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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은 민주주의 기초에 반하는 행동” [2009.08.27. 제775호]
이순혁
[1972~1984 죽음 앞에 서다]
확고한 인권 신념 지켜온 사형수 출신 대통령…
국가인권위 발족과 실질적 사형제 폐지 길 닦는 업적 남겨

1972~1984 죽음 앞에 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적으로, 의문의 교통사고와 납치·살해 위기를 겪었다. 가택연금과 투옥을 반복하며 반독재 투쟁을 벌이다 1980년 9월17일 신군부의 군사재판에서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기에 이르렀다. 고난 속에서 인권 철학이 뿌리내렸다.

» “사형은 민주주의 기초에 반하는 행동”

지난 2005년 2월2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울 신촌 연세대 교정을 찾았다. 연세대 리더십센터의 초청으로 한·미·중·일 네 나라 대학생을 상대로 특별강연을 하게 된 것이다. 1천여 명의 학생이 ‘동아시아와 젊은 리더십’이란 주제의 강연을 경청했다.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 김 전 대통령은 사형을 선고받던 때를 회상했다.

 

재판장 입 나오면 살고 찢어지면 죽는다?
 

» 군사정권의 모진 박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인권과 민주주의 투사’로 만들었다. 1973년 일본 도쿄에서 납치됐다가 풀려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 사진 한겨레 자료
“큰소리는 쳤지만, 살고 싶어서 재판장에서 재판관 입을 뚫어지게 쳐다봤어요. 무기징역만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무기만 받으면 언젠가는 나올 테니까. 왜 재판관 입을 쳐다봤냐 하면, ‘무’ 하면 (재판관) 입이 (앞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사형의 ‘사’ 하면 (재판관) 입이 (옆으로) 찢어집니다. 입이 ‘나오면’ 살고 ‘찢어지면’ 죽는다, 이것이었죠.”

좌중에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한없이 절박했을 생사 갈림길에서의 고뇌는 ‘입이 튀어나오면 살고 찢어지면 죽는다’라는 말과 웃음으로 그렇게 넘어갔다.

하지만 그의 실제 인생에는 그런 유머로 넘기기에는 너무 엄혹하고 절박한 순간들이 많았다. 앞서 김 전 대통령이 언급한 1980년 신군부 군사재판에서의 내란음모 혐의 사형선고를 비롯해, 1971년 목포에서의 교통사고를 가장한 살해 시도, 1973년 일본에서의 납치·수장 위기까지….

하지만 볕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은 법. 군사정권의 도 넘은 탄압은 자연스레 그를 인권 수호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인권 탄압 피해의 상징과 인권 수호의 상징은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김 전 대통령은 인권의 중요성과 인권 향상의 절박한 필요성을 온몸으로 체득하며 인권에 대한 불굴의 신념을 만들어갔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돼 인권과 관련해 남긴 가장 큰 업적으로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설립과 사형제 폐지 노력을 들 수 있다.

우선 국가인권위원회 설치는 김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으로, 자신의 임기 중인 2001년에 출범시켰다. 출범 준비 단계에서 국가인권위의 위상을 어떻게 할지를 놓고 시민사회단체 쪽과 갈등을 겪긴 했지만,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자체는 우리 사회 인권 향상의 큰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런 국가인권위는 지난 8월18일 김 전 대통령 서거 2시간여 만에 “김 전 대통령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분이셨습니다. 고인이 목숨을 바치며 추구했던 인권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의지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되는 데 큰 밑거름이 됐습니다”라는 추도문을 냈다.

김 전 대통령과 인권을 잇는 또 다른 축인 사형제와 관련해서는 좀더 많은 이야깃거리들이 있다. 우선 본인 스스로가 1980년 9월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 출신이다. 김형태 변호사(천주교인권위원회 이사장)는 “1992년 대선 당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대선 주자들을 불러 여러 현안에 대한 의견을 물었는데, 당시 김대중 후보가 확고하게 사형제는 폐지해야 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며 “김 전 대통령 스스로가 사형수였을 뿐 아니라 바다에 빠져죽을 뻔하기도 해서 그런지, 권력이 사람 목숨을 뺏는 것에 극도의 거부감을 가진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김 전 대통령은 사형제도가 정치적 보복에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을 사형제 반대의 주요한 근거로 들었다. 그는 2006년 국제앰네스티에 보낸 기고문에서 “보다 우려되는 것은 독재자들이 민주주의 주창자들과 정치적 반대자들을 탄압하고 몰아내는 수단으로 사형제를 잘못 사용한 수많은 사례들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인혁당의 가담자들이 잘못 기소된 뒤 사형됐고 나조차도 사형 언도를 받고 거의 사형에 처할 뻔했다”고 밝혔다.

 

1970년대부터 사형제 폐지 활동 나서
 

»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 사진 한겨레 자료

하지만 사형제와 관련한 그의 신념은 개인의 경험 이상의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감사원장을 지낸 한승헌 변호사는 “그분 자신이 해방 뒤부터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기에 형벌로서의 사형에 매우 부정적이었다”며 “1973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사형폐지·고문철폐 운동을 시작했는데 이때에도 (김 전 대통령이) 열심히 참여했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앞서 언급한 기고문 서두에서 “사형은 민주주의 기초에 반하는 행동”이라고 규정한 뒤 “민주주의는 사람의 생명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존중하는 것이며, 생명을 끊는 것은 법의 이름으로 이뤄진다고 해도 인권의 기본적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 글에서 △사형과 범죄 감소율은 무관한 점 △당사자로 하여금 범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날 기회를 줄 수 없는 점 등도 반대 이유로 지적했다. 사형제의 여러 문제점에 대한 종합적 인식을 가졌던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의 이런 신념은 그가 대통령으로 있던 기간 단 한 번도 사형 집행을 하지 않는 것으로 표출됐다. 또 이런 정책 기조는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이어져 우리나라가 10년 동안 사형 집행을 하지 않은 ‘실질적 사형폐지국’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민주주의운동 동지이자 경쟁자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임기 말에 23명의 사형을 한꺼번에 집행했던 점을 감안하면, 김 전 대통령의 이같은 업적은 더욱 도드라진다.

물론 사형제 자체가 폐지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는 김 전 대통령의 신념 때문이 아니라, 의석수 또는 ‘국민 감정’이라는 현실의 벽 때문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한 뒤 대통령직인수위 시절 두 차례 정도 뵐 기회가 있었는데 ‘사형수·양심수와 관련해서만은 실망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했다. 진정성이 있었다”고 말했다. 고은태 국제앰네스티 국제집행위원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형제 폐지 소신만큼은 확고했다. 본인은 사형제를 폐지하고 싶었지만 거기까지 (힘이) 미치지는 못해 실질적 폐지라는 첫 단추를 끼운 것”이라고 말했다. 사형제 폐지 법안은 15대 국회 이후 매번 제출됐지만 통과되지 못하고 자동 폐기됐으며, 17대 국회에서도 절반이 넘는 175명의 국회의원이 사형제 폐지 법안을 발의했지만 국민적 여론 등을 이유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누명 썼던 외국인 사형수 본국 돌려보내

인권운동가들은 살인 누명을 쓴 외국인 사형수 2명을 모국으로 돌려보낸 것도 사형제와 관련한 김 전 대통령의 업적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파키스탄인 모하메드 아지즈와 아미르 사밀은 동료 파키스탄인을 살해한 혐의로 1993년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는데, 이들은 끊임없이 무죄를 주장했다. 이들의 편지를 받은 김수환 추기경의 지시로 천주교인권위원회가 조사에 나섰고, 두 사람을 범인으로 몰도록 진술을 사주한 또 다른 파키스탄인이 누구인지 밝혀졌다. 하지만 당국은 “이미 끝난 사안”이라는 답변만을 내놓고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1998년 광복절 특사 때 이들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형집행 정지로 석방하면서 국외 추방 형식으로 고국에 돌려보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났을 뿐 한국인이 개입된 사건이 아닌 만큼 감형 뒤 본국으로 추방해 파키스탄에서 재판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합리적인 주장은 김 전 대통령이 취임한 뒤에야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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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슬퍼할 힘밖에 없다 [2009.08.25. 제775호]
임지선
[2009, 8, 23, 영면하다]
5월 반쪽이 무너진 뒤, 8월 다시 무너진 반쪽…분향소엔 저항의 분노보다 애도의 정념이…
2009, 8, 23, 영면하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마당에서 엄수된 영결식에서 생정에 그사 존경하고 사랑하던 국민들의 오열 속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영원으로 향했다.

»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마당에서 엄수된 영결식에서 생정에 그사 존경하고 사랑하던 국민들의 오열 속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영원으로 향했다.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고작 87일이 지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내고 석 달도 안 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은 또다시 눈물로 젖었다. 시민들은 ‘데자뷔’를 느끼며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치러냈다. 그때와 닮았지만 어딘가 다른 눈물을 흘리며 그를 보냈다.

김 전 대통령도 눈물을 흘렸었다. 지난 5월29일, 노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김 전 대통령은 권양숙씨의 손을 잡고 통곡했다.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은 심정”이라고 김 전 대통령은 말했다. 지난 7월13일 그가 폐렴 증상으로 입원했을 때, 사람들은 나머지 반이 무너질까 염려했다.

» “편히 가십시오.” 서울시청 앞 시민 분향소.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예우의 차이, 규모의 차이

한 달간 뉴스는 ‘위독’과 ‘안정’ 사이를 오갔으나, 8월18일 오후 1시43분 끝내 모두 무너져내렸다. 서울광장 분향소로 모여든 조문객들은 “이제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전 국민이 고아가 된 것과 마찬가지”라며 김연선(42)씨는 분향소 앞에서 흐느꼈다.

초등학교 4학년, 3학년인 두 아들은 엄마가 울자 눈을 끔벅였다. 아이들은 아직 엄마의 눈물을 이해할 수 없다. 김씨는 아이들을 보며 더 서럽게 울었다. “김대중·노무현 두 지도자를 잃고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답답해 잠도 안 온다”는 김씨에게 두 사람의 상실은 ‘미래의 상실’이다.

그러나 5월의 상실과 8월의 상실은 다르다. 5월, 노 전 대통령 분향소 앞에는 항상 촛불이 있었다. 분향을 마친 이들은 경찰을 굳이 밀쳐내고 거리와 광장에 나서려 안간힘을 썼다. 8월, 김 전 대통령 분향소에 그런 안간힘은 없다.

서거 다음날인 8월19일, 정부는 서울광장에 공식 분향소를 열었다. 첫날에만 시민 1만여 명이 조문했다. 시민들은 대부분 분향을 마친 뒤 방명록에 이름을 남기고 광장을 떠났다. 촛불을 들지도 구호를 외치지도 않았다. 다만 영정 사진을 보며 조용히 눈시울만 붉혔다.

5월의 열정과 8월의 차분함 사이에는 ‘예우’의 차이가 있다. 대학생 김민석(25)씨는 지난 5월, 분향을 마치고 거리에서 촛불을 들었다. 국장으로 예우해주지 않는 정부가 미웠다. 이번엔 다르다. 정부는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르겠다고 8월19일 발표했다. “민주화의 상징인 큰 분이 돌아가셨으니 국장으로 잘 모셨으면 한다.” 김씨는 담담하게 분향소를 떠났다.

정부의 예우는 ‘규모’에서도 차이가 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정부는 서울역에 공식 분향소를 마련했다. 이번 서울광장에 마련된 분향소는 그때보다 3배 이상 넓다. 넓어진 공식 분향소는 ‘시민 분향소’가 들어설 여지를 밀어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알려진 직후 인터넷 포털 사이트 토론 게시판에 “시청 앞으로 모이자”는 누리꾼들의 글이 올라왔다. 8월18일부터 이틀간 시청 앞 광장 한쪽에 시민분향소가 차려졌다. 그러나 주목받지 못했다. 시민들은 시민 분향소 옆의 공식 분향소로 발길을 돌렸다.

» 광주 옛 전남도청 분향소 게시판. 사진 <한겨레> 김태형 기자

5월엔 분노, 8월엔 기억

‘김대중 팬클럽’ 회장이라고 밝힌 한 노인이 8월19일 오후에 찾아왔다. “한 곳에 두 개의 분향소가 있으니 좋지 않아 보인다. 옆으로 옮기는 게 낫겠다”고 말했다. 시민 분향소는 두세 차례에 걸쳐 구석으로 밀려났다. 시민 분향소를 지키던 10여 명의 시민은 이날 저녁 자진 철수를 결정했다. “어르신 장례를 국상으로 잘 치르는데 괜한 불협화음이 날까봐 치웠다”고 분향소 지킴이 엄아무개(44)씨가 말했다.

‘시민 분향소’의 쇠락은 저항의 정념과 애도의 정념 가운데 뒤엣것에 무게가 실렸음을 웅변한다. 지난 5월, 덕수궁 대한문 앞에 차려진 시민 분향소에는 일주일간 100만 명 이상의 조문객이 몰렸다. 지척의 거리인 서울역과 역사박물관에 ‘공식 분향소’가 있었지만, 한사코 대한문 앞에서 서너 시간을 줄서 있다 분향했다. 하지 말라는 것을 굳이 하려 드는, 오히려 보란 듯이 해버리는 태도를 저항이라 부른다. 5월, 사람들은 저항하고 있었다. 그럼 이번에는?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노 전 대통령 서거 때는 조문을 통해 현 정부에 저항을 하려는 의지가 강했는데 지금은 그런 국면은 아니다. 나라의 큰 어른인 김 전 대통령이 고령이고 병원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국민이 차분하게 장례를 치르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애도와 저항은 원래 한 몸의 반쪽이다. 세상을 떠난 이를 슬퍼하는 마음은 그를 핍박했던 이에 대한 증오와 통한다. 5월에는 증오했으나 8월에는 그저 슬퍼하기만 한다. 어쩌면 슬퍼할 힘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 “편히 가십시오.” 조문객의 모습.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지난 5월, 사람들은 목청을 높였다. “MB 아웃(Out)” 구호를 외쳤다. 거리에서 민중가요도 불렀다. 문화제에선 록밴드가 전자음악으로 추모곡을 불렀다. 8월, 사람들은 목소리를 낮췄다. 노래 부르는 이, 구호 외치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런 자리를 기대하고 나오는 이도 드물다. 대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5월에 꺼내든 것이 분노였다면, 8월에는 기억을 꺼내들었다.

전남대를 졸업한 현인(51)씨는 대학 2학년 때 5·18 민주화 항쟁을 겪었다. “우리나라와 민족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던 김대중 선생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젊은 시절, 공장 해고자 남편을 따라 복직 투쟁에 참여했던 오미령(54)씨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기억한다. “김 전 대통령이 당시 노동자들에게 큰 힘이 됐다”고 회고한다.

기억은 역사가 되어 다음 세대로 전해진다. 직장 동료들과 함께 조문을 온 이수길(35)씨는 “어릴 때 아버지께서 5·18 민주화 항쟁과 관련한 비디오를 보여주시며 김대중 선생님 얘기를 하곤 했다”고 말했다. 대학생 이재용(24)씨는 “어릴 때부터 민주화를 위해 애쓰시는 분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중학교 1학년인 김민희양도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노벨평화상을 받은 대통령이라는 것을 듣고서 조문을 왔다”고 또박또박 말했다.

아마도 그것이 저항보다는 애도, 분노 대신 기억을 이야기하는 이유일 것이다. 5월의 분향소를 찾았던 20~30대에게 노 전 대통령은 ‘현실 정치인’이었다. 8월의 20~30대에게 김 전 대통령은 ‘전설’이다. 서울광장 분향소에는 그를 추억하는 40~50대가 많다.

신광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아무래도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 1세대이다 보니 젊은이들 입장에선 노 전 대통령보다 조금 낯설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종산(48)씨는 “노 전 대통령은 우리를 위해 일하는 ‘일꾼’ 같은 존재였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선생’과도 같았다”며 “노 전 대통령을 잃은 당시는 ‘동지’를 잃은 허탈함이었고, 지금은 ‘선생’이 사라진 슬픔”이라고 표현했다.

동지를 잃으면 복수한다. 어른이 돌아가시면 애도한다. 이 땅에 수천 년간 내려온 추모의 법도다. 2009년, 한국인들은 같은 추모의 정념, 조금 다른 법도를 따라 두 대통령을 차례로 보냈다.

“용기와 희망을 저희에게 알려주세요”

» “편히 가십시오.” 조문객들의 모습.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시민 분향소도 없고 촛불도 없고 100만 인파도 없으니, 서울시청 앞 경찰들은 한결 여유로운 표정이다. 그러나 데모가 없다고 분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선생을 애도하는 슬픔은 더 깊은 곳으로 침잠한다. 이명박 시절은 여기에 이르러 거대한 지표석 두 개를 갖게 됐다. 역사는 이 시기를 돌아보며 세 명의 대통령을 기록할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 재임 기간에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고. 그 지표석은 거대한 트라우마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에 꽂혔다.

서울광장 분향소 한쪽에 어느 소녀가 붙였음직한 노란 쪽지가 있다. “용기와 희망을 저희에게 알려주세요.” 그 옆에서 펼침막이 펄럭인다. 김 전 대통령이 남긴 말이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 그것은 강력한 촉구가 되어 차분한 조문객들의 뇌리에 남는다. 신광영 교수는 “추모 분위기는 침착하지만, 민주화 1세대 지도자의 죽음이 사회 전체에 주는 울림은 (노 전 대통령 서거 때보다) 더욱 클 것”이라고 말했다.

신 교수는 특히 “이제부터 새 시대에 맞는 새 인물에 대한 담론이 촉발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 국민이 고아가 됐다”는 추모객의 흐느낌은 그래서 하나의 선언이다. 사람들은 이제 아버지를 찾아나설 것이다. 민주주의를 이끌 새 지도자를 머릿속에 자꾸만 그려볼 것이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김하늬 인턴기자·이영은 인턴기자


범인 잡겠다고…시민 DNA 영장없이 채취
경찰, 현금차량 탈취 수사 ‘인권침해’ 논란
용의자와 비슷하면 사무실 찾아가 채집해
한겨레 홍석재 기자
경찰이 ‘장기 미제 사건’ 수사를 한다며 영장 없이 일반 시민들의 유전자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일고 있다.

서울 종로경찰서 관계자는 24일 “지난달 14일 종각 근처에서 발생한 ‘영풍문고 앞 현금수송차량 탈취 미수 사건’ 피의자의 디엔에이(DNA)와 용의 선상에 오른 이들의 디엔에이를 채취해 대조하는 수사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이 피의자의 디엔에이는 당시 사건 현장에 남아 있던 혈흔에서 경찰이 채취한 것이다.

경찰은 이 혈흔과 사고 현장 주변 폐쇄회로텔레비전(CCTV) 자료 등을 바탕으로 160~165㎝ 키에 안경을 쓴 30대 초반 남성들을 용의 선상에 올려놓고 디엔에이 정보를 채취하고 있다. 경찰은 사고 현장 주변에 근무하는 시민들에게 직접 찾아가 당사자의 동의를 구한 뒤 면봉으로 입안의 상피세포를 긁어내는 방식을 쓰고 있다고 한다.

경찰은 사건이 평일 오전에 발생한 점에 주목하고, 당시 사고 현장 주변 지하철역을 이용했던 시민 3000여명의 교통카드 사용 명세를 확보한 뒤 이 가운데 디엔에이 채집 대상을 지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종로경찰서의 한 간부는 “당사자의 동의를 반드시 얻는 등 수사 절차를 철저히 지키고 있다”며 “수만명의 수사 대상자 가운데 상당한 신빙성이 있는 경우에 한해 수십명 선에서 디엔에이를 채집한 상태”라고 말했다. 경찰은 관할 지구대에 수사본부를 꾸리고 신고보상금도 1000만원까지 올리는 등 수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사건 발생 한 달이 넘도록 수사가 진전되지 않자 디엔에이 수사까지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 두고 ‘모든 시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인권 침해 수사’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디엔에이 활용 수사는 피의자를 특정한 뒤 법원의 영장을 받아 범인 여부를 가리는 게 정상적인 절차다. 이은우 변호사는 “영장을 받을 만큼 혐의가 확보되지 않은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동의에 의해 디엔에이를 채취하는 건 ‘영장주의’를 회피한 사실상의 편법수사”라며 “여러 가지 생물학적 정보가 포함된 디엔에이를 잘못된 방식으로 이용하려는 위험한 태도”라고 말했다. 경찰은 2004년 경기도 화성 여대생 살인 사건을 수사하면서 이 지역의 주민과 대학생 등 4600여명의 디엔에이를 무작위로 채집해 ‘인권 침해’ 논란을 부른 바 있다.

이에 대해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경찰이 수사 목적을 달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합리적인 의심의 근거가 부족한데도 시민들을 범죄자로 보고 신체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명백한 인권침해”라고 말했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기사등록 : 2009-08-25 오전 06:5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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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집행 범위 넘어 ‘분풀이 집단폭행’ 비난 자초
도넘은 경찰진압 논란
쓰러진 노조원에 전경 여러명 달려들어 짓밟아
작년 촛불집회 이후 되풀이…경찰 “통제 어려워”
한겨레 남종영 기자 길윤형 기자 김종수 기자
»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시민·사회단체와 정당 대표자들이 6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 앞에서 “쌍용차 노동자들에 대한 경찰의 살인적 강제진압과 인권유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던 중 참가자들의 사례 보고를 들으며 참담한 표정을 보이고 있다.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지난 5일 오전 8시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조립3·4공장 옥상. 전국금속노동조합 쌍용차지부 조합원 김진표(가명)씨는 경찰이 휘두른 방패에 맞아 휘청거렸다. 다시 뒤쪽의 다른 전경이 방패로 목을 후려치자 김씨는 맥없이 쓰러졌다. 전경은 방패를 들고 김씨의 목을 6번 내리찍다가, 그래도 화가 안 풀린 듯 발로 밟기 시작했다. 김씨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새우처럼 엎드려 있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한 명이 달려오더니 김씨에게 발길질을 해댔다. 잠시 쉬던 전경은 다시 곤봉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김씨를 때린 전경만 5명이었다.

경찰의 진압 행태가 도를 넘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6일 노사간 협상에서 극적 타결을 이뤄졌지만, 경찰의 과잉진압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경찰의 쌍용차 평택공장 진입과정을 기록한 동영상과 목격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경찰은 이미 제압돼 저항할 능력을 잃은 시위자에 대해서도 여럿이 돌아가며 방패로 때리거나 내리찍고, 발길질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개중 쌍용차노조 노동안전실장은 “조립3·4공장 등에서 20여명이 다쳐 병원에 실려왔다”고 말했다. 육대웅 민주노동조합총연맹 경기본부 법률원 변호사도 6일 “평택경찰서에 연행된 11명을 면담해보니, 대부분 어떻게 맞았는지 기억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했다.

연행과정도 문제로 지적된다. 김갑수 쌍용차지부 보건부장은 “법 절차에 따른 연행이 아니라 진압봉과 쌍절곤, 군홧발로 폭행을 한 뒤 끌고 가는 식이었다”고 말했다. 이기용(가명)씨는 5일 조립3공장 옥상에서 체포돼 손을 결박당한 채 진압봉으로 폭행을 당한 뒤 연행됐다.

경찰의 이런 행태는 되풀이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촛불집회 이후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이 잦아지면서 경찰이 분풀이성 폭행을 한다는 비판까지 나온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시위자를 진압한 뒤 진압봉을 휘두르는 것은 경찰관 직무규칙을 명백하게 어긴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관 직무규칙 제87조는 ‘강제 해산 시에는 최소한의 물리력을 행사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진압장비 남용도 도마에 올랐다.

경찰이 이번 진압에 사용한 ‘다목적 발사기’는 대통령령인 ‘경찰 장비의 사용기준 등에 관한 규정’에 △인질범의 체포 △대간첩·대테러 작전 △공공시설의 안전에 현저한 위해가 예상될 때 등으로 용도가 엄격히 제한돼 있다. 권영국 변호사는 “이번 농성을 테러로 볼 만한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은 진압 작전의 특수성을 거론하며 노동계와 시민·사회 단체들의 과잉 진압이란 주장을 수긍하지 않았다. 고기철 경기지방경찰청 공보계장은 경찰관 직무규칙을 어겼다는 비판에 대해 “5일 진압작전에서 경찰 26명이 다치는 등 양쪽이 극렬하게 충돌한 전체적인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며 “현장에서는 공권력 사용을 최대한 절제하도록 통제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또 다목적 발사기 사용에 관해서는 “일반적인 불법 시위자가 아니라 사제 대포와 화염병 등 살상 무기를 쏘거나 던지는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사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남종영 길윤형 기자    fandg@hani.co.kr

기사등록 : 2009-08-06 오후 08: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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