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6호선 응암역 근처에 작은 공원이 있다. 주 도심처럼 복잡하기야 할까마는 명색이 역세권이라 큰 아파트도 몇 동 있고 높게 지은 상가도 있으니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잠시 쉬어가기엔 부족함이 없는 공간이다. 으레 역 주변이 그렇듯 과일이며 채소를 파는 승합차도 있고 낮술에 취한 노인네들 다투는 소리도 있고 근처에 있는 병원생활이 답답해 밖으로 나온 환자도 있다. 누군가 망해서 나간자리에 새 꿈을 안고 입주한 상가에서는 아치형 풍선 아래서 현란한 몸짓으로 가게를 홍보하는 아가씨들이 있고 앞으로 남학생들이 몇이 킥킥 웃으며 지나간다. 대형마트로 장 보러 가는 엄마는 솜사탕을 먹고 싶어 하는 아이의 손을 거부하지 못하고 리어카 앞에서 잠깐 실랑이를 하기도 한다. 다들 열심히 산다.


 “별일 없이 산다”고 “내가 이렇게 사는 줄 안다면 너는 깜짝 놀랄”거라고 노래하는 가수와 나를 빼놓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별일 있이 사는 것 같다. 


 그 공원에 또 별일 있이 사는 사람이 있다. 능글맞은 말투와 표정으로 지나치는 사람들의 행색까지도 살피며 “신문한번 보시라구”라는 말을 간첩 접선 시도하듯 전하는 신문 판촉 요원이 그이다. 내가 좋아하는 신문 이라면야 캔 커피라도 한잔 사주며 수고하신다고 맞장구치겠지만 그 양반 꼭 조중동만 판다. 처음에는 못 봤지만 그의 손에는 봉투가 들려져 있다. 바로 눈앞에서 봉투를 흔들면 가지런히 펼쳐진 배춧잎사귀 몇 장이 부채가 되어 무더운 여름날 그 맞기 힘들다는 돈바람 쐬어준다. 영 달갑지 않으니 시원할 까닭도 없다. 나야 그렇다 치고 동네 아줌마 몇 분 그사이에 홀딱 넘어간다. 이유야 어떻게 되었든 단돈 십 만원 변통하기도 어려운 요즘 세상에 언놈이 그와 같은 돈을 공짜로 하사한단 말인가. 그 정도 돈이면 두어 달 치 아이의 급식비를 낼 수 있고 매일같이 사달라고 졸라대는 아이의 메이커 신발값을 반쯤은 댈 수 있고 매월 말 한숨 쉬는 만큼 빠져나가는 공과금의 몇 분의 일쯤은 담당할 수 있으니 늘 빠듯한 규모의 삶을 사는 아줌마들에게 그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은 아이의 고사리 손에 쥐어준 솜사탕보다 더 달콤한 것이겠다. 그가 나에게 접근해 온다면 나는 단 한마디의 말로 불쾌한 흥정을 거부할 수 있다. “나 한겨레 보는 남자야!” 그러나 그와 나는 단한번의 대화도 하지 않았다. 그가 나의 정체를 알아 봤거나 내가 그를 에둘러 피해갔거나...



백화점 앞에서 한 일간지 판촉사원(모자쓴 이)이 뒤춤에 상품권이 담긴 봉투를 들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한겨레 기획위원인 홍세화 선생은 한겨레, 한겨레 21 구독신청서를 꼭 들고 다닌다. 최근에 새로 맡은 직책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인이니 구독신청 용지가 세장이다. 수없이 다니는 강좌의 말미에는 꼭 그 용지를 들이밀고 구독신청을 받는다. 풍부한 학식과 경험에 나오는 그의 열강에 감동한 사람들은 예의 선한 웃음과 함께 건네는 구독용지를 거부하지 못한다. 얼마 전 모 단체 후원 감사의 밤이 끝난 뒤풀이 자리에서도 그는 용지를 들고 테이블을 돌며 구독신청을 받고 있었다. 누가 봐도 진보적 일간지의 기획위원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잡지사의 편집인이며 더군다나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인 그가 해야 할일은 아니다.


 시민사회 단체의 행사에 이름 새겨진 화환 좀 돌리고 열심히 하는 후배들 어깨나 도닥거리고 무슨 무슨 단체의 이사쯤으로 이름 올리고 회의는 바빠서 못가거나 일 년에 한번 얼굴 비추고 가끔씩 생기는 지면에 “요즘 세상이 어째...”류의 칼럼 몇 자 적으면 충분히 어르신 대접 받는 연배임에도 그는 여전히 현역 언론인으로 발품을 팔고 있다. 줄을 세우면 보이지도 않을 새카만 후배 언론인도 하지 못하는 그 험한 일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다. 그에게 구독신청서를 적어서 돌려주는 사람들의 표정도 모두 밝다. 기쁜 일 함께 나눠주어서 고맙다는 표정이다. 나도 그랬다 꽤 비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정기 구독을 신청하면서 나도 저분처럼 나이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감사한 마음.


 “프랑스에 폴리틱스 라는 주간지가 있는데 말이지요. 그 사람들 독자 관리하는 게 우리와는 사뭇 달라요. 아주 질겨요. 자기들 밥줄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명확히 아는 거지요. 근데 질겨도 우리 조중동처럼 돈으로 처바르는 짓은 안 해요” 대학생 인권학교에서 만난 홍세화 선생이 우리 일행에게 잠깐 들려준 프랑스 잡지의 예는 무척 흥미로웠다. “폴리틱스”라는 잡지는 독자가 구독을 끊을 때 6번의 편지를 받는다고 한다. 정기구독 만료 2개월 전. 1개월 전에는“귀하의 구독기간은 언제 까지 입니다”  보름 전에는 “연장을 안 할 시에는 결호가 생깁니다.”구독이 끝나는 시점엔 “귀하에게 폴리틱스 라는 잡지가 더 이상 의미 없는 것입니까?”라는 다소 신파적 메시지가, 구독 만료 이후에도 2달치를 무료 공급하면서 다시 한 번 “아직 생각이 바뀌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동안 구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잡지는 광고를 실지 않는다고 한다. 순수한 독자들의 구독료로만 운영해야하니 독자 한사람 한 사람이 소중한 것이다. 구독료야 말로 잡지를 꾸려가는 사람들의 생계인 것이다.


 어줍지만 나도 몇 장의 음반을 만들었다. 대학 강의도 하고 단체를 만들어 모금도 했다. 그러니 나의 밥줄은 음반을 구입해준 청자(廳者)들이고 학생들이 수강신청을 부족하지 않게 해주니 대학에서 받는 월급의 근원은 학생들이다. 7억여 원이 넘는 모금에 참여해준 사람들 때문에 “에다가와 민족학교 지원모금”이라는 단체는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밥줄인  그 사람들에게 살갑게 다가가지 못했다. 음반 구입방법을 물어오는 이에게는 인터넷에서 대충 검색해 찾아오라는 말밖에 못했고 강의 내용의 새로운 부분들에 대한 학생의 의견을 무시했다. 공연이나 강연을 의뢰하는 이들을 까칠한 요구로 곤란하게 만들었으니 살아야할 인생의 절반을 넘긴 나이에도 나는 아직 내 밥줄에 대한 진정성이 부족한 것이다.


 조중동 판촉요원의 불쾌한 유혹을 보면서 “한겨레”나 “경향“은 왜 안 되나? 싶을 때가 있다. 물론 그들이야 만 원짜리 몇 장의 호객행위로 신문시장을 왜곡시키지만 그럼에도 “별일 있이 사는”조중동 판촉요원인 그의 열심을 내가 선호하는 신문에게서 볼 수 없는 것은 무척 아쉬운 부분이다. “한겨레”나 “경향”같은 진보적 일간지의 모든 기자가 호주머니에서 정기구독 신청서를 꺼내는 장면을 상상한다. 이 정권 들어서 생긴 재정악화로 고민하는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가의 가방에 수북히 모아둔 회원가입 신청서를 상상한다. 참 좋은 일이다. 나도 이참에 음반 몇 장씩 들고 다니며 여기저기 들이 밀까한다. 물론 홍세화 선생처럼 폼 나지는 않겠지만...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3기 대학생 인권학교 후기> 인권을 배우자, 행복해지자 그리고 행동하자
홍승은/ 3기 대학생 인권학교 참가 학생


 

 나와 같은 대학생들에게 ‘인권’이라는 단어는 학문적인 영역에서만 쓰이는 이상적이며 추상적인 것으로 막연하게 다가오곤 한다. 대학에서 사회, 법, 사회복지, 교육 등 인권이 빠질 수 없는 대부분의 학문들을 공부하면서도 인권에 대해 관심을 갖고 유의하지 않았던 것은 인권에 대한 논의가 부질없게 되어가고 있는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과 크게 상관이 없지 않다. 이러한 상황과 더불어 당장 해결해야 할 높은 등록금에 대한 부담과 불확실한 미래로 인한 불안, 그리고 경쟁을 조장하며 안정지향적인 삶을 강요하는 사회까지 더해져 인권에 관한 논의는 우리에게 비현실적이며 지나치게 이상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현실이다. 사람이 마땅히 누려야하는 모든 권리를 뜻하는 ‘인권’은 대학생 뿐 아니라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관심을 가져야하는 것인데 왜 우리사회에서는 인권에 대한 논의가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과 함께 이 땅의 대학생들이 종종 겪는 현실과 이상의 조율에서 오는 딜레마를 해소하고자 하는 바람으로 인권연대에서 주최하는 2박3일간의 인권학교에 참여하게 되었다.


 인권학교에 참여하기 전부터 여느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불확실했던 진로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욱 기대가 컸고 설렜다. 처음 버스에서 사람들과 대면했을 때 나와 같이 상기된 표정들을 보면서 이 버스에 있는 모든 학생들 또한 비슷한 생각을 갖고 부푼 희망으로 이 여정에 함께하게 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마이 스쿨’에 도착해서 짐정리를 하고 간단한 자기소개를 한 뒤 홍세화 선생님의 강의를 시작으로 인권학교의 2박3일의 일정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생각에 관한 의문을 제시해 주신 홍세화 선생님과 삶이 투영된 진정성 있는 노래로 가슴을 울려주신 이지상 선생님, 외국의 사례와 우리나라의 역사 등 여러 가지 관점에서 한국의 노동문제에 대해 명쾌하게 풀어주신 하종강 선생님과 법치주의와 인권에 대해 토론식 수업으로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주신 장경욱 선생님, 종교적 인간론을 통해 한국사회에서 지향해야할 인간관을 제시해주신 이찬수 선생님과 인권에 대한 명쾌한 정의와 인간 지향적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가르쳐주신 오창익 선생님까지 여섯 분의 훌륭한 강의를 통해 머릿속에서 비현실적이며 이상적으로 자리잡아있던 인권에 대한 논의를 현실적인 실천의 영역으로 옮겨놓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인권학교에서의 2박3일은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접할 수 있었던 여러 선생님들의 강의를 듣고 토론을 하며 새로운 지식을 쌓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강의를 통해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뜻 깊은 시간이었다. 그로 인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다소 철학적이게 느껴졌던 명제가 우리에게 진실하게 다가오는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한 강의 한 강의 시간이 지날 때마다 작은 탄성을 지르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기존의 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을 직시하는 순간, 그리고 기존의 굳어졌던 생각과 행동의 변화를 촉구하는 순간 새로움을 맞이해야하는 불편함 때문에 마음이 편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곧 그 불편함이 진정한 삶의 모습이며 지향해야할 가치관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총 여섯 개의 소중한 강의를 들으며 매 강의가 끝날 때마다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하나씩 늘려나가는 우리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이 평범하지 않은 특별한 경험이었기에 2박3일의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잠드는 것이 아쉬워 새벽 늦게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러한 값진 생각의 전환과 책, 컵, 연필, 수첩, 자료집, 티셔츠 등 인권연대에서 준비해주신 소중한 선물들과 더불어 이번 인권학교에서 우리가 받은 것들 중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다. 글을 쓸 때에도 1인칭 ‘내’가 아닌 ‘우리’라고 표현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울 정도로 인권학교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2박3일의 짧은 일정동안 ‘나’에서 ‘우리’가 되는 경험을 했다. 각기 다른 전공과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비슷한 사람들이었기에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금세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우리는 표면적인 관계가 아닌 내면에서부터 전해지는 공감과 이해를 통해 연대감을 느꼈고 그 시간, 그 공간에서의 사람들 간의 관계가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넓은 사회에도 투영되길 바라게 되었다. 한 순간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계유지를 통해서 지금의 이 작은 집단이 더 크고 활성화되도록 함께하자고 다 같이 다짐했다.





 2박3일 간 인권학교에서 인권을 배우고 우리는 행복을 느꼈다. 복잡한 일정표대로 짜여져서 맞춰진 시기 내에 정해진 과업을 달성하지 못하면 낙오자로 뒤쳐질까봐 불안함에 시달리던 우리는 삶이란 단순한 것이란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도 명예도 직업도 그 무엇도 아닌 나눔과 공존이라는 것을 배운 순간 우리를 얽매고 있던 모든 통념들이 벗겨지면서 진정한 행복함을 느꼈다. 물론 현실을 진실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분노에 차기도하고 억울함과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었기에 행복이 배가 되었다. 이러한 깨달음과 행복, 연대가 어우러져서 ‘행동’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실천. 행동. 우리는 이제 조금이나마 인권을 공부한 작은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은 그저 망상가일 뿐이라는 말을 우리는 믿는다. 그렇기에 함께 연대하며 행동하는 지식인이 되도록 더욱 노력할 것이다. 인권학교는 2박3일의 짧은 일정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소중한 경험을 토대로, 뜻이 맞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연대하며, 항상 깨어있는 자각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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