그가 원빈이기 때문에 인기를 얻은 것일 테고 실제 우리 사회에서 ‘아저씨’들은 별로 인기가 없다. 언제부터인가 TV에서건 어디서건 아저씨란 호칭을 듣기 어렵게 되었다. 아줌마란 호칭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웬만큼 나이 들어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저씨, 아줌마 대신 아버지, 어머니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아버지, 어머니라 부르는 걸 더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아저씨, 아줌마란 호칭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게다.

 영국 런던 근교에 뉴몰든이라는 곳이 있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이 동네에 오래 전부터 회자되는 이야기가 있다. 한 한국 아저씨가 공원을 산책하는데 17, 8세 쯤 되어 보이는 백인 소년이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빌려 달라고 했단다. 그러자 이 아저씨 대뜸 그 친구의 멱살을 쥐고는 이렇게 소리쳤다는 거다. “How old are you? What is your father's name?" 너 몇 살 먹었어? 너희 아버지 누구야?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그 많이 듣던 소리가 영어로 직역될 때 생기는 생경함이 이 이야기가 주는 재미의 포인트다. 설마 그런 일이 진짜 있었을까도 싶지만 아무려나 이 에피소드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저씨’들에 대한 이미지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그저 나이를 따져 상대방을 누르려 하고, 다짜고짜 소리부터 지르며 권위를 내세우지만 실상 아무런 권위도, 내세울 것도 없이 초라하게 찌그러지고 있는 존재, 그게 아저씨다. 아저씨들의 동반자가 아줌마들인데 ‘아줌마’라는 기호 역시 부정적인 이미지로 채색되긴 마찬가지다. 뻔뻔스럽고 낯 두껍고 억척스럽고 목소리 크고 막무가내인, 그러면서 더 이상 여성으로서 성적 매력을 가지지 못한 존재, 그게 아줌마다.


잘생긴 배우가 주연으로 나오는 이 영화는 사실 우리가
갖고 있는 ‘아저씨’의 이미지와는 그리 큰 상관이 없다.

사진 출처 - 씨네21

 나이를 먹고 중년이 되면 아저씨, 아줌마 호칭이 붙게 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사람들이 대체로 그 호칭을 반가워하지 않는 데는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 자체가 즐겁지 않은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는 아저씨, 아줌마라는 기호가 품고 있는 그런 이미지들 때문이다. 모두가 거쳐 갈 수밖에 없는 인생의 한 단계에 대해 그런 부정적 이미지가 덧씌워 있는 건 불행한 일이지만 생각해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아저씨와 아줌마를 바라보는 시각이란 대개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에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아저씨와 아줌마는 사실 나의 부모와 같은 세대이고 그들을 보는 나의 시선은 기실 부모에 대한 나의 시선에서 나온 것이다. 그저 권위를 내세우며 큰 소리만 치는 아버지, 억척스럽게 살며 잔소리를 해대는 어머니는 우리에게 언제나 어쩔 수 없는 삶의 조건이다. 난 이 다음에 저런 아버지(혹은 어머니)는 되지 말아야지 다짐했던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닐 테다. 그러나 부모는 그런 측면 외에도 다른 관계(이를테면 가족애, 경제적 후원, 인자하고 따뜻한 또 다른 모습 등등) 역시 존재하고 무엇보다도 나를 낳아준 부모라는 점에서 쉽게 부정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부모의 부정적인 측면은 나 아닌 남의 부모들, 즉 아저씨와 아줌마들에게 전가되어 버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저씨 아줌마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사실 우리 부모의 부정적 측면이 대입되어 형성된 일종의 속죄양인 셈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토록 부모 세대를 닮고 싶어 하지 않은 자신들이 어느 틈엔가 나이를 먹어 가면서 조금씩 나도 모르게 그들을 닮아가고 있음을 깨달으면서 갖게 되는 자기 부정의 감정이다. 어, 어느 새 나도 우리 부모처럼 잔소리가 늘고 뻔뻔해 지고 꼰대처럼 되어가고 있네, 그럴 때 순간적으로 휩싸여 오는 자기 부정의 감정은 불쾌하기도 하고 한편 쓸쓸하기도 하다. 이럴 때 사람들은 애써 아저씨, 아줌마가 되어가는 자신을 그로부터 멀리 떼어놓고 싶어 한다. 우리가 아저씨, 아줌마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것은 자신은 ‘아직’ 저기까지 가지 않았다는 심리적 안전판을 가지고 싶은 욕망의 표현일 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남보다 일찍 아저씨 소리를 들은 편에 속한다. 대학 시절부터 흰 머리가 많아 실제보다 겉늙어 보였던 탓인데 당시에는 조금이라도 더 나이 들어 보이고 싶었던 시절이라 아저씨 소리에 그리 개의치 않았다. 사실 내게 조금 충격적이었던 건 ‘할아버지’ 소리였다. 둘째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 아빠와 함께 참여하는 프로그램이 있어 아이 손을 잡고 유치원에 간 적이 있다. 그 때 어느 꼬마가 우리 부자를 보더니 이러는 거였다. “어머, 내훈이는 아빠랑 안 오고 할아버지랑 왔네.” 유치원 아이의 판단 기준으로는 머리가 하얀 사람은 곧 할아버지였던 거다. 자칫하면 아저씨 단계를 건너뛰고 바로 할아버지 단계로 진입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해야 할 판이었다. 다행히 그런 경우가 많지는 않았고 나는 지금 대체로 순탄하게 아저씨 단계로 연착륙한 셈이다. 물론 나는 지금의 나의 모습에 그런대로 만족한다. 적어도 누군가가 내게 20여 년 전의 청년 시대로 돌아가겠냐고 묻는다면 그리 큰 고민 없이 ‘싫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은 그러하다. 생각해 보면 나의 청년 시대는 대체로 불안했고 불만스러웠고 가난했다. 그게 청년 시대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70, 80년대의 청년에게 그 시절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연옥이었다. 그 시대를 거쳐 지금 현재의 아저씨가 되어 버린 나 자신이 고맙고 대견스러울 정도다. 나는 불안보다는 안정을, 도전보다는 안주를 좋아하는 태생적 보수주의자가 틀림없다. 그러고 보면 아저씨, 아줌마에 대한 혐오는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에서 오는 것 아닌가 싶다. 지금의 나 자신을 정말 사랑한다면 아저씨, 아줌마가 되어 가는 것이 두려울 이유가 없지 않을까 싶다.

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일체유심조(위대영 위원)

위대영/인권연대 운영위원

 일체유심조,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뜻으로 화엄경의 핵심사상이라고 한다.  

 아내의 생일에 맞춰 전남 순천에 있는 송광사에 다녀왔다. 산에는 이미 가을 단풍도 모두 져버린 때라 쓸쓸한 풍경이지만, 송광사는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다른 사찰들과는 달리 고즈넉한 맛이 묻어나는 사찰이었다. 지난봄 전주 금산사에 찾아갔을 때, (경내에서조차) 오며가며 큰 소리로 떠들어대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던 사람들을 볼 수 없고, 천년 사찰의 벽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온통 도배질해 놓은 낙서를 볼 수도 없었다. 어느 사찰이든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던 불경 소리가 없고, 입구를 가득 매운 기념품 가게도 없었다.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3대 사찰 중 하나인 송광사는 다른 무엇보다 수도도량으로 이름이 높고 많은 수도승이 수행 중이다.

 운 좋게도 송광사에서 3년째 수행 중이신 한 스님께서 송광사의 역사와 특징, 송광사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점들을 설명해주셨고,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주셨다. 마지막에 대웅보전 오른편에 있는 삼일암(담당국사가 이곳의 물을 마시고 3일 만에 깨우침을 얻었다고 하여 붙여진 당호임)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스님은 모든 이들 마음에 부처가 있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시며 듣는 이들에게 화엄경의 핵심사상인 일체유심조를 설명해주셨다.

 이에 바로 앞서 스님은 부처님이 수행하신 모습을 벽화로 그려둔 불전 앞에서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때가 어느 때인지 벽화를 보고 맞춰보라고 하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맞추기는 했지만,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셨을 때에 해당하는 그림은 삼라만상이 그려진 풍경 위에 붓으로 커다란 원을 그려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8번째 벽화에 해당하니, 그렇다면 9번째, 10번째 벽화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도 맞춰 보라고 하셨다. 다들 우물쭈물 말을 못하고 있을 무렵, 스님은 9번째 벽화는 깨달음을 얻고 둘러본 풍경은 깨달음을 얻기 전의 풍경과 같더라는 것이고, 10번째 벽화는 깨닫지 못한 중생을 해탈의 길로 안내하기 위하여 다시 중생들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라고 설명해주셨다.

 깨달음의 단계로 한걸음만 더 내디디면 될 것인데도, 자신의 뒤에 있는 억압받는 자, 죽어가는 자, 나쁜 꿈에 시달리는 자들을 보고 이들의 구원자로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벌을 받게 된 모든 사자의 영혼을 구제할 때까지 자신의 일을 그만두지 않겠다고 하신 지장보살의 서원을 비롯해 송광사에서 보고, 듣고, 느끼며 보낸 두 시간은 매일매일 쳇바퀴 도는 일상에 청량한 한줄기 바람과 같았다.


사진 출처 - 송광사

 한낱 윤회를 거듭하는 중생의 하나인 나로서 일체유심조의 의미와 지장보살의 서원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겠다. 날이면 날마다 눈앞에 벌어지는 일들에 울고, 웃고, 슬퍼하고, 화내는 평범한 사람이 오로지 마음먹음으로 하나로 세상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오히려 버겁기만 하다. 매년 반복되는 위정자들의 국민에 대한 배신행위를 보며 마음만 돌이켜 보면 한낱 부질없는 일로, 공허한 일로 치부해 버리기는, 그리고 이것들이 마음먹기에 달린 일로 치부해버리기에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로만 여겨진다.

 깨닫기 전의 세상과 깨달은 후의 세상이 다르지 않듯이, 깨달은 자에게 있어서 깨닫기 전에 수행하며 중생을 계도하는 것과 깨달은 후 중생을 계도하는 것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후 부딪히는 인간사 모든 일이 수행하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인간사 모든 일과 다르지 않다면, 세상사 모든 일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할 때의 마음가짐에는 실천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깨닫고 깨닫지 못하는 것을 깨닫지 못한 자가 알 수 있을까? 알 수 없다면 마음가짐은 항상 실천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실천이 준비되지 않은 마음가짐은 거짓이고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도달한 깨달음은 공허하다.

 언제나 일의 시작은 마음가짐부터다. 그 마음가짐이 어떻게 연유되었는가도 중요하겠지만, 그 마음가짐이 실천을 준비하고 있는지는 더욱 중요하다. 인권연대 운영위원으로, 그리고 내가 속한 모든 공동체의 일원으로 어떤 마음가짐이었는지 반성한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무렵 이 다음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할 것인지 조용히 내면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스승을 잃고 깨닫습니다(김대원 위원)

김대원/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여름 일본학생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건너가 한국 학생들과 함께 연합캠프를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 드라마와 아이돌의 인기 등으로 가려진 양국의 역사와 현실을 보여주고 싶어 기획한 것이었습니다.

 요즘 일본인들에게 한국이라는 나라는 국내외 어느 곳 못지않게 인기있는 여행지여서 모두들 한두번은 다녀온 적이 있기 때문에 참가자 모집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신청자가 많아서 부득이 면접심사를 거쳐 참가자를 선발해야 했습니다. 한국 인기가 만만치 않다더니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면접을 통해 확인한 것, ‘겨울연가’의 영향이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신청학생 대부분 겨울연가 골수팬인 부모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고, 그 관심이 넓어져서 이들에게 이르러서는 ‘신한류’라 불릴 정도로 한국음악의 인기가 상승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저보다 한국 가수와 가요를 더 많이 알고 있더군요.

 문제는 참가취지였는데, 지금까지 아시아에는 관심이 없었고 본인이 아시아인이라는 자각도 없었지만 이번 캠프를 계기로 관심을 가져보려 한다는 학생도 있었고, 자기들은 미국을 미워하지 않는데 한국이 일본을 왜 그토록 미워하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한국에 대한 이해는 물론 자기 나라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듯 했습니다. 이 학생들은 그나마 대견한 경우였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아이돌을 통해 알게 된 한국이라는 나라의 또래 친구를 만들고 싶다는 것뿐이었습니다.

 한국 학생들 역시 크게 다를 바 없었습니다. 자기 역사에 대한 이해, 자기 현실에 대한 이해가 안타까울 정도로 부족해 보였습니다. 한일병합 100주년과 분단문제에 대한 강의가 끝난 뒤 일본학생들의 질문을 받고 난처해하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한국학생들 마저도 이번 캠프가 외국친구를 사귈 수 있는 기회로밖에 비춰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난 2009년 인권연대 창립 10주년 기념식·감사의 밤 행사에 함께한 리영희 선생님의 생전 모습.

 요즘은, 보고서 책자를 만들기 위해서 학생들의 캠프 감상문 원고를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생각 밖이었습니다. 준비된 프로그램에 잘 따라올 뿐 깊게 고민하는 것 같지 않았는데, 의외로 꽤나 큰 자극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100년이나 지난 과거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한국의 분단현실을 보고 도대체 자신의 국가가 어떤 일을 저질러 왔는지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는 학생이 많았고, 심지어 인생이 변했다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젊은이들과의 좋은 기회를 만들어 놓고도 그저 멀리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비판만 해댔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오늘 아침 버릇대로 책상에 앉자마자 메일함을 열었는데, 리영희 선생님의 타계 소식이 제일 먼저 눈에 뜨였습니다. 말씀하시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찼던 스승을 잃고서야 깨닫습니다. 젊은이들과 제대로 어울려 본 적도 없으면서 그들의 무심함을 탓하기만 했던 제 게으름과 어리석음을 말입니다. 이국에서 외국인들에게 선생이라 불리고 있는 이제야 깨닫습니다. 스승 없다 탓하면서 스스로 누군가에게 스승이 되어보려 노력한 적 없었음을 말입니다. 선생님 같을 수야 있겠습니까만, 적어도 젊은이들에게 세상을 바로 보도록, 아니 그들과 함께 바로 보려 노력하겠다 다짐해 봅니다.

김대원 위원은 성공회 신부로 일본 릿교대학교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현대자동차 파업에 관한 단상(도재형 위원)

도재형/ 인권연대 운영위원

 변호사를 그만 두고 학교에서 일한지 6년이 넘어가지만, 아직도 변호사 시절에 있었던 일들이나 그와 관련한 느낌들이 기억나곤 한다. 변호사 업무 중 힘든 것 중 하나는 사건 진행을 위해 법정에 가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변호사 초기에는 책을 읽는 등 소일거리를 찾으려 시도한 적이 있으나 집중하기 어려워 모두 포기하고, 그냥 다른 사건의 진행 과정을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내거나 사건 기록을 뒤적거리는 정도에서 만족하게 되었다. 그날 오후에도 형사법정에서 순서를 기다리며 다른 사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진행되던 사건은 어떤 지역의 조직 폭력배들이 공갈죄 등으로 기소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변명 내용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즉, 자신들과 동네 상인들은 모두 선후배이거나 친한 사이이고 자신들은 돈을 상인들로부터 강취한 적이 없고 빌린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다만 사정이 어려워 갚지는 못했다고 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결국 자신들은 경찰의 실적 위주의 잘못된 수사에 의해 범죄자로 낙인찍혔다는 취지였다. 관련 진술이 매우 진지하긴 했지만, 마음속에서 ‘과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루하루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상인들이 차용증이나 변제의 확신 없이 돈을 빌려 준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었다.  

 최근 현대자동차 하청업체 근로자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나는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곤 한다.  

 한국에는 파견근로자를 보호하는 법인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하 “파견법”)이 있다. 파견법에 따르면, 기업이 하청업체 소속의 근로자를 지휘·감독하며 사용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요건을 갖추어야 하고 2년 이상 사용할 경우에는 그 근로자를 직접 고용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제조업 등 일정 분야에서는 파견근로자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일부 제조업 기업들은 이런 법적 의무를 회피하기 위하여 일견 도급의 겉모습을 띤 계약을 하청업체와 체결한 후 이들을 사실상 파견근로자와 같은 방식으로 사용하였다.

참고) 도급 관계의 경우 일반적으로 도급인이 하청(수급)업체 근로자들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행사하지 않기 때문에 파견근로로 보지 않고 따라서 이들에게는 파견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근로자들의 사용자는 원칙적으로 하청업체이므로 도급인과 근로자들 사이에는, 단체교섭과 같은 집단적 노사관계와 관련된 문제나 특별법을 별론으로 한다면, 권리의무 관계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결국 비정규 근로자들을 사용하면서도 그 법률적 의무를 부담하지 않는 방법으로 도급 계약이 이용되었던 것이다.


 
울산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와 노동단체 관계자들이 지난 11월 30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현대차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이는 불법이지만, 정부는 이를 사실상 방치하였다. 결국 기업 입장에서는 노무비를 절약하고 노무관리 등의 부담을 더는 손쉬운 방법으로서 탈법적인 도급 방식을 유지하였다. 그 결과 지난 10년간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 규모는 확대되고 노동권은 보호받지 못했다. 

 올해 7월 대법원은 이러한 방식에 의해 근로자를 사용할 경우에도 파견법이 적용되고, 현대자동차가 하청업체 근로자들을 이렇게 2년 이상 사용한 이상 직접 고용한 것으로 간주된다고 판결하였다. 즉 파견법을 어긴 기업도 파견법의 의무를 지워야 한다고 본 것이다. 법을 어긴 사람이 법을 지킨 사람보다 이익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이치에 비추어 볼 때, 이는 당연한 결과이다. 주의해야 할 점은 이 판결이 최선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판결은 결국 불법을 저지른 기업에게 합법적인 기업과 동일한 책임을 지우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불법을 저지른 자에게는 법을 지킨 자보다 더 큰 불이익을 줄 수 있어야 함에도, 대법원 판결이 그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런데 그 이후 현대자동차의 대응이 너무 이상하였다. 대법원 판결 이후 진행된 파기환송심에서 현대자동차는 계속 자신의 책임 없음을 다투고, 관련 사건에서는 파견법이 재산권과 경영권 등을 침해하는 위헌 법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조합 활동이 활발한 하청업체와의 도급 계약을 해지함으로써(아마도 현대자동차는 노동조합 때문에 자신들이 이런 판결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청업체에 소속된 비정규 근로자들이 오히려 일자리를 잃게 되는 사태를 초래하였다. 정규직으로 고용될 것을 기대하던 근로자들이 이에 항의하자, 현대자동차의 용역들은 항의하는 근로자들을 폭행하였고, 이들이 공장에 모이자 회사는 불법 파업이라고 주장하며 손해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를 과장되게 비유하자면, 폭력배에 돈을 뺏긴 상인들이 폭력배의 사무실에 찾아가 법원 판결에 따라 돈을 달라고 요구하니깐 자신은 아무 책임이 없으니 돈을 직접 갈취한 부하에게 받으라고 하고, 오히려 주거침입을 했다면서 상인들을 때리고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것과 같다. 그리고 돈을 갈취한 행위를 처벌하는 법 규정이 자신들의 헌법상 기본권인 재산권을 침해하는 위헌 법률이라고 주장하는 격이다.  

 이러한 사태의 진행 과정을 보면서, 개인적으로는, 한국 자본주의의 경박함에 대한 지적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어떻게 이런 주장이 공공연하게 행해질 수 있는지, 이제 한국의 노사 현장에서 법률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없어진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기만 할 따름이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비정규 근로자들이나 노동조합의 요구가 지나치고 현대자동차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기업의 경쟁력 측면에서 현대자동차의 염려나 우려를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기업이란 조직도 한국의 법 제도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고, 사법에 대한 존중은 그런 기업의 의무 중 하나이다. 따라서 마땅히 현대자동차는 대법원 판결을 받아들여 그 뜻에 따라 하청업체 근로자들을 대우해야 한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관련 문제들은 또 다른 차원에서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노사 현장의 분쟁이 힘의 논리에 의해서만 해결되는 국면이 되어 버렸다.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 중 하나는 지난 7월의 대법원 판결이 불법을 저지른 기업에게 합법적인 기업과 동일한 책임을 부과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로서는 판결에 따라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보다는 일단 버티고 저항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이롭고 이를 사회가 용인해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노사 현장에서 법원의 판결마저 힘을 잃게 될 때 과연 한국 사회의 비정규직과 소수자들은 누가 보호할 수 있을지 답답하기만 하다.

 

도재형 위원은 현재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서상덕 위원)

인간에 대한 예의
- 삶을 생각하며, 운동을 생각하며

서상덕/ 인권연대 운영위원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반추하다 보면 ‘인간에 대한 예의’를 떠올리게 되는 경우가 없지 않을 것이다. 누구를 욕하거나 타박할 때나 쓰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모르는 사람”이란 말은 식자들 사이에서나 가까운 지인들 가운데서는 꽤나 파급력이 있는 말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나 또한 이 ‘인간에 대한 예의’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이 적지 않다. 대체로 이런 기억들은 이제는 뇌리 속에서도 가물가물할 정도로 옅어져버린 지난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지금은 진부하게까지 들리는 ‘학생운동’이 살아(?) 있던 시절, 많은 이들이 그랬듯 나 또한 정의와 진리를 위해 기꺼이 투신하고 당연히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나는 이 시절 지금도 유일하게 존경의 마음을 품게 만든 선배 한 명을 만났다. 당시 한창 몸담고 있던 조직도, 한껏 기대를 받고 있던 그룹의 일원도 아니었던 그 선배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두 동생의 앞길마저 책임져야 하는, 누구 못지않게 어깨가 무거운 가장의 위치에 있었다. 과외에 아르바이트에, 이른바 돈 되는 일이라면 몸 안 사리고 닥치는 대로 일을 쫓아다니던 그 선배는 시위나 집회가 있는 날이면 언제 나타났는지 늘 군중들 맨 앞에 있었다. 지금 떠올려도 참 기이한 사람이었다.

 내가 그 선배를 좋아하고 존경하게까지 된 것은 그의 정의감이나 성실함 때문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 때문이었다. 집회가 있는 날이면 그의 두세 평 남짓한 자취방은 시위꾼들의 뒤풀이 장소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 또한 그가 자처한 일이었다. 술집을 전전하며 울분을 토로하다 주머니까지 톡톡 털어낸 날이면 그는 우리를 자신의 집으로 끌었다. 한 아름에 들어오는 조그만 냉장고 속까지 다 털어내고 나면 우리는 그대로 쓰러져 얼마 후면 닥칠 내일이 오길 기다렸다.  

 한 번은 후배들과 세미나를 마치고 몇 번이나 차수를 바꿔가며 술자리를 전전한 끝에 갈 곳이 없어 다시 선배의 자취방을 찾은 적이 있었다. 문은 잠겨 있었지만 이미 알고 있던 비밀번호로 열고 들어가 또 냉장고 속을 비워내기 시작했다. 몇 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던 선배는 기어이 냉장고가 완전히 드러난 새벽녘이 다 돼서야 들어왔다. 나였다면 주인도 없는 집에 들어와 주인행세를 한 녀석들 혼꾸멍을 내줬을 법한데 선배는 오히려 방이 좁다며 미안해하며 그 추운 새벽, 자리를 피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을 먹었다. 나는 그 후로도 선배가 한 번도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시위를 나갔다 온 날이면 술자리에서 눈물짓는 그를 간간이 보았을 뿐이다.      

 이런 선배가 있었는가 하면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합의와 투표로 결정된 결과마저 없었던 일로 돌려버린 선배가 있었다. 그 일로 많은 동료들이 자신이 품어왔던 이상에, 걸어왔던 삶에 회의를 느끼고 투신해오던 장을 떠나갔다. 그 가운데는 형제 이상으로 가깝게 지내던 이들도 있었다. 또 한 번 눈물 날 일이었다.

 이제 다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하게 된다. 자신이 지켜온 가치, 자신의 삶은 고귀하며 값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그것은 값어치가 덜하거나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이들이 요즘 들어 유독 눈에 많이 띈다. 그런 이들은 대체로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비인간적이란 사실을 모른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무엇이고 그것을 어디까지 지켜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차적인 문제다. 그런 생각조차 않고 살아가는 이들이 지도층입네 하는 이들 가운데 적지 않다는 것이 우리 시대가 앓고 있는 병이다. 나아가 스스로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자평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인간에 대한 예의’는 친한 사이일 때나 지켜야 되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서글픈 일이다.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 가까운 이웃이, 이상을 함께 나눠왔던 동료가, 사랑하는 이들이 자기로 인해 상처를 입고 함께 나눠온 가치에서 멀어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다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상대가 인간이기에,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니고 있기에 꼭 필요한 것이고 소중한 것이다.

 나눔, 진보, 발전, 생명, 믿음, 희망, 사랑…. 훌륭한 가치를 지닌 이 모든 것들 가운데 인간에 대한 예의가 들어 있지 않다면, 그래서 그토록 갈구하던 인간의 존엄성에 발길질을 해댄다면 세월이 흐른 후 자신의 삶 또한 허무해지리란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지금 나는 깨닫고 있다.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받고 싶은 대로 먼저 해주려 했던 선배의 마음, 그 마음과 실천을 닮아가는 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를 회복하는 길임을, 그래서 참다운 운동성을 되살려나가는 길임을….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 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학교의 생명력을 잃게 하는 인사 (황미선 위원)

황미선/ 인권연대 운영위원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다. 이는 인사가 공정하고 원칙적으로 이루어져야만 그 조직이 시행하려는 모든 일에 대하여 조직원들의 신뢰가 쌓이고 원칙이 바로 서게 된다는 말일 것이다. 서울시 교육청 소속의 교사들 또한 매년 이맘때 전격적인 인사가 이루어진다. 중등도 그렇지만 초등의 경우, 현재 진행되는 인사제도에 심각한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는데, 이 문제들이 학교의 민주적 운영을 저해하고 있고 인사와 관련해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간의 각종 비리를 양산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공립학교 교사들은 일반적으로 정기 전보와 비정기 전보라는 형태로 근무지를 옮긴다. 정기 전보는 근무하던 학교에서 만 5년을 근무하면 학교를 옮겨 근무지를 바꾸는 형태이고 비정기 전보는 교사의 개인적 사정에 따라 만 1년이 지나면 근무지를 옮기도록 신청할 수 있는 제도이다. 이와는 별도로 초빙, 전입요청, 전보유예라는 제도가 있어 교장의 판단과 희망하는 교사의 요청으로 이루어지는 인사 제도가 있다.  

 우선 초빙교사제도는 학교장이 각 학교에 필요한 유능한 우수교사를 확보하기 위하여 교사를 초빙하는 제도로 학교운영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시행된다. 표면적으로 나타난 도입 취지는 공교육 정상화와 학원자율화를 꾀하여 학교간 경쟁을 유도한다는 것이었고 1996년 6월 교육공무원법에 의거하여 신설, 1996년 9월부터 초빙교장제와 함께 실시되기 시작한 제도이다. 두 번째로 전입요청제도는 정기 전보 대상자 중 해당 학교장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분야의 자격증 소지자 또는 지도·연수·연구 실적이 객관적으로 입증되는 교사나 체육특기자, 상담, 특수학급담당교사 등을 학교로 전입 요청하는 제도이다. 이 또한 전보 대상자의 30% 이내에서 요청이 가능하며, 30%를 초과하더라도 학교당 최소 2인까지는 가능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전보유예제도는 정기 전보 대상자 중 근무하던 학교에 더 근무하고 싶은 교사들이 전보를 미루는 제도로 객관적으로 유예를 인정할만한 사유가 있어야하고 학교장과의 논의를 통한 후 학교 인사자문위원회의 회의를 거쳐 대상자를 결정하는 제도이다.  

 문제는 학교장이 이 제도들을 활용하여 교사 정원의 30%(자율학교는 50%까지 교사를 초빙할 수 있음)까지 확보할 수 있어, 일반 교사들의 수에 비하여 너무 높은 비율로 인사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실제로 본인이 근무하는 강동·송파지역 학교의 경우 10년을 근무하면 거주지 밖으로 반드시 나가야하는 원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2010년 총 442명의 전보대상 교사 중 36%인 158명이 이 방법으로 강동·송파지역에 계속 근무하게 되어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 지역에 근무하기를 희망하는 교사들이 결과적으로 근무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지난 8월 서울시 교육청에서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의 강연을
굳은 표정으로 듣고 있는 서울지역 고등학교 교장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또한 학교장이 모집 교사수를 정하므로 전횡을 일삼을 우려가 있고, 실제로 학교현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근무하는 교사들을 학교의 중간 관리나 학교의 중요 직책을 맡겨 학교장의 정책이나 운영방침을 일선 교사들에게 주입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게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학교 운영과 관련해 교사들의 의견을 수렴한다든지 정책에 대한 문제제기 등은 그 내용이 사장되거나 동료교사들로부터 오히려 비판을 받을 소지가 다분하다. 결국 열정적이고 능동적인 교사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 일에 대하여 의견을 내고 적극적으로 책임을 지려하기보다는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편하게 되고 책임을 회피하는 분위가 팽배하게 된다. 창의적이고 자기 주도적 학습을 강조하는 현 교육 방침에서 이런 식의 비민주적 학교운영은 많은 교사들을 좌절하게 만들고 교육에 대한 희망의 빛을 사라지게 만든다.   

 또한 학교운영위원회나 인사자문위원회가 학교장의 휘하에 들어가 있는 수많은 학교의 경우 이러한 제도는 도입 취지를 유실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교사 개인적으로 원하는 학교로 전출가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심지어 원하는 학교로 전보되기 위해서 강남권은 400만원, 비강남권은 200만원이라는 공공연한 소문도 회자되고 있는 상황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수 있는 문제점은 검증되지 않은 실력 없는 교사가 초빙되기도 하고 교사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업무를 들어서 전입 요청을 하거나 실제와는 다른 업무를 보는 사례, 또 구체적이지 않은 불분명한 이유를 들어 요청을 하는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어 정기전보를 하는 수많은 교사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주고 학교 내에서 위화감을 조성하고 있다. 

 실제로 올해 2월 12일 서울시교육청(교육감권한대행 김경회)에서 발표한 공립 중등교사에 대한 3월 정기전보 결과를 보면 2010년 인사의 가장 큰 특징으로 전입요청·유예·초빙교사가 크게 늘었다는 점이다. 이를 구체적 수치로 살펴보면 전입요청 교사는 전년도 422명에서 560명으로, 전보유예 교사는 794명에서 838명으로 늘었다. 특히 초빙교사는 93명에서 566명으로 크게 늘어 눈길을 끌었다. 이에 따라 전체 전보교사 가운데 전입요청·유예·초빙교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전년도 34.0%(1,309명)에서 50.0%(1,964명)로 늘어났다고 하였다.

 이제는 인사에 대한 권한을 가진 사람들에게 줄서지 않고 정상적으로 인사 이동하는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경로로 이동하는 사람들로 인식되기까지 한다니 이 제도에 대한 진지한 검토가 진보 교육감시대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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