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 인권연대 2011년 겨울 인턴

 2010년 12월, 컴퓨터를 하다가 우연히 인권연대 인턴 모집 공고를 보았다. 고민이 시작되었다. CGPA나 총 이수학점 모두 여유롭지 않아서 계절 학기를 신청해놓았기 때문이다. 항상 이성이 감성을 압도하고, 모험은 하지 않는 성격임에도 이번에는 수강취소를 하러 학사지원팀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선택을 했다. 

 인권변호사가 되고 싶었지만 학교에서 살고, 학교에서 공부하고, 학교 주변에서 놀았기 때문에 보고 배울 사람이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또한 곧 사학년이라고 말하고 다녀야 할 텐데 그 타이틀에 걸맞은 의식수준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이대로 밀고 나갈 수만은 없었다. 크게 이 두 가지가 인권연대 인턴을 지원한 동기였다.

 운이 좋게도 인턴으로 뽑혔다. 많이 부족한 나를 면접에서 보시고는 “얘는 좀 가르쳐야겠다”는 의무감이 드셨던 것 같다. 초반에 인권연대의 분위기를 조금 익히고 나니, 내가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7주 후의 성과가 크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꼭 얻어갈 것을 몇 개 머릿속에 그렸다. 대략 커뮤니케이션 능력, 사회를 보는 눈, 인권을 생각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다.

 과연 매일같이 인권연대와 연을 맺고 있는 인사들을 만났고, 국장님과 그 분들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가 점점 많이, 점점 깊게 보이기 시작했다. 또 그런 자리들이 모두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기를 수 있는 장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6주(7주 중에 설 연휴 1주 제외) 라는 짧은 시간에도 평생 하지 못할 많은 체험을 했다.

 아무래도 가장 규모가 큰 체험은 ‘청송교도소’ 탐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교도소 안에 들어가는 것은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일인데, 교도소 중에서도 교도소라 할 수 있는 그 유명한 청송교도소를 가 보게 되었다. 형법교수님들도 쉽게 못 간다는 그곳에 가서 독거방까지 보고 나니, 교정 시설에 대한 관심이 우리사회에 부족함을 느꼈고, 왜 오창익 국장님께서 교정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시는 가를 알 수 있었다. 

 평화인문학 프로그램을 통해서 청송 외에 영등포 교도소에도 가 보았다. 사실 교도관에 대한 편견도 있었고, 많은 재소자들과 같이 수업을 듣는다 하니 긴장도 되었었다. 그런데 막상 하루 종일 그분들과 한 공간에 모여 있다 보니, “내가 이상한 영화들 때문에 잘못된 인식을 많이 가지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재소자들도, 교도관들도 모두 나와 같은 사람임을 느꼈다.  

 어제 학교 게시판에서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회가 열린다는 알림 글을 봤다. 재학생들은 수강료가 3만원이었는데, 세 분의 강사 중에 두 분이 내가 인턴 활동을 하면서 수업을 들었던 분들이었다. 그 때는 다른 대학생들이나 학교선생님들의 수업에 무임승차해서 같이 강의 듣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 강사님들의 수업을 따로 들으려면 한 사람당 만원이라는 거액의 수업료를 내고 찾아 가야한다는 것을 직접 보고나니, 그동안 인턴활동의 일부로 15, 16기 교사연수와 대학생 인권학교까지 들을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큰 복이었는가를 실감했다. 학교에서는 거의 들을 수 없었던 가치 있는 강의들을 실컷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준 인권연대에 감사드린다.  


대학생 인권학교 강의를 경청하고 있는 11기 인턴 활동가들
김효인, 정희진, 양길모, 남두희(앞에서부터)

 그 외에도 홍대 청소노동자 기자회견 취재, 한겨레신문사 견학, 민가협 목요집회 참석, 프리버마캠페인 등 셀 수 없이 많은 경험들을 했다. 이제는 학년만 올라간다는 생각도 덜 들고, 우리 사회에 대해 관심이 부족하고 무지했던 점에 대한 죄책감도 조금 줄어든 기분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육체적 피로에 굴해서 그 날 그날의 경험을 확장, 흡수 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지나친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스피치도 잘하고 싶어서 국장님께서 알려주신 방법을 토대로 조금씩 시도는 했지만,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여유가 부족해서 연습할 수 있는 기회들을 충분히 활용 못한 것이 후회된다. 하지만 분명 지금의 나는 7주전의 나와는 비교할 수가 없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우리들에게 더 좋은 배움의 기회를 줄 수 있을까 고민하시고, 인턴들이 마음이 흐트러져서 주는 것을 다 받아가지 못할까 하는 걱정에 괜히 쓴소리를 해주시느라 힘드셨을 국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리고 그 많은 사무실 업무를 두 분이서 맡아 하시느라 바쁘셨을 텐데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지도해주신 간사님들께도 감사드린다. 일주일에 절반정도는 우리를 보내고도 남아서 늦게까지 일을 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먼저 오셔서 반겨주시는 간사님을 보면 피곤함을 잊곤 했었다.  

 역동적이었던 인턴기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비록 7주라는 길지 않은 기간 동안의 일탈이었지만, 잔잔한 나의 일상으로 돌아가더라도 나의 심장은 7주 동안의 그 빨랐던 박동을 잊지 않을 것이다.


인턴 과정을 마치며

임아연/ 인권연대 2010년 여름 인턴

 “면접 보러 오라”는 전화에 엄마랑 떡볶이를 먹다가 소리를 질렀더랬다. 하이힐을 신고 출근을 했다가 하루 종일 돌아다닌 통에 발에 물집이 잡혔더랬다. 퉁퉁 부은 발을 주무르며 또 언제, 어느 곳에 가서 누구를 만날지 마냥 설레던 첫 날 이었다. 하지만 처음이라는 그 기분 좋은 떨림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던 것 같다. 매일 아침이 피곤했고 주말이 자꾸 기다려졌다. 지원서를 다시 읽었다. 그게 마지막 출근 날이었다.

 사람들은 “왜 인권연대 인턴을 지원했느냐”고 물었다. 상투적이긴 하지만 나는 정말로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10만 명을 먹여 살리는 한 명의 천재’보단 조금씩 사회를 움직여 가는 ‘10만 명’을 만나고 싶었다. 나는 사회가 굴러가는 것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궁금했다. 인권연대에서 일하는 동안 다행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얘기 나눌 많은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니 용기를 내서 그들에게 가깝게 다가가지 못한 게 아쉽기만 하다. 또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절실한 이들에게 항상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든 적도 많다. “마음으로나마 함께 할 게요”라는 가벼운 약속만 뱉어내는 모습에 자괴감이 들었다. 특히 대사관 앞 땡볕에서 버마의 민주화를 외치던 이들에게 그랬고, 성미산을 재벌 대학로부터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그랬다. 나의 역할을 고민했다. 내 자리는 어디일까 생각했다.

 평생 ‘글 밥’을 먹고 싶다 생각했는데 내 행색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배움엔 게을렀고 경험도 없었다. 모진 소릴 견뎌 낼 만큼 마음이 단단하지도 못했다. 인턴을 하는 동안 그걸 깨닫고는 많이 위축돼 속상하기도 했다.


여름 방학동안 함께 한 인턴 활동가들(김민아, 오명원, 임아연, 한빛나)과 사무국 식구들

 마지막 날 오창익 국장님이 말했다. “꿈을 기자나 대학원 가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갖지 말라”고, “그렇게 안 되면 실패한 인간이 되어버릴 테니, 겨우 그 정도 꿈을 꾸면서 너희 자신을 하찮게 여기지 말라”고 했다. 집으로 내려가는 길에 그 말을 곱씹었다. 불현듯 고병헌 성공회대 교수님이 “존재만으로 힘이 되고 위안이 되는 사람이 있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기차 안에서 왈칵 눈물을 쏟았다.

 생각해보면 인권연대에서 인턴을 하며 만난 많은 사람들은 그 존재 자체가 힘이 되는 이들이었다. 목소리 없는 자들의 소릴 대신 말하는 변호사들이 그랬고 사회 어두운 구석을 들춰내 빛을 쬐게 하는 기자들이 그랬다. 또 알아주는 이 없어도 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힘쓰는 활동가들이 그랬다. 이 밖에도 자신의 자리에서 서로 연대하는 많은 ‘벗’들이 함께 있었다.

 흰 바탕에 까만 커서가 껌뻑이는 모습을 두고 한참을 생각했다. 7주간의 인턴 생활을 종이 한 장에 채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짧은 시간동안 워낙 많은 일을 겪고,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니, 각각의 현장에서 느낀 생각들이 뒤엉켜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다만 확실한 건 우리의 존재가, 그리고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힘과 위안을 줄 수 있을 거란 믿음이다. 이것이 ‘사람’을 만나고 돌아 온 길이 기쁜 이유다.


자취삼천지교(自炊三遷之敎) (김인아)

김인아/ 객원 칼럼니스트

 이화여대(이하 이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박모(23)씨는 지난 1월 기숙사 추첨에서 떨어졌다. 박씨가 구한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45만원의 방은 창문이 없었다. 주방 바로 옆에 있어 음식 냄새와 각종 소음이 하루 종일 이어졌다. 박씨는 “월세와 생활비를 고려했을 때 구할 수 있는 집은 그것뿐이었다”며 “창문 있는 방을 알아봤지만 매 달 10만원을 더 내야 해 포기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옛 말이다.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생에게는 자취삼천지교(自炊三遷之敎)가 더 다가온다. 적어도 세 번은 집을 옮겨봐야 좋은 환경을 가진 방을 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졸업 전까지 같은 방세를 지출하고 싶다면, 물가 상승으로 세 번 정도는 방을 옮기게 된다는 뜻도 있다. 이 과정에서 자취생과 하숙생이 배우는 세 가지 교훈. 집 없는 설움, 혼자 살면 다 돈이고, 세상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이다. 

 신촌 대학가 하숙비는 지난해와 비교해 최대 10%, 자취는 30% 이상씩 올랐다. 등록금 1000만원 시대에 한 달 생활비는 최소 30~40만원이다. 줄일 수 있는 건 방세뿐이다. 집에서 누리는 안정감, 편안함은 사치다. 한 명이 누우면 꽉 차는 방, 빛 한 줌 없는 방 안에서 멍하니 벽을 바라보는 청춘이 어떤 꿈과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올해 들어서는 하숙집에서 주던 밥도 줄어간다. 주말과 평일 점심에는 편의점의 삼각 김밥이나 컵라면이 당연한 일상이 됐다. 

 신촌 대학가에선 공동 행동을 모색 중이다. 그런데 총학생회 중심이다. 심지어 학생회 선거 때 공약집에서도 학생 주거권 문제는 점점 발견하기 힘들다. 올 봄 등록금 인상 반대 운동에는 5년 만에 2001명이 모인 학생 총회가 열렸다. 반면 주거문제는 일부 지역 출신 학생들만의 문제라고 보는 것 같다. 관심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대만 봐도 수도권 이외 출신 학생이 40% 이상이다. 수도권에 살더라도 거리가 멀어 통학 대신 하숙이나 자취를 선택한다. 대학가에서 주거 문제로 고민 하는 학생은 늘어간다. 주거는 곧 복지다. 누구도 대신 해결해주지 않는다. 학생 스스로 나서야 한다.


반지하 자취방에서 바라본 창문 밖 모습
사진 출처 - 필자
 

 이대는 대학원생을 제외하고 학부생을 위해 2개 동의 기숙사를 운영하고 있다. 학생 수용 비율은 2010년 기준 7.8%로 신입생은 615명, 2~4학년 재학생은 98명만 받을 수 있다. 기숙사 입주를 위한 경쟁률은 신입생 1.7:1, 재학생은 7:1 이상이다. 지방 학생들에게 기숙사 입주는 로또가 된지 오래다.

 이대 국제 기숙사가 2012년 2월 완공을 목표로 공사 중에 있다. 외국인 학생과 교원들에게 안정적인 기숙 시설을 제공하겠다는 배려가 느껴진다. 학생기숙사 증축은 아직도 계획 중에 있다. 재학생들에게 안정적인 기숙 시설과 학교의 배려는 먼 이야기이다.

 공간점거운동, 빈집점거운동, 주택점거운동 등으로 불리는 스쾃(squat) 운동은 공간을 둘러싼 사회적 공공성과 권리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미국의 주택점거운동, 브라질의 땅 없는 사람들의 운동 등으로 나타났다. 머지않아 이대생들의 ECC(이화캠퍼스복합단지)점거운동, 신촌 대학가의 집 없는 젊은이들의 운동도 일어날 법하다. 계획만 있고 해결은 없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말이다.  

 자취 첫날밤이 떠오른다. 잠도 밥도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두려움과 외로움은 잠깐이었다. 잠을 이루지 못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고시텔 월세 57만원과 생활비 30만원을 내주신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 이 큰 도시 안에 돈 걱정 없이 발 뻗고 편하게 잘 공간이 없다는 서러움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스펙을 쌓아 좋은 회사에 취직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 푸른 꿈을 꾸면서 사는 것이 청춘이라고 한다. 하지만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반지하 방에 핀 곰팡이가 내게는 현실이다. 방세 걱정에 파랗게 멍든 가슴이 우리의 청춘이다.

 자취삼천지교를 통해 얻게 된 진정한 교훈.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진리. 싼 방을 구하려 발품을 팔던 그 시간과 노력을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쏟아보았다면, 조금 더 일찍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 적극적으로 요구해 보았더라면 어땠을까. 자취 생활 3년차, 졸업을 앞둔 학생의 뒤늦은 후회다


스무 살의 노동 OTL (김종천)

김종천/ 객원 칼럼니스트

 올 초에 친구의 소개로 한 대형마트에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대학 입학금과 등록금을 합쳐 450만원을 내야 하는 상황에서 책값이라도 벌어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자는 생각이었다. 스무 살에 맞은 생애 첫 직장생활이기에 더욱 들뜬 마음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내가 맡은 일은 설 명절 선물세트 박스를 나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근무를 시작한 지 10분도 안돼 꾸지람을 들었다. 다른 파트 판매원 아주머니의 일을 거들었다는 이유였다. 그때 비로소 나는 마트 소속 직원이 아니라 마트에서 한 파트를 맡은 A업체의 파견노동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마트는 각 파트 별로 담당 파견업체를 쪼개놓고 있었다. 같은 매장에서 일해도 업체가 다르면 경쟁자였다. 자기 파트 물품을 조금이라도 팔기 위해 묘한 신경전이 계속됐다. 과도한 경쟁 탓에 동료애는 느껴지지 않았다.

 노동여건도 열악했다. 5일에 한 번 쉰다는 약속과 달리 주말에도 일을 해야 했다. 그에 따른 수당은 받지 못했다. 출근 시간은 칼같이 지켜야 했지만 퇴근 시간은 마트의 담당 직원 마음대로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물류창고에서 박스를 나르다가 가까이 있던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친구의 파트를 총괄하는 직원이 다짜고짜 욕설을 내뱉으며 “네가 직접 하라”고 했다. 자기 파트 직원이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못마땅한 듯 했다. 나는 “알았다”고 하고 혼자 일을 했다. 그러나 그 직원은 “대답이 건방지다”며 울그락 불그락한 얼굴로 내 머리를 때리고 박스더미에 나를 내팽개쳤다. 그로 인해 머리카락이 한 움큼이나 뽑혔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난 당장 경찰에 신고했다. 출동한 경찰에게 사법처리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나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아주머니들은 “가해자가 마트 소속 직원이니 파견업체 소속인 네가 참으라”고 다독였다. 마트 간부는 “A업체는 앞으로 행사에 참여할 수 없을 줄 알라”고 협박했다. 그 간부는 내게 “억울하면 고시를 보든 해서 성공해라. 넌 지금 하찮은 아르바이트생일 뿐”이라고 무시했다. 다른 직원들도 “남들은 다 참고 넘어가는데 왜 너만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느냐”면서 나를 사회부적응자로 몰아갔다.

 잠시 뒤 내게 아르바이트를 소개해 준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 친구는 “사건을 덮지 않으면 자신에게 불이익이 있을 것”이라며 “제발 사건을 덮어달라”고 했다.

 고민이 됐다. 잘못한 건 마트 직원인데, 내 친구가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나와 친구의 사이도 틀어질 위험이 있었다. 오랜 고민 끝에 친구에게 양해를 구하면서 요청을 거절했다. 부당한 대우를 그냥 참고 넘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저녁 시간이 됐다. 친구들은 멈칫멈칫하더니 나와 멀찌감치 떨어져 걸었다. ‘밥 먹으러 갈 때 뭉쳐 다니지 말라더라’고 했다. 돌려 말했지만 나와 함께 다니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음을 알 수 있었다. 친구들에게 먼저 가서 밥을 먹으라고 한 뒤 혼자 패스트푸드점에 갔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햄버거를 먹는데, 서러움에 눈물이 흘렀다.   

 고등학생 때 접한 노동인권 강의에서 자본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나눠놓고 노동자들 사이에 갈등을 유발하고 분열시킨다는 얘길 들었다. 언제 해고될 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하나로 뭉치는 데 장애가 된다는 말도 들었다.

 내가 직접 겪은 대형마트의 노동현실은 강의에서 듣던 것보다 심각했다. 수직적으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파견노동자의 구분이 마치 봉건시대 귀족과 평민처럼 뚜렷했다. 수평적으로도 파트별로 다른 업체가 경쟁하도록 만들어 놓아 노동자는 말 그대로 파편화된 존재였다. 기대했던 노동의 보람이나 협동의 가치는 느낄 수 없었다. 마치 일한 시간만큼 돈을 받는 기계 같았다.

 그날 저녁 난 바로 해고됐다. 마트는 고작 파견 직원을 해고하면서 사유를 알려주는 친절을 베풀진 않았다. 설렘으로 시작한 스무 살의 첫 직장생활은 이렇게 사회의 어두운 면만 또렷이 각인한 채 20여일 만에 끝이 났다.  

 작업복을 벗고 마트를 나서는데 “억울하면 성공하라”는 간부의 말이 계속 뇌리에 맴돌았다. 실제로 난 억울했다. 다시는 그런 대우를 받으며 일하기 싫었다.

 하지만 ‘그래서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다짐을 선뜻 할 순 없었다. 앞으로 대학생활에서 고시에 합격하거나 경쟁자에 비해 학점과 토익·자격증 등에서 앞선다면 그 간부가 말한 ‘성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 시대 대다수 대학생이 꿈꾸는 성공이고, 나 역시 그러한 성공에 대한 갈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성공하더라도 어느 마트 직원은 스무 살 아르바이트생을 때리고도 면죄부를 받고, 맞은 아르바이트생은 참기를 강요받는 일이 반복될 것이다.

 그렇다면 난 과연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정한 의미의 ‘성공’은 내가 겪은 억울함이 반복되지 않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애 첫 해고를 당한 날 밤은 이런 저런 고민으로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사죄투쟁(이재승 위원)

이재승/ 인권연대 운영위원

 이승만 대통령의 유족들이 51년 만에 4.19희생자들에게 사죄를 드린다며 성명을 발표하더니, 4월 19일에는 묘소에 참배를 시도하다가 4.19유족들에게 제지당했다고 한다. 민주정신의 총체적 결손을 절감하는 이 시대에 이승만의 유족과 관련단체들이 뜬금없이 이렇게 한 연유가 궁금해졌다. 오래도록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사죄의 감정을 때가 되어 표현하였다고는 믿기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4.19 희생자들의 혼령을 필요하게 되었을까?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유족들은 “제주 4.3사건과 관련하여 당시 선포한 계엄령이 불법적”이라고 보도한 <제민일보>가 대통령과 유족들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소송을 제기하였다. 실제로 당시 대한민국 헌법은 계엄령을 법률에 따라 선포하도록 하였는데도 계엄법을 제정하지 않는 가운데 계엄령을 선포했기 때문에 제민일보의 보도는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제 이승만의 유족과 관련단체들이 사죄하기 전에 제주에서 민간인학살, 한국전쟁 중 민간인학살, 사사오입개헌, 조봉암 등 정적에 대한 사법살해, 부정선거와 4.19혁명 등에 대하여 공적으로 어떠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물론 유족들과 관련단체의 견해가 어찌되었든 간에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이고 공적인 평가가 달라지기 어려울 것이다. 유족들의 사죄와 참배가 사망한 정치인의 오명을 털고 뭔가를 시도하기 위한 사과정치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어쨌든 정치인에 대한 평가는 정치인으로서 행적으로 충분한 것이지, 유족들의 소급적 참회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정치인으로서 참다운 명예와 평판은 어디에서 올까? 미국의 대통령 워싱턴(G. Washington)이나 로마 공화정의 정치인 킨키나투스(Cincinatus)의 예를 통해 분명해진다. 나아감과 물러섬의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를 이론적으로 풀어냈다. 그에 따르면 행복한 삶이란 정치적 삶(bios politikos)과 관조적 삶(bios theoretikos)의 조화이다. 정치적 삶이란 공동체 속에서 공동선을 위해 자신의 역량을 최고로 발휘하는 실천적 생애를 말하고, 관조적 삶은 이러한 실천적 삶으로부터 제때에 물러나와 삶을 원리적으로 성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좋은 삶이라는 이러한 두 측면의 조화로운 결합이다. 세상에 나가는 것과 물러나 안빈낙도하는 것, 끝내는 신선(神仙)이 된다는 동양의 철학도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다. 공과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고향으로 복귀하는 워싱턴이나 킨키나투스는 좋은 삶에 대한 귀감이 된 것이다.


4·19혁명 51돌을 맞은 지난 19일 오전 서울 강북구 수유동 국립 4·19민주묘지 유영봉안소
사진 출처 - 한겨레

 존경과 명예는 억지로 얻을 수 없다. 물론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권력을 영원히 보유하기 위해 그는 정상에서 하산하는 일을 잊고 ‘공그리’를 치다가 마침내 전제자로 전락했다. 그는 단지 대통령을 오래하다 퇴진의 기회를 놓친 것이 아니다. 그가 권좌에 있는 동안 갖은 헌정파괴와 인권침해를 저질렀으며, 그에 대하여 정치적 책임을 면할 수도 없다. 그가 시작한 나쁜 통치는 한국현대사에서 80년대 중반까지 쿠데타와 폭정의 길잡이가 되었다. 오래되었다고 해서, 처음이라고 해서 적당히 기념할 수는 없다.

 사죄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상호성을 의미한다. 물론 희생자가 사죄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가해자 측은 사죄를 표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제는 사죄의 진정성이다. 진정성이 담긴 사죄와 더불어, 민주주의를 향한 공적인 동조를 지속적으로 표방한다면 완강한 피해자들조차 사죄를 수용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정황을 보면 진정한 사죄라기보다는 가해자의 명예를 위한 조건부 사죄와 같다. 유족들에게 무조건적이고 절대적 사죄를 기대해본다. 그러면 4.19유족이 사죄의 뜻에 공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승만 유족과 4.19유족간의 사죄와 용서는 다분히 사적인 것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일회적인 사건으로 그치지도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이 문제를 국민적인 차원에서, 국가의 차원에서 공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민주적 헌정을 유린한 독재자에 대한 미움은 단지 관련자들의 관련자들에 대한 인간적인 증오가 아니라 공화국의 정신적 토대로서 애국심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객관적 미움을 완화시키려는 시도들은 바로 공화국의 주춧돌을 뽑아버리는 것과 같다. 이 땅에 헌정유린자들의 동상을 세우고 기념하는 일은 거부해야 한다. 오히려 객관적 미움을 보존하는 방책을 세워야 한다.

이재승 위원은 현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 재직 중입니다.


<나는 가수다>에 투영된 욕망(김창남 위원)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프랑스의 사상가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는 명저 “놀이와 인간”에서 놀이의 가장 기본적인 유형을 몇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경쟁’이다. 경쟁은 놀이의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고 사람들이 어떤 것에 즐거움을 느끼게 만드는 가장 보편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다.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이 모여 즐기던 가위바위보 게임에서부터 엄청난 수익이 오고가는 프로스포츠에 이르기까지 경쟁의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 놀이는 거의 없다.

 경쟁에도 여러 유형이 있다. 두 팀 간의 우열을 가리는 단순한 청백전식 경쟁도 있고 퀴즈처럼 여러 명 가운데 한 사람의 승자를 가리는 경쟁도 있다. 최근 들어 가장 각광받는 경쟁의 유형은 서바이벌이라는 것이다. TV는 온통 서바이벌 경쟁을 내건 오락물로 넘쳐난다. 공중파와 케이블을 가릴 것 없이 조금만 채널을 돌리다 보면 노래, 패션, 요리, 심지어 다이어트까지 서바이벌 경쟁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공중파 채널은 아예 신입사원을 뽑는 과정을 서바이벌 게임으로 만들어 내보내고 있다. 서바이벌은 글자 그대로 생존을 건 경쟁이다. 그 판에서 가능한 한 오래 살아남는 것, 그러니까 매 회 탈락자가 되지 않는 것이 게임의 목표이다.

 서바이벌 경쟁 게임은 한국 사회를 사는 사람들의 현실적 생존 방식과 너무나 유사하다. 우리는 하루하루 서바이벌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간다. 어려서는 좋은 성적을 얻어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가서는 취업을 위해, 취업한 후에는 승진하고 살아남기 위해 경쟁한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대가 열리면서 서바이벌 경쟁은 더욱 치열하고 무자비해졌다. 웬만큼 좋은 대학을 가도, 웬만큼 좋은 직장을 얻어도 끝까지 생존하리라 예측하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삶이 불확실해질수록 서바이벌은 어려워지고 경쟁은 뜨거워진다. 그럴수록 사회는 벌거벗은 욕망들이 적나라하게 사투를 벌이는 정글로 변해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정글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을 벗어나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따라서 어떡하든 생존하겠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TV는 온통 서바이벌 경쟁을 내건 프로그램들로 넘쳐나고 있다.
현재 방송되고 있거나 준비 중인 서바이벌 프로그램들.
사진 출처 - 국민일보

 TV의 서바이벌 게임에 대한 시청자들의 열광은 바로 그런 이중의 욕망과 무관하지 않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대한 열광 속에는, 경쟁의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 어떡하든 그 게임에서 이겨 살아남고자 하는 욕망이 모순적으로 중첩되어 있다. TV를 통해 보는 서바이벌 게임은 시청자들에게 가상의 게임일 뿐이다. TV밖에서 그것을 보는 우리는 그 잔인한 서바이벌의 룰로부터 벗어나 있다. 우리는 그저 나와 무관한 사람들이 벌이는 무자비한 서바이벌 게임을 관전할 뿐이다. 누군가가 거기서 탈락하고 패배한다고 해도 그게 나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니다. 그건 게임일 뿐이고 나는 그로부터 벗어나 그걸 안전하게 지켜볼 수 있다. 내 문제가 아닌 한 서바이벌 게임도 재밌는 볼거리의 하나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 게임 속의 현실은 나의 현실과 닮아 있다. 거기서 벌어지는 탈락은 언젠가 나의 현실에서도 재현될지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TV에서 벌어지는 서바이벌 게임 속에서 현실과 유사한 공포를 느끼고 거기서 탈락한 패배자에 대해서는 연민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이 TV의 서바이벌 게임에 열광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적어도 그 공간에서는 공정한 룰이 적용되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모든 게임은 공정한 룰을 전제로 하지만 현실의 게임에서 공정한 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현실의 불확실성은 그런 룰이 언제 어떻게 불공정하게 작용할지 모른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TV의 서바이벌 게임이라면 당연히 정확하고 공정한 룰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내가 현실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게임의 룰이 적어도 TV 쇼에서만큼은 정확히 작동하리라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그런 믿음이 깨어질 때 시청자들은 분노하게 된다.

 <나는 가수다>에서 첫 번째 탈락자인 김건모를 탈락시키지 않고 재도전의 기회를 준다고 했을 때 엄청난 비난이 쏟아진 건 그 때문이다. 공정한 게임의 룰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있는 TV 서바이벌 게임에서 룰이 깨진 것이다. <나는 가수다>에 쏟아진 시청자들의 비난에는 공정한 게임의 룰이 지켜지지 않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한 분노가 투영되어 있다. 탈법과 비리를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는 대기업, 국민과의 약속 따위는 우습게 여기며 부자와 강자만을 위해 권력을 휘두르는 정부, 언제나 힘 있는 자들의 편에 서는 사법부 등 현실에서 공정한 게임의 룰이 훼손되는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한국 사회 전체가 그런 불공정 게임의 장이 되고 보니 그에 대한 분노는 대상도 불분명하고 구체적이지도 않으며 공허한 느낌을 준다. 그렇게 무정형적으로 쌓인 분노가 <나는 가수다>라는 아주 구체적인 대상을 향해 폭발한 것이다. <나는 가수다>에 비난이 쏟아질 때, 공정 사회를 유린하는 권력집단에는 분노하지 않고 한갓 예능 프로그램에만 분노를 터뜨린다는 힐난도 있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비판이지만 달리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아무리 비난하고 비판해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절망한 나머지 TV 속의 가상현실에서라도 공정성이 실현되는 걸 보고 싶었던 거다. 어쨌거나 숨 막히는 서바이벌 경쟁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이 TV 속의 서바이벌 게임에 열광하는 풍경은 어쩐지 씁쓸하다.

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공포(위대영 위원)

위대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일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이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에 깔려서, 이어 닥친 쓰나미에 쓸려가 죽었다. 곧이어 원자력 발전소 폭발과 방사능 유출로 많은 사람이 방사능에 피폭되고, 인근 주민들은 생활터전을 버려두고 대피했다. 방사능 물질에 대한 걱정으로 많은 사람들이 일본을 빠져나갔다. 한국도 위험하다며 한국을 떠나는 외국인도 있다. 한국 상공으로는 날아들지 않을 것이라던 방사능 물질들이 전국에서 검출되고 있다. 일본인들이 직접적인 방사능 위험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도 이래나 저래나 한국에서 떠나기 어렵다. 한국의 원전은 지금도 계속 건설 중이고, 해외로도 수출하고 있다.  

 구제역으로 전국에서 수백만 마리의 가축이 살처분을 받았고, 산채로 땅에 매장됐다. 버스에서는 구제역 종식에 관심을 기울여 주시고 구제역은 인체에 무해하므로 육류 소비에 안심해도 된다는 광고가 흐른다. 침출수는 언제 누출될지 모르고 우리가 먹는 식수와 지하수에 언제 침출수가 흘러 들어갈지 모르며 돈을 내고 받아든 생수병의 물이 과연 안전한지 걱정한다. 오래 전 조류인플루엔자가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았듯 지금 구제역도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사람과 조류가 같은 공간에 있다 보면 사람에게 옮겨지지 않을 것 같던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옮겨지기도 하는 것처럼, 구제역은 정말 사람에게 옮겨지지 않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살처분 된 가축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기간만 더 길 뿐 실은 우리가 매일 소비하는 육류를 위해 도살되는 가축과 살처분 된 가축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겠나. 벌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쌍용자동차 구조조정 노동자 3차 정신건강실태 조사보고에 의하면 응답자의 80%가 중등도 이상의 우울증을, 52.3%가 외상후 스트레스성장애를 겪고 있다고 했다. 전체인력의 36%인 2,646명을 감원하겠다는 쌍용자동차의 구조조정 계획에 반대하며 시작한 파업 과정에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경찰의 폭압적인 진압으로 피를 흘리고, 파업이 끝난 지 1년 8개월이 지난 현재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노동자와 가족들이 속출하고 있다. 지난 월요일 한겨레신문 ‘쌍용차 해고 노동자 짙어진 죽음의 그늘’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지난 2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청 앞뜰. 또래와 함께 뛰어놀던 6살배기 아이가 나무 위로 올라갔다. 자원봉사자가 “위험해. 어서 내려와”라고 외치자 아이가 말했다. “싫어. 자살할거야.”, 라고 쌍용자동차 노동자 가족들의 모습을 전했다.


민주노총 전국금속산업노조 쌍용차지부 한 조합원이 지난 5일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열린
‘쌍용자동차 구조조정 노동자 3차 정신건강 실태조사 보고서’ 발표회 도중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얼마 전 대법원은 합법적인 파업이라도 사용자가 예측할 수 없는 시기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져 사용자의 사업운영에 심대한 혼란 내지 막대한 손해를 초래하는 경우에는 업무방해죄가 성립한다는 판결을 선고했다. 합법적인 파업에 대해서는 형법상 업무방해죄를 적용해선 안 된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이로써 무력화됐다.  

 대학에 들어가고 싶어도 천정부지로 뛰어 오른 등록금을 마련하기 힘든 학생들, 학비 대출을 받아 어렵게 손에 졸업장을 받아들어도 자신을 받아줄 직장이 없는 현실,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서는 언제 현실이 될지 모르는 구조조정의 위험. 치솟는 물가, 늘어가는 빚, 비상구가 보이지 않는 현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은 조용하고 말이 없다. 불안과 공포를 느끼지 못 하지만 몸과 마음에 체화되어 있다. 고통이 내게 현실이 되는 때, 내가 저항하기 힘든 상황이 눈앞에 닥쳤을 때 비로소 공포는 육체를 얻는다. 가장 무서운 공포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을 상대하는 영화다. 주위의 사람들이 사라지고 언제 어떤 방식일지는 몰라도 나도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 부지불식간에 자신도 옆 사람처럼 사라질 것이라는 공포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절망으로 바뀌고 예측할 수 없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구제역과 침출수의 공포, 방사능 공포, 그러나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미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로부터 내가 안전하지 못하다는 공포다. 너무 익숙해서, 항상 그래왔으니까, 나만 아니면 어떻든지... 이미 제한되고 제한된 파업이지만, 그나마 제한된 절차에 따라 인간답게 살자며 시작하는 파업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엄혹한 현실. 하지만 모른다. 나만 아니면 되고, 우리 사회는 항상 그 정도였고, 법원이 자본의 편인 것은 너무 익숙하니까.  

 꽃이 피는 봄이 왔는데, 나무에 핀 꽃을 쫓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살이 뭔지도 모를 나이에 자살을 떠올리며 나무를 오르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단결 금지 법리 철폐를 향한 법원의 첫 걸음(도재형 위원)

도재형/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3월 17일 대법원은 파업권에 관한 중요한 전원합의체 판결을 선고하였다(대법원 2011. 3. 17 선고 2007도482 판결). 이 판결에서 대법원은 ‘근로자는 기본권으로서 근로조건 향상을 위한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 그러므로 파업이 언제나 업무방해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고, 사용자가 예측할 수 없는 시기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져 사용자의 사업운영에 심대한 혼란 내지 막대한 손해를 초래하는 등으로 사용자의 사업 계속에 관한 자유의사가 제압·혼란될 수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경우에 비로소 그 집단적 노무제공의 거부가 위력에 해당하여 업무방해죄가 성립한다’고 판시하였다.

 위 내용만으로는 대법원의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기 어려울 수 있지만, 이 판결로 인해 폐기된 종전 판례를 살펴보면 파업에 대한 법원의 입장이 어떻게 변경되었는지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종래 법원은 단순 파업과 같이 단지 근로자들이 집단적으로 노무 제공을 거부한 행위도 위력(威力)에 해당하므로, 원칙적으로 형법상 업무방해죄로 처벌할 수 있다고 보았다(대법원 1996. 5. 10. 선고 96도419 판결). 위와 같은 판례 법리가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인 1991년경부터 대법원은, 근로자들이 아무런 물리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단순히 노무 제공을 집단적으로 거부한 행위 그 자체가 업무방해죄에 해당한다는 논리를 개발하고선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활발해진 노동조합 운동을 탄압하였다.

 이것은 또한 파업을 사회적으로 유해한 현상으로 보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법원이 단순 파업도 원칙적으로 형법상 범죄로 취급한다는 것은 파업을 마치 절도나 강도 등의 행위와 동등하게 취급하겠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종전 판례는 18세기 혹은 19세기 유럽의 단결 금지 법리와 다름없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리고 이 판결에서 대법원이 폐기시킨 법리는 바로 ‘단순 파업도 범죄다’라는 그 단결 금지 법리의 기초 중 일부이다.

 종전 판례 법리와 이론상 대칭점에 설 수 있는 것은 ‘단순 파업은 범죄가 아니다’라는 법리일 것이다. 이 판결은 “근로자는 […]  원칙적으로는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으로서 근로조건 향상을 위한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헌법 제33조 제1항).”고 전제하며 이 점을 분명히 하였다. 개인적으로는, 판결문에 헌법 제33조 제1항이 인용된 것을 보고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파업과 관련된 종전의 대법원 판결문에서는 헌법 제33조 제1항은 거의 인용되지 않았고, 인용된 경우에도 그것은 쟁의행위 금지 규정에 대한 위헌 주장을 기각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헌법이 파업권을 보장한 나라의 법률가가, 법원이 근로자의 파업권을 인정하는 근거로서 헌법 조항을 든 것을 보고 놀랐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근로자들이 헌법상 기본권인 파업권을 집단적으로 행사했다는 이유로 범죄자로 취급되었다는 점(이는 마치 근로자들이 집단적으로 국회의원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했다고 범죄자로 취급받는 것과 동일하다)을 감안한다면, 이런 감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4일 민주노총 교육원에서 열린 '업무방해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 대한 긴급 토론회 모습

 이 판결이 선고된 이후, 일각에서는 그로 인해 노사관계의 리스크가 커졌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2011. 3. 18.자 문화일보 사설). 그러나 이것은 판결의 취지를 오해한 것이다. 이 판결은 기업에게 더 이상 단순 파업을 핑계 삼아 형사법을 이용해 근로자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시그널을 준 것이다. 만약 단순 파업에 대해 형벌 조항을 적용하려고 한다면, 그 위험 부담은 이를 주장하는 자가 져야 한다는 점을 천명한 것이다. 이는 형사법의 일반 원칙인 죄형법정주의에 부합한다. 만약 잘못된 관행이나 판례를 수정하는 것이 리스크를 키우고 부정의(不正義)하다는 논리라면, 그것은 법원의 역할이나 기능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 판결의 반대의견 및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법리적으로 볼 때 이 판결에 대해 종전 단결 금지의 판례 법리를 완전히 벗어났다거나 법 원칙에 부합한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것이 한국의 노사 현실이 19세기 단결 금지 법리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판결을 계기로 대법원은 ‘파업이 사회적으로 유해한 현상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21세기 한국의 대법원이, 늦었지만, 19세기적 시민법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을 뗀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판결이 노사관계에서도 일반 법 원리(죄형법정주의)가 적용되는 기초가 되기를 희망한다.

 노사 현실에서 파업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좋은 것일 때도 있고, 나쁜 것일 때도 있다. 이는 마치 좋은 사용자와 함께 나쁜 사용자가 있고, 좋은 노동조합과 함께 나쁜 노동조합도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세상사가 모든 그런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한 나라의 법률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그 국가는 불행해진다. 법률이 좋은 것을 좋게 평가하고, 그것이 시장에서 온당하게 평가받을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만 그 국가 역시 좋은 사회가 될 수 있다. 오늘날까지 한국 법원은 노사관계에서는 이러한 원칙을 적용하지 않았다. 단지 기업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나쁜 기업도 노사관계에서 특권적 지위를 누렸고, 단지 노동조합의 활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근로자의 노동 기본권은 박탈당했다. 이로 인해 노사관계에서는 좋은 기업과 노동조합이 바보로 취급되는 현실이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다.

 이 판결은 노사관계에도 위와 같은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최초로 천명한 것이다. 즉 ‘파업이므로 폭력적이고 나쁜 사회적 현상인 것이 아니라 폭력적이고 나쁜 파업이 법에 의해 규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 우리가 법과대학에서 배우던 헌법과 형법의 여러 기본 원칙(사실상 굳이 배우지 않더라도 이미 시민사회에 사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고 지키는 것이다)들이 노사관계에 적용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한편,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강고해 보이는 판례 법리 하에서 개별 변호사가 그에 반대되는 논리를 재판에서 변론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때때로 비관적인 피고인을 설득해야 하고, 때로는 법관이나 검사의 냉소적 자세를 버텨야 하기 때문이다. 혹은 자신이 들이는 시간과 노력 등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노동 사건에서 단순 파업에 참가한 근로자들의 무죄를 주장했던 여러 변호사들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참고) - 이 글은 2011. 3. 24. 민주노총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공동 개최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 대한 긴급 토론회”에서 필자가 발표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도재형 위원은 현재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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